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준비


선지자선교회 1985년 8월 11일 주새 

 

 본문 : 창세기 5장 21절∼24절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오늘 공과 본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크나 작으나 모든 생활을 평가도 하고 비판도 해서 그래  살아야 합니다. 그저 형편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그렇게 주위 환경에 종이 돼서  살면 안 됩니다. 겨자씨 믿음도 그 방편이, 주위 환경이 자기의 현실인데 그  현실을 따라서 살면 결국은 세상 되고맙니다. 겨자씨 비유로 가르친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인고 하니 자기 현실을 따라서 살지 말고 현실을 잡아  먹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에게 지지 말고 현실을 다스리라 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잘못하면 자기 주위 환경인 그 현실을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이  되기 쇱습니다. 현실이 하라 하는 대로, 현실이 무슨 사람도 있기는 있지만 사람  없는 사건들과 물건들만 있을 때도 았습니다. 그러면 물건들이 있을 때도 그  물건을 따라서 물건 위주로 물건 중심으로 사건 위주로 사건 중심으로 살기  쉽습니다. 그러면, 자기 현실에 사람이 말하지 안할지라도 자기 현실을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라면 겨자씨가 벌써 생명이 없어 썩기 시작해  가지고 나중에 썩습니다. 생명이 들어서 겨자씨가 썩지 안하고 그 지기를 먹고,  지기를 잡아 먹고 장성 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현실이라는 그 환경에게  지지 안하고, 환경에게 삼키워지지 안하고 환경을 극복해 나가는 그것이 겨자씨  비유에 자 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극복하기는 뭘로 극복했는가? 생명으로  극복 했습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극복했습니다.

 그러면, 생명이 우리에게 뭐이 생명인고 하니 세 가지. 예수님의 대속이 우리의  생명이요, 성령의 감화 감동이 우리의 생명이요, 또 나타난 신구약 성경의 이  말씀인 진리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현실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영감과 진리대로 행동하면 우리는 현실을 내가 구원을 위해서 내가  이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잡아 먹은 것이 되고, 만일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와 영감과 진리를 잊어 버리고 살면 그 사람은 현실이라는 그 주위 환경에  피동돼서, 피동된다 말은 거게 따라서 움직인다 말입니다. 현실에게 끌려서 현실  형편대로 따라서 살게 되면 그것 은 죽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 가지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는 환경과 주위를 따라서 거게 맞추어서  사는 사람 있고, 또 하나는 자기 중심인 자기 주관 따라서 사는 사람 있습니다.

자기 생각, 이런 현실을 닥쳤든지 저런 현실을 닥쳤든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중심대로 자기 위주로 자기 목적대로, 그러면, 자기가 그 주인이 돼 가지고 자기  주장대로 자기 소원대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관념대로 자기를  따라서 현실을 행동 해 나가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따라 가지고 할라고  하면 그 현실과 마찰이 있으니까 현실 따라서 그래 나가는 사람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현실에 맞춰서 나가는 사람은 그 사람은 아무리 자기가 자기  양심에 거리껴도 현실에 맞추어 나가고 자기 계획에 거리껴도 현실에 따라  맞춰서 나가고, 모든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사건 비위를 맞추고 모든 물건의  비위를 맞춰서 거게 따라서 사는 그런 사람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며 자기 따라  사는 사람이 되든지. 자기 주장대로 사는 사람이 되든지 하는데 그것도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따라서 사는 것도 악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요,  주위 환경 그거는 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인데, 세상은 악령이 지금 주관하고  있는 것인데 세상 따라 사는 그것도 마귀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위 환경을 만들어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지만 그거는, 만들어 주시기는 주시지만 그거는 악령의 것이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악령의 것이 돼 있는데.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악령을 통해서 현실을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악령 사람 물건 사건 모든, 나라  사회 가정 이런 것들을 움직여 가지고 세상을 만들고 환경을 만드는데 그 만드는  최고의 대장은 누군고 하니 주님이 이런 거 저런 것을 시켜 가지고 만듭니다.

 만든 그것은 그 만든 목적이 우리의 구원을 잘 이루어지도록. 우리 구원이  흔들리지 안하고 견고히 서도록 하기 위해서 그 현실을 만들어 주는 것인데  현실을 가만히 눈을 뜨고 자세히 살펴보면 현실이 내 바로 가깝게 내 가깝게  있는 것은 물건이든지 사람이든지 사건이든지 그런 것이 바로 내 가까이  있습니다. 그것을 조금 더 들어가서, 들어가서 들여다 보면 그 배후에는  세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것이 그 배후에 있습니다. 그 물건  그것뿐이면 하지만 그 뒤는 세상이 있기 때문에 그 물건 과 대립하면 그 뒤에  따라 있는 수많은 물건과 수많은 세상과 대립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걸 보고  기절해서 그래 할 수 없어서 세상을 거슬리지 못하고 현실을 거슬리지 못하고  현실 따라서 삽니다. 고보다 조금 더 눈을 뜨고 더 깊이 살펴 보면 그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그 영의 운동이 있으니까 그게 뭐인고 차니  악령입니다. 악령이 그것을 지배를 하고 있습니다. 지배를 하고 있으니까가  거게까지 보는 사람은 그 악령을 배반하지를 못합니다. 고보다 눈을 뜨고 자세히  더 들여다 보면 그 배후에 주님이 계셔서 주님이 그 모든 것을 주관하셔 가지고  그 마귀에게 악령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지배를 하고, 악령은 또 이 모든  만물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그것을 만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현실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악령과 사람과 사물들을  재료로 삼아 가지고 만든 것은 만든 목적이 어디 있느냐? 거기에 그것을 대할  때에 예수님의 피공로와 영감과 진리를 버리고 거게 따라서 사느냐 그것을 대할  때도, 거슬림이 있고 투쟁이 있고 어려움이 있지만서도 그것들에게 따라서 살지  아니하고 주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를 배반치 안하고 거게 따라서  사느냐 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시험해 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생활이 다 시험입니다.

 그럴 때에 사람들이 그만 그 시험에 낙제하는 사람은 현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영감보다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보다도 크기 때문에 거게 따라서  살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가 더 크다는 걸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슬리면 거슬려도 영감과 진리와 주님의 대속의 공로대로 살라고 하니까 나중에  살라고 할 때는 그쪽의 편이 혹은 꾀우다가 안 되면 협박도 하고 안 되면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안 되면 죽이기도 하고 고문과 고행도 하고 어떤 일을 합니다.

어떤 일을 해도 그것들에게 피동되지 아니하고 자기가 중생된 자기를 살린 피와  성령과 진리대로 그대로 사는 사람은 그 현실을 진리로 이긴 사람이요 영감으로  이긴 사람이요 주님의 대속의 공로로 이긴 사람이요 그것에게 지지 안했기  때문에 그것은 밥이 되고 우리의 양식이 인격의 양식이 되고, 새사람의 양식이  되고 새사람의 기능은 한층 더 자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2절에 말씀하시기를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 시험이  와도, 시험이라 말은 현실이 우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심히 어렵게 방해를  한다 할지라도 그 어려운 시험을 인하여서 자기 신앙생활 하던 것이 중단되지  안하고 계속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래서, 시험을 참는 자 복이 있다 말은  시험에 인내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 시험을 닥쳐도 과거에 이 세 가지 생명으로  살던 그 생활을 요동치 안하고 계속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는걸 가리켜서 참는  자 복이 있다 말은 이미 생명 생활하는 그것을 요동치 안하고 생명 생활하는  것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참 그 견디면서 생명 생활을 계속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그 말입니다 복이 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참는 사람이 복이 있다,  인내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왜? 이래 가지고 '이것에 대 해서' 그 현실에 대해서. 그 사건들에게 대해서,  그 시험에 대해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이제 그렇게 생명으로 살면  살아서 그 현실을 통과하면 주님이 옳다 너는 됐다 이 시험을 이겼다 시험을  통과했다 네 현실을 이겼다 하는 것입니다.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이제  너는 됐다 인정을 받은 후에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리라' 그러면, 이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기로 한 생명의  면류관이라 말은 생명이 승리했다 그 말입니다.

 면류관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달음질 면류관이 있고, 또 권투 면류관 이  있고, 또 축구 면류관이 있고, 배구 면류관이 있고 면류관이 있는데 면류관은  이긴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면류관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 요새 일반적으로서는  거게다가 면류관을 주지 안하고 이렇게 꽃다발을 안겨 주는 사람들도 있고 그  면류관 대신에 이렇게 무슨 깃발을 깃대를 주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겼다는 그 표로서, 면류관은 풀로 만 들어 가지고 관을 만든 것인데, 면류관을  만든 것인데, 그 관을 씌워 주 그 이거는 구미 지방에서는 그래 합니다. 요새는  이 세계가 이라기 때문에 새로 그만 챔피언을 땄을 때에는 목에다가 뭘  걸어줍니까? 예? 예? 인제 이기면 금메달을 준다 이랍니다. 금메달을 주는데  그때는 이기면 면류관을 줍니다. 면류관을 씌워 줍니다.

 그러기에,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 말은 생명이 승리한 생명 면류관이라,  생명으로 이겼을 때에 생명 면류관을 주고 복싱으로 이길 때에는 복싱 면류관을  주고 유도로 이겼을 때는 유도 면류관을 주는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면류관 준다 그 말은 영생하는 생명이 이겼다. 우리 생명은 몇 가지가 우리의  생명입니까? 손가락으로 한번 가리켜 보십시오, 손가락으로 와 저게는 요래  요렇게 셋. 네 셋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 셋이 이겼다 말입니다. 이 셋이  현실에게 지지 안하고 이 셋이 현실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승리한 표로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 그렇게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닥칠 때에 무조건하고 환경을 따라 사는 것도 못 쓰고  제 주장대로 사는 것도 못 쓰고 현실을 살 때에 비판을 가지고 살고 평가를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사람이 살 때는 비판과 평가를 가지고 살아야 되는데  그저 무조건 사람들은 이런 형편 되면 이 형편대로 살고 저 형편 닥치면 저  형편대로 살고, 또 어디서든지 이거는 제 주장대로 제 욕심대로 제 고집대로  합니다. 그것도 망할 사람이오. 그것도 망하는 사람이 요 환경을 따라 사는 것도  아주 민첩하게 하기는 하는 것 같지만 그것도 팔방 미인의 창기 같은 그런  생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창기는 이 남자 닥치면 이 남자하고 관계하고 저  남자 닥치면 저 남자하고 관계하고 그것이 창기인데 그와 마찬가지로 이런 현실  닥치면 거기 또 맞춰서 저런 현실 닥치면 거기 맞춰서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팔방 미인이라, 이거는 뭐 이 모든지 저 모든지 어디든지 그 미인 노릇 한다,  그거 어디든지 들어붙는다 그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안하고,  그러면 팔방 미인으로 살아도 안 되겠고 고집쟁이로 살아도 안 되겠고 우리는  살 때에 이것을 잘 비판하고 평가해야 되는데 평가할 때 어떤 걸로 평가하느냐?  이것이 돈이 많이 벌리느냐 적게 벌리느냐, 또 이것이 지위가 올라가느냐 내려  가느냐, 이거 공부를 또 잘하게 되느냐 못 하게 되느냐 그런 걸로 평가하지  말고, 그런 거는 지저분한 가치들이기 때문에 그런 가치는 제일 큰 가치가  못됩니다. 그런 가치는 제일 큰 가치가 못 돼. 지저분한 가치들인데 그런 가치는  제일 큰 가치가 못 됩니다. 제일 큰 가 치 둘이 있으니까 제일 가치 큰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는 뭐입니까? 하나는, 제일, 제일 중대한  제일 귀중한 가치 둘이 있으니까 하나는 뭐입니까? 영생!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이 제일 중대한 가치라 말이오. 죽는 것이 제일 가치 못 쓸 것이고 사는 것이  제일 가치 있지 않습니까? 죽는, 사람들도 말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죽느냐 사느냐 죽느냐 사느냐, 이 일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그 문제가 달렸으면  그 외에 뭐이 있습니까? 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외 아무 것도 없어.

죽느냐 사느냐 문제가 제일 중대한 문제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가치를 뭐 돈이니 권세니 지위니 공부니 그거 다 생각지  말고 제일 중요한 게 뭐이냐? 죽음을 향하여 죽음을 만들어 가는 것들도 있고  영생을 만들어 가는 것들도 있기 때문에 아무리 좋아도, 여게 5장에 보니까  자녀를 많이 낳고 나이를 오래 동안 살고, 오래 동안 살면 사는 동안에 뭐  맛있는 것도 있을 것이고 좋은 옷도 있을 것이고 건강도 있을 것이고 재미있는  일도 있을 거고 영광도 있을 거고 지위도 있을 거고 권세도 있고 모든 거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걸 지저분하게 가치로 삼지 말고 이제 네가 사는  것은 영원한 멸망을 지금 이루고 가는, 영원한 멸망을 이루는 일이냐 영원히  사는 영생을 이루는 일이냐, 영생을 이루는 일이냐 멸망을 이루는 일이냐 그 두  가지로만 가치를 따져라 성경에 그렇게 지금 창세기 5장에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영원한 멸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면 세상에 제일  대통령도 그까짓 거 소용 없고 장관도 소용없고 박사도 소용없지 또 이 세상에서  노벨상 그까짓 거도 소용없고, 어째 됐든지 영생을 이루는 것이라면 뭐 죽음도  좋고 고난도 좋고 가난도 좋고 아무것도 좋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영생을  만드는 모든 생활들이 있고 또 영원한 멸망을 만드는 생활들이 있기 때문에 네가  이 두 가지 가치를 표준으로 삼아 가지고 이거냐 저거냐, 죽음이냐 생명이냐,  죽음이냐 영생이냐, 그래서, 생강이라 생명과 평강, 생명과 평강이라는,  생강이냐 영원한 죽음이냐 이것을 가지고 따지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공부를 할 때도 아, 이라면 지금 뭐 하느냐? 네가 그렇게  열심히 하면 일등 한다. 일등 하면 뭐 하느냐? 일등하면 네가 좋은 취직한다.

취직하면 뭐 하느냐? 네가 장관한다, 네가 더 또 잘 하면 뭐 하느냐? 대통령  된다. 대통령 되면 뭣 하느냐? 대통령 되면 그라면 권세 잡지. 권세 잡고 난  다음에 어찌 되느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살다가 죽지. 죽으면 어찌 되느냐?  죽으면 영원한 멸망이다. 그러면, 멸망이라면 그거 멸망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까짓 거 아무 소용 없다 말이오.

 내가 주일날 공부를 안 하고 이렇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라 하면 현재는  공부하는 데도 지장이 되고 학교 가서 공부도 떨어지니까 아이들에게 어찌 되고  또 부모에게서도 반대를 하고 이렇게 한다 할지라도, 그러면, 이랬으니까 공부  좀 못 했다. 공부를 못 하면 어찌 되느냐? 공부를 못 하 면 일등을 못 한다. 또  일등을 못하면 어찌 되느냐? 출세를 잘 못 한다. 출세 잘 못 하면? 가난하게  지낸다. 가난하게 지내면 어찌 되느냐? 나중에 천대받는다. 천대받다가 뭐  어떻게 되느냐? 그러고 난 다음에 죽지.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영생으로 간다.

그러면, 영생이라면 이런 것도 저런 것도 다 상관 없고 멸망받는 것이라면  아무리 좋은 것도 상관이 없다 그말이오. 소용이 없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가치를 내가 지금 이 현실에서 행동하는 것이 영생을 만드는  행동이냐 영원 멸망을 만드는 행동이냐 요 두 가지로만 따져야 되지 그 외에  딴걸로 따져서는 안된다 이거요. 이렇기 때문에, 레위기 11장에 말씀하시를  쪽발로 걸어가라 했어. 쪽발로만 걸어가는 그 짐승이 깨끗하다 이랬습니다. 두  쪽발 걸어가지 않는 것은 다 더럽다 이랬어. 그거는 우리에게 하나의 상징적으로  가르쳐서 주신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생활 할 때에, 이 세상살이를 해  나갈 때에 이거냐 저거냐 두 가지로만 구별해야 되지 여러 가지로 구별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생애를 비판할 때에는 이러면 내가 이  가는 것이 어떤 걸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냐 그렇게 내가 생명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냐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냐 이라면 그 결과가 어찌  되느냐 그 결과를 따집니다. 결과 따지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비판이요 평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가치가 많은 것이라 모두 사람은 가치를 따져서  요것보다요 가치가 그라면 그것보다 좀 가치 높은 거 그거 잡을라고 애를 쓰고  그걸 취할라고 애를 쓰고 이라는데. 가치 가치 중에 제일 높은 가치가 뭐이냐?  영생하는 것이 제일 높은 가치요, 또 요거보다 요게 못하다 못하다 못하다,  가치가 적다 적다하는데 제일 가치 적은 게 뭐입니까? 제일 가치 적은 것이  영원한 사망이라 말이오. 제일 가치 적은 것이 영원 한 사망이요 제일 가치있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비판으로 평가로 살아야 되는데 제일 가치  높은 것이 영생이요 제일 가치 없는 것이 사망이라 그래서 사람들은 사망은 이  아래 있고 생명은 이 위에 있는데, 생명은 이겨서 가는 곳이요 사망은 져서  패전해 가지고 가는 곳인데, 그러면 현실에 내가 현실을 이기면 영생으로 향하여  가는 것이요 현실에게 내가 지면 그거는 사망으로 가는 것이라. 현실에게 져도  사망으로 가,는 것이요 또 자기 고집에게 져도 사망으로 가-는 것이요 자기의  모든 본성 본질의 그 성격에 져도 사망으로 가는 것이요 승리로 가는 것은 뭐이  승리로 가는 것인고 하니 우리의 생명인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대로 가는 것이 이것이 승리하는 것이요 영생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영생하는 가치는 얼마나 큰고 하니 자기 목숨을 빼앗겨도  영생으로 가는 그 가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뭐 세상에 어떤 게  있다 할지라도 영생을 깨달은 사람은 그 세상에게 지지 않습니다. 뭐 생명을  빼앗는 생명을 빼앗아도 좋다 영생만은 빼앗기지 않겠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생명을 빼앗겨도 영생을 빼앗기지 않겠다. 내가 직장을 빼앗겨도  영생을 빼앗기지 않겠다. 가정을 빼앗겨도 영생을 빼앗기지 않겠다. 내 몸을  자유를 빼앗겨도 영생을 빼앗기지 않겠다. 내 몸이 다 내 몸이 절단난다  할지라도 영생은 빼앗기지 않겠다. 어떤 것보다도 영생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라야 영생을 취하게 되지 영생을 뭣 만치는 귀중히 못 여긴다. 이것보다는  영생을 내가 귀중히 못 여긴다 하면 그것 때문에 영생 다 뺏기고 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가치를 평가하며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고 가치는 둘로, 두 가지로만 평가하고. 또 방편이 수백 수천 방편이  많은데 그 방편 가운데에 제일 좋은 방편 하나 있고 그 나머지기 방편은 뭐  백이나 천이나 다 그저는 도매금으로 그것은 다 사망하는 방편입니다. 이 세상에  방편이 수천 수만이 있는데 요 방편이 좋다 저 방편이 좋다 하고 취하지만 어떤  방편을 취해도 그것은 다 사망이요 거게 영생하는 방편 꼭 하나만 있습니다. 그  하나만 있는데 하나 그거는 뭐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과 동행.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진리와 동행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와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 동행이 제일 가치  있어. 그러기 때문에. 동행하는 방편이 제일 생활 방편으로서는 제일 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별별 방편 취하다가 다 죽었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편을 취해 가지고 영생하고 죽지를 안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편은 그거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만, 동행만  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 하느냐? 그렇지 않다 그말이오.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방편은 다른 것도 다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에녹은 자녀를 낳으며 삼백 년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말은. 자녀 낳았다 말은 에녹은 뭐 장사도 할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학교 선생 노릇도 할 수 있고 정치가  노릇도 할 수 있고 오만 거 다 할 수 있고, 부부 생활도 할 수 있고 자녀도 낳을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고 뭐 오만 거 다 성경에 금하지 않는 것은 다 먹을 수  있고, 이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거 하는 사람 있고 동행을 버리고 그거  하는 사람 있다 말이오. 그러면, 동행하면서 그거 하는 사람은 그것이 다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동행하면서 한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세 가지와 동행하는 거, 내나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입고. 그 공로를 입고 그 공로로  이 세상에 사는 데에도 그 공로, 진리대로 살면 그만 진리대로 살면 세상을  떠나는 게 아니라 진리대로 살면서도 이 세상에서 오만 거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안하고 세상 이런 저런 생활하는  사람은 죄 짓지 안하고 이 세상 생활을 이리저리 하는 사람이요. 그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와 영감과 대속의 공로를 버리고 이 세상대로 사는  사람은 죄를 지으며 사는 사람이라. 장사하면서도 죄 안 짓고 의롭게 장사하는  사람도 있고 죄 지으며 장사하는 사람도 있고, 학교 선생 노릇을 해도 의롭게  선생 노릇하는 사람도 있고 죄지으며 선생 노릇하는 사람도 있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세상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도 이 세상 온갖 생활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동행을 버리고  영생도 버리고 또 세상 생할하는 사람도 이런 거 저런 거 다 할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세상살이 하는 사람과 하나님의 동행을 버리고 이  세상 인간들과 동행하든지 물질과 동행하든지 가정과 동행이든지 자기 고집이나  성질하고 동행이든지 그렇게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의 다른 것이 뭐 있습니까? 밥 먹는 게 다른 겁니까 죽는 게 다른 겁니까  일하는 게 다릅니까 영광 누리는 게 다릅니까 부부생활 하는 게 다릅니까 자녀  낳는 게 다릅니까 뭐 다른 게 뭐 있습니까? 다른 걸 한마디로 한번 말해  보십시오. 뭐이 다릅니까? 예? 크게 말해 봐. 예? 뭐라 하노? 영생이 있고? 그게  아니고 그거는 결과인데, 자. 다른 게 뭐 있습니까? 하나는 죄 없이 살고 하나는  죄 지으 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어기지 안해  영감을 어기지 안해, 주의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안하니까 그 사람은 죄 없이 사는  사람이라. 죄 없이 세상살이를 할 수 있고 죄 지으면서 세상살이를 할 수 있다  그말이오.

 죄 없이 세상살이를 할라 하면 어찌 되느냐? 죄 없이 세상살이를 할라 하면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전토나 이런 데 대해서 빼앗기고 손해 가 간다 그말이오.

죄 없이 세상살이를 할라 하면 죄 없이 살라 하는 그거 때문에 이런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런 것을 빼앗기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예? 여러  배 백 배를 하나님이 더 주신다고 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죄 안 짓고 살면  세상도 더, 죄 짓고 사는 거보다 더 축복 받아서 성공하고, 천하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다고 했으니까 더 받고, 잘 하는데 마귀란 놈에게 꼬여 가지고 '죄 안  지으면 망한다. 죄 지어야 꼭 산다' 마귀의 꼬임을 받아 가지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 안 짓고 살면 더 성공합니다. 죄안 짓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그때 임시로 볼 때에는 안 되는 것 같고, 그 인간들이 삐꾸니까 인간들이  망칠 것 같고, 인간들이 다 망쳐도 인간들 그까짓 거 전체보다도 하나님 한 분이  더 크다 그말이오. 이라면 이 물건 물건 이거 다 손해 간다. 장소도 협소하고  이거 다 헛일이다 이랬지만 그거 주위 환경 협소한 거 현실 모든 만물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이 .더 큽니다. 이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축복이 더  크지 인간의 그 다수와 모든 현실 모든 좋은 조건들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크고  또 모든 그 만물과 인간 그 전부보다도 하나님이 크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축복을 보고 간 사람은 누구며 모든 친한 인간들과 조건을 보고 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 인간들과 조건을 보고 간 사람은 누구요? 누구요? 크게  말해 봐요. 롯? 모든 조건보다도 하나님의 축복, 전 인류 인간보다도 하나님,  자기보다도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을 보고 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은  어찌 됐으며 롯의 결과는 어찌 됐습니까? 롯의 결과는 영원히 다 멸망받지  안했습니까? 재물 따라 갔으므로 재물 실패했고, 인간 따라 갔으므로 인간  실패했고, 자기 주장대로 했기 때문에 자기 실패했고 전멸했어 전망했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따라 살았기 때문에 물질도 성공이요, 따른 사람들도 다  성자 됐습니다. 인간 성공이요, 자기 성공이요 다 성공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가치와 방편  요것을 똑똑히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사람은 가치와 방편을 표준해서 산다 할지라도 사람은 기쁨이 있어야  살지, 뭐 쾌락이 있어야 살지, 기쁨 없이 재미없이 즐거움 없이 어떻게 사느냐?  항상 낑낑거리면서 어떻게 살수가 있습니까? 사람은 쾌락 없으면 하루생활도  그거는 지옥 생활입니다.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살아야지. 그런데, 기쁨과  즐거움인데, 기쁨과 즐거움인데 기쁨과 즐거움은 몇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까?  네, 나머지기 멸망받는 더러운 기쁨은 여러 수천 도 수만도 많이 되지만 참말로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기쁨과 즐거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기쁨, 죽을 때는 더  기쁘고 죽고 난 다음에는 더 기쁘고 부활할 때는 더 기쁘고 하나님의 심판 앞에,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설 때는 더 기쁘고 영원 무궁세계일 때는 더 기쁘고  갈수록 기쁘고 즐겁고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그런 기쁨, 세상이 빼앗을 수 있는  죽음에 갈 때 없어지는 그 기쁨 그런 기쁨을 가지지 말고 영원히 없어지지 안할  기쁨을 가지도록 하라 했으니까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그런 기쁨이 몇 가지나  됩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네, 여기 가운데는 모르네. 요래 좀 들어  봐야 알지. 한번 가리켜 봐요. 몇 가지나 되는고? 아 예. 두 가지.

 두 가지는 뭐이냐 하면, 한 가지는 십자가의 기쁨! 주님과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내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모든 만물과 인류를 좋도록 유익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희생하는 그것이 이제 십자가의 기쁨입니다. 내가 희생하는 것이  십자가의 기쁨이오. 이 십자가의 기쁨을. 십자가의 기쁨은 희생하는 것인데  희생하면 이상하게도 하나님이 기쁨을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것을  가리켜서 십자가의 기쁨이라, 십자가의 기쁨을 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주님이  잘 했다고 선물로 보내든지 주님이 찾아오시든지 이랍니다. 그러면, 선물  보내셨을 때 선물 만날 때에 기쁘고 주님 만날 때에 기쁘고 그 기쁨, 그러니까,  내가 주를 위해서 희생함으로 기쁜 그 기쁨과 희생해서 주를 위해서 희생했다고  주님이 나에게 많이 주셔서 많이 주셔 주님에게 받는 그 기쁨, 주는 기쁨 받는  기쁨 그거. 그 두 가지 기쁨인데, 주님을 위함으로서 내가 모든 주는 일을 할  때에 그 주는 기쁨이 내게 오고 또 그래 함으로써 이제 주님이 나에게 주셔서  내가 주님에게 받는 기쁨이 있다 그말이오. 영감을 받고 진리를 받고 사랑을  받고 또 능력을 받고 지혜를 받고 모든 돈을 받고 모든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해 주심을 받고 주님에게 모든 것을 받음으로서 기쁨이 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요 세 가지를 똑똑히 가르치십시오. 가치로서는 영생이 제일  가치있다. 방편으로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게 제일 방편이 제일 좋은 방편이다,  기쁨은 이 두 가지, 주님을 위하여 주는 기쁨 주님에게 받는 기쁨 두 가지 이  십자가의 기쁨과 주님의 선물과 주님 만나는 기쁨 이 두 가지 기쁨이 제일  귀중한 기쁨이다 하는 것을 학생들에게 자꾸, 그거 이해를 시킨다는 것은  어려우니까. 학생들은 이해시키는 것은 그거는 좀 어려워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해를 시키는 것은 학생들에게 이해를 시킬 라고 애를 쓰지 말고  선생이 이해를 할라고 애를 씁니다. 이해를 하고 주입을 시키면 그 속에 주입이  되는데 이해하는 그것도 속에 같이 들어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들이 몰라도  나중에 나이가 많아지면 전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르치는 선생이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자기가 말만 이렇게  자꾸 주입 시켜서 가르치는 거 있고, 또 거게 자기가 이해를 하고 실행을 하고  가르치는 것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는 이해도 못 하고 말로 만 앵무새 모양으로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에게 말만 들어가 있고, 내가 이해를 하고 가르치면  이해까지 그 말씀이 같이 들어가 있고, 내가 실행하고 가르치면 그 말과 이해와  실행 세 가지가 같이 들어가 있고. 내가 그라고 난 다음에 이제 사람이  됐습니다. 이러면 네 가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르칠 때에 말씀을  가르치고, 이해를 가르치고, 행위, 행위 실행을 가르치고, 사람이 성화되는 그  성화, 사람을 가르치고 이라면, 줄 때에 한 가지 주는 반사 있고 두 가지 주는  반사 있고 세 가지 주는 반사 있고 네 가지 주는 반사가 있으니까 그 뒤에  맺어지는 열매가 각각 다르다 그거요. 이해가 됩니까? 이해가 됩니까? 한 가지  가르친다 두 가지 가르친다 한 가지를 학생들에게 준다 두 가지를 학생들에게 준  다 세 가지를 준다 네 가지를 준다 하는 그것이 이해가 됩니까? 이해 안 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정말로 이해가 돼요? 자, 반사 쳐 놓고 이해 가 되는 사람들  손 들어 봐요. 반사 쳐 놓고 이해 되는 사람. 여반에는 여기 이렇츰 없네 저  뒤에는 없네 모두 놓이소.

 제가 말만 앵무새 모양으로 옮기는 그것은 그 밑에 학생들이 암만 많아도  그것은 뒤에 가서 말만 알고 지식만 가지고 있는 인간되고 맙니다. 지식만 알고  있는 인간 되고 말아. 끝이 없어. 끝이 망하요. 또 이해를 하고 가르치면  이해하는 학생들이 됩니다. 이해할 수 있는 학생이면 좀 낫지요. 이해하니까  뒤에 가서 비판해 가지고, (○선생. 뭐 한다고, 엊저녁에 잠 안 잤어? 뭐  하고,얼마나 심방 많이 했어? 몇시까지 했어? 말해 봐. ○선생 몇 시까지  심방했어? 예? 뭐라 하노? 아, 열 한시까지. 그러면 열 한시까지 했으면 와서  그만 폭 자 버리면 뭐, 열 두시, 한 시 두 시 세 시, 네 시. 그만한 때는 네  시간 이상 자면 안 돼. 네 시간만 자도 막 족족해. 다 성공한 사람들은 네  시간도 안 자. 세 시간 자고 다 했습니다.)  그것을 내가 되고 돼야 됩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앞서가면 뒤에 양무리들이  따라온다 이렇게 요한복음 10장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가르치는  거, 뭐 다 같이 입으로 가르쳐. 다 같이 입으로 이래 가르치는데 가르치는데  거게 말씀 진리가 가고 이해가 가고 또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가고 또 그  다음에는 변화된 사람이 가고 이렇게 가는 것이 각 각 달라요. 그러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이, 녹음을 하면 녹음은 같아도 녹음으로 할 수 없는 그 속에  알맹이 셋은 하나도 없는 사람도 있고 둘 있는 사람 있고 하나 있는 사람 있고  셋 있는 사람이 각각 다르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전할때 자기 말하는 것이 말에 있지 안하고 권능에  있기를 원하고 영감에 있기를 원한다고 그렇게 말했어. 그러기 때문에  가르치는데 '설교를 어떻게 준비할까?' 그 바울은 설교 준비할 그런 준비는 안  했습니다. 자기가 그 말씀대로 어떻게 내가 살까. 어떻게 어떤 사람이 될까.

사는 데에 공력을 들였고 사람되는 데에 공력 들였고, 뭐 깨닫는 데에는 저절로  깨달아지고 말씀 전할 거는 제대로 전했지, 그러니까, 무슨 말씀을 전할까  이렇게 준비하지 안하고 그저 그때 그때 말씀 나오는 대로 이와 같이 그 설교를  하고 이래 했지만 그 설교한 것이 다 진리에 맞고 그것은 뭐이냐 하면 자기가  평생 늘 생각하는,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이니까 묵상하고 생각하니까 늘  깨달음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자기가 날마다 지금 그렇게 살아 볼라고  애를 쓰니까 그 행동하는 게 그것이고 또 그런 사람이 될라고 애를 쓰니까 밤 낮  그것이니까 뭐 설교를 성경보고 이렇게 맞추고 저렇게 맞추어서 해석을 이랄까  저랄까 하는 그것이 아니고,  자기는 주일학교 반사 노릇 하는데 내가 어쩌든지 어떤 사람되느냐, 사람되는  데 제일 주력하는 반사가 제일 일등 반사고, 그 다음에는 사람되는 거는  주력하지 못해도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옳은 행동하는 데 주력하는 사람이  이등 반사이고, 그 다음에는 내가 깨닫고 가르쳐야 되지 깨닫지 못하고 가르치면  되느냐 깨닫는 데 주력하는 사람이 삼 등 반사이고, 제일 사 등 반사 꼴뱅이  반사는 뭐 깨닫는 것도 행하는 것도 사람되는 것도 문제없고 요대로 틀림없이 요  말대로 전해서 가르쳐야 되겠지 하는 그거는 앵무새, 그거는 생명 없는 녹음기와  같은, 테이프와 같은 것이라 그거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이 공과 가르치면 여러분들이 일생 동안 그 학생들에게 한번 더  가르칠란지 몰라요. 가르칠 때가 있을란지 모르는 것이니까 오늘 주일날 이 세  가지를 학생들이 확실히 깨달아서 이 세 가지 지식을 가지고 이 세 가지를  깨닫고 이 세 가지와 행동하고 이 세 가지대로의 사람이 되도록 해야 되겠다  하는 그것을 기도하고 전심 전력을 기울여 가지고, 한 십 분 십 오 분  동안이니까 이제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준비하고 심방해 가지고, 가르치는  것도 그거, 데리고 올 때도 그거, 자꾸 내 속에 그게. 그것이 행동으로 사람으로  이래해 가지고 그 아이들을 변화를 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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