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3 14:15
상반절
본문 : 벧후 3:10-12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예수믿는 것은 순전히 객관의 힘입니다. 자기 주관의 힘이 아니고 객관의 힘인데, 주관은 객관의 힘을 받는 노력하는 것 그것뿐이지 신앙행위라 하는 것은 악령과 세상을 이기는 일이기 때문에 그는 권능이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다. 안 믿을 때에 하던 모든 그 구습을, 모든습성을 이겨서 방탕한 사람이, 의지가 약하던 사람이 의지가 강하게 되고, 또 못쓸 것의 취미를 가지던 사람이 참 옳고 바른데 취미를 가지게 되고, 무지한 사람이 지혜롭게 되고, 신중없는 사람이 신중있게 되고, 비겁한 사람이 담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지고 이렇게 되는 이것이 세상 사람에게도 그게 있지마는 세상 사람의 것 가지고 예수믿는 이 경건의 행위는 못합니다. 왜? 하려고 하면 악령이 방해하기 때문에 안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가지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 그것이 첫째로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처음에 와서 기도할 때에는 다른 기도 하지 말아요. 다른 기도 하지 말고, 처음에 와서 기도할 때에는 아침이면 아침 대예배면 대예배, 이 시간에 자기가 다른 데에 흩어진 마음을 모으는 것과, 흩어진 마음을 모으는 것과 또 하나님 앞에 드려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치를 깨닫는 은혜, 또 그 이치대로 하고 싶은 그 사람으로 변화되는 은혜, 내가 그대로 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 자기가 되려고 애를 쓰는 그 은혜, 그러고 난 다음에는 그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첫 기도입니다.
와 가지고 자기가 거기 앉았으면서 저 장사하는 것, 또 놀러 돌아다니는 것, 누구 생각하는 것, 뭐 돈 생각하는 것, 이런 잡된 것을 지금 마음은 여기 앉았지만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것, 그놈을 첫째는 모우도록 기도합니다. 이 자리에서 모우도록.
이 시간 주님 앞에 예배 드리는 마음이 되어 다른 마음 있는 그것을 제거하도록 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주님이 오늘 아침에 나에게 믿는 이치를 내가 사는 이치를 어떻게 살아야 구원이 되는 이 사는 이치를 가르쳐 주실 때에 이 이치를 내가 깨닫는 은혜를 달라고 그렇게 둘째로 기도를 하고, 또 셋째로는 이치대로 살기를 원하는 내가 되도록 자기를 변화시켜 달라 그걸 또 기도합니다.
이 이치대로, '이 이치대로 살기를 원하는 내가 되도록 변화를 시켜주옵소서!' 그것을 셋째로 기도하고, 넷째로 기도하는 것은 '이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 능력을 받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다른 기도 하지 말고, 엉뚱한 기도 뭐 오만 기도 그런 소원보다도, 그거 하나님 미워 하시요.
새벽에 나와 가지고 예배 보러 와서 그런 것 안 하고 뭐 뭐 뭐 줄줄이 소원하면 하나님께서 '얘, 그것 소원보다도 네가 오늘 아침에 은혜받는 게 문제다. 네가 지금 쓸데없는 잡탱이, 지금 네가 기도하면서 오늘 장사를 잘되게 해주옵소서! 무엇을 어떻게 해 주시옵소서!' 그 마음이 벌써 거기 가 있는데 하나님 얼마나 진노하시겠습니까? 자기 마음이 딴 데 흩어져 가지고 있는 것 주님이 제일 진노하시는데 그 진노하는 걸, '뭘 주십시요. 뭘 어찌 하십시요.' 그 마음이 여기에 집중되어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집중되지 않고 그 마음이 흩어져 있는 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진노하시는데 그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밉상으로 보겠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고, 네 가지. 첫째는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그런 것을 죄인 줄 알고 회개해서 이 예배드리는 데에 마음을 집중을 시킬 것, 그러고 난 다음에는 가르쳐 주는, 네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그 이치를 가르쳐 줄 때에 그 이치를 깨닫도록 하나님에게 구할 것, 셋째로는 그 이치를 구하고 난 다음에는 내가 이 이치대로 살고 싶은 자기가 돼, 살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이 변화를 시켜 달라고. 이치만 알떤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요대로 살고 싶은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그 변화해 달라는 요걸 기도해야 돼. 그러고 난 다음에는 암만 그래 봤자 능력 안 받으면 소용없어.
말씀과 함께 능력을 받게 해 달라고 주님은 주시는데 자기가 마다해. 받게 해 달라고, 이 네 가지를 위해서 기도를 해서 변화가 돼야 하나님의 주시는 그 은혜를 받습니다. 그 네 가지.
그러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받으면 이치가 깨달아집니다. 이치만 깨닫고 말면 그것은 율법이 되기 때문에 자기를 멸망시키는 것이 되고 맙니다.
교만만 되고. 이치를 깨닫고 고렇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돼 가지고 그 능력을 받고 요렇게 하려고 기도를 해 가지고 이제 예배드릴 때에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면 깨달아진다 말이 요. 깨달아지고 난 다음에 이 자리서 떠날 때에 떠나기 전에 자기가 첫째는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러면 자기가 깨달은 그 이치를 한번 새김질 합니다. '보자 이 이치를 내가 기억하고 있나 잊어버렸나?' 한번 쭉 한번 내가 이 이치를 한 번 깨닫습니다.
깨닫고 난 다음에는 고렇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지금 고 시간에 되려고 애를 씁니다. '주여! 내가 요대로 살고자 합니다. 살게 해 주옵소서. 마지막에는 요대로 살겠습니다. 요대로 살겠습니다. 지금부터 이대로 삽니다. 살게 해주옵소서' 고보다 한층 더 들어가서 '살겠습니다.' 그것도 아직까지 안돼! 살겠습니다. 고다음에는 '지금부터 내가 이래 삽니다.' 요래 가지고 고 자리를 떠나면서 사는 사람으로 떠날 때에 그때에 변화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자리에서 설교받아 가지고 이루어 가지고 떠나야 되는 것이지 설교 받아 가지고 이루지도 않고 그냥 가 가지고 들은 대로 그만 휘떡 달아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 마귀라는 놈은 그렇게 해서 그게 습관이 들어 놓으면, 하나님 앞에 은혜받는데 그 못된 습성이 들어 놓으면 그게 악습 중에도 제일 큰 악습입니다.
어제도 내치 이 말씀을 증거했는데, 거기에서 우리가 목적하는 것이 이루어지려고 하면 내가 무엇을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되겠느냐? 현실에서 무엇을 제일 먼저 생각해야 되겠느냐? 순서적으로 그날을 생각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날. 자기의 마지막. 내가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죽는 그날을 생각해야 되고, 또 예수님이 재림 하시는 날, 재림하시는 날이나 죽는 날이나 마찬가지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마지막 날, 주님이 재림하시는 우주의 마지막 날 그날을 첫째 생각합니다.
그날을 생각해 가지고, 그날을 생각하면서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그날에 도적맞는 것, 그날에 자기가 도적맞지 아니하고 가지고 참 영광될 것, 이제 그날에 그날을 첫째 생각해 가지고 그날에 이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날에 도적맞을 것, 내가 지금 그날에 도적맞을 것이 무엇이냐? 자기의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그날에 도적맞을 것을 먼저 검사합니다. '이것도 도적맞을 것, 이것도 도적맞을 것, 이것도 도적맞을 것이다' '이것도 다 빼앗겨지고 없어질 것이다 이것도 다 빼앗겨진다. 이것도 빼앗겨진다' 빼앗겨질 것. 그날에 소망할 것, '이것은 그날에 남아 있겠다' 이것은 그날에 남아 있겠다 하는 그것을 자기가 첫째로 생각하고 그날에 관한 것을 생각해. 그날에 관한 것 두 가지, 그날과 그날에 관한 것 두 가지와, 그날에 관한 것 요 세 가지 요것을 첫째 자기가 생각을 합니다. 고것을 첫째 생각하고 고 현실마다 매일, 매 시간 언제든지 요 세 가지를 첫째로 생각을 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 둘째로 정과 욕으로 사는지 고것을 생각하는 게 하나 있겠고, 또 거룩한 행실과 경건 고것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겠고, 요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것을 먼저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내가 정과 욕으로 사는 이것을 버려야 되겠다.' 암만 생각해 봐야 헛일입니다. 순서가 틀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아, 나는 거룩한 사람이 되겠다. 나는 경건한 사람이 되겠다. 이 시간 내가 거룩한 사람 경건한 사람, 그러면 거룩한 행실 경건한 행실 이것을 나는 이 시간 하겠다.' 이러면 절로 이 정과 욕 이놈이 방해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이 시간에 나를 방해하는 것이 정의 활동이요 욕의 활동이니까, 이놈이 에덴 동산에서도 인류 시조를 죽였고, 모든 인간을 다 이놈이 죽였다. 이놈이 죽여서 이놈에게 속해서 달리기를, 요한계시 9장에는 보면 "전쟁에 달리는 말과 같다" 했습니다.
이 정 이놈이 시작해 놓으면 뭐 죽을동 살동 모르고 욕심 이놈이 시작해 놓으면 죽을동 살동 모르고 날뛴다 그거요. 그래서 이놈이 얼마나 강하며, 얼마나 원수며, 얼마나 적이라는 것을 자기가 비로소 알게 됩니다. 안다고 해도 자기가 거룩한 행실 경건 이 소원을 먼저 가지고 난 다음에 이놈을 대항해야 이기지 이 소원을 가지지 않고 이놈을 대항해 가지고 못 이깁니다.
또 자기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가지겠다고 아무리 애써 봤자 안됩니다.
그날을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그날을 생각해. 그날을 생각하고 그날에 두 가지 이것을 생각할 때는 정과 욕 그놈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정과 욕 그놈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내가 그날을 자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날에 자유로 생각할 수 있지마는, 만일 정욕 이놈을 건드려 놓으면 그놈이 막 둘러싸고 흔들기 때문에 그날을 생각할 수도 못하게 합니다. 그날을 생각하지도 못하게 해요.
이러니까 무엇이든지 차차 해 나가야 되는 건데, 저 수력발전기, 수력발전기를 하려고 댐을 때울 때에 그 많은 물이 내려오는 것을 막는데 어떻게 막겠습니까? 못 막습니다! 저 물이 나갈, 그런 강물이 나갈 만한 그 물 문을 만들어서, 그것부터 잘 만들어 놓습니다. 잘 만들어 놓고 오히려 그 물 문을 열면 이 물이 짝 그리 빠져나갈 수 있도록 그 물 문부터 잘 만들어 놓고, 그러고 난 다음에 물 문 하나 찌우고 둘 찌우면 물이 못 나오도록 고거 딱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이 강물을 그리 조그매만 이래 건들이면 그 물이 다 나가 버려 바짝 말라져 버립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이놈이 물을 메워놓고 단단히 막는다 말이요. 단단히 막아 가지고 이제 굳어지고 난 다음에 철근을 단단히 이와 같이 막고 난 다음에, 물 문 하나만 떡 끼우면 물 이놈이 갈 곳이 없어. 둘 끼워 셋 끼우면 물 한 방을 세지도 않고 전부 딱 막혀 버리고 이제 필요 없는 물은 넘어나가면 넘어나갔지 못 나가도록 할 수 있다 그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첫째로 이 물 문을 뚫어 놓고, 그놈은 제 마음대로 정과 욕이 활동하도록 가만히 두고 이쪽에서는 그날을 자꾸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지 오늘 죽을런지 모른다. 예수님의 재림도 오늘인지 모른다. 내가 이 시간 죽는다면 어찌 되느냐? 내가 살고 있는 것 어찌 되느냐?' 그날에 도적맞을 것, 그날에 참 가져질 것, 그날에 가져질 것은, 그날을 바라보라! 그날에 소망하라! 그날에 있을 것을 소망하라! 그날에 네가, 그날 그날에 없어질 그런 것이 아니고, 그날에 있을 것 그걸 소망하라 그 말이오. 그날을 소망하고 그날에 도적맞을 것 생각하고, 마지막 시간이 언제인지 모르고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자꾸 자기가 강하게 느끼면 이게 힘이라 말이오. 이제 이 힘으로 가지고 뭣 하느냐? 이 힘으로 가지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 이것을 자기가 만들게 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에 대해서 지금 소원을 자기게 됩니다. '내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나는 하겠다' 이러면 이 방해하는 정과 욕 이놈이 나옵니다. 드러납니다.
그 거룩한 행실과 경건의 행위를 자기가 하려고 사람이 되려고 하기 전에는 정과 욕 이놈이 암만 나와 봐야 그놈인 줄 모릅니다. 그게 자기로 알고, 그 원수인 줄 모르고 그것대로 살 뿐만 아니라 그 성공이 되기를 원하고 노력하고 성공이 되면 기뻐하고 즐거워 합니다.
이제 거룩한 행실과 경건으로 살려고 요렇게 하면 그놈이 원수라는 것이 자기에게 알게 되고, '이놈이 들어 내 일생을 망치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된다 말이오. 그러나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소원하기 전에는 그놈이 원수라는 것이 발견되는 게 아니라 그놈이 자기 중에 자기요. 이러니까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사람들이 멸망받는 정에 활동, 이 욕의 활동 이 두 가지에 끌려 가지고 사는 것이 안 믿는 사람 불택자면 전 생활이 이겁니다. 뭐 대통령이든지 박사든지 또 도덕가든지 사상가든지 종교가든지 말할 것 없이 그 전부가 다 정과 욕의 생활입니다. 전 인류가 이 생활에 다 끌려 가지고 다 멸망받는데 우리가 뭐라 그걸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그날을 생각하고 힘을 얻어 가지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을 소원하는 거기에서 힘을 얻어 가지고 그대로 살려고 하면 정과 욕 이놈이 방해하는 걸 알게 된다 그 말이오. 그 때에 '아!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내가 이제 죽든지 살든지 기도를 해야 되겠다.
기도해 가지고 어쨌든지 목적을 달성해야 되겠다.' 하고 기도하러 올라갔는데 그게 뭐이냐? 정 그놈이 들어서 정의 달성, 욕의 달성 그거 하려고 그 사람이 기도를 바로 하면 나중에 가서 그놈이 원수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복을 하고 오히려 성공하기를 원하던 사람이 그놈으로 더불어 싸우는 사람이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하나님과 접하기 전에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단계로 우리가 진행을 해야 이 일이 성공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성공이 안되는 것인데, 이것을 자기가 현재에 해봐야 됩니다. 자기 현실에 이것을 해보는 데에서 거기에서 참 예수님의 기쁨도 나오고 예수님의 능력도 나오고 예수님의 그 성질도 나오고 예수님의 그 강한 아주 강한 그 자존성 자존성도 나오고 여기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모든 것이 흘러 나옵니다. 자기 현실에 이것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 예수믿는 맛 하나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현실이든지 그 현실에 첫째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생각할 것이 뭐입니까? 네, 그날을 생각할 것, 종말 시간, 우주의 종말 시간, 자기의 개인의 종말 시간 그것을 생각할 것. 거기에서 세 가지를 생각, 그날을 생각하고 도적맞을 것과, 그 날에 자기가 자기게 될 것 그 소망하는 것, 그것을 자기가 그 현실에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우리 사람들은 마귀라는 놈이 미혹줘 가지고 현실에서 그것 생각하지 않고 대개는 백에 99가 현실에서 당면한 일 생각하고, 당면한 물건 생각하고, 사람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것 생각하고, 자기 마음에 있는 것 생각하고, 고만 그리 삐뚤어져 버립니다.
자기가 현재 닥칠 때에 '현재에 내가 지금 오늘 이 일을 어떻게 할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할까? 이 사람과의 이 관계를 어떻게 지금 맺을까? 어떻게 해결을 지을까?' 아니오! 다 그리 삐끌어져 버립니다. 그 헛일입니다. 아무리 자기에게 다급한 일이라도 그보다 더 다급한 일이 있습니다. 그까짓거는 마지막 시간이 되면 저절로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자기 현실에 자기 현실을 이용해 가지고, 현실을 이용해 가지고 자기는 구원을 이루어야 될 사랑이 자기 현실에 끌려서 그 현실에 끌려서 그만 현실의 사람이 돼 버립니다. 내가 현실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현실에게 다스림을 받습니다. 현실에게 피동을 받습니다. 내가 현실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이러니까 에덴 동산에서 '그 에덴 동산을 그 지키고 다스리고, 다스리고 지키고 그렇게 하라' 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게 내나 우리 현실과 한 가지인데 우리가 현실에 피동되면 안됩니다. 뭐 사람은, 불택자는 천이면 천, 만이면 만, 그 사람들이 다 현실에 피동되지. 현실에 피동되지. 현실에서 어떤 급하고 복잡하고 무서운 현실이 있어도 현실보다 제일 현실에서 먼저 생각할 것 뭐입니까? 그날, 또 다음에는 그날에 두 가지, 그날과 그날의 두 가지 이것을 생각하는 것이 자기 현실에서 1호가 되어야 됩니다. 1호가 안되면 안됩니다. 만일 공산주의자들에게 자기가 납치가 돼 가지고 지금 참 죽임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다급한 그 현실을 만납니다.
그러면 현실에는 '내가 여기에서 이 공산주의를 만났기 때문에 뭐라고 대답을 할까?' 아니오. '내가 어떻게 여 이길까?' 아니오. 거꾸로 봤습니다. 거꾸로 되면 헛일이라. 일이 안돼. 그렇츰 다급해도 내가 첫째 배우기를 생각할 것이 그날, 그날의 두 가지 이것을 생각하라더라 그날 생각하고 그날의 두 가지를 척 생각하고 나면 정신이 바로 듭니다. 정신이 바로 들어요.
그러면 이제 거기에서 안 죽고 살기만 날뛰었는데 그게 아니라. 문제가 달라진다 그 말이오. 그러고 난 다음에는 그러면 '그날에 있을 것, 거룩한 행실과 경건 이것만이 그날에 남아 있다. 나는 이 시간 뭐 할 것이냐? 내가 이 시간에 거룩한 행실과 경건 이것을 하는 것이 나 할일 아닌가? 죽고 사는 이게 나 할일 아니라. 거룩한 행실과 경건 이것이 나 할일이다.' 이제 자기 할일이 뚜렷이 나옵니다. '주여! 내가 이 시간에 거룩한 행실과 경건 이것을 달성하는 이 현실이 되게 해주옵소서.' 이러고 나면 정 그놈이 나옵니다. 정 그놈이 나오고, 욕 그놈이 나옵니다. 첫째가 욕 그놈이 나옵니다.
'아, 아무래도 살아야 되겠다.' 생애 애착욕, 살고 싶은 마음, 살고 싶은 욕심 말이오. 살고 싶은 그놈, 그 욕심이 나옵니다. 살고 싶은 욕심이 나오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정이 나옵니다.
자식을 아내를 남편을 가족을 친구를 뭐 오만 정이 나와 가지고 거들어 줍니다.
거들어 주면 욕심하고 정하고 이놈, 두 놈이 만나 놓으면 자기는 고만 거기에 휩쓸려 가지고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는 그 정과 욕의 사람이 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벌써 순서에 그 죽음 앞에서도 일호로 그날과 그날에 속한 두 가지를 생각해서 거기서 뿌럭지를 박아 가지고 '나는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거룩과 경건 이것이 문제다.' 이것이 벌써 자기에게 확립이 됐습니다.
확립이 됐으니까 '내 원수가 누구냐? 정과 욕 이놈이 원수다.' 하고 보니까 그놈이 나섭니다. '이놈!' 원수를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이러기에 이것을 우리가 연습하는 일이라 말이오. 대번에 그런 일 닥칠 때에 그렇게 그날이 생각이 되어집니까? 아무 일 없는 평소에, 평소에 자기가 놀면서 누워 자면서 그냥 자기 혼자 글을 쓰면서 일을 하면서 1호로 한번, 1호로 한번 생각해 봐. 이 순서로 한번 생각해 봐요. 1호로 한번 생각하니까 거기에서 1호가 잘 안되고 엉뚱한 짓 합니다. 거기에서 1호 1호를 자꾸 해서 일호를 자꾸 생각하는 것을 연습을 하고, 이러니까 조금 어북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 1호 2호 3호가 순서로 되어지고 조금 더 어려운 일이 있어도 1호 2호 3호가 되어지고, 또 조금 분한 일이 있으면 분한 일, 그때는 무슨 활동입니까? 그게 분할 때 무슨 발동이오? 그러면 저의 발동이지.
'분하다!' 정의 발동이요. 이놈이 일어나도 그것을 물리칠 수가 있고 이래서 조금 어려워도 요 세 가지가 순서대로 되고 조금 더 어려워도 순서대로 되고, 이러니까 자기가 고것을 하나씩 해 보니까 재미가 난다 말이오. '아! 조금 더 어려워도 한번 해 보자.' 아이들 뭐 콩콩이라 하던가? 톡톡 뛰는 것 그거 뭐이지? 콩콩 응 콩콩, 콩콩 그것도 내가 어떤 아이 보니까 처음에 사 가지고 올라 서 턱 자빠져. 그리고 하니까 올라서서 두 번 콩콩 거리고 나니까 떡 나한테 와서 말하기를 '두 번 콩콩 합니다. 두 번 할 수 있습니다.' 또 조금 있다가 오더니마는 '세 번 할 수 있습니다.' 해 보니까 자꾸 되니, 재미가 나니 나중에는 '아무것이는 다섯 번 했고 나는 일곱 번 했습니다.' 이 자랑을 한다 말이오. 고 하니까 재미가 있다 말이오.
고와 마찬가지로 자기 현실에서 요 1, 2, 3 순서를 자기가 생각해 보기를 원하니까 고게 된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고 다음에 조금 어려운 일에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잊어버렸으면 하려 하니 안됩니다. 이러나 또 힘을 쓰면 됩니다.
이렇게 거기에서 취미, 성장되는 그 취미, 그리고 나니까 자기 속에 무엇이 생겨지는, 실지로 생겨지는 구원을 자기가 맛볼 수도 구경할 수가 있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자꾸 자라가는 것이요. 그러면 나중에 가서 급한 일이 있어도, 급한 일이 있을 때 '여기에서 또 한번 해 보자.' 또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주위 환경에 어떤 일이 오는 그것이 자기에게 괴로움이 되지 않고, 거기에에 이 세 가지 순서로 하니까 괴로운 그로 인해서 자기가 얻는 수입이 많으니까 전체가 수입이라. 아브라함 같은 이는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이러니까 거기에서 자기 수입하는 그 길이 있으니까 닥치면 '뭐 무조건 수입된다' 하고 척하고 나니 큰 수입이 됐다 말이오.
그러므로 신앙이라 하는 것은 실천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이 없으면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참 무거운 짐 중에 무거운 짐이 됩니다.
이러니까 이 신앙 생애하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원수 중에 원수가 됩니다. 믿는 사람 가운데에 외식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신앙가가 자기 중에 자기들에게 제일 원수 중에 원수입니다. 제일 밉상으로 보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 시간에 통성으로 기도할 때에, 그 권찰회 있을 터이니까 10분 기도 하는데 10분 기도해도 시간이 없다 말이오. 빠르다 말이오. 10분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첫째가 생각할 것이 이번에 들은 이 이치를 자기가 깨닫는 지식적으로 이치를 깨닫는 요것을 찾아서 자기가 깨닫고 있느냐 없느냐? 고것 첫째 할 것.
그러고 난 다음에는 요대로 소원하는 사람이 자기가 되도록 기도를 할 것.
그러고 난 다음에 소원하는 사람만 될 게 아니라 '이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살겠습니다.' 그것도 아니라. '살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먼저 돼야 됩니까 '살겠습니다.' 살겠습니다가 먼저 돼야 됩니까? 살기를 원합니다가 먼저 되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살겠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다 됐습니까? 그 다음에 뭐입니까? '삽니다. 주여 이 시간부터 삽니다.' 요것이 돼 가지고 고 사람으로 자꾸 이래 걸어가야 된다 그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