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연구하는 법-목회자

 

1986. 7. 28. 월새벽

 

본문:요한1서 2장 15절∼17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니느라

 

이제 오늘 아침에 읽는 성경도 여러분들이 읽어 보면 거기에 단어 모르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단어는 다 아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실 때에 기록해 주시기 전에 구약을 하나님이 기록하시려고 히브리어를 일찍부터 내 가지고 발전을 시켰고 또 그 다음에 신약 시대에는 헬라어를 하나님이 헬라 방언을 내 가지고서 일찍 발전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히브리어가 제일 널리 보급이 됐고 또 그 다음에는 헬라어가 널리 보급 됐습니다.

하나님이 이 계시 말씀을 기록할라고 미리부터 예비를 해 놓으셨는데 이 예비해 놓은 방언을, 말하자면 그 지방어라 말이오. 이 말을 악령들이 이 히브리 말을 갖다가 이런 종교 저런 종교 이런 사상 저런 사상 이런 주의 저런 주의 모든 데에다가 끌어다가 이용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 말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는 해 놨지마는 속에 악령은 그걸 알기 때문에 어찌 됐든간에 이 히브리어를 가지고서 구약을 하나님이 인제 기록할 것이고 헬라어를 가지고 신약을 기록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 어학을 저희들이 미혹 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사용을 해서 복잡하게 만들어야 되겠다 해 가지고서 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끌어다가 이런 철학에도 쓰고 저런 모든 종교에도 불교에도 쓰고 또 이런 무슨 사상에도 쓰고 또 정치에도 쓰고 뭐 이렇게 도덕에도 쓰고 이 말을 갖다 썼습니다. 쓰는 것은 다 하나님이 내놓은 말이기 때문에 이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저희들도 갖다가 사용하는 것은 좋습니다.

이랬는데, 그 뒤에 하나님께서 구약을 히브리어로, 구약 그 원본 말이오. 원어라고 하면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기록한 그 말을 가리켜서 원어라고 이렇게 말하고 원어 성경이라 하면은 그 말로 기록한 성경이라 이러고 원본이라고 하면은 그 성경이 한 권뿐입니다. 한 권뿐인 그거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한 권 그 한 권이 원본인데 원본을 사람들이 그때는 이 인쇄술이 나오지 안해서 사람들이 낱낱이 붓으로 베꼈습니다.

배꼈는데, 원본을 보고 한 권 베끼니까 사본이 한 권 생겼고 열 권 베끼니까 사본이 열 권 생겼고 그래 사본은 수십 권도 될 수 있고 수백 권도 될 수 있지마는 원본은 한 권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지는 변해도 획 하나도 변하지 안하고 가감 못한다, 정확 무오하다 하는 그것은 원본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베낀 사본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실수하기 쉽기 때문에 아무리 성령의 은혜를 받아 가지고 해도 사람들이 가다가 꼭 계속하지 못하고 실족해서 잘못된 것들이 있습니다.

이래서, 사본이 여러 종류가 있는데, 여러 사람이 베낀 게 있다 말이오. 있는데 이런 거 저런 거 다 생각하다가 그총중에 제일 좋은 것을 우리 장로교에서는 택해 가지고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 구약 성경을 보고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 연구하는 그런 마귀적인 복술을 쓰지 말고 성령이 가르친 대로 성경 연구를 하면 성경이 잘 알아지는 것인데 성경을 연구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대로 하지 안하고 저거들의 꾀를 써 가지고 요래 하고 그 별별 귀신이 들어 가지고서 조화를 많이 부렸습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이떻게 말했느냐 하면은 성경에는 읽든지 듣든지 한 그 말씀을 자기 속에 거하게 하면, 자기 속에 거하게 하면 그 사람은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게 되고 또 기름 부음이 옳고 바른 것을 가르쳐 준다.

이러니까 이 말씀을 자기가 듣고 버리지 안하고 기억해서 자기 마음 속에 기억하고 또 요 말씀대로 살라고 애를 쓰고 이 말씀에 틀리지 안하도록 맞게 살라고 애를 씁니다. 애쓰는 그 마음을 가리켜서 이름을 뭐라고 했습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신앙 양심이라 이랍니다, 신앙 양심.

양심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불교인의 양심은 따로 있고 신앙 양심 따로 있고 유교인의 양심 따로 있고 양심이 따로 있습니다. 왜? 양심이라 하는 것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지식대로 바로 옳게 할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양심이라 그거요.

그러니까, 불교인은 불교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불경대로 바로 할라고 유교는 유교의 그 교훈이 있기 때문에 유교의 교훈대로 바로 할라고 철학자는 그 철학에 대한 지식이 있기 때문에 철학 지식에 맞춰서 바로 할라고 애를 쓰기 때문에 지식이 여러 종류인 것만치 양심도 여러 종류가 됐다 그거요.

그런데, 그러면 기독자들은 신앙 양심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약 성경 줬으니 구약 성경을 법규로 삼아 가지고 구약 성경대로 어떻게 하면은 위법되지 않게 사느냐? 또 신약 성경이 그 뒤에 나왔기 때문에 신약 성경과 구약 성경대로 거게 맞도록 살라고 하면은 어떻게 하면은 맞도록 살 수가 있느냐? 요렇게 힘을 쓰고 애쓰는 그 마음을 가리켜서 신앙 양심이라 이랍니다. 기독자의 양심이라 요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법은 자기가 이미 들은 바의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안하고 그 말씀을 자기가 기억할 수 있는 대로 기억하고, 한목 기억하고 있지요? 우리 머리 속에는 컴퓨터가 천억이나 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뭐 천억 단어라도 한번 들으면 그것이 나가지 안하고 컴퓨터에 딱 박혀 가지고 있다 말이오. 박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많은 성경 단어지마는서도 기억할라면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한목 기억은 안 되지마는서도.

그러면, 때를 때라서 현실 만날 때에 ‘요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꾸 이래 생각하면 이 두뇌 속에 그 컴퓨터에 거게 대한 것을 언제 읽었고 들어서 한 그 말씀이 기록돼 있기 때문에 그게 쏙 튀어나와 가지고서 ‘요럴 때는 요래야 된다, 저럴 때는 저래야 된다.’ 요것이 생각난다 그말이오. 그래서 유다서에 보면은 너희들이 다 알고 있으나 생각나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암만 기억해도 현실을 당했을 때에 생각이 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기억하고 요 말씀대로 할라고 애를 쓰면은 생각이 나서 그대로 행하고 요라면은 요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법이라 그거요. 그러니까 이거는 뭐 무식해도 되고 아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성경 연구법이 어떤 것인고 하니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또 이렇게 말씀했다 말이오. 그 말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이미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주님이 말씀하신 그 교훈을 듣고 버리지 안하고, 그 교훈을 듣고 그 교훈대로 행동하게 되면 그 교훈대로 살게 되면 산 것만치 자신이, 참 예수님의 제자 된다 말은 자신이 성화가 됩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한 것만치 자신이 성화가 돼요.

성화가 되고 나면은 이미 그 말씀대로 실행했지마는서도 한번 하고 보면은 처음에 그 말씀을 보고 실행한 그 말씀이 한번 실행하면 자신이 거룩하게 성화가 되기 때문에 성화되고 나니까 성화된 것만치 다시 깨달아집니다.

이래서, 한 성구라도 깨닫는 것이 천층 만층입니다. 한번 실행한 사람은 그만치 성화됐기 때문에 그만치 더 깨닫고 백 번 실행한 사람은 백 번 실행한 것만치 그만치 많이 성화가 됐기 때문에 더 많이 깨닫고 그래서 자꾸 들은 대로 실행하면 자신이 그 말씀으로 인해서 거룩하게 변화가 되어지고 변화가 되면 변화가 된 것만치 깨달음이 달라지고, 그렇지 않습니까? 한 자리에서 같은 말을 들어도 사람됨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도 그 통계가 같습니다. ‘성현이라야 능지 성현이라’ 성현이 돼야 성현이 어떤 사람인 줄 알지, 아이 애비가 돼야 아이 애비의 심정을 알지, 그래서 ‘교자 양자부라’ 자식을 가르치고 난 다음에 이제 비로소 애비의 마음을 안다 그렇게 말했어, 사람은.

이러니까, 성경 연구를 아는 대로 실행하면 자신이 변화되고 변화되면 알아지는 이것이 정식 방편인데 이것은 하지 안하고 책상 위에 앉아 가지고서 자꾸 거게서만 연구하면서 ‘내가 연구해 가지고 선생노릇 할란다’ 대개 책상 위에서 연구한는 사람들은 선생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합니다.

선생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진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 그말이오. 이 진리는 이 세상 학문과같이 사람들에게 이용당할 지식이 아니고 이 지식은 진리기 때문에 없는 가운데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실제로 시공을 한, 실지 시공을 한 그 능력이 진리라 그말이오. 진리인데 이 진리를 가지고서, 진리가 우리 사람에게 앗기지를 안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진리를 들을 때에, 이 진리에게 복종해서 진리대로 순종해서 나는 진리대로 살아서 진리대로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는 자에게는 이 진리가 가르쳐 주시고 살지는 안하고 내가 이 진리를 배워 가지고서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서 선생노릇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지를 않는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책상 위에 앉아서 연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탈선이 되는고 하니 이렇게 탈선이 돼서 됩니다. 자, 이 성경에 기록한 이 말을, 그 말을 그 단어를, 말해 놓은 단어 우리가 보통말로 알면 됩니다. 요거 단단히, 이거 아주 지금 뭐 이게 안 나타난 거, 이게 아주 쉬운 말 같지마는서도 박사들이 이걸 모릅니다.

쉬운 말 같지마는 박사들이 이거 몰라. 이 말 하면은 박사들이 막 대립이 되지마는서도 마지막에는 박사가 깨지고 만다 그말이오. 옳은 말이기 때문에.

성경 기록하기를 아주 쉬운 말로 기록했기 때문에 성경 단어가 어려워서 성경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말은 다 누구든지 알 수 있는 말을 해 놨는데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하니 이 말 속에, 성경 말씀 속에 그 속에 무슨 목적으로 그 말 했으며 또 그 말씀을 어떻게 하라고 한 것인가 하는 이것은 성령님만이 가르쳐 주지 다른 이는 가르쳐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인데, 이것을 실행하는, 순서 방법대로, 성경 방법대로 성경 연구하지 안 하는 사람들이 책상 위에 앉아서만 연구하니까 구약 연구를 하는 데에는 ‘히브리어 이거는 이거’ 말을 모르는 게 아니라. 등신이라. 말을 모르는 게 아니라 이 말은 다 아는 말인데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느냐?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이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이 무엇인가? 이것을 알라고 애를 쓰지 안하고, 자꾸 말은 알고 있으면서 ‘속에 이 뜻을 그라는 데는 그라면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용했는가 보자’ 이래 가지고서 그 단어를 ‘불교에서는 이 단어를 어떻게 사용했나?’ 저도 뻔히 아는 단어인데, 아는 단어면 다 됐어. 아든 단어면 다 됐는데 ‘불교에서는 어떻게 이 단어를 사용했나, 유교에서는 어떻게 사용했나, 철학자는 어떻게 사용했나, 문학자는 어떻게 사용했느냐, 정치가들은 어떻게 사용했느냐, 어떤 유명한 사람은 어떻게 사용했느냐?’ 그 사람들이 사용한 그것을 연구해 가지고서 ‘이 사람들이 이래 사용했기 때문에 이 단어의 뜻은 이런 것이다’ 이래 가지고서 가르치니까 불교에서 이용한 단어를 연구해 가지고서 가르치니까 불교에서 그 단어를 불교에 사용했으니까 그 단어는 불교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단어를 그 사람들은 해석하기를 불교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말이오.

그러니까, 이걸 보고 하니까 불교적인 예수교를 만들고, 철학적인 예수교를 만들고, 문학적인 예수교를 만들고, 정치적인 예수교를 만들고, 유교적인 예수교를 만들고, 이런 종교 모든 저런 종교적인 예수교를 만들고 이래 만들어 놓으니까 중세대에 이걸 깨닫지 못하고 철학을 가 가지고 철학이 높은 학문이라고 해서 철학적으로 이 성경을 해석했다 말이오. 철학에 가 가지고서 그 사람들이 사용한 단어를 가지고서 이 성경 해석하니까 그 성경 해석이 뭣대로 됩니까? 철학적으로 될수밖에 없다 말이오. 이거 다른 길이 갈 길이 없어.

이래 가지고 기독교가 제일 미혹을 많이 받은 게 뭐이냐 하면은 기독교 철학주의가 있었습니다. 이래서 지금도 그 테두리 벗지 못하고, 내가 꽃마을에 가서 어떤 학생을 만났는데 막 이래 뻐기고 있어. 버르징이가 그만 그 항상 거게서는 ○○신학교에서는 우리가 제일이다 이래 뻐기고 이라니까 어데 다니느냐 하니까 ○○신학교에 다녀. 뭐하러 다니노 이라니까 앞으로 교역자 할라고, 그라면 지금 뭘 내가 그거, 내가 보니까 벌써 저게 지금 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뭐 그라면 목회할라고 하면은 신학에 가 가지고서 신과대학에 다니면 무슨 과를 공부하노?’ ‘철학과를 공부합니다.’ ‘왜 철학과를 해야 목회를 하는가?' 이러니까 `예, 철학과가 목회하는 데 제일 유익하기 때문에 철학과 합니다.’ 그러니까 목회할라면 철학을 해야 된다 이래 가지고 다 철학합니다.

철학과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이걸 몰라. 기독교는 하나님이 위에서 계시해 줄 때에 받아 가지고서 깨닫는 계시 종교고 철학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연구해 가지고 자기 속에 주관을 연구해 가지고 주관이 자꾸 발달돼 나가는 것이라.

기독교는 객관의 역사이고 철학은 자기 주관 역사입니다. 정반대라.

그걸 내가 잠깐 좀 해석을 해 줬어. 이러니까 네가 목회할라면 이래 목회해 가지고 목회하면은 사람만 죽이는 뒤에 스승된 자는 받을 심판이 많으리라 야고보서에 말씀하지 안했느냐? 네가 심판 많을 것이고 네가 그런 것 다 치워 버리고 목회자가 될라면 평신도 신앙 생활을 네가 성경 아는 대로 꼬박꼬박 실행을 하면은 평신도로서 이제 제일 잘 믿는 사람 된다. 그러니까 평신도 신앙 졸업하고 나면은 그 다음에 그만 목회자 된다.

목회자가 뭐이냐 하면은 평신도들을 성경대로 살도록 하는 그것이 목회자니까 네가 성경대로 사는 그거 졸업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이렇게 성경대로 살면 된다. 자꾸 이렇게 만들어서 목회에 가 가지고서 교인들을 성경대로 사는 사람만 만들면은 너는 일등 목회자가 되고 대부흥이 되고 하나님이 너와 동행해 주실 것이다.

이렇지, 네가 철학은 기독교 정반대인데 그것도 모르고 철학을 공부해 가지고 목회할라고 있어? 누가 그래 지도하더노 내가 이래 놨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그래 처음에는 떠들더니만 나중에 이래 가지고서 그뒤에 그만 다시는 그 집에 안 와요, 그만. 혹 나 만날까 싶어서. 이렇다 그거요.

이런데, 오늘 아침에 본 것도 쉽지 안해요. 15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 말 모르는 말 있습니까, 여게? 모르는 단어 있소, 여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 단어 모르는 단어 있습니까? 혹 모르는 단어 있어요? 또,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이니라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말은 다 아는 말인데, 아는 말인데 그 속에 뜻이 뭐인지 그게 문제라 말이오. 속에 뜻이 뭐인지 그거 지금 문제라. 그 속에 뜻이 뭐인가? 그러면, 이 뜻을 지금 모두 주석들이 있으니까 여러분들이 주석을 가서 찾아 보면은 뜻이 뭐인지 여게서 배우는 거와 같은지 안 같은지 그걸 좀 알 수 있을 것이라 말이오.

여게 여러분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이 세상에 있는 것 뭐 정치 과학 문화 물질 이 모든 자연 만물 이 모든 것은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 이래서 세상이 주는 사랑이오. 알겠습니까? 세상이 주는 사랑이라.

이 과학이 뭐이냐? 세상이 주는 사랑이오. 철학이 뭐이냐? 세상 인간들이 주는 사랑이오. 또 이거 물질이 뭐입니까? 세상이 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주셨지마는 이것은 아담 해와가 범죄한 이후에 마귀의 것이 됐어.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세상 임금이 오겠다 하는 것은 세상 임금은 누구를 말했느냐 하면은 마귀를 가리켜서 세상 임금이라 했어.

아담이 처음에는 임금이지요. 아담이 임금인데 아담하고 배암하고 둘이 씨름해 가지고서 아담이 꽁 넘어가 버렸다 그말이오. 아담이 그만, 해와가 마귀에게 꼭 꾀여 가지고서 미혹을 받아서 완전히, 해와가 배암에게 미혹받아 가지고서 배암은 이겼고 해와는 졌다 말이오. 이 해와만 졌으면 좋은데 요 간교한 그 해와에게 요 아담 요게 꽁 넘어가 버렸다 말이오. 꽁 넘어가 버렸어.

남자들이 여자가 생긋생긋 웃고 요래 하면 안 넘어가는 남자 없어. 여자는 아주 여자가 제일 큰 죄를 조심할 건 뭐이냐 하면은 남자를 어짜든지 내가 미혹 주지 않겠다. 언제든지 남자에게 옳고 바르고 참된 길을 내가 협조하지 미혹 주지 않겠다.

남자 미혹을 주면은 그까짓 거는 똥같이 생각하고 딱 요래서 거석하고 어찌 됐든간에 옳고 바른 걸로만 딱 요렇게 나가게 되면은 점령이 되는데 그렇지 안하고 그만 여자의 미혹에 빠지면 안 돼. 남자는 여자의 미혹에 안 빠지도록 노력해야 되고 또 여자는 남자를 미혹하지 안하도록 노력해야 되고, 내가 어떤 사람 만나 가지고, 저거 남편은 죽고 없는데 ‘수고한다. 그렇게 사느라고 고생한다.’ 그런데 내가 말하기를 ‘너 분은 뭐할라고 발랐고 구찌베니는 뭐할라고 지금 발랐고 뭐 짜다라 굽고 지지기는 뭐할라고 지졌노? 너는 남편이 없기 때문에 수수하게 하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이 저거 남편 없으니까 지금 되겠다 싶어서 욕심을 낼까 싶어서 네가 수수하게 다녀야지 뭐 짜다라 그렇게 하는 거는 누구 반하라고 그래?’ 남편 있는 사람은 그 남편이 다른 데 반하지 안하고 저거 마누라에게 혹하도록 그렇게 만든는 그게 참 좋은 일이라. 이렇지마는, 남자들은 미혹 안 받도록 하고 여자들은 미혹 안 주도록 노력하고,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여자는 남자를 사모해야, 되고 자기 남편을 사모해야 되고ㅡ이라면 남반 좋아할새ㅡ아내는 남편을 사모해야 되고, 남편은 어째? 남편은 아내를 어째야 됩니까? 자, 남자노릇 할란가 보자. 해 봐. 어째야 됩니까? 어째야 돼? 이거 다 모두, 어째야 돼요? 남자는 아내를 어째야 돼요? 그래, 다스려야 돼. 다스려야 돼. 다스려야 된다는 말은 지배를 하고 지도를 해야 된다는 말이오.

지배하고 지도하는데 어짜든지 어떤 남자한테 내가 말 들어 보니까 요새 그말 들으니까 이거는 남편이라 하는 게 순똥덩이 같은 행동하고서 마귀노릇만 자꾸 하면서도 그래도 아내를 복종하랍니다. 마귀노릇한 남편에게는 절대 복종하면 안 됩니다. 죽어도 복종 안 해야 돼. 그게 순교라.

혹 겉어머리로는 복종할 수 있어. 겉으로는 작전상 복종하는 척 해 가지고서 이거 잘 유도해서 바로 가도록 하기 위해서 하지마는서도 삐뚤어진 데 거기 뚜드려 맞지 않기 위해서 뭐 이혼한다 해서 복종하는 건 못써. 끝까지 복종하면 다 죽어 버려.

언제든지, 다스리라 그말은, 같은 머리면 누가 다스립니까? 둘이 싸웁니다.

다스리는 것은 머리가 나아야 머리 못한 사람을 다스릴 수가 있소. 이러니까, 남편과 아내의 부부에는 살림을 살라고 하면은 가정살이 할라 하면 뭐 범사가 사건들이니까 이 사건에 대해서 물질에 대해서 거게 대해서 판단이 나와야 될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남편은 요렇게 합시다 아내에게 말해서 그거는 딱 정확히 점수를 매기면은 오십 점 또 아내는 요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한 아내 의견은 육십 점, 그라면 누가 지배를 받아야 됩니까? 남편이 받아야 돼요 아내가 받아야 돼요? 남편이 받아야 돼.

‘내가 남자인데, 남자인데.’ 네까짓 게 남자라도 그까짓 거로 남자노릇 하면 가정 다 망친다. 옳은 것은 진리인데, 옳은 것은 진리인데 네가 크냐 진리가 크냐? 남자가 크요 진리가 크요? 진리가 크요.

이러니까 남자는 있다가서, 가만히 들으니 내가 말하는 거는 오십 점밖에 안 되고 우리 아내가 말한 것은 육십 점이 되니까 저 아내가 나보다 낫게 말했으니 ‘이거 어느 게 좋습니까?’ 이라는 날이면 제것이 좋다고 세우면 바보되고, 제것이 좋다고 세우면 바보되고 그게 좋습니다 하는 날이면 아내에게 지배를 받아야 되겠고 그라면 그때 막 두 주먹을 거머쥐고 막 땀이 바짝바짝하는 거라.

‘주여, 내가 지금 아내에게 지배를 받게 됐는데 주님이 아내를 다스리라 했는데 지배를 받게 돼 놨으니 이거 어찌 됩니까? 지금 내가 대답을 못 하겠습니다.’ 이라면 말 안 하고 ‘으음' 이래 가지고 있으며, 이래 가지고 꿍 이래 가지고 있으면 그 뭣이 거석한 척 하고서 이래 가지고 있지만 속으로는 막 콩이 튑니다.

이래 가지고 떡 이래 가지고 말해 보니까 칠십 점짜리 말해 놨다, 칠십 점짜리 하나 발견했어.

그라고 난 다음에는 떡 있다 말하기를 ‘그라면 좋겠습니까?’ `아까 당신이 이래 말했는데 그보다는 이게 어떻습니까?’ 이래 떡 말하거든. ‘잘 말했소. 내가 말한 것보다 그게 훨씬 낫소. 그런데, 혹 이래 한번 생각해 보지.’ ‘어떻게요?’ 슬그머니 이렇게 칠십 점짜리를 슬그머니 내 보인다 말이오. 내 보이니까 아내가 있다 보고서 ‘아이구 그게 옳습니다.’ `자기가 말한 그것보다도 이게 나을까요?’ ‘아이구 그게 훨씬 낫습니다.' 그때사 비로소 남편 위치를 가지는 거라. 알겠소? 남자들 알아요, 이거? 이래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만일 그 당장에 좋은 것이 나오지 안하거들랑은 어쨌든지 그 아내가 백 점짜리는 아닐 터이니까 더 좋은 게 있을 거라 말이오. 이러니까 떡 그래 놓고 ‘좀 더 생각해 봐.’ 저는 떡 잘 아는 척 하고서 `좀 더 생각해 봐.' 이렇게 떡 말일랑 좀 더 생각해 봐 이래 놓고 난 다음에는 저는 뭐 그 이상 알지도 못하는데. ‘좀 더 생각해 봐.’ 이라고 나서는 그만 보따리 싸 가지고 산으로 갑니다. 가 가지고 죽자껏 하나님께 막 기도합니다. ‘주여, 내 심령이 너두워서 지금 아내는 칠십 점짜리 말했고 나는 육십 점짜리 말했으니까 이래 가지고 되겠습니까? 그보다 더 좋은 게 없습니까?’ 자꾸 이래 거기 대해서 묻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가르쳐 주지. 요거는 그보다 나은 팔십 점짜리다.’ 요거 깨달아. ‘예, 됐습니다.' 이제는 떡 내려옵니다, 기도하고 척 내려와서. 그거 물으러 갔지요, 주님 앞에.

물어 와 가지고 떡 내려와서 그 아내한테 떡, ‘그 아직도 다른 생각 없어요? 그만 우리 그렇게 할까요?’ 이라니까 하도 배짱을 하고 우뚜룸하니까 뭐 좋은 것 있어, ‘아이 뭐 내가 그리 의견만 낸 것뿐인데 뭐 더 좋은 게 있으면 말을 해 줘요.’ ‘그거 좋으면 뭐 그대로 하지요.’ ‘말씀하이소. 그라면.' `그래? 혹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떡 하면서 팔십 점짜리를 슬그머니 내놓는다 말이오.

슬그머니 내놓으면 아내가 보고 ‘야, 옳습니다. 우리 남편이 정말로 천하 제일이다. 이 보니까 그 의견이 탁월하구먼. 아주 지도하는 것이 탁월해. 사리 판단과 가치 평가가 탁월하구먼. 예,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믿고 든든히 살고 안심하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살고 평가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데 주먹이 크니까, ‘안 되면 내가 주먹 달라든다’ 이라며 주먹으로 제 남자가 힘이 세다고 그라거들랑, 그런 남자는 저 뭐꼬? 방망이 가지고 그 가슴을 꾹 찔러 버리면 좋을 것이지마는 그래 하지를 말아요. 속으로 말이지 ‘이 자식 네가 남자라고 주먹 크다고 하느냐, 등신 같은 게? 내 말이 옳으나 네 말이 옳으나 한번 생각해 봐.’ 이래도 아주 말도 안하고 입을 딱 닫고 있어야 돼. 가만히 이래 가지고, 어떤 주례자가 떡 주례 하기를 그래 하더랍니다. 나는렇게 주례하지는 안했는데.

세 가지 뭐 병신이 돼야 된다고. 시집가거든 세 가지 병신이 돼야 됩니다. 첫째는 벙어리돼야 되고 또 뭐 소경돼야 되고, 또 하나는 뭐라 하더라? 귀머거리돼야 되고 그래 세 가지 병신돼야 된다 그 좋은 말 했어.

어짜든지 그래 가지고 사람은 평가적으로 살아야 돼요. 암만 부부간이라도 가족이라도 이리저리 말해서 보자 평가해 보자 어느 것이 낫노? 나은 거 요게 낫다. 평가적으로 나은 걸 따라가야 되고 비판적으로 옳은 걸 따라가야 되지.

이 말씀은 이런데, 이거 뭐 잠깐 하겠소. 그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마귀가 승리했기 때문에 다 세상이 주는 거요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거짓말을 하든지 사기 협잡을 하든지 돈 위주로 살아 돈이 제일이다. 돈이 유전이면 사귀신이요 황금 만능이다. 돈이 제일이다. 이래 돈을 이래 알고 돈에다가 자꾸 욕심해서 돈을 사랑하도록 하는, 돈을 사랑하게 하는 이 돈을 사랑하는 사랑은 이 돈은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세상 사랑입니까? 세상이 주는 사랑입니까 하나님이 주는 사랑입니까? 세상이 주는 사랑이라.

요래 말하면 여러분들이 알지마는서도 요 성구를 아버지의 사랑과 세상 사랑이라 하는 게 뭐인지 요거 사랑을 바로 말해 놓은 주석이 아마 뭐 수십 권 봐도, 있기야 있겠지마는서도 다 그렇게 바로 돼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다.

여게 사랑을 말하는 것은 세상 사랑은 세상이 주는 것들 세상에 속한 것들은 세상이 주는 사랑이고 또 하나님께 속한 것들은 하나님 주는 사랑이라. 어제 깨어 있는 사람 성공 다섯 가지 말했는데 그 다섯 가지는 세상이 주는 사랑입니까 아버지가 주는 사랑입니까? 아버지가 사랑으로 내게 주는 그것이라 말이오.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 뭉텅이가 내게 왔어. 사랑의 선물이라.

알겠소? 그러면, 아버지가 저 시장에 갔다 오다가 어데 여행 갔다 오다가서 좋은 무슨 만년필 하나 사다 줬어. 사랑함으로 사다 줬습니다. 그러면 만년필 사다 준 그것은 누구의 사랑, 누구의 사랑이 내게 왔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의 선물이라 말이오.

아버지의 사랑의 선물인데 아버지가 사랑함으로 나에게 만년필 사다 줬기 때문에 그 만년필은 아버지의 사랑이라. 아버지가 사랑으로 나 줬어. 아버지의 사랑인데 그러면 그 사랑의 선물입니까 그것이 아버지의 사랑의 자체입니까 그래 말해 놓으면 어째 됩니까? 선물입니까 아버지의 사랑의 자체입니까? 선물이지 자체는 아니라 그말이오. 요걸 구별해요. 그말 하면 아버지의 사랑이지. ‘이 만년필 뭐냐?’ ‘아버지가 나를 사랑해서 줬어요.’ 이런데, 또 있다가 ‘이 만년필이 뭐꼬?’ `아버지의 사랑이지요.' `그러면 이게 너 사랑하냐? 너를 사랑하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함으로써 준 선물이지 그 자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거는 아니라 말이오. 그러면 만년필이 자기를 사랑합니까 안 사랑합니까? ‘만년필이 너를 사랑하느냐?’ 그라면, ‘아버지의 사랑이라면 이 만년필이 너를 사랑하는가배?’ ‘아니, 그까짓 게 나를 무슨 사랑해 내가 사용하지. 아버지가 사랑함으로 나에게 준 선물이지.’ 요걸 구별하면 돼요.

여게 세상을,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걸 사랑치 말아라 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세상이 주는 모든 이런 것들을 네가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 하는 말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 말은 아버지의 사랑 자체가 우리 속에 없다 말입니까 아버지의 사랑의 선물이 우리에게 없다 말입니까? 여게는 선물이 우리에게 없다 말입니다. 선물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 알겠습니까?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도 우리 속에 있지마는서도 아버지의 선물이 우리 속에 있다 말이오. 지금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나라 속한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은 무슨, 데려감을 당한다 또 모든 도적맞지 안하고 모든 거 소유한다 하는 이 다섯 가지 축복이 한없는 이 축복인데 아버지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다 맡기신다 하는데, 맡기신다 하는데, 맡긴다, 자, 아버지의 것을 맡겨 주심을 받은 것을 믿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받은 것을 믿는 사람, 아버지의 모든 선물을, 소유를 우리에게 맡겨 주셔서 받은 사람 다 손 들어 봅시다. 없어? 나는 다 받았는데.

여러분은 왜 안 받았어? 다 받았지.

하늘에 있는 것 땅에 있는 걸 다 우리 상속받지 안했소? 영원한 것이 다 우리 것이 아니요? 이랬는데 그것을 받았소. 바울 사도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인이 오실 때, 내게 있는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자, 사도 바울이 맡겨 주심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다 받았어.

다 받았지마는서도 받은 그것은 무슨 형체 가진 것이 있습니까 형체 가진 것이 없습니까? 형체 가진 게 없어. 그거는 전부 계약으로 받았어. 다 믿음으로 받았고.

진리로 받았고 약속으로 받았고, 이러기 때문에 그것이 앞으로 실상으로 나타날 때 있어. 지금은 너희들이 보지 못하나 앞으로 나타내심이 되면은 그때 참 모양 볼 것을 인함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우리가 지금은 형체적으로 유형적인 것이 아니고 유형적인 것을 우리가 받지 안하고 무형적인 것을 받았습니다. 왜? 유형적인 것은 형체 속에 들었기 때문에 그거는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그 형체라 하는 거는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형체가 있는 거는 다 없어지요. 우리의 몸뚱이도 형체가 있기 때문에 이거 없어집니다. 없어져 가지고서 앞으로 이 없앨 수 있는 이런 유형의 것이 아니고서 이제 무형의 것이면서 이 형체를 초월해서 나타날라면 나타나고 안 나타날라면 안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혈육은 하늘나라 가지 못한다 하는 것은 형체의 것은 유형적의 것은 없어요. 유형적의 것은 없어지고 이 신령한 것이라 말하는 것은 형체가 없는 그 신령한 것인데 형체가 없기 때문에 공간에 제한도 받지 안하고 이런 형체 없는 것은 형체로 나타나고 싶으면 나타나고,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형체가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신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데 우리와 함께 하는 이 예수님이 밤이고 낮이고 함께합니다. 우리와 함께 지금 이 가운데에도 같이 함께 계시는데 함께 계시는 이분이 지금 형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형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

그러면 형체로 나타날 수는 없습니까 나타날 수 있습니까? 형체로 나타날 수 있소 없소? 나타날라면 나타나고 안 나타날라면 안 나타나고, 무쇠덩어리 속에 형체가 여기 있으면 못 들어가지요. 안 그래? 형체 없기 때문에 무쇠덩어리 속에 무쇠덩어리나 말거나 왔다 갔다 마음대로 해.

그러나 또 형체가 나타날 때에는 떡도 먹고 고기도 잡수고 이렇게 동행도 한다 그거요. 이것이 이걸 가리켜서 신령한 것이라.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모든 이 제한을 초월한 것을 가리켜서 신령한 것이라 생명과 신령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복 주셨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아버지의 사랑과 세상이 주는 사랑과 둘을 비교하라 그말이오.

오늘 아침에 내가 이 말씀을 봉독한 것은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가르칠라고 말한 것이라.

어제 우리가 깬 사람들이 받는 복이 몇 가지라 했지요? 다섯 가지. 이 다섯 가지인데 이 다섯 가지와, 다섯 가지는 아버지의 사랑이라. 아버지가 주는 것이라.

아버지의 사랑이라. 다섯 가지 그 자체가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거게 왔다 말이오. 아버지의 사랑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어.

이 신구약 성경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인데 이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영감은 하나님의 사랑이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나 예물이나 그런 것은 하나님의 사랑 자체가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 이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 자체요 영감도 자체요.

이런데, 이래서 네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 사랑치 말아라.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 그거는 세상이 너희들에게 준 것이다. 그건 뭐이냐 하면은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이기 때문에 세상도 없어지고 정욕도 없어지고 안목도 없어진다. 그것은 너거 눈만 좋게 하고 너거 만물보다 거짓된 정욕, 배암 욕심, 배암 욕심 그놈만, 배암이 너거 속에 만들어 놓은 악령, 악성, 악습만 좋구로 하고 또 이 불탈 고기덩어리 이거 육안만 좋아하게 하는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고 모든 것이 다 가지마는서도 아버지의 사랑은 영영토록 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오늘 아침에 말한 것은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이 세상 사랑을 좀 비교를 해 보라 하는 그 말을 똑 하기 위해서 지금 하는 것입니다. 비교해 보라.

그러면 자, 데려감을 당한다는 것은 무슨 축복을 말했습니까? 데려감을 당한다는 것은 어떤 축복을 말했습니까? 이 남반에? 크게 말해 봐요, 뭐? 자체? 그 자체라 하면 자체도 뭐 짜다라 쌔버렸는데 뭐 자체 뭐인고? 영은 자체 아닌가? 이것은 ‘자체에 속했다’ 이랬는데 데려감을 당하는 것은 하늘나라로 옮겨졌고 영생으로 옮겨졌고 버림을 당한 것은 영원한 멸망으로 다 포기돼서 폐기돼 버렸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거는 심신의 기능을 말하지 안했소, 심신의 기능? 말하자면 마음과 몸뚱이의 실력, 심신의 실력이라, 기능이라 말은 더 정확히 말하기 위해서 기능이라 말인데 실력이라, 심신의 실력이라. 심신의 실력이라 이라면 그만 막 힘센 그것도 실력인데 그까짓 거 다 불타고 마는 거라 말이오. 기능이라면은 좀 달라.

심신의 기능인데, 자, 하나님이 주시는 이 데려감을 당하는, 말씀대로 하면 데려감을 당하는 심신의 기능 이 기능은 영원한 기능이오. 알겠습니까? 이 기능은 영원한 기능이요 땅위에 있는 심신의 기능은 ‘박사했다, 또 그 사람이 세계에 제일 기술자이다, 또 그 사람이 세계에 제일 문학자이다.’ 이거 다 심신의 기능 아니요? 다른 사람은 그거 글자를 모르는데 글자 아는 것은 기능이라 말이오.

나는 에이 비이 그 두 자밖에 몰라요. 에이 비이 두 자밖에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영어 여러 자 아니까 그게 나보다는 마음의 기능이 더 하고 입의 기능에 더 해서 요거는 뭐, 에이 비이 그 다음 뭐라? 뭐꼬? 씨이. 씨이 알면 나보다 낫다 말이오. 씨이, 입이 ‘씨이’ 하니까 이 입의 기능이 낫고 또 머리의 기능이 낫다 그거요.

이거 다 심신의 기능인데 땅의 것은 암만해도 없어질 기능이요 이제 진리를 지킴으로 말미암아 얻는 이 심신의 기능은 데려감을 당하는 이 기능은 영원한 기능이니까 자, 땅의 기능과 영원한 기능 이것을 좀 비교를 좀 해 보라 그거요.

또, 없어질 소유와 영원한 소유를 좀 비교를 해 봐요. 아버지가 주시는 것과 이 세상이 주는 것을 가치 비교를 해서 평가를 해 보라, 비판을 해 보라. 비판이라 말은 요거 저거 한테 대놓고 요게 옳으나 저게 옳으나 하는 것이 그것이 비판인 것입니다. 하나만 두고는 비판이 안 돼요. 둘을 대야 비판이 돼요.

이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실감적으로 이렇게 성경 안에 있는 축복과 세상 것을 비교를 자꾸 따져서 자꾸 비교해 보고 비교해 보고 ‘아이구 세상 것은 가치 없다.’ 가치가 없으면 얼마나 없고, ‘하늘나라의 것이 가치가 있다. 주님이 주는 거 가치가 있다.’ ‘가치가 있으면 얼마나? 조금 있나, 배가 있나, 삼 배 있나?' 비교를 해 보니까 ‘이게 낫네.’ 또 비교해 보니까 `십 배 낫다.' 십 배 낫아? 또 좀 더 연구해.’ 연구해 보니까 ‘백 배 낫다. 아니고 억억만 배도 더 낫다.' 이래 가지고서 이 땅의 것을 다 버리고 하늘나라의 것을 취하는 사람들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나는 좋은 말 한 마디 들었어. ○○○목사님이 그리 가기 전에 자기 형 ○○목사님한테 가니까 ○○목사님이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평가적으로 뭐 네 말하는 게 평가적으로 옳으면 내가 따라가지. 평가적으로 해야 되지.

평가적으로 뭘 이래 한다고 이래 합디다 나한테 와서 그래 보고해. 야, 그라면 희망이 있다. 정말 평가를 한다고 하면은 설마 가치 있고 없는 게 나올 거 아니가? 희망 있게 들었는데 말만 모두 평가적 평가적이라 하는 자꾸 입에 익어서 하지 정말 평가적으로 하느냐? 가치를 정말로 따져서 평가적으로 하느냐? 평가적으로 하는데 마귀 지식 가지고 따지면은 자꾸 그게 좋지 성경 지식으로 가지고 따지면은 하나님의 것이 좋지, 여러분들, 마귀 지식이 참말이요 성경 지식이 참말이요? 뭐 이거 많은데 이거 다 나와서 자꾸 배워야 될 터인데 인제 시간 다 됐어. 자꾸 나와 배워야 돼요.

여러분들 뭐 일생 배울 거 아니라 암만 배워도 모자라, 암만 배워도. 암만 배워도 가르칠 거 있어. 평생 가르쳐도 여러분들이 모르는 걸 가르칠 수가 있다 그말이오.

‘아이구 그거 어떻게 아는가?’ 그거 쉬워. 자,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올라간 사람이 십 미터 올라간 자에게 이십 미터를 올라가 가지고서 말합니다. ‘뭐 있고 뭐 있고’ 하면 ‘그게 어데 있습니까?' `저기 있다. 봐라.' `안 보이는데 백지 거짓말이로구만.’ 자, 그라면 그 사람 말하는 것을, 이십 미터 올라간 사람이 말하는 것을 십 미터 올라간 사람이 배우면 배울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알라면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알 길은 뭐이요? 십 미터 더 올라가면 다 알아져. 제가 성화가 돼야 알아진다 그말이오.

예수 믿고 그대로 실행을 해서 자꾸 실행을 해야 사람이 자꾸 변화가 되고 변화가 돼지면 저절로 알아요, 뭐. 성경 알 게 뭐 있는가, 저절로 알아지는데?

어짜든지 새벽기도 꼭 나와요. 오늘 아침에는 많이 나왔는데 좀 더 전도를 해요.

오늘 아침에는 한 칠백 명 될란가? 오늘 아침에 나온 사람 내일 아침에도 계속해서 나올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나오고 싶거들랑 하나님께 기도를 해요.

기도하고, 처음에 새벽기도 나올라 하면 쉬운 줄 압니까? 밤새도록 잠 못 자요. 또 나갈라고 보면 시간됐지 싶어 일어나 보니까 한 십 분밖에 안 됐어. 또 일어나 나가면 또 그랬어. 그래 가지고서 새벽기도 나올라 하니까 처음에는 밤새껏 뭐 몇십 번을 깨고 이래 가지고서 새벽기도 나오기를 길을 들여 가지고서 공을 들여서 그래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다 모두 그 경험 있네. 이래 가지고 된 것이라. 이런데 처음으로 나오는 사람이 ‘나는 하나님이 안 깨워 줘서’ 그렇게 깰라 하면은 힘이 들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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