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읽는 요령

 

1987. 3. 29. 주일오후

 

본문:요한계시록 1장 2절∼3절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하는 이 말씀은 신구약 성경 말씀 전부를 가리킨 말씀입니다. 혹 생각하기를 이는 이 계시록 말씀이라 그렇게 사람들은 마음대로 갈라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다 가리키는 것인데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사를 말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인간이 모르는 하나님의 그 비밀의 모든 지식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것을 가리켜서 예언의 말씀이라 그렇게 합니다.

앞으로 이 말씀대로 모든 것이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도 이 말씀을 가감하거나 변개하지 못하시고 또 피조물들도 다 이 말씀에 어떤 자는 순종으로 복종하고 어떤 자는 거역함으로 그 형벌로 복종하게 됩니다. 이 말씀에 복종치 않는 자는 하나도 없읍니다. 순종함으로 복받는 사람도 있고 거역함으로 벌받는 사람도 있어서 하나님이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 이 말씀을 가지고 심판하시고 이 말씀대로 영원 무궁한 세계는 건설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정죄 심판하는 율법의 말씀이 되고 중생된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이 생명의 자유의 법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자에게는 이 말씀이 자유법이 되어서, 어떻게 자유하나? 이 말씀대로 자유합니다. 또 어떻게 사나? 이 말씀대로 삽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없는 사람은 이 말씀대로 다 정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다 이 말씀으로 정죄받아 가지고 죽은 것을 예수님이 대속한 사람들은 대속으로 그 사람을 살려 가지고 이 말씀을 영원한 영생법으로 주어서 영생하게 합니다.

이 말씀으로 정죄해서 죽은 사람을 예수님의 대속을 입히지 않은 사람은 정죄 멸망에서 벗어나는 길이 없읍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은 사람이 모르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그 도리를 인간들에게 말한 그 말씀을 ‘예언이라’ 그렇게 말했읍니다. 미래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틀렸으니까 그 관념을 버려야 하고, 또 ‘예언의 말씀이라면 곧 계시록은 말세론이라. 미래사를 말했기 때문에 예언이 맞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 기록한 이 말씀만을 국한해서 말씀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도 잘못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고쳐야 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이 말씀을 개인이 이미 육십육 권 도리가 다 확정돼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이 말씀을 얼마든지 우리 개인으로 읽을 수 있읍니다.

읽는 데는 이 말씀 안에는 영감이 계시고 또 이 말씀 안에는 영감뿐 아니라 이 말씀은 독자적인 전능의 전지의 능력을 가진 것이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해서 이 말씀이 능력 있는 것뿐 아니고 이 말씀 독자적으로 자체가 전지 전능의 능력을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학자들이 다 경험하고 성경의 명백성을 다 인정합니다.

명백성이라 말은 밝을 명(明)자, 흰 백(白)자 아주 모든 것을 밝히 깨닫는 그런 능력이 이 말씀 가운데 있다. 그러기에 누구한테 배우지 안해도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똑똑히 알려 주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명백성을 다 인정하고 있읍니다.

“읽는 자” 읽는 자가 복이 있다. 그러면 읽는 사람은 무슨 복이 있는가? 지켜 행할 수 있는 준비의 복이 있다. 또 듣는 자들도 무슨 복이 있는가? 지켜 행할 수 있는 복이 있다. 그러면 지켜 행하면 어찌 되는가? 지켜 행하면 우리의 구원에 실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지킬 수 있는 그 실력이 준비되는 것은 이 말씀을 읽으면 우리에게 있는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자꾸 제거돼 나갑니다.

혹 사람들이 어데 가서 기도할라고 하면은 그만 가서 기도만 할라고 애를 써.

기도할라고 애를 써서 기도가 안 된다고 이라면서 몸부림치는 것을 봅니다.

또 지금은 제가 안 가지만 그전에 금정산에 가면은 각 교회서 많은 사람이 모여듭니다. 모여들어 가지고 기도할라고 애를 쓰면서 기도가 안 되니까 기도할라고 애를 쓰면서 이 방편도 쓰고 저 방편도 쓰고 자꾸 방편 쓰는 것을 많이 봤읍니다.

그래 가지고 그저 자기 생각하는 대로 이래도 기도해 보고 저래도 기도해 보고 이런 기도 방편도 쓰고 저런 방편도 써도 그 기도에 힘을 얻지 못하고 그저 헛되게 중얼거리다가 나중에 졸아버리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에 힘을 얻어 가지고 기도하는 거 같지마는 순전히 마귀에게 붙들려 가지고 탈선되는 그런 아주 자기 주관의 그런 흥타령만 하고 있읍니다. 또 자기의 신명풀이만 하고 있읍니다. 자기가 주문 읽는 거 모양으로 주문 기도만 하고 있읍니다.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읍니다.

이래도 그것을 말해 줄 수 없는 것은 모두 그 주인들이 있어. 각 교파에 속한 그 소속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말을 해 주면 좋다는 것보다도 ‘어떤 사람이 이라더라’ 이라면 돌아가서 그 얘기하면 교역자는 원수를 삼습니다. 삼아 가지고 ‘건방지게 남의 교인을 제가 그렇게 할까?’ 이래 가지고 도로 역효과가 나 가지고 범죄만 되지 효력이 안 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어도 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도 그런 것을 많이 봅니다. 서부교회 교인들도 요새는 좀 기도를 힘써야 된다 하고 바짝 기도할라고 애를 쓰는데 기도해 봤자 기도가 안 되니까 재미가 없읍니다. 양산동이든지 이런 꽃마을이든지 또 다른 데든지 뭐 울산이나 아무 데든지 기도하러 가도 아무 은혜를 받지 못하고 하니까 별 재미가 없으니 시간만 보냈지 소용 없다 이래 가지고 나중에 가면 차차 차차 기도하는 사람이 떨어집니다. 그것은 기도를 잘못해서 기도의 효력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도의 효력을 보면 자꾸 기도할라고 애를 쓰게 됩니다.

애를 쓰게 되는데, 처음에 기도할라고 달라들었다가 기도가 안 되니까 그만 낙심하고 그 열심이 식어지는 사람, 또 거게서 기도하는 재미를 붙여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다가 또 중간에 떨어지는 사람, 끝까지 기도를 열심히 해서 죽을 때까지 기도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사람.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것이 다 잘못돼 그런 것이니까 이런 것을 잘 배워 가지고 바로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기도를 할 때에 가서 기도할라고 들짱 눈 감으면 기도할 것은 ‘이 장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는 여게서 나에게 주를 영화롭게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고 나서는 그만 기도할라고 하지 말고 성경 읽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 가지고 ‘주님이여, 이제는 내가 이 계시의 말씀, 이 예언의 말씀을 읽을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첫째로 읽을 은혜를 주시옵소서. 읽을 은혜를 주시옵소서.’ 또 그 다음에는 ‘기억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또 그 다음에는 ‘깨닫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깨닫는 은혜라 말은 자기와 관련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을 가리켜서 그 성경을 읽을 때에 자기와 관련되는 그 점을, 관련된 점 그 점을 발견하는 것을 가리켜서 깨달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성경대로 자기는 자기대로 관계 없이 성경대로 성경은 이렇다 이렇게 깨달은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자기와 관련시켜 가지고 깨달은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기억하는 은혜를 주옵소서.’ 이 성경 말씀을 기억하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때를 따라서 생각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아무리 기억하고 있어도 그 어떤 현실을 만났을 그때에 그 말씀이 생각이 나야 자기의 구원이 되는 것이지 그만 현실을 만나면 그때 다 지내보내 버리고 뒤에서 생각하면 ‘그만 그때 이라면 되는 건데 그만 그렇게 하지 못해서 실패했다.’ 그러니까 그때그때 어떻게 해야 될 것을 깨닫게 해 주셔야 자기에게 효력이 있읍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기도할 것은 뭐이겠읍니까? ‘그대로 실천해서 구원의 실상을 이루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인제 그 기도하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 할 기도 뭐입니까? 있으면 ‘이루고 난 다음에도 항상 감사와 겸손과 충성을 계속하도록 해 주옵소서’ 이제 그런 기도를 하고 그렇게 길게 안 해도 좋습니다. 하고 나서는 주님에게 어찌 됐든지 이 성경을 첫째 읽어야 돼. 읽는 은혜, 또 거게서 읽으면서 깨닫는 은혜, 기억하는 은혜, 또 때를 따라서 생각나는 은혜, 또 그라고 난 다음에 실상을 이루는 은혜, 실상 이루고 나서는 또 교만해 버리면 헛일이라. 또 겸손히 감사하는 은혜 그래 달라고 그래 하고 성경을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가 졸음이 오거들랑 그만 그 자리에서 졸음 오는데 자꾸 이래 해 봤자 헛일입니다. 벌써 졸음 오기 전에 졸음이 올라 하면은 내 속에 있는 이 세 놈이 들어 가지고 나를 자꾸 졸게 하는 것이니까 졸음 올라 하면은 얼른 일어나서 가지고 바깥으로 나가야 됩니다. 그러면, 천막에 있다가도 바깥에 나가고, 그라면 방에 있다가도 바깥에 나가고, 예배당에 있다가도 바깥에 나가고 밖에 나가서 쑥 한번 돌고 와 가지고 새로 성경을 읽습니다. 읽으면 처음보다는 조금 많이 읽을 수 있읍니다. 많이 읽으면, 읽다가 또 잠이 옵니다. 잠이 오거든 또 그래 해 버리십시오.

어릴 때는 여러번 그래야 되고 신앙 좀 장성하면 차차 회수가 줄어집니다. 이제는 처음에는 열 번 나갔다가 들어갔다가 해야 이제 성경에 눈이 열려지고 잠이 안 오고 조금씩 성경에 맛이 나고, 또 그라고 나면은 그뒤에는 아홉 번만 그래도 되고 여덟 번만 그래도 되고, 또 일곱 번, 다섯 번, 뭐 네 번, 또 어떨 때는 두 번, 한 번, 이렇게 되고, 그러면 또 그리 나갈 때에는 한 번도 안 나가고 읽기 시작하면 좔좔좔 그만 성경에 대해서 읽어지고 깨달아집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거게서 악령 악성 악습 이것이 차차 차차 제거되어집니다.

제거되어지는데 악령은 뭐라고 했읍니까? 악령은 뭐입니까? 악령은 마귀, 또 악성은 뭐입니까? 악성은 뭐입니까? 원죄, 악성은 원죄, 아담 하와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죄받은 그 원죄, 또 악습은 뭐입니까? 본죄, 자기가 지은 죄를 가리켜서 악습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차차 차차 살쪘던 놈이 마릅니다. 인제 이 셋을 가리켜서 자기 아닌 자기, 원수 자기, 자기를 죽인 자기 아닌 자기, 믿는 사람에게는 옛사람, 안 믿는 사람에게는 육신의 사람 이렇게 성경에 말씀했읍니다.

성경을 자꾸 읽으면 이 자가 차차 차차 밥을 못 먹으니까 이놈이 배가 고픕니다.

배가 고프면 뭐 막 밥을 당겨들입니다. 못 먹어서 배가 고프면 이놈이 밥을 먹도록 자꾸 속에서 역사합니다. 자꾸 ‘밥먹어라 밥먹어라 자꾸 밥먹어라’ 역사합니다. 제 밥을 만들어서 먹도록 자꾸 역사합니다.

그러면 밥을 먹도록 역사한다 말은 무슨 말입니까? 저 한번 대답해 봐요. 저게 뭐 구서동인가 거게서 온 분 저분? 밥을 먹도록 역사하는 게 뭐이요? 죄를 짓도록 자꾸 역사하는 거라. 자꾸 요 죄를 자꾸 생각나게 하고 조 죄를 생각나게 하고 자꾸 죄를 짓도록 역사를 합니다.

죄를 짓도록 역사할 그때 이놈이 지금 곯아서 옛사람 그놈 원수 그놈인데 그놈이 곯아 가지고, 성경을 며칠 동안 계속해 읽으니까 이놈이 지금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인데 그때 죄를 지으면 죄 맛이 있읍니다. 죄 맛이 있어 굉장히 맛이 있는 죄를 짓고 재미있는 죄를 짓고 그만 그 죄 지으면은 이놈이 그때 곯았다가 실컷 배부르게 먹고는 그만 살이 퉁퉁 쪄 놓으면 벌써 그놈이 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만 성경 볼라 하면 잠오고 자꾸 설교 들으면 잠 오고 자꾸 이리 돼집니다.

그래서, 그때에 그놈이 벌써 자꾸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있고 습성으로 악습으로서 그전에 죄 짓던 습성 죄 짓던 버릇이 있어 가지고 과거에 죄 짓던 버릇대로 죄가 짓고 싶은 그럴 때는 그게 자기 아니고 자기 죽인 원수 그놈이 그때 자기 마음과 몸을 붙들어 가지고 그와 같이 하는 것인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놈이 배가 고프니까 지금 발동을 한다. 조금만 견디면 이놈 인제 뒈진다.’ 하고 죄를 안 짓고 자꾸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자꾸 읽으면은 나중에 이놈이 골케골케 해 가지고 참고 견딥니다. 견디면서, ‘설마 성경 오늘 하루 읽고는 내일은 그만 읽겠지.’ 또 이튿날 또 읽습니다. 읽으면 어떤 사람은 ‘일주일 동안 했으니까 일주일 동안 어떻게 견디노? 일주일 동안 읽고는 가겠지.’ 일주일 동안 읽고 또 읽습니다. 그러면 그놈이 간담이 녹아. 간이 녹아집니다.

또 성경 읽지, 또 성경 읽지 또 성경 읽다가 겨우 마구 사로잡아 가지고 어떻게 하는 멱살 거머쥐고 내 곤대기 해서 정신 차리지 못해 가지고 그만 성경 읽을라 하면 잠이 그만 꼬박꼬박 오면서 이리 되면은 이게 그만 배워 가지고 성경 척 덮어 놓고서 그만 저 밖으로 돌아다니며 잠을 깨 가지고 또 달라듭니다. 이래 놓으면 그놈이 죽을 지경이오. 이라다가 얼마 동안 그라면 이놈이 할 수 없어서 그만 쫓겨 나갑니다.

쫓겨 나가 버리면 내 속에 죄악이 하나도 없어 악령의 역사도 하나도 없고 악성도 없고 악습도 없고, 악성이 없다 말이 그게 무슨 말이요? 악성이 없다 말이 무슨 말이지요? 악성이 없다 말은 원죄가 없다 말인데 원죄가 없다 말은 무슨 말이요, 그 말이? 악성이 없다 말은 뭐이지? 죄 지을 생각? 자기 중심이 없어.

자기 중심 사욕이 없어져 버리요, 그만. 사욕이 없어져 놓으면 성령의 소욕으로 바꿔진다 말이지.

이놈이 쫓겨나갑니다. 쫓겨 나가면 그놈이 그만 어데로 도망쳐 버립니까? 안 치요. 성도들이 천국 문을 거머쥐고 이 오른발 들여 놓으면 ‘그래도 행여나’ 안 떨어지고 붙어 가지고 있읍니다. 이라다가 두 발 다 들여 놓으면 그래도 행여나 이놈이 뒤돌아 나올까 기다리고 있다가 그만 천국 문을 딱 닫아 버리면 그때사 ‘아이구, 인제 헛일했다.’ 하고서 낙망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놈이 뭐, 그놈의 진상을 볼라거들랑은 출애굽기에 바로 왕이 모세 앞에서 강퍅을 부리는 걸 그걸 봐서 그것을 마귀의 현상을 우리에게 기록해 가지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래 가지고 바깥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들어오지는 못하고, 우리 속에는 들어오지 못하니까. 들어오지 못하니까 기다리고 있다가 옆에 다른 사람을 시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 가지고 내 귀에다가 거슬리는 소리를 하게 됩니다.

거슬리는 말을 한 마디 하게 되면은, 이거 이래 있다가 거슬리는 소리 하면은 ‘그래?’ 그만 속이 그만 휘뜩 뒤비지며 그만 그 사람한테 억울한 소리 들으면, 억울한 소리 ‘그래? 나한테 그래?’ `그래?’ 할 때에 됐다 하고서 얼른 뛰어 들어와 버립니다. 얼른 뛰어 들어와 가지고, 그때는 성경 읽은 그사람 아니오. 그 사람 아니고 어만 놈이 와 가지고 지금 내가 돼 가지고 있읍니다.

그러니까 그때에 뭐이냐? 귀를 조심하고, 눈을 조심하고, 또 우리 속에 마음에 그놈이 혹 일어나는가 들어오는가 해서 조심을 해 가지고 이래서 얼마 동안 성경을 많이 읽고 나면 그놈이 내 마음에 와 가지고 침노도 하고 들어왔다 나갔다 하기는 하지마는 그 삐삐 말라 놓으면 그까짓 거 뭐 힘이 있읍니까? 힘 없어. 삐삐 말라 놓으면 힘 없어. 힘이 없다 말이오.

어떤 남자가 조막대기만한데 부인은 어떻게 큰지 이거 남자가 만날 싸워도 이기지 못해. 이래 놓으니까 그래 저거 친구들이 ‘야 이놈아, 너 마누라 길들이는 법을 가르쳐 줄께. 너거 벽장 있지?’ ‘그래.' `장 안에 나는 키가 작아서 못 내리니까 저 안에 저거 좀 내려 달라 해라. 헤, 키가 작아서, 내가 올라가지. 뻐뜩 올가거들랑은 딱 놓고 그만 대못을 쳐 가지고 그만 두드려 박아 놓고 어쨌든지 열어 주지 마라. 열어 주지 말고 여자는 이레를 굶어야 죽지 그리 안 하면 안 죽는다. 이러니까 내비 둬라. 이래 나중에 열어 달라 열어 달라 해도 안 열어 주고 그라면 한 여드레 되거들랑 그래 문을 열어 줘라. 열어 주고 나오라 해라.

나오면 뭐 기운이 없어 퍼드러져 가지고 꼼짝도 못한다. 그럴 때에 달라들어 가지고 되게 패대라.’ 되게 패대 가지고 이라면 뭐 얼마나 뭐 힘대로 되게 패대 놓고 이라니까 그만 그때 아주 혼이 났다 말이오. 그라고 난 다음에는 다시 안 그렇다고 그랍니다.

그런 거 모양으로 우리 옛사람 이놈도 그래 가지고 자꾸 바깥에 이래 있다가 이게 그런 기회를 통해서 들어올라고 애를 쓰는데 그럴 때 이놈이 골케골케 해 가지고 들어올 때 그때 이놈을 오는 쪽쪽 이거 그만 자꾸 참 승리를 합니다.

그놈이 들어와 가지고 말하면 탁 꺾어 넘기고 탁 꺾어 넘기고 자꾸 이래 꺾어 넘겨 가지고 이래서 벌써 십분지 한 칠쯤 새사람이 그 심령을 점령하고 십분지 한 삼쯤 남았으면 그 사람은 어떤 기회에 범죄해도 그까짓 거 뭐 범죄해도 일어날라면 일어나고 소용이 없읍니다.

이러기 때문에 마태복음 25장에 보면은 벌써 기름 준비한 자들은 신랑 온다 소리 듣고 이래 나가 맞이했지마는 기름 준비 못한 자들은 소리 듣고 맞이할라 해야 맞이하지 못하고 그만 헛일하고 말지 안했읍니까?

그래서, 어쨌든지 성경을 읽는 것으로 옛사람 이놈을 멸해서 꺾도록 이렇게 하고, 또 재독을 듣습니다. 설교를 자꾸 듣는데 이 듣는 거는 조심해서 들어야 됩니다.

왜? 성경은 꼭 같은 성경이니까 성경 안에 거게 성령이 내재하셔 가지고 옳게 바르게 가르쳐 주시지마는 설교라 하는 것은 옳은 설교도 있고 틀린 설교도 있읍니다. 이러기 때문에 설교는 잘못 들으면 안 돼요.

‘이 집회에서 은혜 받았으니까, 또 어짜든지 집회만 가면 은혜 받으니 자꾸 집회 다녀 보자.’ 집회에 다녀 가지고 쑥물이라고 쑥물 먹는데 쑥물 먹으면 죽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설교는 그것은 그저 아무 설교나따나 벌로 들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말씀은 오전에 비유하기를 뭐라고 비유했지요? 설교 말씀은 뭘로? 자연 식품. 뭐 밥 채소 이런 모든 이 식품 자연 식품이고, 또 설교는 뭐라 했읍니까? 특효약. 특효약이기 때문에 이 특효약은 바로 쓰면 참 효력이 나서 뻐뜩뻐뜩 듣습니다. 그렇지마는 아무리 좋은 특효약이라도 그 약만 자꾸 쓰면 뒤에 큰 병신되고 큰일 납니다. 그거는 가끔 가다 쓰고 그만 식품을 잘 먹어야 되지. 그런데 또 특효약 중에는 아주 사람 죽이는 특효약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 잘못 맞아 놓으면 그만 큰일 납니다.

그러니까 마귀란 놈이 그 교회에 부흥을 해 가지고 옳은 부흥회를 해서 참 좋은 특효약을 써서 교인들이 다 그 특효약을 쓰니까 효력이 나서 기운이 팔팔 일어나거든.

일어나면은 마귀란 놈은 ‘이놈들은 어떻게 잡아야 되겠느냐? 이제 저희가 이 부흥회에서 은혜 받았기 때문에 부흥회만 하면 교인들이 은혜받고 믿음 좋아지고 교회가 부흥되니까 이렇게 알고 있으니 이놈들을 잡는 데는 참 비상한 방법을 써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봐라. 집회 해 가지고 은혜 받지 안했느냐? 그러니까 집회를 한번 더 하면 은혜 더 받고 두 번 더 하면 은혜 더 받고.’ 자꾸 그란다 말이오. 이제 집회를 또 하게 됩니다.

이라면 옳은 특효약을 효력 본 사람에게 나쁜 특효약을 집회를 한번 해 가지고 완전히 그걸 그만 죽여버리고 마는 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집회는 아무나따나 돌아다니면 안 됩니다. 설교는 아무나따나 들으면 안 돼요. 성경 말씀은 그저 뭐 방에 앉아서도 읽고 들에 앉아서도 읽고 자꾸 읽으면 남한테 안 배워도 자기 마음만 바로 쓰면은 자꾸 됩니다.

이래 가지고 자기가 일어나지 못할 때는 부득이 특효약이라도 써 가지고 처음에 기운을 차려야 되니까, 뭐 음식 먹어 가지고는 안 되는 그 사람이 그냥 음식 먹어봤자 회복 못 합니다. 특효약을 해 가지고 회복을 하고 난 다음에 이제는 이 자연 식품을 잘 먹으면은 잘된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아주 병이 들어 가지고 골케골케 해서 주일날 오면 졸기나 하고 또 일주일 내 돌아다니며 죄 짓다가 주일날 이레 만에 하루 하는 것도 ‘아이구 지겹다’ 설교 사십 분만 해도 지겨워서 못 견뎌 하고 테레비만 보면 열두시까지 봐도 아무 지겹지 않는 그게 뭐이냐 하면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 그놈이 강건하고 이제 새사람이 병이 들어서 뭐 죽을 지경입니다. 중생된 영은 파묻어 놓고 꼼짝 못 하고 일어나려고 하면 주먹으로 조겨대니까 이 중생된 영이 죽지는 안하지만 꼼짝을 못 하는 거라, 이래 가지고.

그럴 때는 특효약을 써야 돼, 특효약. 어데 집회에 가든지 이렇게 설교 듣든지 이래 듣고 난 다음에는 그만 그때 은혜 받아 가지고 기운을 차려서 중한 병이 걸렸다가 새로 일어날 수 있어. 일어나고 난 다음에는 어서 자연 식품인 이 성경을 자꾸 읽어야 되지 성경을 안 읽으면 안 돼요.

그래서, 여기서 교역자들도 설교 이거 받아 가지고 가면 설교를 받아 가지고 가서는 그 다음에 자꾸 자기가 새김질해 가지고 성경으로 돌아가고 자꾸 이래야 될 터인데 자꾸 특효약만 자꾸 쓴다 말이오. 특효약만 쓰면 그만 특효약 마비가 돼 가지고 그만 특효약에 걸려서 중독이 돼 버립니다. 특효약 중독이 되면은 안 돼요.

이래서, 내가 지난 금요일날○○○목사님에게 설교를 시켰는데 그 ○○○목사님은 설교를 받아 가지고, 그 설교는 전부 제가 한 건데 그거 그래 가지고 자꾸 이제 성경에 좀 맞춰봤다 말이오. 성경에 맞춰 가지고 좀 이라니까 제법 맞췄어. 제법 맞췄는데 그렇게 애를 써서 맞추면은 아마 교회서 쫓겨나지는 안할 거야.

며칠 전에○○○목사님을 만났는데목사님도 ‘저도 지금 이거 설교 말씀을 테이프를 가지고 가서 듣고 재독을 듣고, 재독 들을 때에ㅡ설교 들은 것보다 재독 들을 때 더 은혜가 되고 재독 듣는 것보다 또 이제 자기가 필기를 한다고, 거기서.ㅡ그 재독 들은 걸 또 필기할 때에 더 은혜를 받고, 또 필기하고 난 다음에 자꾸 명상하면서 새김질하면 더 은혜 받고 그래서 아주 요새 재미가 있읍니다.’ 그라면서, 그러면 교회가 부흥돼요.

그래서 자꾸 이 병든 데는 아주 믿음이 떨어지고 이렇게 병든 데는 뭐 성경을 읽어야 됩니까 재독을 해야 됩니까? 어째야 돼요? 믿음이 떨어진 그 식구들 데리고 가 가지고 자꾸 성경을 읽으라 해야 됩니까 재독을 해야 됩니까? 재독을 해야 돼요, 재독. 재독 특효약을 써요. 재독을 자꾸 해 가지고 이제 힘을 얻습니다.

힘을 얻으면은 차차 차차 식물을 먹여야 돼요. 재독해 가지고 힘을 얻거들랑 그라고 난 다음에 ‘성경을 읽어라, 자꾸 성경을 읽어라.’ 이래 가지고 차차 차차 길러서 인제 성경을 읽고 듣고 이라는 가운데에서 이 악령 악성 악습 이놈을 다 제거해 버리면 병만 치료가 되면 강건해져 버려요. 그놈만 나가면 우리가 행할 수 있는데 그놈 때문에 행하지를 못해요.

또 설교 재독해 가지고 내게 강한 그놈이 속에 들어 있는 그걸 설교 말씀을 가지고 찔러서 다 쫓아내고 뭐 쫓아버리고 이래야 된다 그거요. 그라고 난 다음에는 성경 말씀을 자꾸 열심히 읽어서 성경에서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도 유익을 못 보는 일 되기 쉽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유익 못 보는 일이 많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말이지요. ‘그라면 유다서를 한번 읽어 보십시요. 유다서에 뭐 있는고 한번 읽어 보십시오. 유다서에 그 몇 가지나 말했는고 한번 읽어 보십시오.’ 쭈르르 읽고 난 다음에 ‘몇 가지나 있었읍니까?’ ‘뭐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한번 더 읽어 보십시오.' 한번 더 쭉 한 오 분 만에 쭉 읽어버리고 또 ‘뭐 있읍니까?’ `뭐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입에 대면 쭈르룩 읽어버리는데 속에 뭐 있는지 몰라.

인제 그것은 성경 읽는 그 악습이 들어 있어, 악습. 성경 읽는 악습이라 말은 자기 중심으로 성경 읽었다 말이오. 성경 법대로 읽지 안하고 악습이 있어 놓으면 나중에 성경 외우는 것도, 요한계시록 외워보라 하면 쭉 외워버립니다. 한 뭐 삼십 분 사십 분이면 쭉 다 외워버립니다. 다 외워버려도 뭐인지를 몰라. 거게 대해서 뜻은 몰라. 그렇기 쉽습니다.

제가 진주성경학교 가서, 한번 가서 똑 두 달 공부했는데, 석 달 공부할 건데 두 달밖에는 공부 못 했어요. 그 후에 다시는 안 갔읍니다. 했는데 그때 가니까 권이만 목사님이라고 저 호주에서 온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분이 나중에 아니까 논문 박사가 일곱인가 되는데 논문을 안 내서 박사를 하나도 안 해. 박사 하나도 없어. 박사 이름 하나도 없는데 실력으로는 논문 박사 일곱을 하고도 훨씬 남은 사람인데 모두 다 그저 논문을 내라 해도 안 내고 또 명예 박사를 줄라 해도 안 할라 하고 이래서 박사 명의는 없는데 그 사람은 그렇게 실력 있는 분이라.

그분 내가 가니까 성경 공부 시간에 성경 읽는데 그뭐 호주 사람인데 코는 커단하지 턱은 넙죽하지 이거 낯은 기단하이 이래 가지고 읽는데 ‘예ㅡ수ㅡ그ㅡ리ㅡ스ㅡ도ㅡ의ㅡ계ㅡ시ㅡ라’ 이래서 ‘아마 저분은 한국 말을 저렇게 배우기를 아주 서툴어 놓으니까 저래 읽는갑다’ 했더니만 나중에 우리 한글 박사를 할 수 있는 그런 실력가인데 그분이 논문을 안 내 그렇지 한글로 그만치 되는 이가 없다 그래요.

이래도 그렇게 성경 읽으면 벌벌벌 떨면서 그렇게 아주 읽어요. 성경 똑 못 읽는 것같이 그래. 나중에 보니까 그분이 뭐 성경을 그저 얼마나 많이 읽었고 참 그렇게 능통한 분인데 그분은 성경 읽을 때에 그렇게 아주 두려워하며 떨면서 벌벌 떨며 그래 읽어요. 읽는데, 그래 놓으니까 그분은 범사가 그렇게 신중해요.

내가 한번 그분을 어찌 한번 보고 싶어서 어째 보니까 거창읍에, 거창에 시골장이라 하면 막 사람이 꽉 채여서 못 뚫고 나갑니다, 꽉 채여서. 이런데 퍼뜩 보니까 그 권 목사님이 지나가는 거 같애. 이래서 그 뒤에서 ‘권 목사님!’ 고함을 지르니까, 그분들은 뭐 똑 뉘가 쫓는 사람 모양으로 막 급하게 가요, 바빠서 지금 뭐. 참 느릿느릿하이 우리 사는 거 모양으로 이래 띠볼띠볼 이래 가는 게 없어. 숙여 가지고 그저 언제든지 급한 사람이고 바쁜 사람이라, 또 바쁘고.

그래 뒤에 불러도 돌아보지 안하고 가는데 안 돌아보고 가요. 가는데 가만히 보니까 걸음을 조금씩 멈춰. 그래 죽자껏 따라가니까 따라가. 따라가서 그 뒤에 가서 ‘권 목사님’ 이래 해도 돌아보지를 안해. 내가 앞에 가 가지고 ‘권 목사님’ 하니까 그래 반가이 인사하면서 이렇게 해. 어떻게 신중한지! 그 권 목사가 또 어데 딴데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공연히 자기 앞에 똑똑히 안 보고 자기 안 하는데 뒤에 와서 말하는 거 보고 ‘예’ 하고 돌아보면 자기 아니면 큰 실수라 그 말이오. 그렇게 따지고 따지고 실수 없이 그렇게 사는 분이라.

이런데 그분은 그 성경을 볼 때에 그렇게 봐요. 그래서 ‘저분이 성경을 보면은 어떻게 보는고 그거 가르치는 가운데 혹 나올 건가?’ 이래 가지고 보니까 그분은 성경을 볼 때에 하나도 그저 보지 안해요.

우리가 이 성경을 봐도 효력이 없는 것은 성경은 성경대로 나는 나대로 성경과 나와의 관련을 시키지 안하는 데에서 마귀의 시험에 듭니다. 모처럼 성경을 열심히 보기는 보면서 성경은 성경대로 나는 나대로 성경과 나와의 관련을 시키지 안하고 보는 데에서 여게서 대실패를 하고 모처럼 하는 그런 기회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는 나하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하나님 하고 나하고 서로 상대하고, 어떨 때는 하나님하고 나하고 둘이 상대해서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는 것을 내가 거게서 발견하고 ‘하나님에게는 이렇게 하라고 하나님이 시키는구나. 하나님에게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노를 끼치는 것이로구나.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긍휼을 구하는 것이로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이렇게 하는 게 기쁘시게 하는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게 사랑하는 것이로구나.’ 성경에 보면은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 또 계명을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도 그를 사랑할 것이요 아버지에게도 사랑을 받을 것이니라. 이 계명을 또 지키는 자에게는 우리가 와서 거처를 같이 하겠다. 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나를 사랑하는 자니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거 뭐 똑똑히 말해 놨는데 성경은 성경대로, 성경에서 내가 첫째는 성경에서 배울 맘을 가져요, 성경에서 배울 맘.

창세기 1장이면 ‘창세기 1장에서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고 보자.’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가르치는 거, 거게서 보면은 천지 창조도 가르치고 있고, 하나님도 가르치고 있고, 또 이거 창조의 순서도 가르치고 있고 그 여러가지 가르치고 있고, 어떨 때는 사람도 가르치고, 일도 가르치고, 물건도 가르치고, 나도 가르치고 내 행사도 가르치고, 그러면 내 행사를 다른 데서는 모르는데 성경 읽어 보면은 내 행사를 다 알겠다 그 말이오.

이래 가지고 성경과 자기와의 결부를 시켜 가지고 이 꼭 결부를 시켜서 성경을 보면은 얼마 안 봐서 그 사람의 심령이 밝아지고 악령과 악성은 다 물러갑니다.

이게 자꾸 성경 보니까 저절로 그놈이 못 견뎌 물러가는 것보다도 나중에 가서는 성경을 자꾸 그래 보게 되면은 자기 주관에 확고한 능력이 오는 것은 뭐이냐? ‘요게 악령이다. 요게 악령이다. 요게 악성이라는 이거 내가 아니고 요 원죄다.’ 자기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도적질 할 마음이 생깁니다. 도적질 할 마음이 생깁니다. 또 자기가 사람을 사랑할 때에 사람을 미워하는 미운 맘이 생깁니다.

성경을 보니까 그것이 뭐이냐? 악성이라. 그것이 사람이 미울 때는 그게 내가 아니라.

사람을 미워할 때는 그게 내가 아니고 나 아닌 자기 중심의 악성인 원죄 그놈이 지금 내 마음하고 고기덩어리하고 사로잡아 가지고 그 사람을 미워하는, 미워하는 내 마음이 되도록, 미워하는 내 몸이 되도록, 미워하는 행동을 하도록 이래 하는 것은 순전히 내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 보고 깨닫고 난 다음에는 혹 퍼뜩 ‘미운 생각, 이 마귀 들었다. 이놈 악령 이놈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그게 악령이 들어왔고 악성이들어와 가지고 악습하고 뭉쳐 가지고 그와같이 하니까 그걸 자연히 물러가게 하는 게 아니라 미워서, 미워서 그놈을 그만 미워서 그걸 죽이고 ‘하나님 앞에 요놈을 죽여 주옵소서.’ 이래서 “옛사람을 다 죽여버려라” 옛사람을 죽여버리라 했기 때문에 그 죽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듭니다.

이러니까 그자하고 자꾸 원수라는 걸 딱 알면은 그만 돼요. 그 미친 사람이, 정신 이상자가 자기가 ‘나는 정신 이상이 됐다.’ 정신 이상에 걸렸다는 것을 알면 벌써 육십프로는 치료가 됐다 합니다.

이거 모양으로 그자가 내 원수라는 것을 딱 알고 ‘요놈이 내 원수다. 원수 이놈이 지금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여! 요 원수 요놈을 물리쳐 주시고 내 마음을 요게서 해방시키고 요놈을 내 원수인 걸 알고 요 물리치고 내 마음과 내 몸은 이놈하고 완전히 이래 별도로 서로 나뉘어져서 이걸 대적하게 해 주옵소서.’ 요렇게 말하는 자에게는 그놈이 붙어 있지 못해요. 뭐 그만 달아나 버립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우리가 지금 복을 받아야 되겠는데 우리 서부교회서 복을 받아야 되겠는데 복을 받는 데에는 뭐 별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복은 전부 돈을 줄 때도 말씀 주시고, 권세 줄 때도 말씀 주시고, 영광 줄 때도 말씀 주시고, 승리 주실 때도 말씀 주시고, 지위 줄 때도 말씀 주시고, 사업 줄 때도 말씀 주시고, 직장 줄 때도 말씀 주시고, 전부 말씀으로 주시지 말씀 아닌 걸로 주는 거는 하나도 없어요. 전부 말씀으로 줘요. 말씀으로 주니까 그 말씀 들어 가지고 지켜 행하면 그만 돼져. 꼭 안 될 거 같은데 되거든.

그러면,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이 해 주시기 때문에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는 그분이 하시니까 우리 이치에 말씀을 지킬 때에 ‘요래 지키면 되겠다’ 되겠다 싶은 것은 지키고 안 되겠다 싶은 거는 안 지키고 그라면은 그 사람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하심을 믿는 사람입니까 안 믿는 사람입니까? 안 믿는 사람이라. 그거는 안 믿는 사람. 이러니까 그런 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염려할 필요도 없어.

그러니까,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에 이래 말씀으로 하신 것은 전부 그게 내게 대한 말씀이야. 그거 다 내가 다 받으면 돼요. 내가 다 받으면 돼. 다 받으면 내것 다 돼요. 내게 다 줬기 때문에.

다 받으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것을 받아야 되지 다 받을 수 있기는 있는데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하나씩 주실 때 받아야 되지 안 주는 걸 받으면 그거 또 뭣 됩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것은 바로 그것이 실상인데, 실상인데 그것을 내가 받을 때에 하나님이 주시지 안하는 것을 내가 취하면은 그것도 탐심이라. 알겠읍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취해야 되는데 안 주시는 건 취하면 탐심이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취해야 돼요.

주시는 것만 취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주시는 것만 취합니까? 하나님이 언제 주십니까? 언제 주십니까? 하나님이 언제 주십니까? 주시는 것은 현실을 요 말씀을 지킬 수 있는 현실을 주실 때에는 그 말씀 지켜 가지고 그 말씀으로 내게 복되는 것을 나에게 주시는 때라.

그러기 때문에 현실을 하나님이 요 현실 만들어 줄 때에는 그 현실에 지킬 수 있는 말씀을 지키면 내가 복이 되도록 그 복을 줄라면 그 말씀 지켜야 돼. 요 말씀 지켜서 복 받을 수 있는 그 복을 줄라 하면은 요 말씀을 지킬 수 있는 현실을 주십니다. 알겠읍니까? 또 ‘이 사람에게는 저 복을 줘야 되겠다.’ 저 복을 줘야 되겠다 하면은 하나님께서 저 복을 줘야 되겠다 할 때에는 또 그 복에 대한 말씀을 지켜야 그 복을 주시는데 그 복에 대한 말씀을 지키도록 하면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라면 그 말씀을 지키도록 복을 주십니까? 어떻게 주십니까?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 주신다 말이오. 알겠읍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당신 마음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척척 갈아서 주시는데 주시는 것은 뭘로 우리에게 주십니까? 현실을 바꾸어 주십니다. 알겠읍니까? 이러니까 우리에게 자꾸 빈틈이 없이 뭐 현실에서 현실, 현실에서 현실 쭉 늘어 있어. 현실이 쭉 늘어 있어.

자, 현실 끊어진 사람 있읍니까? 현실 동가리 났어요? 동가리 안 났어요. 동가리 안 나고 현실이 쭉 연대어 있어요. 현실이 쭉 연대어 있는 것은 뭐이 연대어 있다 말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연대어 있다 말이오. 알겠읍니까? 축복이 연대어 있어.

이러니까, 요 현실 조 현실 자꾸 이래 바꿔 줄 때에는 요 현실 지키고 조 현실 지키니까 자꾸 하나님의 축복이 요거조거 섞어서 말이요, 밥만 먹으면 재미없으니까 밥하고 장하고 고기하고 다 또 과일하고 이래 섞어 이래 먹는 거 모양으로 자꾸 요 현실 조 현실 하나님이 바꿔서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그렇게 구비해 주시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이러니까 참 이 세상은, 찬송에 ‘묘한 세상 주시니’ 묘한 세상 주셨다고 참 세상은 묘한 세상이오. 알고 보면 이 세상은 묘한 세상이라.

그런데 현실을 주는데 사람들이 모두 다 좋아하는 현실도 있고 나빠하는 현실도 있는데 좋아하는 현실에는 일반 축복인 저급의 축복이 오고 모든 사람이 좋아하지 안하는 그 현실은 드문 현실인데 특수 현실이니까 특수 축복이 오는 현실이고 온 천하에 아무도 닥치지 안한 그런 특별 특별한 현실을 주신 그 현실은 어떤 것입니까? 특별 특별 특별한 축복을 주는 현실이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이제 우리가 자꾸 읽고 듣고 이래 가지고 현실 닥치면 이제 읽고 들으면 마귀는 다 물러가 버리지, 또 자기에게 자꾸 차차 능력이 생겨지지 이러니까 이라면 이제 현실을 닥쳐서 이 말씀대로 살 수 있읍니다.

이래서, 아무리 건강해도 제가 음식 안 먹으면 안 되는 것처럼 이러니까 쉬지 안하고 성경 말씀은 읽어야 됩니다. 주야 성경 말씀을 읽어야 돼.

내가 언제 저 양산동에서 누구에게 가서 ‘보자. 이 사람이 은혜를 받는다 하는데 이거 이 사람 천막을 어떻게 해 가지고 있나?’ 해서, 없는데 나 혼자 가 볼 수는 없는 거고 이래서 마침 그 주인을 만나 가지고 ‘천막 한번 좀 들여다 봅시다.’ 이라니까, 뭐 부끄럽다고 뭐 흐트려 놨다고. 내가 흐트러진 그대로 내가 보는 게 좋으니까 한번 좀 구경하도록 해 달라고.

내가 그래 문을 열기 때문에 내가 밖에서 들여다 봤어. 들여다 보니까 그뭐 이리저리 해 가지고 있는데 ‘저 사람이’ 내가 그걸 못 봤어. 내가 거기서 묻기를 `어둡지 않소?’ 이라니까 ‘뭐 요래 놓으면 밝습니다.' 이래 내가 `어둡지 않소?' 그래 물은 것은 이 사람이 자연 식품을 먹어서 지금 건강한지 특효약을 써서 건강한지 특효약을 써서 건강하면 이거 시원찮고 자연 식품을 먹어서 이래 이만치 건강해졌으면 이거 괜찮다 싶어서 이라니까 ‘요래 놓으면 환하이 밝아서 성경 얼마든지 볼 수 있읍니다.’ 성경 보는 모양이라.

그래서, 우리가 어짜든지 이 성경과 나와 관계를 끊어 놓고 성경은 성경대로 내가 읽으면은 그것은 성경과 나와의 관련을 시키지 안하면 이 복음은 내 복음이 안 됩니다. 이 복음은 내 복음이 안 되고 남의 복음이 됩니다. 남의 복음이 되니까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복되게 설교는 해 줄 수 있을지라도 제 구원은 이루지를 못합니다. 또 이 복음은 제 복음이 안 됐기 때문에 이 복음은 남의 복음이 됐으니까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교정하는 데는 필요 있지만 제게는 아무 소용 없읍니다. 저 고치는 데는 아무 소용 없어.

그러니까 자, 남의 복음으로 가진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 됩니까? 교만한 사람 됩니다. 교만한 사람 돼요. 그러기 때문에 지식은 교만케 하는 것이라고 했읍니다. 이러니까 뭐 그만 그리 되면 그 사람 교만해서 그 고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성경을 자기와 이 결부시켜서 성경을 보지 안하면 거게서 효력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성경 봐도 나중에 가서 교만하기만 하고 남에게 가르치기는 가르칠지라도 제게는 아무 소용이 없어.

꼭 이 성경을 보는 데에는 자기에게 관련 있어 자기 복음으로 봐야 됩니다. 자기 복음으로 봐야 되니까 이 성경 말씀에서 첫째는 배울 것, 내가 모르는 거 많이 있으니까 배울 것, 배우는 거는 내 밖에 있는 저 밖에 있는 거 모든 걸 배울 것, 그라고 난 다음에는 내가 내게 있는 거 고칠 거, 또 내가 해야 될 거 안 한 게 뭐꼬? 해야 될 일 안 한 거, 해야 될 일인데 안 한 거 이런 걸 자꾸 고치게 되면은 그 일에는 양식을 바로 먹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심령이 피곤하지 않습니다.

자꾸 심령이 새로와지고 강건해집니다.

그러면 자꾸 성경을 보고 싶고 자꾸 신앙 생활하는 것이 힘이 나지고 자꾸 이래 되지지마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만 신앙 생활이 언제 하다가는 늙어지면 그만 신앙 생활이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생활에 정상으로 되어지는 것은 “무거운 짐진 거와 같다” 그러면 무거운 짐은 지면은 처음보다 갈수록이 무겁습니다. 무거운 짐진 거와 같다 그 말은 신앙 생활하는 게 신앙 생활해 갈수록이 자꾸 마음이 눌려지요.

마음이 눌려지고, 자꾸 조심도 더 돼지고, 열심도 더 나고, 또 애도 더 쓰고, 충성도 더 하고 이라니까 갈수록이 자꾸 신앙은 새로워지니까 “겉사람은 후패하나” 겉사람은 노쇠해서 약해지지마는 속사람은 날로 자꾸 새로와져.

강건해져.

이러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지금 우리 서부교회가 이거 하나 살아나면 많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들이 살아날 수 있고 이 서부교회가 이라다가 그만 주저앉아 버리면 많은 교회들을 주저앉힐 수 있읍니다.

이래서, 벌써 이 주일학교만 해도 한 칠백여 교회가 와 가지고 시찰하고 갔는데 그분들은 유익 봤지마는 요새는 지금 주일학교가 내려오니까 지금 제 참 마음이 쫄리고 가슴이 떨립니다.

장년반들도 우리가 암만 이렇게 기도하고 뭐 또 성경대로 산다고 이래 떠들어 쌓아도 표적이 있어야 돼, 표적이. 표적이 있어야 되는데 신앙 생활한 표적은 제일 껍데기 표적이 뭐라 했지요? 제일 껍데기 표적이 경제라 그 말이요, 경제. 제일 껍데기 표적이 경제라.

그러면 제일, 우리가 신앙 생활 한다 하면은 자꾸 경제 형편이 자꾸 더 좋아져 가야 돼요. 경제 형편이 자꾸 좋아져야지 뭐 예수는 잘 믿는다 하는데 자꾸 모든 경제 형편이 오그라지면 이거 틀려. 그러면 우리가 신앙 생활 바로 하나 안 하나 그거 제일 껍데기의 겉껍데기로 표적 나는 것이 경제 표적이 제일 겉껍데기라.

그 다음에는 무슨 표적이라 했어? 그 다음에는 무슨 표적? 그 다음에는 사업 표적이라, 일 표적. 자기 활동이 형통해져요. 자기 자꾸 활동이 형통해져요. 그거 그러면 자기 활동하는 일이 자꾸 형통해지고 그 사람 하는 일 ‘그 사람 하는 일 뭐 잘된다.’ ‘저 사람 요번에는 꼼짝 못 하게 절단난다’ 하는데 떡 엉뚱이같이 자꾸 말씀대로 하니까 ‘저게 절단나는데 그때는 수단을 좀 부리고 지혜를 써야 되는데 저거 신앙 고집만 가지고 저래 한다’ 이라니까 ‘저거 절단난다' 했는데 아니 절단난다는 그것이 푹 일어나 버립니다. 이러니까 인제 꺼꾸로 속 껍데기는 뭐이냐 하면 모든 “무릇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는 이게 있어야 된다 말이오.

그라고 난 다음에는 또 뭐입니까? 그 안에 안 껍데기는 그 사람이 언행심사에 행동하는 게 달라졌다 말이오. 언행심사에 행동하는 게 달라졌어. 행동하는 거 이거는 속속 껍데기야, 속속 껍데기.

또 속에 알맹이는 뭐이요? 알맹이는 그 사람이 달라져 버렸어. 달라졌는데 영 그전과 달라. ‘그전에 구걸하던 사람같다’ 그런데 달라져 버려. 눈도 달라졌지, 귀도 달라졌지, 입도 달라졌지, 다 달라졌어. 사람이 달라졌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졌다 그 말이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졌어.

그라면 껍데기가 몇입니까? 자, 껍데기 물질, 또? 사업, 또? 행동, 또? 사람. 이게 다 껍데기요. 알겠읍니까? 껍데기인데, 이게 다 껍데기야. 알맹이는 뭐인가? 그 속에 그리스도가 내주해 가지고 그거 보니까 입에서 젖과 꿀이 나옵니다. 젖과 꿀이 나와. 입에서 하나님 말씀이 줄줄 나오고 영감이 줄줄 나오고 그 속에 영감이 줄줄 나와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한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내 안에서 아버지가 일하시는 그 일이 밖으로 나왔다. 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 보니까 주님의 말씀이 속에 줄줄 줄줄 자꾸 나온다 그거야. 그러면 그게 인제 뭐입니까? 그거 우리는 성전이고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셔 가지고 내 언행심사를 맡아 주관하시게 되는 것이라.

그러니까, 이제는 말도 주님으로 인하여, 생각도 주님으로 인하여, 뜻도 주님으로 인하여, 소원도 주님으로 인하여, 또 모든 걸 접할 때도 나 혼자 접하지 않고 주님하고 둘이 동행해서 접하고, 그래서, 옛날 사람들도 구약 시대도 다 이렇게 살았어요. 신명기 11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18절에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마음과 뜻에 두고”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항상 두고, 마음에 항상 두고, 내가 어떤 노인 한 분 봤는데 그분이 나이가 뭐 팔십 몇 살이라요. 팔십 몇 살인데 보니까 뭘 이래, 이래 퍼뜩 이래 앉았으면서 ‘주여, 주여,’ 또 뭐 하는데 ‘주여’ 보니까 주님을 잊어버리지 안할라고 `주여 주여' 하는데 요새 며칠 보니까 그만 잊어버려 버렸어. 주님을 잊어버려 버렸어.

내가 보고서 ‘다르네요’ ‘어짠지 그만 뭐 그때는 정신이 까랑까랑 모두 환한데 하나님께서 내게 말을 거둬갔어.’ 이래요. ‘말을 거둬갔어. 그전에 하던 말 그 전에는 사람 닥치면 좔좔좔좔 이거 생명의 말씀을 했는데 말을 거둬갔어.

성경을 볼라 해도 도무지 눈에 안 보여.’ 성경이 안 보인대요. ‘성경이 안 보이고 기도 암만 할라 해도 기도가 안 되고 하루 종일 기도 하나도 안 되고 성경 읽어 볼라 해도 성경이 안 보이고 그만 내게 말을 거둬가 버렸어. 내 말을 거둬가서 이제 구역을 못 보겠어. 구역 식구 데리고 아무 할 말이 없고 말이 없어.’ 당장에 그리 돼지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있으면 좔좔좔 그래요. 그리스도가 그렇게 뭐 우리 안에 계시면 항상 토막 나무 모양으로 장 그래 있는 줄 압니까? 그리스도는 번개보다 더 빠른 어른이라. 그러기 때문에 금방 와서 계시다가 금방 없어집니다.

이래서 아가서에 말하기를 “노루와 사슴 같은 사랑하는 자라” 했읍니다.

노루하고 사슴하고는 짐승 중에도 별다른 짐승이오. 뭐 이래 밭에 뜯어먹다가, 뜯어먹다가 생전 안 보던 돌뱅이만 하나 봐도, 못 보던 돌뱅이만 하나 봐도 그만 달음질을 쳐 가지고 저 만당, 어데든지 만당이 아무리 큰 산이라도 만당까지 해 올립니다. 그만 도망을 쳐 버리요.

이 모양으로 주님은 자기 뜻에 맞지 안한 거 하나 보면은 그만 뭐 천리 만리 달아나서 없읍니다. 암만 만날라 해야 찾을라 해야 없어.

내가 저 아레 금요일날 밤에 설교를 할라고 저녁도 안 먹고 왔어. 저녁도 안 먹고 이래 와 가지고 이랬는데도 그만 설교 못 해. 왜? 그날 그래 이래 하다가 누가 찾아와서 그 사람하고 뭐 이런 얘기하고 뭐 교회 얘기 뭐, 어떤 목사님이 찾아왔는데 이리저리 하다 그만 거기서 저녁도 못 먹고 이래 바로 왔는데도 그만 그래 가지고 어떻게 그만 삐뚤어져 놓으니까 주님하고 나하고 핀트가 안 맞아. 안 맞아서 뭐 설교 암만 할라 해야 할 수가 있어야지? 할 수 없어 그날 인제 ○○○목사 시켰어. 누구만 오면 헛일이라.

저 먼저 또 금요일날도, 똑 금요일 이 사람들은 저거 뭐 ‘중우 삶은 물에 나물 데친다’ 하던가 뭐뭐 뭐라 하던가 하는 거 모양으로 말이지요. 이제 이 금요일날 오는 걸음에 와 가지고 사람을 괴롭히는 거라. 그래 와 가지고 떡 와 가지고 이라니까 그만 그 사람들 오면은 그만 그날 와 가지고, 나는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하고 자꾸 이래 교제하고 이와같이 근근히 이래 연줄이 돼 가지고 있는데 와 가지고 그만 이래 끊어버리면 그만 헛일이라. 하루밤 지내야 되지.

하루밤 지내면 인제 그날밤에 좀 고생을 하고 이래 해야 돼지지 그리 안 하면 연결이 안 돼요.

어떤 사람은 뭐 이라다가 설교해도 되고 저라다 설교해도 되고 그런 사람은 능해 그런지 몰라도 그만 그분과 끊어지면 할 말이 없어. 할 말이 없고 뭐 입도 안 벌어지는데 어짭니까?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마음과 뜻에 두고” 뜻이라 말은 계획할 때에 뜻입니다. 할 때 뜻이니까 뭐이든지 경영할 때에 이 말씀이 그 뜻을 주장해 가지고 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돼. 옛날도 이래 믿었어요. 이래 믿었어요.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여 기호를 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손목에 매어서 기호, 기호라 말은 번호라 말이오. 손목에 하나님 말씀을 매어서 번호를 매겨 가지고 ‘요럴 때는 네가 움직이고, 요래 요럴 때에는 네 손을 움직이고 요래 요럴 때에는 네 손을 움직이지 말고’ 그래 가지고 하나님 말씀으로 이 기호를 삼아서 네 손 하나 움직이고 펴고 하는 것이 함부래 딱 ‘요럴 때는 움직여야 되고 요럴 때는 움직이지 말아라.’ 그렇게 네 손 움직이고 멈추는 것을 요 말씀으로 딱 법을 정해 가지고 그렇게 이 손목에다가 매어 가지고 기호를 만들어 가지고 그래 살아라. 이래 가지고 다 신앙 생활 했다 말이오.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너희 미간에, 눈 사이에 이래붙여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여기다 딱 표를 붙여 가지고 ‘그런 거는 보지 말아라, 그런 거는 봐라, 그럴 때는 정신 차려 봐라.’ 요렇게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행동하는 거 이거 하나하나를 주님의 말씀과 동행해 가지고 검토해 가지고 이래 해야 신앙 생활이 되어지는 것이지 아무나따나 되는 것 아닌 것입니다.

또, ‘아이구 그래 할라 하면 어떻게 그걸 할 수 있겠느냐?’ 아니야, 연습을 하면 차차 돼진다 말이오.

나는 스케이트 탈라 해도 타지 못해서 말았는데 여기 동남아에서 일등한 사람 여기 있어요. 여기 ○○○목사님이 스케이트 그때는 동남아 일등을 했어.

일등했는데, 아마 그럴 거라. 그거 타는 사람 보니까 제가 ‘요럴 때는 어째 넘어갑니까?’ ‘어째 넘어가?' 논리로 몰라. 논리로 몰라도 연습이 돼 가니까 뭐 닥치면 척척 이래 돼 버리는 거라.

이거 모양으로 생각하면은 ‘그렇게 손 놀릴 때에, 눈 놀릴 때에, 귀 놀릴 때에 그 하나를 전부 말씀 가지고 다 검토해서 그렇게 할라 하면 그거 되겠나? 백지 궤변이지 말로만 그렇지 그럴 수 있겠느냐?’ 아니야.

스케이트 타는 것도 ‘봐라, 요럴 때는 네가 요라고 조라고’ 논리적으로 스케이트 타는 것을 만일 설명해 놓으면은 그거 보고는 아무도 탈 사람 없읍니다.

아무도 못 타요. 언제 퍼뜩 넘어가는데 그때 요렇고 요렇고 요렇고 어찌 되겠읍니까? 그런데 익숙해지면 저절로 그 순서가 다 돼 가지고 요리 넘어갈 때 요리 재끼고 이래 해 가지고 타도록 돼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실지로 이렇게 연습하는 데는 연습하지 안하면 안 돼요.

이러니까 이 말씀을 우리가 손에다가 매어 가지고 기호를 삼고 눈 양 미간에 여게다 딱 표를 삼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말이오.

“또 그것을 너희 자녀에게 가르치며” 이 말씀을 또 너희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앉았을 때도 이 말씀을 항상 생각하고,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길 가면서도 항상 말씀 생각해. 말씀 생각하면 뭐 전봇대 가다가 박 깰라고? 아니야. 말씀을 생각하는 데는 기이합니다. 말씀을 생각하면 사람이 까랑까랑해지요. 말씀은 전능입니다. 전지입니다. 말씀과 나와 동행할 때는 모든 게 까랑하고 명철해집니다.

또 말씀을 자꾸 이랄 때는 그라다가 보면 뭐 할 일도 못 하고 다 그라다가 마느냐? 아니야. 이 말씀과 동행할 때는 일을 몇 배 더 합니다, 수월하고. 일을 척척 잘하지, 또 그 일에 대해서 방해하는 것들이 없어지지. 이러니까 어찌 되는지 몰라.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은 도무지 못 해요. 그 사람 하는 일을 따라갈 수가 없어. 몇 배 해.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길을 가도, 또 누웠을 때도, 앉았을 때도, 또 “일어날 때든지” 앉았다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이 말씀을 강론하고” 그라면 제가 앉았다 누웠다가 일어났다가 자꾸 이 말씀을 설교하면 다른 사람 보면 미쳤다 할라고, 중얼거려 쌓으면? 저 혼자 설교하는 거라, 저 혼자. 제가 제게 설교하는 거라. 자기가 자기에게 자꾸 이 말씀을 ‘이 말씀은 이런데 나는 어떠냐?’ 자꾸 이래, 구둥거리는 것이 이래 자꾸 하는 것이 그게 아니면 안 돼요.

그러니까 건강하면 좋은 것도 있지만 나쁜 것도 있어요. 나는 그전에 거석할 때에는 여기서 내려오면 행여나 처박힐까 싶어서 뭐 찰나도 주님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주님이여, 낙상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주님이여, 낙상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붙들어 주시옵소서. 낙상되지않게 해 주옵소서. 붙들어 주옵소서.

낙상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이랬는데, 요새는 조금 건강하니까 ‘주님이여, 낙상되지 않게 해 주옵소서’ 그라고 나서, 그전에는 그 층층대 내려올 때 아마 스무 번이나 서른 번이나 했을 거 같으면 요새는 한 열댓 번 할까? 반도 안 해요.

그러니까 주님과 나와는 이 건강하면 오히려 멀어지기 쉽다 말이오.

“강론하고”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그 대문 “바깥문에 기록하라” 이 문설주에도 기록해 놓고 대문에도 기록하고 그라면 뭐 우리가 그라겠읍니까? 그 말은 뭐이냐 하면은 출입할 때마다 네가 절대로 말씀 버리고 너 혼자 출입하지 말고 언제든지 출입할 때에 말씀과 같이 출입하라 그 말이오.

말씀과 같이 출입하라.

“기록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약속하신 모든 약속 축복을 다 주어서 “너희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이 장구함같이 장구하리라” 이러면 이 모든 땅이 이 우주 속에 딱 파묻혀 가지고 싸여 가지고 있는 것처럼 너희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 은총 속에 파묻혀 가지고 싸여 가지고 있어서 너희들의 그 모든 너희 모든 행사가 장구하리라 이렇게 말씀했읍니다.

이러니까 어짜든지 오늘 주일부터, 오전에도 이 말씀했고 오후에도 이 말씀했는데 이제 성경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되면 지켜 행하는 자는 저절로 돼요. 읽는 자 듣는 자 되어서 원수를 다 물리치고 지켜 행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사람이 되어집시다.

이러는 데는 이 말씀은 말씀대로 그리 하지 말고 말씀과 나와 꼭 하나를 만들어요. 만들어서 말씀이 나에게 뭘 가르치고 있는가? 말씀에서 배워요.

하나님은 완전자인데 이분이 복의 근본이신데 이분만, 이분하고 나하고 친하면 되는데 이분을 아는 것도, 친할라면 알아야 안 돼요? 이분을 친할라면 알아야 되고, 이분에게 잘 보일라면 그분을 알아야 되겠고, 이분을 알아야 되겠고, 이분을 친해야 되겠고, 이분을 친밀한 교제를 가져야 되겠고, 이분에게 모든 것을 다 받아야 되겠고 이래야 될 터인데 이라는 데는 성경 외에 딴거 없어.

그분을 아는 것도 성경에서 알 수 있고, 또 그분의 비위 아는 것도 성경에서 알 수 있고, 그분을 친하는 방법도 성경에 알 수 있고, 그분이 좋아하는 사람도 성경에 알 수 있어. 그러면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되면 당신이 나를 좋아해요. 그분이 좋아하는 사람이 안 되면 당신이 나를 좋아할 수가 없어.

이러니까 여게서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신 이 주님이 좋아하면 다 되는데 이 생명길을 우리가 내놓고 어만 데 가 가지고 자꾸 이거 뭐 거짓부리 하나님들을 만들어. ‘이거 공부하는 데는 여기 해야 된다. 출세하는 데는 서울대학 가야 된다.’ 전부 그게 우상이라. 서울대학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야 돼요.

이러니까 모든 성공은 주님에게 있는데, 모든 주권은 주님에게 있는데 주권을 ‘주님은 이런 데 주권 없다’ 치워버리고 어만 주권자 어만 하나님을 갖다 하니까 “내 앞에 다른 하나님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다른 것들이 하나님노릇 할라고 자꾸 밀고 들어올 때에 막 물리쳐야 돼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늘 작정합시다. 이제는 어짜든지 뭐 그저 차에 가면서도 성경, 인제 특효약으로 이거 재독을 들었는데 이제는 재독 안 들은 사람은 자꾸 재독 듣고 재독 들어서 벌써 힘이 난 사람들은 자꾸 또 성경 읽어요. 길에 가면서도 성경, 차 타고 가면서 성경, 앉아도 성경, 그만 다른 사람이 보면 저거 정신 이상자라고 할 만치 그만 얘기해도 성경, 어짜든지 뭐라 하든지 그만 성경을 손에서 떠나지 말고 자꾸 읽되 그냥 술술 읽어버리면 헛일이라. 장수만 넘기고 읽으면 안 돼. 꼭 성경과 나와 결합을 시켜야 돼요. 결합을 시켜서 이래 하면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고 이제 신앙 생활 해도 그전에 오래부터 신앙 생활한 사람보다 훨씬 앞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3256 성경론/ 디모데후서 3장 15절-17절/ 850809금새집회 선지자 2015.11.04
3255 성경론-하나님의 말씀은 전능/ 누가복음 1장 37절/ 850809금야 선지자 2015.11.04
3254 성경만 보면 깨달아 지도록/ 사도행전 20장 31절-32절/ 870918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04
3253 성경말씀을 근거하라/ 에베소서 4장 13절/ 890205주후 선지자 2015.11.04
3252 성경말씀을 묵상-주관적평안/ 마태복음 14장 26절-33절/ 850217주후 선지자 2015.11.04
3251 성경번역-고등비평가/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 890123월새 선지자 2015.11.04
3250 성경보고 기도함으로 자기를 만들것/ 디모데전서 4장 5절/ 861010 지권찰회 선지자 2015.11.04
3249 성경연구법/ 에베소서 6장 1절-4절/ 870327금새 선지자 2015.11.04
3248 성경영감/ 디모데후서 3장 10절-17절/ 870107수새 선지자 2015.11.04
3247 성경을 아는 방법/ 디모데후서 3장 15절-17절/ 861220토새 선지자 2015.11.04
3246 성경을 주신 목적/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800606금야 선지자 2015.11.04
3245 성경을 주신 목적/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800607토새 선지자 2015.11.04
3244 성경을 주신 목적/ 베드로후서 2장 22절/ 800516금새 선지자 2015.11.04
3243 성경의 내재적 증거/ 베드로후서 1장 1절-2절/ 840331토새 선지자 2015.11.04
3242 성경의 인물을 연구하여 자기성공/ 창세기 13장 14절-15절/ 881223금새 선지자 2015.11.04
3241 성경이 보배인 이유/ 시편 1장 2절/ 800930화새 선지자 2015.11.04
3240 성경읽고 묵상하는데 힘쓰자/ 시편 1장 1절-3절/ 800923화새 선지자 2015.11.04
3239 성경읽기/ 갈라디아서 1장 1절-5절/ 840120금새 선지자 2015.11.04
3238 성경읽는 목적-믿음-2가지 결과/ 디모데후서 3장 13절-17절/ 871021수새 선지자 2015.11.04
» 성경읽는 요령/ 요한계시록 1장 2절-3절/ 870329주후 선지자 2015.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