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4 12:49
성경말씀을 근거하라
1989. 2. 5. 주일오후
본문: 에베소서 4장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전에 증거한 말씀을 다시 증거합니다.
우리가 구주로 믿는 이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시요 홀로 계신 분이십니다.
아무것도 없을 때에 자존하셨습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주권 의지로 예정하시고 또 주권 능력으로 모든 것을 섭리하신 창조주 대주재십니다. 그분이 크고 작은 모든 것을 홀로 주권으로 섭리하시고 또 홀로 모든 크고 작은 것을 심판하시고 영원한 보응으로 응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충만한 것을 가지고서만 온전한 사람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원형이시요 그를 따른 그와 같은 모형자 곧 성경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그 원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도 이것도 피조물의 요소를 이렇게 선택 종합해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순전히 온전하신 그분의 그 신적 요소가 우리에게 와 가지고 그분과 같은 온전한 자로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것만 가지고 우리가 성장됩니다.
성장되는 그 방편은 그분과 모든 면이 차차 차차 연결돼 가지고, 비유컨대 저수지에 물이 있는데 그 수도관이 저수지에 연결되어 그 저수지에 물이 그 수도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적 요소가 우리 인간 속에 연결돼 가지고서 신적 요소의 모든 것이 우리 인간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것으로써 온전한 사람과 그리스도직의 장성한 분량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 그렇게 그 방편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동이시고 거게 따라서 피동되는 것으로만 온전한 행위와 역사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이나 그들이 사망과 변해가는 이 역사 속에서 삶이 하나도 멸해지지 안하고 다 영생하게 된 그 이유는 그분과 연결되어 그분으로 동하고 정한 그 결과로 말미암아서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은 하나 비유컨대 다니엘이나 요셉이나 그런 사람들이 위대한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요셉이는 그는 아주 배울 시간도 없는 그런 무식한 사람인데 그는 애굽의 총리가 돼 가지고 그 총리를 감당한 것은 역사 세계에서만 아니고 그는 영원 무궁에 하나님의 심판에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 통치를 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무슨 정치학을 공부한 그런 사람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서 동하고 정하는 이 일을 연습하고 숙달해서 크고 작은 모든 언행심사를 그분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는 이것 하나만으로서 완성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말을 땅위에 많은 종교 창설자들이 말을 하고 또 많은 고등비평가들, 지성이라 하는 그런 학자들이 많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궤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땅위에 변사가 없다. 지배자가 없다. 이유는 그들이 뭐라고 논리한다 할지라도 그 일을 실지로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권적으로 이행하시는 당신이 당신의 계획하고 목적하신 그대로지 천하 인간들이 통계를 맞추고 이성 비판의 그 종합을 해 가지고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무익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영원 자존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하는 것을 이 믿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분이 주재자시요 주권자시요 또 완전자시요 모든 주권 대소의 개별 섭리자시요 또 그분이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자시요 그분의 법칙을 준해서 모든 것을 판단해 가지고서 영원히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이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분에게 따라 피동되지 아니한 어떤 그 많고 적은 무엇이든지 그것은 다 자멸 행위요 자살 행위입니다.
이 하나님의 온갖 온전하신 그 온전을 우리가 거게 연결되어 가지고 그분의 것이 우리에게 와서, 그분 한 분의 능력의 역사가 우리에게 와서까지 충만하고 우리에게 충만한 것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충만해서 그대로 이루어져서 영윈히 계속되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땅위에 많은 무신론자들이 있고 또 많은 모든 철학자들이 무책임한 그 궤변들을 떨어서 말을 했지마는 하나님 말씀은 영원합니다. 그러기에 역사를 통계 맞추면 땅위에 있는 모든 사상이나 종교나 주의나 주장이나 어떤 학이나 그런 것은 그들이 보고 있는 모든 만물관이 다 갈 지자 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이랬다가 이랬다가 이 하나도 일관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씀하신 것은 창세기 1장으로부터 요한계시까지의 육십육 권 도리에 계시되어 있는 이 내용은 시종이 꼭 일관입니다. 인생관도 갈고 만물관도 같고 생사관도 같고 행불행관도 꼭 같습니다. 변하지를 안했습니다.
이러기에, 신구약 성경 말씀을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궤변 중에 궤변이요 거짓말 뭉텅이라 이렇게 말을 했지마는서도 역사가 벌써 근 이천 년이 지나가는 가운데에 저희들의 말은 말과 그 실상이 맞지 안했지마는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맞았기 때문에 지금은 신구약 성경 하나님 말씀을 모든 서적에 제일위의 권위를 두는 것은 다 세계가 통일입니다. 또 그러고 이제 이 말씀을 거짓말쟁이라 하지를 안하고 그 말씀에 한 대로는 사람들이 멸시하지 못하고 다 따라갈라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도 거게 대해서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라도 그들은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지고서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당신이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 정하신 그것을 선택이라고 발표했고 그래서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고 또 예정하신 그것을 그대로 하나님께서 주권 능력으로 창조하셨고 창조한 그것을 오늘까지 보존하시고 섭리하시고 이렇게 하셔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또 제사장 선지 왕직의 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성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창조하실 때에 다른 것은 다 그냥 창조했지마는서도 사람은 창조하실 때에 특별한 회의를 열어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통치하고 주관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계대자로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이 존재를 짓는 데에는 어떻게 짓나 하는 것을 창세기 1장에 의논해 가지고 지은 것은 사람뿐입니다. 사람을 지을 때에 영과 육으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영을 지으시고 또 만물과 같이 이 물질로 가지고서 사람의 심신으로 된 이 육을 창조해 가지고서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이런데 이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충만으로 당신의 목적이신 이 그리스도인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역사하시는 데에 하나님과 이 피조물 사이에 그 사이를 연절시키는 그 연결 역사를 도성인신 신인양성 일위의 대속하신 예수님의 대속 공로로 말미알아 이 연결을 하는 작업을 하나님이 시작하셨습니다. 이래서 그리스도는 곧 피조물의 중보자시요 특별히 택함 입은 자들의 중보자십니다.
이래서, 그리스도가 중보가 될 때에 무엇으로 중보가 됐느냐? 제사장 선지 왕으로 중보가 됐습니다. 제사장은 이 피조물들의 모든 죄와 허물 이것을 다 이 제사장직으로서 무마를 하시고 또 하나님의 그 완전하심에 연결되도록 작업을 일으킨 것이 제사장직입니다. 이래서 예수님께서 이 모든 피조물들의 잘못된 그 모든 것은 그것을 한 말로 말하면 뻐뚤어진 것들인데 그것은 삐뚤어진 것이라 말은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 하는 삐뚤어진 것을 죄라고 그렇게 이름을 해서 발표했습니다.
그러면 삐뚤어진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 능력으로도 그것은 삭제할 수가 없고 삐뚤어진 것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사망의 그 댓가를 받아야 되는고로 예수님께저 그 잘못의 형을 받아서 대형으로 죽으심으로써 사죄가 우리에게 된 것입니다. 사죄 공로를 베푸셨고 또 대신 행해서 칭의의 공로를 우리에게 입히셨고 대신 화친하셔서 생명의 공로를 입히셨고 또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소망에 대표의 길을 열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게 되는 이 영생길을 얻어 가지고서 우리가 영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안하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사람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기독교의 근원은 어데서부터 시작했는가? 창조 전 또 예정 전, 하나님의 선택 전, 하나님의 목적 전, 그리스도는 영원 존재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그리스도 이 직을 가지신 그때부터 당신의 홀로 속에 있었고 홀로 속에 계시던 것이 당신의 의지에 그것이 뻗어나왔고 당신 의지 속에 있는 것이 예택으로 나왔고 예택이 주권의 예정으로 나왔고 주권 예정의 것이 주권 능력의 창조로 나왔고 창조된 이것이 오늘까지에 보존되고 섭리로서 도성인신하셔 가지고서 대형 대행 대화친의 대속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충만이 그리스도로 거게서 발휘해 나왔고 또 그리스도의 것이 성령의 감화로 영감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또 영감이 진리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고 진리가 우리에게 이 문서 계시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이 문서 계시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서 증거함으로 우리 귀에 들려졌고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게 돼 가지고 우리와 접선이 돼서 이 구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유래의 그 모든 근원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시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성령의 감화 감동과 또 진리로 우리의 죽은 영을 살렸습니다. 우리 영은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법도를 배반함으로 죽은 영인데, 우리가 안 믿을 때는 죽은 영과 마음과 고기덩어리로 되어 있는 육으로 더불어 합작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영물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는데 영물로 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우리의 영이요 또 물질로 되어 있는 것은 물질 중에 신비한 것인 마음과 또 물질인 고기덩어리와 이 두 가지로 되어 있는 우리의 육입니다.
이래서 영육으로 된 사람인데 영은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 영을 단번에 살렸고, 영은 단일성을 가진 것이요 단일체기 때문에 단번에 살렸고 그거는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리지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순전히 객관 역사로 단번에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신이라 하는 것은 벌써 그 주격인 영이 살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주격인 영을 무시하고서 월권적으로 그렇게 직접 우리의 심신에 관련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이 구속받은 것을 증거한다고 성경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에게 온 이 구원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가깝게, 진리로 우리에게 가깝게, 또 문서로 기록한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깝게 접하게 됐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을 내가 받는 데에 제일 가깝게 접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은 곧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들은 어떤 자들이든지 무엇이든지 이 성경 말씀을 접해 가지고서 성경 말씀에서 자기에게 나오는 이 은혜를 받아야 되지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다 그것은 수많은 천도 만도 넘은 악령으로 말미암아 오는 잡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을 주의해야 됩니다.
이래서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 말씀은 간단 명료하게 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에게 하나님의 충만을 접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우리에게 올 때에 이 말씀대로 행하면 의인도 되고 온전도 되고 또 모든 피조물에 당신이 주시는 모든 것을 다 성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충만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다른 것으로 주시지 아니하고 이 말씀으로 주십니다.
말씀으로 준다 말은 진리로 준다는 말입니다. 진리로 줄 때에 그 진리를 자기가 행하면 진리와 함께 하나님의 충만이 우리의 것이 되고 진리를 배반하면 하나님의 충만을 자기가 다 부인하기 때문에 물러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이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가 접하고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가 받고 또 말씀으로 인하여 망하고 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거부하면은 말씀을 거부했는데 멸망이 옵니다. 또 말씀을 순종했는데 이 말씀을 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충만이 내것이 됩니다. 에덴 동산 인류 시조의 그 해와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선악과를 먹지 말아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데 그 사람들은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고서 그로 인해서 인류는 전부 이 사망을 맛보게 됐습니다. 그러면 사망 맛보게 된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무신론을 주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교만하지마는 그 사람이 나고 늙어지고 죽어진다는 하나님 말씀대로 그 과정에 제가 응하지 안하고는 안 된다는 그것이 반대하면서든지 주장하면서든지 하나님 말씀 그대로 약속하신 대로 성취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래서 지낸 금요일날 밤과 오늘 아침에 말씀 가운데에 혹 그런 말이 있었습니다. '암만 기도해도 안 됩니다. 우리 기독자외 성공은 기도 암만 해도 기도만 가지고 안 됩니다. 회개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믿음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또 자기의 어떤 절제 생활의 행함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그 안 되는 그 이유를 말한 그것은 무슨 이유냐? 그런 것은 다 하나의 열매와 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열매와 같이 되어 있는데 그 열매가 맺을 수 있는 그 나무 둥치는 무엇인가? 그 나무 둥치는 곧 진리, 영감, 예수님의 대속, 그라면 그 안에는 영원 자존하신 완전자이신 주재자이신 주권자이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기에 이 나무 둥치와 같은 예수님의 피와 영감과 진리를 자기가 접할 때에 거게서 생각나는 하나님이라야 되고 거게서 보이는 하나님이라야 되고 거게서 또 깨달아지는 믿음이어야 되고 소망이라야 되고 사랑이라야 되고 희개라야 되고 기도라야 됩니다. 거게서 맺어져야 되지 거게서 맺어지지 안한 것은 다 잡탱이 것입니다.
이래서, 요한복음 15장 1절 이하에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을 가리켜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비유한 것은 포도나무 가지에 온갖 것들이 다 연접할 수가 있겠습니다. 포도나무 가지에는 뭐 거미줄도 와서 걸릴 것이고 또 여러 가지 먼지도 올 것이고 포도나무 가지에는 아주 보석을 주렁주렁 걸어놨다 합시다. 또 진주를 걸어놨다 합시다. 진주를 걸어놔도 그거는 포도나무에 해독이 되는 것이저 포도나무에 그 가지나 잎사귀나 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거는 무엇을 우리에게 비유하신 건고 하니 곧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만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된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은 온 천하가 다 와도 그까짓 거 아무 가치 없고 다 멸망케 하는 것뿐입니다. 포도나무에 보석을 주렁주렁 걸어놨으면 걸어 놓은 그것이 포도나무에게 절대 호리의 도움도 힘도 되지 안하고 도리어 그 포도나무를 골아 말려 죽이는 것뿐이지 다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곧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그것이 자기에게 다 영생이 되고 자기의 온전한 자체가 되어지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온 천하를 얻어도 그것이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해하는 것이지 자기에게 도움되는 것은 털끝만치도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 오늘이라도 끝시간 나면 다 두고 가야 될 터인데 이런 것들을 인해서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참사람 자기를 잊어버리고 자기 아닌 악령 악성 악습,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것은 자기를 죽인 죄악의 뭉텅이가 그렇게 돼 있는 것이지 자기 영도 아니요 자기 육도 아닌데 육이 그것에게 이용당해서 그렇게 되는 것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잃은 자는 천하를 얻고도 그 사람은 아무 무익하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우주보다 귀하다 그 말씀은 한 사람이 하나님과 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결을 가지고 있는 참사람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면은 그 사람은 우주와 영계에 주인공이 되기 때문에 우주보다 크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이 소망을 위해 살 것이고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이 소망을 다 거짓말이라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거짓말쟁이라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믿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믿지 않습니다. 자기가 믿지 안하면 믿지 않는 사람은 제가 지식이 높으고 커서 믿지 않는 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택해서 중생이 되고 난 오래 후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택함도 받지 안한 자요 중생하지 안한 자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게서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 것이지 택함받고 중생된 사람은 그는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도록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기를 성신의 감동을 받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라고 믿을 사람은 없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전신앙 생활은 이 우리에게 나타난 문서 계시의 말씀, 우리에게 나타난 문서 계시의 말씀 이 말씀에게 우리가 입을 대고 거게서 나오는 그 영양을 빨아먹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움직이는 것은 신구약 성경 문서 계시로 나타난 이 말씀에게 접해 가지고서 이 말씀에게 피동되어서 동하고 정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으로 인하지 아니한 것은 어떤 큰 것이든지 작은 것이든지 인간들에게 높이 평가를 받든지 멸시를 받든지 그까짓 거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분으로 말미암은 것이면 천하가 다 정죄해도 천하를 완전히 점령하고 자기가 주권할 수 있는 그런 자가 디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되지 안한 다른 데서 온 그 모든 것들은 천하가 인정해도 다 불타 버리고 맙니다. 그런 것을 약간 보여 줘서 노아 홍수 때에 유명한 사람들, 네피림, 유명한 사람들 모든 용사들 위인들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오늘 이 세상이 주장하고 었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서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했지마는서도 홍수 심판인 물심판이 내릴 때에 하나님의 심판 외에 것에는 도움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그까짓 게 뭐 없는 거와 한가지지 조금도 뭐 거리낄 것도 없고 방해될 것도 없고 도움될 것도 없이 다 홍수 밑에 매몰이 되고 말았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은 이제 하나님께서 구름타고 오실 때는 불심판이 우리에게 이르게 됩니다. 불심판이 이를 때에는 그때는 그 불심판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빛이신데 그 빛이 오면은 어두움이라는 것은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불심판이 될 때에 소멸하지 안할 자는 어떤 자가 소멸하지 안 할 자냐? 불화된 자가 소멸하지 않습니다. 진리화된 자가 소멸하지 않습니다. 영감화된 자가 소멸하지 않습니다. 진리와 영감화되지 안한 이것은 어두움에 속한 것은 빛이신 주님이 올 때에 그 빛에서 다 녹는 것을 가리켜서 불심판이라, 모든 우주가 다 불에 타서 그 원소가 녹아지고 인간들은 모든 크고 작은 비밀의 행위가 다 그대로 드러난다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진리화되고 영감화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화되고 하나님화돼서 하나님은 머리시고 우리는 그 몸과 지체가 되어지는 이렇게 완전히 거룩하게 성화된 것만 불심판에서 남아 있고 나머지기는 다 홍수 밑에 매장된 거와 마찬가지로 불에 다 소멸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모든 만물이 다 불에 타서 녹아지고 그 체질이 다 녹아지고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때에 지금 있는 하늘이 없어지고 땅이 없어지고 다 이와같이 될 때에 너희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되느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이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라 말했습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하게 되면, 거룩한 행실과 경건하게 되면 이 세상은 가장 자기가 살기 싫고 살기 어려운 이 세상에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은 자기와 정반대가 되어지고 자기와 정반대가 되어져 있고 전부 적이 되어져 있고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은 자기와 동일 본질 본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지는 이것이 오늘에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수많은 사람들은 이 일을 실지로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아주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못난 자 같으나 잘난 자요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라. 모든 것이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말했습니다. 이런 보배가 질그릇에 담긴 거와 같이 껍데기가 이렇게 흉한 데 담겼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고 못난 사람들이 차지할 수 있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껍데기는 아주 허무한데 속에 알맹이만 좋습니다. 이래서 이것을 보배가 질그릇에 담긴 거와 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 간단하게 요거 지금 요거는 다 서론이오. 요령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도를 하든지 모든 신앙 생활을 이 신앙 생활이 어데서 나와야 되느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자기가 듣든지, 지금은 듣고 있습니다. 듣든지 읽든지 할 때에 거게서 첫째로 뭣을 만나라고 혔습니까?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무슨 일을 우리가 해야 됩니까? 자기가 혼자든지 여럿이든지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할 때에 첫째 우리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첫째 할 일이 뭐입니까? 뭐 크게 말해 봐. 녜, 주님 만나는 것.
주님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자기가, 이 세상에 무슨 종교 유사들의 그 모든 서적을 보고 모든 철학을 보고 이런 저런 모든 사상들을 보고 그와 마찬가지로 거게서 '이들이 말한 것이니까 기독교에도 아마 이런 교주인갑다. 이런 하나님인가보다.' 하는 그런 것 다 잡신을 만나는 것이요 다 헛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대주재자요 주권자요 창조주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영생하는 생명이 그에게만 있는데 이분을 만나는 데에는 어데서 만나야 되며 어째 만나야 됩니까?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자기가 들을 때에, 들을 때에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 나에게 지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분을 만나십시오. 자기가 혼자서 성경을 읽을 때에 읽을 때 이 성경 가운데에 성령으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시니 나는 이 성경과 대화를 합니다. 주님 이 말씀을 읽게 하십니까? 요것을 내가 이해했습니다. 요거는 내가 믿습니다. 요거는 내가 모릅니다. 이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 주님 만나서 대화하고 화친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대화하고 화친하고 요것을 꼭 놓지 마십시오.
성경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자기가 외우든지 행하든지 요럴 때에 그때에 곧 주님이 거게 함께 계십니다. 이러니까 주님을 만나고, 거게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믿으십시오. 고게서 믿음을 만드십시오. '주여 오,' 들을 때 '녜, 요것은 믿습니다.' 들으면은 요렇게 하는 사람들은 마귀 말을 알게 됩니다.
이래서 성경에 요한복음 10장에 말씀하시기물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으나 다른 이의 음성은 듣지 안하고 달아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무리 설교를 해도 중생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말씀하실 때는 그 말씀이 자기에게 들려지고 이 악령이 천하의 문학을 다 가지고 와서, 천하의 과학을 다 가지고 와서, 천하의 논리학을 다 가지고 와서 한다 할지라도 조거는 마귀말이라고 중생된 자는 그게 비위에 맞지 않습니다. 그게 토해집니다. 그것이 토해져서 그것이 자기에게 삼키워지지를 안합니다. 그것이 이해와 납득이 되지 안하고서 사람을 많이 유혹시켜서 멸망을 시킨다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러기에, 여게서 자기가 믿음을 만들고 말씀이 나올 때 그 말씀을 '녜, 믿습니다.' 자기가 '주여 믿습니다. 이것을 내가 소망하고 바라봅니다. 내가 의지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나를 주시는 사랑인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하라 할 때 그게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뭉텅이오. 내가 하면 곧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는 것입니다. 하라 할 때 안 하면 그게 뭐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오. 자멸을 하는 것입니다.
거게서 소망도 믿음도 사랑도 가지고 거게서, 거게서 '내가 이거 잘못됐습니다.
주님 말씀하신 이 말씀을 보니 내가 이거 잘못됐습니다. 회개를 합니다. 주님이 이 말씀하신 말씀 보니까 내가 뭘 간구를 해야 되겠네. 간구합니다. 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내가 요것을 요래 봐야 돼, 요래 해야 되겠습니다.' 요게서 일어나는, 요게서 발동되는,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외우든지 실행할 때에 거게서 발동되는, 거게서 발작되는, 거게서 발아되는, 거게서 움이 트는 발아되는 요것 가지고, 요것이라야 믿음도 되고 바른 믿음이고. 요것이라야 회개도 바른 회개고 소망도 바른 소망이고 이제 요것이라야 사랑도 바른 사랑이고 요것 이라야 사람도 바른 사람 참사람이 되는 것이지 천하에 이 신구약 성경 외에 천하에 있는 모든 지식은 다 그게 죽은 지식이요 죽이는 지식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천하에 이 성경 말씀 외에 모든 지식이 인간을 다 멸망만 시키지 한 사람도 구원하지를 못했습니다. 죽은 지식이요 죽이는 지식입니다.
이래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시발을 하고, 그다음에는 우리가 말씀에서 이랬으니까 그만치 우리가 깨끗해지고 새로와지면 하나님이신 성령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이 순서 밟기 전에는 영감을 우리는 접할 수가 없습니다. 영감을 접할 수 있는 영감은 어떻게 하면 영감을 접하는가? 내나 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외우고 자기가 이대로 행하고 하기를 그저 껍데기, 자기 지나가는 수많은, 수많은 욕심을 가득 채우고 모든 거짓을 가득 채우고 이래 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런 것도 다 제하고 저런 것도 제하고 참되게 참되게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내가 여게서는 거짓이 없이 참 마음을 가지고 참되게 하고 있느냐 고것이 소위 양심이라, 신앙 양심야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양심입니다.
자기가 양심을 가지고서 자기가 하나도 남김 없이 자기 마음에 거짓부리라 하는 것 다 제하고 또 잡된 것도 제하고 순전히 요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주님이 하신 것인 것을 깨닫고 들으면서 주님이 나에게 말씀해 주셨다는 것을 믿고 주님을 대면하고 또 여게서 자기가 소망을 가지고 이 말씀을 믿고 하는 그런 것이 자기 마음으로 비판할 때에 거짓부리가 없이 진심으로 순전히 잡것이 없이 자기가 믿고 바라보고 또 의지하고 주님을 만나고 자기가 거게서 소망하고 거게서 행동하고 거게서 회개하고 거게서 기도하고, 참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그때에 거게서 조금만 나가면은 자기가 양심으로 가지고서 깨끗하게 한 것 보다도 더 깨끗함이 자기에게 생겨집니다. 양심으로, 양심껏 했는데 자기 말로 발표하지 못하게 양심껏 한 그 속에 양심껏보다도 더, 깨끗한 것이 자기에게 보여집니다.
말로는 표시는 못 해도 더 깨끗한 것이 보여지고, 더 온전한 것이 보여지고, 더 정확한 것이 보여지고, 더 확실한 것이 보여지고 이렇게 될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성신의 감화라, 차차 차차 들어가 가지고서 이제 모든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이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세상 지식 이것을 다 헤치고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되게 양심으로 접하고 영감으로 접해질 때에 그때에 비로소 자기는 많은 깨끗함이 됐습니다. 깨끗해졌다가 또 더러워졌다가 깨끗해졌다가 또 더러워지는데.
깨끗해졌소. 깨끗해지면은, 깨끗해지면은 필연적으로, 기독교는 모두 다 필연성입니다. 깨끗해지면 필연적으로 적이 생깁니다. 깨끗해지면은 내외간에도 금방 괜찮다가 내외간이 적이 됩니다. 이 깨끗해지면 깨끗해진 것만치 더러운 것은 부부간이라도 적이 되고 형제간이라도 적이 되고 상관이라도 적이 되고 부하라도 적이 되고 깨끗해지면 깨끗해진 것만치 깨끗지 안한 것이 적이 됩니다.
이 적이 될 때에 그때에 이것이 이 적으로 더불어 깨끗지 않는 거로 더불어 싸웁니다. 이것이 뭐이냐? 사죄를 입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죄를 입고 사는 것이오. 그럴 때에 이제 자기와 동질이 있습니다. 자기와 본질과 본성이 동질된 것이 있습니다. 의사가 같고 같은 게 있습니다. 그게 의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와 칭의를 입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가 말로는 표시를 못 하지마는서도 대주재이신 완전의 근본이 되고 주재의 근본이 되신 그분과 자기와 동행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자기 안에 계시고 자기가 그 완전 속에 들었고, 이러기에 완전과 자기와의 아무 이색진 것이 없이 하나되어 이런 이것이 뭐이냐?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 안에 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너희 안에 계시고 너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너희들이 볼 수 있으리라 말씀했습니다. 이럴 때에 이제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 되면 모든 땅에 있는 소망은 벌써 지나갔습니다. 땅에 있는 소망은.
왜? 눈이 밝기 때문에 그저는 소망을 할 수가 없습니다. 눈이 밝기 때문에.
그것이 고거 살았느냐? 자세히 보니까 죽었고, 있느냐? 자세히 보니까. 없고, 그것이 강하냐? 아무것도 아니고 이러기 때문에 그건 것은 다 땅의 것은 다 바울이 말하기를 배설물로 내가 여기게 됐다. 배설물이라 말은 똥오줌이라 말이오. 그런 걸 똥오줌같이 여기게 되는 것은 그런 걸 하나도 가치로 삼을 것이 없다 말이오. 그것을 논리로 존재했다고 할 것이 없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코에 호흡이 있는 것을 수로 헤아릴 것이 없다 말씀했어. 이러니까 이제 완전과 영원함에 소망을 가지는 이 사람이 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완전과 영원을 소망하는 영생을 가지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이 기독자의 속에 알맹이요 성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그것이 자라도, 어린 아이가 자라도 저는 자란지 큰지 모릅니다. 이제 위에 아버지 어머니가 보면은 자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게 자라서 과거에 안 하던 행동을 한다. 과거에 모르던 것을 안다. 어머니를 안다.' 이라는 것처럼 이제 그게 후배는 선배를 모르지마는서도 선배들은 후배를 알기 때문에 '저게 아마 하나님을 조금 알아. 저 사람은 떠들지만 하나님이 없어.
그거는 아직까지 순전히 껍데기뿐이라. 저것은 속에 하나님 알고 하나님이 계셔.' 이렇게 선배는 후배의 자란 것을 보고 짐작하고, 저보다 크면 모릅니다. 저보다 큰 자는 모르요. 하나님께서는 그자의 커 나가는 것을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런 소망을 가진 것이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말하는 것은 어쨌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입을 대고 거게서 나오는 것을 먹어라. 거게서 나와서 그로 말미암아 모든 생겨진 것 거게서 움터 나온 것, 거게서 또 시발된 것, 거게서 동기된 것, 소망도 거게서 소망되고. 거게서 나온 것이라야 되지 거게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은 다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다. 이러기 때문에 해 아래 수고한 것이 자기에게 하나도 유익이 없다 전부 헛되다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낸 달에는 천수백 명이 가서 기도하러 갔었고 또 지낸 주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들로 이렇게 기도하러 다녔는데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다 헛일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것이 헛일해도 아주 헛일은 아닙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기도는 향이라 말했습니다. 향이라 하는 것은 악취를 제하는 것이 향입니다. 이거 다 껍데기 생활이오. 그 기도하니까 자기에게 그때는 더러운 마음이 있을 수 없고 허영과 허욕이 있을 수 없고 다소 깨끗함을 가지지마는서도 그게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향을 피우니까, 향수를 피우니까 썩은 악취가 나지 않는 것뿐이지요. 이러니까 기도하면 들짱 성경을 읽든지, 자기가 심령이 아직까지 어리면은 성경 말씀을 읽어 가지고는 안 되니까 설교 재독을 한 삼사 차례 하든지 설교록을 읽든지 그라다가 또 그 다음에는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은 자기에 깨달아집니다.
이래서, 성경을 읽으면 처음에는 그만 깨달으려니 잠이 오고 잠 오는 고비를 넘어 가지고서 이라면은 알게 되고,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를 부인한 것만치 성경이 인정되고 또 땅에 있는 모든 소욕을 버리는 것만치 하늘의 것이 보여지고 소망이 되어지고 이렇게 자기 속에서 역사하는 것과 자기가 변화되어 나가는 것을 자신이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모든 우리 신앙 생활을 성경 말씀을 근거하고 거게서 발족하고 다른 그 허탄한 길을 찾아 가지고서 탈선되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기를 위해서 오전 오후에 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