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분설과 이분설(영에 대하여)

 

1987. 12. 31. 새벽(목)

 

본문:베드로전서 1장 23절∼25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거듭났다 말은 이중으로 났다 그말입니다. 한 번 났고 또 이중으로 났다. 그러면  일차에 우리가 난 것은 첫째 아담에게 속한 부종 모혈로 우리가 났고 또 다시 난  것, 거듭 난 것, 두번째 난 것 말이요, 이중으로 난 것, 두번째 이중으로 두번째 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어질 종자로 우리가 다시 거듭 이중으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썩지 아니할 씨, 썩지 아니할  종자로 다시 났으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의 씨로 되었느니라”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을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다시 나지 아니하면, 불택자들은 한 번만  출생됐습니다. 한 번만 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택자들은 이중으로 났습니다.

두번째, 첫째 났고 또 두번째 났습니다. 이래서 거듭났다 이렇게 말씀한 겁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처음에 난 자는,  처음에 난 자는 하늘의 것을 모르고 땅의 것만 압니다. 이것은 땅에 속했고  이거는 땅에 속해서, 영육인데 영은 영계에 속했고 이 심신이라 하는 것은  물질계에 속해 가지고서 된 것인데 영은 하나님께서 영계 것으로 창조하셨고   육은 물질로 창조됐습니다.

창조돼서 영육으로 사람이 됐는데, 사람이 제일 처음에 난 자는 땅에 속한 자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땅에 속한 자라 말은 그것은 영계 것도 다 땅에 속한 자라,  피조물에 속한 자라 하는 말입니다.

이래서 사람의 영은, 그러면 영이 우리의 이 육은 부종 모혈로 이렇게 난  것이지마는 영은 어떻게 났느냐 하는 문제가 많이 문제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문제는 공통이 돼 있지 안하고 여러가지로 사람들이 깨닫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치 육이 부모의 그 심신의 요소를 다 거게서 심신의 요소를 종자적으로  받아 가지고서 그렇게 난 것이 육인데 그러기에 부모의 마음 또 자녀의 마음이  마음도 비슷하고, 몸도 비슷하고, 모양도 비슷하고, 이러나 하나님이 지으시기  때문에 아주 판이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면 영은 어찌 됐느냐? 영은 부모의 영이 육과 같이 그렇게 거게서 전달돼서  나온 것이냐? 거게서 전달돼 나올 수가 없는 것은 영은 단일체요 단일성이요  거게 분류 분산될 수 없는 영이기 때문에, 육은 그 얼마든지 분산이 돼서 한 육이  여러 육체로 이렇게 여러 사람으로 날 수 있지마는 영은 그것이 나뉘어질 수  없다 하는 것이 또 성경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영은 하나님께서 한번 많이 지어 놓고 난 다음에 한 사람 한 사람 날  때에 그 영을 하나씩 그 육을 지어놓고 거게다가 영을 넣어 줘서 그래 사람이  생겨졌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들은 영의 전재설이라, 그건 전재설이라 이랍니다.

영은 그 사람이 나기 전부터 벌써 영은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영이 있는데 순서를  따라서 한 육을 지을 때에 한 영씩을 거기다가 넣어 줘 가지고 그렇게 사람은  됐다. 이래서  영의 전재설을 그렇게 말하는 그런 주장도 있는데 그것도 성경에서  틀렸다고 이렇게 똑똑히 증거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것도 정통이라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전설을 말합니다, 유전설. 유전설은 부모의 영이 내나  그다음에 거게서 그 요소가 유전돼 가지고 그다음에 사람의 영이 생겨졌다  이렇게 유전설을 말하는 그런 깨달음의 학자들도 있고, 또 창조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부정 모혈의 육을 창조하실  때에 그때에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의 육을 창조하셨는데 육을 창조하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을 통해서 창조하는 게 아니고 그때 영은 영으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셨다, 그러면 육은 사람을 통해서 부모를 통해서 창조하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영은 직접 창조하셨다. 이래서 창조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렇게 있습니다.

그러면 유전설도 있고, 또 전재설도 있고, 창조설도 있는데 그러면 저는 뭘 믿느냐  하면은 창조설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부모를 통해서 그 사람을 지을 그때에 영은  하나님이 같이 지으셨다, 그러면 다만 영과 육이 다른 것은 영은 그것은 부모의  종자로 태어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그때 지었다. 이렇게 창조설을 말하는  것이고, 유전설을 말하는 것은 영도 육과 같이 내나 부모에게서 그것이 유전돼 나왔다  이렇게 되는 것이고, 이러니까 그리 되면은 영이 그렇게 분산성, 영의 그 분리성을  인정하는 게 되기 때문에 영의 분리성을 인정할 수 없는고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그것인데. 그러기에 영은 그렇게 유전성으로 유전이 될 수가 없다  그렇게 깨달아서 유전성도 우리가 믿지 안하고 또 벌써 먼저 지어놨다가 했다는  전재성도 우리가 믿지 안하고 그때에 날 때에 창조했다고 하는 그걸 믿기 때문에  창조성을 믿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으로부터 3장까지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짓는데 거게 육은 육으로 꼭 짐승같이 이렇게 모든 동물과 같이 이렇게 지어  가지고 그때 살고 있었는데 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영은, 영은 하나님이 그  영을 지었지마는 그 영이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가 거게는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을  때에 그때에 “생령이 되었다” 산 영이 되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숨을 불어 넣을 때에” 하는 그것이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그렇게 말을 해서 숨을 불어 넣었다 하나 그것은 곧 하나님이 영감 주신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숨을 쉬면서 ‘후’  이래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건 성령을 제자들에게  부어 주시는 그것을 사람들이 뭐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에게 기억하고  거게서 연구해서 올바른 도리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이라는 그것이 내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그 영이 산 영이  됐다” 하는 그말입니다.

그러면 영을 창조할 때에 산 영, 그라면 죽은 영이냐? 죽은 영이 아니고, 죽은  영이라는 것은 살았던 것이 그 생명이 없어질 때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고 또  이것은 생명이 없는 영입니다. 생명이 없는 영인데 “호흡을 불어 넣음으로써 산  영이 됐다” 이러니까 처음에 영이 지음받을 때에는 생명이 없었고 그다음에  생명을 불어 넣을 때에 그때에 산 영이 됐습니다.

그러면 생명 불어 넣는 것을 그것을 “코에 호흡을 불어 넣으니 산 영이  되었다” 하는, 코에 호흡 불어 넣은 것이 이 육체의 숨 쉬어서 이렇게 바람 불어  넣은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는 곧 하나님께서 성령 주시는 그 작용을 표시하기를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의 영이 지음받았을 때에 그때에 성령의 은사를 받기 전에는 생명이  없었다, 성령의 은사를 받기 전에는 생명이 없었다 하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성령의 은사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과 연결이 없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후에   생명이 있었다. 하나님과 연결이 있었다.

피조물인데, 영은 피조물인데 피조물이 창조주와 연결이 있을 때는 그 피조물은  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 풀 한포기도 창조주와 연결이 있을 때에는 피조물은  죽지 안하고 그 연결이 없을 때에 끊어질 때에 피조물은 죽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다 하나님의 생명 작용이 끊어지면 이 풀 한포기 이것도 그만 썩어집니다.

또 아무리 강한 악어라도 하나님의 생명 역사가 그에게 연결돼 있을 때는 그게  살아서 아주 강한 동물이지마는 하나님의 생명 역사가 끊쳐지면 그 악어는 그  시간으로 죽고 썩어지고 내나 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래서 영이 지음받았지마는 하나님과 연결이 없을 때에는 그에게는 생명이  없었다. 그래서 코에 호흡을 불어 넣으니 이제 산 “생령이 됐다” 산 영이 됐다  그말은 하나님과 연결이 됐다.

코에 호흡 불어 넣은 그것을 코에다가 생기를 불어 넣으니까,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됐다” 이렇게 하는 그것을, 코에 호흡을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됐다는  “생기를 불어 넣으니”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이제 힘이라, 곧 생명이라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는 건데 그게 곧 영감입니다.

영감으로, 그 영이 영감을 받았을 때에 성신의 감화를 받았을 때에 “산 영이  됐다” 하나님과 연결이 됐다, 산 영이 됐다 말은 하나님과 연결이 됐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 연결이 되면 그 영이 산 영이 되고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죽은 영이 됩니다.

이래서 “죄와 허물로 죽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우리 사람과의 연결은 뭐이  시키는고 하니 성령이 시키고 또 끊어지기는 무엇이 끊느냐? 죄가 끊게 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끊어졌을 때에는 그 영은 당장 죽었지마는 영의  주격이 죽으니까 피소유격인 심신도 서서히 죽지 영이 죽은 데에 대번 죽지를  안했습니다. 마치 말하면 나무에 생기를 끊어버리면, 그 나무에 생기를 끊으면 그  나무가 지금 외부에 보기에는 아주 푸르게 청청하게 있지마는 벌써 뿌리에서  잘려졌으면은 조만간에 그 나무는 시들어서 마르고야 마는 거와 같습니다.

이래서 영이 주격이기 때문에 영이 죽었으니까 이 심신은 차차 죽습니다. 죽어서,  이 육의 죽음은 언제 죽느냐 하면은 영과 나뉘어질 때에 죽습니다. 이래서 왜  우리가 중생되기 전에는 죽은 사람이냐 하면은 영과 육이, 영육이 다 같이  있지마는 그 영이 죽어 있기 때문에 영의 작용이 없습니다. 그 영의 작용으로서  심신이 사는 것인데 영의 작용이 없으니까 심신이 차차 차차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육이 죽을 때에도 심신이, 마음과 이 몸이 나누어질 때에 그때에  죽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안 믿는 사람들이 마음을 가리켜서 혼이라  하고 이제 몸은 가리켜서 몸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혼이 떠났다 그  말은 마음이 떠났다 그거요.이래서 마음이 먼저 떠나고 이제 몸의 생명이  떠납니다. 마음이 떠나면 그 몸은 있으나 생명이 떠나고 마음이 떠나버리면은 혹  그 몸은 생기가 남아 있어서 이렇게 풀풀 뛰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이라지마는 그 마음이 떠났으면 그 몸은 벌써 조금만 있으면 죽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의 육도 그렇고 다른 것의 육도 그렇고, 만일 생기가 딱 끊어졌다  할지라도 남은 그 근육에 남은 힘은 그대로 좀 움직여서 뛰기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고 이러나마 마음과 그 사이가 나뉘졌으면 벌써 그것은 그저 순간만 있으면 다  죽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래서 몸은 마음과 연결해서 그것이 살아 있고, 또 마음은 하나님과 연결해서  아니, 영과 연결해서 살아 있고,} 영과 연결해서 살아 있고, 또 영은 하나님과  연결해서 살아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육이 마음과 연결돼 있어야 되고, 마음과  연결된 이 심신은 중생된 영과 연결이 돼 있어야 되고, 또 사람은 영은 하나님과  연결이 돼 가지고 있어야 생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은 이분설을 말하는 사람도 있고 삼분설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분설을 말하는 것은 곧 사람은 영과 육 둘로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이라 이래서 이분이라 말은 둘로 나누는 그 주장이라, 둘로 나누는  주장으로서 그래 이분설을 말하고 또 삼분설은 사람을 셋으로 나눈다, 그 셋으로  나누는 것은 영 혼 몸 이래서 삼분을 말하고 또 이분설을 말하는것은 영 육 둘로  말하는데, 그라면 이분설은 이 심신을 둘로 말하지 안하고 하나로 말했고 삼분설은 이  심신을 하나로 말하지 안하고 마음을 혼이라 또 이 육을 몸이라 이래 가지고서  삼분을 말한 것입니다.

이래서 이분설 ‘사람은 영육으로 되어 있다’ 하는 그 주장은 육이 그 하나가  아니고 육을 둘을 합해서 하나로 말해 가지고서 육이라 하는데 그 육은 실상은  그것이 마음과 이 고기덩어리 둘로 되어 있어서 육이라고 이렇게 합해 가지고  육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영 혼 몸, 삼분설이 이것이 더 분명합니다.

이래서 삼분설 말하는 것이 유력한 장점이 있고 이분설 말하는 것이 장점이  있습니다. 삼분설 말하는 장점은 무엇이 장점인고 하니 사람은 영과, 이 ‘육’  하면 고기덩어리로 알기 쉬운데 영과 마음과 몸 이 셋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이라 하는 그 면이 장점이라 그것은 잘 표시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점이  뭐인고 하니 영 혼 또 이 몸, 이 셋으로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혼이  어데 속했느냐? 그 혼이 영계에 속했느냐 그 혼이 물질계에 속했느냐 하는  이것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래서 이분설 이분설 말하는 사람들은 이 마음 이것을 똑똑히 구별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에 마음을 영이라 이렇게 봅니다, 마음을 영이라. 영은, 마음을 영이라,  마음이 영이요 영이 마음이라. 이래서 그 면이 분명치 못한 그것이 단점입니다.

또 이분설 영육으로 말하는 그 사람들이 좋은 장점은 뭐인고 하니 영은 영계에  속한 것이지마는 이 육은 땅에 속한 것이라, 육은 이 물질계에 속한 것이라  하니까 물질계에 속한 것이니 그 마음은 곧 육과 하나이기 때문에 마음은 물질에  속했다 하는 그면으로서 좀 잘 깨달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분설도 알아야 되고 삼분설도 알아서 이분설 삼분설 이것을 바로  알아야 사람이 어떻게 구조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그것을 바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말을 이분설로 말하지마는 우리는 삼분설도 우리는  이해를 하고 삼분설도 인정을 하고 이분설도 인정을 해서, 사람을 삼분으로  나누면은 둘은 물질계에 속했고 하나는 영계에 속했다 그렇게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이 몸이라는 것, 이 몸이라는 것은 이것은 마음과 연결이 돼야 사는  것이니 몸에 모든 생기와 힘은 마음에서 온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성경을 보고  깨닫고 믿습니다.

또 그러면 마음은 뭘로 사느냐? 마음은 이것은 영으로 말미암아 영에서 생겨져  가지고 사는 것인데 사람들이 타락한 그후에는 중생되기 전에는 영이 죽었기  때문에 죽은 영과 그 마음이 연결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은 영은 기능  작용으로서는 없는 것 한가지입니다. 기능 작용은 하나도 하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죽은 영과 그 마음이 연결된 것은 그 마음이 영의 혜택을 입지 못합니다.

왜? 영이 기능으로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영의 혜택을 입지 못합니다.

영의 혜택을 입지 못하니까 중생되지 안한 사람들은 그 사람의 주격이 누굽니까?  그 사람의 주격이 무엇이 주격이 되어 있습니까? 그 사람의 주격이 마음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 이거는 순전히 물질이지 영계의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물질뿐인고로 그것이 마치 비유컨대 코와 입과 눈이 있는 그 머리를 닭을  그 머리를 딱 끊어버리면 그 몸뚱이가 보고 듣고 감각을 느껴서 모든 것을 다  관찰하고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 모든 것을 정평 정가하는 그런 작용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남아 있으나마 그것이 벌로 뜁니다. 인제 없으니까 뭐 풀풀  뛰고 이래 쌓으나 그것이 아무 속에 자기를 지배해서 통치하는 머리가 없으니까  그 뛰는 것은 전부 죽는 그 발동입니다.

죽을라고 발동하는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영과 연결이 없어 영의  작용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그 마음은 마치 그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그  움직이는 것이 목이 끊긴 그 닭의 몸뚱이가 뛰고 움직이는 거와 꼭 같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기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그렇게 말했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또 “육체의 소욕은 사망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래서, 또 말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이렇게  말씀했는데, 그러기에 영과 연결이 없는 그 마음의 작용은 다 죽는 것입니다. 또 영과 연결  없는 마음에게 피동되어서 작용하는 그 몸의 생활은 전부 죽은 겁니다. 죽음인데  사람은 그것들을 죽음으로 인정하지 안하고 하는 그것은 어째 그러냐?  사람들의  심령의 눈이 영안이 어두워 가지고, 마음의 눈이 어두워 가지고서 범위를 이  물질계, 물질계라는 범위 내엣 것만 보지 물질계 범위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러니까 물질계 범위 내엣 것을 보니까 영에 관련 끊어진 마음의 움직임, 그  마음이 몸을 거머쥐고 움직이는 그 움직임 그것은 전부가 마음이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과 약속과 모든 진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진리와는  상관이 없고 다만 이 물질만 맞춰 가지고서 이와같이 하기 때문에 마음도  물질이요 몸도 물질이기 때문에 그들은 물질 이상의 그 위 차원의 것을 연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전히 물질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최고를 말하기를  과학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래서 물질 작용만 이래 하기 때문에 그것은 살아 있으나 그것이, 비유하기를  “풀과 같다” 이라기 때문에 풀은 잠깐 마르고 또 영광은 떨어지고 이와 같이  그것은 잠깐이다. 왜? 이거는 물질계 범위 내에만 계산 댔지 물질계 범위 밖의  것을 알지도 못하고 연결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보혜사 성신이 오면은 이거는 우주라는 물질계를 초월한 그 영계의 존재요  하나님의 존재이기 때문에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만날 것이고 볼 것이고 또 너희를 주관할  것이고 너희들 안에 계시고 너희들은 또 그 안에 있고 이렇게 상호 내주하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 곧 그것입니다.

이래서 마음은 산 마음이 될라면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마음이 저 혼자 그러면  모가지 끊긴 닭과 같고, 그 마음은, 그 마음이 얼마나 무지하냐 하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비유요, 예를 든 것인데 목을 끊어놓으면 닭 그 목 끊은 몸뚱이가 무슨  지각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고 벌로만, 그 있는 힘만 가지고 뛰는  것뿐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그 심신이라는 이 육이 영과 연결이  끊어지면 그거 마치 비유컨대 머리 끊겨진 몸뚱이만 가지고 있는 짐승과 꼭 같은  것입니다.

이러니까 마음이 사는 데에는 뭐와 연결되면 삽니까? 영과 연결되면 삽니까?  그라면 안 믿는 사람들은 영과 마음이 연결 안 돼 가지고 있습니까 연결돼  가지고 있습니까? 연결돼 가지고 있지요? 안 믿는 사람들도 그 마음과 영이  연결돼 가지고 있지요? 연결돼 가지고 있는데 그 영이 어떤 영입니까? 죽은 영이기 때문에 죽은 영과 그  마음이 연결됐기 때문에 죽은 영이니까 기능 작용으로서는 없는 거와 꼭 같이  완전히 기능 작용은 완전히 없습니다, 그만.

그런데, 그러니까 사람이 죽은 영과 이 심신이 같이 있지마는 영이 죽어서 심신을  바로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한테 송장하고 한테 몸 붙여 놓고 있는 것  한가지기 때문에 작용이 아무것도 없고 다만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의 작용은  뭐이 주격돼 가지고 작용하고 있는고 하니 마음이 주격돼 가지고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은 영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인데 영이 죽어 있으니까  그 마음이 죽었다 말이오. 마음이 죽었다, 마음이 죽었으니까 그 마음과 몸뚱이에  활동하는 것이 다 죽은 활동입니다.

그러면 마음과 몸이 죽은 심신의 활동이라 하는 말은, 심신이 죽은 심신의  활동이라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은 죽은 심신은 무엇을 가리켜서 죽은 심신이라  이렇게 말합니까? 무엇을 가리켜서 죽은 심신이라 이렇게 말합니까? 죽은 심신.

녜,  죽은 영과 연결돼 있는 것이, 같이 접해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 죽은  마음이요 또, 이 죽은 마음이라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죽은 마음이라 말은 뭐이지요? 죽은  마음이라 말은 무슨 말입니까? ○○○? 하나님과 연결이 없는 마음이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하나님과 연결이 없는 마음, 하나님과 연결이 없는 마음은 죽은  마음입니다.

또 죽은 영과 연결은 하나님과 연결이 없다 말이오. 중생된 영과 연결된 마음은  그 마음은 산 마음입니다. 중생된 영과 연결된 마음은 산 마음입니다.

중생된 영과 연결된 마음은 산 마음이라 그라면 중생된 그 영은 무슨 영인가?  중생된 영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것입니다. 거듭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은 언제든지 예수님의 열여섯 가지 대속으로 움직이고, 영감으로 움직이고,  진리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마음이 영과 일치가 되면은 그 마음은  영원히 살았습니다. 일치돼서 행동한 거는 죽지 않습니다.

이러기에 사람이 진리대로 움직인 마음, 영감대로 움직인 마음, 또 예수님의  열여섯 가지 대속으로 움직인 마음, 거게 피동된 마음은 다 산 마음이요 행동은  다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게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은 “거듭났다” 하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사람이 부종 모혈, 부정 모혈. 부정 모혈로 난 이것은 처음  난 것이요, 처음 난 것이요, 이제 성령으로 난 것은 다시 난 것이라. 거듭 나,  이중으로 난 것이라. 이중으로 난 것이라.

그러면 이중으로 난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속성과  꼭 같은 자로 난 것이 이중으로 난 것이요, 하나님의 속성과 꼭 같이 난 것이  이중으로 난 것이요 또 하나님의 속성은 없이 꼭 타락한 사람의 요소로, 사람의  요소로만 난 그것은 처음 난 자라,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땅에 속한 자라, 그것은  혈육의 것이라, 그것은 물질의 것이라.

물질로 난 것은 그것은 땅에 속했다, 물질로 났다 말은 땅에 속했다  말인데  그것은 처음 난 것이고 거듭난 것은, 거듭난 것은 다시 이중으로 난 것은 하늘에  속한 자라, 하늘에 속한 자. 이러기에 예수님의 피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가  거듭났다, 중생됐다 말은 다시 났다, 중이라 말은 무거울 중자, 무거울 중자가  다시 중 자요. 무거울 중자는 다시 중자. 다시 중자. 거듭 중자. 그래, ‘왜  중론하느냐, 왜 거듭 말하느냐? 그거 중복이 아니냐, 거듭이 아니냐?’ 이렇게,  그러기에 거듭났다 말은 그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기 좀 어려운 말이지만  아무래도 알아야 예수를 믿습니다.

이러니까 이런 것은 신학에서도 지금 이렇게 이것을 분류해서 이렇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중간에 가다 말았지. 그런고로 단단히 기억을 하고  여러분들이 많은 명상을 하고 또 자기가 살아보면은 자기 속에 새사람으로  살아난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두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 땅에 속한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은 사람 하나 있고, 또 하나님과 같은 사람 하나 있습니다.

이래서 안 믿을 때는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살고 그대로 살지지마는 중생되고  난 다음에는 한 자리서 아무리 부자간이라도 얘기하면은 안 통합니다. 이제  그거는 땅에 속한 사람은 땅에 속한 말하고 땅에 속한 주장과 땅에 속한 모든  생각만 알고 있고 또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에 속한 자를  알고 있기 때문에  둘이 만나도 합치지 않는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땅에 속한 자도 있고 하늘에 속한 자도 있고, 땅에 속한 자로 난 자  있고 하늘에 속한 자로 난 자가 있는 그 두 가지로 난 사람은 이제 사람을 대할  때에 땅에 속한 자를 대할 때는 땅에 속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땅에 속한 자로  이 상대하고, 또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에 속한 자를 상대해 가지고서 이렇게  이중으로 이렇게 해서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이중을 알지마는 하나로 일중으로 난  사람은 일중뿐이지 이중을 모른다 그거요.

요것을 누가, 요거 보고한 사람, 요거 보고한 사람 여기 존칭을 성직을 말할 필요  없습니다. ‘장로님’ 이래서 이럴 필요도 없고 ‘목사님' 성직명을 쓰지 말고  이름만 쓰면 됩니다. 위에 장로면 장로 목사면 목사만 해서 그라면 되니까 그래  해서 기록해 보내도록 하십시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고 찬송가 내가 맡겨 놨는데 그거 그렇게 말을 잘못 듣고 잘못 해 놨어.

이러니까 그 한 사람들 오늘 지금, 오늘이 그믐입니까? 하루요? 오늘  삼십일일인데 아마 오늘 시간이 없을란지 모르겠고 또 내일은 일일이니까 다  공휴일이니까 시간이 있겠지요? 있으니까, 내일이 금요일이가? 내일이 일일이니까  시간 있을 터이니까 그때 모두 또 모여 가지고 찬송가 가사가 이게 낫나 저게  낫나 대조를 해 가지고서 이거는 이렇게 말했고 저거는 저렇게 말했으니까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고 이거는 성경대로 됐다 이것을 구별해 가지고 그걸 뭐  거석해서 입에다 넣어 줘도 토해 내고 안 먹는다 그말이오. 이렇게 이렇기 때문에  이 마귀란 놈 말은 잘 들어. 그래 성경에 말하기를 예수님이 “너희들이 땅에  속했기 때문에 땅에 속한 자의  말하면은 잘 듣고 하늘에 속한 자의 말 하면은  잘 안 듣는다” 이래서 양과 염소가 다르다. 이래서 양은 하늘에 속한 말 들으면은 잘 듣고,  거석한 사람은 땅에 속한 말들을 잘 들어요. 목사가 돼도 진리가 속에 들어가지  안하고 들으면 반대되고 예수를 안 믿어, 안 믿는 사람도 처음에 와서 요 진리를  말하면 ‘요게 옳다’ 요래 대번 착 듣는다 말이오. 그러니까 이거 잘못된 것은  가르칠라 하면 고칠라 하면 얼마나 힘이 많이 드는지? 안 믿는 사람 전도해  가지고 예수 믿기로 해서 믿으면 이거는 잘 되는데 삐뚤어진 거는 얼마가  고치기가 힘이 드는지 몰라요.

그거는 만 가지가 다 그래요. 예를 들어서 피아노를 가르친다고 하면은 되는데  잘못 배워 놓은 것은 그건 좀 그래 몇 달 공부했는데 그 사람은 안 배운  사람보다 가르치기가 힘이 들어요. 안 배운 사람은 딱딱 가르치면 되는데 잘못  배웠기 때문에 잘못 배운 그놈을 뽑아버리기가 힘이 더 든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를 처음부터 잘못 믿은 그거는, 어제도 내가 어떤 사람  만났는데  그뭐 방언을, 항상 예수 믿어도 ‘다른 사람은 방언, 성신 받으면  방언하는데 나는 방언을 못하니 이거 내가 지금 중생됐나 안 됐나, 내가 성령  받았나 안 받았나?’ 이렇게 자꾸 생각이 난다 하니 그 사람 잘못 관념이 들어  그렇다 말이오.

방언은 데데데데데 하는 그것도 그래 말하는 것도  종류에 방언이 있지마는 외나  방언의 본종은 그게 아닙니다. 방언의 본종은 뭐이 방언의 본종인고 하니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이 오시니까 방언의 다 은혜를 받았다 그말은 베드로가 한  베드로가 유대인 말로 설교하니까 온 세계 각국에서 십여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그 설교를 유대인 말로 설교하는데 그 사람들이 다 저거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이러니까 말을 할 때에 상대방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들을 수 있게 전하는 그  권능이 방언의 권능입니다. 방언의 권능. 알겠어요? 또 이제 그 방언의 권능이 듣는 사람에게는, 듣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말씀을 들을 때 잘 들어 깨닫게 하는 그것이 방언의 은혜입니다.

방언이라 말은 모 방자 말씀 언자, 그러면 유대 지방의 말로 했는데 로마 지방의  사람도 그 말을 듣고 또 다른 지방에 마게도냐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고,  이러니까 한 말로 말하는데 각국 방언으로 말을 듣게 하는 그 권능이라, 또 이 사람은 아주 쉬운 말로 했는데 아주 대지식가 그 사람들도 알아듣게 되고  또 어려운 지식의 말을 했는데 무식한 사람도 알아듣게 되고, 말을 들을 수 있는,  방언의 은혜라 그말은, 방언이라 무슨 방언이냐 하면은 중국 방언, 또 뭐 미국  방언, 또 뭐 로마 방언, 그게 방언 아닙니까? 사람을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권위 있게 말하는 것 또 들을 때에 그 말을 알아듣고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방언의 은혜입니다.

그게 사도행전 2장에 있는 첫째 방언의 은혜고, 그후에 방언의 은혜 또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꾸 이와같이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은 나중에 가서 자기 입이  따라가지를 못합니다. 기도 할라 하면 입은 이 둔하기 때문에 마음은 벌써 한 열  가지나 구했는데 이 입은 찍해야 한 가지도 못 따라간다, 못 따라 한다 말이오.

이러니까 나중에 이라다 보면은 자꾸 말과, 고기덩어리로 하는 이 말과 자기  마음의 간구, 이 마음의 간구를 고기덩어리가 따라갈라고 애를 쓰다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따라가지 못할 때에는 어찌 되느냐? 그때는 그만 방언이 되는데,  이러니까 그뭐 뭐라고 말할 수 없고 자꾸 이래 자기가 말을 자기가, 속에  마음으로서는 지금 열 가지 백 가지를 자꾸 이래 해 나가고 있는데 입은  따라오지 못하니까 부득이 그때 넬넬넬넬넬 러러러러 이렇게 들린다 말이오.

이거 사람 보기에는 그만 이래 되나마 실은 그 속에 자기가 마음으로 영감 받아  가지고 마음으로 자꾸 하나님에게 이렇게 향해서 말하는 것인데,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으로 더불어나 교제되는 것이고 사람으로 더불어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교제되는 그것이라 그겁니다.그러면 그라는데 이제 거기 해석하는 건  자기가 인제 자꾸 그래 하면 그걸 들으면 알 수가 있는 것은 ‘저 사람 지금  무슨 지금 기도를 하로 있다’ 그걸, 사람이 자꾸, 모르는 사람은 거석하지마는  능한 사람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 사람은 무슨 지금 간구를 하고  있다’ 하는 그것을 아는 것을 가리켜서 이제 통역의 또 은혜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래서 “일만 마디 방언 보다도 한 댓 마디 깨닫는 것이 낫다” 그렇게  말씀했읍니다. 똑똑히 알아보면은 “너희들이 방언하기를 힘쓰는 것보다도  예언하기를 구하라” 방언은 여기 지금 방언은 뭐 잡탱이 방언이요, 그거.

잡탱이 방언인데 방언은 외나 진짜 방언은 이제 말한 대로 사도행전 2장 방언이  진짜 방언이고 그다음에 방언은 어떤 게 방언이냐 하면은 자기가 간절한  마음으로 자꾸 이래 기도하면은, 기도의 문이 열리면은, 기도의 문이 열리면은  처음에는 기도할라 해도 할 말이 없지마는 자꾸 기도하다 기도에 마음이 열려  가지고 영계, 영감을 받아 가지고 기도하게 될 때는 자꾸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까? 자꾸 기도가 나오는데 기도가 나오다가 보면 자기 마음으로는 기도할 게 많아서  이것 저것 자꾸 기도해야 되겠는데 입은 따라가지를 못해. 입은 이거 둔하요.

입은 마음이 백 마디 할 때에 입은 한 마디도 옳게 못 합니다.

이라다 보니까 자꾸 그렇게 나가니 부득이 입으로는 나중에 가서는 그만 말  어운이, 어운, 어간 어미가 다 안 되니까, 어음이 똑똑이 안 되니까  에레레레레레레 이랄 수밖에 없어. 그거 자꾸 주여 저저저저저저저  마음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어. 그게 마음으로 기도하는 거라. 마음으로 기도하는데 이  고기덩어리는 그저 형용만 하고 있지 이건 작용을 바로 못 해요.

이라다가 나중에 그 기도가 또 자꾸 이렇게 심하게 돼지면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도 그거 피곤해서 기도를 못 해. 마음으로 요거 생각하고 조거 생각하고 그래  못 해. 못 하고 마음이 확 열리면은 이제 자기 마음으로 열 번 말할 것을 한목 다  볼 수가 있다. 다 보니까  마음으로 쫙 다 보고 자기 마음에 생각은 다 그것은  그뭐 천리  만리고 환하게 다 열려. 환하게 다 열리고, 이리 되면은 그때 가서는  자기는 기진해지면은 가만히 있고 이제 구경하는 거라. 그러면 성령이 자기 대신  기도를 하고 있어. 성령이. 성령님이 대신 기도해 주는 것을 자기가 볼 수가 있다  말이오.

이거는 간절한 마음에서 생겨지기 때문에 이 외식자들이 간절한 그것을, 그리  이끌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그 외에는 데데데 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하나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  너희들이 방언하는 것보다 예언하기를 힘쓰라” 이래. “예언하기를 힘쓰라” “예언하기를 힘쓰라” 예언은 뭐인데? 예언이라는 것은 미래사를 말하는 게  예언이 아니오. 예언하기를 힘쓰라 그말은 깨닫기를 힘쓰라 그말이요, 깨닫기를  힘쓰라. 다른 사람은 깨닫지 못한 것을 자기가 깨달아서 그걸 말하면 그것이  예언이라.

선지자라 하는 것은 미래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 한국 말로 말하면 먼저 선자  알 지자니까 미래사 아는 걸로 이래 말하지마는 그게 아니라. 본 뜻은 선지자라  말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감추어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만이 아시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려서 전달해 주는 게 선지자라.

그러면 예언은 미래사를 말하는 게 예언이 아니라 예언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파해 주는 것이 그것이 예언이요 선지자  노릇이라.

그러니까 “예언하기를 힘쓰라” 그말은 신구약 성경이 있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이 도리를 바로 깨닫기를 힘쓰라 그말이오. 바로 깨닫기를 힘써라. 그러면 성령은,  성령은 성경 말씀을 바로 깨닫게 하시고, 또 그것을 믿게 하시고, 또 그대로  소원하게 하시고, 그대로 실행하도록 독촉하고, 실행할 때에 도와주고 하는 이게  성령이지 뭐 그만 데데 그까짓 소리 아무 소용 없어. 그것뿐이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 그말 했어. 성경에 말하지 안했소? 그것뿐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그 방언은 아무 교회에는 도로 오랑캐가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아무  소용이 없다. 알아들어야 다른 사람이 아멘 할 것 아니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자꾸 보이는 것만 위주하고 보이지 안하는 영면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여기 방언이니 뭐이니 하는 이것이 없었어요. 경남에서 제일  처음에, 제일 처음에 방언파의 조상이 누구냐 하면 제고 또 진동파의 조상이  저입니다. 제가 집회할 때 그때 그래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때부터 이래 시작해서  터져 나왔는데 지금 한 오십 몇 년 됐습니다.

이랬는데, 그라고 난 다음에 그만 이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간절히  기도하면은 기도의 문이 트인다, 기도의 자기에게 문이 열려서 기도에 마음 문이  열려 가지고 기도할 때에 기도가 살살 나오다가 나중에 거석하면 기도할 거는  많은데 언제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자꾸 이래 할라 하니 입은 따라가지  못하니까 부득이 입으로는 엉엉엉엉어어 이라고 자꾸 속으로 지금 마음으로  기도해 나가. 마음으로 기도해 나가기 때문에 이건 하나님으로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라.

이렇게 나가다가 나중에 가서는 그것도 또 심해지면 그것도 기운이 없어서 안  돼요. 기운이 없으니까 입은 따라갈 힘이 없어. 따라갈 힘이 없으니까 그때는  입을 거석하고 눈으로만 이래 마음으로만 이렇게 환하게 보고 있는데 마음으로  보고 있다가 나중에는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을 자기가 보고 성령이 대신 기도해  주는 것을 자기가 볼 수 있다 말이오. 그러면 자기는 참석만 해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령이 우리 대신 기도해 주신다” 하는, 로마서 8장에 있는  말씀은 자꾸 그렇게 해 나가면 이제 거게 도달하게 된다 그거요.

그러니까 요 거듭났다는 걸 요걸 잘 알아서, 보이는 거와 보이지 않는 이 비중이  있는데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더 온전한 자꾸 영적으로 이렇게 바로  온전함으로 들어가, 영적 뭐 꿈이나 무슨 이런 무슨 뭐 신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말하는 게 아니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확실해요.

이래서 자꾸 우리가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그러면 고기덩어리의 사람에서  마음의 사람으로,  마음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바꿔져야 돼요.

이러니까 사람도 서로 사귀는 것이 고기덩어리만 사귀는 사람 있어요,  고기덩어리로만. 고기덩어리로 서로 이렇게 사귀고 이라지마는 마음이 안 통하면  안 통해요.

그러니까 사람을 고기덩어리만 접촉하고 있는 그런 사람 있고, 고기덩어리 속에  마음까지를 접촉하는 그 사람이 있고, 또 마음만 접촉하는 게 아니라 마음 속에  양심까지를 접촉하는 사람 있고, 양심까지를 접촉하는 그 속에 영과 접촉하는 그  사람이 있고, 영과 접촉하는 그 속에 영감으로 접촉하는 사람 있어. 그러면 그  사람 속에 영감 있는 것만치 내 속에 영감, 영감과 영감이 접촉이 될 때에 비로소  이제 통해져.

그러기 때문에 통한다, 이러니까 ‘요 사람은 요 제일 껍데기 통하고 있다.’ 암만  한 자리에 뭐 같이 한 집에 밥을 먹고 이래도 속에 고기덩어리만 서로 접하고  있지 거기 마음은 통하지 않는다 말이오. 또 마음만 통하고 있지, 마음만 서로  이리 통하고 있지 속에 양심은 통하지 안하는 사람 있어요. 또 이 양심까지는  통해도 그 속에 영감은 통하지 않는 그런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막혔다 통했다  하지 안해요? 그러니까 처음 만나도 사람 만나보면 그만 환하게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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