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영감

 

1987. 1. 7. 새벽 (수)

 

본문:디모데후서 3장 10절∼17절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 약속을 따라서 살 때에는 반드시 핍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계약대로 살면 반드시 거게는 충돌이 있고 마찰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일이요 세상은 마귀의 뜻대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마찰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는 일이요 고치는 일이기 때문에 세상은 죽이는 일이요 모든 것을 다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마찰이 됩니다. 정반대이기 때문에 마찰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필연한 일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는 반드시 그렇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이렇게 무엇을 할 때에 세상에서 대립과 이 마찰이 오면 그것을 이상한 일로 생각해도 안 되고, 또 그것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와 같은 일이 있으니 마음에 있는 것을 불만스레 생각해도 안 되고, 또 그 있는 것을 이해 못 하고 ‘어짠 일일까?’ 그렇게, 안 닥칠 일이 닥치는 것처럼 이상하게 생각해도 안 됩니다.

그것은 반드시 마찰이 오는 것이요 대립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이 약속대로 하는 것은 세상과 반대기 때문에 필연이요, 또 말씀대로 약속대로 하는 것은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죽이는 것이 죽고 죽는 것이 저희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방편도 사상도 힘도 정반대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세상이 깨어지고 세상대로 하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깨져 버립니다. 깨어집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양 사이에 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법칙을 따라서 살면 나와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나와 내게 있는 모든 것과 나와의 관련되어 있는 모든 그런 것이 다 깨어집니다. 세상에 속한 나와 세상에 속한 나의 것이 다 깨어집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나의 세상 것도 깨어지고 나와 관련되어 있는 세상 것도 깨어집니다. 왜? 그것은 하늘나라의 것이, 또 산 것이, 온전한 것이 올라고 하니까 온전치 못한 것이 그거 다 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필연적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때에 깨어지는 것과 절단나는 그런 것을 보고 슬퍼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여러가지로 고통스러워합니다, 자기 것이 깨어지고 자기와 관련된 것이 파괴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그 고통스럽게 여기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이 옛사람이든지 옛사람이 아니면 아직까지 그걸 바로 깨닫지 못해서 알지 못한 무지한 사람이든지 그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완전히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라도 죽어야 되고 또 무지한 사람이면 무지한 사람이 죽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에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하는 것은 마찰을 받으리라 하는 것인데 이거는 필연한 일이요 없으면 헛일입니다.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다이나마이트의 이 폭탄을 터주면 바위가 갈라져야 되지 그거 안 갈라지는 건 공사가 성공을 못 합니다. 그런 것처럼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사망에 속하고, 세상에 속하고, 멸망에 속한 것들이 깨어져서 그것이 없어져야 생명과 영원과 온전에 속한 그것이 건설이 되어지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깨어지는 것을 속사람은 좋아하고 겉사람은 걱정하고, 아는 사람은 좋아하고 무지한 자는 근심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서 나올 때에 홍해 바다 왔을 때에 애굽 병정은 추격하고 앞에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하니까 이것이 지금 하나님의 능력이 오셔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해하는 그 세력이 없어지고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할라고 하나님이 그런 장면으로 인도하셨고 그런 장면을 닥친 것인데 이 사실을 아는 모세는 기뻐하고 즐거워했지마는 이것을 모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심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을 닥쳤을 때에 대적의 애굽 병정들은 다 파괴를 당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그런 사람들을 만나보지 않는 그런 온전한 구원을 얻게 됐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계약의 말씀,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 말씀은 다 생명이요, 또 영원이요, 불변이요, 완전이요, 무한한 능력이 되기 때문에 이 말씀대로 우리가 믿고 행하면, 인정하고 행할 때에는 마구 세상과 사망에 속한 것이 콱콱 부딪힙니다.

부딪혀서 깨지고 부딪혀 깨지고 자꾸 이러는데 사람들이 부딪히는 것만 보고 걱정하고 낙망하지 부딪힌 다음을 보지 않습니다. 부딪힐 때에 보고 놀라고 야단을 지기는데 부딪히고 난 다음에는 부딪히면 버썩 깨져버리고 부딪히면 버썩 깨지고 온전한 것이 건설이 되고 승리가 되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소망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소망하고 참고 견디고 보니까 “너희들이 여러가지 시험을 받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아니할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주의 말씀대로 자기가 행할 때에 부딪혀지는 마찰을 보고서 근심했지마는 그 마찰당하면 어느 것이 부숴지고 깨지는가 하는 그걸 볼 때에 사망에 속한 것들이 다 깨어지고 생명에 속한 것들이 완전히 성장되며 세상은 깨어지고 천국이 건설되는, 자기 인품에서도 그렇고, 속성에서도 그렇고, 자기 소망에서도 그렇고, 또 자기의 취미에서도 그렇고, 모두가 다 세상에 속한 거는 그런 일을 통해서 마구 박살이 나집니다.

그러고 자기가 흐미하게 생각했던 하늘나라의 것은 완전히 이루어지는 그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말을 했고, 또 그거는 왜 그러냐?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의 보호함을 입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계약대로 행하는 것은 전지 전능의 능력이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그것은 털끝만한 것도 깨어지거나 없어지거나 그렇지 안하고 그렇게 행할 때에 마찰되는 것은 다 깨어집니다. 커도 깨어지고 작아도 깨어지고 마찰만 되면 다 깨지기 때문에 깨지는 걸 보고서 걱정하는 것은 옛사람에게 속한 것이요 마찰되고 난 다음에 상대방이 깨어지고 하나님 말씀은 서 있는 것을 볼 때 기뻐하는 것은 새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시간 시간마다 옛사람은 죽어지고 새사람은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느니라” 악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안 믿는 사람들이 다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불택자들인가? 아니오. 택한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악한 사람으로 살 때도 있고 경건한 사람으로 살 때도 있는데 악한 사람으로 사는 거는 어떤 게 악한 사람으로 사는 것인고 하니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사람으로 우리가 살 수도 있고 또 경건하게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으례히 악한 자로 사는 것이요 속이고 속는 자로 사는 것인데 예수님을 믿는 택한 자들도 자기 현실에서 생활할 때에 악한 자 생활할 수도 있고 속는 자 생활할 수도 있고 속이는 자 생활할 수도 있습니다.

악한 자로 사는 것은 다 속는 일이요 속이는 일인데 그렇게 사는 사람은 점점 그 사람 됩니다.

악한 사람으로 살고, 속는 사람 속이는 사람으로 살아 보니까 그래 사는 사람은 자꾸 그 사람이 돼서 그 사람 살게 되고, 그때에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경건하게 살아 보니까 그대로 모든 하나님의 약속대로 사는 그 생활에 마찰되는 것은 깨어져 버리고 썩을 것과 죽은 것과 없어질 거와 세상의 것들 다 그런 것들은 거짓부리는 다 깨어지고 참된 것이 성립이 되는 것을 자기가 보기 때문에 점점 믿음으로 믿음에 나아가게 됩니다. 점점 경건한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악한 자로 사는 자는 악한 자의 것이 깨어지는 것을 보고, 이 지금 성공하는 이거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지는 것을 보고 안 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점점 그 방편을 취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 결과적으로 항상 기쁨과 성공을 보고서 그저 마치 “내가 주는 물은 뱃속에서 생수가 되어서 목마르지 안하고 넘친다.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이곳에 좋은 샘물 흐르고 있다.” 이렇게 경건으로 사는 사람은 거짓부리가 깨어지고 참이 살고 죽음에 속한 것들이 깨어지고 생명에 속한 것들이 살아나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을 자꾸 할 수 있지마는, 예수 믿는 사람이 이래 살면 자꾸 만족합니다.

보니까 더러운 것하고 좋은 것하고 바꾸고, 죽은 것하고 산 것하고 바꾸고, 없어질 것하고 영원한 것하고 바꾸게 되다 보니까 ‘좋다 승리다 승리다 유익이다’ 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지마는, 악에 속해서 사는 사람은 자꾸 그게 깨어지니까 깨어지지 않도록 그 방편에서 그 면으로 자꾸 힘써 가니까 그 사람은 안 깨어질라고 하나 그게, 안 깨어질라고 하니까 그것이 안 깨어집니다. 안 깨어질라고 하니까 안 깨어져요. 안 깨어지니까 ‘됐다, 봐라, 이게 깨졌더라면 어찌 될 뻔했느냐?’ 이제 안 깨어지니까 그 사람은 파괴가 안 되니까 손해가 안 가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요.

그러면 그것은 뭐인데? 그것은 깨어질 게 깨어져야 될 터인데 깨어질 것이 안 깨어지니까 저는 좋아하지마는, 죽은 것은 없어지고 산 것이 생겨져야 될 터인데 죽은 것을 상대해 사니까, 죽은 것이 손해가지 안하도록 자꾸 하니까 그게 손해 안 갑니다.

믿음을 지키면 깨어질 거는 깨어지고 좋은 것은 남아 있지마는 믿음을 반대하면 좋은 것은 오지 못하고 더러운 것은 그대로 보존하게 되기 때문에 믿음을 지키지 안한 자는 자꾸 그렇게 지키지 안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키지 안하는 사람은 점점 지키지 안하게 됩니다.

이래서 갈라디아서에 말씀하시기를 “육체를 위해서 노력하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 심으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 그러면 우리가 현실에서 살 때에 성령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육체로 사는 사람도 있는데 육체로 사는 사람은 성령으로 살아서 건설되는 것을 자기는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하고,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육체를 위해 있는 그런 것이 원수인 줄 알기 때문에 그게 깨어져야 되고 이러니까 평가나 모든 소망이나 가치로 여기는 것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육체로 사는 사람은 육체의 것이 그것이 깨어질 것이 깨어지지 안하니까 좋다 다행이다 이라고, 또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깨어질 것이 깨어지고 생명의 것이 살아나게 되기 때문에 다행이다 이렇게 해서 그 모든 평가와 견해가 정반대이기 때문에 악한 자는 점점 악해지고 경건한 자는 점점 경건하게 됩니다.

“속이기도 하나니” 그것을 여러분들이, 우리에게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지식을 가지고 두 사람이 있고 두 생명이 있는데 한 생명은 죽는 생명이요, 그 생명은 하루 살면 그만치 죽었고 이틀 살면 그만치 죽은, 그 죽는 힘이 있다 말이요, 죽는 힘. 생명이라 말은 힘이라 말과 같은데 죽는 힘이 있고 또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죽는 힘, 안 믿을 때 우리가 사는 거, 안 믿는 사람이 사는 그거는 죽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그 착각을 해 가지고서 산 걸 ‘오늘 내가 하루 살았다’ 이랬는데 실은 하루 죽었습니다. 하루가 그만치 감해져 버렸소. 그러니까 벌써 사망으로 사망 선고를 받고 있어서 벌써 그 생명에서 끊어졌어.

하나님과 끊어졌기 때문에 하루 있으면 그만치 끊어진 그 결과가 더 많이 나타나고 일 년 있으면 더 많이 나타나서 일 년 사는 게 아니라 일 년 죽었고 십 년 산 게 아니라 십 년 죽었고 자꾸 이래서 그런데 그걸 사는 것 같지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것은 일 년 살았으면 일 년 그만치 영생이 이루어졌고 십 년 영생이 이루어지고 한 것이기 때문에 두 사람이 있고, 두 지식이 있고, 두 생명이 있고, 두 소원이 있고, 두 힘이 있고, 두 노력의 방편이 있으니까 요것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계약대로 사는 거 하나 있고 계약 아니고 이 세상 법대로 사는 거 하나 있고 그 둘이 있는데 하나님의 계약대로 살면 멸망할 것이 깨어지고 옛사람 것이 깨어지고, 또 세상대로 살면 멸망할 것은 그대로 유지가 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에 속한 것들이 살아나지를 못하고 건설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 두 종류 있는 것은 하나는 영원한 것이 건설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하나는 멸망할 것이 유지되는 걸 보고서 기뻐하고, 그러니까 죽음을 보고서 기뻐하고 하나는 생명을 보고 기뻐하고, 하나는 참 완전한 것을 보고 기뻐하고 하나는 이제 거짓된 것으로 기뻐하고, 기뻐하는 이 사람이 두 사람이 정반대라는 그런 것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을 평가할 때에 이게 좋으나 나쁘나 그 평가하는 것보다도 내가 하나님의 지식대로 평가하느냐 또 내가 옛사람이 되어 평가하느냐? 옛사람은 새사람의 일을 반대해서 멸할라고 하고 새사람은 옛사람의 일을 멸할라고 하기 때문에 우리 속에는 두 사람이 있으니까 이 사람으로 살면 저게 대적되고 저 사람으로 살면 이게 대적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되는 사람으로 살 수도 있고 마귀와 대적되는 사람으로 살 수도 있고 그 두 사람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 구별해야 되지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우리의 모든 평가는 헛일입니다.

‘오늘 큰 수입 봤다’ 이라는데 그 수입 본 것이 그게 썩음의 수입도 있고 삶의 수입도 있기 때문에 그 수입 본 걸 보고서 ‘수입 봤다’ 이렇게 지금 좋아하는데, 자기가 좋아합니다. ‘오늘 수입 봤다’ 좋아하는데 그러면 네 지식이 어느 지식이 돼 가지고 지금 수입 봤다고 하는지, 또 네가 어느 사람이 돼 가지고 수입 봤다 하는지, 그러면 옛사람이 수입 봤다 할 때에는 새사람이 절단났고 새사람이 수입 봤다 할 때는 옛사람이 절단났기 때문에 그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살면 헛일입니다.

시간 없는데, “속기도 하나니 그러므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확신한” 확실히 믿는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하는 것은 그것은 두 가지를 말하는데 외부에는 신앙 계통을 말합니다, 신앙 계통. 우리가 신앙의 계통, 신앙의 줄기를 이걸 언제든지 귀중히 여겨야 되지 그걸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영감도 제가 혼자 독립적 영감을 못 받습니다. 그러기에 꼭 교회라 하는, 기독교라 하는 것은, 혹 기독교를 민주주의라 이렇게 말하는데 민주주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독재주의입니다. 강제는 아니고 독재주의입니다.

독재주의라는 것은 자기 주장대로 그대로 쭉 해 나가는 것이고 여럿이 의논해 가지고 이래야 되겠나 저래야 되겠나 의논해서 다수 가결로 나가는 그것이 모든 민주주의인데 기독교는 다수 가결이 아니고 절대 단일 주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독재이고 민주주의가 아니라 이라는데 사람들은 지금 기독교를 민주주으로 아는데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이는 영원 자존하신 그 일원론입니다, 일원. 근본이 하나인 하나에서 나와 가지고 모든 것이 된 것이지 여러 것들이 종합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에게서 나온 그것이 거게서, 이제 그 계통에서 나와 가지고 아벨로 나와 가지고 또 아브라함으로 나와서 쭉 그런 계통으로 이래 나오고 있지 그 겉의 것이 많이 주 모아 가지고서 다수 가결로 그래 되는 것이 아니라 그거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그러면 이것은 사람 계통인 동시에 그는 사람에게 배운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배우는 게 됩니다. 사람 계통. 아브라함과 모든 우리 믿음의 조상, 신앙 계통으로 하는 그 계통 외에 딴 계통이 없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요한계시 21장에 보면은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 위에 그들이 다 기초석이 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그 토대 위에 그 진리 위에서 되어지는 것이지 다른 데 어데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언해 놓으시고 예언해 놓으신 그것이 실상으로 성취되고 자꾸 이렇게 계통적으로 이렇게 나오지 그게 없이 모두 되는 대로 그래 나오는 것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보고 다 깨달을 수 있지마는 선배들이 그 깨달은 교리와 신조가 있으면 그 교리와 신조를 자기는 타게 되는데 그 교리와 신조는 성경처럼 정확 무오한 것은 아니나 모두 성령 받은 사람들이 성경 보고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교리와 신조를 성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겨야 됩니다.

교리와 신조를 성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만일 교리 신조와 자기와 깨달음이 다를 때에는 그 제맘대로 깨달음이 다르다고 축축 주장해 나갈 게 아니고 그 교리와 신조가 자기와 깨달음이 다를 때에는 그는 성경을 많이 살펴 가지고서 이제 그 선조들이 깨닫고 나오는 그 교리 신조 그것이 성경에서 확실히 틀렸다 하는 것이 성경 증거가 그 증거보다 강할 때에는 우리는 그 교리를 수정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조도 수정할 수 있습니다.

그거는 정확 무오의 것이 아니고 인간이 들어 가지고 했기 때문에 잘못 할 수도 있는고로 교리 무오는 아닙니다. 교리 무오는 아니고 신조 무오도 아닙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교황이 말하는 교리 무오 신조 무오, 사람들이 해놓은 것을 성경처럼 무오라 이렇게 하기 때문에 천주교의 삐뚤어진 것 중에 제일 큰 것이 그것이 교황 교리 정확 무오, 신조 정확 무오, 교리와 신조는 대개 법왕, 교황이 내놓은 건데 그런 거 정확 무오라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분들이 잘못된 정권, 교권. 잘못된 교권을 가지고 주장해서 교리 정확 무오라 하는, 교리는 사람이 깨달은 것인데 그 교황이 깨달은 것을 전부 교리라 그때 천주교에 그랍니다.

이러니까 교리 정확 무오라는 그것이 들어서 천주교를 그렇게 부패하게 시켰습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잘못돼서 줄기를 찾는 거는 틀리고 옳은 줄기는 하나님 다음 성경 다음 가는 것이기 때문에 “뉘게서 배운 것을” 신앙의 계통 사람을 잘 알아야 되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되는 것을 말합니다.

뉘게서 배웠다는 요 뉘라 하는 요거는 먼저 외부적으로는 신앙의 계통을 네가 단단히 잡아라 하는 그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말하고 그 다음에는 그렇게 되면은 이제 그 다음에 내려가 보면은 하나님에게 직접 배우게 된다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신경에 뭐라고 했습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또? 그 다음에 또 뭐라고 말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히신 걸 믿고, 또? ‘성령을 믿사오며’ 예수님의 그 사활의 대속을 믿고 대속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성령을 믿고, ‘성령을 믿사오며’ 또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거룩한 공회와’ 거룩한 공회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신앙의 그 줄기 계통을 성령 다음으로 중하게 여기라 그 말이오. 성령 다음으로 중하게 여기라.

‘거룩한 공회와’ 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성도들의 그 교통, 그러기 때문에 성도의 교통이라 하는 것은 신앙 동지의 신앙 사귐을 말하는 것인데 신앙 동지를 잘못 정하면 망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회도, 공회 뭐 지금 여러가지 공회로 갈라져 있지마는 그 공회로 이런 교파 저런 교파 갈라져 있으니까, 모든 교파 다 나쁘다 말이 아니고 그 교파에 그 원줄기는 다 교리와 신조를 타고 난 그 교파지, 그런데 교리와 신조가 같으면 한 교파입니다. 그러나 지방을 따라서 교파의 이름이 다르고 또 혹은 어떤 사람이 깨달음이 달라 가지고 교파가 나오는 거 있는데 지방이 달라서 다른 그것도 필연적으로 있게 되고, 또 깨달음이 달라 가지고 교파가 다른 그것도 필연적으로 있게 되는데 깨달음이 달라 가지고 교파가 달라지는 거, 천주교가 처음에 원교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주교는 큰집이고 우리 개혁교는 열교라, 갈라져 나간 작은 집이라’ 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깨달음이 틀릴 때에는 깨달음을 그걸 고쳐 가지고, 고치니까 틀린 깨달음 거게서 사는 사람도 있고 고친 깨달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교파가 거기서 나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깨달음이 잘못된 그 사람은 그 사람들이 잘못됐지 그 교리가 잘못된 것 아닙니다. 그 교리가 있는데 그 사람들이 교리를 잘못 깨달았기 때문에 탈선돼 나가는 것이지 원선은 바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올바른 거룩한 공회는 쭉 내려와서 아브라함부터서 신구약 성경 이 교리 신조를 믿는 그 단일 교회 그것을 가리켜서, 단일 교회를 가리켜서 거룩한 공회라고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변동되지 안하니까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교파가 갈라지는 것이 그게 인제 하나는 정죄받고 하나는 옳게 됩니다.

왜 그러냐? 둘이 깨달음이 달라져 가지고 그래 됐다고 하면은 그 깨달음이 달라졌으면 뭐 이래도 저래도 되는 게 아니고 깨달음에 옳은 깨달음은 하나뿐이지 둘이 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깨달음으로 갈라졌으면 그것이 정죄받고 올바른 깨달음이 그대로 있으면 그대로 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거 교파 선정에 대해서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거룩한 공회가 성령 다음 간다 말이요, 거룩한 공회가. 성령 다음 되는데 그러면 거룩한 공회는 어떤 게 거룩한 공회이고 가치 있는 실력 있는 공회입니까? 실력 있는 공회는, 거룩한 공회라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거룩이라 하는 것은 지저분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구별하고 구별하고 자꾸 구별해 가지고 참된 하나에 도달한 것을 가리켜서 거룩한 것이라 그 말입니다.

세상에 지저분한 그런 모든 깨달음들이 가득히 찼지마는 그 중에 올바른 깨달음은 하나뿐이라 그 말이오. 거룩한 공회라는 건 그 공회라 하는 걸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교파의 가치는 어데 있습니까? 다수에 있습니까, 열심에 있습니까, 권세에 있습니까 교파의 권위는 어데 있습니까? 내가 말할 때 거기 있다 하는 사람들은 손을 드십시오. 다수,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그 다수에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또 그렇지 않으면 교파의 권세 세력, 교파의 세력에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교파 다수도 아니고 권세도 아니고 교파의 부강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부강은 천주교가 제일 부강합니다. 돈 제일 많습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거기는 죄를 지으면 속전만 내면 됩니다. 너는 죄를 지었으면 너는 천원 내면 된다, 너는 백만 원 내야 된다, 네 죄로 말하면 천만 원 내야 된다. 이래 죄에 대해서 가격을 붙여 가지고 돈만 많이 내면 되는 그래 가지고 천주교는 재산이 굉장히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또 교파라 하는 것은 교파의 권위는 이 성경대로의 이 진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녜, 진리에 있습니다, 진리. 진리에 있는데 진리에 있는 것보다도 더 권위 있는 것은 뭐입니까? 권위 있는 것은 영감에 있습니다, 영감.

그러면 영감은 진리 밖에 영감이 있습니까 그 진리 안에 영감이 있습니까? 진리 안에 영감이 있습니다. 진리 안에 영감이 있는데 그 영감이면 영감 위에는 뭐입니까? 하나님 자체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 계통을 중하게 여겨야 됩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이걸 몰라서 이 교파가 좋으냐 저 교파가 좋으냐 어느 교파가 좋으냐 그런 게 아니라 그 교파의 모든 것을 따져 들어가서, 교리라면 깨달은 것인데 깨달은 것을 가리켜서 교리라고 하고 신조라 하는 것은 자기가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을 그것을 가리켜서 신조입니다.

그러면 교리와 신조가 어느 것이 성경대로 있으며 어느 것이 바로 돼 있느냐 거게 가치가 있는 것이지 뭐 사람 숫자야 많고 적고 현재 권세가 있고 하는 거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뉘게서 배운 것을” 하는 것은 이것은 사람 계통, 신앙의 사람 계통과 사람 계통 그것만이면 안 되고 사람 계통 속에 하나님에게 직집 배우는 그 계통이 없으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이거 아주 중요한 말이오.

“알며”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성경을 알았다는-이거 시간 없는데-“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을 그 사람이 성경의 권위 있는 걸 네가 알았지마는, 권위 있는 걸 네가 알았지마는 더 권위 있는 것을 내가 말해 주겠다 그 말입니다. “알았나니” 하는 건 성경 권위를 네가 인정했지마는 인정 네가 한 것으로 그거 다가 아니라 한없는 권위가 속에 들어 있다. “성경은 능히” 하는 것은 성경의 이 독자적 그 전능성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성경의 독자적 전능성을 가리켜서.

그라고 또 요번에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는 이것을 말했는데 이것도 벌써 성경 기록에 대한 그 기록 영감에 대해서는 수많은 그 영감들이 있습니다. 기록 영감에 대해 수많은 영감들이 있는데 이번에 제가 말하는 그 영감, 그 영감은 모든 영감에 이리저리 치우치지 안하고 정확히 말했기 때문에 그 성경 영감을 그렇게 똑 믿어야 되지 아직 지금까지는 이런 쪼갱이 저런 쪼갱이 이리 치우치고 저리 치우치고 다 치우쳤는데 그리 치우치면 안 되고 이리도 저리도 치우치지 안하고 그 모든 것을 다 가진 올바른 영감, 영감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일하셨다 그 말입니다.

성경이 영감됐다 말은 성경은 당신이 우리 이 구원 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당신이 성경을 이렇게 기록하는 데에는 첫째 영원 전부터 계획해서 성경 기록할 사람을 만드셨고, 또 말을 만들었고, 이것도 말을 만들었다는 이거 지금 사람들이 부인해도 따져 들어가면 알 건데 아직까지는 그런 말이 별로 없습니다.

히브리어니 헬라어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벌써 성경 기록하기 위해서 그런 방언을 만들어 가지고 그 방언을 발달을 시켜서 그 시대에는 제일 유력한 그 방언으로 했고, 또, 나는 히브리어를 몰라요. 우리가, 그거 내가 시간이 없어서 못 물어봤는데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그것은 다른 그 모든 어학들보다 정확 무오한 것을 증거하는데 그거는 무슨 성경 원어는 많은 방언을 가진 그것도 가치가 아니고 많은 방언에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세밀히 말한, 세밀히 말해서 ‘문’ 하면은 하나뿐이지만 문은 뭐 큰 문 작은 문, 또 문을 조금 열어라 뺄쭘 열어라, 또 확 열어라, 문을 닫아라 이렇게 그 문에 대해서 많은 말이 난 그런 데 가치 있는 게 아니고 요것은 정확 무오한 그 정확 무오성을 발표하는 데에 제일 유력하게 그 글자라든지 그 모든 모음 자음도 다 그렇게 돼 가지고 있고 단어도 그와같이 돼 가지고 있다, 그 모든 글자 조직이 그와 같이 돼 있다 그것을 지금 원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거게 그것이 좀 표현되어 있지 않나 그것을 제가 한번 물어볼라 하는 게 지금 그걸 물어 보지 못했는데 반드시 그들이 몰라도 꼭 거게 이 정확 무오하다 하는 정확 무오에 제일 유력하도록 원어가 하나님이 만들어 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생긴 것이 하나님은 성경 기록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지 그때 하나님이 성경 기록할라고 보니까 ‘이때 어느 방언을 등용을 할까? 이 나라 방언을 등용하면 유익할까 저 나라 방언을 등용하면 유익할까?’ 그런 게 아니오.

그거, 함부래 성경 기록하기 위해 미리부터 그 방언을 하나님이 내셨다 그 말이오.

사람을 미리부터 만들어 냈고 성경 기자를 만들어 냈고, 또 방언을 냈고, 또 붓을 만들어 냈고, 종이도 만들어 냈고, 붓도 거게 쓸 붓을 만들어 냈고 뭐 ‘붓을 어느 붓을 쓸 것인가?’ 아니야. 저거딴에는 어느 붓인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거기 쓸 붓을 다 구별해서 그래 가지고 만들어 내 가지고 하나님이 그거까지 다 만들어 내서 나중에 글자를 성경을 쓸 때에도 한 혹 삐치는 것도 제맘대로 못 삐치고 하나님께서 똑 통해서 한 획 삐치게 하고 째치고 한 그것까지 하나님이 끝까지 해서 성경을 딱 기록하는 데는 이런 거 저런 거 하나님께서 기록에 이용하는 그 모든 이용 기관은 여러가지를 삼았지마는 끝까지 성경이 딱 되어서 완료할 때까지 하나님의 전, 하나님 당신 한 분의 그 모든 능력으로 하셨다. 딴것은 거게 추호도 거게 대해서는 개입하지 못하도록 당신이 모든 걸 창조하셔 가지고서 그와같이 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이 일할 때는 언제든지 감동으로 일합니다. 그분이 일할 때는 감동으로 일해.

하나님의 감동으로라 말은 하나님의 역사라 그 말입니다. 감동은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게 해. 이렇게 성경관을 이렇게 바로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라고,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요거 여러분들에게 말하지 안했을 거니까 요걸 말해 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 말은 뭘 말하는가? 그리스도는 영원 전 하나님의 자존 다음으로 표현된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창세 전, 하나님이 자존하셨는데 창조도 안 했어. 그때 예정도 아무것도 없어.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택함의 이 구원 역사가 시발됐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 말은, 이 믿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입니다. 둘째로 나타난 하나님인데 한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나타난 것은 자존하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로 나타냈는데 그리스도로 나타난 그 그리스도와 사활의 대속의 예수님까지의 이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 놓은 것이 믿음이라 그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 말은.

그러면 시간이 얼마나 걸렸느냐? 영원 전에서 영원 후까지 걸린 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식이 부모를 믿고 부모가 자식을 믿는다는 이 믿음 세상이 말하는 믿음과 이 믿음은 아주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대속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요게만 쓰는 전용의 믿음이지 이거 딴 믿음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도,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믿는 대로 되리라” 하는 그 믿음은 무슨 믿는 믿음입니까? 그 믿음은 자식이 부모 믿고 친구가 친구 믿는 그 믿음 같이 그 믿음 믿는 대로 된다 말입니까? 아니오. 이 믿는 대로 된다 말은 하나님이 영원 전에 전용하실라고 만들어 놓은 그 믿음인데 그 믿음은 하나님이 가지고 있어.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 받아 가지고 믿을 때 된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제맘대로 제가 뭐 돈 믿는 거, 밥 먹으면 배부르다 하는 이런 거 믿는 것같은 그런 믿음 가지고 믿는 대로 되는가? 그래 믿는다고 되는 게 아니야. 하나님이 믿음을 줬을 때에 그 믿음 받아 가지고 우리가 믿을 때에 다 된다. 요거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요렇게 똑똑히 쪼개 가지고 예수를 믿어야 돼요.

그러니까, 먼저 척 스미스 목사가 그 말 하는데 그거 내가 그 말에 대해서 내가 좀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뭐 이리 쌓아도 조금 벙벙하이 해 가지고 그 사람 내가 뭐 인정할란지 뭐인지 모르겠다. 도무지 신앙에 체험이라 하는 것이 별로이 나오지 안하고 이래서 좀 벙벙하게 생각했는데 그분이 말하는 가운데 자기는 뭐 이적이니 하는 그런 것을 믿지 안하고 이렇게 좀 이래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언제 길을 걸어가니까 그 병신이 뭐 쩔뚝거리며 어데 가면서 병신이 오는데 그 마음에 ‘이 병신 위해서 기도해 주면 낫겠다’ 싶은 그 마음이 있어서 그래 거머쥐고 기도하고 나니까 그만 확 나았다고.

그게 뭐이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알겠습니까? 알아듣겠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그 믿음이 뭐이냐 하면은 그 믿음은 뭐라 했소?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지 안했소? 그 믿음은 거게만 전용하게 쓰이는 믿음인데 하나님이 믿게 해 줘야 믿지 저거 인간에게 있는 믿음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인간에게 수많은 믿음이라는 것이 뭐 억억만도 넘지만 그런 믿음이 아니고 이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하나님께서 여게만 쓸라고 영원히 그리스도와 예수의 이 재료를 가지고 이제 영원이라는 그 시간을 걸려서 만든 믿음인데 여게만 전용할 믿음이니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믿음인데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라. 하나님이 줘야 믿지 주지 안하면 못 믿어요. 그러기 때문에 일반 믿음과 이 믿음이 아주 이거는 본질적으로 아주 다른 거 이거 뭐 말할 수 없는 그 차이가 다르다는 거 그런 것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내가 종종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 마음에 요거 ‘누구에게 요거 기도하면 되겠다, 기도하면 되겠다, 또 요라면 되겠다.’ 그 자기에게 믿어지는 그 믿음이 그때 생길 때 딱 하니까 그대로 됐다 말이오. 그런 게 자꾸 체험입니다. 그게 뭐이냐 하면 내가 주님 믿는 게 아니라 주께서 믿게 하셔서 내가 믿음이 착 생길 때에 그때 하는 거 다 되는 거.

그러기 때문에 이 믿음은 여게 전용하는 믿음이니 하나님이 주시는 그 믿음이라고 해 가지고 뭣이 붉고 푸르고 뭐 거게 있지 안하고 하나님이 주셔서 우리 속에 와 가지고서 믿어지게 할 때에 믿는 믿음이 척 생길 때 그때 하나님이 선물로 준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고 하면 된다 그거요.

그래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는 걸 여게서 단단히 잘 알고, 뭐 그 다음에 많이 있지마는 시간 없으니까 여러분들이 요 어려운 것만을 지금 여기서 했기 때문에 집에 가 가지고 자꾸 파고 들어가면은 바로 깨닫게 될 것이라 그거요.

오늘 아침에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는 그걸 잘 구별해야 됩니다.

지금 연경실, 이번에 지난 주일 후로 성경 공부 할라고서 가입한 사람 몇이라? 지난번에 우리가 성경 공부 하자고 주일날 오전 오후 설교하지 안했어? 그후에 지금, 그라면 주일날 한 것을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오늘 목요일까지인데 가입한 사람 얼마나 돼? 용지 가져간 사람, 용지 가져간 거 하면 알 것 아니야? 용지를 얼마나 가지고 나갔어? 용지 받아 간 것이? 입학한 사람이 얼마나 돼? 사백? 지난 주일 이후로 성경 공부 할라고 입학한 사람이 사백입니다, 사백.

사백이니까 그래서 그거 좀 사람 좀 더 동원해 가지고 좀 하라 했어, 사백. 그걸 보면 조금 순종하는 것은 순종해. 성경 공부해서 성경이 이리 중요하다 하니까 그날 우리가 성경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고 난 다음에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어제까지 사흘인데 어제까지 사흘 동안에 사백 명이 입학을 했답니다. 그전에 한 것 말고. 사백 명이 입학해.

그거 그래도 순종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새벽기도 나온다고는 손 들고 야단 지기지마는 못 나와. 그러니까 그거는 보니까 뭐이냐 하면은 약해서, 그렇게 약해.

몇닢푼치 안 돼. 새벽기도 나오겠다고 해도 못 나오면 밥을 굶겠다고 이렇게 약속하고 손을 들어도 새벽에 나온 사람 보면 얼마 안 돼. 오늘 아침에도 뭐 나온 거 보니까 얼마 안 돼. 저 먼저 할 때 천 명까지 나왔는데 오늘 아침에도 천 명 안 돼요.

그러고 이 광고 하나 합니다. 초등강을 다 마치고 고등강 하는 분들은 그 자기가 이 답안지를 그거 다 외우지는 못 할 터이니까 답안지를 줄 터이니까 고등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시험을 해서 모두 다 시험지를 내놓은 게 있으니까 그 시험지를 자기가 좀 가지 말고 요거 좀 받아 가지고 그것을 원지하고 줄 터이니까 요거 대조해 가지고 채점을 해 좀 보내 주십시오.

하루 백여 명씩 자꾸 그 하는데 그거 어떻게 누가 다 채점 하겠어? 시험지 하나 가져 가 가지고 지금 가져간 그 입한 사람이 그러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나올지 그 채점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이러니까 초등강 하고서 고등강 하는 사람들은 공부해 가지고 시험지 내놓은 사람들에 대한 채점하는 데에 좀 도와달라 그 말이오. 엊저녁에 네 사람을 좀 전적으로 그 사람은 아침과 저녁에 하도록 그렇게 네 사람을 임명했고 한 사람은 또 능히 계속 그만 직원으로 이 수고를 하도록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래 가지고도 안 돼요.

이러니까 초등강 다 하고 고등강 한 사람은 그것 보고는 시험지 보고는 매길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사람 매기기가 좀 힘이 좀 들지라도 답안지를 가지고 이렇게 상고해서 보며 매기면 외우는 거는 그대로 매기고 모르는 거는 답안지 보고 그래 가지고 좀 채점을 해서 주면 성경 공부 하는 데에 많은 협조가 되겠습니다.

초등강 다 한 사람 손 들어 봐요. 아, 요거 뿐이라. 들면 손 뻐뜩 들어. 요래 가지고 몰라. 뻐뜩 좀 더 들어, 높이. 녜, 많아. 그라면 그걸 좀 해요. 해서, 초등강 다 한 사람이 뭐 얼마? 칠십오 명이, 칠십오 명은 초등강 다 했으니까 고등강 하고 있으니까 그런 사람들은 좀 이제 접장이라 하면 하지. 이는 선생 안 주고 좀 새끼 접장, 접장이 돼 가지고 그걸 가서 좀 매겨 달라 말이오. 그라면 도움이 돼요.

하루 삼십 분 기도 이거 빼지 말고 꼭 계속해서 합시다. 앞으로 큰 환난을 이것으로써 메꾸고 우리 앞길이 형통히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요번에 교역자들 가거든 전부 교인들에게 성경 공부 다 시켜요. 여기 지금 주일학생들 다 시킵니다. 주일학생들도 다 시키고, 또 어떤 반사들은 그만 여기서 안 되니까 자기 학생들 거느리고 그만 저 산으로 가요. 산에 가 가지고 도시락 싸 가지고 가 가지고 어짜든지 그만 하루 종일 그만 공부를 시켜 자꾸 이래 쌓으니까, 길만 열어 놓으면 좋아서 자꾸 생명을 얻으니까 열심히 공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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