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3 00:41
사랑의 빚
본문 :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이 말씀은 다 내가 빚졌다고 말하는 이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그 개인이 말함이 아니고 이 계시의 기관으로 쓰여서 이 역사를 말 한마디까지라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성령의 사람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만이 이떻게 말해야 되는 사람이 아니고 또 바울만이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구속함을 받은 우리들은 누구든지 다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이 바울같은 이런 사람이 될 수 있고 또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바울같이 이 깨달음을 가지고 이런 사람으로 사는 것이 기독자로서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지 않는 모든 것은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는 다 정상이 아닌 이 비정상의 사람이요 행동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다 이 사도 바울과 같은 이런 생각과 욕망과 생활을 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또 우리도 이렇게 사도 바울 같은 이런 생각과 욕망과 행위를 해야만 될 우리들입니다.
그런고로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신 이 성령의 사람을 우리가 보고 참고로 삼아서 우리도 그와 같은 성령의 사람이 돼야 할 것을 책임지고 목표로 삼아서 살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다음 주일 가르칠 공과의 제목은 사랑의 빚입니다. 사랑의 빚. 사랑의 빛이 아니고 사랑의 빚. 빚진 것. 사랑의 빚. 성경에 '아무에게나 아무 빚도 지지 말고 사랑의 빚 외에는 다른 빚은 지지 말아라' 그렇게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이 여게 '모든 사람에게 나는 빚진 사람이라' 하는 말은 나는 주님에게 빚진 사람이라 하는 그 말이 다 그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잠깐 사랑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하겠습니다. 사랑은 지극히 귀한 것이요 사람들에게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런 동시에 또 사랑은 사람에게 지극히 해독이 많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참 우리 사람에 가장 귀한 것이 사랑이요 또 사람을 가장 해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 사랑이요 타락시킨 배암의 사랑입니다. 마귀의 사랑이 우리 사람을 타락시키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을 마귀가 마귀의 사랑으로 변질을 시켜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마귀의 사랑, 에덴동산에서 아담 하와를 꾀운 그 배암은 마귀가 나타날 때에 배암을 입고서 나타났는데 그 배암 곧 사탄이요 마귀입니다.
그러면 마귀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 사랑은 두 가지가 있는데 모든 사람이 마귀의 사랑으로 죽었습니다. 한 사람도 마귀의 사랑으로 죽지 안한 사람은 없습니다. 마귀의 사랑으로 죽은 모든 사람 중에 택한 자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해 살렸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 사랑이면 다 같은 사랑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사랑을 주고 받았다가 크게 사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삼층에 들립니까? 들리면 손을 좀 들어 주십시오. 신관에 좀 울립니까? 울려서 잘 안 들리거든 손을 좀 들어 주십시오. 울려서 잘 안 들리면 손을 들어 주시고. 녜, 그러면 잘 들리는 줄 알겠습니다.) 타락 그대로 있는 사람들,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변화되지 못하고 인간 생각대로 사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도 없고 이해할 자도 없습니다. 전부 인간의 사랑, 이 마귀의 사랑, 해독이 가장 많은 이 에덴동산 배암의 사랑을 가지고서 오늘 모두 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근본 죽은 것은 인류 시조가 배암 사랑을 가지고 하와가 아담을 죽였고 아담이 하와를 죽였습니다. 그 죽음은 원죄인데 그로 인해서 정죄함을 받아 가지고 사망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영은 단번에 죽었고 이 심신으로 된 육은 단번에 죽지 아니했는데 서서히 죽는 그 죽음을 전부 사랑을 가지고 다 죽여버립니다. 그러면 영도 인간의 사랑으로 죽였고 또 육도 인간의 사랑으로 다 죽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자녀는 부모를 사랑한다고, 또 가족은 가족을 사랑한다고, 서로 이웃을 사랑한다고, 사회를 사랑한다고, 국가를 사랑한다고, 민족을 사랑한다고 모두 다 사랑한다고 하는 이 사랑을 가지고서 인간은 다 죽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은 무지 무능합니다. 사랑 하기는 사랑하지마는 지혜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무지 무능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사랑한다는 것이 나중에 지나가고 보면 그것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일이 돼 버렸습니다. 또 사랑함으로 이렇게 위해서, 위해서 이런 노력 저런 노력을 한 그것이 나중에 보니까 그것이 들어서 다 죽이는, 그런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 그뿐만 아니라 그것마저도 그런 사랑이라도 그것이 그 수명이나 길면 한 천 년이나 살면 천 년 동안은 사랑할 수 있겠는데 불과 한 칠팔십 년에 지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만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 수명이 짧으니까 잠깐 있다가는 마지막에 다 슬픔으로 다 화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오늘 사랑한다는 것이 내일 보니까 미움이 될 수 있고 오늘에 위한다는 것이 내일에 보면 해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아주 극히 좁은 범위에 맞춰 가지고 사랑을 하고 또 이리저리 치우친 그런 치우침에서 그게 사랑인 줄 알고 사랑했기 때문에 좁은 범위의 것이 넓은 범위를 대할 때에 그 전체를 대할 때에 그것이 다 자멸을 하는 그런 일이 되고 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하나님만 가졌지 다른 것은 가진 자가 없습니다. 왜? 사랑은 첫째로 지혜가 전지한 지혜를 가져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전체를 다 알아야 그 전체면으로 유익하도록 할 수 있지요. 또 오늘 사랑한다는 것이 내일에 죽음이 된다면 그게 사랑이 안 되겠습니다.
요새 우리 한국 나라에서는 그런 것을 잘 봅니다. 자기의 친족을 사랑한다고 공산주의가 오니까 그 형제를 사랑한다고 6·25 때에 공 산주의로 끌어들여서 사랑하니까 아무래도 지금 이 형제를 구출해야 된다고 분발하게 구출했지마는 나중에 또 국군이 들어와서 후퇴하고 나니까 그뒤에는 또 그게 잡혀 죽는 일이 됐습니다.
사랑은 전지한 지혜자가 아니면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모든 종류대로 전부를 다 알아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종류 모든 면으로 그에게 유익이 되는 그런 일을 내가 선택할 수가 있고 경영할 수가 있지 모든 면을 모르면 일면만 알면 일면만 보면 그 사랑하는 게 되지마는 이면을 보면 미워하는 게 될 수 있고 전체면을 보면 살해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전지한 지혜를 가진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또 사랑은 전능한 능력이 없는 자는 안 됩니다. 제가 암만 사랑하고 사랑하고 싶지마는 제가 몰라도, 그에게 어떻게 하면 유익이 되련지 어떻게 하면 사는 게 되련지 어떻게 하면 망하는 게 되련지 그걸 모르니까 사망을 피하고 생명을 줄 수가 없고 그 길로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또 자기가 아무리 그를 복되게 해 주고 싶어도 능력이 없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참 사랑하는 자라도 자기에게 힘이 없으면 그에게 사랑을 베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영생을 가진 자라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영원히. 영생을 가진 자라야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사랑하지마는 그만 내일 죽어버리면 그것도 비극입니다. 이러니까 세상에는 사랑이 한 근쯤 되면 반드시 그 사랑은 마지막에는 슬픔의 한 근으로 바꿔집니다. 그거는 뭣이냐? 그 사랑마저 수명이 짧아서 끊쳐지는 날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 사랑은 전지해서 알지 못함이 없어야 되고, 능치 못함이 없어야 되고, 또 영원해야 되고, 그럴 때에 그 사랑은 참 사랑할 수가 있고 그 사랑은 영원히 가도 그에게 유익된 그런 것을 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사랑은 무지합니다. 내일 어찌될지 모르지, 오늘 좋아서 뭘 위한다 하지마는 내일 그것이 뭘로 변해지련지? 또 자기가 사랑한다고 하지마는 이런 지식을 가지고서 사랑했는데 뒤에 가 보니까 자기가 지식이 변해지고 나면, 지식이 변해지면 사람이 변해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지식이 변해져도 사랑이 변해지고 그 지식이 유한한데 다른 전체의 지식에게 대적이 돼도 그것은 위하는 것이 결국은 해하는 것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은 무지 무능하고 또 수명으로도 단명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그게 사랑이 되지를 못합니다. 또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절대자, 절대자 그분도 모르고, 그분의 것 가지고 먹고 살면서 그분도 모르고, 그분의 법칙도 모르고, 그분에 대립되는 그것도 모르고 이러니까 이것은 참 하는 모든 생활이 화약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것밖에는 안 되기 때문에 그 종말은 멸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 사랑은 조물주에게 배치가 되기 때문에 그게 사랑이 될 수 없고 무지 무능하기 때문에 사랑이 될 수 없고 또 수명이 짧기 때문에 변해지니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그분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또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고 또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은 하나도 무지한 면이 없습니다.
하나도 모르고 무지한 면이 없고, 잘못된 면이 없고 또 우리에게, 좋은 면은 못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전지 전능 영생자만이 참 사랑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사랑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 실력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실력을 가지신 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물론 밥 먹이고 옷입히고 이런 것도 중요합니다. 중요하나 그것은 벌써 그 분이 일반적으로 사람을 낼 때에 먹을 것, 입을 것, 또 마실 것, 그런것은 다 누구든지 줘서 먹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하셨는데, 우리 사람에게 제일 문제되는 점이 뭣이냐? 제일 문제 되는 것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게 거슬려지는, 하나님과 대립이 돼서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는 그 문제가 제일 크고, 또 그다음에는 하나님이 법칙을 우리 인간들에게 정해 주셨는데 그 법칙이 지성법이요 지공법인데 그 법칙을 정해 주셨는데 법칙을 다 어겨버렸습니다. 그 법칙을 다 묵살하고 그 법칙을 어겨 놓은 그 큰 문제가 또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람이 자기를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신 이 창조주,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옆에 조는 것, 깨울라 하면 잠이 전염해요. 자든지 말든지 내비두고 자기나 안 졸아야 되지.-내가 무슨 말 하다 말았지? 자존자로? 그래. 자존자 이 지극히 크신 그분과 대립의 원수되어 있는 그것이 제일 큰 문제 첫째 문제고 둘째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법칙을 줘 놨는데 인간들에게는 이런 규범 안에서, 이런 규범 안에서 이런 법칙으로 살아라 줘 놨는데 그 법칙을 어겨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지성과 지공법을 그만 어겨버렸습니다.
또 하나는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은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음받고 그분의 것으로 살고 있는 것이 그분으로 인하여서 활동을 해야 될 터인데 그만 그분을 냅두고 제가 왕이 돼 가지고 제 맘대로 활동하는, 제 맘대로 활동해서, 하나님에게 속해 가지고 하나님에게 이 피동으로 순종으로 살지 안하고 제 맘대로 사는 이 못된 악이 사람들에게 와서 있는 이것이 셋째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세 가지 문제가 인생에게 제일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 세 가지 문제만 해결지우면 인생이 뭐 다 영생할 수 있고 영원히 행복되게 살 수 있는 것인데 이 세 가지 문제가 제일 큰 문제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뭣 때문에 죽느냐?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죄는 무슨 죄냐? 이제 말한 이 세 가지를 합해서, 이 세 가지 잘못된 것을 합해서 한 말로 죄라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율법이 있기 때문에 그 죄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런 권세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주 지존자 그분에게 대적이 된 그 잘못, 또 하나님의 법칙을 어긴 잘못, 하나님에게 속하지 안하고 제 맘대로 사는 제가 주장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인 그 악 이 세 가지를 합해서 죄라고 했는데 이 죄로 말미암아 사람은 망하고 죽고 영원한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서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전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대립의 자리에 서는 것이요, 또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요, 이러기 때문에 이 세 가지 문제가 제일 큰 문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이시니까 당신이 우리가 범한 이 세 가지 죄를 뭐 당신이 그만 괜찮다 이렇게 묵살시켜 버리고 그것을 그만 없애버리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이 돼지지마는 하나님은 그렇게 못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공 지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도 당신의 법을 어기지 못합니다. 당신도 당신의 법을 어기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도 조금 양심 있는 경관이라고 하면 자식이 범죄했을 때에 자기 부모가 범죄했을 때에, 자기가 경관이라면 법을 가지고 닥쳤으면 어쩔 수 없어 그 법대로, 자기 부모요 자녀라 할지라도 법대로 처형을 하고 자기는 거게서 사표를 내고 자기가 그 처형을 당한 그 형에 대해서 자기가 무슨 돈으로 뭣이든지 대속을 하려면 하지 그거는 그대로 법 대로 시행하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이 내놓은 법칙이지마는 당신이 당신 법을 어기지 못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어기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이 완전한 사랑, 이 사랑은 하나님 혼자만 가지고 있는 사랑입니다. 다른 이는 사랑을 가질 수가 없어요. 사랑 가진다는 것이 그다음에 보니까 미움이 되고, 위한다는 것이 해가 되고, 인간은 그 사랑을 사랑하기는 사랑하지마는 그게 사랑이 되지를 못해요. 왜 사랑이 못 됩니까? 뭣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을 가지지 못합니까? 요걸 똑똑히 좀 압시다.
내가 며칠 전에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어떤 권찰님이 교인들한테 가 가지고 이걸 하나씩 물었더랍니다. 하나 둘 물으니까 깜깜한 절벽이라. 하나도 모르더랍니다. 하나도 몰라. 이렇츰 허무한 줄 몰랐다고 놀라는 소리를 해요.
이제 데리고 앉아 가지고서 하나씩 둘씩 그저 자꾸 이래 가르쳐서 이래 하니까 알더라고. 그럴 거라. '자존자' 하면 자존자가 무슨 말인지 그뭐 해석은 여러번 하기는 했지마는, '기본구원' 기본구원이 뭣인지 전연히 모르더랍니다.
이러니까 모르면 모르는 것을 구역장에게라도, 여게서 쓰는 단어도 모르는 것이 많을 것, 또 교리도 모르는 것 많을 것, 그러니까 구역장에게 그것을 묻고, 또 구역장들도 진리를 교인들에게 가르치면서 진리로 교인들을 구원하면 이게 참 알곡이 될 터인데 자기부터도 예배볼 때는 꾸벅꾸벅 졸아 가지고 진리는 하나도 모르고 가 가지고 '예배당에 나오십시오 나오십시오' 이러니까, 나오면 물론 진리를 들으면 되겠다는 그런 생각도 있겠지마는 그래도 그걸 골을 꺼내줘야 되고, 골을 꺼내줘야 되고 귀를 조그매 뚫어줘야 됩니다. 귀를 뚫어줘야 그것이 알아듣기 시작해야 알아들어지지 그리 안 하면 못 알아듣는다 그거요.
이러니까 여러분이 여기서 배울 때에 어짜든지 아무리 내가 열심히 새벽기도 나오고 뭐 나와도 여게 나와 가지고 진리를 배울 때에 이 진리를 깨닫고 알아야 되고, 알아야 또 내가 그대로 생활을 할 수 있고 또 행동해야 구원이 되는 것이니까, 모르면 어떻게 할 걸 어찌 알겠습니까? 또 행동이 없으면 무슨 구원이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꼭 알아들으려고 애를 써야 되겠다 그거요.
그러면 사랑은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모든 사람들은 사랑을 가질 수 없는, 사랑을 가질 만한 실력이 없는 그 이유가 뭣입니까? 무슨 실력이 없습니까? 몇 가지 실력이 없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녜, 이 세 가지 실력이 없습니다. 지혜도 모자라고 능력도 모자라고 수명도 모자랍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 한다 그거요.
그러기에 그것이 왜 인간 사랑은, 인간 사랑이 뭘 다 합니까? 자기가 죽을 때는 사랑하는 자를 두고 자기가 죽을 때에 참 마음에 원통해서 눈물을, 죽는 자도 눈물 흘리고 또 보내는 자도 눈물 홀리고 하지마는 수명이 까라지니까 할 수 없다 그거요.
그러기에 세 가지 자격이 없고, 또 큰 거는 뭐이냐? 절대자이신 이 주재가 있는데, 절대자 주인이 있는데, 이분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았고 이분의 것 가지고 먹고 살고 이분의 것 되어 있는 인간이 이분을 모르고 이분에게 반대되는 일만 자꾸해 놨으니까 그 일이 사망밖에 더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오늘밤에도 '사랑은 둘이라더라. 사랑은 둘이다. 하나는 인간 사랑이요 하나는 하나님 사랑이다. 인간 사랑은 인간을 유익되게 한다고 하지마는 지능이 모자라서 다 결과적으로는 해되는 일을 하게 되고 또 수명이 짧아서 그것마저라도 길이 좋게 할 수가 없다.
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인데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은 영원히 계시 지, 밤이고 낮이고 바다에 가도 우리와 함께 어데든지 우리와 같이 계시지, 또 알지 못하심이 없지 능치 못하심이 없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걸 다 아낌없이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시지, 이러니까 참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인간 사랑이 있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십시오.
사람은 뭣이 들어 죽였느냐? 에덴동산에서 이 배암이 와서 배암의 사랑을 하와와 아담에게 줘 놓으니까 이 하와가 배암의 사랑을 받아 가지고 선악과를 먹는 것이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것인 줄 알고 선악과를 먹었음으로써 죽었습니다. 또 자기만 먹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에게 선악과 먹이는 것이 사랑인 줄 알고 먹였고 아담은 아내가 자기를 이렇게 선악과를 주며 같이 먹자 하는데 먹어 주는 것이 그게 사랑인 줄 알고 또 먹어 줬더라 그거요. 그게 들어서 죽였습니다. 서로 죽였어.
지금도 인류는 전부 사랑으로 죽습니다. 자녀를 사랑함으로 자녀를 죽였고, 부모를 사랑함으로 부모를 죽였고, 친구를 사랑함으로 죽였고, 전부 인간이 지금도 죽는 것은 전부 사랑 배풀다가 죽었고 사랑 때문에 죽었고 사랑으로 다 죽었습니다. 사랑으로 죽지 안한 것은 한 뽀스래기도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간 사랑은 인간이 사랑하고 싶고 위하고 싶고 되게 하고 싶지마는 무지 무능하기 때문에 안 되고, 제가 하나님 같으면 되겠는데 무지 무능하기 때문에 안 되고 절대자가 있는데 그분에, 소속하지 안하고 그분을 반대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안 되고 또 수명이 짧아서 안 되고, 참 사람은 하나님 한 분만 가지고 계시는 이 사랑은 참 사랑이요 살릴 수 있는 사랑이라.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 어떻 사랑하셨느냐? 인간의 지혜로서는 사람을 사랑할 때에 잘 먹이고 입히면 잘 살 줄 알고 잘 먹이고 잘 입히면 됐다. 그 이상 없다. 잘 먹이고 잘 입혀서 몸이 건강하고 약도 많이 먹이고 건강하고 또 좋은 자리에 평안하게 잘 살리면 그것이 사랑인 줄 알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길게 가지도 못하고 그것이 외나 그떻게 함으로써 자꾸 조물주와는 배치가 되고 지공 지성법에 배치가 되니까 그게 사망이 됩니다.
이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에는 어떻게 사랑하셨느냐 보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에게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척 와서 보니까 우리에게 문제 제일 큰 문제 가지가 있습니다. 그 문제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세 가지 문제만 해결 해 주면 사람들이 죽지 안하고 영생도 할 수 있고, 또 영원히 평안히 살 수 있고, 영원히 기쁘게도 살 수 있고, 영원히 모든 것이 다 충족한 데서 살 수가 있는데 이 세 가지 문제가 제일 큰 문제라서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 줘야 되겠다 해서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사랑의 주님이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주님이 우리 세 가지 문제가 뭣이냐? 좀 전에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원수된 문제, 하나님의 법칙을 어겨서 어긴 문제, 또 사람들 속에 악이 있어서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사는 요 불의의 불법의 요 문제, 요 세 가지 문제가 있어서 요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 줘야 되겠는데,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면 다른 길은 없고 이 세 가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사망하게 되었으니까 영원히 사망하게 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되겠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되겠고 또 하나는 이제는 하나님 앞에 어겨서 제 맘대로 산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법에 만족이 되도록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법이 요구하는 대로 요구에 만족을 하도록 거기에 만족을 이루어지려는, 지공과 지성법을 완전히 이행한 그 실행이 있어야 되겠고, 그다음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이 원수가 화목이 돼야 되겠다 그거요.
그러니까 이 세 가지 문제가 제일 큰데 이 세 가지는 사람이 들어서 범해 가지고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로서 하나님 앞에 정죄받아 가지고 영원한 멸망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여게서 구출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그만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 용서한다' 이러면 하나님이 당신이 세워놓은 지공법과 지성법이 틀리기 때문에 안 되겠다 그거요.
또 하나님이 당신이 '내가 그러면 대신해서 하겠다' 해도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지은 죄는 인간이 대신 벌을 받아야 되고 인간이 행할 것은 또 인간이 행해야 되겠고 인간이 또 하나님과 원수된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화친이 돼야 되지 인간이 아니면 안 되겠다 그거요. 이러니까 하나님이 할 수 없어 사람되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가지고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것은 이것은 창조주가 피조물된 것이기 때문에, 어떻습니까? 창조주가 피조물의 인간 된 것이 우리가 구더기가, 우리가 구더기, 똥구덩이에 있는 구더기 말이요. 우리가 구더기 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된 것과 어느 것이 좀 차이가 큽니까? 어느 것이 차이 큽니까? 우리가 구더기 된 것이 좀 차이가 큽니까? 어떻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사랑함으로써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구더기가 되는, 그 사랑함으로 사랑하는 자를 구원하면 네가 구더기가 안 되면 안 된다 해서 우리가 구더기가 됐다고 하면 우리가 구더기 된 것이 더 큰 천해진 것입니까 창조주가 피조물 된 것이 천해진 것입니까? 창조주가 피조물 된 것은 우리가 구더기 되는 그런 것 억억억억…만 배도 더 천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천해지시는, 피조물이 안 되면 우리를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이 되어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또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이제 사람으로서 다 받았습니다. 또 우리가 행할 것을 또 당신이 다 행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을 가져야 될, 이 원수된 이것을 화친을 해야 될 걸 당신이 대신 다 화친을 했습니다.
그러면 세 가지 대속을 하는데 그 세 가지 대속을 하려고 하면, 세 가지 대속을 하려고 하면 예수님에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남겨 놓고는 될 수가 없고 당신에게 있는 그 부요와 영광과 권세, 또 존귀 심지어 그 생명까지 다 내놔야, 다 내놔야 그 전부가, 그 전부가 다 사망이 돼야, 그 전부가 다 사망이 돼야 우리 사망을 대신할 수가 있고 또 그 전부가 다 없어지기까지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법에 순종을 함으로써 그걸 다 들여서 순종을 해야 불법을 해결지워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지공과 지성을 다 행했다 하는 의가 되어지기 때문에 그래 하고, 또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화친을 할 때도 당신은 화친을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이제 성부는 원수로 이와같이 지금 대적을 하는 것을 화친하려고 하니까 있는 걸, 있는 걸 화친하려고 다 들여 화친 화친 하려고 애를 써도 안 되다가 마지막에 화친을 하려고, 하나님은 저주하고 배척을 해도 화친한 그 당신으로서 그만 세상 끝을 마쳐버렸습니다. 이걸 가지고서 우리를 대속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큰 희생인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들여서 우리에게 난제 이 세 가지 난제를 해결읕 지웠습니다. 난제 이 세 가지를 해결을 지웠고, 또 해결지우고 나니까 당신은 죽어버렸습니다.
당신은 죽어버렸어.
죽었는데 죽었지마는 인성은 죽었지만 신성은 안 죽고 있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그만 끝나면 하나님이 사람되어 왔다가서 그것으로 끝나버리니까 이제 모욕당한 일은 끝나버렸는데 다지 우리를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을 지웠지마는 우리가 죄 없는 자로 살고, 하나님께 피동 되는 의로운 자로 살고, 하나님과 화친된 동행자로 영원히 영생하도록 하는 데에는 당신이 또 사람을 입고 부활하지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이런 천한 사람을 또 입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만 고난이라 하지마는 십자가 못박혀 죽으신 것과 부활하신 것이 중량이 꼭 같습니다. 고난의 중량이 꼭 같습니다. 희생의 중량이 꼭 같습니다. 이래 가지고서 우리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이, 이 대속의 공로를 입어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되어서 하나님과 서로 연결이 되어지고, 또 성령도 우리에게 오셨고, 진리도 우리에게 왔고, 천국이 우리나라가 됐고, 영생을 우리가 가졌고 이래 된 우리들에게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희생해 가지고 너희들을 구원했으니, 너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모든 것 다 들여 가지고 구원했으니 이것으로써 내 사랑을 깨닫고 너희들도 내가 하나 부탁하니 너희들도 내가 너희를 이렇게 모든 걸 다 희생해서 너희를 사랑으로 구원했으니까 이 사랑의 구원을 받은 너희들은 내 소원을 하나 들어다오. 내 부탁을 하나 들어다오. 내가 너희들 위해서 모든 걸 다 희생해서 너희들을 구원한 것과 같이 너희들도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너희들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구해다오.' 하는 이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것이 주님이 한 마디 부탁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는 계명은 모든 계명은 한 말로 다 똘똘 뭉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이대로 너희들이 너희들의 형제를 사랑하여 달라. 내가 너희들을 사랑함으로 이렇게 큰 희생으로 구속한 것처럼 너희들도 형제를 사랑함으로 큰 희생을 가지고서 구원해라.' 요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이렇게 빚진 자라 이렇게 말하는 것은 주님은, 예를 들면 주님은 자기를 이 다섯 가지를 가지고서 다섯 가지를 다 가지고 사랑을 했는데, 사랑을 했는데 바울 자신은 주님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다섯 가지 다하지 못하고 아직까지도 몸뚱이가 살아 있고, 있는 소유는 다해 사랑했지마는 아직까지도 몸뚱이가 살아 있고 아직까지도 육의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에 주님은 몸과 생명을 다해서 나를 사랑해서 구원하셨는데 나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사랑한다고 해도 아직까지 내게 몸이 남아 있고 주를 사랑함으로 다 없어지지 못하고 몸이 남아 있고 생명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나는 주님이 다하여 사랑하신 그 사랑을 나도 다하여서 사랑치 못했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나는 빚진 자라.
또 주님이 다해서 나를 사랑하여 구원하시고 나한테 한 마디 똑 부탁한 게 있는데, 한 마디 똑 요청한 게 있는데 요청한 것 그거는 뭣이냐? '네가, 내가 너를 구원한 것처럼 네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너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형제를 구원해다오.' 하는 이 부탁을 받았는데, 자기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갖 고난과 여러가지 굴곡과 애로를 많이 당했지마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기록돼 있습니다. 그렇게 어려움을 당해도 아직까지 형제 구원을 위해서, 소유를 다 들였고 날마다 생명과 몸뚱이를 다 들여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주님이 부탁하신 이 복음 운동, 형제 구원을 위해서 몸도 생명도 다 내놓고 다 내놔 가지고서 그날 복음 운동 해도 그날 또 안 죽고 살았다 그말이오.
살았으니까 몸뚱이도 남아 있고, 이러니까 남아 있으니 아직까지 나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대로 나는 형제를 다하여서 사랑하지 못했고 아직까지 남은 것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다 들여야 할, 다 투자해야 될 것을 다 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형제 구원에 대해서 나는 사랑에 빚을 진 사람이다.
형제를 내가 다 사랑하지 못했다.
그러면 주님에게 대해서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자기도 다한 사랑에 다해서 상대가 돼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주님 다해서 나 사랑했으니까 나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해야 될 터인데 다해서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해서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주님 앞에 빚진 자라.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 들여서 구원하지 못했고 남아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빚진 자라.
이래 가지고서 이 마음이 눌려서 평생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늘 '주님은 다해서 사랑했는데 나는 다해서 사랑하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나는 생명이 남아 있다. 아직까지도 나는 몸뚱이가 남아 있다.' 이래서 항상 빚진 마음, 또 형제를 사랑해서 뭐 오만 욕도 당하고 강의 위험, 광야의 위험 민족의 위험, 이방의 위험, 또 모든 거짓 형제의 위험, 도적의 위험 강의 위험, 바다의 위험, 이것 뭐 수없이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이래 했지마는 이것은 고사하고 아직까지도 주님의 이 교회를 위해서 주님의 교회에 내가 다 바치지 못했다 하는 이것으로서 늘 사랑의 빚진 이 감을 가지고서 늘 마음 무겁게 주님에게 대해서나 주님이 한 마디 부탁한 그 부탁에 대해서나 이 둘에 대해서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고통을 느끼면서, '내가 주님 앞에 갈 때에, 주님 앞에 가 설 때에, 한 마디 부탁했는데 내가 이것을 다 들이지 못했으니 주님 앞에 가 설 때에 무슨 안면으로 설까? 주님은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는데 나는 주님을 이와같이 내가 다 들여 사랑하지 못했으니 내가 주님 앞에 부끄러워 어째 설까?' 이래 하다가 로마의 감옥에서, 예수 전한다고 복음 전한다고 잡아다가 고문하고 때릴 대로 때리고 상울 대로 상해 놓고, 마지막에는 '아무래도 이거는 죽여야 되지 죽이기 전에는 안 되니까' 해 가지고서 이제 죽이려고 사형 선고를 떡 내려서 사형 선고를 내려 가지고 지금 인제 사형을 받는 그 직전에 그때사 마지막으로 이 편지를 쓰면서 디모데 후서를 쓰면서, 이제는 내가 제주를 붓는 것과 같이 내가 부음이 됐다. 이제는 내가 내 모든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들여 나도 주님을 사랑하게 됐고 다 들여서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게 됐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는 싸울 싸움을 다 싸웠고 믿음을 지켰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으니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이 나에게 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이 의의 면류 관을 나에게 주시리라. 내가 주님 앞에 이제는 부끄러움을 다 면했고, 물론 양은 다르지마는 하나님이 다해서 나를 사랑했는데 인간이 다해 사랑해도 다한 것은 같지마는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고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 대는 되지는 안하고 양은 안 되지마는 그래도 주님 앞에 나도 다해서, 더할 것 없이 다해서 사랑했고 주님이 나에게 부탁한 요구와 명령을 나도 다해서 이제 형제에게 구원 위해서 했기 때문에 이제는 안심이다. 이제는 주님 앞에 설 때 주님이 나를 칭찬 하시면서 의의 면류관을 나에게 씌워 주실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어떻게, 어떻게 주님이 다해서 나를 사랑함같이 나도 다 들여서 주님을 사랑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주님이 준 게 있으니까 '주여 주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러면 내가 밥을 굶고 자꾸 이래서 할 건가? 그럴 수 없고, 주님을 내가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나에게 사죄를 주신 것이 주님의 사랑이요, 칭의를 주신 것이 주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을 주신 것이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사죄외 칭의와 화친을 내가 이거 주님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마귀에 뺏기지 않기 위해서, 이 세 가치 이 사랑을, 세 가지 대속의 이 사랑을, 주님의 이 사랑을 원수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서 내가 간직하는 것이 이것이 내 정조를 지키는 것이요 또 이것을 요대로 생활하는 것이 내가 정조 지킨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주님을 주님이 주신 정조를 지키는 데 몸과 소유와 생명을 다해서, 주님이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을 받아 내가 당신 위해 살기를 다해서, 또 당신이 나에게 하나 부탁한 그 일을 다해서, 이렇게 사는 이 일을 해 나가면서 아직까지도 몸과 생명이 남아 있을 때에는 자기는 마음에 부끄럽고 미안하고 '어떻게 대할까?' 하는 마음이 무겁다가 순교당하는 그 일에 턱 직전에사 '이제는 주님이 다해서 나를 사랑하심같이 나도 다해서 주님을 이제 사랑하게 됐다. 주님이 다해서 나를 구원하심같이 형제를 구원하라 했기 때문에 나도 다해서 형제를 구원함이 됐다.' 하는 여게서만 안심하고 만족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도 이와같은, 주님의 이 사랑을 깨달아 사랑의 대상이 돼야 되겠고 이런 실감을 가지고 이런 양심을 가지고 주님을 대해서 우리가 살아야 할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사랑을 깨닫고, 이제는 사회가 나를 범죄하라고, 이러면 범죄만 하면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나에게 사죄를 입혀 줬는데 사죄를 뺏겼다 말이오. 죄 없다는, 죄 없다는 죄 없음을 뺏겼다 그거요.
그러니까 만일 나라에서 범죄하라 하면, 어떤 사람이 범죄하라 하면, 어떤 친구가 범죄하라 하면, 만일 남녀 이성에서 어떤 칠계범으로 범죄하라 하면 내가 '모가지가 끊겨도 이제 범죄하지 안하고 내가 주신 사죄를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분에게 정조를 지키는 것이요, 또 내가 주님에게 피동되어서 주님의 뜻대로만 사는데 이제 이 세상이 저거 뜻대로 사회 뜻대로 해서, 주님의 뜻대로 사는 이 의를 사에게 입혀 줬는데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안하고 다른 어떤 것의 주장대로 요구대로 명령대로 사는 그 불의의 생활을 하지 안한다고 어떻게 하면 내 생명을 내줘도 입혀 준 칭의를 뺏기지 안하는 것이 이게 정조를 지키는 것이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 이것을 당신이 생명을 기울여서 나에게 준 것인데 하나님 배반하라고, '신사참배 해라. 신사참배 해라. 뭐 어째라. 하나님 배반해라. 예수 믿는 것 부인해라. 예수 믿는 것 그만 치워라.' 하면 생명을 줬으면 줬지 주님이 이렇게 해서 화친 주신 이 화친을 내가 이제는 이 화친을 내가 뺏길 수가 없다. 생명은 네가 가지고 어짤지라도 내가 화친은 안 준다.
네가 나를 강제로 죽였으면 죽였지 화친은 안 준다. 내가 칭의는 안 준다 내가 사죄는 안 준다.
또 내게 있는 것 다해서, 죽는 힘 다해 가지고서 죄 없는 자로 살고, 의로운 자로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피동되는 생활로 살고 하나님으로 화친된 생활을 하겠다. 요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는 죄가 와 가지고서 범죄하라 할 때 내 속에 악독의 죄악이 와 가지고 죄를 범하라 하면 이제, 말했습니다. '입이 너를 범죄하거든 혀를 끊어라. 눈이 범죄하거든 눈을 빼버려라. 손이 범죄하거든 손을 끊어버려라. 네 어떤 지체가 범죄하거든 지체를 끊어버려라. 그러고라도 너는 죄지을 수가 없다.' 말했습니다.
이런고로 우리는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해서 주님이 입혀 주신 이 사죄를 벗지 안하고, 사죄를 우리가 지키기 위해서, 사죄를 보수하기 위해서 내가 다 들이고, 사죄받은 자로서 죄없이 살기 위해서, 칭의를 벗지 않기 위해서, 칭의받은 자로 의로운 자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배반치 않기 위해서 다 바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의 동행하는 생활로 하기 위해서 이 일을 위해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치는 것이 이것이 주님을 사랑함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지조를 지키고 정조를 지켜서 주님 앞에 이제 참 정조 주님은 우리의 신격의 참 주요 우리는 그에게 소속한 상대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간 말로 말하면 그는 남편이고 우리는 아내라고 신부라 이래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또 지조 있는 자로 살기 위해저 지조 있는 자로 사는 것은 뭣이냐? 죄 없는 자로 사는 것, 의로운 자로 사는 것, 하나님과 동행으로 사는 것이 지조를 정조를 가지고 사는 것이요 정조를 뺏기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삣기지 않는 것, 뺏기지 않기 위해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뺏긴 이것이, 바친 이것이 주를 위해서 바치는 것이요 주님이 하나 부탁했기 때문에 주님의 소원하시는 이 소원을 우리가 이루기 위해서 형제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도 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해서 형제 구원을 위해서 하는 이것이 사랑하는 주님이 나에게 한 가지 부탁하는 그 부탁을 우리가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늘 그래 말했어 마지막에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모든 것을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너한테 말한다. 주님 만날 그날을 생각하며 주님이 나한테 한 가지 부탁했는데 그 부탁을 우리가 어짜든지 완전히 그걸 다 해 가지고 감수해 해 가지고 가야 되겠다. 주님이 나를 사랑한 것같이 나도 사랑하는 이 사랑에 결실을 해 가지고 가야 되겠다 하는 이걸 목표로 했기 때문에 이것이 미달될 때는 항상 빚진 자로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앞에 어떤 일이 있든지 항상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이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 속에 성령의 능력이 와 가지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이렇게 사랑했는데 내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떻게 내가 했더란대도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했는데 내가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어려움 당한 것이 주님이 나를 사랑 해서 어려움 당한 것과 비교가 되나?' 할 때에 자기에게는 '아니다. 주여,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제 내 있는 걸 전부 다 들여 살겠습니다.' 새로운 힘이 나오고 능력이 나옵니다.
또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뭐 신사참배 고난이나 인민군들이 잡아다 놓고 우리를 어떤 고난 주련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말이지요. 뭐 별별 고난 줘도 그때에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써 어떻게 된 요것을 생각하고, 다른 것 생각지 안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생각하고 나도, 주님이 나 사랑함같이 나도 주님을 사랑할 요 사랑에 완성을 이를 요것을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자는 이기고 남음이 있을 것이고 그만 그것을 생각지 안하면 자기가 주님 위해서 너무 많이 수고하고 고생하고 희생한 것처럼 그렇게 악마의 마귀가 미혹을 줘 가지고 망령을 부리기 쉬운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가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보수하는 것이 정조를 지키는 것이오.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 결합의 정조를 지키는 것이오. 또 이대로의 사죄와 칭의와 화친으로 생활하는 것이 당신 앞에서 사는 것이오. 당신과 관계 맺은 자로 사는 것이오. 우리가 이렇게 형제 구원을 위해서 기울여 사는 것이 당신이 하나 요구하신 그것을 내가 감당하고 당신에게 서는 것입니다.
광고 하나 합니다.
거창집회는 팔월 팔일부터 시작됩니다. 미리부터 직장 경제 가정 문제등 모든 면에 준비하시고 특히 집회와 강사 목사님과 왕래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 합시다.
또 삼십 분 기도 후에 여전히 아래층에서 재독과 기도가 있습니다.
다음 주일 공과를 못 받으신 분은 나가실 때에 서기부에서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이거는 뭐 반사들도 받고 일반 아마 장년반도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혹 글자나 그런 것이 그저 불러 주면서 썼기 때문에 이것 뭐 새로 재독 한번 읽어볼 여가가 없었습니다. 한번 불러 줘 써 가지고 그만 그대로 한 것이니까 여기 혹 틀린 게 더러 있을란지 모르겠습니다. 장년반도 이것 받아 가지고 자꾸 읽어요. 받아 가지고 외워요. 읽고 외우고. 성경 다음으로 이것도 외우는 게 좋습니다.
우리가 빚진 요 양심을 가지고 삽시다, 빚진 양심. 이제는,주님이 죽어 나를 사랑했으니까 나도 죽어 주님을 사랑해야 될 것 아닙니까? 주님이 다른 것 다 가난해 사랑했으니까 나도 가난해 주님을 사랑해야 될 것 아닙니까, 다 들여서.
주님이 나를 이렇게 구원했으니까 나도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요 양심을 가지고서 양면 빚진 이 항상 양심의 눌림에서 살고 참 순교 척 할 때사 비로소 안심하고 '이제야' 할 수 있는 우리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