성도의 길


선지자선교회 1989년 8월 9일 수전집회 

 

본문 : 계2:8-11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제가 반주에 대해서 '좀 스피카를 보륨을 올리라' 그래 한 것은, 도무지 피아노  치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안했습니다.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인데 소리가 안 됐어.

 그래서 이거 나는 그걸 모르고 자꾸 보륨만 올리라 이랬는데 피아노를 옮기면  뭐 조율인가 뭐인가 해야 되는데 그걸 안 해 놓으니까 피아노가 해체가 돼서  소리가 안 나요. 그래 그걸 내가 말했고, 또 하나는 비디오 이거 하나 안 하나  괜찮은데, 자꾸 외국에 보내고 또 이란다고 또 이 비디오 한다고 돈을 많이 들여  가지고 이래 했는데 내가 이제 보니까 원숭이를 만들어 놨어, 강사를. 그래 놓고  저거는 찌글찌글 웃고 앉았다 말이오.

 이거 신문기자들이 제 마음에 밉상스러우면 그 사진을 우습게 만듭니다. 만들어  가지고 아무 사람이든지 그만 아주 병신이고 얄궂게 내나 사진기로 해도 그래  찍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은 누가 찍었다 그걸 다 이름을 기록할 책임이 있어서  합니다.

 인제 보니까 머리는 조 똑 어찌 보니까 새파란 거, 머리는 새파랗고 머리는  새파래요. 머리는 새파랗고 또 뭐 얼굴은 어떻고 이래 가지고 원숭이 같이 만들어  놓고, 내가 '너거 강사를 원숭이 만들어 놓고 웃고 있느냐?' 이라니까 이거 조금  낫기는 나은데, 대구는 됐는데 왜 여기는 안 되는가 말이요? 그래 할라면 이거  치뭐야 돼.

 왜? '아따 백 목사는 자기 사진 나오는 거 인물 잘난 거 보일란가?' 나는 인물이  본래 못난 사람이라 그런 건 내가 생각지 안해. 이런데 강사가 넥타이를 하나  잘못 매서 넥타이가 돌아가 놓으면 이거 교인들이 은혜받는 거 다 없어져 버리고  넥타이만 그것만 항상 기억이 돼 가지고 넥타이가 들어서 은혜 다 가로막는다  이래 합니다.

 이래서 모든 사람이 보면, 내가 보니까 꼭 원숭이 같애. 여기 안 보이더나? 안  보였습니까, 처음에? 머리가 새파란 것 안 보였어? 새파랗지 안했어?  색맹이로구나. 새파랗지 안했어? 아주 그거는 뭐 사람을 그려도 그래 그리는 건  없어. 그렇게, 지금도 좀 그러네. 새파랗게 해 놓고 그래 놓고 그걸 떡 보고  앉아서 저거끼리 찌글꺼글 웃고, 내가 '너거가 강사를 원숭이 만들라고 그랬나?'  내가 이랬는데, 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이 모든 사람의 시선과 심령이 강사를  이렇게 보고 있기 때문에 강사의 뭐이든지 어두운 거나 뭐 이상이 있으면 안  됩니다. 강사가 와 가지고 설교나 할 일이지 와 가지고 여기서 야단을 치고 '그것  못 고치나?' 이래 쌓아니까 '저 왜 강사가 저렇게 지금 막 혈기를 내고 저래  야단이 나 가지고 그런가?' 이라면 마귀란 놈이 그놈을 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이래 전달하기 때문에 은혜가 가로막힌다 그 말이오.

 그래 또 이거 해석을 또 내가 해야 돼. '저 목사님 예수 잘 믿는다고 이래  쌓아도 사위는 일찍 죽었지, 또 그 손자는 지금 요새 차사고로 또 고장이 났다  하지.' 이러니까 또 이 마귀란 놈이 그걸 들고 '봐라, 예수 잘 믿어야 헛일  아닌가? 봐라.' 이렇게 자꾸 충격을 줘 가지고 미혹을 줘서 은혜를 못 받게  하니까 또 그것도 또 자랑을 해야 되겠다 그거요.

 이래 놓으니까 가족들은 말해요. 목사님 제발 강단에 서거들랑은 우리 가족들 말  좀하지 말라고. 그거 부탁이오. 그래도 나는 그걸 다른 사람이 이래 보고 있기  때문에 확 까 뒤비쳐 놔 버려야 마귀란 놈이 멸망의 운동을 하지 못하지 그래  놓으면 그거 하나만 있으면 저거딴에는 뭐 별별 해석을 해 가지고 죽는 역사를  하고 있다 그거요.

 그러니까 백 목사에게 있는 거는 뭐이든지 있으면 좀 더 많게 막 과장을 해서  이래 그만 들어내 버립니다. 다 드러내 버려. 톨톨 다 털어내요. 그걸, 그런 것도  다 자기 뭐 그런 걸 숨기고자 하고 이렇지만 드러내는 그런 것이,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유익할 것은 하나도 숨기거나 가루지 안하고 다  말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너희 들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 이랬어. '내가  너희들의 피에 대해서 새 끗하다 너희들의 생사의 구원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내게 흠점이 없다. 내 책임은 없다, 다 했다 하는 그 말이오. 그거는 다 하는 것은  할 말 다 하면 다 한 거라, 뭐. 목회자는 딴것 할 것 없고. 할 말 다 하면. 그래서  이제 그런 말 한거라. 그런 거 조그매라도 들으면 '뭐 그래 하는가?' 이래도  조그만한 것만 봐 놓으면 마귀란 놈이 자꾸 속에 이게 작용하면 그거 생각하다  보면 그만 졸음옵니다. 그만 졸고 은혜 하나도 못 받아요. 내가 수십 년 경험한  것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래 뭐 내게 대한 말은 뭐이든지 나만 그걸 그만 막  광고를 해 가지고 막 퍼트리니 저게 언제 더 뭐, 더 말 할래야 말할 것도 없고 다  이래 돼야 되겠다 해서 그래 광고하는 거라. 그걸 오히려 모르는 사람은 '제  자랑할라고 광고한다, 또 저 나쁜 거는 저 변명할라고 광고한다.' 변명이고  자랑이고 그런 거는 할 여가 없어. 사람들의 구원과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거게만 문제가 돼 있는 것이지. 그래서 어짜든지 모든 것 다 생각지 말고  어짜든지 자기 구원만 잘 이루도록 해야 됩니다.

 또 내가 좀전 시간에도 누구를 만나 가지고 말했는데 자기딴에는 옳고 흠이  없다고생각해도 벌써 저거 나기도 전에, 배기도 전부터 예수 믿어 가지고 모든 거  경험한 사람들이 다 그런 거 경험 체험했기 때문에 말하면 듣고 어찌 됐든간에  고쳐서 복종해야 희망이 있지 암만 잘나도 말할 때에 옳은 것에 복종하지 안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이래 내가 좀전 시간에 누구를 만나 가지고 그랬어. 그거 내가  그 사람 또 여기 앉았으니까 들으라고 말해. 나는 제게 희망과 기대를 가졌는데  그게 단점이라. 그놈 안 죽이면 저 망하고 나 한 일 다 헛일 해. 고거 죽여  버려야 되지.

 일곱 교회 가운데에 보면 두쪼가리가 안 된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  하나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한 덩어리 돼 가지고 있는 교회고 다른 교회는  전부 두 쪽 세 쪽씩 다 그렇게 갈라져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것은 신약 교회는 한 덩어리 된 교회도 있고 한 덩어리가 안 되고 두 쪽 세  쪽으로 갈라져 가지고 있는 교회가 그것이 일반적인 교회라 그렇게 생각을  가지면 됩니다. 교파도 갈라지지 안하고 한 교파로만 이리 돼 가지고 있으면 조금  우리는 '이거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슬기로운  일입니다. 또 교회도 그 교회가 두 쪽이 아니고 하나뿐이라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입니다. 교파도 그러합니다.

 이런데 얼마 전까지는 천주교가 '다른 개혁교들은 여러 가지 쪼갱이로 나누어져  가지만 천주교는 나뉘지 안하고 하나로 되어 있다' 하는 그런 것을 많이 자랑삼아  말했습니다. 천주교가 수백 년 동안 하나로만, 한 덩어리로만 돼 가지고 나오다가  얼마 전에 성공회라 하는 파와 천주교와 둘이 갈라졌습니다. 갈라졌는데  갈라짐으로 거게 생명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래서 성공회 그때부터 '성경을 읽어야 된다. 또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된다.

 주일을 지켜야 된다.' 하는 그것이 그때부터 움트기 시작 했습니다. 그전에는  천주교는 성경을 못 읽구로 했습니다. 성경을 못 읽구로 하고 성경에 자기네들, 그  불의한 교권자들이 자기네들 교권에 침해가 안 되는, 자기네들의 교권을 인정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성구 몇 성구만 가려 가지고 그것만 경문 읽듯이  읽도록 그렇게 해 나온 것이 천주교입니다. 그라다가 천주교서 신구약 성경을  믿는 사람은 다 자유로 봐야 된다 하는 것을 개혁해서 일어난 것이 성공회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또 해방 후에 지금 천주교도 예배를 본다, 또 기도를 한다,  주일을 지켜야 된다, 이래 가지고 지금은 뭐 천주교 전체가 성경은 봐야 된다는  것은 그걸 다 인정을 하고 이래 가지고, 또 성경번역할 때에 개혁교와 이 구교가  이렇게 합동 번역을 하도록 해 가지고 합동 번역을 했습니다. 합동 번역하니까  천주교는 천주교 교리와 신조에 맞도록 번역하고 또 개혁교는 개혁교의 교리와  신조에 맞도록 성경을 번역을 할라 하니까 원문은 꼭 같지만 번역은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번역에 대해서 실은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개혁교가 살았으면 합동 번역하는 것을 생명 내 걸고 반대를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게 대해서 아무 말하지 안하고 합동 번역하면 거기서 돈을  주니까 그거 하는 게 괜찮다 그래 가지고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 합동 번역을  했습니다.

 성서공회는 뭐 돈을 껌기를 돈 무더기요, 돈 무더기입니다. 그게. 돈무더기인데  뭣이 돈이 모자라서 번역할 때에 개혁교만이 독단으로 번역하면 개혁교 교리와  신조에 맞쭉서 이렇게 맞도록 번역할 터인데, 천주교와 합동 번역을 할 이유가  없는데 거기서도 돈벌이 하는 사람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거! 앞으로 둬  뒀다가 어떤 복수를 할란지 모릅니다. 그것 가지고 돈벌이 해 먹고, 그것 가지고  자기가 또 이용해 먹을라 하는 그런 잘난 사람들이 들어서 합동 번역을 하기로  해 가지고 합동 번역이 나와 가지고 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거 번역할 때 내가 말 들어보니까, 이런 거는 어떻게 하는고 보자 이러니까,  그거는 천주교하고 개혁교하고 서로 시비가 있으니까 '그라면 흥정을 하자. 너거  천주교에 맞도록 우리가 틀린 것 너거에게 맞도록 번역하는 거 몇 개, 또 우리  개혁교에는 틀렸지만 천주교에 맞도록 그렇게 번역하는 거 몇 개.' 그래 서로  흥정을 해 가지고 번역을 한다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또 번역돼 나온 것이  그러합니다.

 그래 그래서 천주교에 생기가 돌아오니까 성공회로 더불어 서로 교리 신조에  그게 시비가 나 가지고 갈라지게 됐습니다. 갈라짐으로써 천주교는 거기서부터  생명의 움을 트기 시작했습니다.

 천주교에서 개혁교로 이렇게 개혁을 하는 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개혁교의  교리와 신조를 세우기 위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굉장한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해 가지고 이 개혁교 교리 신조가 이렇게 다 정리되고 조직됐었는데 이것을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생명 내대, 생명을 바쳐서 지린 교리와 신조를 저거는 저거  취미 삼아 저거 돈벌이 삼아 이래 가지고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죽었고 썩었고  등신이고 바보고 천치고 불교에 한 것 모양으로, 부처 모양으로 그런 하나님이면  나는 욕해 버립니다. 그런 하나님은 마귀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은 발로  지끈지끈 밟겠소.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닙니다. 이제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이 가만히 참고 있지만 그 보응이라 하는 건 굉장히 클 것입니다.

 뭐 하나님이라 하면 다 우리가 인정할 증니까? 일본에서 예수님의 사진이라  하면서 그림을 그려 가지고 길바닥에 놓고, '이 사진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살려 두고 안 밟고 지나가는 사람은 죽인다' 이라니까 '어떻게 예수님의 사진을  밟아?' 이라면서 그래 안 밟고 지나감으로써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그때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거는 그게 교리와 신조를 몰라 그렇습니다.

 나한테 댔으면 '이거 한 번 밟으랍니까, 열 번 밟으랍니까, 백 번 밟으랍니까?'  백 번 밟으라 하면 백 번 막 자근자근 밟겠어'. '이거 내가 집어뜯으라 하면 내가  집어뜯어 버리고 여기다 똥을 누라 하면 여기 똥 누겠소, 내가.' 이라겠어. 그까짓  게 무슨 상관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만 저거 붙이면 예수님이 됩니까, 어디?  이러니까 이 교리와 신조를 똑똑히 모르면 예수 바로 못 믿습니다. 교리와 신조가  흐리다는 건 그것이오.

 천주교가 사도 교회가 천주교 됐는데 사도 교회가 천주교로 그렇게 타락된 것은  차차 차차 성경은 멀어지고 인간들의 그 권세가 커져서 불의한 교권들의 세력이  강해지자 자꾸 교회는 변질돼서 타락했습니다. 요새도 보면 신구약 성경이 그  사람들을 주장하느냐? 아니오. 교파가 주장하요. 교파가 성경보다도 신앙 지도  권리를 더 강하게 가지고 있는 그런 교파들이 있으면 모조리 말할 것 없이 싹  그거는 도매금으로 '이거는 아니다.' 하는 것을 우리는 판정하고 정죄해야 합니다.

 자, 여기 목사님들 맞아요 안 맞아요? 맞은 말이요 안 맞은 말이요? 왜  벙어리라? 왜 대답 못 해? 좀 보거든. 시야가 좀 넓다 말이오. '이라면  아무것이하고 삐뚤어질 건데 아무것이하고 삐뚤어질 건데, 아무 데 마찰을 받을  건데.' 이래 놓으니까 전부 피조물 무서워서 하나님은 그까짓 거 뭐뭐 찍꺽 밟아  버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니야.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도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는 것을 하나님께 필요하지 사람 두려워하고 뭣 두려워하고 이래  가지고 할 때는 하나님이 '보자, 그라면 살펴보자. 네가 제일을 뭘 두려워하느냐?'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그거는 의롭다 하지 않소. 제일을 하나님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면 '보자, 그라면 한번 또 심사해 보자.' 심사해 봅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두려워하고 제이로 다른 것을 두려워하면 그거 올바른 교리 올바른 깨달음의  믿음입니까? 어째요? 우리는, 우리 총공회 교리와 신조는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하는 것이 총공회 교리와 신조입니다. 그러면 딴것, 딴것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안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세상 정권에 있는 사람이든지 자기  은사 위치에 있어 자기 부모라든지 그런 분도 두려워하지 안해야 되느냐?  두려워하는 건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기  때문에 부모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거  맞아요 안 맞아요? 저 집사님, 옆에 있는 아이가 아들이야? 아들 옆에 앉았으니까  그라면 그 아들이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아버지 두려워 안 하면 돼요 안 돼요?  돼? 인제 저거 된다 하지만 인제 깨닫고 된다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요. 왜? 부모를 공경하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나와의 출생의 인연이  있어서 그렇다는 그 껍데기에 붙지 안하고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나를 나게 해  주셨고 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나게 한 그 계통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나게 하는 하나님이 정한 계통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한 계통이니 우리는  신중히 대우해야 되고, 이라니까 부모를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부모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라 말은, 공경하라 말은 존경하라 말이요 두려워하라 말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하라 하기에 두려워하지. 왕도 하나님이 두려워하라니까  두려워하지. 선생도 하나님이 두려워하라니까 두려워하지.

 선생이 죄를 지으라고 매초리를 들고 이래 할 때에 그때는 두려워해야 돼요 안  두려워해야 돼요? 두려워해야 돼요 안 두려워해야 돼요? 안 두려워해야 돼.

 하나님을,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함으로 그분 때문에 두려워하니까 그분에  반역하는 그런 두려움은 침을 뱉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독자야!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라. 하나님 한 분만 사랑해라.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라.

 이런데 이런 것을 지식적으로 배워 가지고, 회개는 하나도 안 하고 지식적으로  배워 가지고 날뛰는 그자가 대마귀가 되고 큰 적기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에베소 교회는 두쪽인데 여게 나타나시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잡고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이렇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러니까 이걸 보면 그  다음에 내용을 알 수가 있어. 에베소 교회는 자기네들이 여덟 가지 행위 한 거,  여덟 가지 행위한 거 그것만 귀한 줄 알고 거게만 전심 전력을 기울이고 그것만  자랑하고 그것만 자꾸 높이고 이랬는데 그런 교회에 오른손에 일곱 별을 잡고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나타나 가지고 말씀합니다. 그 무슨 밀입니까?  오른손이라 하는 것은 승리를 가리켜서 오른 것이라 그렇게 늘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그 교회의 목회자가 좋은 옳은 것 의를 행해서 좋은 것을 한 점이  있으면 그것은 전부 주님이 장중에 잡으시고 일한 것이오. 이거 뭐 전부 소문  들으니까 다 누워잔대요, 이거. 그래, 누워자. 이거 못 들으면 들을 귀가 없으면  이제 그게 뭐 마귀 오면 전부 마음대로 잡아 삼키요. 이 도리를 들어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 이 도리에 깨소금같이 참 자기의 전부를 기울일 만치 그렇게  깨달아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자는 사람이요, 수건을 벗지 못한, 자기  주관을 벗지 못한 사람이요, 그 사람이 아직까지 땅에 속한 점이 많고 하늘에  속한 점이 좀 더 가벼운 그런 사람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언제든지 하나님의 종들은 옳은 일은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고 하셨는데, 자기는 옳은 일에 방해나 지겼지 자기 힘이 아니면 하나님이 그  옳은 일을 할 수 없단다는 그런 생각 가진 것은 잘못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백프로 옳게 할 터인데 내가 들어 방해를 해 가지고 잘하면 구십프로, 또 그리 안  하면 팔십프로, 그리 안 하면 오십프로, 그리 안 하면 십프로, 그리 안 하면  일프로, 그리 안 하면 전부 올은 일 하시는 것을 반대하고 날뛰는 것이 인생이라  그거요. 이래서, 좋은 거 잘한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요것을 똑똑히 믿어야  하겠고, 또 잘못된 것은 하나님이 시켜 잘못한 게 아니고, 잘못된 건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안 하는 그 반역이 들어서, 옛사람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거  옛사밤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이 들어서 그렇게 삐뚤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놈이 적이니까 그놈하고 저하고 둘이 책임을지고 주님에게 그런 책임을 전가  안 시켜야 합니다.

 이래서, 에베소 교회에 너거가 여덟 가지 행한 그것은 전부 다 내가 했는데, 내가  하는데 너는 방해될 정도지, 내가 한 것은 뭣 때문에 내가 해 줬느냐? 처음 사랑  때문에 내가 해 줬는데 해 주니까 해 준 그것은 주님이 하셨는데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생각지 안하고 제가 한 것으로 이래 교만하고 자고하고, 그거 뭣  때문에 해 줬느냐? 주님이 사랑하심으로 이렇게 대속하셨기 때문에 해 줬는데  이거 다 집어던져 버리니까 이거는 아무짝도 못쓸 인간이라. 그러니까 촛대를  옮겨야 돼. 그런 걸 자꾸 여게 보고 뭐 새기면 평생 새겨도 남아요. 새기지  안하면 헛일이라.

 또 일곱 촛대 사이로 다니신다 말은 그 교회에 크고 작은 모든 것을 다  관리하시고 책임지시고 이렇게 늘 관리한다 그 말이오. 그러면 여덟 가지 된  그것이 주님이 하셨고 주님이 관리하여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뭣 때문에  주님이 그와 같이 지금 모든 옳은 것을 해 주시고 또 옳은 것 그것을 원수들이  삼킬라고 막 달라들어도 못 삼키구로 잘 보호해 줍니까? 옮은 것이 보존되는 줄  압니까? 옳은 것이 보존 안 됩니다. 옳은 것을 막 삼킬라고 우는 사자와 같이 막  달라듭니다. 달라드는데 옳은 것 그것이 보존되도록 잘 관리해서 하는 그것이 다  주님이 그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와같이 주님이 하시는 것이 뭣 때문에  하심니까? 우리, 우리 인물이 잘나 합니까 우리에게 돈이 있어서 합니까 권세가  있어 합니까 우리에게 무슨 의가 있어서 합니까 뭣 때문에 그와 같이 하십니까?  뭣 때문에 그와 같이 하셔? 저 OOO목사님? 그래. 예수님의 대속으로 이것을 값  주고 사서 구속했기 때문에 원청 자본이 많이 들었어. 당신의 전부를 다 기울였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이세 아무래도 끝까지 잘돼야 되지 잘못되면 자기 해 놓은  일 헛일이거든.

 이래 놓으니까 이러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이 망령되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휘떡 벗어 내던져 버렸다 말이오. 그라면 하나님께서 그거 둬 두겠어요 안 둬  두겠어요? 둬 둘 수가 없어. 이렇게 에베소 교회에 의로운 일 행한 사람들은 이래  가지고 실패합니다.

 이래서, 의로운 일 하는 것을 다 주님이 하셨고 잘못된 거는 제가 했고 의로운  일 그것이 보존이 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래도 좀 광고가 되고 유익이  되는 그것은 주님이 당신의 이름과 의를 위해서 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그와 같이  하는 것 아니라 그거요.

 우리 서부교회에 주일학교에 시찰 오고, 견학 오고, 방문 오고, 그래 나는 사람에  따라서 말합니다. '이 사람이 왔는데' 견학하러 왔다 하면 또 섭섭하게 여길  사람에게는 이제 시찰하러 왔다 그라고, 제일 높은 사람에게는 시찰하러 왔다  이렇게 말하고, 또 그 다음의 사람은 이제 방문하러 왔다 이렇게 말하고, 이제 내  마음에 딱 들어맞은 사람은 견학하러 왔다 이랍니다. 견학하러 온 사람은 두 번도  오고 새 번도 오고 네 번도 옵니다. 몇 번까지 온 게 제일 많이 왔지? 일곱  번까지 온 사람 있어, 일곱 번까지. 다 그런 큰 교회라. 그런 교회들은 다 벌써  견학하고 가고 난 다음에 그 교회가 칠 배니 뭐 육 배니 팔 배니 그렇게 많은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OO교회도 그때 OOO목사님이 아무래도 서부교회 주일학교 견학을 해야  되겠다고 견학하러 반사를 그때 열 몇 명인가, 내가 수는 몇인가 잘 모르겠어. 열  몇 명인가 스물 몇 명인가 보내 가지고 그래 두 번인가 한 번인가 보냈는데 한  얼마? 내가 똑똑히 숫자는 몰라. 틀릴지 몰라요. 이백 몇 명인가 이래 됐었는데  그 뒤에 뭐 팔백 몇 명이 됐다던가 칠백 몇 명이 됐던가 그렇게 불었었어.

 그렇게 불었는데 그 뒤에는 '백 목사 하는 식 틀렸으니까 이것도 틀렸다' 해  가지고 집어던져 버려저 지금 아마 그 교회 주일학교가 분명이 내가 보나 안  보나 삼백 명 이내지 삼백 명 이상은 올라가지를 못했을 것이라. 그 OO교회가  아는가 몰라. 얼마나 돼요? 삼백 명 이내지? 이백 명 밑으로. 아마 그럴 거라.

 이래 가지고 팔백 명으로 쑥 올라가도 또, 쑥 올라가도 싫다는 거라.

 이런데 서부교회 이 주일학교 뭐 이렇다는 말을 나는 광고할라고 광고비 일  전도 안냈어요. 이랬는데 어째 이래 가지고, 그것도 하나님이 잘 관리하는 것인데  이래 가지고 거게 시찰하러 온 수가 천 얼마라더라? 천백 이 십일회째  각국에서와 각 지방에서 이렇게 왔었어.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들은 다 왔어. 안  온 게 아니고. 이것도 다 하나님이 관리해서 하는 것이지 그거 우리가 하는 거  아니라.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거게 자칭 사도라 하는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자칭  사도라. 자칭 유대인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자칭 사도라 하는 것은 '내가 주님과  밀접하다, 내가 주님 앞에 직접 명령을 받았다, 직접 은혜를 받았다, 직접 지시를  받았다, 직접 뭐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과 자기와의 직통이라는 것을 스스로  직통이라 하는 그런 자들이 이 에베소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이러니까, 그런 것이  있으니까 그거하고 싸우다 보니까 그만 처음 사랑도 잊어버렸어.

 그러기에 우리는 온갖 것들이 다 와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시선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사활의 대속 이 네 가지만 항상 보고 생각하고  사모하고 모든 행동도 이 네 가지에서 발원해 가지고 네 가지가 막 번져나가고  네 가지가 퍼쳐나가야 됩니다. 사죄가 막 퍼져나가 세계에 가득 차 나가고, 칭의가  퍼져 나가서 크게 나가고, 하나님과 화친이 퍼져나가 가지고 크게 나가고,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자꾸 퍼져나가 크게 나가야 되고 딴거 나가면 안 돼.

 이것이 나가면 얼마든지 나갈 수가 있어요.

 이랬는데 그런 것을 아닌 자를 드러냈으니까 얼마나 귀한 일 했지만 귀한 일 한  것이 누가 했습니까? 드러낸 걸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했어. 오른손에 일곱 별을  잡은 이가 내가 말한다. 내가 너를 붙들고 승리하도록 내가 너를 붙들고  승리했는데 네가 한 척 하고 그것만 큰 척 하고 이제, 내가 뭣 때문에 해 줬는데?  사활의 대속 때문에 해 줬는데 사활의 대속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어디서 뚝  떨어진 걸 알아라. 사활의 대속을 버리면 사활의 대속이 하나님과 진리와  우리와의 연결입니다. 그 연결 줄이 뚝 떨어졌으니까 하나님과 끊어져 버렸어.

 진리와 끊어져 버렸어. 이러니까 의와 끊어지고 무죄와 끊어지고 생명과  끊어지고 소망과 끊어지니까 이거는 전체가 전멸이라. 전멸뿐이라. 이거 뭐  하나만 해도 자꾸 보고 생각하고 자꾸 깨달아져야 돼요. 슬슬 지내가서 그렇게  하지 말고.

 서머나 교회는 여게 보니까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이  말은 뭐인고? 유대인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신약 교회 이스라엘이 생겼을 때에  구약 교회가 유대인들입니다. 그거 자칭 유대인이라 말은 이거는 정통이라  그말이요, 정통. 정통을 말합니다. 모두가 다 저거가 다 정통이오. '우리가  정통이다 정통이다' 뮈 전부 정통입니다. 자칭 정통이라 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제 이것을 잘 살펴서 '저거는 하나님이 정통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저거는  저거가 스스로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자칭 정통이다' 그런 것을 잘 구별해서  알아야 되지 그거 구별할 줄 모르면 헛일이라 그거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그러면 자칭 유대인 이거는 저거가 정통이라고 자꾸 헐어 재낍니다. 저거가  정통이라고. '그거는 갈라져 간 것' 천주교에서는 뭐 '개혁교는 열교라, 쪼개져  나간 열교라' 이래 가지고 훼방합니다. '그거는 우리에게 쫓겨나가서 뭐  쫓겨나갔다. 그런 거는 뭐 이단이고 뭐 잡탱이다.' 이렇게 '우리가 정통이고  우리가 법통이고 우리가 진리의 계통이다' 하는 그런 거짓부리 것들이 가득 찬다  그 말이오.

 이 가득 찬 걸 알아야지 그만 아무나따나 이 사람이 정통이고 저 사람이  정통이고 제가 정통이고, 그러면, 정통이라고 하면, 너 졸지 마. 이렇게 그만 제가  정통이라, 또 옆에 사람이 정통이라, 이라면 당장 정통 돼 버려. 정통이 됩니다.

 하나님이 정통이라야 정통이지 하나님이 정통이라 인정 안 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또 사람 죽이는 것도 잠깐이라. 그거 '이거 이단이다' 이 교파가 이단이라 저  교파가 이단이라 모든 게 이단이라 하는데 그만 몇이 이단이라 하면 이단으로  완전히 몰려서 이단으로 정죄당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게 이기지 못합니다.

 너거 전체가 다 이단이라 해도 옳은 것은 하나님이 안정만 하면 된다 하는 것을  '아멘! 됐다! 너는 내게 합당한 자다!' 이라고 하면 자꾸 일어서집니다. 뭐  정죄한다고 그래 꺼꾸러칠 줄 압니까? 꺼꾸러지지 안해.

 아마 한국에서 제일 이단이라고 욕 많이 얻어먹기는 아마 여기 총공회 백  목사라. 백파, 미워서 못 견디니까 백파라 백파라, 백파야 흑파보다야 백파가 좋지.

 홍파 이파 김파보다는 백파가 좋지 뭐, 하얀 게 좋지 뭐 딴 게 좋을 게 뭐  있는가? 그래 나는 그래 말해. '백파라 하면 검은 것보다 흰 게 안 좋으나?  그래라 그만.' 그거 그걸 가지고 '이래 쌓아니까 이거 전도가 안 됩니다. 이러니  교회를 옮겨야 되겠습니다. 어짜니 간판을 떼 갈아야 되겠습니다.' 간판 떼 갈고  좋게 할 거는 좋게 하고 그러나 '이제 백파라고 욕하는 그것을 능가하지 못할  교역자거든 아예 사면해라. 목회하지 마라, 너 불쌍한 사람 된다.' 네가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는 것은 주님이 아시고 네가 알고 너와 주님과 똑 바로 들어붙었으면  천하 사람이 다 그렇다 해도 그거 정통을 네가 알 터이니까, 네가 이단 정통을  아니 천하 사람이 다 정통이라 한다고 올라가지 안하고 천하 사람이 이단이라고  해서 처박히지 안하는, 요동치 안하고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피동되고, 그분이  말하면 죽자 살자 깜짝 놀라서 이라지만 그분 외 딴데는 동하지 안하고 정하지  안하는 것이 기독자들인 것입니다.

 이러기에 참된 기독자는 세상이 뭐 사형을 가지고 온다고, 억만금의 돈을  가져온다고, 권세를 가져온다고 발람 모양으로 그래 팔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지 안하면 동하고 정하지 안해요. 어떤 일이라도 동하고 정하지 안해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안다' 그러면 이것은 자꾸 헙니다.

 훼방이라 말은, 훼방이라 말은 헐 훼(毁)자 헐 방(謗)자요. 헐어 가지고 자꾸  사고 깎는다 말이오. 자꾸 사고 깎소. 뭘 삦고 깎아. 그 교파는 이렇게 삦고 깎고,  우리 총공회를 이단이라고 정죄한 교파들이 많습니다. 노회들이 많고. 삦고  깎아서 또 가 가지고 뭐, 그거 또 말 안 하면 다른 사람이 죽기 때문에 가 가지고  이래 말하면 우리가 잘못됐다고, 그라면 누가 그랬지 우리는 안 그랬다고.

 이래 가지고 그래 뭐 그 뒤에 '그러면 우리가 수정해 가지고 우리 노회에서 그래  기록하겠다' 깎고 삦어서 욕하기는 실컷 해 놓고 아니라고 그것을 이제 다시 그걸  아니라는 거 우리가 증거하겠다 해 놓고는 떡 어디 종이쪼가리에 조그매, 노회나  뭣이나 노회 촬요 끄트머리 '그것은 우리가 정죄한 것은 정죄가 아니고 그거는'  정죄라고 뭐 정죄라고 안 한다 한다던가 뭐, 정통으로 인정한다 그 소리는 안  했지, 아마? 정죄를 하지 안한다던가? 뭐라 했어, 접때 한번 당했지? 정통 교회  정통 말했어? 거기는 점잔하다, 그래도. 정통 교회로 인정하는 것 보니까. 그래  가지고, 이제까지 이래 가지고 근근히 지금 이래 자꾸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래 두 교회가 있는 거 여러분들은 주욱 연구를 하면서, 그러면 에베소 교회는  둘인데 어떤 거 어떤 것이 있었느냐, 서머나 교회는 둘인데 어떤 것 어떤 것이  있었느냐, 버가모 교회는 둘인데 어떤 거 어떤 거 있겠느냐, 두아디라 교회는  둘인데 어떤 거 어떤 것이 있었느냐, 사데 교회는 둘인데 어떤 게 어떤 것이  있었느냐,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떤 것이 둘이 있었느냐, 라오디게아 교회는 둘이  아니고 한덩어리니까 그거는 얼마나 좋으냐 하는 것을 이걸 자꾸 연구해서, 그런  걸 연구해 가지고 교회를 똑똑히 알아야 돼요. 똑똑히 모르면, 내가 교회관이 바로  되지 못하면 자기 구원관이 바로 되지 못하기 때문에 헛일된다 그말이요.

 이러기에 얼마나 바로 알아야 돼요? 이걸 바로 모두 알라고 생각지 안해요. 이게  전체적으로 종합해 가지고 생각지를 안해요. '이 일곱 교회가 이름 각각 가져  이거는 에베소 교회에 해당된 것이다. 이거는 뭐 서머나 교회에 상관된 것이다.'  에베소 교회 말한 것이 일곱 교회에 다 해당된 것이요 서머나 교회에 말한 것이  일곱 교회 다 해당되는 것을 이렇게 우리에게 뭐 에베소 교회라, 서머나 교회라  사데 교회라 이렇게 교회 종목으로 이래 한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OOO목사님?  또 저 도매금으로 만데 장 도매금 지식이라, 저거. 아니라, 그거. 또 뭐이야? 또  모르지? 그래 가지고 또 헛일이라. 또 OOO목사님? O조사가 바로 알았어. 그것은  모든 죄악의 모든 유혹이나 구원이나 그런 것이 오는 순서 계통이 있기 때문에  그 순서와 계통을 알리기 위해 가지고 이제 요런 교회 저런 교회 한 것이지  그것이 모든 교회 다 있는 것이라 그 말이오.

 우리는 거기서 '이단이 들어올 때는 요렇게 들어오는구나. 요런 이단은 요렇게  들어오는구나. 저런 이단은 저렇게 돌어오는구나. 요런 마귀는 요래 들어오는구나,  요런 사탄은 요래 들어오는구나.' 그러면 첫째가 에베소 교회, 둘째가 서머나  교회인데 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에 이 교회를 망치는 이단은, 이단은 뭣을 쓰고  들어왔지? 이단은 뭐 쓰고 들어왔지? 거게 이단은 뭘 쓰고 들어와? 무슨 감투를  쓰고 들어왔어? 뭐 쓰고 들어왔어? 성경을 봐야 알지 뭐. O조사? 그래. 자칭  사도라 하는 것은 직접 하나님에 직통하는 사람이오. 유대인은 시퍼런 정통을  가진 사람들이라. 정통이니 하나님으로 더불어 직접 연결됐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그 속에 이단이 들어오고 그런 사람을 통해서 온다 그 말이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옳다 한다고 따라가지 말아요. 또 삐뚤어졌다 한다고 다  삐뚤어진 걸로 정죄하지 말아요. 뭘 봐요? 들어봐요. 말씀을 들어봐요. 또  들어보고 거짓말쟁이 많은데 들어보면 돼요? 또 뭘 봐요? 행동하는 걸 봐요.

 그라면 다 봤어? 말도 제가 할 수 있고 행동도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하지  못하는 거 있어. 뭐이지? 하나님이 결과를 맺게 하는 건 제가 그거는 만들지  못해. 그거는 가짜배기는 못 만들어요. 암만 천사의 말을 하고 뭐 아주 의인의  행동을 이래도 그거 가짜가 있는데 하나님이 그 뒤에 딱 보면 결과를 해서 알려  줍니다. '이거는 가짜다' 하는 것을 그 결과로 보여 준다 그거요.

 여게 아침에 서머나 교회는 주님이 칭찬하시는 교회로 이렇게 나타났는데  주님과 서머나 교회와 몇 가지 지식이 같았습니까? 네 가지 지식이 같았습니다.

 같았는데 이제 네 가지 하는 것 보니까 다 알기는 알겠지 처음에는 시간관이  같습니다. 시간관이 같다 말은 시간을 어떻게 봤느냐? 네가 가지고 있는 시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어떤 시간을 네 시간으로 보고 네가 지금 모든 것을  계산도 하고, 계획도 하고, 또 달성도 할라고 지금 건설도 하느냐? 이것입니다.

 주님은 그 시간관이, 그러면 어디 나타났는가?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라' 이랬어.

 처음이라 말은 시발이라 말이요 나중이라 말은 끝이라 말이기 때문에 이 말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그런 말인데 이 말은 영원 전 영원 후라는 말입니다. 영원 전  영원 후라는 말이오. 영원 전과 영원 후는 시간이 그 안에 다 들었습니다. 영원  전과 영윈 후에는 그 속에 시간이 다 들었지 거게 빠진 시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은 영원 전과 영원 후를 당신의 시간으로 알고, 당신이 살  시간으로 알고 당신이 일할 시간으로 알고, 당신이 그 시간에 다 매여서 이와  같이 지금 살 것으로 알기 때문에 당신의 계획은, 당신의 계획은 요 시간을 영원  전으로 영원 후까지를 당신의 시간으로 생각을 하고 모든 일을 계획을 하고  처리합니다. 그런데 제일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일 년 만을 자기 시간으로 알고  사는 사람, 어떤 사람은 하루 만을 자기 시간으로 사는 사람, 어떤 사람은 다음  시간이야 내가 모르겠고 당장 그 현실이라는 그 시간만 보고 사는 사람 여러가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제일 눈먼, 눈이 소경된 사람입니까? 자 어떤 사람이 돈을  벌라고 땀을 쭐쭐 흘리고 있으니까 있다가 '이 바보 새끼야 그래 하지 마라. 돈  그거야 벌기 쉽지. 안 벌라 해 그렇지.' '어째 버노?' '나 따라오너라.' 그래  은행에 가더니만 은행에 보니까 돈을 세어서 척척 이래 갖다 놓고 단 위에  놓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 찾으러 왔던가 이라니까. 그래 놓으니까 푹 거머쥐고  보겟트에 넣습니다. 그라면 그게 몇 시간 됐어요? 몇 시간이나 부자됐어요? 그거  몇 시간이나 걸렸을까? 한 삼 분 걸렸을까? 삼 분 동안에 그만 부자입니다. 한  뭉텅이 집어넣습니다. 그 삼 분만 보니까 삼 분 동안 부자가 됐어.

 이랬는데 그 다음에 오 분도 안 돼서 이래 묶여야 됩니다. 이거. 그러니까 이제  삼 분만 자기 시간으로 보고 계획하는 사람, 또 어떤 사람은 하루, 어떤 사람은  자기 젊을 때, 젊음이 생전 있는 줄 알고 젊을 때 시간만 알고 늙을 때를 생각지  못하고 젊을 때의 시간만 계산해 가지고 해 놓으니까 나중에 가 통통 틀려  버렸다 말이오.

 또 이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이다' 살아 있는 동안만 자기 시간으로 알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몇 살 먹으면 힘이 적을 거다, 늙어서 내가 내 똥오줌도 받아내는  사람이 있어야 될 터이니까 그때 좀 그래도 하나 일꾼을 하나 댈 만치는 돈을  벌어야 되겠다. 어짜고.' 거기까지는 계산을 해서 알뜰히 했습니다. 이게 영원이  있는데 죽은 너머 시간을 계산 못 했다 말이오. 그 사람 그만 헛일이야.

 자, 하루만 보고 계산한 사람 이틀 닥치면 헛일, 또 한 달 계산만 딱 해 가지고,  한 달 시간만 상대해 가지고 계산한 사람은 그 다음에 한 달 지나고 나니까 통통  비어서 헛일이라. 젊을 때만 상대한 사람은 늙어서 헛일이라. 이 세상만 상대한  사람은 오는 영원 무궁세계를 생각하니까 안돼.

 이래서, 알파와 오메가라는 시작과 끝이라 말은 영원 전과. 영원 후를 다 내  시간이요, 내가 다 거게 살 사람이요, 또 내가 거게 관계되기 때문에 그 영원 억만  년 뒤에는 내가 어찌 되나? 억만 년 뒤에 일까지 오늘의 계산에 넣어 가지고  계산을 해야 되겠다 말이오. 예수님이 이래 살았는데 서머나 교회도 이래 살기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셨어. 예수님의 시간과 같은 시간관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관(觀)자라 말은 볼 관(觀)자요. 시간을 어떻게 보느냐 그 말이오. 시간에  대해서 어떻게 네가 지식하고 있느냐,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그것을 가리켜서  시간관이라 이라는데 시간관이 예수님과 같은 시간관을 가졌어.

 지금 아이가 학생 때 공부도 안 하고 자꾸 이렇게 강패로 돌아다니며 이라는  그거 그 사람이 이유가, 그렇게 된 이유가 어디 있어요? 어디 있어요, 그거?  그렇게 된 원인이 어디 있어? 시간관이 젊을 때 그때만 봤지 '내가 이라면  늙어서는 어찌 되나?' 늙을 때의 시간을 생각지 못해 그래. 그게 근시자라.

 가깝게만 보고 멀리 보지 못해 그래. 안 믿는 사람들이, 홍포 입은 부자가 그렇게  날뛴 것은 그 사람의 시간관이 영원 무궁한 시간이 자기에게 남아 있어서 세상은  하루밤 나그네와 같은 짧은 시간이고 영원 무궁은 영원한 자기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그 시간에 대해서 좀 염려를 하고 거게 계산을 넣었소 안 넣었소? 자기  생활에 그 계산 넣었습니까 안 넣었습니까? 안 넣었어, 그 말이오. 안 넣으니까  낭파당했지.

 우리는 기독자는 시간이 주님과 같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영원한 시간을  우리가 가졌기 때문에 영원한 시간을 계산 대 가지고 영원한 사간에 행복된 그  길을 택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시간을 자기 시간으로 두고 영원한 시간에  자기가 행복된 그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계산해서 가는 사람이 우리  기독자들이라 그 말이오. 시간관. 또 그 다음에는 뭐입니까? 생사관. 생사관  이것도 잘못되면 헛일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은 생사관이,  죽음이라 하는 사관, 죽음은 '죽음이 있단다' 이래서 그거는 있기만 있지  자기에게는 해당됐다고 생각지를 않습니다. '사람이 뭐 죽기야 죽지' 해도 죽음에  대한 관심적으로, 자기 마음에 감격적으로는 없습니다. 감격적으로는 그거 없어.

그래 죽는다는 그걸 생각만 하고 있지 항상 살 것만 생각하요. 항상 살 것만  생각해.

 그런데 우리 기독자들은, 살았느냐? 죽었다. 죽었느냐?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났다. 살아나서, 살아났으니 영원히 죽지 안하고 영생하는 것도 있고  살아나기는 모처럼 살아났는데 살아난 것이 잘못되면 죽는 수가 있다. 그것이  뭐이냐 하면 둘째 사망의 해다. 그렇게 보는 것이 기독자의 생사관이오.

 일반인들은, 일반인들은 생사에 대해서 어떻게 하고 있느냐? 우리가 아는 것은,  일반인은 살았습니다. 살았다가, 살았다가 죽었습니다. 뭘로 죽었습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살았던 것이 죽었습니다.

 요새 아이를 낳으면, 아이 낳으면 하나님이 아이 낳을 때, 창조할 때 영육을  창조한 건데 영육 창조한 것이 하나님이 그라면 죽은 걸 창조했느냐 죄인을  창조했느냐? 그것이 신학에 논리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걸 창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산 것을 창조하고 좋은 걸 창조 했어. 좋은 걸 창조했는데  창조한 그것이 존재하고 난 다음에는, 존재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정죄가 옵니다. 하나님의 정죄가 옵니다. 인류 시조가  범죄해 가지고 정죄받은 것은 시조 자기 혼자만이 정죄받은 것이 아니라 인류  시조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선악과 먹으면 죽는다 먹지 말아라' 하는 그 계약을  한 것은 하나님과 사람과 둘이 계약한 것인데 하나님의 계약 대상인 인류 시조  아담 속에는 아담의 부정 모혈로 난 자손은 전부 그 안에 다 포함 다 됐습니다.

대표해 가지고 아담이 하나님의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써 계약 어긴 그 계약은 아담은 보통 자연 생육법으로 난 모든  사람들의 대표로, 계약 대표자로 이와같이 범했기 때문에 그 범죄에 다 동참했고  다 정죄받아 가지고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은, 일반인들은 누구든지 처음에 살았다가 그 다음에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는데 죽은 것이, 죽은 것이 계속 죽습니다. 죽은  것이 계속 죽소. 죽은 것이 계속 죽어. 모든 사람은 말이요, 살았다가 죽었습니다.

 살았다가 죽었어. 자, 살았다가 죽었다는 그 말을 뭘로 가지고 증거할 수  있습니까? OOO목사님? 살았다가 죽었다는 건 뭘로 증명할 수 있어? '너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라' 했으니까, 죽었던 자라 했으니까 살아야 죽지요. 그렇지  안해요? 그 성구를 딱 들이대요. 살았다가 죽었거든. 살았다가 죽었다는 것을  에베소서 2장 1절 이하를 딱 들이대면 아무 박사라도 말 못 해요. 살았다  죽었거든. 살았다가 죽어 가지고, 죽어 가지고, 그 사람들은 이제 죽어 가지고  영원히 죽습니다. 인생은 산 것이 죽어 가지고 영원히 죽습니다. 영원히 죽는데,  그래 그걸 잘 몰라서 이 세상에 지금 청년으로 울뚝불뚝 힘쓰고 있으니까 산  자로 생각하지만 그게 죽은 자인데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받아 가지고 죽어가고 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자, 특수한 문제는, 특수한 사람은 았기는 있지만 한 살 먹는 아이와 열  살 먹는 아이가 그러면 어느 아이가 많이 죽었소? 열 살 먹는 아이가 많이  죽었습니까? 많이 죽었습니까? 그라면 한 해 살면, 한 해 살면 한 해 더 죽은  것입니까, 산 생명이 커지는 것입니까 죽음이 커집니까? 죽음이 커집니까?  맞습니다. 죽음이 커집니다. 이라다가 이제, 차차 차차 한 살 두 살 먹는 것이  자꾸 죽어 가지고, 이거 죽어 가지고 이 세상에서 다 죽고 영원한 죽음으로  옮겨서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 번 살았다가 영원히 죽는 것이 그것이  일반인입니다. 일반인. 이 생사관을 이렇게 성경이 말해 놨어요. 요대로 믿어야  합니다. 살았다가 영원히 죽는 그것이 일반인들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어찌 되느냐?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새생명 얻어서 다시 살아났다 이랬거든 이라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산 것이 마귀로 말미암아 죽었다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살아난 것이, 살아난 것이 또 어찌 됩니까? 이  살아난 것이 또 어째 되지요? 살아난 것이 그 뒤에는 어찌 돼요? 여기 보자,  누구한테 물어봐꼬? 저 목사님들은 전부 뒤로 갔구만. 뒤로 가서, 뒤로 가서  진리보다는 시원한 게 좋지. 진리보다는 시원한 게 좋아. 선선한 게 좋지. 그것도  관이 틀려 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살았다가 죽었다가 또 살아났습니다. 그라면  몇 번 꼬꿀트렸습니까? 세 번 꼬꿀트렸어. 살았다가 죽었다가 또 살아 났어.

 살아났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으로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살아난  것은 몇 가지로 살아났습니까? 몇 가지 능력으로? 네 가지 능력으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이거 예수님의 대속은 완전한 사죄 칭의 화친이오. 예수님의  죽음의 대속, 또 성신의 감동. 또 진리, 또 하나님을 향한 소망. 사활의 대속이라  하면 그 둘이 하나기 때문에 이제 사활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 서이라 해도 되고  이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 해방된 대속과 다시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인한  삶을 겸해서 이렇게 말하면 너이라고도 하고 서이라고도 하는데 너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의 피는 부활이 거기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O목사님? 예수님의 피로 우리 구속했는데 예수님의 피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둘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들었어? O목사? 이것도 또 문제네. 이거 이렇츰 몰라  놨으니. OOO목사님? 안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에는 사죄 칭의 화친 대속의  속죄제만 들었습니다. 알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데는 피는 상관 없어. 피는  이미 죽은 게 부활행기 때문에 그 부활에는 예수님의 피와는 상관 없어.

 그래서 피를 말하는, 예수님의 피, 또 성령, 진리, 또 그라면 하나님을 향한 산  소망 그라면 네 가지로 말해야 됩니다. 네 가지로 말해야 되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하나로 되고 사활의 대속이라, 사활의 대속을 한 마디로 대속이라 이라면  우리가 몇 가지로 중생됐습니까? 몇 가지로 살아났어? 세 가지로 살아났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피' 하면 네 가지로 살아났고 '사활로' 하면 피와 부활 겸해서  하나로 보기 때문에 '사활' 하면 세 가지로 됩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우리가 살아났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난 것은 어떤  능력으로 살아났느냐 하면 예수님의 완전으로 살아. 예수님의 죽음으로 대속한  것은 세 가지 죄를 대속한 것이요, 세 가지 의를 대속한 것이요, 세 가지 동행을  대속한 것입니다. 세 가지 죄라 말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금하는 것을 한  것이 한 죄고 또 한 가지 죄는 하나님이 하라고 했는데 하지 안한 것이 죄고, 또  하나님과 이렇게 하나돼서 그에게 피동돼 거게 속해 살라 했는데 배반하고  나왔기 때문에 죄가 되어지고, 또 하나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라 했는데  하나님만 바라보지 안하고 산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게 다 우리가  죽음이 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우리가 죽었던 것이 살아났습니다. 죽었던  것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몇 마디가 생겨졌소? 죽었던 것이 살아났으니까  우리가 다시, 다시 살아났어. 요 다시 살아난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것이 다시  살아났고 둘째 아담의 자손으로 또 나는 게 있습니다. 둘째 아담의 자손 그것은  신적 요소고 인적 요소가 아닙니다.

 이런데, 그러면 죽은 것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에는 우리가 살았는데 산  것이 죄와 허물로 우리가 죽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몇 곱배기 했습니까? 마디가 몇 개라? 세  마디. 세 마디 생겨졌어. 세 마디 생겨졌는데, 살아났는데 이 살아난 이 사람이  앞으로는 어찌 됩니까? 살아난 이 사람이 앞으로는 어찌 됩니까? 살아난 게 어찌  돼?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말 맞아요?  맞아요? 저기 그 뒤에, 뭐라고 말했어? 누가 말 하더만. 그래 살 수도 있다 죽을  수도 있다 했는데 그 말이 틀렸기 때문에 내가 묻는 거라. 왜?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것도 있고 또 영원히 죽지 못하고 영원히 영생을 하는 것도 있고  그렇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생사관을 바로 알야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영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또 이 마음과 몸의 형체는 어찌 돼요?  마음과 몸의 형체는 죽어요 살아요? 몸과 마음의 형제는 살아난 것이 죽습니까  영원히 죽지 안합니까? 영원히 죽지 안에. 이것은 예수님이 대속해 놓고 '내가  다시 조사해 가지고 안 되면 죽여 버릴란다' 이게 없거든.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심판에는 그 행함을 심판한다 했지 몸과 마음을 심판한다는 말이  성구에 없다 그 말이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따져야 돼요. 그래 마귀란 놈들과  하나님의 법전에 서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지.

 이래서, 산 것이 첫째 아담의 그 범죄로 인해서 죽었다가 우리가 죽은 것이  예수를 믿어 가지고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났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났는데  살아난 것이, 살아난 것이 이제 영은 그는 영생으로 살아났고 우리의 마음과  고기덩어리의 형체도 영원한 것으로 살아났고, 왜? 그거는 죽이는 심판이 없어요.

 거기서 판정이 돼. 죽이는 심판이 없으니까 영원히 산다는 게 확정되지 않소? 그  심판에서 죽인다 해야 되지 죽인다 안 하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다 살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이 없다면 우리의 이 모든 심신의 행위도 다  살았어. 행위도 다 살림을 받았습니다. 행위도 다 살림을 받았는데 이게 다시  이제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셨기 때문에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어. 행위는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러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그말은 살아 있으면 한번 살아났으니까  살아 있는 것이 죽지 안하고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살아난 영과 심신 이것이 죽지 안하는 데에는 어떻게  해야 죽지를 안합니까? 어떻게 해야 죽지를 안하지요? 어떻게 해야 죽지 안해요?  저 양성원 학생 똑똑이 말해 봐. 너 O가 너 해 봐. 그래. 안 벗으면 돼. 조거  똑똑히 알아. 그렇게 똑똑히 알고 앞으로 목회를 해서 막 뚜드려 대면 한국과  세계가 막 쩔렁쩔렁 흔들리고 막 일이 납니다. 이 교리와 신조를 여러분들이 안  믿어! 안 믿기 때문에 능력이 안 나와. 안 믿는 자에게 무슨 능력이 나와,  나오기를? 안 믿는데.

 우리 교리와 신조는 이거 공연한 말이 아니고 세계에 제일 가는 교리요 신조요  행정입니다. 이거 뭐 공연히 말하는 게 아니오. 따져 보십시오. 이라면 '저거 또  제 자랑한다' 이거 여러분들 자꾸 이걸 아주 천한 것으로 여겨서 멸시하고 무시해  버리기 때문에 내가 여러분들이 무시하지 말라고 하기 위해서 이라니까 나는 욕  얻어먹어. '그 자식 교만한 자식, 그 자식 또 제 자랑 하지.' 이래 가지고 욕은  엉드리 먹지만 내가 교만한 말 하는 이런 것도 교만으로 말하니까 이제 이런 말  하면 제 자랑 하는 것이 다 손해가지 유익은 하나도 없어. (내 자랑하는 거 내가  통했나?) 그러나 내 자랑인데 내 자랑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했기 때문에  통해서 하신 그분 자랑이지 내 자랑이 아니야. 또 그라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가책이 없어. 욕은 얻어먹어도 좋고  평안해요. 그러니까 그 욕이 나한테 뚫고 들어오지 못하니까 그 욕을 하면 나는  그저 마음에 감사하고 기쁘고 '그 사람들이 몰라 그런 것이니까 그 사람들도 알게  해 주옵소서' 그 기도나 나오지 거기 분이라 하는 것이 나오지 안해 언제 저  OOO목사 떡 OO서, 그거 OO 뭐 교역자회인가 어디서 그래 가지고 이랬는데 '이  어떻게?' 이래 가지고 막 분해서 와 가지고 '목사님이 열심이 있는 어른이니까  아마 가서 말하면 나 배나 삼 배나 지금 막 분개할 거다.' 와 가지고 실컷 말해.

 실컷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래 나는 그걸 좀 '뭐 그런 걸 자꾸 말하노? 너 할 일  없구나? 네 일이나 하지. 저거야 그 일 하거나 말거나 네게 무슨 상관이 있나?  너는 너 할 일만 하지'. 이래 가지고 이라니까 처음에는 섭섭히 여기더니만  나중에 좀 있다가 보니까 '이제 알았습니다.' 하면서 용기를 가지고 '이제는 됐어,  이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가더니만 봐, 해결해 줬지.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지.

 이래 하나님이 일해 주시는 맛을 봐 놓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 안 떨어져요.

 하나님이면 다 되는데 뭐 문제가 뭐이야? 그래, '그런데 다만 내가 살펴보겠다.

내가 이거 대속해서 살렸다. 살았다는 이름은 있다. 살았다. 너는 산 자라고 하는  산 자라 하는 그런 이름은 가졌다. 네 명의는 산 자다. 내가 대속해 너를 살렸다.

네 행위도 다 살렸다. 그러나 내가 행위에 대해서는 내가 너를 시험하겠다.

조사하겠다. 네가 행위에 대해서는 네가 이 대속을 참 믿는 행위를 하는지 대속을  벗어버리는 행위를 하는지, 네가 벗어버릴 그런 우려성이 백프로 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심사해 본다. 하고 '이제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선악간에 각 사람의  행함을 따라서 갚음을 받으려 함이라' 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이러니까 자, 영과 혼 몸은 이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다시 재심사  한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사활의 대속의, 일차 사활의 대속으로 완전 대속이 됐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택한 자들이 아무리 세상에서 죄를 짓고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것이 마음도 부활하고 몸도 부활하고 부활해서 영육이  부활은 합니다. 부활하는데 다만 행위는 그게 의되면 영생이 되고 죄가 되면  멸망을 받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심사를 하신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라니까 그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되고 인정 안 하시면 예수님의  대속을 확 벗길 것이라. '네가 내 대속을 안 입고 행동했는데, 하루 종일 안 입고  했는데 안 입고 행동한 그걸 내가, 안 입고. 대속을 안 입고 벗어내 던져도 강제로  입힌다 말이가?' 강제로 입혀? 그거는 안 돼. 제가 벗으면 자유성을 줘서 '네가  벗으면, 벗는 게 필요하거든 벗어라. 네가 괴로와도 입고 있는 게 필요하거든  입어라.' 이래 가지고 벗은 것은 영원한 사망이 되고 입고 벗지 않는 것은 다  영생입니다. 영, 육, 그 행위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안 벗고 입고 있으면 영,  육, 행위가 사망입니까 영생입니까? 다 영생합니다.

 이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살았던 것이, 일호에 살았던 것이 이호에 죽었고,  이호에 죽었던 것이 삼호에 살아났고, 삼호에 살아난 이것이, 이것이, 살아난 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살았는데 대속으로 살아난 이것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지만 안하면 전부 영생입니다. 사활의 대속을 벗지만 안하면 전부  영생입니다. 몸도 마음도 행동도 벗지만 안 하면 다 영생이라. 그거 심신의  정력도 벗지 안하면 다 영생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능도 영생이라. 이러니까  이렇게 영원히 살고,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은 이제 살았던 것이 죽었고, 죽었던  것이 살아나 가지고 다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어버리면 그 다음 어찌  됩니까? 그 다음에 죽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벗으니까 죽어요. 사활의  대속을 벗으니까 죽는데 '네가 벗으면 죽는다' 사활의 대속에 대해서 재심사가  있는 것은 몸입니까 마음입니까 행동입니까? 행동 만이라는 요걸 똑똑히 알아요.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하는 요 성구를 단단히 알고 뽈끈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람은 영원히, 벗은 것은 영원히 죽습니다. 우리에게, 우리는 영,  마음, 몸, 행위, 행위로서 만들어지는 기능 그 기능이 있는데 그라면 몇 가지는  영원히 죽지 안하고 영생합니까? 네, 영 마음 몸 자기 이 행동한 형체는  영생하지만 행위는 뭘 만들어 내느냐 하면 행위는 기능을 만들어 냅니다. 행위는  기능을 만들어 내요. 기능 그거는 죽습니다.

 자, 어떤 사람이 자꾸 글을 글을 쓰는데 자꾸 손으로 가지고 글을 씁니다. 글을  쓰니까 아주 글씨가 늘었습니다. 글씨가 늘어서 아주 세계에 명필이 됐습니다.

 세계에 명필이 됐는데, 세계 명필이 됐는데 글씨 쓴 명필 그 사람의 오른손온  죽습니까 삽니까? OOO? 뭐이 죽어, 그라면? 뭐이 죽어, 그라면? 오른손은 살고,  자꾸 이래 쓴 오른손은 살고 또 뭐 죽어? 뭘 했는데? 천하의 명필인데, 명필은  이제 기능이지. 기능인데 그라면 손은 죽어요 살아요? 뭐 그거 확신이 없는가배?  손은 죽어요 살아요? 살아요. 그 붓은 죽어요 살아요? 붓은 죽어요 살아요? 붓도  죽어요. 이러니까 글씨를 잘 쓰는 아주 명필의 기능 그거는 죽어요 살아요? 글씨  잘하는 명필 그것은 하늘나라 가져가 소용이 있습니까? 소용이 없어. 다 죽어.

 이거 여러분들이 잘 알아야 되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가 시간을 소비해 가지고 자기에 있는 정력, 정력이라 하면  마음의 재료와 몸의 재료 이 두 가지 재료를 가리켜서 정력이라 합니다. 그것  가지고, 그것 가지고 기울여서, 일생 동안 기울여 가지고 복싱이라 하나, 이거  복싱? 이 때리는 거? 이거 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세계 참피언이 됐어. 세계에  참피언이 됐으면 참피언 되니까 자꾸 뚜드리고 자꾸 이래 한 참피언된 그 팔뚝  그거 하늘나라 가요 못 가요? 하늘 나라 갑니다. 그런데 그 힘은 하늘나라 가요  못 가요? 갈 수 있고 못 갈 수도, 어찌? 복싱하는데 내나 그거 하는 건데 뭐? 못  가지요.

 그런데 그 힘은 그힘이 그대로 있었으면 갈 터인데 그 힘이 일단 다른 것으로  가공이 돼 가지고 그 힘이 힘으로 있습니까, 복싱하는 그힘이 힘으로 있습니까,  뭘로 변해졌습니까? 기능으로. 이 뚜드리고 이거 치고 박고 하는 그 기능으로  변해졌어. 그러면 그 기능은 하늘나라 필요해요 안 필요해요? 하나님의 진리에  맞아요 안 맞아요? 하나님께 피동된 거요 안 된 거요? 그러면 그거 힘이 변해서  기능됐기 때문에 그 정력도 다 불타고, 기능도 불타고, 몸뚱이 그 형체만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부활할 때에 영광이 차이 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의 영광의 차이가 비유할 때 형체로 비유했는데 형체는 땅에 속한 형체가  있으니까 이것도 형체요. 모래알도 형체요. 하늘에 해도 형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해 한 개의 형체와 땅에 있는 모래알 한 개의 형체와 다 같은 형체는 한  개의, 형체는 형체요 이름은 가지고 있고 형체는 형체지만 해 한 개의 형체의  영광과 모래알 한 개의 형체와 그 형체의 영광이 같애요 달라요? 차이가 좀  있어요? 차이가 좀 있습니까? 누가 수학 잘하는 사람 누가 있노? 우리 O박사 뭐  컴퓨터 박사라 하던가? 그래? 그거 그라면 차이가 얼마나 있는고 얼마나 차이  있는고? 심히 큰 차이라, 심히 큰 차이라 하면 다 들어 가기는 들어갔지. 심히 큰  차이라. 무한한 차이라. 해 한 개의 영광이나, 가치나, 실력이나 모래알 한 개의  실력하고 비교가 됩니까? 모래알 같은 실력 부활도 있고 해 한 개와 같은 실력  부활도 있다 그것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이러니까 부활한 자의 영광과 실력이  차이가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이래서, 우리는 살았던 것이 죽었고 죄와 허물로 죽고, 첫째 아담으로 죽었고,  둘째 아담으로 살아났고, 둘째 아담으로 살아난 것이 그대로 영생하는 것도 있고,  둘째 아담으로 살아난 이것이 또 새로 죽는 일 있습니다. 새로 죽는 일은 무슨  죽음이라요? 무슨 죽음? 너 무슨 죽음? 너? 둘째 죽음이라, 둘째 죽음. 둘째 죽음.

 둘째 죽음. 너 단단히 좀 배워. 둘째 죽음. 암만 알고 싶어도 잘못 배우면  헛일이라. 다른 교회 다녀도, 다른 교회 다녀도, 우리 교회 오라 소리, 우리 교회  오지 말고 여기 금요일날 거석하고, 또 주일날 우리는 오후에 두시에 예배를 봐요.

 다른 사람들은 다 일곱시에 보는데. 이러는데 욕을 하면서 따라오기는 잘  따라와.

 어짜든지 두시에 보니까 이거 두시에 보자 이래 가지고 두시 예배 보는 거는  아마 부산 시내에서도 두시 예배 보는 교회가 많지 아마. 그거 그런 거는  따라오기는 잘 따라오는데 욕은 한다 그 말이오. 또 금요일날은 다 모두 구역  예배 본다고 다 이래 보더니만 이제 우리는 한테 모여서 예배 본다 하니까  금요일날 한테 모여서 보는 그것을 또 따라서 하는 교회가 아마 거의 십분지 한  오륙이나 칠팔이나 안 되는가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내 것인데' 고집을  피우고 안 한다고 하는 또 그 사람 있습니다. 옳은 것이면 따라가야 되지 뭐 그래  고집 부리면 뭣 하는고? 자, 그러면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노라' 그러면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랬으니까 예수님은 몇 마디입니까? 죽은 거 산 것  몇 마디요? 어? 두 마디인가 세 마디인가? 네, 세 마디라. 어째 세 마디? 한번  해석해 봐, 나도 좀 배워 보자.

 예수님은 살았었습니다. 살았었는데 우리를 배신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두 마디. 살았었다가 우리를 대신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대신했기  때문에 죽었는데 껍데기는 죽고 속에 알맹이는 살았었어. 예수님은,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음을 한 번 봤습니까 두 번 봤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을 한 번 봤소  두 번 봤소? 한 번도 안 봤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보지 안했어 예수님은 우리  대신해서 죽으셨지 당신은 죽지 안했습니다. 이사야 53장 마지막 절수에 보면  우리 죄를 담당해서 죽었으나 실상은 우리의 택한 자들의 죄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셨느니라 이랬어. 기도하고 계셨어. 껍데기는 우리 대신해서 죽어서 형벌받았어.

 껍데기는 죽음의 형벌 받았지만 속에 알맹이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어. 예수님의  이 심신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을 봐서 죽음의 형을 받았어. 죽음의 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인성의 영은 죽음의 형을 받지 안했어. 그 영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생생하게 살아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책임지고  기도하고 계셨다 하는 것을 이사야 53장 몇 절이고? 12절? 12절 한번 읽어 봐.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기도했어. 안 죽었어. 속은 안 죽고  겉만 죽었어.

 예수님의 그 인성은 겉만 죽고 속은 죽지 안했습니다. 왜? 겉어머리 죽는 것만  하면 우리 대형이 되고 대행이 되거든. 그러니까, 대형이 되기 때문에 겉만 죽고  속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는 몽땅 죽었다가 몽땅 살아났다  이랬는데 주님은 우리 대신하는 것은 껍데기만 하면 대신할 수가 있기 때문에  껍데기는 대신해서 죽고 속 알맹이는 죽지 안하고 살았습니다. 죽지 안하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는 죽는 것은  하나님을 거슬려야 죽는 것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도 없고 우리 대신 형 벌받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했기 때문에 거역함으로 정죄 받아서 죽을 만한 것은 아니고 다만 우리를 대형  대행한 사랑으로서 성공만 한 것이지 죽음의 저주를 속속들이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받지 안했습니다. 그는 당신이 십자가 못박혀 죽으시면서도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 순종 하는 것으로만 전부가 됐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살았다가 죽었고, 또 죽었다가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살아났고, 살아난 것이 이것이 지금 살아난 것이 두 길이 있습니다. 살아난 것이  영원히 그만 살아버리는 게 있고, 영원히 사는 거 있고 살아난 것이 또 한번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한번 죽는 거는 그라면 몇 동가리입니까? 몇  마디요? 몇 마디? 몇 마디요? 살았다가 첫째 아담으로 우리 조상으로 말미암아  죽었고, 죽었다가 둘째 아담으로 살았고, 또 산 것이 또 둘째 죽음으로 죽고  그라면 마디가 몇 마디입니까? 네 마디.

 여러분들 그라면 자, 네 마디가 좋소 세 마디가 좋소? 네 마디 원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네 마디 원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저 뒤에 네 마디 원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더러 드나요? 네 마디 원하지 안하고 세 마디만 원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세 마디만 원하는 사람? 다 들기는, 세 마디. 세 마디를 원하면 이는 어째야  세 마디만 가지고 살 수 있어요? 세 마디만 가지고 살면 영생해요. 어짜면 세  마디 가지고 살 수 있습니까? 안 벗으면 돼. 안 벗으면 돼.

 흰옷을, 옷을 홀딱 벗었기 때문에 '흰옷을 사서 입어' 이랬고 또 두루마기를  더럽했기 때문에 빤다 이랬고 내나 사활의 대속을 입고 있으면서 실수하는 것을  가리켜서 이제 그것은 사활의 대속의 구원의 두루마기를 더럽했다 그 말이오.

 더럽히면 빨면 돼. 그래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이 복 있다' 이래. 빨면 돼.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또 빨면 돼요.

 이래서 이것이 우리의 생사관입니다. 우리의 생사관. 이러니까 죽는 것은 뭘로  죽어요? 죽는 것은 뭘로 죽었습니까? 죄로 죽는데 어떤 사람으로 죽었습니까?  우리 믿음의 조상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그만 그거는  죄로 죽었습니다. 죄로 죽었어. 살아난 것은 뭘로 살아났습니까? 살아난 건 뭘로  살아나? 의로 살아 났소 죄로 살아났소, 하나님과 동행으로 살아났소, 뭘로  살아났소? 사죄 칭의 화친 또 하나님을 향한 소망 이 네 가지로 살아났어요.

 죽기는 몇 가지로 죽어요? 죄 하나로 죽어요. 사는 건 이 네 가지가 구비해야  돼요. 구비하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생사관이 주님과 서머나 교회는  하나였습니다. 생사관.

 그라고 그 다음에는 또 뭘 말했지요? 고락관. 이 고락에 대해서 고락이라 하는  건, 고생이고 즐거움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이 고생이라는 것이 자기  자체로 인한 고생 있습니다. 자기 자체로 인한 고생. 자기 자체로 인해서  고생스러운 그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체가 그만 쇠약해지든지 또 늙어지든지 또  자기가 잘못해 가지고 그만 다치든지 이라면 자체로 고생하는 게 있고, 또 다른  피조물들이 나를 괴롭게 해 가지고 고생하는 거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나를  고생시켜 가지고 감옥에도 가두고, 뭐 때리기도 하고, 끌기도 하고, 또 굶기기도  하고 또 돈 뺏들라고 칼로 찌르기도 하고 이 모든 피조물들로 말미암아 내가  해를 보는 피해를 입는 그런 고난이 있어. 그런 고난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나를 고난을 줘서 고난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을 말하면 크게 말하면 고난이 두 가지 종류입니다. 고난은 두 가지  종류입니다. 고난관을 똑똑히 알아요. 고난은 두 가지 종류인데 하나는 하나님께  고난 받는 것이고 하나는 피조물에게 고난받는 것이니 피조물에게 고난받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피조물에게 고난받는 것은 다른 피조물들이 나를 괴롭히는 거  고난이 있고 내 자체가 자체를 괴롭게 하는 고난이 있으니 그 둘 다 피조물  들에게 받는 고난입니다.

 이래서, 이 서머나 교회는 피조물이 주는 고난을 그것을 고난은 고난이나 고난을  고난으로 보지 안했습니다. 그 고난은 그까짓 거 가치 없는 고난이라. 그 고난은  영원히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 고난은 우리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 고난 제까짓  게 암만 따라와 봤자 못 따라와요. 좀 있으면 못 따라와. 이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따라옵니다. 영원히 우리에게 고난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안 받을라고 하면, 안  받을라 하면 피조물에게 고난을 받게 되고 또 피조물이 주는 고난을 안 받을라고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받게 되고, 맞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맞아요?  이해가 돼요? 이거 뭐 이해가 돼야 되는데. 그래,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하나님을 거스려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거슬리면 하나님께 고난을 받고 또  이 세상에 고난받는 것은 세상에게 거슬리고 대립이 되면 그것들에게 고난을  받습니다.

 이러니까 자, 하나님께 받는 고난이 큽니까 세상에 받는 고난이 큽니까?  하나님께 받는 고난이 커. 이라니까 기독자들은 이 고난에 대한 관찰이 발라서  고난관이 바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 피조물들에게 고난받는 그것도 안 받아야  되지만 하나님께 고난받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고난을 안 받을라고  하니까 피조물들에게 고난을 받아야 되는 그 고난은 성도들은 고난으로 생각지  안하고 달게 받습니다.

 왜? 피조물들에게 고난 안 받을라 하면 하나님께 고난받아야 되니까 하나님께  고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피조물들에게 고난을 받으니까 피조물들에 고난받는  그것은 하나님께는 뭐이 됩니까? 고난이 돼요 평안이 돼요? 평안이 됩니다.

 평안이 되는데 이제 세상이, 하나님의 평안을 받을라고 애를 쓰니까 세상이  평안받지 못하도록 방해를 많이 할수록 이거 방해를 받지 안하고 하나님의  주시는 평안을 받으니까 세상이 자꾸 하나님의 평강을 받지 못하도록 이렇게  방해를 하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많이 받게 도와 주는 것입니까 못 받도록  해하는 것입니까? (많이 받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래요? 맞아요? 그래.

세상이 주는 또 고난을 이것을 안 받을라 하면 하나님께 고난받겠고 하나님의  고난 안 받을라 하면 세상의 고난받고. 둘 다 고난 안 받으면 좋은데 이렇게  되지를 못한다 그 말이오. 왜? 하나님은 옳은 것이고 세상은 틀린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에게 고난 안 받을라 하면 틀린 것에게 고난받아야 되고 틀린 것에게  고난 안 받을라 하면 옳은 것에게 고난을 받아야 된다 그 말이오, 이 둘이  정반대기 때문에 이것도 합치될 수가 없어요. 평안도 그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평안과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는데 하나님의 평안을 받을라고 하니까  세상이 '내 평안 받아라. 하나님 평안 받지 말고.' 하나님 평안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세상이 주는 평안을 받으라고 자꾸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성도들이 세상이 주는 평안 그까짓 거는 뭐  있다가 없어질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자기가 받고 놓지 않기 위해서 세상이 주는 평안을 물려칩니다.

 이러니까, 세상이 주는 평안을 물려치니까 세상이 나에게 뭘 줍니까? 나에게  고난을 줍니다. 그렇지 안해요? 세상이 나에게 고난을 줍니다. 고난을 주니까,  고난을 주니 이 고난을 받지 안할라 하면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내놔야 될 거라  말이오.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안 내주기 위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안 내주기 위해서 세상이 주는, 저거 원수라고 대항해 가지고  고난을 줍니다. 고난을 주는 이, 고난을 받으니까, 하나님의 평안 때문에 이 세상  고난을 받으니까 하나님이 주신 이 평안은 이런 내게 이 평안의 중량이 커지겠소  작아지겠소? 커집니까 작아집니까? 커집니다.

 이러니까 세상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지 못하도록 막 애를 먹이는데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을라고 애를 쓰니까 세상에는 미움을 당하는데  누구한테는 사랑을 받습니까? 하나님께는 사랑을 받소, 이러니까 세상이 나를  하나님의 평안을 받지 못하도록 자꾸 방해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를 돕는 것이  됩니까 해하는 것이 됩니까? 돕는 게 돼. '할렐루야!' 돕는 것이 돼요.

 또 내가 하나님의 주시는 고난을 안 받고 세상이 주는 고난 받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고난은 이거는 참 큰 고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고난을 안 받고  이제 세상 고난을 받을라고 이라니까 세상이 나를 고난을 줍니다. 하나님의  고난을 안 받을라 한다고 세상이 나를 미워서 고난을 되게 줍니다. 고난을 되게  주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그 고난이 없는, 고난이 없는 평안이 더 커집니까  작아집니까? 커지요 작아지요? 커져, 커져. 못 따라왔나? 못 따라왔어? 못  따라왔어? 커져.

 이러니까 세상 제가 아무리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 자에게는 바라다  주고, 도와 주고, 위해 주고, 섬기고, 우리 하나님이, 그가 나를 미워하는데  미워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고, 욕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고,  축복해 주는 것이고 암만 해도 해할라 해 봤자 이 믿음에 꽉 서 놓으면 믿음에  선 자는 세상이 아무리 해할라 해도 해하지 못하고 뺏들라 해도 뺏들지 못합니다.

 뺏들면 어째? 뺏들면 더 많아지고 더 커져요. 이 고락관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됩니다. 고락관을 바로 알면 그 고락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어.

 자, 생사관 바로 알았지, 또 시간관 바로 알았지, 또 고락관 바로 알았지, 또  빈부관만 바로 알면 되는데 빈부관을 바로 압니다. 빈부관도, 부자라는 것도 돈  부자도 있고, 명예 부자도 있고, 지위 부자도 있고, 지식 부자도 있고, 건강 부자도  있고 또, 뭐이요 또? 진리 부자도 있고, 또 믿음 부자도 있고, 또 하나님 부자도  있고 부자 했습니다. 부자가 쌨어 그 중에 제일 좋은 부자가 뭐입니까? 하나님  부자요. 그 다음에는? 진리 부자. 그 다음에는? 믿음 부자.

 믿음 부자는 하나님의 충만한 것을 내것처럼 막 쓰는 겁니다. 건방지게 전지도  없는 것이, 전지도 없는 게 막 전지 지혜를 척척 씁니다. 요셉이가 애굽에  총리대신이 돼 가지고 그 총리대신 되고 난 다음에 애굽 나라를 다스리는데  하나님의 전지를 다 갖다 써 버려. 하나님의 전지를 다 갖다 써. 쓰니까 그때  애굽이 참 잘됐습니다. 또 하나님의 전능도 다 갖다 씁니다. 이라니까 애굽  사람들이 뭐 요셉이를 아버지라 했지. 아버지라 했지? 요새는 뭐 김일성를 뭐라,  뭐라 하더라? 아버이라 한다더나? 어버이? 어버이인가 뭐인지? 그때 애굽  사람들은 요셉이를 아버지라고 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게 보니까 전지자거든. 전능자거든 모든 걸 주권하고 있는 주권자거든.

 하는 대로 다 된다 말이오. 하나님의 것을 다 내 썼어. 하나님의 것 제것이라.

 하나님의 것이 제것이라. 제것인데 뭘로 써먹어요? 뭘로 써요? 뭘로만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써먹을 수 있어요?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믿는 것이  하나님께 일을 시키는 것이라. 믿음으로 다 그래 썼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가 성전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그분이 거지로 우리 안에 계십니까, 부자로 계십니까? 그분이 어리석은  자로 계시요, 전지 전능자로 계시요? 그러니 내 안에 계시니까 전지 전능이 내  안에 계시니 전지 전능을 쓸 수밖에는 없지, 뭐. 그런데 그분이 내 안에 계실 때에  어떻게 계시면 좋겠어요? 이 주먹덩이만하게 둥그러이 내 이 간 속에든지 내  이거 가슴 속에든지 주먹덩이같이 둥그러이 하나님이 그런 형체를 가지고 계셔서  이 주먹덩이만한 이 주먹덩이는 전지한 덩어리다, 전능한 덩어리다, 이거는 완전한  덩어리다, 이거는 다 완전이다. 이래 주먹덩이만해 가지고 완전하면 좋겠어요  주먹덩이만한 덩어리도 없고 알밤만한 덩어리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서 전지  전능 완전만 있으면 좋아요? 어떻게 와서 내주하면 좋아요? 형체를 가지고  내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다 없지.

 이러니까 이렇게 좋게 우리 안에 와서 내주해 계셔. 이래 내주해서 내가  주먹덩이만 내가 전능자가 돼 가지고 와서 있어도 전능은 좋지만 주먹덩이만한  게 들어놓으면 좀 괴롭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에게 제일 좋구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존재로 전지 전능으로만 완전으로만 내 안에 계셔 가지고 실력만  이행하고 이라니까 안 보인다고 또 야단이라. 안 보인다고 또 부인한다 말이오.

 나 같으면 '너 부인해? 그라면 네가 알도록 해 줄까?' 그라면 그 안에  메주짝같이 말이지 이 주먹덩이 이 둘 만한 게 여기 떡 와 가지고 전지 전능의  뭉텅이라도 이 둘 주먹덩이만한 뭉텅이로 와 가지고 있어 놓으면 저 죽을 지경일  겁니다. 안 그렇겠소? 이 뭉텅이를 가지고 오는 게 좋아요? 뭉텅이는 없이 전지  전능의 그 모든 완전의, 완전의 실력으로만 생명으로만 와서 있으면 좋아요? 뭐이  좋아요? 뭉텅이, 없이 이 전지 전능 완전 지혜 사랑 이 모든 하나님의 속성의  능력으로만 와서 계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우리  O장로 회개해야 될세. 이거 들어, 이거. 오른손. 어? 왼잡이라? 오른손으로  글쓴다고.

 글을 쓰니까 왼손으로 들었다 말이지. 그래도 그래. 글씨 그뭐 이거 그런데  그래도 오른손을 들어. 하나님 앞인데 들라 하면 오른손 얼른 놓고 이 오른손을  들어야지. 그래야 더 겸손이지. 안 그래요? 이제 배워. 박사라도 배워. 그거 뭐  박사라도 소용 없어, 배워야 되지. 인제 그래 할 거야, 안 할 거요? 그래. 순종  잘해. 순종 잘하면 그게 믿음이라. 그거 복있는 거라.

 이래서 이제 시간관, 생사관, 또 고락관, 빈부관 그라면 몇 가지입니까? 이 네  가지 사대관이 바르면 그 사람은, 이것이 바르면 그 생활은 필연적으로 바로 되고  맙니다. 여게 다 이 네 가지를 바로 모르고 착각한 가운데서 그런 것입니다.

 생사관을 바로 모르는 데에서 이거 살라 하는 것을 죽이는 줄 알고 죽이는 것은  산 줄 알고 꺼꾸로 뒤벼져 가지고 사람들이 야단을 지긴다 말이오. 생사관을 바로  알면 주님을 인해서, 주님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거는 전부 생명으로 충만한  일인데 왜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왜 그렇겠습니까? 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살았다가 죽었고 죽었다가 살아났고,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그러면 믿는 사람들이 지금 사는 생활은 무슨 생활입니까? 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산 생활을 하는데 산 생활 하다가 피곤하니까 다시 죽는 생활 합니다.

산 생활 하면 산 생활이 주관되면 영생이 되는데 산 생활 하다가 또 죽는 생활을  한다 그 말이오. 믿는 사람이 이제 살아났기 때문에 살아난 영생하는 산 생활만  자꾸 하면 좋을 터인데 산 생활 하지 안하고 죽는 생활을 가다가 한다 말이오.

죽는 생활. 죽는 생활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게 죽는 생활 하는 것이지? 벗어  버리면 죽는 생활 해.

 그러면 산 생활 하는데, 이 대속만 벗지 안하면 산 생활 하는데. 산 생활을  하는데 자꾸 대속을 벗으라고 자꾸 하는 것은 이거는 죽이는 소리입니까  죽일라고 하는 소리입니까? 죽일라고 하는 것이라. 자꾸 죽일라고 하는데,  죽일라고 하는데 안 죽는 것은 그거 나를 죽일라 하니까 혈육으로 가지고 다퉈야  돼요 무기로 다퉈야 돼요? 뭘로 해야 돼요? 믿음으로 싸워야 돼요. 사활의 대속을  믿음으로 벗지 안해야 돼요. 나는 이 사활의 대속했기 때문에 나는 다시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벗을 수 없다는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확신하기  때문에 요것을 벗지 안하는 것이 싸우는 것이라 그라다가 그러면 믿는 사람 안  죽습니까? 믿는 사람 죽으면 어찌 돼요? 자 살았다가 죽었다가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네 가지, 능력으로 살아났는데 살아난 사람이. 살아난 사람이  사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살아가고 있는데 세상이,  세상이 죽일라고, 죽일라고 해서 자꾸 죽일라고 합니다. 세상이 왜 죽일라고  합니까? 세상이 죽일라고 하는 것은 이 사활의 대속을 벗으라고 합니다. '벗으면  내가 죽이지 안하고 높이 들어서 줄 터이니까 벗으라' 이래요.

 왜정 말년 때에 이 사활의 대속을 벗으라고, 신사참배 하는 거는 이거 벗는  것이니까. 우상 섬기는 것이요, 이거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요, 순종치 않는  것이요,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요 하지 달라는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 배반한  것이기 때문에 이거 사활의 대속을 벗는 것이라 말이오. 벗길라고. '대속을 벗으라  그리 안 하면 감옥에 가둔다. 벗으라. 안 벗으면 네가 예수를 안 내놓으면  죽인다.' 이래 가지고 고통 고문을 합니다. 고문과 고통을 합니다.

 그러면 고문 고통을 하는 그것이, 고문 고통하는 것이 영생하는, 영생하는  생명으로 살아난 이 생명을, 이 생명을 그것이 벗으라고 죽일라고 하는데 그때 이  생명이 사는 길은, 생명이 사는 길은, 생명이 사는 길은 그때에 '너를 죽인다.

 독가스로 죽인다.' 왜정 말년에는 독가스로 죽일라고 그들이 계획을 했어요.

 '독가스로 죽인다.' 또 '너 지금 굶겨 죽인다, 형을 받아 죽인다.' 이렇게 자꾸  죽인다 하는데 그들이 죽일라고 하는 것은 이레 죽일라고 하는 것은 살아난  사람을 죽일라고 합니까 그들이 뭘 죽일라고 합니까? 그들이 죽일 수 있소 없소?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안해요? 최상림 목사님도 죽였는데, 뭐. 주경일  목사님도 굶겨서 죽였는데 그만, 형을 고문 해 가지고 죽였는데.

 그래, 그들이 이 자연 생명, 이 자연 생명을 죽일라고 하는데 자연 생명을 죽일라  하는데 자연 생명은 그들이 죽일 수가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자연 생명은 죽일  수가 있는데 피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생명은 그들이 죽일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영의 생명도 죽이지 못하고 마음과 육의 형체의 생명도 죽이지 못하고  다만 그 행위의 생명은 죽일 수가 있습니다. 죽일 수가 있는데 그때에, 죽일라고  벗으라 이렇게 할 때에 그때에 그들이 자꾸 죽일 터이니까 네가 안 죽을라면  그것을 벗으라 자꾸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 육체의 생명을 가지고 위협을 해서  그렇게 말하는 그것이 중생된 새생명의 생명은 그들이 죽일 수 있어요 없어요?  죽일 수 없어요.

 그러면 그들이 죽인다고 협박을 놓는 그것은 새생명을, 새생명을 그들이 죽이는  일을 할라고 애를 쓰는데 그때에 우리에게는 그들이 죽일 수 있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까? 그들이 죽일 권세가 있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까? 영도 죽일  권세 없고, 심신도 죽일 권세 없고, 죽일 권세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행위는  죽일 권세가 있습니다. 행위는 죽일 권세가 있는데 그때에 우리의, 우리를 실상은  행위는 죽일 권세가 없고 이 영육은 죽일 권세가 없는데, 그들이 이 심신을 죽일  권세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심판에, 하나님의 영원 절대의 심판에서 죽일 수  없는 거 영원히 죽일 수 없다는 것이지 이심신은 그들이 죽일 수가 있습니다.

 자연 생명은 죽일 수가 있습니다. 자연 생명을 죽여서 그라면 내가 살아난 이거,  대속으로 살아난 이 생명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자연 생명을 그들에게 뺏긴다고  하면 자연 생명을 뺏겼습니다. 자연 생명을 생겨서 그들에게, 새로 살아난 이  생명을 뺏기지 안할라고 하다가 자연 생명을 그들에게 뺏겼어. 그들이 죽여  버렸어. 그들이 죽였으면 자연 생명이 죽은 그 생명은 어디로 갑니까? 자연  생명은 그것은 어디로 갑니까? 예? 자연 생명 그것은, 자연 생명 그것은 중생된  새생명을 뺏기지 않고 새 생명에게 속해서 새생명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들에게 그런 모든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을 당해도 요 새생명을 인해서 육체의  생명을 그들이 삼킬라고 죽일라 할 때에 죽임받았으니까 그 생명은 누구의  것으로 죽었습니까? 누구의 것으로 죽었습니까? 그 생명은 새생명의 것으로  죽었습니다. 그 생명이 죽은 것은 누구에게 속하게 됐습니까? 누구의 것이  됐습니까? 새생명의 것이 됐옵니다.

 다시는 이 죽음의 세력이 침노할 수 없는 완전 새생명화돼 버렸습니다. 이래서  죽은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거 죽은 것이, 죽은 것이 그라면 심신이 그들에게 해를 받아서 맞아서  칼에 총에 죽었으면 죽은 심신 그것이, 그것이 무엇에게 속해서 죽었으며 무슨  힘으로 죽었습니까? 새생명의 힘으로 죽었습니다. 새생명에 속해서 죽었습니다.

 새생명의 것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 죽은 심신의, 그 사람의 심신의 기능은  무슨 기능이 됐습니까? 새생명의 기능이 됐습니다. 새생명의 기능이 됐습니다.

 영생하는 기능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 육체를 고문과 고형으로  죽었으면 그 육체에 썩어질 수 있는 그것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만드는 데에  이제 이용당하고 협조를 하게 된 것이라. 이것을 가리켜서 썩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우리가 지금 새생명을 받아 가지고 살고 있는데 그들이 지금  우리의, 새생명이 살고 있는 것은 영도 살았고, 마음도 살았고, 몸도 살았고, 이  모든 정력도 다 살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그들이 자꾸 이렇게 벗으라고 해서  죽일라고 애를 써 자꾸 죽일라 할 때에 그것들이 죽이면, 그것들이 죽이면 내  살아난 영이나, 마음이나, 몸이나 영육은 그들이 벗으라고 죽일라고 할 때에 내가  벗지 안함으로 죽었으면 죽은 것은 무슨 실력으로 죽었습니까? 죽은 것은 무슨  힘으로 죽었습니까? 영생하는, 중생한 힘의 실력으로 죽었습니다. 그 힘 덩어리요.

 그 힘이기 때문에 그들이 죽여도, 죽여도 생명을 버리지 안하고 이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생명으로 산다고 그들이 죽였으니까 껍데기는 보기에 죽이는 것  같지만 이 생명을 완전 생명으로 아주 숨이 딱 끊어져 버렸습니다. 숨이  끊어졌으면 죽음의 침노를 받을 수 있는, 죽음의 침노를 받을 수 있는, 영은  그들이 침노 못 하지만 육은 침노할 수 있는데 침노를 받을 수 있는 심신이. 이제  그들이 벗으라 하는데 자꾸 '벗으라, 네가,' '안 벗을란다'. '벗으라' '안 벗을란다'  자꾸 이라다가 안 벗을라 해으로 그들이 죽여 버렸으니까 죽은 것은 안 벗고  죽었습니까 벗고 죽었습니까? 안 벗고 죽었습니다. 안 벗고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심신의, 안 벗고 죽었는데, 죽었으면 죽었지 안 벗은 그것은 무슨  능력으로 안 벗었습니까? 이 새생명의 능력으로 안 벗었습니다. 안 벗어서, 안  벗다가서 죽었습니다. 죽었으면 그 심신은, 심신은 영생하는 그 실력으로 안 죽고  영생하는 실력으로 그들에게 이 실력을 버리지 안할라 하기 때문에 이 실력  가지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실력 가지고 죽임을 당했어요. 실력 가지고 죽임을  당했으니까 죽임 당한 그 심신이 그것이 죽었습니까 이제 그들에게 침노를 받을  수 있는, 방해를 받을 수 있는, 시험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이 다시 시험할 수 없는  것으로 이제 완성을 해 버렸습니까? 완성을 해 버릴 것입니다. 다시는 그들이  침노할 수 없는 것으로 완성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다시 침노할 수가 있습니까? 그들이 다시 도전을 할 수가  있습니까? 못합니다. 다시 도전이 없는 완전 승리로 이제 끝나고 말았습니다. 왜?  나는 새생명의 영육으로 이렇게 말하고 그들은 이제 벗으라고 하고 여기는 새  생명으로 살라 하고 이래 살라고 하다가 살라고 하는 이 심신을 딱 그들이 이  산다 안 산다 이제 새생명을 내놔라 이랄 때에 안 내놓는다 내놓으라 하다  그들이 딱 우리를 더 시비할 수 없도록 딱 끊어 버렸으니까 그거 끊은 건 저거  책임입니다. 이러니까 이쪽에는 새생명의 것으로서 완성을 하는 것이고 완전히  완결했습니다. 완전히 결론을 지워 버렸어. 완전히 결정을 판결을 지워  버렸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이러니까 세상이 아무리 시험할라 한대도 우리를  돕기만 하고, 유익되게만 하고 바라다 주기만 하지 참 불쌍한 것이오. 암만 해야.

이것을 아는 것은 비웃어. 그래 손양원 목사님이 그 원수의 총칼은 웃음으로  받는다고. 웃음으로 기쁨으로. 그 노래가 있어.

 그래서 오늘은 이제 이 서머나 교회의 시간관. 생사관, 고락관, 빈부관이  예수님과 같기 때문에 '나도 그러하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이렇게  말씀했어. 요것을 바로 가져야 되지 이걸 모르면 제가 모르고는 사람이라는 건  생의 애착욕이 있습니다. 생의 애착욕이 있기 때문에 어짜든지 좋은 거  찾아갑니다. 좋은 거 찾아가고, 유익한 거 찾아가고 사는 거 찾아갑니다. 요  지식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산다는 요 지식이 확고하게 서 있으면 그 지식이  변동되기 전에는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게 죽는다는 그  지식을 가지고는 그 사람이 '내가 주를 위해 죽어야지 죽어야지.' 해도 못  죽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올바른 교리와 신조가 아니면 올바른 신앙 행위는 있을  수가 없고 올바른 신앙 행위가 없는 데는 올바른 구원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아멘) 저 뒤에 이해가 됩니까! (아멘) 저 백지 왜 저  먼데 앉아 있는지? 이거 이래도, 아, 오늘 시원하다. 오늘 더워요? 오히려 우리  농사 안 될까 싶어 겁이 나네. 요번 주간에 지금 막 더울 거라고 지금, 장마  끝에는 덥거든. 이러니까 이랬는데 오늘 시원하니까 농사가 안 될까 싶어 겁이  나는데 그래 기도를 해, 나는 그거 오기 전에 기도했어요, 나는. '서늘하게 그라면  농사가 안 될 터이니까 우리 있는 그 자리만 시원하고 다른 데는 뜨시고 이래서  농사 잘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했어. 딴데는 뭐, 볕이 났네. 볕이 났으니까  아마 더울 거라.

 볕 났으면 농사 잘되지 뭐. '할렐루야! 할겔루야! 우리 아버지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여게 해당되는 찬송 뭐 있소? 무슨 찬송이 있어? 뭐? 찬송 하나  택해 봐요. 이 서양 사람들 말이요, 서양 사람들 그거 다 예수 믿는 거는 자꾸  숭배를 해 가지고 이래도 여기 한국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찬송한 것도 더럽다고  안 해요. 그게 유치하다고. 저거가 몰라 유치하지. 이러니까 미국 거라야, 저 서양  것이 와야 그만 좋다고 다 이래 돼 버리고 이 한국에 순교자들이 찬송한 것도  손양원 목사님 지은 찬송도 안 해요. 더럽다고 안 해. 속되다고 안 해요. 참  둔갑했지 둔갑했어. 둔갑했어. 환장한 거라, 그게. 자, 이제 우리 한국 사람 지은  찬송 중에 좋은 거 하나 있어요? 뭐. 뭐라 하노? 우리 한국 사람이 지은 찬송,  이제 하나님 찬송 좋은 거 하나 하자 그 말이오. 자, 서양 사람 찬송 하지 말고.

72장은 뭐인데, 72장이 뭐입니까? (믿음으로 살자) 그거 됐다, 옳지. 그거 됐어.

뉘가? 우리 O목사님이 택했어? 잘 택했어. 사회자 자격이 있구만.

 여기 와서 늘 광고하는 것인데 어짜든지 이 말씀을 가지고 서로 생각하든지  혼자 단독이, 여게 이 자리에서 가져갈 것 뭐입니까? 이 자리에서 가져갈 것, 이  시간 우리 찬송하니까 참 영감으로 기분이 충만해집니다. 이 기분을 가져갈  것이요 사람의 많은 분위기 속에서 이런 그 분위기를 가져갈 것이요? 뭣 가져갈  것입니까? 몇 가지 가져갈라요? 손가락으로? 어디든지 너이만 들이대네. 하나  가지고 가야 돼 하나. 이 하나만 가져가요. 하나만. 목사님들도 꼭 하나만  가져가십시오. 하나 뭐? 말씀만 가져가요. 말씀만 가져가 가지고 자꾸 눈을 감고  생각하고 생각하면 자꾸 나와. 백 목사가 설교한 거는 요만하면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생각하면 막 우주같이 큰 것도 다 나와요. 이렇게 많아져요.

 이러니까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 세상도 이길 능력도 속에서 나오고, 또 모든  원수를 위해서 내 생명을 바칠 것도 거기서 나오고, 또 하나님의 모든 부요를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도 여기서 나오고, 우리 보배가 우리 속에 들었어요.

이거, 남에게 있는 거 취하는 게 쉬워요 제속에 있는 거 취하는 게 쉬워요? 자기  속에 있는거 취하는 게 좋아요. 우리 속에는 요지통이라. 그 뭐이 들었는데  그럴까? 우리 속에는 뭐이 들었지? 하나님이 계시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요.

또 진리도 같이 있어요.

 이라니까 이 하나님이, 하나님이 우리 속에 어찌 들어왔어요? 어찌 들어와요? 뭐  타고 들어왔어요? 비행기 타고 들어왔어요? 배 타고 들어왔어요?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이 뭐 타고 들어왔어요? 말씀 타고 들어왔어, 말씀 타고. 말씀만 썩  받아들이고 이라면 그 속에 말씀을 쑥 들어와 딱 훝치고 보니까 그 속에  하나님이 들어 있거든.

 이 그물을 싹 훝치고 보니까 그물에 그 안에 보니까 아주 좋은 고기 든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하나님 말씀을 딱 거머쥐고 딱 옹카넣어 놓고 이 말씀을 자꾸  차각차각 뒤벼보니까 거게 성부도 계시고, 성자도 계시고, 성령도 계시고, 영생도  있고 모든 좋은 거 다 있습니다. 이러니까 세상을 이길 능력이 있어. 거게 보니까  좋은데 뭐 세상 이것 때문에 좋은 것을 내줄 리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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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0 성도가 가질 것/ 베드로전서 1장 24절-25절/ 820516주새 선지자 2015.11.05
3229 성도가 가질 것/ 로마서 6장 1절-7절/ 820530주전 선지자 2015.11.05
3228 성도가 어떤 복있는 자인가/ 마태복음 25장 5절-13절/ 840202목새 선지자 2015.11.05
3227 성도는 세상의 소금/ 마태복음 5장 13절/ 1974. 12. 22. 제51공과 선지자 2015.11.05
3226 성도들의 할 의무/ 시편 91장 14절/ 841002화새 선지자 2015.11.05
3225 성도를 구원하는 성경말씀/ 이사야서 34장 16절-17절/ 1975. 5. 26. 제 21 공과 선지자 2015.11.05
3224 성도에 대한 주님의 요구/ 아가 4장 6절-9절/ 820829주전 선지자 2015.11.05
3223 성도에 대한 주님의 요구/ 아가 4장 6절-9절/ 1982년 36 공과 선지자 2015.11.05
3222 성도에게 주신 견고한 성읍/ 이사야 26장 1절-10절/ 1974. 2. 10. 제6 공과 선지자 2015.11.05
3221 성도의 구원생활/ 베드로전서 3장 10절-12절/ 840901토새 선지자 2015.11.05
3220 성도의 구원생활/ 야고보서 1 장 5절-8절/ 841007주후 선지자 2015.11.05
3219 성도의 기능부활/ 요한복음 5장 29절/ 880525수야 선지자 2015.11.05
» 성도의 길/ 요한계시록 2장 8절-11절/ 890809수전집회 선지자 2015.11.05
3217 성도의 길/ 야고보서 1장 15절-21절/ 1976년 19 공과 선지자 2015.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