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4 12:43
성경-기도-실행
본문 : 사도행전 17장 10절∼15절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이 사도 행전은 일반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성령의 행전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성령님께서 행한 것을 기록한 전기라, 이 사도 행전을 연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떻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잘 깨달을 수가 있도록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뭐 때문에 밤에 형제들이 바울을 데리고 바다까지, 그렇게 인도를 해서 갔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도를 바로 전하니까 유태인들이 싫어서 핍박하기 때문에, 죽일려고 하니까 모든 제자들이 밤에 인도해 가지고 바다까지 가서 배를 태워 가지고 보냈습니다. 그때에 다 한목 가지 안하고 실라와 디모데는 거기 머물러 있게 하고 사도 바울 한 분만 그렇게 인도해서 피신을 시켰습니다. 만일 한목 가면 거석할 테니까 두 사람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 아직 여기 있다 하고 그들이 그 바울을 피신시키는 것을 알고 또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두 분은 거기 남아 있고 바울만 피신을 시켰습니다.
피신을 시켜 가지고 베뢰아로 보냈는데, 베뢰아에 가 가지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까 이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바울이 거기 가서도 예수 믿는 도를 전한다 이래 가지고 사람들을 보내고 또 거기 있는 사람들을 충동시켜 가지고 이렇게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를 하고 이래서 바울이 자기를 호위해 가지고 자기를 호위해 가지고, 바다까지 온 사람들은 갔고 베뢰아까지 같이 동행에서 호위해 가지고 왔던 사람들은 보내면서 '실라와 디모데를 또 속히 보내라' 또 보내니까 거기 와 가지고 또 거기서 다른 데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은 이렇게 모든 일이 다 형통치 아니하고 마찰이 있고 대립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을 합니다.
유태인들은 어떤 분들이 유태인들인고 하니 구약 이스라엘이 유태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소망을 가졌다고 하고 또 그때 구약 성경은 다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해 놓은 것을 한테 모아서 벌써 구약 성경은 다 완전히 완제가 돼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대해서는 주님이 오셔 가지고 획 하나도 잘못됨이 없다 하는 것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보증을 해서 구약에 대해서는 이 보증이 제일 권위 있습니다. 그때 신약 성경은 그때에 사도들이 여기 저기서 기록을 해서 있었지만 한테 주 모으지를 못했고 구약은 다 모여져 있을 때입니다.
구약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고 또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해서 놓은 메시아가 올 것을 그들이 다 바라보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들이 다 메시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요 소망이 메시야에게 있는 사람들이지만 메시야를 오니까 정작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요, 또 십자가 못 박아 죽인 그것을 사도들이 너희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은 내어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하고 오히려 살인 강도를 너희들이 구원했으니 입술로는 너희들이 의를 진리를 말하지만 실은 의와 진리를 싫어하고 악에 속해 가지고 악을 좋아하는 너희들이라 그렇게 사도들이 말했습니다. 이 바울도 이거 때문에 자꾸 박해를 당하고 당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전할 때에 진리대로 전하고 또 하나님이 함께 해서 전하면 거기는 아무 박해가 없고 대적이 없고 방해물이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세상은 어두움에 속하여 있고 하나님의 도는 빛이기 때문에 빛과 어두움은 언제든지 대립이지 일치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칠 때에 그 어두움을 멸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어두움을 구원하려 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빛이 어두움을 구원하는 데는 빛이 어두움을 죽이는 거 있고 살리는 거 있고 있기 때문에 어두움을 살리는 데는 그 빛이 어두움에 비출때에 어두움이 돌이켜서 회개를 하면 그 어두움이 회개를 하면 빛이 그 어두움을 점점 밝도록 하고, 또 빛이 어두움에 비췰 때에 어두움이 회개하지를 안하고, 어두움이 빛으로 변화되지 안하고 그 어두움이 빛과 대립이 될 때에는, 그때는 어떻게 하는고 하니 그 빛이 어두움을 피해야 합니다.
어두움을 피해야 합니다.
세상은 어두움인데 하나님의 도는 빛입니다. 빗이 어두움에 비췰 때에 어두움이 그 빛을 보고 깨달아 가지고 변화가 돼서 회개를 하면 빛이 거기 서 점점 그것을 밝게 해서 구원할 수가 있고. 만일 그것이 회개치 아니하고 이 빛을 대립할 때에는, 대립할 때에는 그것이, 어두움이 빛으로 변화가 될 때는 어두움이 빛을 인해서 빛으로 변화가 될 때는 그 라이 거기서 일을 해야 되는 것이고 또 빛이 어두움에 비칠 때에 어두움이 회개해서 빛으로 변화되지 안하고 어두움이 똘똘 뭉쳐 가지고 빛을 대적할 때에는 그때는 그 자리를 피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피해 주지 안하고 만일 있으면 어두움은 그만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실 때에 지방에 가서 복음을 어느 지방이든지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시면 그 지방이 예수님의 그 천국 복음을 듣고. 조금씩이라도 회개하고 그 복음을 달게 받으면, 회개하고 받으면 그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셨고 그 지방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지 안하고 오히려 대항적으로 나을 때는, 대항적으로 나을 때는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다 피하셨습니다.
왜 피하느냐? 우리가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기서 대항을 하고 자꾸 죽이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그것이 두려워서, 대적하는 것이 두려워서 피하는 걸로 그렇게 알기 쉬운데, 대적하는 것으로 피하지 안했고 피하지 않으면 결국은 마찰이 되면 그것은 어두움이요, 이는 빛이기 때문에 빛 앞에는 어두움이 깨어지는 것이 그거 필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어두움은 이기는 것입니다. 온 골짝에, 어떤 집안에 큰 집안에 어두움이 꽉 들어 있다할지라도 조그만한 참 벼룩만한 이런 조그만한 불이라도 가면 그 빛은 빛대로 더 밝히 그 빛을 드러내고 있지 그 어두움에게 빛이 삼키워지지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빛과 어두움이 서로 맞서면 어두움이 깨지지 빛이 깨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과 악령에게 속한 사람과 그 둘이 서로 마찰이 된다고 하면 결과적으로는 악령에 속한 것을 하나님께서 멸해 버리고 맙니다. 멸해 버리면 멸망은 시켰지만 그것을 회개시켜서 구출하지는 못하게 되기 때문에 서로 대립해서 마찰하는 것이 그것이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어두움에 속하여 있는 사람을 구원하는 데는 그것이 실패하는 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그 자리를 즉시 피하셨습니다.
언제든지 성경에 보면 그렇게 벌써 대립이 돼 가지고 마찰적으로 이렇게 될 때에는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즉시 피하셨습니다. 밀려 나가고 쫓겨 나가고 이렇게 피했습니다. 이 사도 바울도 역연 사도들도 그 자리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그 사람들이 복음을 달게 받고 하면 복음을 전했고 만일 받지 안하고 대립적으로 나갈 때에는 사도들도 그 자리를 피해서 딴 데로 옮겼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보고 혹 생각할 때에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아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데 하나님의 도가 핍박을 많이 받고 그라고 하니까, 핍박하니까 겁이 나서 쫓겨갔는가 보다, 피해 갔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악의 세력이 말을 하면 아주 벌벌 떨고 그렇게 떠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그때 유태인들이나 혹은 로마인들이나 그런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이래 대립을 할 때에는 그 사도들이 그 앞에서 말 한 마디라도 거리끼지 안 할라고 참 벌벌 떨면서 이렇게 상대방을 아주 높일 대로 높여서 각하라고 이렇게, '각하여' 각하라고 이렇게 말하고 '이렇고 이렇습니다' 꼭 뭐 상대방이 겁이 나 가지고 꼼짝을 못 하고 죽을 지경이 돼 가지고. 아주 약자가 세력있는 강자에게 앞에서 벌벌 떠는 거와 같은 그렇게 떨면서 말을 한 것을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고 비밀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고 하니, 만일 거기서 인간적으로 서로 상대를 한다고 하면 그 사도들이 그들에게 박해를 당하는 것이나 혹은 욕을 먹는 것이나 핍박받는 것이나 해를 당하는 것이 그것이 무엇인가 그 사도들에게 털끝만치라도 자연히 인간 대 인간으로 대립하다 보면 그 사도들에게도 악에게 피동되고 네가 악을 발하니 나도 악으로 대한다 이래 가지고서 조금만치라도 그 사도들에게 잘못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고 사도들의 잘못을 인해서 상대방이 그 잘못을 인해서 악을 발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은 자기네들이 벌써 생명 내놓은 그 사도들이 뭐 죽기가 두렵고 매 맞기가 두렵고 그런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안하면 자기네들의 털끝만치라도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 그것을 인해서 상대방들이 잘못이 더 발아되고. 잘못이 발생되고 잘못이 더 강해져 가지고 진리를 대적하는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그 사도들이 박해받는 것이 순전히 주님과 진리 때문에, 상대방을 구원하는 그것 때문에만 받지 자기네들이 무슨 말 한 마디라도 수 있는 그런 것 때문에 받지 안할라고 그렇게 조심을 하면서, 그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순전히 악으로 악을 행하지 사도들이 무슨 잘못된 거리낌이 조그매 있어 가지고 그렇게 악을 행하는 그런 일이 되지 안하도록 조심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상대방에게 조그만치라도 거리끼지 않도록 이렇게 할려고 애쓰는 것은 그것이 죽기를 두려워서 공포나 비겁에 쌓인 그것이 아니고 그 상대방에게 거리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나 또 그게 아니라도 지금이라도 악한자들이 복음을 대적해서 할 때에는 악에 속한 사람은 그 사람은 내게 대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어떤 나쁜 말을 하고 한다 할지라도 복음 전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털끝만치라도 잘못을 인해서 그 사람이 상대방이 그렇게 하도록 하는 그런 일이 없도록 애를 써서 노력을 해서 상대방은 복음 전하는 자에게 백 가지 억울하고 나쁜 일을 가해한다 할지라도 복음 전하는 자는 저희들의 잘못으로, 저희들의 잘못함으로 그렇지. 이 진리를 대적함으로 그렇지 진리에 속한 사람이 털끝만치라도 잘못함을 인해서 그들이 그런 일을 하지 안하도록, 자기에게 털끝만치라도 복음 전하는 자에게 잘못이 없도록 할려고 노력을 해서 그와 같이 하는 고 비밀을 여러분들이 보지 못하면 성경을 읽을 때에 '아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보니까 사도들도 죽기를 두려워했구먼.
또 예수님도 모두 다 죽일라고 웅성웅성하니까 그 자리를 피하고 한 것 보니까 예수님도 역연 인간은 인간이라 죽기를 두려워했구먼'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그 말이오.
제가 그렇게 느꼈기 때문에, 그것을 처음에 예수 믿은 지 한 몇 달 안 돼서 그때 성경을 읽는데 이 사도들을 보고 사도들, 사도행전을 읽고 이 성경을 보니까 사도들이, 예수님에게는 감히 그렇게, 대적을 하고 핍박을 하고 이라니까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그만 피했습니다. 그 자리를 자꾸 피했다 말이오. 피했는데, 피할 때는 거기 대해서는 '무엇 때문에 피하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두려워할 것이 없을 건데 왜 피하는고 감히 그런 생각 가지지 못했지만 사도들이 그 자리를 피해서 이래 하는 걸 볼 때에는, 또 벨릭스 각하나 이런 참 총독들에게 나타나 가지고, 사도행전 24장 이하에 쭉 내려보면 총독들에게 이래 걸렸을 때에 그때에 아주 총독을 겁을 내 가지고 그 앞에서 뻘뻘 떨면서 말한 거와 같이 그렇게 아주 조심있게 아주 저자세로 말했고, 아주 저자세로 말했고 거기서 참 죽어가는 사람과 같이 그렇게 말하는 그것을 보고 제가 오해를 가졌었습니다.
'도를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다 영생을 가졌고 하나님이 배후에 있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들이 공포와 비겁을 해 가지고 이래 비겁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했을까? 그때 당당히 말을 하지' 그래 가지고 그때 그런 오해를 가져서 그것이 좀 의문이 되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문이 돼 가지고 있다가 그 뒤에 제가 차차 조금 살아가면서 경험을 해 보니까, 그 상대방에게 당당히 말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고, 언변적으로도 설복을 시킬 수 있고, 정복을 시킬 수가 있고, 굴복을 시킬 수가 있고, 또 할 말이 얼마든지 있고 또 그것을 따지면, 콩팥을 따지면 상대방에게 비가 있다는 것을 그것을 드러낼 수가 있지만 그걸 드러내면 그 상대방이 그로 인해서 오히려 깨닫고 복음을 받는 게 아니라 더 악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빛에서 멀어지게 되고 이러기 때문에 상대방의 구원을 위해서 할 말을 못 하고 벙어리 되고, 이길 수 있는 것을, 논쟁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지고. 또 상대방에 대해서 담대함을, 담대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인데 담대한 태도를 가지지 못하고 비겁한 그런 태도를 가지게 됨으로써 그들에게 뭐인가 하나도 거리끼지 않게 해야 되겠고 또 그들이 실컷 한번 고자세가 돼져야 되지 저들이 고자세가 되지 안하고 저자세가 돼 놓으면 양심을 가지고 뒤에 가서 진리에 돌아오기 어려울 터이니까 실컷 아무것도 아닌 게 고자세를 가지고 한번 눌루고 한번 욕질을 한번하고 그래 안 하면 뺨이나 한번 때리고 실컨 한번 멸시를 해서 발끈 발에 밟아야, 밟아야 마음이 시원하고 뒤에 거리끼지 안하지 저희들이 털끝만치라도 밟혀 놓으면 그거는 언제든지 그게 소화되지 안하고 항상 거기 대해서 진리를 대항함이, 되기 때문에, 실지로 신앙 걸음을 걸어 보니까 참아야 되겠고, 져야 되겠고 벌벌 떨어야 되겠고, 무슨 죄나 있는 듯이 자꾸 이렇게 해야 그 상대방을 구원하는 일에 지장이 없고 또 그 뒤에 그들에게 가서 전할 수가 있지, 얼마든지 그 이튿날 만나도 또 웃으며 전할 수 있지만 내가 할 말 다 해 놓으면 그 다음에 그 사람들이 대해 주지도 안 할 뿐 아니라 할 말이 없다 말이오. 그래서, 아, 이 사도 바울들이 이렇게 한 것이, 과연 참 사랑에서 이렇게 했고, 그는 상대방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낌에서 했지 공포나 비겁에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닫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도 성경 볼 때에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기가 쉽지 않느냐 그래서, 혹 전도할 때에는 거기서 '진가를 구별해야 된다. 옳고 바른 것을 구별해야 된다. 틀린 사람에게, 틀린 사람에게 틀렸다 하는 것을, 여기 똑똑히 밝혀야 된다.' 틀린 사람들에게 틀렸다는 것을 밝히면 구원이 될 줄 알아도 안 됩니다. 틀린 사람에게 틀렸다는 것을 밝히지 안 하고, 그 사람이 틀렸는데 내가 틀렸다고 말할 때는 내가 틀린 사람같이 공연히 거기서 억울함을 입고 거기서 죽은 듯이 그렇게 당하고 있는 그것이 상대방에게 기운이 납니다. 상대방에게 기운이 나고 상대방에게는 내게 대해서 아무 반감은 없고 오히려 너무 과히 했다 싶으니까 도리어 거기 대해서 반성이나 회개의 싹이 났으면 났지 거기 대해서 반동 그것이 쌓여지 지는 안하지만 내가 할 말 다 해 놓고 진가를 따져 옳은 것 그른 것 다 구별해서 가르쳐 놓으면 그 상대방은 안면이 없고, 그 복음 전하는 자가 뭐 흠이 있을 것이 있습니까? 안면이 없고 이러기 때문에 그걸 알면 그 사람이 옳은 데로 돌아올 줄 알아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상스럽게 반감적인 사람이요 반동적인 사람이요 그 속에 감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구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와 같이 피하셨고 사도 바울도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에게 억울함은 당할지라도 억울함을 끼쳐서는 안 되고, 남에게 눌릴지라도 남을 눌러서는 안 되고, 남에게 억울하게 꺾어졌으면, 우리가 상대방을 구원하는 데는 억울하게 꺾어져야 되고 박해를 당해야 되고 손해를 봐야 되고 천대를 받아야 되고 멸시를 받아야 되고 꼭 예수님이 하나님이신데 뭐 잘못이 있어서 십자가 못 박히셨습니까? 이렇게 우리 것을 대신해서, 잘못은 인간들이 잘못했는데 예수님에게 정죄해 가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면, 죽은 것은 인간들 잘못을, 잘못의 값을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복음 전하는 데에는 꼭 크나 작으나 이런 성질로 가기 때문에 이 성질을 가지지 안하면 복음이 전파되지 안하고 승리돼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정당 방위는 기독교에는 무용입니다. 정당 방위는 기독교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또 콩팥을 가리는 그런 시비도 기독교에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이 계셔서 당신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억울하게 애매하게 어떻게라도 자기가 희생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구원이 되고, 자기가 억울한 것은 상대방의 구원이 되고 자기가 상대방에게 억울하게 하는 것은 상대방을 죽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복음의 성질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오늘 아침에 증거할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기 보니까 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 말씀을 전할라고 오늘 이 말씀을 봉독한 것입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니 헬라인으로 말하면 그때에 제일 문화인이요 제일 지성인들입니다. 지성인들도 자꾸 이 성경을 상고하도록 만들고 성경을 읽도록 만들 때에 그 지성인들이 회개를 하고 또 참 뿌리깊은 신앙들이 생겨지지, 우리 신앙생활에는 성경 읽는 게 하나 있고. 또 기도하는 것이 하나 있고. 또 자기가 행동하는 것이 하나 있고 이렇게 성경보는 것 기도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 세 가지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성경 상고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기도를 힘쓰고 성경 상고나.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 중에 기도를 제일 힘을 쓰는 사람들은 잘못하면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돼 가지고, 하나의 감정적인 사람이 돼 가지고 신앙이 건전한 신앙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또 기도하는 걸 내버려두고 실행하는 데에, 실행하는 데에 제일 주력을 해 가지고 실행하기를 힘을 쓰는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가 보면 율법적인 사람이 돼 가지고 그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되고 냉정한 사람이 돼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의 신앙도 위험합니다. 나중에 가서 교만한 사람이 돼지고 하나의 율법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에 자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는 멀어지는 사람이 돼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중에 제일 좋은 것은 성경을 상고하는 이 일을 제일 주력하고, 우리 신앙생활은 성경 보는 것 기도하는 것 실행하는 것이 세 가지가 줄기인데, 벼룻줄이고 이게 지금 강령인데, 이 세 가지 강령 중에 기도를 주력하는 사람은 이 사람은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탈선하기 쉽고, 또 행함을 힘쓰는 사람은 그 사람은 율법적이요 또 그 사람은 다 교만의 결과로서 실은 복음의 본질에서는 멀어지는 사람이 자꾸 되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행함 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사람이 되어지기 쉽습니다. 이래서, 마태복음 20장에 그 포도원 품군 비유에 말씀해 놨습니다. 품군 비유에 보니까 아침에 일찍 온 사람은 그 일을 당당히 많이 해서 그 품을 받았고, 마지막에 맨 늦게 온 사람은 일하지 안하고 그 품을 받았으니까 그 사람은 감사했고 처음에 온 사람은 불평했고. 이래서, 나중에 아침부터 일찍 온 일군은 오히려 버림을 당해서 주님 앞에서 참 책망을 받았고, 마지막에 늦게 온 사람은 칭찬받고 그 사람을 품을 먼저 줬습니다. 요 오묘한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중에 행함을 힘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전부 되는 건데 제가, 은혜보다도 제가 들어서 했다는 자율이 강해지고 자기의 주관이 강해지고 자기의 행함이 강해지기 때문에 그 사람은 차차 차차 율법적이요 교만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하면 알겠지만 필라기우스 학파라는 학파가 있습니다. 필라기우스 학파라는 그 학파는 어떤 학파인 고 하니 '성경 말씀대로 못행할 게 있는가? 성경 말씀대로 다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성경에 '무엇이든지 알면 다 행하지 못 행할 게 어디 있느냐 이러기 때문에, 차차 차차 그 사람은 행함으로써 구원이 이루어가지 하나님의 은혜로 되지 않는다 해서 해나가는 그런 사람들 돼 가지고 마지막에는 하나님과 뚝 떨어져 필라기우스파가 완전히 그건 하나님과 멀어지고 전부 저거 힘으로 된, 안 믿는 사람들이 저거 힘으로 가지고 모든 걸 이루는 것과 같은 그런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래서, 그 다음에는 모든 후손들이 그 걸 알고 '필라기우스 이건 틀렸다. 반쯤은 깎아야 된다.' 반필라기우스주의가 생겼습니다.
반필라기우스주의가 생겼다가서 지금은 이제는 순전히 은혜라 하는 것으로 완전히 바꿔지고 말았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믿는 사람이 성경 보고 기도하고 자기가 실행하는 데에 힘쓰고 요 세 가지 하는 이것이 요게 아롱아롱하게 되어 나가면 구원이 잘 되어 나가는데 요 세 가지 가운데 제일 먼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 먼저 앞서 가고 그 다음에 기도가 뒤따라 가고 그 다음에 행함이 뒤따라 가고 요래야 되지 행함이 제일 앞서 가도 그 사람 실패. 기도 가 앞서 가도 실패, 성경 보는 것이 상고하는 것이 앞서 가야 된다는 요것을 지금 오늘 아침 말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이 성구를 읽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기도도 힘을 쓰고 행함도 힘을 쓰는데, 행함은 그라면 될 대로 됐느냐? 행함도 될 대로 된 게 아니고, 지금 우리가 얼마든지 행함에 힘써 나가야 될 사람들이요, 또 우리가 기도를 힘쓴다는 것도 기도도 될 대로 됐느냐 하면 기도도 지금 할 대로 다 하지 못하고 아주 미비하고 미달된 것이 많습니다.
기도도 미달이요 또 행함도 미달이요 그러나 성경 상고가 제일 미달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에 연경회에 가입을 해 가지고 성경을 연구하는 그 회를 해서 지금 가입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에서 연경회에 가입한 사람이 숫자가 몇 명이나 됩니까? 근 천 사백 가량 된다는 말 들었습니다.
또 그러고, 다른 교회. 우리 교회가 아니고 다른 교회서 거기 가입한 사람이 얼마나 된다 했습니까? 예? 지교회가 이천, 그러니까, 지교회가 이천이 가입을 했고 여기서 천 삼 사백 됐고 이런데 우리 교회는 그만침 언제든지 그만 삼분지 일이니까 그것도 뭐 그래 되는 모양이라. 집회 가서도 보면 삼분지 일, 전체 연보도 삼분지 일 이랬는데, 요번에 표적 나타난 것은 삼분지 일이 아니고 반이나 넘어 됐습니다. 그거는 뭐냐 하면 교만할 것은 아니고 믿는 믿음이 좀 낫다 그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 말입니다.
이랬는데, 우리 이 서부교회 교인이 중간반 이상으로는 할 수가 있는 사람들인데, 중간반 이상으로 말하면 아마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몇만 명이 될 것인데 천 삼백 명밖에 안 하고 있기 때문에 권유해 가지고 어짜든지 이거를 하도록 시키십시오. 그래서, 성경 상고하는 일을 제일 주력해야 됩니다. 그걸 하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경회에 가입한 사람 손들어 봅시다. 예, 자, 아직까지 가입 못 한 사람 손들어 봅시다. 뻐뜩 들어 봐요.
주일학교 중간반 반사 선생님이 아직 가입 안 하면 안 돼. 가입해야 돼요.
가입해서. 어쨌든지 고걸 꼭 미루지 말고 일 주간에 두 장씩을 하는 거 그걸 미루지 말고 그 뭐 잠을 좀 못 자도 하면 하나님께서 보충해 주십니다.
이러니까, 꼭 일주일에 두 장씩 하는, 고걸 하도록 그렇게 하시고, 그걸 한번 물을려고 했는데, 지금 두 장에 구십원을 할라고 하니까 거기 일보는 사람의 사례 한 달에 십만 원 해 가지고 한 사람밖에는 사례가 안 나옵니다. 구십 원색 하면 한 사람밖에는 사례가 안 나와요 안 나오는데 한 사람이 하니까 그저 이래 퍼뜩 퍼뜩 보고 틀렸으면 돌뱅이 치고 채점이나 해 주지 그걸 고쳐서 써 줄 수는 없다 그 말이오. 그거 써 줄라고 하면 얼마나 돼야 되느냐? 구십 원 짜리가 백 오십 원이 돼야 돼요. 백 오십 원이 돼서 육십 원을 더 받아야 그걸 틀린 것은 고쳐서 써주고 자꾸 이렇게 할 수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그걸 써 주도록 그렇게 까지는 하지를 못해요. 그래서 '써 줘야 되지 틀렸다 그만 하고 나면 어짜느냐' 그것도 좋습니다. 자기가 틀렸다 하면 틀린 것을 알고 또 자꾸 그래하지 쭉 하면서 틀렸든지 옳든지 답안을 쓸라고만 하면 그만치 벌써 성경을 공부하는 데에 유익이 됐습니다. 답을 틀리게 써도 봤으니까 유익이 됐어. 또 그걸 틀린 것을 새로 자기가 고친 것을 고친 것 읽어보느냐 하면 고친 것 별로 읽어보지를 안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도 자꾸 하도 여러 사람이 '고쳐 줘야 되지 고쳐 주지 않으면 무슨 틀렸다고만 하면 뭐 소용이 있습니까? 고쳐줘야 공부를 하지요.'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한번 광고를 하는데, 고쳐 주는 그런 것이 육십 원이나 더 내 가지고 하는 게 옳겠나 아무래도 그만 구십원 하고 틀린 것은 틀렸다 하면 자기가 뭐이 틀렸는고 옆에 사람에게 '나 이것 틀렸다. 뭐 이 틀렸습니까?' 가서 물어도 될 터이니까 그래도 하면 될 터이니까. 백 오십 원보다 구십 원 내고 그와 같이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한번 그래 가지고 손을 들어서 결정을 한번 지어야 되지 모든 사람의 중론을 무시하고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해 가지고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 오십 원 내고 고쳐주는 것이 좋은 손들어 봅시다. 이거 다 드네요 또 그러면 구십 원 내고 예? 예. 그것 참 아주 좋은 요령입니다. 예, 그래 인제 그걸 육십 원을 더 내서 백 오십원 내서 하자고 모두 다 손을 다 들었는데 그것보다도 고쳐 줘도 그렇고 하니까. 노력이 있어야 되고 하니 저 게시판이 있으니까 우리 게시판에, 게시판에다가 반드시 지낸 주 공부한 것이면 정답을 거기다 딱 써 놓을 테니까 고치고자 하는 사람은, 알고자 하는 사람은 틀렸으면 고 문제를 가져가서 딱 읽어보고 고치면 되겠다고 아주 좋은 것을 말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래 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자 그러면 그렇게 게시판에다가 딱 써 붙여 놓으면 그저 전 주간 공부 한 것을 딱 써 붙이면, 이것도 또 문제는 문제라. 그것도 또 하나 문제가 있네요. 그래 놓으면 나중에 뭐 전 주간 것 딱 딱 해 나가면 되지만 안 해 나가고, 안 해 나간 사람은 어느 것을 표준해 가지고 답을 써내느냐? 답 써 놓으면 제가 성경 읽지 않고 답만 보고 쭉 쭉 쭉 쓸 테니까 그것도 또 문제가 돼지고, 그러니 그것도 참, 그래 놓으면 하지도 안하고 이거 보면 그래요. 신학교도 보면 답 쓸 것 답안 써 놓으면 옆에 못 보도록 하는 것도 보고 이라는데 뭐 보라 해 놓으니까 가보고 뭐 이래 해 버리면 또 공부가 안 될 거라 말이오. 좀 생각합시다. 그라면 백 오십원으로 하나 구십원으로 하나 이거 좀 더 좀 생각해 보고 판정해야 되겠습니다.
예, 어짜든지 세 가지. 성경 읽는 것, 또 기도하는 것, 실행하는 것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제일 중요합니까? 자 성경 보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봅시다. 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그 다음 이 호는 기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봅시다. 예 이 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고 두 가지가 되면 밑에 실행이라 하는 것은 저절로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 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산에 가도, 저 대신 공원이나 꽃마을에 가서 기도하러 가거들랑 기도만 덜렁 하고 오지 말고 반드시 기도와 성경 있으니까 가듬 길로 말이지요 가듬질로 할 수 있으면 성경 몇 절이라도 보고 그라고 난 다음에 기도하는 게 좋고. 성경 안 볼라면 새벽기도에 할 때에 받은 말씀을 자기가 눈 감고 쭉 이래 암송하고 새김질하고 난 다음에 기도하는 게 좋고. 어쨌든지 성경이 첫째, 기도가 둘째.
실행이 셋째 요런 순서로 노력을 하면 다 그것이 바로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