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관

 

1987. 10. 6. 새벽 (화)

 

본문:요한계시록 2장 1절∼5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우리는 이 성경이 우리의 전 신앙에 유일한 법칙이요 또 이대로에 믿고 행하는 것이 다 구원이 되고 그 외에는 구원되는 길이 없는 것을 다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 도는 진리의 도입니다. 진리는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건 아니고 진리는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깨닫는 것도 바른 깨달음은 하나뿐이지 둘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고 또 우리가 행동도 하는 것이 바른 행동은 하나뿐이지 둘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거는 차차 범위가 있어서 그 옳은 것이 중앙이라든지 어디든지 하나 옳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향하여 찾아가고 있는 그것이 옳은 데에 바로 거게 명중된 것도 있겠고 그것을 향하여 지금 찾아가고 있는데 거리가 좀 먼 것도 있고 가까운 것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옳은 것의 범위가 무한히 넓어서 그를 향하여서 지금 찾아가고 있는 것도 있겠고 거게서 삐뚤어져서 딴데로 이탈돼 나가는 것도 있겠습니다.

바로 찾아 나가기는 나가는데 아직까지 온전함에 자기의 바름의 그 자체에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거리가 멀다 할지라도 그것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면 시일 문제겠고 그것은 또 어리고 약한 문제지 틀렸다고는 할 수가 없겠고 차차 차차 이제 장성해 가면 거게 도달하겠고 또 그것이 강해져 가면 거게 도달하겠습니다.

그러나 삐뚤어졌다고 하면 그것은, 벌써 향방이 삐뚤어졌다고 하면 아무리 하나인 참인 그 진리 옆에 붙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면 갈수록이 삣대져 가지 거게 가까이 찾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는 하나뿐인데, 옳은 깨달음이나 옳은 행위나 옳은 그 건설구원 그것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그 법칙 그 하나뿐이지 둘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인 법칙을 사람들이 수많은 천태만상으로 생긴 것만치 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이렇게 만들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 진리로 만들지 다른 걸로 만들지 안했기 때문에 이런 향방으로 찾아가나 저런 향방으로 찾아가나 그 나선 자리가 각각, 출발한 자리가 각각 다르겠고 그러니까 중간은 다르지만 마지막 종말에는 하나님이신 한 분에게로 도달하고 종착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 요동치 않는 표준이 있어야 하겠는데 우리가 예수 믿는 그 법칙을 신구약 성경으로 이렇게 알고 믿고 있습니다. 있는데 ‘이 신구약 성경은 정확무오하다. 이 성경은 호리도 틀림이 없고 획 하나도 가감할 수 없이 정확하다.’ 이렇게 아는 것과 ‘성경에도 그것은 틀린다' 이러면 벌써 틀린 게 있을 수 있다 하면 그 사람 구원은 그 하나 생각 가지고 자기 구원은 다 틀려버렸습니다.

왜? 틀린 데는 주인이 마귀요 주권자가 마귀요 옳은 데에는 주권자가 하나님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근본적으로 우리 영을 옳은 데 세워 놓으시고 우리의 심신은 거게 소속한 소유격의 위치기 때문에 그 영이 산 자에게 그의 소유를 영을 표준해 가지고 주격으로 삼아서 그런 것을 점점 이렇게 구원시키는 그 역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영은 그렇지만 자기의 이 심신이 지금 영이 받은 그 구원을 자체도 받도록 하려고 영도 역사하고, 예수님의 피공로도 영감도 진리도 역사하고, 모든 만물도 역사하고, 모든 그 성도들의 원하고 기도하는 그 운동도 역사하고 본인도 역사해 가지고 그 심신을 영과 일치를 시켜서 영육이 하나된 그 참사람을 만드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것인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인고 하니 ‘하나님 말씀은 정확무오하다’ 이 하나를 잡고서 나가는 것인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도 정확지 않는 것이 있다. 거기도 정확무오라 할 수는 없다, 틀린 것도 있다.’ 이렇게 이 성경관을 가지면 이 성경관 가진 이 성경은, 이 모든 사본들이나 번역본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원본 성경은 한 권뿐인데, 하나님이 계시하신 원본 한 권뿐인데 그 한 권은 획 하나도 틀림이 없다 정확무오하다 이렇게 우리가 믿고 나갈 때에 그 번역문도 그 원경에, 원문 성경에 틀리지 않도록 그리 가려고 하고 있고 거게 틀린 것 있으면 이것을 고쳐서, 여게 저게 여러가지가 있으면 그렇게 상고해 가지고 바른 거 참된 그걸 찾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틀림이 있다’ 이런다면, 그 사람의 그 건설구원을 이루는 제일 건설구원 역사에 제일 앞잡이 서 가지고 지도하는 자가 어떤 자냐 하면 그것이 곧 지식이라는 것이 지도하고 있는 것인데 그 지식이 틀렸기 때문에 이것은 그를 따라가는 모든 자기 이 심신의 수많은 부분과 수많은 요소들은 다 틀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그 틀린 것을 그 위에 옳은 것을 가지고 있는 중생된 영이 있고 또 그 위에 진리가 있고 그 위에 예수님의 피공로와 영감이 이렇게 있기 때문에 그것도 수정이 안 될 거는 없고 고칠 수 없는 절대 불가능이라고는 할 수가 없지마는 그래도 그 사람의 그 자체로 말하면 자체 속에 제일 선봉장인 지성, 그 지식성이 벌써 잘못 잡아 가지고 삐뚤어져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의 심신 전부는 다 틀렸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고 그 이상에 있는 중생된 영과는 서로 삐뚤어져 가지고 서로 대립돼 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이것이 바로 되지 못했다고 하면 그 구원이 바로 된다는 그것은, 아주 절대 안 된다고 붙일 수는 없지마는 그 현실로서는 될 그런 길은 없다고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이 정확무오하다 하는 그것이 이렇게 중요하고, 또 그와 같이 우리가 성경을 보고 그대로 우리가, 성경에는 참 온 세상에 둬도 다 두지 못할 만한 그런 많은 양을 간추려서 우리가 가진 육십육 권이라 하는 조그만한 책에다가 간추려 가지고 기록되어 있어서 어떤 한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데는 그대로 다 읽음으로써 알 수 있다고 하면 천하에 둬도 다 두지 못할 만치 복잡한 그 기록을 해야만 될 터인데 간추려서 이렇게 우리에게 간단 명료하게 신구약 성경으로 기록해서 발표해 주셨고, 또, 그러면 그거 가지고 어떻게 알 수가 있느냐? 그것은 그 성경은 자체 안에 영감 역사가 있고, 또 중생된 우리 영이 영감으로 중생됐고, 또 중생된 자 속에 영감 역사의 역사가 있고, 또 진리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서 이렇게 점점 바로 깨닫고 바로 알도록 이렇게 지도하는 역사가 있음으로써 간단 명료한 기록을 가지고 세상에 둬도 다 두지 못할 만한 그런 복잡한 많은 양을 능히 다 바로 파악하고 바로 자기 법칙으로 삼아 따라가서 구원을 이룰 수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또 신앙 체험에도 우리가 경험에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신구약 성경에 부분적으로 이 깨닫는 것도, 신구약 성경이 정확무오한 것을 믿어야 하는 것처럼 자기가 깨달은 교리와 신조나 그것도 그 교리 신조를 정확무오하다고 이렇게 믿어지는 거게서부터 그 사람의 행위는 자기가 가진 그 교리와 신조와 일치될 그런 희망이 있지 벌써 그것을, 자기가 깨달은 그 교리와 신조가 마치 성경이 정확무오하다고 성경관을 가진 거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깨달은 그 교리와 신조관도 이거는 정확무오하다고 그렇게 인정되는 거게서부터 교리와 행위가 일치되는 행동은, 생활은 시작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이 없는 데에는 시작될 수가 없는 것이 그것이 이치입니다.

그것이 필연성입니다.

또 그뿐만 아니라 자기 주관 내에서도 ‘이는 틀림 없다. 이 외에는, 틀림이 없다.’ ‘네가 그러면 이것을 정확무오하게 믿는다고 하면 어느 정도 믿느냐?' ‘이것은 내가, 내 소유가 다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이 옳음은 내가 양보하지 않겠다. 이거는 내 소유를 다 여게다가 다 맡길 만치, 투자할 만치 나는 이것이 정확무오하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 네가 소유가 그러면 네 몸이 절단나도 그러냐?’ ‘이 몸이 절단나도 변동 없다.' `네 생명이 절단나도 변동 없느냐?’ ‘변동 없다.' 여게까지 나가는 데에서 비로소 자기가 가진 교리 신조대로의 이 신앙 생활 신앙 행위를 이 세상에서 해 나갈 수가 있는 줄을 압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방해물은 마치 바다에 들어간 사람에게 그 물이 전후좌우 상하에 가득 찼고 자기 몸뚱이만 물 속에 있어서 물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격하고 거기서 살아 있고 물이 들어오면 저는 몰사하고 익사하고 마는 것인데, 그래 인제 이렇게 악령의 역사와 이단의 방해물들과 우리를 삐뚤어지게 하는 세력들이 가득 찼는데 자기 주관을 다 점령할 수 있는 정확한 것이 있어야 그 신앙 생활을 걸어가겠고, 또 자기가 아무리 정확하다 할지라도 자기는 보배로 알고 있는 네 가지 소유가 있는데, 자기의 마음이라든지 목숨이라든지 힘이라든지 뜻이라든지 자기 소유라든지 몸이라든지 이런 것 다 보배인데 이 보배를 다 자기는 빼앗길지라도 이것 때문에, ‘이 보배가 다 손해가서 보배가 다 절단난다 할지라도 나는 내가 믿고 있는 교리와 신조에는 변동 없다. 내가 그런 것이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내가 이 정확한 것을 내가 이렇게 뭐 팔거나 양보하거나 의심하거나 그럴 수는 없다’ 이렇게, 다시 말하면 자기가 깨달은 교리와 신조가 정확무오하다 하는 것을 자기가 알고 믿고 있고 이 정확무오한 것은 자기 주관에 가득 차서 자기 주관에 온 천하에 그 모든 논리와 모든 통계 별별 논리들이 와서 증거를 댄다 할지라도 자기 안에 믿고 있는 정확무오의 이 교리와 신조로 믿고 있는 것이 벌써 자기라는 자체를 완전히 다 점령하고 있고 또 자기의 그 소유라는 보배를 완전히 점령하고 있는 여기에서만 자기는 이 세상에 수많은 대적들과 미혹들을 이겨날 수 있지, 그것을 그렇게,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이겨서 자기 주관 안에 가득 차서 딴게 없고 자기의 소유가 있지만 그것보다 이 정확한 교리 신조를 더 가치 있게 보배롭게 이거는 참이라고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모든 것보다 능가하지 안하면, 자기 소유보다, 자기 믿고 있는 교리와 신조가 자기 소유보다 더, 소유를 능가한 그 교리를 가졌고 자기 주관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능가한 이 정확한 교리로 자기가 신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 사람의 그 신앙이라는 것은 언제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을 이긴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니까 한 번 이기고 두 번 이겼지만 최후까지 다 이겨야 이긴 것이지 아직까지 이길 자가 남아 있고 또 내가 질지 이길지 모르는 전투가 남아 있다고 하면 전투가 남아 있고는 그 사람이 승리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그 다음 전투에, 일차 이차 백차까지는 승리했다 할지라도 아직 백일차가 남아 있다고 하면 하나가 남아 있다면 하나 남아 있는 그게 어찌 될지 모릅니다.

그것을 이겨야 이긴 것이지 이기지 않으면 그게 패전하는 것이 된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신구약 성경만 정확무오하다, 신구약 성경을 정확무오한 자기의 구원의 법칙으로 이렇게 믿는 이것만 중요한 게 아니고, 이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우리가 중요성을 가지되 일반 이 교계에 있는 교파들이 이것을 중요성을 다 가지느냐 하면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나는 넓게 모르지만 대면하나 안 하나 다 그래도 알고 인정하는 거 있기는 있습니다.

있는 것은, 어느 교파가 ‘이 신구약 성경 이 원본 성경, 한 권만 되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이 원본 성경은 정확무오하다.’ 하는 그것을 인정하는 교파가 많지를 못하고, 또 인정하는 교파 가운데서도 인정하는 개인은 많지를 못하고, 또 인정하는 개인은 다소 있다 할지라도 제가 신구약 성경은 정확무오한 것을 부정하면은 안 되는 줄 알지만 자기가 신구약 성경을 다 정확무오로 인정한다 할지라도 거게서 자기가 깨달은 교리와 신조의 정확무오하다는 그것을 잡지 못했으면 내나 신구약 성경 전경을 정확무오하다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나 꼭 같은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올바른 신앙 행위가 있을 리는 없는 것이고, 거기에 그 교리와 신조에 자기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자기 전부가 다 되어서 인정해지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또 행해지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그거는 뭐 이거는 필연성으로, 이거는 법적으로, 이거는 과학적으로, 이 세상법인 과학적으로 이거는 판정되는 일이라고 그렇게 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저 성경을 그대로 보고 줄줄 읽는 데에서 우리가 은혜되는 거 있고, 읽는 데에서 또 영감의 역사가 오는 거 있고, 이래 자꾸 읽고 또 그대로 내가 아는 대로 행하고 읽고 행함으로써, 읽고 네가 행할 때에 네 자체가 변화돼지고, 네 자체가 변화된 것만치 다시 또 정확하게 바른 것을 알게 되고, 바른 것을 알므로 말미암아 아는 그대로 네가 자유 생활 할 수 있고 그대로 아무것에게도 제재받지 안하고 방해받지 안하고 자유 생활 할 수 있다 하는 이 말씀을 하신 그대로 그래 나가면 우리가 되지만, 또 우리는 그렇게 자기 실천에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도 있는 동시에 또 먼저 다른 사람들이 연구해서 경험하고 체험한 그것을 우리가 받을 때에 우리는 가속도로 또 그 효력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모든 과학 발전이라는 그 모든 문화 발전이라는 그런 것이 다른 사람이 연구해서 경험하고 체험한 것을 그것을 자기 지식으로 받아들여 가지고서 인정할 때에, 자기는 그것을 처음부터 생각하려면 평생 해도 모를 그것을 하루 아침에 그런 것을 다 들어서 가속도로 이렇게 빨리 향상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세상인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거 자기가 성경 읽고 자연적으로 아는 대로 행하고 행하는 대로 변화되고 변화된 대로 이렇게 또 자기는 깨달음이 새로와지고 점점 이렇게 돼지는 이것으로만 하면 이것이 굉장한 세월이 걸리기 때문에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말하는 거 우리가 배우고 받아들여 가지고 그래 해서 다른 사람의 먼저 믿은 체험한 사람들의 그 모든 체험을 우리가 듣고 배워 가지고 가려 하는 것은 우리가 자기 발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른 타의 힘입어 가지고 가속도로 날아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지금 가속도로 가려고 하는, 정한 시간에 빠른 걸음을 걸어서 이 우리의 한정돼 있는 힘으로써 우리에게 한정돼 있는 우리 걸어갈 길을 다 걸어가려고 우리가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는, 지금 내가 이렇게 여러 말을 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정확무오한 것으로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 있다. 안 믿는 사람은 그것부터 믿고 난 다음이라야 뭐이 돼지지 그걸 믿지 안하고는 안 돼진다. 거게는 수많은 방해물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 많은 유혹을 가지고서 안 돼진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은 정확무오하다고 믿는 그런 교파가 많으냐? 또 그 믿는 교파 중에도 믿는 사람들이 많으냐?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신구약 성경은 정확무오라고 믿지마는 자기가 알아서 깨달을, 교리라면 자기가 깨달음이고 신조라면 자기가 믿는 것인데, 자기가 믿는 것이나 깨달음 그것을 내가 정확무오하게 가져야 되지 이거 뭐 이 사람은 이래 하고 저런 사람은 저래 하고 뭐 수십 종류로 말하고 있는데 수십 종류 가운데에 내가 정확무오한 것을 내가 가져야 되지,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을, 성경 말씀을 정확무오하지 않다, 신구약 성경 말씀은 틀린 것도 옳은 것 있다 하는 그것이나 자기가 하나의 자기가 지금 믿고 살려고 하는 당면한 교리와 신조 그것이 정확무오하냐? 뭐 정확무오하지 않다, 그거는 틀릴 수도 있고 이래도 저래도 관계 없다.

신구약 성경을 그래 보는 것은 크게 보는 것이고 실은 자기에게 해당된 교리와 신조를 정확무오하냐, 정확무오한 것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과 정확무오의 교리와 신조를 자기가 찾아 가질라고, 천인 만인이 전파하고 있는 신조와 교리는 천도 만도 넘은데 그 가운데 정확무오한 것은 하나뿐일 터이니까 하나뿐인 그것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이나, 신구약 성경은 정확무오한 것이 신구약 성경인데 성경은 번역 성경도 많고, 또 거게서 이치를 가지고 말해 놓은 성경도 많고, 예를 들어서 성경에 말해 놓은, 예화적으로 되어 있는 성경도 있고, 이해적으로 되어 있는 성경도 있고, 윤곽적으로 되어 있는 성경도 있고, 또 문법적으로 되어 가지고 있는 성경도 있고, 또 인간의 모든 심리적으로 되어 있는 성경, 뭐 성경이라 하는 거는 수많은 종류가 있기 때문에 이제 이것도 저것도 관계 없다 할 수가 없고 어쩌든지 정확무오한 그 성경을 우리가 찾아야 되지 그거 아니면 안 되겠다.

이래서 성경 가운데서 ‘이 성경은 이것은 내가 보는 대로 틀린 게 많다’ 이 여러 권 중에, 만일 백 종류가 있다고 하면 자기대로는 백 종류 가운데에서 자기가 다 혼자 다 할 게 아니라 모든 신앙 동지들이 ‘이것이 제일 정확무오한 번역이다’ 이라면 그걸 찾으려고 애를 쓰고 또 정확무오한 성경으로 찾은 그 제일 좋은 번역인데도 이 번역도 다른 모든 번역과 볼 때에 이 번역의 이 성구는 이거 번역이 잘못됐다, 이건 틀렸다.

이러면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정확무오한 원본에 가까운 그 성경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꼭 원본을 우리가 찾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원본에 가까운 성경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요와 꼭 같이, 성경 그 전체는 나무로 말하면 큰 둥치인 원둥치 뿌리라고 하겠고, 거게서 자기에게 해당된 교리와 신조는 잔뿌리라고 생각하겠는데 잔뿌리 거게서 모든 영양이나 모든 수분이 섭취돼 올라가서 위에 둥치가 사는 것이지 원둥치 뭐, 큰 정자나무도 뿌리는 가면은 뿌리가 이거 한 아름 돼. 한 아름 돼도 이거 끊어 봤자 거게서는 영양 하나도 못 만듭니다. 그거는 하나도 못 만들어요. 그거는 운반 역사만 하지 하나도 만들지는 못해. 위에서 내려오는 건 밑으로 운반해 주고 밑에서 올라오는 건 위로 운반해 주지, 운반 역사만 하지 그거는 만들어 내는 건 아니라 말이오.

만들어 내는 거는 눈에 보일까 말까 머리카락같은 가는 뿌리 그것이 실상은 만들어 내고 있다 말이오. 그 만들어 내는 것이 내게 실지로 내게 양식이 되고 효력 있는 것은 바로 내게 당면한 교리와 신조 그것이 그것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교리 신조 그것이 전 성경이 필요한 거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꼭 같은 교리 신조도 필요합니다.

자기가 있는 교리와 신조가 그 필요해서 중요성이나 신구약 전체가 중요성이나 꼭 같은 중요성을 가졌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있는 전체 그것도 삐뚤어졌으면 자연히 밑에 모든 게 삐뚤어지겠고 위에 거는 맞다 할지라도 밑에 것이 삐뚤어졌으면 위에 것 맞은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교리와 신조가 삐뚤어졌으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정확무오한 이 교리와 신조, 또 자기는 자기 속에 자기 뭐, 객관 속에는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주관이야 맞든지 말든지 내라는 내 주관에는 틀림 없고 정확무오한 성경으로 정확무오한 교리로 내 주관 속에는 이 교리와 신조를 완전히 믿고 정확무오한 것으로 믿고 달리 의심이나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그 정확무오한 교리와 신조를 자기가 가져야 되겠고, 또 정확무오한 이 교리와 신조는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자기의 생명이나 자기의 전 힘이나 노력이나 이런 것을 의심 없이 여게다 다 기울여서 다 할 수 있는 그런 정확무오한 그 교리와 신조를 찾으려고 애를 쓰고 찾아서 ‘요거다’ 이렇게 잡았을 때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모든 것이 기울인, 필연적으로, 자연적으로, 안 할라 해도 그 생활이 자연히 될 것이고 그 행동이 자연히 되지마는, 이것이 바로 되지 안한 데에는 행동한다는 것이 다 정확지 안하고 모두 다 자기에게 있는 이 정확무오한 성경에서 피동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있는 정확무오한 교리에서 피동되어 거게 복종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천태만상으로 시대를 따라서 환경을 따라서 변해져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교회들이 왜 이 지금 자꾸 부패해 나가고 그뭐 개혁되고 나서 얼마 있다 보면 엉뚱하게 아주 딴것이 돼 버리고 딴것이 돼 버리고 이렇게 돼지느냐? 이렇게 돼지는 것은 이거 정확무오한 이 정확성을 찾으려 하는 요 진실이라 하는 것이 완전히 깨져버리고 상실된 데서 요런 모든 사망은 다 나오고 있는 줄 압니다.

이래서, 우리는 물론 전 성경을 그저, 그러면 해석 안 하고 읽으면서 이렇게 행하고 거게서 자체 변화되는 거게서 또 자기는 바로 깨달아짐이 있고 또 바로 깨달아짐이 있으면 그거는 자유가 됩니다. 바로 깨달은 것은 절대 자유입니다.

아는 것과 행함이 하나라 하는 그 말이 우스운 소리 같지마는 아는 대로는 이 행함과 일치됩니다. 왜? 왜 일치되느냐? 우리에게는 생의 애착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생의 애착이라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생의 애착은 자기에게 힘을 두고는 죽을 데에서 빠져나오지 살려고 하지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힘은 생의 애착이라 하는 그 본능이 힘을 두고는 힘 있는 대로는 안 죽으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 본능이요 또 거기서 살려고 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이것이 생의 애착의 본능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옳다고 아는 그것은, 알면은, 옳으면 옳은 것은 성공이요 생명이요 승리요 삐뚤어진 것은 사망이요 실패요 다 패전이기 때문에 생의 본능이라는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대로 가고 맙니다. 그대로 가고야 맙니다.

우리가 가진 교리와 신조나 그런 것이 이 정확무오성에 도달하지 안하고 이렇게 진실되게 자기가 알지 안하는 거게서 이렇딱 저렇딱 하는 것이지 진실성에 도달해서 정확무오를 알았다면 그 아는 지식대로는 행하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명이 끊어지는 데까지는 틀리지 안하려고 애를 쓰고 또 옳으려고 애를 쓰는 것은, 왜? 그것이 자기의 생명이요 평강이요 승리요 성공이기 때문에 이 생의 본능이라는 것이 그라고 있습니다. 생의 애착이라는 것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옳은 것이 생명이요 삐뚤어진 거는 사망인 줄 이래 알기 때문에 참 아는 것과 행함이 일치로 돼 나가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이 뭐 아는 거와 행함이라는 것은 참 뭐 천태만상으로 막 변화되고 천변 만변도 더 합니다. 얼마든지 변해집니다. 아무 정확성이라는 그게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지식이 정확성이 없으면 우리 행동에 정확성이 없고, 우리 지식과 행동에 정확성이 없으면 자기의 이루어진 구원에 정확성이 없고, 이루어진 그 구원에 정확성이 없으면 그 인품이라는 그 인품에 정확성이라 하는 것이 있을 수는 절대 없는 것입니다.

정확성 없는 그것이, 정확성 없는 그것이 힘이 있을 리는 없는 것입니다. 그거는 얼마든지 변해 나갈 수 있는 것이지 무엇이 하나, 하나가 돼 있겠습니까? 그러고 또, 자기대로에 아는 그 정확성이 있을 때에는 거게 모든 것이 다 바쳐지는 것입니다. 마음도 생명도 힘도 뜻도 다 바쳐지는 것이 뭐 별스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그거는 필연적으로 바쳐지는 것이지 억지로 바치는 게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는 전부 필연적으로 되는 이 필연성의 것이 이것이 진리지 억지로 강제로 자기가 뭣을 거슬려서 해 나가려 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전부 필연성이라.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자기는 필연적으로 하고 또 그것이 제일 좋고 수월하고 기쁘고 즐거워서 모든 것이 되어지는 것이 이 신앙 행위인 것입니다.

이제 이 말 하는 것은 어데든지 무슨 교리든지 우리 신구약 성경에 무엇이든지 하나를 거석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체험하고 경험해 가지고 수많은, 평생을 겪어 가지고 어떤 하나 둘을 연구해 냈으면 나는 그것을 나도 겪으려 하면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그걸 알려 했으면 평생 해 알 터인데 다른 사람의 평생 안 것을 그것을 내가 거게다가 동잇이를 해 가지고서 다른 사람 평생 연구한 거게다가 나는 동잇이 하니까 나는 그 한 평생은 안 살아도 산 거와 같이 동잇이 해 놓은 그것으로서 직접 연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런 것이 얼마나 가속도로 가는 것이니까 중요하기는 중요한데 이게 틀리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얼마나 정확하게 받아들여야 되겠느냐? 이러기 때문에 아무나따나 받아들일 게 아니라 자기대로는 더 심사해 심사할 것이 없고 자기 주관에서 충만하게 ‘이거다’ 정확무오성으로 자기 주관에서 인정되는 그것이라야 자기가 받아들여야 되겠고 또 자기의 모든 소유라도 능히 다 바칠 수 있을 만치 정확무오성이라야 자기 교리로 받아들이지,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하니까 그것도 내 상식적으로 받아 들여야되겠다. 그것도 내가 또 이런 모든 알고 있는 지식성으로 받아 들여야되겠다.’ 이런 자리 가 가지고서는 이런 교리 말하고 저런 자리 가 가지고서는 저런 교리 말하고, 이것이, 자기의 교리와 신조가 자기의 바로 생명인 것, 자기의 생명이요 이것이 생명의 것을 조성해 내는 것, 모든 자기의, 객관성으로서, 우리의 영을 살린 그 생명은 객관성으로 살렸지만 건설구원이라 하는 것은 기본구원을 얻어 가지고 그 구원을 힘입어서 자기 주관을 통해 가지고, 영도 마음이라는 이 육의 주관을 통해 가지고 영도 일하고 또 성령도 이 주관을 통해 가지고 일하기 때문에 자기 주관에서 이것을 정확무오하다고 인정되는 그것을 자기가 받아들여야만 자기 구원이 이루어지지 그게 아니면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데, 그런 것을 다른 사람이 연구해 놓은 것을 받아들여서 동잇이 하는 데에도 아무나따나 뭐 이렇다 저렇다 받아들여 가지고 ‘이 자리에서는 이것을 증거해야 인기가 가겠다, 저 자리에서는 저걸 증거해야 인기가 되겠다. 이 사람에게는 이래야 되겠다, 저래야 되겠다.’ 이래야 되겠다 저래야 되겠다가 아니라, 네가, 네가, 네 소유와 몸과 생명과 네 주관 전부가 다 기울어진 정확무오한 교리가 있나? 네가 깨달음이 있나? 믿는 게 있나? 그거 없으면 너는 죽은 자다. 필요가 없어.

우리가 이것을 예사로이 뭐 아무나따나 받아들일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을 참 내 영원이 여기에 있는데 이 영원이, 내 영원의 좌우 흥망성쇠가 여게 있는데 이것을 돈의 가치만치도 여기지 안하고 사업의 가치만치 여기지도 안하고 썩을 죽을 생명의 가치만치도 여기지 안하는 그런 차원에서 어떻게 그게 모든 걸 능가할 수 있는 그런 역사가 거게서 발생되고 생산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거 진실을 우리가 가져야 되겠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가서 그만 중단하겠는데 그저 이래도 여러분들이 이만하면 눈은 뜨였고 이만하면 한 껍데기를 일으켜서 벗겨내게 됐으니까 이거 하나 가지고 자꾸 벗겨 나가면 얼마든지 벗겨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거 하나에서 자기가 좁은 한, 좁은 발자국이라도, 넓은 길을, 대로를 만들지 못했다 할지라도 자기 혼자 한 자국 한 자국 걸어서 천 메타를 걸어갔으면 천 메타를 네가 걸어갔으니까 천 메타 올라갔으니까 천 메타에서 네가 자꾸 봐라, 동서남북을 이래 보면 천 메타서 보일 데는 다 볼 수 있다.

요렇게 한 깨달음이라도 그 깨달음을 향상시켜서 자기가 요 깨달음에 한 촛점이라도, 거게 대해서 한 바늘 끄떠리만한 것이라도 자기가 잡아서 가졌으면 그것을 양보하지 안하고 거게서 자꾸 보니까 또 보이고 또 보이고, 천 메타 올라간 사람이 천 메타에서 이래 보이고 과거에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여기만 보이느냐? 거기 있으면 아래로 봐도 보이고 많이 보인다. 요래 보니까 또 보인다.

요래 보니까 또 딴거 보인다. 천 메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런 것만 해도 뭐 깜깜한 어두운 데다가 이 조금만한 봉창이라도 봉창을 하나 만들어 놨으니까 그 봉창 햇빛을 통해서 자꾸 차차 차차 걸어가면 얼마든지 갈 수가 있을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신구약 성경만 정확무오로 알아서 되는 게 아니고 신구약 성경을 정확무오로 아는 동시에 자기의 교리와 신조를 정확무오의 교리와 신조로 알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신구약 성경만 정확무오로 이렇게 자기가 아는, 이게 ‘이 성경은 정확무오다’ 이것을 가지지 못해서 낭파되는 것이나 자기가 가진 교리와 신조를 정확무오로 자기가 가지지 못한 그것이나 다 낭파요 다 실패입니다.

그러면 이거 신구약 성경은 양이 크고 이거는 적은 것뿐이지마는 큰 거는 큰 대로의 필요하지마는 자기에게 직접 당면에 필요한 것은 적은 것이 더 필요하고 거게서 모든 것을 다 자기에게 필요한 생명과 구원은 조성해 내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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