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4 12:44
성경론
본문 : 디모데후서 3장 12절∼17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저 학생들 돌아다니지 말고 어디든지 거기 끼어 앉으이소. 그늘에 어디 어른들 사이에 끼어 앉아요. 그라고, 어른들은 학생들 들어오거든 좀 자기가 자리가 좁아도 잘 용납해서 잘 다스려 가지고 예배를 잘 드리고 은혜를 받도록 그래 하십시오. 그러면 거기 앉아서도 또 수입을 봐요. 어쨌든지 수입을 봐야 되지, 그저 진공으로는 지내 보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학생들도 다 거기 앉아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시오. 여기도 학생들이 들어오거든 자꾸 용납을 해서, 좀.
어른들이 욕심이 제일 많구먼, 보니까 여기 제일 넓게 앉았네. 예수 믿는 데 욕심이 없는 사람은 느적느적 와 가지고 저 뒤에 꽉 채여 앉아 가지고 소리도 멀지 자리도 좁지, 예수 믿는 욕심 있는 사람들은 앞에 와 가지고 앉으니까 선선하기도 하지 자리도 너르지 말씀도 잘 들려지지, 아무래도 뭐 좀 등둘한 사람은 모든 일이 뒤떨어집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아예 핍박받을 것을 각오해야 됩니다. 믿는 사람들은 핍박받을 것을 각오해야 되지 핍박을 피하면 사탄이 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가리켜서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 네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너는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을 했지만 그만 평안한 예수를 믿을라고 하다가 당장 사탄 돼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평안을 찾으면 안 됩니다. 평안을 찾는 그 평안 속에는 귀신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마귀들이 다 들어 있어. 여기 앉아 있는데도 '어디로 가야 좀 선선하고 좀 너르고 좋을꼬?' 그거 찾는 사람들은 귀신 찾는 것이오. 그게 귀신 찾는 거. 여기서라도 '어디가 제일 비좁고 자리가 안 됐고 더운고?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지' 하는 사람은 그것이 주님 찾는 것인데, 거게 가보면. 다른 사람 보기에는 불미 속에 들어갔으니까 저거 인제 굽혀 죽는다 싶었지만 불미 속에 들어갔다 나옴으로 말미암아 덥지도 하나도 안하고 크게 영광을 받은 것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런 사람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 계시 인물로 구원 도리를 보여 준 것입니다. 주님 명령 순종으로 주를 위해서 그렇게 혹독한 일을 피하지 아니하고 당하는 것은 혹독이 변해서 평강과 존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모르면 예수님을 못 믿어요.
그런데 오전에 공부할 때에 하나님께서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으로 당신이 가지신 전부를 가지고 하나님과 같은 그런 자를 만드실려고 목적을 정하셨고 또 하나님과 같은 자를 만들어 가지고 모든 만물들을 다 복되게 잘 통치하실려고 그렇게 하나님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크시기 때문에 우리와 거리가 너무 멉니다.
우리와 거리가 너무 머니까 하나님 본체는 무형의 존재시지만 완전이신데 완전이신 그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면, 직접 대하면 사람들이 다 소멸하여 멸망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피조물 중에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아주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에 제일 쉽고 좋고 또 하나님도 피조물인 이 택한 백성들에게 제일 접촉하기가 가깝고 좋은 그런 방편을 하나님이 택하셔 가지고 제일 처음에 당신이 피조물 우리들에게 나타나신 일이 있었으니 나타나신 걸 가리켜서 영감. 하나님이 영감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영감이 하나님 아닙니다. 영감이 하나님은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그 모든 충만 온갖 충만이 우리에게 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충만이 나타나심이 영감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영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감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감은 하나님이라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영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가지고 나타나심이 영감입니다. 그 영감으로 하나님이 창조도 나타내셨고 보존도 나타내셨고 섭리도 나타내셨고. 영감으로 또 모든 섭리도 나타내시고, 또 영감으로 우리에게 대한 온갖 대속의 은혜도 다 나타내시고 그랬습니다. 첫날, 영감이 공산주의의 독침도 영감이 그렇게 하고 계신다 하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 것을 잘못 들어 깨달으면 안 되나 말은 옳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감으로 나타나셨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과 동행하면 하나님과 동행이요, 영감에 소망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는 것이요. 영감에게 바라보고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되어져서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영감으로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는 더 가깝게 우리가 접할 수 있도록 나타나시기를 어떻게 나타나셨습니까? 진리로 나타나셨습니다. 진리로, 진리는 어떤 것이 진리인고 하니 영감이 우리 개인들에게, 무형의 진리가 우리 개인들이 접해 가지고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그렇게 나타난 것이 진리입니다.
이제 오후에 이거 왜 말하는고 하니 진리를 어떻게 만날까 영감을 어떻게 만날까 하는 데 대해서 공부를 할라고 지금 이 제목을 들어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진리가 우리에게 더 가깝게 접하기 쉽도록 나타나셨는데 그 나타나심을 가리켜서 뭐이라고 말합니까? 말씀이라고 합니다 또 말씀이 우리에게 더 접근하기 쉽도록 나타나셨으니 그것을 가리켜서 뭐이라고 말합니까? 성경이라고 말합니다.
이래서 우리는 성경, 말씀, 진리, 영감 이렇게, 그 안에 자존하신 하나님 이런데 이 다섯 가지로 우리가 공부를 했는데 이 다섯 가지는 그 근본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 한 분이신데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나시기를 그렇게 나타나셨고 그분이 우리에게 대해서 역사하시기를 그렇게 역사를 하십니다.
하나님 본체가 가지고 계시는 지혜와 영광과 사랑. 그 외에 모든 거, 하나님이 가지신 것을 영감이 다 가졌습니다. 영감 속에 하나님의 충만이 그 안에 다 들었습니다. 다 들었는데, 거게 하나님의 전부가 다 들었다고는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없으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것이 다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은 뭐이 있는지 없는지 그거는 모르지만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은 영감 속에 들어 있지 안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이 영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영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래서, 영감에게 받으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을 다 받는 이게 됩니다. 그러면, 영감 안에는 지혜도, 전지의 지혜도 전능의 능력도 완전한 사랑도, 그 모든 부요도 평강도 영광도 오만 거 다, 그 영감 속에 다 들었습니다.
또 영감 속에 든 것이 이제 우리가 접하기 쉽도록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 뭐입니까? 진리입니다. 그러면, 진리 안에는 다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거 있는 것은 다 하나도 빠짐 없이 솔빡 영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 필요한 영감 속에 들어 있는 그 전부는 진리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진리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또 진리 속에 들어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충만의 모든 것은, 저 뭐꼬? ○○교회 조사님, 어데 들어 있지? 진리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은 어데 들어 있어. 또? 어데 들어 있지? 현실? 현실에 들어 있어요? 인제 ○○교회 쫓겨난다.
저 뚱딴지같은 소리 하니까 저거 어짤거라?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충만이 영감 속에 다 들어 있고 영감속에 들어 있는 것이 진리 속에 다 들어 있고,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이 다 어디 들어 있지? 예? 저 무슨 조사님이지? 예? ○ 뭣이? ○○○? ○○교회 조사? ○○교회 ○조사? ○○교회 ○조사는 뭐라고 하는데 아니라 현실 속에 들었다는구만. 잘 가르치겠다. 저래 놓으니까 ○○교회가 부흥이 안되지, ○○교회 가 자지고는 어쩌든지 부흥을 시키더니만 거기 가더마는 그만 부흥이 안 돼, 왜 그렇지? 여러분들 왜 그렇지? 그 조사님이 무슨 조사가 되어 그렇지? 몰라요? 할머니조사, 할머니 조사가 돼 가고 그래, 할머니 조사, 인제 좋은 거 배웠어. 좋은 거 배웠어, 여러분들이 자꾸 기도하면 인제 처녀 조사가 돼요, 처녀 조사가 되면 부끄러움도 타고 겁도 나고, '아이구, 이래 이거 주님이 요래 볼라 조래 볼라.' 해 가지고 발발 떨면 처녀 조사 돼. 그러면 부흥이 돼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충만이 위에서부터 줄줄줄 다 들어왔는데. 하나님께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충만이 영감 속에 다 들어 있고 영감 속의 충만이 진리 속에 다 들어 있고, 진리 속의 충만이 말씀 속에 다 들어 있고, 말씀 속의 층만이 이제 어디 들어 있습니까? 성경 안에 다 들어 있어. 이걸 여러분들이 꼭 믿으십시오.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을 대할 때에 이제, 하나님께 있는 모든 것이 거기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성경을 대할 때에 하나님을 대한 것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말씀을 대할 때에 하나님을 대하는 것으로 그래 하십시오. 진리를 대할 때에 하나님을 대한 것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영감을 대할 때에 하나님을 대하는 것으로써 그렇게 하십시오. 조그마치라도 거기 쪼끔 차차 차차 하나님께보다 영감에게는 줄어지고 영감에게보다는 또 진리에 줄어지고 진리에 보다는 말씀에 들어온 것이 줄어지고 말씀에 온 거보다는 성경에 내주해 있는 것이 더 줄어지고 이렇게 그 차이가, 차이가 급속히 아주, 송곳 그트머리 모양으로 하나님은 대목이고 그 다음에 영감은 그보다 조금 또 좁고 그 다음에 또 진리는 더 쪼부당하고 좁고 가늘고 그 다음에 말씀은 더 가늘고 그 다음에 성경 안에 있는 것은 더 가늘고.
이러니까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충만한 은혜가 어디 제일 많고 어디 제일 적습니까? 하나님, 영감, 진리, 말씀, 또 성경 이런데, 어디 제일 많이 들어 있고 어디 제일 적게 들어 있습니까? 우리 여기 목사님들 내가 좀 물어 볼라 하니까, 꼭 같습니다. 꼭 같다는 걸 아십시오. 꼭 같은데, 왜 그라면 그만 영감이면 영감 그만 진리면 진리 말씀이면 말씀이지 그래 층어리를 많이 둬 가지고 그렇게 하는가? 그 층어리 둔 그 이유가 하나님께 있는 고장입니까 우리에게 있는 고장입니까? 우리에게 있는 고장이라. 우리에게 있는 고장이라서 우리가 거기는 접선을 못 하니까 또 접선하기 쉽도록 또 나타나고 접선하기 쉽도록 나타나서 그렇게 나타났지 거기는 꼭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견고히 잡고. 성경을 대할 때에 성경은 전지 전능으로 그렇게 대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나 성경이, 성경 안의 말씀이지만 이걸 단단히 구별해서, 제일 처음에 믿을 때에 자기가 하기를 나는 성경과 하나 될란다, 나는 성경대로 살란다, 나는 성경 모시고 살란다 나는 성경의 것이 되어 살란다, 성경 믿고 살란다, 성경 높여 섬기고 살란다 성경 모시고 살란다.
성경의 것이 되어 가지고 살란다, 성경과 동행할란다, 성경의 인도를 받겠다, 성경에게 능력 받고 성경에게 도움 받고 성경에게 가르침 받고 성경에게 보호받고 성경에게 온갖 은혜 받고. 원수 앞에서 성경에게 보호받고, 이제 성경에게 자기는 상대 해 가지고 성경에게 자기의 모든 소원 성취를 이룰려고 그렇게 자기가 믿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이라면 말씀 외에는 뭐인가? 성경이라면 내나 말씀 아닌가? 말씀인데 성경이라고 왜 그렇게 말하며 또 말씀이라고 그래 까다롭게 말하는가? 어릴 때에. 처음에 시작할 때에 말씀대로 한다 하는 그것이 초절이 됐기 때문에, 그러면, 거기서 마치, 그 사람은 순서를 밟지 안하고 이래 되니까 거게서 잡것이 생겨지기 쉽고 또 꺼풀이 있어야 될 터인데 꺼풀이 없으면 속에 알맹이가 약해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계란 꺼풀이 둘인데 껍데기는 사기로 돼 있는 꺼풀이 있고 그 다음에는 이제 얇은 명주 같은 거 그런 꺼풀이 있고 있는데, 그러면.
겉에 사기로 되어 있는 껍질은 껍데기가 필요 없으니까 내나 알맹이다 하고 껍질 없이 속에 알맹이 가지고 된다고 하면 터져서 그만 버려 버립니다. 터져서 버리요. 속에 겉으머리 계란 껍질 있는 그거까지 다 취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뒤에 먹을 때는 속에 알맹이를, 벗기고 이래 먹어야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는 제일 처음에 신앙생활에 그만 한 계단을 뛰어올라가 가지고 성경과 동행하지 안하고, 성경을 자기가 영접하지 안하고 이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는 것이 그거나 그거나 같다고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이제 계란을, 비유가 잘 안 되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믿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말씀을 믿는 그 순서가 되면 그것은 상하지 안하고 탈선되지 안하고 바로 되지만 성경이나 말씀이거나, 성경은 기억하지 안하고. 성경을 냅두고 기억하지 안하고 그저 성경 있는 말씀만 가지고 그 말씀에 '마태복음 몇 장에 말씀에 뭐 있지, 뭐 있지' 이렇게 하고 성경이라는 걸 떼 내어 버리면 우리의 어릴 때에, 우리 어린 우리에게 적합하게 하나님이 나타내셨는데, 적합하게 나타내신 적합한, 우리로 하여금 관계를 가질 수 있는 하나님이 나타나신 그 꺼풀 하나님이 나타나신 꺼풀, 제일 겉껍데기가 없어지기 때문에 속의 것이 그만 터지기 쉽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그만 다 냅두고 '아, 성경에 뭐라고 했느냐? 성경에 이랬다? 성경에,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에 뭐라고 했느냐? 마태복음을 찾아 가지고 그래 하는 사람은 성경은 없고, '성경에 뭐라고, 성경에 뭐라고 해 놨노' 이것도 없이 그저 로마서면 로마서 이래 거석해 가지고 '이 말씀이 로마서 몇 장에 이렇게 했다' 그렇게만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그 말씀을 자기가 기억하든지 또 자기가 사귀든지 상대하든지 이렇게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장성했으면 괜찮지만 어릴 때는 나중에 가서 그 말씀이나 다른 철인의 말씀이나 도덕가의 말씀이나 일반적인 사람들의 말씀이나 꼭 같은 말로서 혼잡을 일으켜 가지고 그 사람이 성경 안에 있는 말씀이라 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겉꺼풀이 없어졌으니까 그 계란이 툭 터져 가지고 버리기 쉽습니다.
요새 사람들이 성경과 사귀고 성경 속에 내나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들어와 있는데, 성경은 집어던져 버리고, 이제 성경을 집어 던지고 요새는 모두 말하기를 '성경' 하는 소리를 듣고 요새 뭘로 모두 변명을 하는 줄 아십니까? ○○○ 목사님, 뭘로 변명했지요? 뭘로 변명했소? 성서. 이제는 성경이 아니고 성서입니다. '자, 성경에 뭐라고 했지?' 와 '성서에 뭐라고 했지?' 와, 성서도 다 냅두고 몇 절을 말하면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했다 이렇게 그 말씀만 가지고 말하는 것과 성서에 이렇게 말씀했다고 말하는 것과 성경에 이렇게 말씀했다는 것과 말하는 것이 아주 다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새는 성경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아주 성경을 저버렸습니다.
이래서, 성경을 볼 때에 성경 말씀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 성경 말씀이라는 그것도 너무 속화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랄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 '목사님 나오셔서 하나님 말씀 봉독하시고 하나님 말씀 증거해 주시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또 '목사님이 이제 축도하겠습니다' 그렇게 안 하고 '하나님의 종이 축도하겠습니다.' 이라니까 이게 듣기 싫고 새부리가 나와 가지고 야단인데, 그럴 때라도 하나님 한번 불러 줘야 되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좋아서 그 강단에 마구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뭐 만날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말씀은 뭐. 성서라 하지.' 하나님 말씀이라 하는 것보다도 성경 말씀이라 하는 데 대해서 내가 깨닫기는, 내가 이거 절대라고 주장은 안 합니다. 내가 깨닫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과 성경 말씀이라고 하는 것과 성서라고 하는 것과 또 몇 장 몇 절하는 거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나 하나님께 대해서 하나님으로 알아서 섬기고 대우하고 하는 그것이 아주 많이 차이가 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라니까 마귀들은 듣기 싫어한다 그말이오. 뭐 종이 좋은 게 뭐 있겠소? 그러나, 거기서라도 '하나님의 종이라' 하나님의 종이라 해야 제가 목사라 하는 거보다, 목사면 하나님과 뚝 떨어져 가지고도 목사는 목사대로 오만 거다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번 떡 걸어 놓으니까 하나님과 한번 이름을 붙여서 연관성을 딱 붙여 놓으니까 그만 훨씬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가 없고 권위는 있고 그렇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제일 처음에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냈기 때문에, 물론 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냅두고 '성경이 뭐라고 말했느냐?' 그거 요번에도 '하나님 말씀이 뭐라고 말했느냐' 고거보다도 제일 일 학년에는 성경이 뭐라고 말했느냐 하는 이것을 말해 가지고 '성경이 뭐라고 말했지? 성경에 어떻게 하라지? 이 일에 대해서는 성경이 뭐라고 지금 지도하시는고? 여기 대해서는 성경이 노하시는가 싫어하시는가?' 자꾸 성경이 어떻게 하라는가. 성경을 상대해 가지고 성경과 관련을 가지도록 이라고 난 다음에 그것이 많이 숙달되고 장성되고 난 다음에는 이제 성경 말씀, '말씀이 뭐라고 하지?' 할 때도 '성경 말씀이 뭐라고 하지' 하는 거와 영 다릅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성경' 하다가 그 다음에는 '성경 말씀' 이렇게 할 것입니다.
이제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그라고 나서. 그게 숙달이 자꾸 이래 돼 나가고 난 다음에는 성경. 성경 말씀, 성경 말씀이 뭐라고 하는지, 성경 말씀이 내게 가르치고 있는 내 현실에서는 어떻게 해야 될 건가 하는 그것을 찾습니다.
이래서, 처음에는 '성경' 이란 이름을 많이 부르는 것이 제일 권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라는 말을 자꾸 많이 부르고 쓰는 것이 좋고, 성경이란 말 쓰는 거보다도 하나님을 자꾸 불러야 됩니다. 하나님을 자꾸 부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종, 또 뭐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 자꾸 하나님을 많이 붙이는 걸 또 하나님이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얼마든지 좋아합니다.
이것을 나는 분명히 느껴 가지고 있어서, 처음에 그 사람이 신앙생활 할 때에 그만 그 사람에게 소개할 때에 '마태복음에 뭐 어떻다 누가복음에 어떻다' 이렇게 말할 게 아니고 '성경에 이렇다 성경에 이렇다' 성경을 소개해 가지고 그 사람이 성경을 상대해 가지고 모든 것을 지도도 받고 인도도 받고 도움도 받고 이제 성경과 친밀해 가지고 성경에 받을라고 성경에 의지할라고, 성경을 믿을라고, 성경에 받을라고, 성경에 지도 받을라고, 성경에 물어볼라고 자꾸 이렇게 성경을 사모하고 내나 성경 속에야 뭐 책이 아니라 성경 속에 말씀 아닙니까? 이러나 성경 속에는 말씀이, 성경 말씀에 물어볼라고 하는 그것을 가르치지 말고 '성경에 물어봐라'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것이 유익이 있다는 것을 내가 말로 발표도 다 못 하겠고, 이거 발표해야 다른 사람들은 '곶감 접말 한다. 별 유익이 없는 말한다' 절대 아닙니다. 요새는 말이요. 요새는 성경을 떼 버려 버렸어. 떼 버려 버리고 그저 이거 성서 그래 아니면 성경에 있는 무슨, 성구나 읽고,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만일 10장에 있는 성구라면 '마태복음 10장' 이러면 마태복음은 성경인 줄 아는 거 아니겠습니까? '성경 마태복음 몇 장 몇 절' 이것을 이래 하면 시간이 걸려도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래서, 성경이라는 이 이름을 교인들이 깊이 인식을 박아 가지고 있고, 이래서, 바로 성경이 말씀이요 성경이 진리요 성경이 영감이요 성경이 예수님의 대속이요 성경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하나님이 나타났어도 위에, 영감으로 나타났고 진리로 나타났고 말씀으로 나타났고 성경으로. 마지막으로는 성경으로 나타나 가지고 우리에게 제일 접근하기 쉽도록 그렇게 나타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접해서 거게서 아주 숙달돼 가지고 성장되고 난 다음에는 말씀을 상대하고 말씀에 성장되고 난 다음에는 진리에 상대하고, 진리에 성장되고 난 다음에는 영감에 상대하고, 영감에 성장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을 멀리서 우러러 바라보는 우리가 돼져야 되지 그만 이렇게 전부 초절이 돼 가지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점점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 권위가, 성경 권위가 자꾸 떨어집니다. 성경 권위가 점점 떨어지요.
이러니까, 성경을 가리켜서 성서라 그렇게 말합니다. 뭐 원어는 나는 어떻게 돼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성경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으니까. 성서나 성경이나 뭐 말은, 원어는 물론 같을 거야. 성서나 성경이 그러나, 우리는 성경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으로 그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서나 성경이나 원어가 어찌 돼 가지고 있습니까? ○○○ 목사님, 같습니까? 우습제? 같은데, 백지 성서나 성경이나 원어는 같은데 뭐 그렇다고. 같은 데 왜 자꾸 그걸 가지고 꼭닥스럽게, 저거 원어를 모르는 무식한 소행이라 그렇게 생각할 거라 말이오. 성서보다는 성경이, 원어는 같지만 그 번역을, 원어는 물론 같은데 원어 번역을 성서라고도 번역했고 성경이라고도 번역했는데 성경이라고 번역한 것은 바르고 성서라 그 번역한 거는 타락한 사람들이 번역한 것입니다. ○ 목사님, 어때요? 안 그래요? 나는 원어 몰라도 그거는 알아.
이러니까, 자꾸 지금 뻐덜트려 나갑니다. 이제는 앞으로 성서라고 하지 안하고 뭣이라고 할란지? 성서라고 하지 안하고 앞으로는 뭐이 나올지 그거 누가 연구해 봤소? 예? 이제 이야기 성경이라고 붙였는가 그저 이야기라고 해 놨는가? 이야기 성경이라 해 놨어, 이야기라 했어? 아, 구약 이야기 신약 이야기, 이제 구약 이야기 신약 이야기로 나왔답니다. 이제 이야기가 돼 버렸어. 이야기가 되고 난 다음에 조금 있으면 이제 신화가 될란지 모릅니다. 그리 되면 마구 그만 인제 더 여지없이 하나님의 진노가 다 차져 가지고 쏴악 갈아 가지고 불로 가지고, 불로 가지고 쏴악 태워 버리요.
이거 가르치기 제일 어려운데 이걸 여러분들이 꼭, 이제 우리가 각자 자유로 하기는 하지만 성경을 떼 놓지 마십시오. '성경 마태복음 몇 장, 성경 요한복음 몇 장, 성경 로마서 몇 장' 성경 떼 내 버리고 무슨, 마태복음이나 이름 붙이는 그거 다 붙이지 말고 '성경 무슨 복음 몇 장, 성경 뭐 몇 장' 성서라는, 성서라는 말 쓰지 말고. 이래 가지고, 어릴 때는 교인들 가르칠 때도 '여보시오.
성경대로 해야 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것이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의지하십시오, 성경을 믿으십시오. 성경과 동행하십시오.
성경에 물어 보십시오.' 내나 성경 말씀에 물어 보는 것이지만 '성경에 물어 보십시오' 자꾸 이래 가지고 성경을 교인들로 더불어 제일 밀접하게 초보로 상대하는 대상을 만들도록 이렇게 우리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가 친할 때에는 여기 말한 대로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우리가 성경을 상대할 때에 이 성경하고 친하면서, '성경은 능히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 성경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성경은 '능히' 그런다 말은. '성경은 능히' 성경은 능력을 가지고 다 할 수 있다 그말이오. 능력이라 말은 성경은 이런 게 다 가능하다 그말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는 것은 뭣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고 하니 하나님이 영원전 우리를 벌써 목적하실 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을 하셨는데 거기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베푸신,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예택.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보존 하나님의 섭리, 도성인신, 십자가의 대속, 죽은 가운데서 부활, 이로 말미암은 은혜, 이로 말미암은 믿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은 무엇이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인고 하니 거기서부터 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라 말이오. 거기서부터 다 시작해 가지고 이렇게 이루어 나가는 그 모든 운동. 모든 역사, 모든 공로, 모든 건설, 모든 장비, 모든 능력, 그것을 믿는 믿음을 가리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 말한 것입니다. 그 안에 있는 믿음. 그것을 믿는 믿음인데 그 믿음은 이제 인간이 개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저 영원 전 목적을 가진 그리스도에서부터 자꾸 오고, 오고 오고 오고 오고 해 가지고. 십자가의 대속으로써 완전히 대속을 베푸신 공로까지의 그 운동 속에 있는 믿음, 그 운동 속에 있는 믿음, 그 운동을 알고 인정함으로써 그로 인해서 그에게 오는 모든 은혜를 가리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지식과 인정과 실행을 가리켜서 믿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 말은, 그리스도는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택했다는 그 그리스도를 두고 말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은혜. 그 운동으로 만들어 놓은 은혜라.
그 지식이라, 그 지식을 인정하는 것이라, 그 지식대로 실행하게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성경은 능히 너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경이 뭐이냐? 성경이 무엇을 품고 들어 있느냐? 성경이 무엇을 품고 있느냐? 성경이 무엇을 간직하고 있느냐? 영원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한 그리스도로부터 쭈욱 내려온 그 모든 것을 성경이 다 가지고 있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성경이 다 가지고 있다, 그 지식이 그 안에 다 들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모든 공로와 모든 설정이 다 돼 가지고 다 구비돼 가지고 있다. 이 성경 속에는 뭐이 들었습니까? 성경 속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 들었다 그거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 들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말은, 구원에 이르는, 네 미래를 다 알고 하나 실수 없이 또박또박 다 하도록 하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의 권위를 여기서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 그 안에 들었는데 그 믿음이, 성경 안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믿음이, 이 성경을 읽는 자에게는 이 믿음의 능력이 그를, 영원 미래를 다 알게 해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을 다 가지도록 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모든 복잡이 이 성경 가운데 다 내포되어 있고 문서로 내포되어 있고 글자로 내포되어 있고 지식으로 내포되어 있고 말씀으로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능력으로도 내포되어 있고 실존으로 내포되어 있다, 실존으로 내재 해 있다 하는 말입니다. 실존으로 내재해 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은 바로, 이래 말하면 좀 안 됐지만 성경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요, 성경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오. '그러면, 성경이 하나님이냐?'-이래 놨으면 아이구야, 이단이라 달려들 사람 많이 있을 것이라 그말이오. 성경은 하나님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시고. 앞으로도 나타나시고.
성경을 믿는 자에게는 앞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그에게 줘 가지고 미래사를 환하게. 영원 무궁의 미래를 알 수 있는 그 지혜는, 영원무궁을 알게 해 가지고 그것을 구원을 이루게 한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이래 가지고 이제, 구원은 뭐이 구원이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다 차지하도록 한다 그말입니다. 이거 뭐 아는지, 따라오는지 모르겠는데. 성경은 우리가 이런 권위가 있는 줄을 믿어야 됩니다.
성경에는 어떤 게 있습니까, 성경에는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성경 안에 계십니다.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성경 안에 나타났습니다.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을 정한 것이 성경 안에, 성경을 이제 성경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도성인신, 십자가의 대속. 부활, 영원 무궁 세계까지가 전부 다. 하나님, 자존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섭리 영원 무궁의 그 전부가 다 성경 안에 다 내포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이 성경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데 껍데기는 보면 종이요 먹이요 글자요 말이지만 그 속에 자꾸 들어가면 말뿐이 아니라. '말 뿐이 아니라니?' '그 속에 또 진리가 들어 있어' 진리뿐이 아니라 또 영감이 들어 있어. 영감뿐이 아니라 또 그 다음에 뭐이 있느냐 하면 또 그 안에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 있고 하나님이 다 계시고 내주해 계신 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지금 신구약 성경은 예수님을 중심한 책이라 여기까지는 사람들이 다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다 신구약 성경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고 신구약 성경은 전부 예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까지는 사람들이 다 거의 통일이 다 됐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의 권위를, '성경은 능히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니까.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니까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믿음이오? 예? 어디 있소? 우리 안에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지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인데. 그라면 그 그리스도가 뭐인데?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 우리 구원을 영원 전부터 벌써 목적할 때부터 책임지신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라 그말이오. 목적하신 그대로 하나님이 사람되시기까지 해 가지고 도성인신 하신 것이 우리 구원을 이루실라고 하나님이 적극 나서 가지고 일하신 것이라 말이오. 그래 가지고 부활하셔 가지고, 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이제 부활하시고 난 다 음에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만들라고, 새끼 그리스도를 만들라고 그리스도의 모형을 만들라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대제사장이라 말은 그리스도라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라 그 말은 이제 그리스도의 직책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그리스도가 못 박혔다고 그렇게 나중에 가서는 뚜렷이 나타냈습니다.
이러니까, 성경은 어떤 성경이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성경인데, 이 성경은 너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가지고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너희 구원에 필요한 영원 미래의 모든 것을 다 알게 해 가지고 너희들의 구원을 넉넉히 이루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성경이라,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성을 두고 지금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하고 사귈 때는 성경이 뭐인지 알아야 사귀지요. 성경을 사귈 맛이 있어야 사귀지요. 성경이 그까짓 거 뭐 책 한 권 같을진대야 성경이 책 한 권 얼마 갑니까? 이런 성경 얼마 가요? 육천 원짜리 그까짓 거 불에 태워 버리면 이거 무슨 가치 있어? 이래 보면. 이거 이렇게, 성경은 가치가 없고, 저 무슨, 의서 같은 거는 요만한, 요만한 의서 있었으면 아마 의서는 요만한 의서 하나 놓고, 요새는 하도 의서가 많이 나왔지만, 요만한 의서 쳐놓고 제일 비싼 의서는 얼마나 갑니까? 저 의학 박사 한번 대답해 보이소. 대략? 삼사만 원이오? 요새 삼사만 원이지 옛날 화태편작이 중국에 나온 의서 그런 거는 요런 걸랑 냅두고 요거 한 십 분지 일쯤 하는 그 하나에 요새 돈으로 말하면 억억만 원을 줘도 안 팔아. 그거 가지고 나라의 권세가 왔다 갔다 해. 나라가 왔다 갔다 해, 그런데.
성경이야 육천 얼마니까 얼마치 되느냐? 이러기 때문에, 성경은 실은 이거 돈 많은 사람들이, 믿음 좋은 사람들이 보조를 해 가지고 성경을 헐하게 해서 이렇게 성경을 어쩌든지 돈 없는 사람이 사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의 사랑으로써 이거 헐하게 해 가지고 보조해 가지고 헐하게 하니까 가치 없어 헐한지 알지 공으로 주니까 이거 쓸 데 없는 것이라 천하니 공으로 주는 줄 아니까 이러니까 이거 참 사람들이 기가 막힐 일이지.
이러니까 성경의 가치를 알고 성경을 사귀자 그말이오. 오늘 오후에 지금 공부할라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성경과 동행해야 되는데 성경의 가치를 알아야 동행할 맛을 보지. 맛을 알지, 결혼을 할라 하는데 결혼할라 하는데 그 남자가 보니까 앞뒤꼭지가 툭 불거진게 코는 수뿍 솟은 게 그 눈은 뻐끔 들어간 게 그게 보기에 볼품이 없다 말이오. 이러면 '아이구, 꿈에 볼까 징그럽다' 안 할라고 한다 말이오. 그러나 가만히 보니 보니까 그게 뭐 박사가 열 두 개나 되지 또 월급이 한 달에 수천 불이지, 뭐 미국 한국 소련 뭐 중공 막 서로 뺏들어 가서 한 시간만 와서 강의해 주면 몇 천 불 줄라 하지, 이 속에 가치가 그러니까.
이제 그라고 난 다음에는, 꿈에도 보기 싫다 했는데 어떻게 좋아하는지 달아 매입니다, 결혼할라고 달아 매일 거라 그 말이오. 가치 있는 걸 내용을 알면.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 모양으로 성경의 권위의 가치를 좀 알자 그말이오.
성경이 뭐 이거는 책 한 권으로만 이렇게 보기 때문에 성경을 상대할 만한 가치가 없어.
이래서, 성경 가치 알고 난 다음에는 말씀 가치를 공부하고. 말씀 가치를 공부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진리 가치를 공부하고. 진리 가치를 공부하고 난 다음에는 영감 가치를 공부하고, 또 이제 사귀고 가까이 얻는 그런 방편을 또 공부하고 그렇게 해 나가 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볼때에 첫째로 '성경은 능히 너희로 하여금' 우리들로 하여금, '능히' 그런다 하는 그 말은 가능하다 말이오. 성경은 너거들로 이렇게 구원에 이르도록 넉넉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성경 안에 들었다 그말이오. "성경은 능히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이러니까, 이 성경의 권위를 이렇게 알고 성경을 상대하자 그말이오. 이 성경은 영원전 자존하신 하나님과 역사하신 그리스도, 또 목적, 예택, 예정, 창조, 보존, 섭리, 도성인신, 주권 개별 섭리, 오늘까지의 모든 것만 아니라 영원 무궁에 있는 모든 미래를 네게 환하게 다 알려 가지고, 영원 미래를 다 알려 가지고 부끄럽지 않은 영원한 영광스러운 구원을 넉넉히 이루게 할 수 있는 것이 성경이다, 그러면, 성경 권위 있어요 없어요? 성경 권위 있어요 없어요? 이제 조직 신학에 보면 계시론이라고 있는데, 계시론이라고 있는데, 그 계시론에 있는 것은 뭐 계시. 조작배기로 자꾸. 이러니 저러니 자꾸 잔소리만 주 꽂아 놨지 성경의 권위라 하는 것은 말해 놓은 것이 아주 허무합니다. 아주 빈약해. 성경의 권위를 이래 우리가 알고 성경과 사귑시다.
'성경은 능히 너희로 하여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지만 성경은 너거들로 이 구원을 넉넉히 이루게 할 수 있다, 이런 성경이라. 성경은 영원 무궁한 영광스러운 구원을 우리에게 이루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이러니까, 성경은 모든 피조물보다 큽니다. 땅 위에 우리에게 피조물 가운데에 큰 것은, 피조물 가운데에 큰 것은 성경입니다. 예수님의 신성도 이 가운데 다 들었고 인성도 다 이 가운데 내포되어 있다 말이오. 예수님의 신성, 하나님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이 가운데에, 이 가운데에 내포돼 가지고, 이 가운데 뽈끈 구속돼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이 하나님이 이 성경 속에 나타나서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는 이 하나님이 계신다 그말이오.
하나님이 저 위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서 우리가 만나기 쉽도록 나타났는데 제일 처음에 우리에게 아주 가깝게, 우리로 하여금 접하기 좋도록 아주 쉽게 연구해 가지고 우리가 접하기 쉽도록 나타나신 첫 나타남이 뭐입니까? 그것만 가지고도 안 돼. 그 뒤에. 이제 또 새로 나타나면? 그 뒤에 또 새로 나타나면? 성경!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껍데기는 다르지만 속에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 자꾸 그대로 주욱 와 가지고, 그러기 때문에. 성경하고 계약하면 하나님하고 계약한 거 한가지라. 성경이 인정하면 하나님이 인정한 거 한 가지라. 성경과 맺었으면 하나님과 맺은 것이라. 성경을 절대 믿고 성경이 보호한다고 이래 한 것은 하나님을 절대 믿고 보호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말이오. 성경의 인도에 절대 복종했으면 하나님 인도에 절대 복종이라.
성경하고 흠이 없이 완전, 이제 완전 완성을 해 버렸으면. 성경하고 완전 완성했는데 그 뒤에 말씀에게 가니까 '나 모른다 네가 뭐 저 산따로, 저 산따로 성경하고 너하고 결합 완성이지 내가 무슨 상관 있어?' 안 그래. 성경하고 인제 완전한 결합을 했으면 말씀한테 가니까. 아, 그러냐고, '아 나는 성경하고 완전 그 모든 걸 해결지워 놨는데 말씀에게는 좀 미안한데요 송구스러운데요' '아, 성경에 해결지운 것이 말씀 나하고 해결지운 것이지' 이란다 말이오. 그래 보니까 '아, 말씀하고 성경하고 잘 통하는구나' 그 다음에 진리한테 찾아가서 '나는 성경하고' 해결했는데 진리하고는 어찌 됩니까?' '아, 성경하고 해결했으면 곧 진리 나하고 해결한 것이지. 성경하고 맺은 것이 나하고 맺은 것이지.' 같다 한다 말이오.
또 그 다음에는 영감한테 찾아가서, 영감한테 찾아가 가지고 '나는 성경하고 모든 걸 다 맺고 끊고 다 해결을 다 해 놨는데. 성경하고는 다 철통같이 해 놨는데 이제 영감하고는 어찌 됩니까?' '아, 성경하고 해결 됐으면 나하고 해결한 것이지 성경하고 다 모든 걸 해결했으면 영감 나하고 해결한 것이지' 보니까, 나중에 들어가 보니까 성경 말씀 진리 영감 하나님 하나라 그거요.
우리의 미숙함에 따라서 나타나신 방법이 달랐지 그 속에 나타나신 분은 한 분이시라.
그러기 때문에, 성경 권위를 '성경은 능히' '능히 너로 하여금' '너로 하여금' 우리들로 하여금 넉넉히 이룰 수 있게 한다 그말이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예수 안에 있는 믿음. 그러면, 이 그리스도는 무슨 그리스도일까요? 요새 성경에 말한 그리스도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예택했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 하나님의 성호입니다. 영원 전 성호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 성호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인데 하나님의 직명입니다.
하나님의 직명. 직책을 이름한 하나님의 직명입니다. 무슨 직? 제사장 직, 선지자 직, 왕직, 그 안에 있는 믿음이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무엇이지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인정하는 인정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것,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 그게 믿음 아닙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이 믿음이 성경에 나타났다 그거요. 이 믿음이 성경에 나타났어. 예수의 믿음이 성경에 나타났어.
예수의 믿음이 뭐인데? 예수의 믿음은 예수에 대한 지식이요 예수에 대한 인정이요 예수에 대한 소망이요 예수에 대한 동거 동행의 복종이 그것이 믿음이지. 예수의 믿음, 그리스도의 믿음,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이 믿음으로 구원에 도달하는, 그 믿음이 그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어디 있습니까? 예? 성경 안에 있어. 성경의 권위를 똑똑히 우리가 알자 그말이오.
이런데, 자꾸 성경을, 마귀란 놈은 성경을 마구 쥐어틀고 있습니다. 이래서 성경을 뭐 이야기 성경이라 해 가지고 알기 쉽게 하는 게 아니라, 성경 안의 자체에 권능의 권위가 있어. 인간의 지식 가지고 알라 할게 아니라 성경 안에 자체의 권위성이 있고 거게 명백성도 있고 신빙성도 다 있어요. 이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변동만 안 하면 성경 말씀이 와 가지고 그 안에 있는 권위가 역사하지만 성경 말씀을 휘딱 변동해 버리면 그것은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역사 할 수가 없고 떠나 버리신다 말이오. 마귀란 놈은 이걸 알고 하는데 성도들은 마귀에게 꼬여 가지고 이걸 모르고 지금 마구 지금 야단을 지기고 있다 그거요.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가, 물론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서 알기 쉽게 이렇게 저렇게 하지만, 성경은 어쩌든지 해석할라면 성경에 있는 것으로 해석을 하고 또 이렇게 저래, 모든 만물을 들어서. 예를 들어 가지고 이렇게 해석도 하지만 해석하는 성경 그 이치는 요동치 말고, 그 성경을 자꾸 사람들에게 알도록 이렇게 저렇게 사람의 말로 이렇게, 알게 소개하는 그런 거는 하지만 성경 그 자체는 변동을 시키면 안 됩니다. 성경의 자체는 변동이 안되어 있는 거기에 권위성이 다 들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 서부 교회의 주일학교를 한국 교회서는 제일 큰 주일학교라. 또 세계의 제일 큰 주일학교라 하는데 세계는 나는 모르겠습니다.
모르나, 저 먼저 주일에는 10,150명 모였고 하기 아동 성경 학교 때에는 12,500명 모였었습니다. 모였는데. 뭐 크고 작은 거는 냅두고 하나님이 우리는 상상도 안 했는데 주일학교를 이렇게 많이 주는고 하는 데 대해서 세 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뭐이냐? 하나는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 학생들의 지식 정도를 따라서 가르치자 하는 것이 온 세계입니다. 공통입니다. 또 학생들의 심리에 맞춰서 학생들의 심리에 맞춰 가지고 학생들이 좋아하도록 가르치자 하는 그것이 온 세계의 통일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동화라고 말합니다. 학생들의 정도에 맞춰서 가르치자. 또 학생들의 비위에 맞춰서 가르치자 이렇게 하고 있는데, 서부 교회서 저는 '꼭 성경 말씀대로만 가르치라. 인간이 못 쓰게 버려진 이거 헌 차, 헌 추럭같이 버려진 헌 차. 나이가 칠십이면 더 버려졌고 육십이면 좀 덜 버려졌고 오십이면 덜 버려겼고 스무살이면 아주 덜 버려겼고 열살이면 아주 덜 버려졌고, 한, 국민학교 학생들은 아주 덜 버려져 있다.' 덜 버려져 있으니까 거기다가서, 자, 아주 많이 버린 추럭에다가서 짐을 많이 싣겠소 덜 버린 추럭에다 짐을 많이 싣겠소? 대답 한번 해 봐요. 덜 버려진 덜 상한 추럭에다가 짐을 많이 실을 수 있지.
이러기 때문에 아동들은 덜 버려져 있기 때문에 모든 심령이나 뭐나 덜 버려져 있기 때문에 새 차 한가지라. 어쩌든지 간에 진리만 막 때리 실어라 해요.
진리만 때리 실어. 이래 가지고 공과할 때는 제일, 설교 중에도 제일 요지만 빼 가지고 이래 이래 합니다. 그러면 반사들이 모르니까 일주일 내내 그거 말해.
이거이라면 반사들이 저거 알고 가르치는지 모르고 가르치는지 몰라도, 반사들은 몰라도 학생들은 다 알아. 이거 물으면 대답을 딱딱 하니까 사람들이 탄복을 합니다. 저 복잡한 데, 내가 가야 한 마디도 못 듣겠어. 와글와글 와글 하는데, 또 어떤 놈들은 와글와글 하는데도 뭐 걸상 뛰고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또 걸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가 이라는데 저기 뭐 알겠나 싶은데 물으면 문답할 때는 언제 들었는데 다 들어. 꼭 그 답 다 합니다. 대답을 다 해. 그게 성령의 능력이라.
이래서, 온 사람들에게, 물으러 온 사람 중에, 526회를 사람들이 우리 전국에.
일본에서 그래 각처에서 견학하러 오고 시찰하러 왔었습니다. 왔는데, 그분에게 말할 때에 '그래 어떻게 가르칩니까? 주일학교 교사 양성은 어찌 합니까?' 양성 우리는 하나도 안 하거든. 양성은 하나도 안 해요. 주일 학교 교사 양성 하나도 안 하고, 또 '어떻게 가르칩니까?' 할 때는 내가 그 말 해. 꼭 성경 말씀만 가르치는데.(지금도 안들이요? 안 들립니까?
그래서, '주일학교는 장년반 설교한 중에서 줄기를 간추려 가지고 제일 골자.
어려운 것만 성경 본문대로 그대로 가르칩니다.' '이라면 학생들이 압니까? 또 1학년 3학년 6학년 한테 가르쳐 가지고 어째 됩니까? 1학년은 1학년대로 모아 놓고 가르치고, 2학년은 2학년대로 모아 놓고 이래 가르치지 한테 가르쳐 가지고 어째 압니까?' 그러는 말은 내가 간단하게 대답해서, 그건 잘 알아요. 내가 대답하기를 '장년반은 최고 학문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국민학교도 입학 안 한 사람들도 있고. 한자리에 놓고 가르쳐도 다 그란다고 해서 무식한 사람이 예수 못 믿을 거 같아도 무식한 사람이, 예수를 더 잘 믿는 사람이 거기서 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거는 성신이 감동시켜서 알게 하는 것이니까 우리는 전하면 되는 것이지. 알게 하는 것은 성신이 알게 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그저 성경 말씀대로만 가르칩니다' 이라면 그렇겠다고 그거는 모두 다 사람들이 이해를 해요.
또 '아동들 심리를 이용해 가지고 뭐 노리개도 하고 공작도 하고 그렇게도 안 하고 자꾸 그만 그래 땡땡하게 딱딱하게 이래 그만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그래 하는 그것만합니까? 아무 뭐 노리개 그런 거는 하나도 없습니까? 그 아동들이 그라면 재미가 없어서 옵니까?' '우리 주일학교는 못 하지만 학생들이야 이렇든지 저렇든지 주님만 기쁘시게 하려 하는 그것을 목표로 가지고 합니다.' 인제 그게 달라요.
또 하나는 뭐이 다르냐 하면 반사들을 자꾸 처음에는 대접을 하고 이랬었는데 서부교회 주일학교 반사들은 대접 하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작년 탄일 때에 뭐 선물 줬어요? 올해 하기 아동 성경 학교 하고 난 다음에도 점심 줄라 하니까 점심 값을 내래요. 점심값 줬더니만, 점심값 주니까 그거 가지고 전부 학생들 '상품 타 주고 저거는 점심 하나도 안 먹고, 빵은 몇 개씩 먹었나요? 예? 먹은 사람도 있고 빵이 없어 모자라서 못 먹은 사람도 있고 그랬어.
이러니까, '대접을 좀 해 줘야 되지' 이랬는데, 대접을 해 주니까 뒤에 위험할 때가 있어요. 이게 병들 때 있다 말이오. 병이 들어 가지고 공연히 삐꿔 가지고 이와 같이 낙심하고 있을 때에 가 가지고 뭐 위로를 하면 '안 갈랍니다. 내가 뭐 국밥 한 그릇 그거 얻어먹고 한 줄 압니까?' 하, 이거 엉뚱해서, '내가 냉면 그거한테, 그거 하나에 팔려 가지고 한 줄 압니까? 내가, 뭐 타월을 몇 개 주는데, 그거 가져가십시오. 나 안 할랍니다.' 하 이게 암만 말해도 안 곧이 들어. 안돼 '하. 이게 식이 틀렸구나' 이래서, 그만 그거 없습니다. 그게 없고 난 다음에는 혹 그래 병든 사람이 있어. 가 가지고 '너 왜 안 하노? 뭐 너 목사보고 했나? 주님보고 했나 목사보고 했나? 또 너 대접 안 해 준다고 했나? 대접 안 해 줘 그래 그랬나? 너 대접 바래서 대접 안 해 줘 그래 그랬나? 너 뉘 보고 했노?' 마구 그만 그때 조겨 대. '너 뉘 보고 했노? 구원 내놔라. 너 뉘 보고 했지? 대접 안 해 준다고 그러나? 너 목사 보고 했더나?' 마구 실컷 퍼붓는다 말이오. 이거 위로 커녕 실컷 퍼부으면 눈물 쭐쭐 흘리며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과연 내가 참 인본주의입니다. 주님은 날 위해서 이렇게 애를 쓰시고 큰 대속을 줬는데 내가 이걸 하고 이렇게 가중했으니 내가 회개합니다.
내일부터 내가 하겠습니다.' 그래 한대 맞고 나면 어떻게 기운을 내는지. 그만 힘이 나고 풀풀 이라는데 뭐 줘 놓으면 그게 걸려 가지고 해결이 안 돼.
주일학교 반사들 대접하지 말아요.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장로님들 세도를 못 부립니다. 장로님들이 '이거 갈비나 한턱 좀 내도록 한턱 좀 먹이지요' 이라는데 내가 그걸 못 얻어먹게 하거든.
갈비나 한턱 얻어 먹일라고 이래 하는데, 갈비 그런 걸 낼라고 해 쌓는데. 자, 갈비를 낸다 해도 못 내게 하지 요만 한 것도 얻어먹지 안하지, 장로님들만 존경하고 이라니까, 우리가 바라는 건 하나님의 복음 위해서 일하는 거나 바라지 딴거는 하나도 바라지 안 하니까 돈 가지고는 매수를 못 해. 요새 장로님들이 저 분교 가 가지고 오후 예배 보지, 분교 가 가지고 거기서 뭐 일곱시까지 있다 거석하지, 이러니까 배가 고파서 아마 그 귀골 장로님들은 되게 고생할 거라.
그러니까 힘이 나는 모양이오. 복음대로 꼭 그래 해야 되지 인본 쓰면 안 됩니다.
학생들도 그래요. 이거 이웃 교회서는 뭣 주고 뭣 주고 자꾸 고라는데 떡 저거 동무들에게 가 가지고 '야, 너 어느 교회 갔지?' 아무 교회 갔다고. '거기 가니까 뭣 주더노?' 뭣 주더노 하면 이래 버려요, 그만, '뭣 주더노? 뭐 노트 주고 뭣도 주고 뭣 주고 뭣 주더라. 아니야 나 다음부터 거기 안 갈거야' 다 자존심이 있고, 신앙의 자존심이 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안 간다' 하면, '너 그라면 돌아다니며 더 여기보다 더 많이 주는 데로 가거라. 너 그저 얻어 먹을라고 예수 믿나? 이 못난 놈아! 저거 동무끼리 그라면 '아, 아니야 아니야.
나 그것 때문에 그라는 거 아니야. 나 그거 싫어. 나는 지금 서부 교회로 갈 거야' 그래 놓으니까 갔다가는 빵만 주고 뺏기고 빵만 주고 뺏기고 다 뺏기는 모양이라.
주님을 그들에게 소개해 주고 진리 주고 하늘나라 구원 주고 이래 주니까 다 좋아하고 좀 자존심상 참 마음에 씩씩한 모양이라. 이래 그렇게 하면서 '내가, 뭣 받고 하노, 내가? 주님보고 하지, 내가. 주님이 날 위해서 대속했기 때문에 주님 위해서 하지' 주님 위해서 한다 하니까 또 한 보람도 있고 그래도 또 자존심상 가치도 있고 마음에 기운이 난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주님 위해서 하니까 '야, 너 욕 얻어먹어도. 다른 거 같으면 그거는 견디지 못해요. 그래도 주님 위하다 보니까 '너 욕 얻어먹었지? 주님 어쨌지? 욕 얻어먹으니까 좋으나 나쁘나?' '아, 괜찮아요' '그러면, 주님이 너 위해서 고난 당한 거 너도 좀 알고 있구나' '아 괜찮습니다. 내가 뭐 그게 뭐 어떻습니까?' 어떻게 쓴 것을 잘 견디는지.
성경의 권위는,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그 믿음은 뭐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인정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소망.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맡김,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의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복종, 예수님께 복종하는 복종 그것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다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다 되어 있어. 오늘 어떤 사람이 예정을 물으면서 '그러면, 예정을 다 했으면 뭐 사람 할 일은 아무것도 없으라고요?' 그런 거 같지? 우리에게 믿음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다 있습니다. 다, 우리 구원이 다 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또 알도록 또 돼 가지고 있고, 인정하도록 돼 가지고 자고, 또 맡기도록 돼 가지고 있고, 바라보도록 돼 가지고 있고, 의지하도록 돼 가지고 있고 복종하도록 돼 가지고 있고, 다 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이걸, 다 돼 가지고 있는 거를 성경에 몽땅 옮겨 가지고 옮겨 놨는데. 이제 성경에 옮겨 놓은 것을 뉘든지 또 거기. 성경에 옮겨 놨는데 이 사람은 한 뭉텅이 주고 저 사람은 두 뭉텅이 주고 저 사람은 세 뭉텅이 주고 저 사람은 네 뭉텅이 주고 저 사람은 열 뭉텅이 주고. 이러니까. 세상에서 볼 때 저 사람은 예수 잘 믿는다 하는 것은 열 뭉텅이 받은 사람이라면 저거는 예수도 더럽게 믿는다 하는 것은 한 뭉텅이 받은 사람이라. 이러니까, 열 뭉텅이 받은 사람이 한 뭉텅이 받은 사람 보고 멸시 천대 할 수 있습니까? 없어. 한 뭉텅이 받은 사람은 열 뭉텅이 받은 사람 보고 이제 불만 불평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안 주면 어짤 거라, 제까짓 게? 안 주면 어짤 거라? 안 주면 그만이지. 또 이게 묘하거든 안 주면 그만이지만 이렇지만 요번에 쪼끄매 주고 많이 줬는데. '저는 많이 주고 나는 적게 줬다' 시기 질투하는 그거는 그런데 그것 또 '아이구,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것 이런 것을 이래 주십니까?' 하는 그것은 요다음 그리스도 심판 너머 가 가지고는 큰 거 주거든, 마태복음 20장 품꾼 비유할 때 일 많이 한 사람이 앞섰소 적게 한 사람이 앞섰소? 그게 뭐냐? 그게 이제 겸손의 상급이요 또 공짜배기 은혜라 하는 것을 아는 상급이라. 제것 가지고 제 한 사람은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어. 많이 사함 받은 자는 크게 감사가 더 많고 적게 사함 받은 자는 적게 감사했다 그렇게 말씀했고. 또 자기가 다 같이 받았는데 적게 받고 감사하는 사람과 많이 받고 감사하는 사람과 이다음에 감사의 저울로 다는데, 감사 저울 달아 가지고 하니까 제일 못난 나사로 그것이 상급을 많이 받았어. 감사 저울. 아무리 제가 어디든지 해 가지고 잘났다고 해 가지고 우쭐하고 그만 감사 없고 제가 잘나 그런 줄 알면 남의 것 도적질했기 때문에 가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러니까 이거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있게 하는 거, 구원에 이르게 하는 거 이거, 다 이것이 어디 들었지? ○○○ 목사님, 이것이 어데 들었지? 이거 어데 들었지? 누가 주지? 누가 주지? 어데 들었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지혜, 구원을 넉넉히 이루게 하는 이것이 어데 들었지요? 예? 성경, 누가 주지요? 누가 주지? 성경. 성경 안에 있고 성경이 줘요.
이러기에 성경의 권위를 이런 줄 알고 성경을 상대하자 그말이오. 이러니까 성경을 모시고도 아깝고 모시고도, 성경책에 우리는 우상 섬기지 말라 했기 때문에 성경에 절은 하지 못하지만 성경 모시고 다녀야 돼요. 성경을 모신다는 것은 자기 인격이 성경을 이렇게 모시고 존경해야 됩니다. 성경책을 모시는 게 아니라, 미신주의 우상주의같이 모시는 게 아니고 성경은 내가 모실 성경이요.
섬길 성경이요, 성경에 내가 속한 자요, 성경의 것이요, 내가 성경의 것이요 나는 성경에 속했소. 나는 성경을 섬길 자요. 성경에게 복종할 자요. 성경에게 내 있는 거 다 드려서 섬기고 성경에 있는 모든 걸 내가 받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성경은 이런 가치가 있지.
'하느니라 또 모든 성경은' 또 '성경은' 말했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감동으로 됐다 말은 하나님이 당신이 당신 본체는 말고, 당신 본체가 나타나는 역사로 나타났어. 당신 본체 외에 당신의 역사로 모든 지혜와 권능과 모든 속성이 이제 당신 본체 말고, 본체 외의 거는 다 나타날 때에 나타난 게 뭘로 나타났느냐 하면 이제 영감으로 나타났는데, 영감으로 나타났는데 영감으로 나타난 것이 어디 다 쌓여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에 쌓여 가지고 있어. 성경의 권위를 이런 줄을 우리가 알고 믿자 그 말이오.
'감동으로 된 것으로' 그러니까, 성경 안에 들어 있으니 성경이 우리에게 무슨 역사를 하느냐? 교훈하는 역사를 하고 책망하는 역사도 하고 바르게 하는 역사도 있고 의로 교육하는 역사도 있고 우리에게 유익주는 그런 역사를 하고 있어서, 이 역사로 말미암아 이 성경은 우리에게 뭐 하고 있느냐?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무엇이 해? 성경이 해. 이런데. 성경을 하나의 책 쪼가리로 알고 이렇게 종이 쪼가리로 알고 이래 무시해서 성경을 막 주 찢고 이와 같이 욕을 보이고 이래 가지고 뭐 이야기니 뭐니 성경의 권위를 이걸 다 떨어트렸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큰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이래서 원청 이거 묵어 놓으니까 성경과 동행하는 것을 암만 말해도. 성경과 동행해라 해도 '성경 동행이 말씀 동행이지 뭐 자꾸 그래 쌓아?' 지식을 아는 사람들은 '성경이나 성서나, 내나 성경이 안에 말씀 없으면 소용 있는가? 그러니 그만 말씀이면 되지 자꾸 이라는데, 성경을 가지고 말하니 참 무식하고 답답하다' 무식하고 답답한 게 아니라 정말로 유식합니다. 성경관을 바로 가져야 됩니다. 성경을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성경이요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서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고 계시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한 사람을 만들고 있고,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행위를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경 무시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성경에 대해서 너무 아무 관련이 없다 말이오.
이래서 모든 세계의 조직 신학에 계시관이라 하는 것은 성경관이라 그말입니다.
계시관이라 하는 거는 성경관이라 하는데 성경관에 거기 생명되는 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말이오. 성경에 이런 거 저런 거 뭐 성경에, 어째 돼 가지고 있다, 성경에 있는 걸 보고 그만 요래 쪼개고 조래 쪼개고 그 쪼개는 그까짓 거야 쪼개는 뭐 쪼갤 필요가 있는가? 성경이 우리에게 뭐 하고 있는 것이며 또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믿을 것이며 성경을 우리가 어떻게 배울 것이며 이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라니까, 해방 직후에 ○○교회서 노래 부르기를 그랬어. '생명된 신앙은 내 버리고 말라진 교리만 붙들고 있다' 이랬어. 그러니까 신학자 쳐 놓고 신사 참배 이긴 사람이 없어요. 우리 한국에 신학자 쳐 놓고는 신사 참배 이긴 사람 하나도 없고 신사 참배 안 할라고 도피했다 온 사람 있지 망명 갔다 온 사람 있어. 박형룡 박사는 망명해서 갔다 왔기 때문에 신사 참배는 안했지만 여기 있었으면 했지 뭐 별 수 없어.
이러니까. 이 성경이, 성경 안의 권위, 성경이 하나님 아니로되 하나님이 성경에 나타나셨다 말이오. 하나님이 성경에 나타나셨고, 하나님의 역사가 성경에 나타나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서 당신의 모든 역사를 이루시고 우리가 그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우리가 알고, 그래서, 자꾸 '말씀이면 성경 아니가' 이래 혼합시키지 말고 좀 구별을 해요. 이제 처음에는 성경만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한 성경이기 때문에 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모든 걸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하나의 생존의 존재같이, 이 성경을 어떤 한 존재, 한 개체를 가진 한 존재같이 그렇게 우리는 여길 만치 여기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당신이 나타났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당신이 말하시고 성경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성경을 통해서 모든 걸 줄 것을 주시고. 이러니까 아까 말한 대로 성경하고 해결지운 것이 나중에 가서 말씀한테 물어봐도, '아, 잘됐다' 하 그러면. '말씀하고 해결지은 거와 다르지 않습니까?' '아 나하고 해결지운 거라' 또 진리한테 가니까, '진리하고 해결 안 짓고 성경하고 해결지웠는데 어찌 됩니까?' '아, 그거 나하고 해결지웠다' 또 영감 한테 말하니까 영감이 있다가 '아, 그거 잘됐다'고. '나하고 해결지운 것이라'고. 또 하나님께, 예를 들면 하나님한테 가 물으니까 '하, 잘됐다 잘됐다' 아, 그라면 한통속이네요? 그라면 서로 합자가 됐습니까? '성경, 할 때 그때 내가 거기 있었어.' 진리도 '내가 거기 있었어.' 영감도 '내가 거기 있었어' 말씀도 '내가 있었어' 신비하게 하나라.
그러므로, 우리는 가르칠 때 어쩌든지 성경을 범하지 마십시오. 자, 따라합시다. 성경을 범하지 말자! 성경과 동행하자! 성경을 저버리지 말자! 성경을 모시고 살자! 성경의 것이 되자! 성경의 보호를 받자! 성경의 인도를 받자! 네, 이렇게 성경 그 개체로서 권위있는 것을 우리가 믿는 우리가 돼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이라는 말을 빼지 맙시다. 무슨 어디 말씀하더라도.
'마태복음 뭐이라' 이래 말하는 이 습성 이거 버려 버리고. '성경 마태복음 어디. 성경 요한복음 어디, 성경 어디' 항상 성경, 하나 더 붙일라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 그리 아니면 '하나님의 성경' 이라든지, '하나님의 성경, 하나님의 성경' 하나님도 자꾸 부를수록 좋고 성경도 자꾸 부를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이 신구약에 기록돼 있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이 성경이 그렇게 이런 능력 가진 거와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도 이렇게 능력을 가졌습니다. 성경 말씀의 능력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장 37절요? 한 번 읽어봅시다. 그라면,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그러면 성경 말씀은 능력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이래 믿어요, 믿어.
그러면 성경 말씀과 동행하는 것은, 이 현실에서 나는 성경 말씀대로 할라 하고 이 세상은 성경 말씀대로 하지 못하구로 했는데 내가 성경 말씀대로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모시고 있는 것이요. 내가 성경 말씀을 그라면 성경 말씀을 내가 지키는 것입니까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 말씀을 내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 말씀을 내가 모시고 있는 것입니까? 성경 말씀이 나를 지킵니까 내가 성경 말씀을 지킵니까? 뭐입니까? 우리가 환난 중에 성경 말씀대로 행하고 성경 말씀을 배척하지 안하는 것은 성경과 그래 둘이 내가 성경 말씀을 어기지 안하고 성경 말씀대로 내가 행하고 이래 있으면 내가 성경 덕봅니까 성경이 나 때문에 이제 보수되도록, 성경이 나 때문에 그만 없어질 터인데 나 때문에 보수되도록 성경이 나에게 보수를 받습니까 내가 성경의 혜택을 받습니까? 성경의 혜택을, 잘 믿습니다. 입으로 아는 대로 요래, 인제 핑계하지 못해. 요대로만 하면 우리가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라 성경 말씀이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내가 뭐 무슨 이래 간수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을 우리가 모시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보다 무한히 큽니다. 성경 말씀은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이 말씀이 지으셨습니다. 제 이 위인 로고쓰가 이제 로고쓰를 말할 때에 그 로고쓰가 지었습니다. 천지 만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었다고 말하지 안했습니까, 히브리 11장에? 지으셨는데 이렇게 말씀이 지었는데 그 말씀을 누가 말했습니까? 말씀이 말했어. 성자라는 말씀이 '만물아 창조돼라' 하니까 만물이 창조 됐거든.
요한복음 1장에 있는 말씀은 이 하나님 말씀. 이 말씀이 아니고 그는 제 이 위 성자의 이름을 가리켜서 말씀이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한 것은 우리말로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말이라 하는 것은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발표하는 것이 말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 무형의 존재, 완전의 존재, 하나님의 존재를 모든 것들에게 알리고 나타내는 직책을 받은 것이 이제 성자 예수님이라 말이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면, 성자가 하나님의 자존하심을 나타냈는데 처음에 뭘로 나타냈습니까? 그래. 목적으로 나타냈어. 또? 예정으로 나타냈어. 또? 창조로 나타냈어. 또? 보존으로 나타냈어. 또? 섭리로 나타냈어. 또? 도성인신 대속으로 나타냈어.
개별 섭리로 나타냈어. 이거 다 누가 합니까? 누구 직책입니까? 하나님의 모든 은밀한 모든 존재를 이제 이렇게 나타내는 직분은 누가 맡았지요? 누가 맡았습니까? 예? 이 직책을 가진 그 하나님의 이름이 뭐이지요? 성자? 예? 이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그 직책을 가지신 하나님을 이름해서 뭐라고 '해요? 말씀. 말씀. 성자가 아니라 말씀. 이러니까,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신 저것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창조로 하나님이 많이 소개 됐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대저' 이 대저라는 말이 있는데 대저라는 말을 먼저 ○목사님이 조직 신학 할 때 대저 하는 소리 들어 봤는데 대저가 뭐이라요? ○ 목사님 어데 있어? 예? 대저가 뭐이라요? 대략인가? 대략? 대략 짐작하는 대략? 뭐입니까? 대저? 여기는 대저라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쉬운데 이는 더 불변성과 아주 견고성을 표시한 내용입니다, 여기 번역은 이래 가지고 있어도. 대저 하는 것은 '절대 불변적으로' '이는 절대적으로 불변적으로' 하는 그것을 강조하는 그 강조를 여기 대저라고 했는데 우리는 여기 '대저' 하니까 그만. 이거는 '무엇보다' 그 말이오. '대저' 하는 것 은 무엇보다. 뭐 세상에 이런 거 저런 거 있지만 어떤 것 보다 하나님 말씀은 능치 못하심 없다, 뭐 능치 못함이 없는데 이거보다 더 확고하고 저거 보다 더 확고하고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이거는 절대 확고하다 하는 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대저라 했는데 우리는 대강 십분지 일이나 혹 맞는다 십분지 오나 맞는다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기 쉽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한 자 잘못하면 절단나요.
대저 하나님 말씀은 능치 못하심 없다, 그러니까, 자 이 말씀은 전능 아니오? 이 말씀은 전지 아니오? 이 말씀이 누구요? 예?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 속에 하나님이 계셔요. 자, 이 말씀과 동행하면 그게 누구하고 동행이라요? 이 말씀과 동행하면 전지자와 동행이요 전능자와 동행입니다. 완전자와 동행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자와 동행입니다. 이 말씀과 동행하면 모든 것을 주권하시는 분과 동행합니다. 공산주의가 요래 요래 그 독침을 가지고 찌를라고 이렇게 해도 그 다음에 이분이 주권 개별 섭리로 활동계를 주권하고 계시기 때문에 할 때에 요라고 난 다음에 '스톱' 이라니까 다시 더 못 냅니다. 요래 가지고 있어. 요래 가지고 있는데 또 팔을 오그리라 하면 하지만 오그리지도 못하구로 '그대로' 하면 요대로 있다가 뒈져 버립니다 알겠소? 이제 이 말씀은 곧,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접촉하기 쉽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이래 접촉하시려 나타나셨기 때문에 겉은 말씀이지만 속은 하나님이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말씀과 동행이 전능과 동행이요 전지와 동행이요, 어떤 강한 세력 원수가 있어도 이 말씀 속에 숨으면 이는 지존자로 거처를 삼은 자. 여호와. 지존자는 여호와인데 거기 여호와로 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말씀을 피난처로 삼으면 아무도 해할 자가 없어. 말씀을 피난처로 삼으면.
이런데 여러분들은 살기 위해서 말씀 저버리는 일 있지 안해요? 손해 안 보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이 말씀이 누군데? 누군데 이분 버리고 뭐 좋은 거 있을까 이분 버리고 성공할라고, 이분 버리고 살라고, 이분 버리고 뭣을 잘될라고? 이거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이거는 믿을 때에 기쁨이 한정 없습니다.
그거 한번 해 봐요.
이제 우리가 자꾸 현실에서 미리 그래. '아, 나도 그런 꼴 한번 닥쳐봤으면 좋겠다 이라다가 그런 기회가 있어 가지고 이래 가지고 나는 이 말씀을 모시고.
말씀과 동행하고 말씀을 모시고 떨어지지 아니하고 말씀 모시고 말씀이 가면 가고 오면 오고 말씀 모시고 함께 할라고 하는데 말씀을 못 모시도록 하는 것들이 강한 게 뭐 있습니다. 있으면 '보자. 정말로 이 말씀이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보자' 모시고 있으니까 막 죽인다 죽인다 합니다. 죽인다 죽인다 했는데 이 말씀을 모시고 있으니까 죽인다 죽인다 했는데 못 죽인다고 못 죽이구로 가로막습니까, 그래 죽인다 하니까. 죽인다 하면 뭐 죽입니다. 죽이니까 저는 그만 죽습니다. 그럴 때에 사람이 그만 낙망을 하고 절단이 나. 죽여도 이 말씀은 능히 나를 보호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이 말씀만 모시면 날 죽일 자 없다 하고 모시고 있는데 이제 죽입니다. 죽음에서도 '이 말씀 내가 모시니까 나는 죽이지 못한다, 나는 안 죽는다, 네까짓 게 날 못 죽인다.' 뭐 죽여 가지고 불에 태워 버렸는데 헛일 아니오? 어째요? 죽였어요? 인제 희망 없지? 죽여서 희망 없어요? 어째 희망 있어? 영원한 세계가 또 있어, 영원한 세계가 있어. 영원한 세계가 있는 그것도, 말씀을 인해서 죽었는데 영원한 세계에 영광으로 삽니다.
또 말씀으로 죽인다 죽인다 해 가지고 영 이거는 꼼짝없이 죽게 됐는데, 꼼짝없이 죽게 됐는데, '이제는 나는 죽는다. 죽어도 나는 말씀을 버리지 않는다' 이랬는데 죽으면 커녕 살아 나와 가지고 원수 다 죽여 버리고 이제 큰 성공을 한 사람 있는데 그게 누구입니까? 다니엘이 그렇게 됐 다 말이오. 자, 다니엘이 사자 구덩이 나온 거 살아 나온 거. 그것이 제일 큰 성공입니까? 다니엘이 그 사자 구덩이서 죽었으면 죽은 것이 큰 성공일까 살아 나온 것이 큰 성공일까? 죽은 것이 큰 성공이라. 살아 나온 거는 다니엘을 위해서 있소 우리들을 위해서 살아 나왔소? 우리들을 위해서 살아 나왔어. 그러면, '그게 뭐 성공이라? 살아 나온 게 큰 성공이지 뭐 죽은 게 큰 성공이라?' 왜 살아 나온 거는 큰 성공이 못됩니까? 미결! 미결! 완전 성공이 아니라. 살아 나온 것이 뒤에 뭐 마귀놀음을 할란지 뭐 할란지 뉘가 압니까? 또 뒤에 승리 생활 할라 하니까 큰 고통이라. 그러나, 이제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을 인해서 완전히 그것으로 완전히 그것이 돼 가지고 끝을 마쳤으면 이제는 할렐루야 다 완전 승리했어.
우리가 이것을 언제든지 익혀야 됩니다. 서슴지 안해. 서슴지 안하고 자꾸 익히고 익혀서 꿈에도 말하면 퍼뜻하고, 밤에도 말하면 퍼뜻하고, 환하게 이게 능숙하게 알고 있어야 되지 이것이 떠듬 떠듬거리다 보면 마귀란 놈은 자꾸 그걸 모르구로 그만 이리 저리 덖어 대 가지고 뭐 언제 생각할 여가도 없이 막 때리고 쥐 박고 이렇게 하면 그만, 그만 그거 생각지 못하고 이라다가 그만 나중에 가 잘못하면 의심이 와 가지고 '아이구, 내가 이거 참 이거 기가 찬다' 이라니까, 죽어도 배반하고 죽고 살아도 배반하고 살고, 멋진 승리로 완성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말이오.
이러니까 평소에 자기가 자꾸 이걸 익숙하게 자꾸 익혀요. 자꾸 익혀. 몇 천 번 몇 백 번이라도 자꾸 익혀야 됩니다. 자꾸 익혀요. 저도 이런 거 원고 하나도 없어요. 없는데 내가 자꾸 하는 건 내가 자꾸 평소에 말하는 건 자꾸 그거 하고 있어요. 내가 준비해 가지고 뭐 말하고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자꾸 기도하고 있는 거 그런 거 내가 지금 내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자꾸 평소에 그래도 보고 저래도 보고 자꾸 여러 번 연습을 해 쌓아니까 그래 지금 그거 연습한 그대로 내가 말하는 것이지요.
이런데, 이제 연습을 톡톡히 해야 되는 것은 만일 그런 지경 됐을 때 더듬으면 헛일이라. 언제 그럴 때 계산 댈 여가가 있어? 계산 댈 여가가 없어. 연구하고 이렇겠나 저렇겠나 연구해 가지고. 연구하나 안 하나 퍼뜩 그만 전체가 다 떠오르는 거라. 퍼뜩 전체가 쏵 다 떠올라 버려야 그때 서슴지 않고 이렇다 이래 버리지 그때 뭐 이거 이렇고 저렇고 어찌 되겠나, 이거 요번에 이래 맞춰 보면 수지가 어찌 되느냐 이 진리가 어찌 되느냐 이라다가 보면 다 헛일해 버리고 만다 그거요.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또, 사도행전 20장에 32절 '지금 내가' 이거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거는 성령이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주는 주님.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영, 성령. 말은 이래도 저래도 본체는 하나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이름이 은혜의 말씀이라. 왜 말씀의 이름을 은혜의 말씀이라 지어 놨지? 예? 예? ○○○ 목사님, 은혜 말씀이라고 이 말씀 이름을 은혜라고 이름을 지어 놓은 것은 이 말씀이 주는 것은 전부 그저 줘. 공짜배기로 줘.
공짜배기로 주는 것은 왜 공짜배기로 줍니까? 헐하고 가치가 없어서 공짜배기로 줍니까? 우리에게는 가치를 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공짜배기로나 주지 뭐 값을 쳐 가지고는 줄 수가 없어. 너무 좋아서 값이 없이 주는 것이지 가치가 없어서 공짜배기로 주는 것 아니라.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이오? 은혜의 말씀인데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데? 성경에 기록된 성경 말씀이라. 우리에게 기록된 성경 말씀.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우리를 누가 세워요? 이 말씀이 우리를 세워요.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우리를 든든히 세워 가지고 하늘나라의 영광의 구원을 다 이루기까지 한다고 이렇게, 이 말씀이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 그러면. 성경이 하는 일과 말씀이 하는 일과 비슷합니까 같습니까? 그러면, 성경한테 공들이나 말씀한테 공들이나 꼭 결과는 같네요? 성경하고 일하나 말씀하고 일하나 같으네요? 같아요. 이렇게 성경의 권위를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러니까, 말씀의 권위를, 이렇게 이 권위를 알고, '말씀 버려라 말씀 버려라' 이래도 말씀의 권위를 우리가 평소에 알아 놔야, 이 말씀은 전능의 권위를 가졌다, 주권의 권위를 가졌다, 창조의 권위를 가졌다, 주권의 개별 섭리의 권위를 가졌다, 개별 섭리를 누가 하는데? 이 말씀이 해. 누가 하는데? 성경이 해요. 성경대로 돼. 이 우주 영계는 성경대로 돼. 전부 성경대로. 성경이 다 이루고 있어. 성경대로 돼요.
이러니까. 성경에 대한 권위성을 알아야 성경을 믿을 만하고 의지할 만하지.
바라볼 만 하지, 그러기에 성경의 권위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지 안해. 또 말씀의 권위성을 모르는 사람은 말씀을 의지하고 바라보지를 안한다 그거요. 이러니까, 말씀의 권위성을 우리가 자꾸 알아서 확실히 알고 있어야 되고 성경의 권위성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이제 그 다음에, 그 다음에 뭐입니까? 그 다음에 진리, 진리가 뭐입니까? 진리가 뭐이지요?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너희는' 하는 것은 우리 기독자들은 다 총칭해서 하는 말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대를 따라가지 말고, 이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하는 말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면 이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는 말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는 말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요. 세상은 통틀어 하나를 말하는 것이고 세대는 동가리 동가리 토막 토막 동가리가 있어. 동가리. 지금 동가리 말이오, 지금 동가리. 이 세대라 말은 세상은 전체를 말한 것인데 그게 지금 해당된 동가리를 말하는 거라. 지금 해당된 동가리가 뭐이지요? 예?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네 현실에 따라가지 말고 그 말입니다. 맞습니까? 해석이 맞아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네 현실에 피동되지 말고 그 말이오. 본 받지 말고 피동되지 말고, 네 현실에 피동되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새롭게 한다 말은 그 마음을 새롭게 한다 말은 더 깨운다 말이요 더 깨끗하게 한다 말이요 더 온전케 한다는 말입니다. '새롭게 하여' 그러면, 새롭게 하는 그 마음은 무슨 마음인가? 새롭게 한다는 말은 그 마음을 가졌는데 그 마음을 더 깨끗하게 이제 더 깨끗하게 해서 새것을 만들어라, 때가 묻었으니까 때묻은 것을 다 제하고 이제 깨끗하게 하라, '네 마음을 새롭게 하여'
그러면 우리 마음은 무슨 마음입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본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 됐어. 왜? 우리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났거든.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라. 예수님의 성품이 우리 성품이라 이것이 이런데 엉뚱스럽게 되어. 이 마음으로 살면 될 건데 이 마음이 현실에 변화된다 그말이오. 변해진다 말이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네 현실에 피동되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네 마음인데 네 마음에 구름이 끼었고 네 마음에 때가 끼었고, 네 마음이 우중충하게 됐었기 때문에 똑똑히 예수의 마음으로 똑똑히 소생을 시켜라 말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 변화 받는 것은 이거 성화 받는 것을 가리켜서 말하는데, 우리가 예수의 마음이지만, 때가 묻고 어두워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을 자꾸 닦아서 이래 가지고 너희 마음이 이제 변화를 받아라 그 말은 이제 현재에 네 마음은 딴 물이 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쁜 물을 탈색을 하고 새 물로 가져라 네 마음에는 먼지가 가득 앉았다. 때가 많이 묻었다 이거를 새롭게 해라 이것을 씻어서 변화를 받아라, 완전히 네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완전히 이제 정상화되어져라.
이것을 비유해서 드라크마로 비유해 가지고 잃은 드라크마를 찾을라고 부지런히 등불 들고 땅을 쓸고 이라다가 발견했는데, 그 성구가 어디에 있어요? 누가 15절 몇 절?
누가복음 15장 8절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모우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이 드라크마 찾는데 드라크마가 은전이오. 하얀 돈 은전인데, 이 드라크마를 잃어 버렸는데 이걸 자꾸, 비로 자꾸 이래 쓰니까 나중에 먼지가 다 쓸려 나오니까 드라크마가 나왔습니다. 드라크마가 있었습니다. 그거 뭘 가리키느냐 하면, 이제 예수의 마음이 때가 묻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새롭게 하라 말은 이제 좀 깨끗이 하라 말입니다.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변화를 받으니까 먼지가 변해서 드라크마가 됐습니다. 마당에 먼지뿐인데 자꾸 쓰니까. 먼지뿐인데 자꾸 쓰니까 나중에 먼지는 없어지고 뭐이 나와? 드라크마가 나왔어. 드라크마가 나와. 그게 뭐이냐 하면 '변화함을 받아' 이렇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그라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도록 하라' 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 하니까 이거는 뭐일까요? 하나님의 뜻 이거는 뭐일까요? 진리. 그러면, 그 사람이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하는데 성경은 진리 아니오? 여기서 이래 가지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함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네가 바로 찾도록 하라' 했으니까 그 뜻은 진리지요. 모든 성경 말씀은 진리 아닙니까? 성경 말씀 진리와 이 진리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 이게 진리라. 이 진리는 이것은 자기 진리라. 성경과 말씀과 진리를 말하는데 그게 그거지 내나 다를 게 뭐 있느냐 했는데, 이제 여기 진리를 말하는 것은 이걸 진리라 말하는 것이라.
진리는 자기 개인 진리입니다. 현실에 자기에게 해당된 진리.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 자, 이 뜻을 찾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행한 것이 믿음이 됩니까 안 됩니까? 믿음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데 믿음이 안 됩니다. 그러면 뭣이 믿음 됩니까? 자기에게 해당된 찾기 어려운 이 뜻을 찾아 가지고 자기에게 대한 뜻을 찾아 가지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인데 그 믿음은 전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믿음은 능치 못함이 없다 했는데 그 믿음은 전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 믿음은 전능을 가지고 있어요 없어요? 예? 가지고 있어요? 이거 참 그렇게 찾기 힘들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딱 찾아 가지고 그 시간에 행해야 될 하나님의 뜻을 딱 찾았는데 그만 하면 이제 그대로 행했으면 뭐 순종 믿음이 되겠지. 믿음이 됐으면 전능의 믿음이 되겠지 믿음은 믿음인데 전능한 능력은 없다? 그러면, 전능의 능력은 어째야 능력이 있는고? 네, 영감이 같이 해야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일은 구별됩니다. 영감이 같이 해야 돼. 영감이 같이 해야 된다 말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도 동기도 별별 동기 가지고 할 수 있고 목적도 별별 목적 가지고 할 수 있다 말이오. 동기와 목적은 얼마든지 딴걸 가지고도 할 수가 있다 말이오. 그 시간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행하는데도 그 행하는 데에 잡탱이가 들어 가지고 거기서 어만 생각 가지고 할 수도 있고. 어만 목적 가지고 할 수도 있고, 명예적으로 할 수도 있고, 남한테 봐라 해 가지고도 할 수도 있고. 딴걸 소망하고도 할 수도 있고 이라니까 잡탱이니까 성령이 와서 떡 보고는 도장을 안 찍어 준다 말이오. '안 됐는데 자꾸 고치라고 이래도 그거 그대로 가지고 지금 마귀란 놈은 자꾸 들이모니까 그때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그대로 행하는데 성신이 인쳐주지 않는다 그말이오.
그러면 믿음이 안 돼요. 그런데 그 때에 이제 성령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 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이제 다 해 가지고 성령이 볼 때 '합격' 할 수 있도록 그 자기 현실에 해당된 하나님의 뜻을 이행했을 때에 그것은 믿음이니까 그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그 믿음은 전능이다 그 믿음은 전능이다. 이렇게 예수 믿는 것은 세밀하게 성경 말씀에 해 놨는데 범벅 타령으로 덮어 씌우기식으로 그만 아무나따나 이래 가지고 예수를 믿고, 우리가 범벅 타령을 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사데 교회에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었도다" 그라고 난 다음에 뭐, 왜 죽었소?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는데 실상은 죽었도다' 왜 죽었습니까? 죽은 것을 그 다음에 뭐라고 발표해 놨습니까?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내가 찾지 못했다' 온전한 행위라야 구원이 이루어지는 거고 성화가 되는 것이고, 온전한 행위라야 무엇이 살아납니까? 온전한 행위라야 무엇이 살아납니까? 기능이 살아나지. 기능이 살아나. 온전한 행위라야 기능이 살아난다 말이오. '네게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기능이 다 죽어 버렸다' 이렇기 때문에 '이미 죽고 가고 있는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내가 죽지 않도록 해라' 어떻게 하는데? 온전한 행위 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능 부활이 되는 우리 구원이 되는 것은 온전한 행위라야 구원이 되는 것이지 아무나 따나 비슷한 거 가지고 되면 안되기 때문에 이제 학개서에 말하기를 '내 백성이 이러하고 제사장도 이러하고 모든 일들이 다 이러하다' 어때? 옷자락에 거룩한 것을 쌌으니까 거룩한 것을 쌌으니까, 거룩한 제물을 쌌으니까 제물은 거룩한데 거룩한 거 쌌다고 이 옷자락 닿는 데마다 전부 다 거룩해지겠느냐? 제물 거룩한 제물 자기 옷에 쌌다고 전체가 다 거룩하겠느냐? 거룩합니까? 거룩하지 안해.
그러기 때문에, 거기서 뜻은 바로 찾았지만 갖출 것을 다 갖추지 못하니까 온전한 행위가 되지 안했기 때문에 살아나지 못했다 그거요. 기능이 살아나지 못했다, 시체를 만졌든지 해서 더러워진 시체를 만져서 더러워진 그 손을 가지고 만지면, 시체 하나 만졌는데 만졌다고 해 가지고 그 손 가지고 모든 걸 만지면 다 더러워집니까. 안 더러워집니까? 더러워져. 이게 달라. 깨끗한 거는 고거 하나만 깨끗하지만 더러운 것은 하나 더러운 거 가지고 전체가 다 더러워집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따라합시다. 깨끗한 것은? 그거 하나만 깨끗하고! 더러운 것은! 하나 더러움으로! 전부가 더러워진다! 이 비밀을 몰랐기 때문에, 제사장도 이 방식 취했고 서기관도 이 방식 취했고 모든 이스라엘들이 다 이 방식 취했기 때문에 성전을 짓는다 하지만 축복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진리를 찾는 데는 그게 힘듭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부터 이렇게 말하는 거 보면 진리 찾을라면 먼저 뭘 해야 된다고 했어요?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아예 자기를 하나님 앞에 죽여 바쳐 놔야 된다 말이오. 다시 말하면 자기 욕심이나 뜻이나 자기 주장이나 자기 취미나 자기라는 것은 완전히 죽은 것같이, 죽은 제물같이, 죽은, 잡아놓은 짐승같이 자기라는 그 자기의, 자기 주장은 자기 요소 자기 취미 자기 권리 자기 사상 자기 오기 자기 감정 그런 것은 완전히 그것을 없애야 하나님의 그 뜻 자기에게 해당된 자기 진리를 찾을 수가 있지 그래 안 하면 찾지 못한다 이랬어. 하나님의 뜻 찾기가 쉬워요 어려워요? 어려워. ○ 장로님 첫째 뭐 해야 뜻을 찾을 수 있어요?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야 돼요. 몸으로 산 제사 드리면 자기는 살아 있으나 자기 주관이라 하는 거는 완전히 부인돼야 찾을 수 있다 그 말이오. 자기 주관을 완전히 부인돼야 찾을 수 있다.
그라고 난 다음에 또 말했어? '너희들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시대보다 더 자꾸,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이 시대라고 동가리를 말하니까 동가리 중에 동가리로 동가리로 이제 더 낼 수 없는 마지막 동가리가 뭐입니까? 마지막 동가리가 현실이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그거 따라가지 말고. 본받지 말라 말은 그거 따라가지 말고, 그 말은 네 주위 환경에 피동되지 말고. 이렇게 영생을 이루는 것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려워. 아무나 따나 쉬운 줄 알아? 그러니까, 참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기본구원이나 있지 건설구원은 하나도 없다'고. 건설구원이 없다는 그 사람은 건설구원을 다소 이룬 사람이라.
건설구원이 어떻게 해야 건설구원인지 그것도 모르고, 기본구원 그거야 뭐 암만 예수 믿는 사람이 기본 구원은, 택한 사람이 하나님을 욕을 하고 반대해도 기본 구원은 벗지 못합니다. 그거 같으면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고 참 소용도 없고 상관도 없는 거라. 믿어야 아무 소용은 없어. 이렇게 우리 기능이 영생으로 살아난다는 것이 그렇게 쉽습니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란 말은 씻으라 말이오. '새롭게 함으로 변화함을 받아' 완전히 이제 변색이 되어져야 된다 말이오. 변색은 뭐? 예수님의 것으로써 완전히 청색을 들여놨는데 이거 엉뚱이같이 해 가지고 이 세상 색깔을 또 입었다 말이오 또. 옛사람 색깔을 입었어.
그러니까, 완전히, 세상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옛사람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이 옛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변화함을 받아' 네 본색을 도로 찾아, 본색은 푸른 것이 마구 먼지가 어떻게 앉아 놨던지 나중에 먼지가 뽀야이 먼지밖에 없어. 아무것도 안 보여. 빗자루로 자꾸 쓸었어.
드라크마를 잃었는데 자꾸 이래 쓰니까, 차차차 쓰니까 쪼끔씩 쪼끔씩 나오는데 나중에 다 쓸고 나니까, 쓰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쓸라 말이오, 자꾸 이래 쓸라. 쓸어 가지고 나중에 '변화를 받아' 나중에 보니까 먼지를 쓰는데 드라크마 은전이 나옵니다. 성결이 나옵니다. 예수의 마음이 나와. 그라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구별해라. 그래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제 찾게 된다,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 찾기가 이떻게 어렵습니다. 뜻을 찾았으면 그 뜻은 전능자라, 전지자라. 그 뜻과 나와 동행하면 전능자와 동행이라. 그 뜻을 모셨으면 전능자를 모셨고 하나님을 모셨어. 아무도 해하지 못해. 그래 가지고야 이제 구별하게 된다 그렇게 말씀했어. 그러면, 하나님의 뜻 자기 진리를 찾기가 이렇게 힘든다 그말이오.
그러면, 이제는 뜻을 찾았으니까 뭐 찾아야 돼요? 인제 찾을 거 다 찾았소? 영감 찾아야 돼요? 그라면 영감 찾는 거 한번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5장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 본다 했는데 또. 하나님 못 본다 하더만 또 여기는 하나님 본다 했으니까 여기 보는 하나님은 누구요? 영감! 아멘 여기 보는 하나님은 영감입니다.
그러면 영감을 만날라고 하면 무얼로 가지고 만나야 돼요? 마음이 정결해야 돼 마음이 정결치 않으면 영감 못 만나요.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마음이 정결치 안한 사람은 그 사람은 예수 믿어야 항상 껍데기 예수 믿습니다.
내가 언제 저 아래 말들으니까 여기 이 밑에서 어떤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자꾸 뚜드리고 이러기 때문에 '아, 아이를 그래 뚜드리면 됩니까? 버르장이 없다 말이오. 대중 앞에 때리는 것은 그것은 대중을 무시하는 거라 말이오.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를 때리는 거와 한가지라 그말이오.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저거 아이라고 톡 톡톡 그만 때려 대고 뺨을 때리고 그러면 아버지 뺨 때리는 거와 같소 다르요? 말이, 생전 몰라 놓으니까, 자,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하도 도덕이 썩었기 때문에 그래 맞았어. 같아.
이런데 대중 앞에 그라면 대중을 무시하는 거라. 그러면 그것은 대중들이 마음이 상하지 안하도록 살살 데리고 나가서 저 한쪽 구석에 가 가지고 뭐 때리든지 죽이든지 마음대로 하지만 여럿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그거요. 그걸 이제 어떤 사람이 그걸 틀렸다고 이렇게 말하니까 마구 내둘러 버려. 네가 무슨 관계가 있어 가지고 그러냐고 마구 해 대고 이랬다 하는데, 그거 마음이 어두워 그래. 이거 내가 잘못 가르쳐 서부 교회 교인들 아주 버르장이가 참 없어. 서부 교회 교인들 아래 위를 몰라요 서부 교회 교인들은 아래 위를 몰라. 자꾸 우사를 시켜야 되는데. 아래 위를 몰라. 서부 교회 장로님들은 뭐 삐꿔서 야단이라. 왜? 삐꾼 표는 안 내도 생전 장로로 알아 줘야지? 또 목사도 그래요. 고관 대작이 와도 서부 교회는 '제 뭐 장관이면 장관이지 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가치만치 정당한 가치를 알아주는 것이 그게 기독교입니다. 가치 이상 알아주는 것이 그것이 간교라.
그러면, 영감을 찾아 만날라고 하면 이렇게 힘이 듭니다. 마음을 깨끗히 해야 되지 마음이 깨끗지 안하면 영감을 만나지 못합니다. 마음이 깨끗지 못하면.
또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라" 양심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찾아가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데 양심 없는 사람이 무슨 영감을 만날 것이며 영감 못 만난 사람이 무슨 건설구원을 이루겠습니까? 이러니까. 마음이 정결해야 되는데 정결한 마음은 어떤 게 정결한 마음인가? 정결한 마음은 그것은 피와 성령과 진리가 속에서 주장하고 있으면 정결한 마음이 되는데 여기 양심이라 그 말하는 것은 정결한 마음과 달라 마음이 정결한 마음은 벌써 그 속에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가 속에 주장하고 있어야 그게 정결한 마음인데 선한 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 달라. 선한 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말씀을 준해 가지고 성경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성경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참되게 어쩌든지 성경 말씀대로 바르게 할라고, 불경대로 바로 하는 게 아니고, 유교대로 바로 하는 게 아니고, 세상 국법대로 바로 하는 게 아니고 성경 말씀대로 바로 할라고 하는 그것이 신앙 양심입니다. 이것이 생겨져야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갈 수가 있습니다.
양심에 대해서는 몇 가지 배웠어요? 여섯 가지? 첫째 양심을 화인 맞지 말아야 돼요 화인이라 말은 화인 찍으면, 여기다가 도장을 꾹 찍으면 이 양심 이거는 도장 임자 것이라 그말이오. 소 뿔에다가 화인을 꾹 찍으면 그 소는 화인 맞은 그의 소라 그말이오.
이제 양심이 화인 맞지 말라 말은 양심의 주인을 정하지 말아라 그말이오.
양심은 주인이 없어야 돼. 양심은 소속이 없어야 돼. 소속이 없고 저 혼자만 돌아다녀야 돼. 양심은 아무데도 거리낌이 없어야 돼. 자기에게 대해서도 하나도 매이지 안했고 아무데도, 자기에게 대해서도 바로. 남에게 대해서도 원수에게 대해서도 사정없이 바로 말하는 그게 양심이라. 화인 안 맞아야 돼요.
양심은 돈의 양심이 되면 그 사람은 그 양심은 항상 돈 위주로써 판단해. 양심이 혈육의 양심이 됐으면 그 양심은 혈육 중심으로 다 해요. 양심은 화인 맞으면 안 돼요. 우리 마음이 뭣이든지 성경 말씀대로 할란다 하면 그게 양심이 되는데 그 양심에 주의할 것은 그 양심이 내 편이 되도 안 돼요. 그 양심이 내 편 되도 안 되고 네 편 되도 안 되고 양심이 돈 편 되도 안 되고 권세 편 되도 안 되고 양심이 아무 편도 되면 안 돼요. 양심이 아무 편도 안 돼야 되지 양심이 무슨 편을 들면 그만 그리 치우쳐 가지고 양심이 옳은 것을 바로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에 양심이 화인 맞지 않도록 그것을 제일 주의해야 됩니다. 뭐 양심 양심 하지만 전부 자기에게 화인을 맞아 가지고 전부 자기 위주로 판단하는 그 썩은 양심, 화인 맞은 양심. 양심은 매인 데가 없어야 됩니다.
또 둘째로는? 양심을? 매장하지 말아야 돼 양심 매장하는 게 뭐인데? 양심 매장하는 것은 양심이 이렇다 가르쳐 주면, 이거는 이게 옳다 저기 옳다 말하는데 그걸 그만 슬그머니 묻어 둬 양심은 이게 옳다 저기 옳다 말하는데 그 소리를, 그게 옳다 바르다 해도 그만 모르는 척 하고 슬쩍 쳐 덮어두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양심을 매장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 양심을 매장하는 거.
알겠습니까? 자기 양심이 이게 옳다 저기 옳다 말하는데 옳다고 말하는 걸 그걸 옳으냐 그르냐 따져 가지고 하지 안 하고 옳다고 말하는데 그만 옳다고 하거나 말거나 모르는 척 하고. 자꾸 따져 나가면 그래 해야 될 터이니까 그만 그걸 따져 나가지도 안하고 그 만 그만 이리 저리 뒤섞어려 가지고 그만 슬 덮어두는 그것이 양심을 매장 시키기 때문에 양심이 매장되면 양심이 죽지 않습니까? 양심을 매장 하는 거, 다음에는? 양심을 죽이지 말아요. 양심 죽이는 거는 뭐이냐? 양심이 이렇다고 판정지우는 것을 딱 거절해 버리는 것이 양심을 죽인 거라. 옳다고 자기에게 판정되는 것을 딱 거절해 버리고. 반대하고 거절해 버리는 것이 양심을 죽이는 것이라.
또 그 다음에는? 양심을 북 돋우어야 돼. 이제 가꾸어야 돼. 양심을 북돋우는 거는 뭐이냐 하면 그저 '보자, 양심으로 한번 생각해 보자. 야, 양심이 뭐라고 하노?' 자꾸 양심을 등용해 가지고 양심이 뭐라고 하는고 보자' 이제 양심을 찾아 가지고 양심의 지도를 받을라고 양심을 자꾸 둥용을 한다 말이오. 양심을 등용해 가지고 양심으로 한번 생각해 보고 자꾸 양심으로 자꾸 생각해서 양심을 자꾸 쓰는 것이 뭐이냐 하면 양심을 북돋우는 것이라 그거요.
또 그 다음에는? 양심을 기루는 것, 양심을 기루는 거는 뭐이냐 하면 양심이 옳다 하면 그것을 목이 달아나도 하는 거라 말이오. 양심이 지정하면 양심이 지정하는 그대로 단행 해 버리는 것이, 뭐 사람이야 뭐라 하든지 가족이야 뭐라 하든지 아브라함처럼 딱 단행해 버리니까 양심을 이제 길렀다 그말이오. 롯은 이게 옳다 싶지만 가족들이 자꾸 그래 쌓아니까. '옳기는 옳은데 하도 가족들이 저래 쌓아니 모르겠다 안 되겠다 할 수 없다' 슬그머니,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슬그머니 버린 그것이 뭐냐 하면 양심 매장하는 것. 그라고 난 다음에 이제 양심에 거리끼는 그대로 딱 단행해 버려서 소돔들을 취하는 것이 양심 죽인 거.
양심 죽이고 나니까 저는 망하고 말았지.
그 다음에는 뭐이라요? 성장한 양심. 장성한 양심은 뭐이냐? 장성한 양심은 어떤 것이 장성한 양심인고 하니 그 양심이 내 생명에 대해서도 주권을 가지고, 내 몸에 대해서도 주권을 가지고. 재물에 대해서도 주권을 가지고 모두에 주권을 가지고 있어. 그 양심이 죽으라 하면 아주 뭐 죽어야 되지 안 죽을 수 없다 말이오. 그러면 내 전신 전체의 몸과 마음과 생명을 양심이 총 권리를 가지고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그 권리를 가지고 있는 그것이 이제 장성한 양심이라.
장성하면 내게 대해서 주권을 가지는 거라. 그 양심은 하나님하고 서로 교제합니다. 이 양심 가지고 하나님 교제하기 때문에 이 양심을 길러 놓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요소가 우리에게는 없어요. 이러니까, 양심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양심을 가꾸어서 길러야 합니다.
오늘 오후에 연보할라고 했지? 연보할라고 했는데, 연보 말이요. 요번에는 얼마를 해야 되느냐 하면 일억 이천 사백만 원을 해야 돼. 그래 안 하면 우리가 빚을 다 벗지를 못해요. 이런데, 여러분들이 가치를 알아서 이 기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 교회 가 가지고 얼칠얼칠 일 년 배운 거보다도 이 잠깐의 시간에 배운 것이 더 많이 배웠어 또 우리가 그대로 꼭 계속해서 배우기 때문에 우리가 변화된 것이 많아. 영이 장성해진 것이 많고 마음, 치료된 것이 많고 몸 치료된 것이 많고 이래 치료된 것이 많으니까 여기 치료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니까 아예 이 연보는 천만원 내는 사람도 있어야 돼. 자기 예배당 짓는 거보다도 더 큰 마음을 먹고 힘컷 내야 돼. 아예 과거 모양으로 쪼그매 몇천 원 몇만 원 그래 하지 말고. 아무리 적게 해도 만원은 해야 돼. 그래야 일억 이천만 원을 하지. 어때요? 연보 하라 하니까 모두 가슴이 도곤도곤해요? 옹달샘에 있는 물이기 때문에 자꾸 심으면 씨 주시고 양식 주시고 또 심으니까 씨 주시고 양식 주시고, 처음에는 하나 심으니까 씨 주고 양식 주고 나중에 그 다음에 또 둘 주고 셋 주고 자꾸 자꾸 많이 줘. 그러니까 의의 열매가 가득해지지. 그라고, 거의 다 백만 원씩은 다 하는 그런 사람들 많이 나와야 될 거라.
나는 돈 없어요. 월급 받아도 남는 거 없어요. 그거 딱 거석으로 하다가 그 다음 월급날 되면 모자라서 자꾸 미리 좀 채어 써요. 이런데, 나도 요번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백만 원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여기 나보다 부자 여기 많아. 그런 사람들 몇백만 원씩 해야지. 왜 내가 이 말 하느냐 하면 연보를 어느 표준으로 해야 되느냐 하는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내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라. 우리 교회 분교 연보할 때, 그때 나는 뭐 얼마 했던가? 분교 연보 할 때 내가 얼마 했지요? 이십만 원인가 오십만 원인가 그래 했어요. 그런데 내가 이번에는 '이제는 백만 원 해야지 백만 원 할 가치가 있다. 백만 원 여기 투자하자.' 이제 여기 이런 데 좋은 데 투자하면 뒤에 이자가 많이 끼여 나와요.
부가가 많이 끼여 나와요.
아, 경기하는 사람들 하지 안해요? 이 사람에게 떡, 그거 뭐라 하더라? 남하는 데 끼우는 거. '부'라 하요? 붙이기인가? 서로 노름 할 때도 그 붙이기 있어요, 이 사람이 하는데 이 사람에게 떡 붙이기 해 놓으면 이 사람 이기면 나도 이겨 가지고 따먹는 거라. 이러기 때문에 이제. 모두 투자할 데가 많이 있는데 이 투자를 어떻게 하나?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어떤 사람이 이거 투자를 어디다가 좀 할꼬 이래 가지고, 투자할 데가 장 있어야지요? 저 그때 언제 ○○○라 하는 장로가 왔어. 하도 그립다고 오래 동안만에 왔어.
○○○장로를 만나 가지고 '○장로' '네' '○장로 일생 동안 저축하고 연보 짜다라 해 쌓아도 내가 ○장로 돈 육만 원 저축한 그만치 뒤에 가서 보면 이율이 높으질 안할 것이다.' 육천원인가 육만원인가 모르겠어. ○○교회 세울 때에 그 돈 가지고 ○○교회를 세웠어. ○○○씨 돈 가지고. 이랬는데, 어떻게 불어 나왔는지. ○○교회 심어 놨는데 그 돈이 어떻게 불어 놨는지 ○○교회가 얼마나 큽니까? ○○교회가 지금 셋째로 크지 안해요? 이랬는데, 그러면서 '지금 교회가 이렇고 이렇습니다' 이라니까 지금이라도 돈을 주며 그리 좀 잘 좀 심어 달라고 하지만 내가 그 돈 심을 거 없이 그거는 또 거기가 심고, 또 여기 심을 돈 많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또 천만 원을 '이거 어디 잘 심어 주십시오' 이래서 이래 심을라고 자꾸만 돌아다녀 봐도 아무리 봐도 이거 돌아다녀봐도 심을라 해도 심을 데가 없어. 그래 가지고 ○○○목사님에게 자기는 모르지만 내가 심었다 말이오.
이랬는데, 시작한 지 얼마 됐지? 넉 달인데 주일학교 학생이 얼마? 이제 지난 주일에는 제일 많이 내려오는 거라. 주일학교 학생 얼마? 230명? 그런데 하기 아동 성경 학교 할 때는 420명까지 나왔어. 지난 주일은 우리 교회도 삼천 명이 줄었어 주일 학교가. 그런데 아마, 평균은 보니까 300명 주일 학생 나와요. 또 장년반은 육십 몇 명 나와요. 이러니까, 이게 잘 되면 그거 떡 심어 놓은 데 부가 많이 나온다 그거요.
또 어떤 사람은 나한테 와 가지고 '이거, 이거 심을 데가 없는데 이거 좀 어디 잘 좋은 데 한번 심어 주십시오' 하면서 어떤 사람이 한 오백만 원 말하는데 아무리 심을 데가 없어. 그래서 여기다가 심어 볼까 그렇게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어, 이 기도원에 심어 줄까. 그거 내가 심었다가 뒤에 이자가 잘 나가고 많이 불어서 심어 준 게 이렇게 많이 수입이 많았어야 뒤에 내가 안면이 있지 수입이 없으면 부끄러울 일 아니오? 이러니까 그거 벌로 하는 게 아니라고. 또 누가 오백만 원을 심어 달라 하는데 심을 데가 없어 가지고 넉 달인가 지나가고 나니까 이자까지 뭐 오백 뭐 이십 몇만원인가 삼십 몇만원인가 됐어. 이걸 심을라 그 가만히 생각하니 어디 뭐 개척 교회 하는 사람 많이 있지만 뭐 심을 데가 없어. 잘못 심아 놓으면 내가 책임이 있거든. 그래서, 이거 잘 될란가 못 될란가 뛰금 뛰기로 ○○○조사님에게 심어 줘 놨어. 이거 어짜면 그만 잘 될 것 같아. 좀 아마 이익이 많을 거 같아. 이래서. 여기 저기 어디든지 심어 가지고 어디면 유익이 될까 이걸 우리가 또 노리고 있다 말이오. 다 우리는 계산 대고 살아야 돼요.
이러니까, 여기 한번 며칠 동안에 이 사람들이 수만 명이 모여 가지고 이래 가지고 막 변화를 받고 있는데. 자, 여기다가 심어 가지고 하면 아마 뒤에 가서 추수가 상당히 많을 거라. 그러니까 아낌없이 자꾸 심어요, 좀. 모두 좀 심어 가지고 넉넉하고 남음이 있으면, 저 이상하게도 저 뒤에 150평 저거는 짓지도 안했는데 허가가 다 나와 가지고 있어. 허가까지 다 나와 있어요. 하나님이 또 그거 지어라 하는 거라. 우리는 그런 줄 몰랐는데 이 사람들이 계산에 연필이 틀렸는지 어째 어째 했는지 150평이 더 불어 가지고 떡 허가가 나와 있다 말이오. 저거는 지으라는 거라.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는 묘해. 이러니까. 요번에 150평 지을 돈까지 나올란지도 모르겠다, 그거요.
자, 이제 그만하면 여러분들 아니까 좀 거석한 사람들은 아마 돈 천 만원 씩 내야 돼요. 적어도 뭣 한 사람들은, 자기 교회 지을 때 백 만원 낸 사람은 백만 원 내야 돼. 그렇게 해 가지고. 내가 말한 것은 연보 할, 어느 정도로 해야 되느냐 하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제게 대한 것을 소개를 한 것입니다. 나는 돈 없는 사람이라. 그달 살고 나면 아무것도 없어요,
자 그러면, 우리 기도하고, 주님 선한 사업에 부요하고 가장 주님이 기뻐하시고 인간들 구원에 효력있는 요긴한 자리에 우리의 심신과 소유를 투자할 수 있는 저희들 되도록 축복하시옵소서. 메마른 땅에 투자하여서 아무 추수 없는 일을 하지 않도록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금번에 저희들이 연보할려는 여기에 저희들이 깨닫고 아낌없이 주의 뜻을 바로 찾아 가지고 투자하여서 인간 구원하는 이 일에 모든 것이 넉넉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사 우리가 이로 인해서 많은 축복을 받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