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전도방편

 

1986. 6. 13. 금밤

 

본문:사도행전 1장 4절∼9절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벌써 이 말씀을 여러 시간 증거했습니다. 증거했는데 알아 듣는 사람이 오십 명만 있으면 그만 설교 안 하고 고다음에 딴거 합니다. 알아 듣는 사람이 내가 보기에는 없다고 봅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기막힐 소리지요? 당장이라도, 그렇게 말했지만 물으면 모릅니다.

설교를 여러분들이 들을 때에 말 구경을 시키는 설교인지, 지식을 가르치는 설교인지, 세상을 이겨서 세상에서도 축복을 받고 또 세상과 환난을 이기고 무궁한 하늘나라의 구원을 이루는 그런 설교인지 이것을 여러분들은 구별하지를 못합니다. 좀 섭섭한 소리지마는, 아닙니다.

또, 우리 총공회 산하에 있는 모든 교역자들은 복음 전하는 전도의 방편으로서는 다 음행했습니다. 다 음행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 연결이 될 거고 그거 회개하지 안하면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해도 기도가 된다면 그 기도가 좀 이상한 기도입니다.

히브리서 10장에 보면은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장성한 전도 방편을 배우고 깨닫고 쓰던 자가 게을을 부려서 힘을 쓰지 아니하고, 이것도 망령이라 하나님 앞에 벌받을 일인데 이제는 어린 아이의 전도 방편의 그거라야 된다고 그리 후퇴해서 나아가니까 여러분들이 양심이 있고 영감이 있으면은 이 영감에, 이라니까 영감이 강해지는지 영감이 떠나가는지 주님이 대면이 되는지 대면이 안 되는지 이거 알 터인데, 그걸 봐서 모두 허무하다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진리를 듣고도 도무지 교회가 부흥이 안 됩니다.

한가지라. 들으나 안 들으나 뭐, 들어 가지고 입만 종얼종얼 놀리니까 설교는 잘하지마는서 저도 믿지 않는 것을 말하니까 거짓말쟁이 아닙니까? 그것을, 집회에 따라오든지 오늘 저녁에 여기 온 것도 상품 사러 왔어. 설교 사 가지고 받아 가지고 가서 다음 주일날 자기 본 교회 가 가지고서 팔아 먹을라고, 그러면 혹 교인들이 귀하다고 댓가를 잘내고 대접도 잘하고 이랄까 싶어 그런 거 바라고, 실지로 사람을 구원하는 그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살아 보면 압니다. 살아 본 자는 압니다.

열심히 전도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는 그 방편도 성경이 가르친 그 방편, 나 혼자만 쓸 게 아니고 천 명 만 명 천 교회 만 교회가 그 방편을 써도 다 쓸 수 있고, 또 어느 한 과도기, 한 시기만 쓸 게 아니라 몇천 년 몇만 년 가도 그 방편 그대로 쓸 수 있고, 얼마든지 힘을 쓰면 어느 정도까지 힘쓰고 그 이상은 못 쓰는 거 있고 얼마든지 힘쓸 수 있고, 얼마든지 힘쓸 수 있고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고 하는 그런 방편이 있고 일시만 쓰지 계속 어느 시대나 계속적으로 쓸 수 없는 방편, 또 나만 쓰지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는 방편, 모든 사람은 쓸 수 없는 방편, 모든 사람이 다 쓰면 예수교가 과연 그 전도 방편으로 예수교가 바로 전해질란지 예수교가 죄투성이 가운데에 파묻혀서 완전히 기독교는 변질의 기독교가 될란지! 조금 시간적으로도 시야를 넓혀서, 공간적으로도 시야를 넓혀서, 종류적으로도 시야를 넓혀서 모든 것을 사고하고 계획해야 되지 그렇게 편벽되게 조부랍게 모든 것을 사고하면 그만치 그 사람은 작고 좁고 치우치고 실패하는 사람 되고 맙니다.

성경은, 물론 번역을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다 교파마다 저거 교파에 맞도록 성경을 번역합니다. 조그만한 교파는 돈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저거 교파 위주로 성경 번역을 못 하지마는 돈 좀 있는 교파는 다 저거 교파에 맞도록 성경 번역을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거는 뭐 차이가 있어 봤자 얼마 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 생활은 신구약 성경이 유일한 신앙의 법칙입니다. 성경은 그만 같다고 봐서 좋습니다. 약간 번역이 틀렸다 할지라도 전체를 읽어 보면은 뜻을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 사람마다 깨달음이 다릅니다. 그러면 성경 보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깨달음은 그 사람의 행동을 주장합니다.

여러분들이 공부하는 조직 신학이라는 그 조직 신학은 내나 그것은 원어는 도그마인데 도그마라는 뜻은 성경에 대해서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의 성경 보고 깨달은 교리와 신조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교리와 신조.

그 사람의 신앙 행위는 그 사람의 교리와 신조대로 신앙 행위를 합니다. 교리와 신조가 삐뚤어졌으면 그 사람 신앙 행위는 삐뚤어져서 구원은 절단났습니다.

교리와 신조, 깨달음이,ㅡ또 교리와 신조라 하면 또 딴건 줄 아는데,ㅡ깨달음이 삐뚤어졌으면 그 사람의 신앙 행위는 삐뚤어져서 실패합니다. 그 사람의 성경 깨달음이 바로 됐으면 반드시 그 신앙 행위가 바로 되어서 구원이 바로 되어 나갑니다.

그러면,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바로 됐으면 바른 생활로 구원 바로 되고 성경 깨달음이 삐뚤어졌으면 행위가 삐뚤어져 구원이 틀렸고, 그 사람이 성경에 대해서 깨달음이 두 가지로 깨달았으면 그 사람의 신앙 행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성경에 대해서 한 성경을 이리도 깨달아서 해석하고 이리도 깨달아서 해석합니다. 그러면, 이리 깨닫고 이리 깨닫고 두 가지로 깨달은 것을 두 다 그 사람이 긍정을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 행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의 신앙 행위는 두 갈래로 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틀립니까? 그 사람의 신앙 행위는 두 갈래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한 도리에 대해서 두 가지로 깨달았으면 두 갈래의 신앙 행위를 하는데 그 사람이 신앙 행위 할 때에 두 갈래길 가운데에 행하기에 쉬운 길 가겠습니까 어려운 길 가겠습니까? 그 사람은 어떤 길 가겠습니까? 인간의 본능이 뭐입니까? 쉬운 길 갑니다. 언제든지 쉬운 길 갑니다. 깨달음 이 깨달음대로 이렇게 나가다가 어려움 당하면, 어려움이 오면은 그때는 또 쉬운 이것 또 나갑니다. 이 길로 나갑니다. 또 이 길로 나가다가 어려움 되면은 또 이 길로 바꿔 나갑니다.

그럴 거 아니겠습니까? 깨달음이 둘이면은 그 사람 신앙 행위는 반드시 두 가지라고 이거는 과학적입니다. 이거는 과학적이요 이거는 필연적이요 절대적이오.

이러기 때문에, 왜?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은 시종 일관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뜨문뜨문 있고 시기와 환경을 따라서 신앙 생활이 갈 지자 걸음으로 이리 하다가 이리 하다가 갈 지자 걸음으로 신앙 걸음이 일관되지 안하고 갈 지자 걸음으로, 갈 지 자는 이래 쓰는 게 갈 지자요. 이랬다가 이랬다가 이라면 이게 갈 지자라 말이오. 갈 지자 걸음으로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고 시종 일관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아주 드문드문 합니다.

그러면, 그 시대가 지내가고 난 다음에는 시비가 납니다. 시종 일관의 신앙 생활한 사람들 있고 갈 지자 걸음으로 신앙 생활한 사람들도 있고 이런데 갈 지자 걸음으로 신앙 생활한 사람들은 숫자가 많고 시종 일관으로 신앙 생활한 사람들은 숫자가 적습니다.

적어도, 그 역경의 환난의 시기가 딱 끝나고 나면은 누가 머리를 듭니까? 일관한 사람들이 머리를 듭니까 갈지자 걸음으로 간 사람들이 머리를 듭니까? 어떻습니까? 이런 거 모르면 신앙 생활 못 해. 뭘하고 신앙 생활하는 건데? 그저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 하는 그거는 기본구원인데 예배당에 안 와도 좋아요. 예배당에 와야 천국간다 하는 그거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 말이야. 택한 사람이면 천국 다 가요.

또 택한 사람이 마지막 죽을 때라도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믿고 죽어요.

환난이 딱 중단되면 어느 것이 세력을 가집니까? 일관 생활한 것이 세력을 가집니까 갈 지자 걸음으로 이렇게 한 것이 신앙 세력을 가집니까 어느 겁니까? 환난이 딱 중단되면 갈 지자 걸음 걸은 것이 세도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손들어 봅시다. 이거 판단 못 해. 일관 신앙 생활한 사람들이 세도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이거요. 몰라. 이거라, 이거 이거. 해방 직후에는 일관 신앙 생활한 사람들이 그때 이거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환난이 차차차차 시간이 지나감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 환난을 잊어버리는 데 따라서, 잊어버리는 데 따라서 세도를 누가 가집니까? 다수인 갈 지자 걸음 걸은 그 사람들이 세도를 가지게 됩니다. 숫자가 많으니까. 다수 가결로 다수를 따라가는 종다수 가결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세도를 얻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또 타락합니다.

타락하면 하나님께서 또 환난을 줘 가지고서, 환난을 줘 가지고서, 신앙 시종 일관되는 사람들로 교회 종자를 삼고 갈 지자 걸음한 걸 완전히 다 박멸시켜 버립니다. 이러니까 환난이 지내가고 나면은 개혁이 됩니다. 시종 일관의 사람들이 승리를 해서 그것 표본으로 삼아 가지고서 개혁이 됩니다.

개혁이 돼 가지고서 또 그 환난이 차차차차 멀어져서 사람들이 그 환난을 잊어 버리게 되면은 갈 지자 걸음 걸은 사람들이 또 득세를 해 가지고서, 다수가 세력을 얻어 가지고서 그것이 세력을 가지게 됩니다. 가지면 교회는 또 부패됩니다. 부패하면 또 하나님은 정화할라고 또 환난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사 아닙니까? 그러면, 여러분들, 여게서 환난 때든지 평안한 때든지 언제든지 신앙이 한결 같이 시종 일관의 신앙 생활을 하고 싶은 사람들 손 들어 봅시다. 다 하고 싶네요. 녜, 우리가 다 하고 싶습니다.

시종 일관의 신앙 생활을 할라고 하면은 그 원인이 어데 있습니까? 시종 일관의 신앙 생활의 원인이 어데 있는지, 갈 지자 신앙 생활을 하는 그 원인이 어데 있는지, 그 원인이 어데 있습니까? 그 원인이 어데 있습니까? 깨달음에 있다. 녜, 깨달음에 있다. 녜, 깨달음에 있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면, 깨달음이 이래도 되고 이래도 되고 깨달음이 둘이면 그 사람 신앙 생활이 일관되겠습니까 깨달음이 하나면 일관되겠습니까? 하나면 일관되지요. 이거 다 알 수 있는 일 아니요?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 깨달음이 성경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도 하고 이렇게도 하는데, 그렇게 백이면 백이 다 해석을 성경 깨달음이 각각 다르나 거게서 올바른 깨달음은 둘이겠습니까 셋이겠습니까 열이겠습니까 하나겠습니까? 성경에 대해서 올바른 깨달음요 하나라는 것을 인정합니까? 그러면 하나라는 것 그것을 잡고 찾고 싶습니까? 여게서부터 고쳐야 됩니다.

이거 신앙 생활이 뭐인지 여게 대해서 이런 데 대해서는 관심도 안 가집니다.

그것 뭐 암만 열심 내 봤자 소용 없소. 목숨 내 놔 봤자 그까짓 거 가치 없습니다. 신앙 가치는 예수님의 피와 영감과 진리에 있는 것이지 인적 요소에 충성이나 순교나 순생이나 어떤 인내나 열심이라 할지라도 그까짓 것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인간 행동의 가치는 피를 그 근거 두고서 영감을 근거 두고 진리를 근거 두고 거게 근거를 두고 거게 몇 닢 푼치나 섞여 있느냐 얼마나 섞여 있느냐 얼마나 연결이 되어 있느냐 관계가 없느냐 거게다가 근거해 가지고 가치를 평하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에 가치를 평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이 학자들이 이렇게도 깨닫고 이렇게도 깨달았다. 이것도 정통이요 이것도 정통이다. 이렇게 깨달아도 되고 이렇게 깨달아도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거게 대해서 바로 깨달음이 둘이라 말 아닙니까? 아닙니까? 둘이란 말 아니요? 둘이면 그 사람 신앙 행위는 일관이 되겠습니까 둘이 되겠습니까? 둘이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신앙 행위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고난 받는 게 좋다고 해 가지고서, 두 길이니까. 이 길로 가다가, 이 길로 가기는 쉽고 이 길로 가기는 어려우면 어려운 길을 택해서 가는 사람들 있겠습니다. 어려운 길을 택해서 가는 길이 있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본능적으로 쉬운 길을 택해서 가는 사람이 있겠습니다.

그러면, 쉬운 길을 택해 가는 것보다 어려운 길 택해 가는 게 낫습니까 어려운 길을 택해 가는 것보다 쉬운 길을 택해 가는 게 낫습니까 어떤 게 낫습니까? 어려운 길 택해 가는 것이 그것이 여러분들은 좋다고 봅니까 그 둘 중에는 좋다고 봅니까 어려운 길을 택해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까? 어려운 길을 택해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고 보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러면 쉬운 길을 택해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쉬운 길 택해 가는게 낫지요. 그렇지 안해요? 어려운 길 택해 가는 거는 고행주의요. 쉬운 길을 택해 가는 것은 생의 본능입니다.

그러면, 이 길을 가야 되겠소 저 길을 가야 되겠소? 그 사람이 현실을 당했을 때에 깨달은 교리는 둘인데 행위는 하나로 가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절대 못 가집니까? 혹 가질 수 있습니까? 깨달음이 둘이면 그 사람은 일관된 행위는 가지지 못합니다. 둘이면 이걸 부인할 때도 있고 이걸 부인할 때도 있고 그 사람은 정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 깨달은 대로 행할라고 하면은, 그 깨달음 그것에 순종을 할라고 하면은 어데까지 해야 순종이 됩니까? 쉽게 순종할 때도 있지마는서도 생명까지 다 내놔야 순종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깨달음은, 우리의 깨달음은 생명보다 중량이 무거워야 됩니까 가벼워야 됩니까? 무거워야 합니다. 생명보다 중량이 가벼우면 반드시 생명을 취해서 깨달음을 버리게 됩니다.

생명보다 그 깨달음을 중하게 여기는데, 그러면 그 깨달음을 한 진리에서 이렇게도 깨닫고 저렇게도 깨닫고 두 가지나 세 가지로 그 사람이 깨닫는, 두 가지나 세 가지로 깨닫는 그 깨달음을 제 깨달음으로 삼아서 생명까지 거게다가 투자할 만한 그만한 권위적인 깨달음으로 가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어. 좀 알고 믿어야 돼.

이러기 때문에,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이렇게 말씀했는데 우리는, 진실은 하나입니다. 거룩은 수많은 사이비한 것들이 가득 찬 가운데에서 거게 참이 있는가 없는가 찾아서 수많은 것 가운데에서 참이 하나도 없는 수도 있고 참이 있으면 몇 개나 있습니까? 하나는 꼭 있을 수 있습니까 없을 수도 있습니까? 수많은 복잡한 것들 가운데에 참이 반드시 하나는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수많은 복잡한 것들 가운데에 참이 반드시 하나는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것도 모릅니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요.

있으면 얼마나 있습니까? 하나 있지요.

그러면, 우리가 깨달음은 그 깨달은 대로 우리가 복종해서 살아야 되는 것인데 깨닫는 대로 복종하는 데 있어서 쉬울 때는 쉽지마는서도 쉬울 때에 그 깨달음대로 복종생활 하다가, 십 년 복종생활 하다가 이십 년 복종생활 하다가 그 복종생활 함으로 심히 어려움을 닥쳐서 생명을 내놓지 안하면은 복종생활 할 수 없는 그런 어려운 때에 그 사람이 생명 내놓지 안하면은 복종생활 할 수 없는 그런 어려운 때에 그 사람이 생명 내놓기 싫어서 복종생활을 못 했으면 이십 년 신앙 생활 한 것이 그대로 있습니까 다 완전히 변질로서 수포로 돌아갔습니까? 돌아갔습니까 그대로 있습니까? 돌아갔습니다. 이기고 이기고 했지마는서도 하다가는 마지막에 결말 지었을 때에, 결말을 지을 때에 졌기 때문에 나머지기 이긴 것도 다 헛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깨달은 그 교리와 신조대로 순종 생활을 할라고 하면은 어데까지를 각오를 하고 어데까지 거게다가 투자를 할라고 계산해야 되겠습니까? 망대를 지을 때에 앉아서 짓기에 족할란지 안 할란지 계산해 보라 했는데 어데까지 계산해야 됩니까 우리가 교리와 신조를 깨달을 때에 그 교리와 신조에 대해서 어데까지 자기는 투자하기로 계산을 해야 됩니까? 땀 흘리기까지? 조금 손해보기까지? 생명 바치기까지? 어뎁니까? 신앙 생활은 어느 교리든지, 어느 교리든지 생명까지 투자할 계산을 대야 됩니다. 안 대면 헛일입니다.

그러면, 교리 선택에 대해서, 교리 선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우리가 가치로 삼아야 되겠습니까? 교리를 선택할 때에 그 교리를 어느 정도의 가치로 삼아야 됩니까? 교리를 선택할 때에 어느 정도로 그 교리에 가치를 삼아야 됩니까? 돈만침 가치로 삼아야 됩니까? 자기 가족만침 가치로 삼아야 됩니까? 자기 몸뚱이만침 가치로 삼아야 됩니까? 자기 생명보다 더 가치로 삼아야 됩니까? 어떻습니까? 생명보다 더 가치를 삼아야 생명을 주고라도 교리와 신조를 뺏기지 안하지.

그러면, 생명보다 내게 있어서 더 귀중한 교리와 신조인데 그 교리와 신조를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으로서 그 깨달음을 두 가지 세 가지 이렇게도 저렇게도, 이렇게 두 가지 세 가지 가지는 자는 그자는 생명보다 자기에게 더 귀중한 가치로 삼는 자입니까 안 삼는 자입니까? 예? 안 삼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 목사님이 어떤 학자의 그이의 저서를 보고 그 학자가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한다 이래저래 말해 놓고 마지막에 ‘너는 어떻게 생각하노?’ `이래 말하는 것도 맞고 저래 말하는 것도 맞고 이리저리 맞고 다 맞고 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그 학자를 말하기를 ‘그는 생명이 없는 사람이요 책보따리다. 죽은 자다. 생명은 없다.’ 그말이 과혹한 과평입니까 정평입니까? 정평입니까 과평입니까? 정평이오. 생명이 뭐인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게 뭐인지를 몰라. 이러기 때문에 조석으로 변해 나가.

그러니까, 우리가 깨달음이라는 깨달음은 그 깨달음에게 내 소유도 몸도 생명도 내 가정도 내 지위도 권세도 명예도 전부 그 깨달음에다가 다 투자해서 그 깨달음 하나만을 내가 보수할 자이기 때문에 내가 깨달음에 중량의 가치는 내 소유, 몸, 생명 이보다 내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이요 내가 여게다가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투자할 것인데, 투자할 것인데 아무나따나 택해요? 아무나따나 택할수 있습니까? 아무나따나 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돈만 자기 재산에 만일 일억짜리라면은 그 사람이 돈만 몇천만 원이 손해가고 유익되고 한다고 해도 신중히 선택할 터인데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이 다 헛되냐 이걸 다 허비하느냐 이것이 참으로 가치있게 쓰여지느냐 이 중대한 그 방편인데,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을 어떻게 지금 써야 되느냐 하는 이 중대한 방편인데 그 교리와 신조를 아무나따나 선택할 수 있습니까? 아무나따나 선택하는 사람은 그 선택할 때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거게다가 투자하기로 생각을 하고 선택하는 자입니까 교리와 신조는 교리와 신조대로 나는 나대로 나와 그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선택하는 것입니까 정말로 자기의 모든 것을 거게다가서 바칠 그 교리와 신조로 선택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은 교리와 신조는 신조대로 자기는 자기대로 상관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나따나 선택하지 이렇게 이 중대한 것으로 느끼고 깨달으면 아무나따나 그렇게 선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선택할 때에 그것을 생명보다 귀중한 가치있는 교리와 신조로, 자기 생명보다 그 교리와 신조가 더 가치있는 고귀한 것으로 자기가 인정하고 정하지 안한 것이라면 그건 다 거짓부리입니다. 거짓부리요. 요렇게 정해 놔도 현실을 닥치면 안 되는데 미리부터 이렇게 정하지 않은 자가 현실을 닥칠 때에 뭐이 됩니까?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왜정 말년에, 조선 교회로 있을 때에 그렇게 신자가 많았지마는서도 동방 요배니 신사 참배니 그것을 안 하고 거부하고 신앙 일관으로 제이계명을 지킨 사람들이 숫자가 극히 적었습니다.

언제 신고함에 보니까 또 써 넣었어. 선천 고을에 있는 그 출생하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선천 고을에서는 신사 참배 이긴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라니까 섭섭해서 ‘또 아마 목사님이 잘 몰라 그렇지요’ 나는 내가 뭐 알겠소? 모르지마는서도 그 지방에 유력한 목사로 있던 전칠봉 목사님은 그때 거게서도 다 유력한 목사로 지냈던 분이요, 또 그분 동생, 전칠봉 목사님의 동생이 또 선천서 두 분이 왔는데 그 두 분에 내가 직접 들었고 거게 나왔는 목사님들에게는 많이 들었고, 물론 고난이야 많이 받았지요. 고난이야 많이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요. 이렇지만 끝까지 신사 참배를 안 하고 이긴 사람은 없었다 그말이오.

일관된 신앙의 사람이 되고저 하면 일관된 신조와 교리를 자기가 가져야 됩니다.

두 가지로 가지면 반드시 그 행위는 두 가지로 기회를 따라서 바꾸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리 신조는 내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 교리와 신조를 자기가 확정을 지워야 됩니다.

이 교리 신조가 귀하다 할 게 아니라 내 생명보다 귀해. 왜? 내 생명을 바쳐서 그것을 지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생명보다 높이 평가하고 또 내 생명을 투자할, 생명을 투자할 것이기 때문에 벌로 알고 아무나따나 투자하면 다 개죽음하지 않습니까? 이만큼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귀중한 줄을 알고 우리가 깨달음을 확정을 해야 됩니다. 아무나따나 정할 게 아니오.

그러기 때문에,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은 이런 깨달음 저런 깨달음 두 깨달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하나가 되기까지는 평생 난제를 삼아 가지고 확실히 깨달아서 ‘요 깨달음에 내 생명 바칠 수 있다. 요 깨달음은 내 생명 바칠 수 있다. 요 깨달음에는 내 생명 바쳐도 손해가 없다. 몸을 바쳐도 손해가 없다.’ 요런 깨달음으로 다 가지고 있지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하는 그런 깨달음, 벌써 그 사람의 설교 들어 보면 압니다. 그 사람의 신앙 행위를 보면 아요. 저거는 앞으로 뭐 될 것이다.

여러분들,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축복을 했는데. 겉어머리는 축복했다고 하지마는서도 처음에는 말할 때에 축복이라고 하지 안하고 앞으로 너거들이 어떤 그 형편이 다가올 거다 하는 것을 예언으로 말했습니다. 그거 보면 열 두 형제가 야곱이 살아 있을 때까지의 행동 고 행동의 이콜 은 요거다 그렇게 말해 놓은 겁니다. 그 다른 거 아니오.

이러기 때문에, 벌써 지금은 환난 때를 다 각각 제 길을 차지하고 있고 자기를 정해 놓고 있고 또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도 무궁세계도 다 어떤 것이라 하는 것을 다 정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칠라면 오늘에 고쳐야 되지 오늘 시기를 지나면 못 고칩니다.

이러니까, 한 교리와 신조라도 똑똑히 알아야 되겠소 몰라야 되겠소? 똑똑히 알고는 그다음에 뭐입니까? 한 교리라도 똑똑히 알고, 그러면 이렇게 아는 이 깨달음에, 이 교리에 나와 내 소유 내 일생을 이 교리에 바칠 만한 교리냐, 바칠 만한 교리냐? 지나가는 말이니까 거게 대해서 뭐 내가 돈 몇만 원이라도 뭐 바칠 만한 그런 거는 아니다. 그저 그렇게 안다 저렇게 안다, 안다는 것뿐이지. 이렇게 하면 그것이 벌써 멸망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하지 안하면은 우리 건설구원은 안 되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했습니다. 주님의 명령에 다 투자하지 안하면 예수님화 우리의 성화구원은 안된다 그말입니다. 그거 딴 해석이 있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한 교리와 신조는 내가 내 소유와 생명을 다 바칠 길이기 때문에, 바칠 길이요 바칠 방편이기 때문에 그 방편을 얼마나 신중히 생각하고 신중히 선택해야 되겠습니까? 뭣보다 신중히 보관하고 신중히 선택해야 되겠습니까 뭣보다 신중히 선택해야 되지요? 뭣보다? 생명보다 신중히 선택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바로 듣지 안하기 때문에 항상 배워야 헛일이오. 다 거짓부리라.

그러면 신조와 교리를 구경을 해야 되겠소 신조와 교리를 바로 알아야 되겠소 신조와 교리를 알고 난 다음에는 과연 내 전부를 바칠 것이기 때문에 이게 바르냐 옳으냐, 생명보다, 생명을 보호하는 것보다 다 그 교리 신조의 선택에 대해서 자기 생명에 대한 주력보다도 교리와 신조 선택에다가, 둘이 있으면 어데다 주력을 더 해야 되겠습니까? 양성원 학생 한번 대답해 봐요? 생명 보호에 주력을 더 해야 되겠소 교리 신조 선택에다가 주력을 더 해야 되겠소? 어째야 되겠소? 교리 신조 선택을 자기 생명 보호보다도 더 신중히 중요하게 해야 되는 것이 필연한 일 아닙니까? 이 말이 틀렸습니까? 이 말을 벗어나서 구원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어.

이런데, 우리는 얄궂은 걸 배웠어요. 한번 따라합시다. 아멘! 다 해 봐요. 아멘! 아멘! 아멘! 맞으면 아멘 하십시요, 이제. 우리가 이거 이제까지 나온 거 더러운 거 다 내버려야 돼. 맞으면 ‘아멘’ 틀렸으면 `틀렸소' 설교하다가 틀렸으면 ‘틀렸소’ 맞으면 `아멘' 모르면 이래 가지고 있다가 `모르겠는데' ‘틀렸소’ `아멘' 이래서 우리가 이 중요한, 생명보다 중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따나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육의 생명이 이 교리와 신조에서 망하고 흥하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생명보다 귀한 것이 신조와 교리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한 번하고 두 번하면 안 되기 때문에 설교는 한 번만 해야 되지 두 번 하면 안 된다. 재독하면 안 된다. 한 번만 하고 두 번하면 안 된다는 그 사상이 오늘밤에 말하는 대로의 이 교리와 신조는 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투자할 그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은 내 소유와 몸과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이니 이 귀중하게 그 깨달음을 바로 신중히 선택할라고 하는 것입니까 말을 그 교리와 신조를 구경하는 말입니까? 그말 한 마디에서 다 알 수 있어. 몰라요? 그래도 몰라? 귀가 없기 때문에 몰라요. 성령의 귀가 없으니까 몰라.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깨닫든지 배우든지 할때에, 이 성경을 자기가 깨닫든지 배워서 알든지 하는 것은 이것이 교리와 신조인데, 교리라 말은 깨달은 이치라 말이오. 예수 믿는 이치라 말이오. 신조라 말은 자기가 믿는 모든 조문이라 그말이오.

이런데, 그러면 이 깨달음을 우리가 어느 정도, 그 깨달음을 어느 정도 확고히 깨달아야 됩니까, 어느 정도 깨달아야 순교할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 깨달아야 순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깨달음을 자기의 육의 생명보다 귀중히 여겨야 생명 바칠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에 생명 바칠 수 있습니다. 깨달음보다 생명이 귀중하면 생명을 그 깨달음에 바치지 안하고 깨달음을 버리고 생명을 취할 것입니다. 그런 거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면, 깨달음을 생명보다 귀중히 여겨야 되는 것이니 귀중히 여길라고 하면은 그 깨달음을 자기가 ‘이 깨달음이 확실하냐’ `바르냐 틀리냐' 하는, 이 깨달음이 바르냐 이 깨달음이 틀렸느냐 이 가르침이 바르냐 틀렸느냐’ 내가 이 배워서 내가 지식으로 가지는 것이 ‘바르냐 틀렸느냐’ 하는, 바르고 틀린 거게 대해서 신중성을 가지기를 우리가 어느 정도 신중성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자기 생명이 죽느냐 사느냐 그 생명이 죽느냐 사느냐 그것보다 좀 신중성을 가볍게 가져야 됩니까 그보다 중량을 더 무겁게 가져야 됩니까? 예? 어째야 됩니까? 무겁게 가져야 되지. 이거 믿습니까? 이해가 됩니까? 그러면, 우리가 깨달을 때에 그것을, 가르치니까, 가르치면 ‘뭐 백 목사가 가르치니까 바로 가르쳤겠지’ 하고서 무조건 따라온다는 그것이 틀렸습니다.

성경 보고 깨닫고 깨닫고 ‘요는 틀림없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교리와 신조든지 ‘요게는 내 생명을 바칠 만하다. 소유도 몸도 바칠 만하다.’ 내 소유와 몸도 요 깨달음에 복종, 요 깨달은 요대로에 행하는 데는 소유와 몸과 생명을 아낌 없이 지체하지 안하고 주저하지 안하고 바칠 수 있도록 요렇게 자기가 교리와 신조는 다 자기의 전부를 투자할 수 있는 고 확신있는 고 깨달음과 신조를 가져야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뭐 이래도 해석하고 저래도 해석한다 이렇게만 해 가지고 안 됩니다.

이것 뭐 얼마나, 배울라면 얼마나, 심령이 밝으면 쉬운데 어두워 놓으니까 어떻게 가르쳐야 될란지. 가르쳐야 모르니까.

여게 4절에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요 성구의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요것도 요 깨달음도 소유와 몸과 생명을 자기는 바쳐야 될 그런 깨달음입니다. 소유와 몸과 생명보다 더 가치있는 귀중한 깨달음이 요 속에 있습니다. 내 생명보다 귀한 깨달음이 여기 있기 때문에 아무나따나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래 말한다고 예 저래 말한다고 예 해서 내가 그 깨달음을 내 깨달음으로 그렇게 내가 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게다가 생명을 바쳐야 할 이 깨달음인데 아무나따나 되겠습니까? 생명 바칠 깨달음인 것을 알고 이 깨달음을 다룰 때에 생명보다 귀중히 더 가치 있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이 해석을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때에 큰 환난이 있었는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들이 죽였고, 또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다고 하셨고, 또 그뒤에 부활을 한 것을 저희들이 알고 이라기 때문에 이 예수교가 살면 로마 정권도 절단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전멸이 되고 유대교도 다 절단나고 서기관 제사장 바리새 교인 다, 저들이 죽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살아나면 이제 큰일 나는데 살아났기는 살아났다고 벌써 군인들이 증거했고, 증거했으니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을 완전히 전멸을 해야 된다 하는 그런 지금 박해입니다.

그러면, 정객들이 다, 정객들과 유대 나라에 있는 유대교 종교인들과 군인들과 그외에 딴 사람 있습니까? 이 전체가 똘똘 뭉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일라 하는 그런 어려움입니다. 그 어려움입니다. 그 어려움을 피해서 그 어려움을 도피하지 말고 그 어려움 속에 있으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려움 피하지 마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마라, 어려움을 피하지 말아라, 그라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몇 날이 못 되면 성령 세례 받는다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그러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활로 인한 그 환난입니다. 예수님의 사활로 인한 환난입니다. 그러면 사활로 인한 환난인데 이 사활로 인한 환난은 예수님의 사활을, 사활이라면은 죽을 사 자 살 활 자, 죽고 사신 걸 말합니다. 사활이라 말은 한문 글자로 말하는데 그거 우리말 됐어. 그뭐 그렇게 써야 되지 어짤 거라? 예수님의 죽고 사심을 인해서 일어난 환난인데 그 환난은 어떤 사람들에게 한해서 환난입니까? 예수님의 이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의 이 소망에 대해서 사활하신 예수님의 그 공로와 그 구속을 배반하는 사람들에게 오는 환난입니까 배반치 안하고 예수님의 사활의 이 공로를 자기 구원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대한 환난입니까 어떤 환난입니까? 그것은 확실합니까? 고 해석은 삐뚤어졌습니까, 달리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까? 생명을 바칠 만침 정확합니까? 그러면, 그 환난과 오늘 우리에게 상관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때 역사로 지나간 그 환난이 우리와 상관이 없으면, 우리와 상관이 없으면 이 성경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그 환난을 떠나지 안하고 성령 세례 받은 것이 오늘 우리와의 연관성은 어떠합니까? 어떻게 해석합니까? 이게 해석입니다, 이거.

그것은 역사의 배경을 말한 것이고, 아까 말한 것은 역사의 배경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여게 대해서 깨달음은 이게 깨달음인데, 그러면 그들이 예루살렘의 그 환난을 피하지 안하고 그 자리 있으면서, 있으면 성령 세례 받는다고 했는데 그 자리 있어도 예수의 사활의 공로만 집어 던져 버리고 ‘나는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와 상관 없다’ 해 버리면 아무 일 없어. 다 저거 편이라고 환영을 합니다.

아무 환난될 게 없습니다. 사활의 공로를 저희 공로로 믿는 그 자에게 한해서만, 이 공로를 내놓지 안한 자에게 한해서만 환난이 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게 이 적응이 됩니까? 이게 깨달음이요 해석입니다.

그러면 내가 거기 대해 해석을 하겠습니다. 내가 깨달음을 말하겠습니다.

오늘에 예수님의 이 세 가지 대속의 공로를 자기 공로로 삼아, 자기 공로로 삼아 자신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자기는 완전히 죽은 자요 살아 있는 것은 예수님의 것으로 알아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해 가지고서 하나님을 향하여 새사람으로 사는, 예수님으로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살고 벗지 아니할라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아니할라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그대로 살라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연합해서 하늘의 산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 요렇게 사는 생활을 할라고 하면은 오늘 땅 위에서 예루살렘에 그들이 고난받는 거와 같은 그런 고난을 오늘도 우리에게 그런 고난이 닥치게 된다. 그들이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제것 삼고 소망을 삼고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배반치 아니함을 인해서 그들에게 환난이 왔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배반치 안할라고 하면은 요런 환난이 온다. 그 해석이 틀렸습니까 맞습니까? 요 해석 외에 딴 해석이 있습니까? 요 해석이, 여러분들이 그냥 맞다 할 게 아니라 요 해석은 과연 그때에 그분들이 고 환난당한 고것이나 고 도리요 진리요 또 요것은 우리에게 계약하신 계약이요 예언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 안하고 대속을 내것으로 삼고 예수님의 부활을 내 부활로 삼아서 내가 예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향하여서 새사람으로 사는 요 생활을 내가 할라고 하면은 우리에게는 온 세상하고는 대적이 돼서 온 세상과 나는 대적이 되는 요 환난은 우리에게 반드시 온다.

그러면, 그들의 환난이나, 그들이 예수를 벗지 안해서 당하는 환난이나 오늘 우리가 예수를 벗지 안하므로 당하는 환난이나 꼭 같은 환난이다. 동일한 환난으로 그렇게 해석하는 그 해석이 생명을 바칠 만침 정확합니까? (아멘!) 요렇게 믿습니까? (아멘!) 생명을 바칠 만침 정확합니까? (아멘!)

그러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 이로 인해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내것 삼아 가지고서 내가 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요 삶으로 말미암아, 요 생활을 내어 주지 안할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요 생활을 할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오는 환난, 요 자기라는 사람과 요 사상과 생애를 벗어 버리지 안할라고 함으로 오는 환난 고 환난과 그 환난이 꼭 같은 환난으로 나는 해석을 했는데 요 해석을 여러분들이 생명을 바칠 만치 정확한 해석이다 요렇게 믿으면, 그러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안하고 고 환난 속에 있으면 며칠이나 가면은 성령 세례 받는다 했습니까? 몇 날 안 돼서 성령 세례 받는다 했습니다.

그러면, 고 환난 가운데서도 피하지 안하고 고대로,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자기 공로로 알고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믿음으로 인해서 오는 환난을 당할 때에 그 환난에서 도피하지 안하고 기피하지 안하고 그 환난에서 배신하지 안하고 고 환난 속에서, 환난 속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아라. 환난 속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아라. 몇 날이 못 되어 성령 세례 받는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 성령이 너거에게 와서 세례를 준다.

그러면 세례는, 세례는 우리가 물로 세례 받을 때에 그 세례나 성령 세례나 종류는 꼭 같습니다. 하나는 가견적 세례요 하나는 불가견적 세례요, 하나는 인간이 베푸는 세례요 하나는 성령이 베푸는 세례지, 세례의 종류는 꼭 같고 권능은 다릅니다. 성령 세례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줍니다.

여게를 떠나지 안하고 있으면은 몇 날이 못 돼서 성령으로 세례를 너희들이 받으리라.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면, 성령으로 세례받은 이 세례는 뭐입니까? 세례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내것 삼음으로 나는 죽었고, 옛사람으로 살던 나는 죽고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온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으로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의 지체로, 예수님의 몸으로, 예수님의 종으로,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주의 것으로, 새사람으로 살아 죽이고 살리는 것이 세례라고 해석하는 해석을 여러분들이 인정이 됩니까 안 됩니까? 여게 세례는 죽고 사는 그 식을 세례로 표시한, 나는 이렇게 깨닫고 해석하는데 이 해석이 여러분들에게는 인정이 됩니까? 생명 내놓을 만치 인정이 됩니까? 그래 인정 안 되면 아무 소용 없어. 생명 내놓을 만치 인정돼야지.

‘세례를 받으리라’ 그러면, 성령으로 세례 받으니까 성령이 오셔 가지고서 옛사람을 죽일 자를 죽이고,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 가지고서 죽일 자를 죽이고 살릴 자를 살려서 죽고 사는 이것을 초자연의 전능의 능력의 이 성령이 오셔 가지고서 이렇게 우리에게 사활하는 이 능력이 와 가지고 우리를 사활시키는, 죽이고 살리는 이 일을 하신다. 이것이 성령 세례다.

이렇게 성령이 와 가지고서 우리에게 옛사람은 죽이고 새사람으로 살리는 이 능력이 전능의 능력이 와 가지고 내게 와 가지고서 역사하시는, 순전히 객관 역사가 와 가지고 내게 와 가지고 주관 속에 들어와서 이 죽이고 살리는 이 사활의 역사를 하시는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으로 세례 받는다, 네가 성령이 와 가지고서 죽일 자를 죽이고 살릴 자를 살려 주심을 네가 받는다 하는 이것으로서 해석하는데 이 해석이 여러분들에게 이해가 됩니까? (아멘!) 됩니까? (아멘!) 생명 내놓을 만치 확실히 믿어집니까? (아멘!) 이러면, 이 성령 세례 받는 준비가 뭐입니까? 성령 세례를 받는데 주님이 주의시킨 준비가 뭣 뭣입니까? 몇 가지입니까? 하나는 뭐입니까? 떠나지 말고, 또?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또? 주님이 분부하신 것.

주님이 분부하신 것과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것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믿어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이 두 가지는 믿어야 되고, 한 가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그 어려움 속에서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어려움을 자기가 겪고 있어야 돼.

어려움이 와도, 뭣 때문에 어려움 받습니까?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 때문에 어려움 받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버리지 안할라고 함으로 어려움 받습니다.

아무리 어려움 받아도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를 내가 버리지 안하고 사활의 공로를 내가 입고 벗지 아니할라고 함으로 환난 와도 입고 벗지 안하는 이 환난인데 환난이 와도 입고 벗지 안하면 뭣 옵니까? 뭣 옵니까? 성령 옵니다.

성령 오면 뭣합니까? 죽이고 살립니다. 이거 외에는 안 돼.

그러면, 성령 세례를 받기 위해서 이 환난이 있는 것입니까? 환난으로 인해서 성령 세례가 있는 것입니까? 어느 겁니까? 뭣 때문에 뭣이 있습니까? 뭣이 근거입니까? 성령 세례가 이것이 근거입니까? 이 환난이 근거입니까? 성령 세례가 원인이고 근거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손 놓읍시다. 이 환난이 원인이요 근거라고 믿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없어? 나는 이거야. 여러분들하고 나하고 달라? 세례가 그까짓 거 뭐이야? 세례가 그까짓 거 뭐이라?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없으면 세례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이것이 근거입니다. 알겠습니까? 내가 깨달음이 또 틀렸습니까 맞습니까? 원인이 이 환난이 원인입니까 성령 세례가 원인입니까? 어느 게 주체성입니까? 이 환난이 주체성입니까 이 성령 세례가 주체성입니까? 뭐입니까? 어느 게 원인이며 어느 게 결과입니까? 환난이 결과요 성령 세례가 결과요? 뭐입니까? 여러분들은 성령 세례가 원인이요 성령 세례가 중요한 근거라고 말했고 나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대속을 버리지 안하고 대속을 입고 놓지 안할라고 하기 때문에 오는 그 환난 그것이 원인이라고 말했는데 나는 혼자 이래 손 들고 여러분들은 이쪽으로 들었는데 누구의 깨달음이 옳습니까? 어느 깨달음을 따라갈랍니까? 어느 게 옳소? 여러분들 깨달음이 옳아요? 성령 세례가 기초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환난을 당한 고것이 기초입니까 어느 게 기초입니까? 어느 게 기초요? 이것도 확정지어아 돼. 아무나따나가 아니고 생명 내놓는 건데. 생명 내놓고 안 하면 안 돼. 생명보다 귀한 교리인데. 신조인데. 아무나따나 뭐 이래도 저래도 되는 줄 알아요? 나는 그렇게 깨닫고 믿어요. 예수님의 대속의 사활의 이 공로를 내가 입고 벗지 아니하고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모든 환난, 환난이 와도 이 공로를 이 공로를 벗지 안하고 환난이 오기까지 이 공로를 입었고, 환난이 와도 벗지 않는 이 공로를 입고 있는 고것이 성령 세례 받는 원인입니다! 원인입니다. 고게 기초입니다. 고것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 세례가 안 옵니다. 이치가 어떻습니까? 말미암지 않고도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제 어느 게 원인이냐 어느 게 근거냐 할 때에 성령 세례가 원인이요 근거라고 하는 그 깨달음은 잘못됐습니까 바로 됐습니까? 바로 됐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안 든 사람도 더러 있네. 잘못 됐으면 좋은 것 깨달아요. 잘못 됐어요.

요렇게 똑똑히 알고, 왜? 우리가 생명을 바칠 이 교리와 신조인데 아무나따나 취택해? 아무나따나 생명 바쳐? 그거 거짓말쟁이야. 생명 바칠 길인데, 내가 생명 바칠 길인데 아무나 따나 선택해 가지고서 생명을 바쳐? 그거는 거짓부리야. 생명 바치지 아무나따나 선택해 가지고서 생명을 바쳐요? 그거는 거짓부리가 생명 바치지 안할 것으로 했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나따나 하는 것이지 생명 바칠 그 도리라고 하면은 신중히 생명보다 귀중히 다루지 안할 수가 없어.

뭐 히브리서 6장에 대해서 어떻게? 나는 영원한 터 여섯 가지를 영원한 나는 신앙의 기초로 나는 삼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그거는 버릴 것이라고, 초보의 버릴 것이라고 하고 나는 그게 영원한 터로 나는 믿고 이라니까 깨달음이 정반대야. 깨달음이 정반대라. 나는 그거는 영원히 버리지 아니할 그는 터라고 나는 믿어요. 그 터에 나는 생명까지 다 바쳐서 건설할라고 믿어요.

‘영원한 심판에 관한 말씀의 터를’ `터를' `터를' 다시 닦지 말라 했으니까 그 터 어데 있습니까? 영원한 심판에 대한 말씀이 터입니까 터 아닙니까? 예? 터입니까 터 아닙니까? 닦지 말라 했으니까 그 터로 쓰라 말입니까 그 터 버리라 말입니까? 버리라 말이요 그 터로 쓰라 말이오? 그 터 위에서 완전한 데 나아가라. 완전을 건설해야 돼.

왜?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 안수, 죽은 자 부활, 영원한 심판 이 여섯 가지가 우리 신앙 행위에 영원한 터라. 영원한 터. 이걸 완성해야 돼. 이 여섯 가지를 완성해야 돼.

이래도 저래도 박사가 말한 것이면 믿지마는 ‘제까짓 게 아무것도 무식한 것이’ 박사도 좋지마는 박사보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면 무식한 사람이라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누구 말보다도 바른 것이 옳소. 여게도 생명 내놔야 돼. 이 기초를 이렇게 저렇게 말하니까 여러분들이 생명 바칠 교리요 그것도 교리입니다.

자기의 전 신앙 생활에 기초라니까 얼마나 중요합니까? 생명 바칠 것인데 아무나따나 이래도 저래도 취택하고 있어? 안 돼. 그거는 거짓부리의 사람이라.

이렇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음으로 세상이 박해를 주고 벗어 놓으라고 박해 주고 박해 줘도 안 벗고 공로를 입고 있으면서 박해를 받아도 그 공로를 벗지 안하고 있으면 성령 세례가 될까요 안 될까요? 녜? 성령 세례가 되겠소 안 되겠소? 성령이 오겠소 안 오겠소? 성령이 오겠소 안 오겠소? 그러면 성령이 죽이고 살리는 그 일을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오시면 죽이고 살리는 그 일을 하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하기 쉽겠소 어렵겠소? 전능인데 뭐 하기 어려울 것 쉬울 게 뭐 있는가? 그러면, 그 사람이 죽이고 살리는 것을 잘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성령이 죽일 자를 죽이고 살릴 자를 살리는 그 역사를 그 사람이 수락을 할까요 안 할까요? 잘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잘 받지요. 잘 받아.

뭣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안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받아. 떠났으면 못 받아.

예수님의 사활의 공로로 오는 어려움을 피했으면 그 사람은 죽일 자를 죽여 주는 데에는 도망쳐. 살릴 자를 살려 주는 데는 도망쳐. 안 받아. 이것이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준비요 자격입니다.

이라면 이치가 맞습니까? 이 교리와 신조가 맞아요? 요라면 틀림이 없겠어요? 생명 바칠 만큼 확고해요? 확고해요. 다른 길 없어요. 천인 만인이 해석해도 이 해석에 반대되면 그 해석은 나는, 정죄받고 그 해석은 저주 받는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다른 사람이야 자유지마는 나는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치고 넉넉히 바칠 수 있는 안심하는 교리요 신조로 나는 믿습니다.

이라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제자들이 물으니까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신 것이니 너희들은 알 바 아니라’ 그러면 그 해석을 나는 그래 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말했었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게 해당되느냐 하는 해석을, 그게 깨달음이요 해석이오. 해석은 그때 있는 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을 시키느냐 하는 그것이 우리의 깨달음이요 그 외에 거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깨달음을 가지겠느냐?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겠느냐? 그들이 로마 식민지로서 경제에 심히 도탄, 정치 압박에 심히 도탄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체가, 전체가 공통으로 공통으로 메시야가 와 가지고 우리나라를 독립시키고 우리 나라를 회복시켜서 이 압박에서, 곤고에서 구출해 줬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습니다.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이었습니다. 이 해석 틀립니까? 이 해석 틀립니까?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와 가지고서 식민 그 모든 압박에서 해방되어서 독립시켜 줘서 자기들이 자유로이 살 수 있는 그런 것을 이스라엘 전 백성이 소원한 그 소원이라는 그 해석이 틀렸다고 생각합니까 맞다고 생각합니까? 녜? 맞으면 이것도 생명 바칠 만치 ‘이것뿐이다. 다른 해석은 없다.

요게 정확하다.’ 그렇게 믿습니까? 이래 해석해도 되고 저래 해석해도 되면 소용이 없어.

‘요거다. 천인 만인이 반대해도 요거다. 나는 생명을 바쳐도 요거다.’ 이렇게 믿습니까? 그것이요? 그것이오. 그 해석이 정확합니다. 그 해석 외에 딴것은 암만 해 봤자 그거 나는 틀렸다고 나는 정죄합니다. 왜? 내가 생명 바쳐 믿기 때문에, 내가 믿기 때문에 그거 아닌 것은 나는 틀렸다고 나는 정죄를 해야 나는 이걸 믿지. 뭐 신사가 돼 가지고서 ‘그것도 그래도 깨달을 수 있지. 그것도 맞지.’ 나는 그렇게 하면 나는 생명 바칠 가치가 없고 생명 바칠 만치 그렇게 나는 전심으로 믿지를 못해요. 나는 그렇게 나는 믿어요.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떻게 해당되느냐? 우리와 적응은 어떻게 시키느냐? 오늘 우리와는, 성령의 권능을 받을라고 하면, 성령의 권능을 받을라고 하면 ‘때와 기한은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아버지의 권한에 뒀다’ 너희들이 지금 성령의 권능 받아야 할 입장에서,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할 입장에서,ㅡ 오늘 우리는 어떤 입장입니까? 우리는 무슨 입장입니까?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할 입장입니까, 우리 각자 각자에게 어려운 난제를 주님 앞에서 해결 받아야 할 입장입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경제면으로나 신체면으로나 자기의 사업면으로나 사건면으로나 모든 염려면으로나 자기에게 있는 난제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 받아야 되는 이 한 건이 있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하는 이 한 건이 있고 이 두 건 중에 자기의 난제를 해결 받아야 된다는 이것이 지금 주님 앞에 급선무로서 요 건이 자기 앞에 당면된 중요한 첫째 난제로, 첫째 주님에게 요것을 해결 받아야 될 요 첫째 문제로, 자기의 모든 경제 문제 사건 문제 염려 문제 그 모든 신체 문제 이 문제 해결을 먼저 받아야 된다는 요 문제가 요것이 앞선 문제로 생각하눈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다 그게 첫째 문제 아니고.

그러면, 성령의 권능 받는 것이 첫째 문제로 알고 있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손은 드는데 거짓부리야. 거짓부리. 거짓부리가 안 되기를 기다립니다.

성령의 권능 받는데에는 이 문제를 버려야 됩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권한에 뒀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주권하고 있다. 네 육체 문제 뭐 신체 문제 경제 문제 난제 문제 그 해결은 아버지가 너희에게 해 줄 때에 주고 아버지의 권한에 매였지 너희들에게는 권리 없어. 암만 달라 해 봐야 안 돼. 이거 믿습니까? (아멘!) 암만 달라 해도 안 준다. 그것은 첫째 문제가 아니다. 그거는 아버지가 적당한 시기에 너희들에게 적당하게 주실 것이다 하는 요것으로서, 이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신자들은 요런 문제는 주님에게 맡겨 놓고 성령의 권능 얻는 것이 우리에게 급선무의 문제이다 하는 것으로 요렇게 나는 해석을 하는데, 요 깨달음을 가지고 요렇게 해석하는데 요 해석을 여러분들이 받아들입니까 안 받아들입니까? 받아들입니까? (아멘!) 생명을 내놓을 만치 받아들입니까? (아멘!) 생명을 내놔도, 어떤 모든 세상의 모든 신학자들이 다 와서 반대해도 여러분들이 변동 없습니까? (아멘!) 없으면 살아. 없으면 살아. 교리와 신조는 이렇게 가지는 것이오.

내가 오늘 교리와 신조를 이렇게 가졌는데 대중이 이렇게 말하니까 따라가고 교훈의 풍조에 따라서 요동되는 자들.

성령 받으니까, 그때 삼천 명이라면 굉장한 수인데, 지금은 삼억만 명이 되는 숫자가 되는 것인데 그들이 그 많은 사람이 예수 믿은 것은 다 그때는 이렇게 성령 와 가지고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니까 그들이 다 새술 취한 거와 같이 애통하며 회개하면서 다 구원을 이룬 거 그것이 그때 뭐 안 믿는 사람도 믿는 사람도 다 그렇게 해 가지고서 구원을 이룬 요것이 전도의 방식인데, ‘권능을 얻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전도 방편을 주님이 유언으로 이 방편 줬는데 이 방편보다 좋은 방편 있어요? 이 방편 쓰기 싫으니까 도박 방편을 쓸라고, 사기 방편을 쓸라고, 쓰는 사람은 쓰지마는서도 옳은 좋은 방편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셔서 확고 부동하고정확 무오하고 억만 인이라도 한 사람도 실패 없이 요 방편 쓰면 하나도 실패 없는 요 완전한 방편을 배워 가지고서 요 방편 쓰다가 요 방편 제가 쓰는 일을 열심을 내지 안하고 충성해서 요 방편 쓰지 안하고서 이제, 요 방편 버리고, 요 방편은 버리고 딴 방편 취했으니까 요 방편은 버렸으니까 요 방편은 배척당한 거 아니겠소? 요 방편을 여러분들이 다시 쓰지 못한다면은 어짤랍니까? 버린 사람들은 요 방편은 다시 요 방편이 여러분들과 함께 해 주지 안하면 어짤랍니까? 함께 안 해 줘도 요 방편 버리고 다른 방편 취할 것입니까? 요 방편 가지고는 모자랍니까? 요 방편을 버리고 다른 방편을 취할 것입니까 요 방편에 힘쓰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힘을 쓸랍니까? 요 방편을 버리면 요 방편에 대해서는 음행입니다.

다시는 간부를 취했기 때문에 이 방편의 진리는 그와 동행해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회개를 해야 되지 그냥 용서 받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어째요? 시간과 공간과 모든 종류에 대해서 무한한 전도 방식을 취할랍니까 한 개인 한 개별 한 개성에만 해당되는 것을 그런 방편을 취할랍니까 어떤 것 취해요? 성경이 주시는 방편 취할 거라요 인간이 주는 방편을 취할 거라요? 둘 중에 하나 취해요.

우리 총공회 산하에 있는 교회가 뭐 한 칠팔십 교회 되는데 이제, 그러면 한 달에 둘씩 할란지 셋씩 할란지? ○○○ 목사님 ○○ 교회는 어느 날 할랍니까? 어느 날 ‘오늘만 와 주십시오’ 하는 그 방식으로서 어느 날 할랍니까? 중복되면 안 되니까. 어느 날 할랍니까? 정했습니까? 어느 날 하기로 날짜 정했습니까? 예? 아직 안 정했습니까? 또 저 ○○ 교회는 어느 날 할 겁니까? 어느 날 할 거요? 저 ○○○ 교회는 어느 날 할 겁니까? 아직 안 정했습니까? 부산 교회가 팔백 오십여 교회인데 팔백 오십여 교회가 다 한 번씩 할라 하면은 아마 그 중복이 되기를, 중복이 되기를, 오십 두 주일이니까, 오십 두 주일인데 팔백 오십을 오십 둘로 나누면 얼마나 됩니까? 누가 수학 똑똑히 아는 사람 좀 빨리해 봐요? 뭐 얼마? 한 주일 열 일곱씩 하면 돼? 팔백 오십 교회가 오십 두 주일인데 그러면 다 할라고 하면은 한 주일에 몇 교회씩 해야 되느냐 그말이오.

얼마? 열 여섯 교회? 열 여섯 교회면 되나? 열 여섯 교회, 한 주일 열 여섯 교회씩 해야 됩니다.

열 여섯 교회씩 해서, 만일 금년 남은 때에 주일마다 하루 열 여섯 교회씩 그렇게 그 방식을 쓰면은 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어떻게 볼까요? 기독교를 어떻게 보겠어? 그러면 팔백 오십 교회가 다 효력을 볼까요? 만일 그것을 한국 교회가 백 년을 계속해서 쓴다고 하면은 기독교는 뭣 되지요? 기독교는 뭣 되지요? 여러분들이 몰라요?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면 알지 않아요 다, 계산해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을 나쁘다고 하는 것 아니고 자기네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어쨌든지 열심히 전할라고 하는 것 나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도 산에 가서 거기 대해서 기도했습니다. 어쨌든지 모이도록 하는 것은, 모여 가지고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은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니까 그 목사님에게 은혜를 줘 가지고서 그날 오는 사람들이 단번에 감화를 받아 가지고서 참 믿는 사람이 많이 되도록 그렇게 그 목사님이 지금 준비하고 있을 터인데 은혜 있는 설교가 되도록 해 달라는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왜? 그것도 복음 운동이기 때문에.

그러나, 성경대로의 방편을 가졌다가 그 방편은 집어 던져 버리고 그 방편이 좋다고 이 방편 버리고 그 방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좀, 좀 마음에 두렵고 염려스럽습니다. 내가 이 말 한 데 대해서 하나님이 축복 안 해 주고 할까 두려움 하나도 없습니다. 나 자신 만만하요. 하나님이 이 말 하는 거 기뻐한다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왜? 몇십 년만 지나면 환하게 알 것이오.

성령 오면, 세례 받으면 자체가 완전히 변화됐고 권능 받으면 생활 변화 됩니다.

어떻게 변화돼? 아버지가 보냈기 때문에 주님은 아버지만 상대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다 맡겼습니다. 행동은 아버지 시키시는 대로만 행동했지 자행은 하나도 하지 안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내가 너희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계명 지켜서 아버지 사랑 안에 거했지마는 너희들은 내 계명 지켜서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했습니다.

권능 오면 그 권능이 와 가지고 뭣하는데? 권능이 와서 예수님의 모형을 합니다.

예수님의 모형. 예수님은 원형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아버지만 상대하고 딴것은, 아버지만 짝했어. 아버지만 상대했지 딴거는 짝이 없어. 아버지만 짝했어.

이와같이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사활로 대속했기 때문에 예수님만 짝해. 예수님만 짝을 해. 예수님만 짝을 하고 예수님만 상대해. 예수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예수님만 상대해. 성령의 권능 오면은 이 일 합니다.

성령의 권능은 뭐 합니까? 예수님만 상대하는 그것이 성령의 권능이요 내 자체도 내 생사도 내 의식주도 내 모든 성공도 다 주님에게 맡겨. 주님은 아버지에게 맡겼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에게 맡겨. 이러기에 성령이 오면 성령의 권능은 이것이라. 성령의 권능이 와서 이거 해요.

그러면 하나 남았어. 내게 대한 모든 것은 다 주님에게 다 맡겼어. 주님 한 분만 상대해. 뭐 하나 남았습니까?. 이제 뭐 하나 남았어? 뭐 하나 남았어? 뭐 하나 남았어? 순종 순서가 지나가 버렸어. 행동 하나 남았어, 행동. 나는 다 맡겼고 아버지만 상대했기 때문에 내 행동은 어찌 하느냐 하는 그게 문제라. 그거 하나 남았어. 행동은 아버지 시키시는 대로 했어.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해.

요 세 가지 예수님의 모형의 행위를 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이 옵니다. 요 세 가지만 되면, 요 세 가지가 되면 어데든지 증거할 수 있습니다. 요 세 가지가 되면은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소. 예수님이 요렇게 한, 내가 모형이 돼 가지고 모든 사람을 요 세 가지로 살도록 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으로 값 주고 샀기 때문에 당신의 것이 돼서 당신만 상대해. 요거 말로 하고 행동으로 하고 내 사상으로 하고 내 자신이 그리 되고, 주님에게 내 전부를 맡기는 말하고 맡기는 행동하고 맡기는 사상하고 고 사람 돼.

주님에게만 복종하는 사람 돼. 이것 말하고 이것 보여 주고 이거 알려 줘. 이라면, 성령이 오셔서 인간을 끌어 닥쳐요. 인간을 구원해요. 그라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될 수 있어.

이렇게 말씀했는데, 성령이 오셔 가지고서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얼마나 오랫 동안 고생했어요? 말해 봐요? 얼마나 오랫 동안 고생했어요? 몇 날이라 했는데 몇 날이라 하면 몇 날인 줄 아는가? 날짜가 정해 가지고 있어. 예? 열흘.

열흘 만에 오순절에 성령 강림했습니다. 성령 강림으로 다 그들은 세례 받았고 자체가 완전히 변화됐고 그들의 모든 생활과 행위가 변화됐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때 방언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어찌됐소? 예루살렘 그라면 그 환난이 없어졌어요 계속 있었어요? 없어졌어요? 계속 있었습니다. 있었는데 환난이 없어져서 그들에게 평강이 왔어요 그들 자체가 변화가 돼서 평강이 왔어요? 자체가 변화됐어. 세례 받고 권능 얻고 나니까, 옛사람으로 있을 때에 그놈이 그 환난을 겁을 냈지.

그러면 그 환난,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대적하는 세력들이 많아지니까 그 대적하는 세력들이 없어야 좋아요 있어야 좋아요? 없어야 좋아요 있어야 좋아요? 있어야 좋아요. 왜? 그래야 밥이 되지 양식이 되지. 없어야 예수님의 대속이 저들에게 효력있게 결과를 맺어요 그 환난이 있어야 더 유효하게 좋은 결과를 맺고 더 좋은 성과를 거둬요? 있어야 좋아요.

있어야 좋아하는 그자들에게 그 환난이 그들에게 행복이요 불행이요? 여러분들, 예수 믿는 것은 그 땅에 있는 것을 변화시킴으로써 되는 것 아닙니다.

자체가 변화되므로서 땅 위에 있는 그 모든 것이 다 내것이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예수 믿는 도리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똑똑히 믿어요, 똑똑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주님이 분부하신 대로 아버지의 약속하심을 기다리라 몇 날 못 되어서 성령으로 세례 받는다. 또 너희들이 네 소원 사욕의 소원, 네 소원 버리면 성령 권능 와 가지고서 네 생활 변화시켜 준다.

그러면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돼. 그라면 전도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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