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한 사람


선지자선교회 1985년 5월 7일 화전집회 

 

본문 : 사도행전 3장 1절∼21절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그 아이가 어짠 아이입니까? (주: 정신 이상된 아이가 계속 소리 지름) 아픈  아이요? 아픈 아이라? 몸이 아파. 정신이 이상됐소? 예? 예? 아. 그러면, 데리고  왔으면 기도를 하고 또 다른 사람 은혜 받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 앞에 복을 받지 가운데서 자꾸 고함을 지르고 이래서 다른 사람  은혜 받는 데에 방해가 되도록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요? 그러니까,  여기에 방이 여기에 있으니까 이 방으로, (예? 안 들려요?, 안 들려? 저기는  하나도 안 들린다는데? 안 들려, 지금도? 예? 멀어도 거기 멀어 안 들릴까?  마이크가 멀어 그런 게 아니라. 안 들립니까? 들려? 그라면 내가 딱 들어앉아야  되겠구만. 인제 들립니까?) 그런 사람들은 바깥에 또 울면 데리고 나가기도 하고  이래야 되니까. 저 방을 좀 치우라 했는데, 말씀 못 듣는 그런 환자들은 저런 데  데려다 놓고 그래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도록 그래 하십시오.

 환자를 메어다가 지붕을 뚫고 달아내리니까. 예수님이 보시기에 특수한 방편을  써서 그렇게 환자를 평상에다가 메어다가 지붕을 뚫고 내리니까 그만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나타났습니다. 이러니까, 다른 모든 사람보다도 그 사람의  보호자가 그 사람을 낫게 하려는 간절한 그 소원과 성의를 보시고 그 사람을  먼저 낫게 해 줬습니다. 그것은 그 환자의 믿음으로 나은 게 아니고 환자의  보호자의 믿음으로 나았습니다.

 이래서, 환자의 보호자의 믿음으로 낫는 것, 환자 자신의 믿음으로 낫는 거 또,  다 낫아 주기는 예수님이 낫아 주시는데 옆에 그를 낫게 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의 믿음으로 낫는 거, 본인의 믿음으로 낫는 거, 낫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환자를 위해서 목사님이 위해서 기도해서  낫는 것도 그것이 그 환자를 낫게 하고저 하는 그 간절한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에 그때에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낫게 해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도 그 사람을 낫게 하고저 하는 그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시는 것이니까 그 보호자 곧 제 삼자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시는 것이고, 늘 창문으로 메어다가 놓은 것도 그런 것이고  또 교회 장로의 딸의 그것 낫게 해 주신 것도 다른 사람의. 제삼자의 믿음으로  낫게 해 주시는 거 본인의 믿음으로 낫게 해 주시는 것이 있는데 다 낫게 해  주시는 이는 주님이 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옆의 보호자의 성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런 인도 해 가지고.

말씀 들릴 수 있는 데로, 말씀 안 들리는 데 가면 안 돼요. 말씀 들리는 데 가  가지고서 거기에 놓고 말씀을 듣도록 하시이소. 하고, 기도를 자꾸 하이소. 낫아  주시기를 자꾸 기도해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낫아 주시요 거기에 놓고 고만하면  됐어. 거기에 놓고 낫아 주시기를 자꾸 기도해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십니다. 요 말씀을 들어야 돼요. 보자. 아따. 군대가 많은데? 어느 아이?  제이호가 그런 아이요? 이호가? 다른 아이들은 안 그렇제? 다 그래요? 그 아이만  그래요? 그라면 저기 데려다 놓고서 그래 말씀을 잘 듣게 해요. 그라면 낫아요.

거기에 놓고 말씀을 잘 듣게 해요. 거기에 딱 거기 그만 앉혀 놔 두이소. 거기  앉혀 놓고 말씀을 잘 듣게 해요.

 이런 것도 다 여러분들의 구원이 됩니다. 왜 구원이 되느냐? 우리는 아는 지식의  범위가 좁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의 지식은 일방적이기 쉽습니다. 전면을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요것은 꼭 병이 나았으면 좋겠다 싶으지마는  전면을 보시는 주님이 보실 때에 그것은 안 나아야 된다 그럴 것도 있고 또 우리  보기에는 이것은 낫지 안하고 좀 오래 좀 고생을 했으면 좋겠다 싶은데도 전체를  보시는 주님께서는 낫아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물론 우리가 구한다고 다 낫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나아서 필요한 것은 다  주님이 낫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  말씀은 다 없는 가운데 천지를 창조할 수 있는 이런 말씀인데도 우리의 믿음이  항상 에누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그 표적을 보게 되면  우리들의 믿음도 생겨집니다. 그렇지 않겠소?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봄으로. '이, 하나님이 참 저렇게  역사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봄으로 우리들에게도 믿음이 생겨지니까 구원이 된다  그거요.

 그러니까 저런 것도 우리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기도를 해요. '저 사람 참 저거 낫게 해 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간절한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면은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십니다.

 오전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 맨 끝으로 고기  덩어리의 병 낫게 해 주시기를 우리가 하나님에게 또 기도하겠습니다.

 이것은 거기 관한 거 아니나, 1절에,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이런 사건을 만났습니다. 이래서, 그전에 또 좀 제가  실행하다가 중단도 하고 이랬었는데, 성경에 보면은 구약 시대에 신앙의 참  위대한 사람들은 다 보면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었던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육체의 이스라엘은 대개가 아흡시. 열 두시, 세시 이렇게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평소에 뭐 잘 때. 깰 때. 또 식사할 때, 어데를 갈라고 출발할 때. 또  걸어서든지 타고 오든지 갈 때에. 또 가서 어데 앉았을 때에, 앉을 때에 또  거기에서 무슨 일을 한다든지 사람으로 더불어 서로 관계를 맺을 때에 그럴 때에  기도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의례히. 우리 단독으로서는 실수 없는 걸음을 걸을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하나 하나에 같이 해 주셔야 우리가 실족하지 아니할 것을  아는 사람은, 또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이루어 주실 것을 아는  사람은 늘 기도하게 됩니다. 그거는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의 모든 움직임의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가 활동할 때마다, 깼다가 잘 때도  기도하고, 자다가 깰 때도 기도하고 어데를 갈라고 출발 할 때도 기도하고,  가면서도 기도하고 가서 머무는 데도 기도하고. 이렇게 이런 사건 저런 사건을  닥칠 때도 기도하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은 참 빼 놓을 수 없는 필연성의  기도요 또 아주 필수한 기도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움직이든지 또 중단을 하든지  할 때에 기도 없이 움직이고 기도 없이 정지를 한다는 것은 그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요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늘 기도는 언제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기도, 아침 아홉시에, 또 열 두시에. 오 후  세시에 이래 하는 기도를 구약 육체의 이스라엘들은 거의 다 이 기도를 행했고,  또 다니엘 같은 사람도 전례대로 기도한다 한 걸 보면은 그들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그런 시간을 기도한 것이 보여집니다.

 그래서, 서부 교회는 매일, 다른 때 기도는 냅두고 밤 일곱시부터 열시까지를  한계를 하고 매일 삼십 분씩 자기와 모든 교회들의 장래를 위해서 기도하자는  것을 작정을 해 놓고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기도록을 작성해 놓고 거기에 등록을  해 놓고 기도하는데, 등록된 수가 얼마던고? 칠천 오백 뭐 십 팔 명인가 그렇게,  칠천? 칠천 육백 십 이명까지 등록하고 왔답니다. 기도한 등록에 기록하고 또  거기 등록 안 한 사람들도 기도하고, 등록한 사람들은 매일 교회 와서 기도하는  사람은 거기에서 표를 해 주고 또 자기가 다른 데서 기도한 사람들도 기도했다는  그 표시를 하고 그렇게, 이건 참 일 학년 생활인데, 일 학년 생활인데 그래 라도  해서 기도를 해야 되겠다 해서 기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이스라엘들이 하루 세 번씩 그렇게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 한 거와 같이 우리 교회들도 자기네들 그 역량이 있는 대로 할 수 있으면  하루 세 차례든지 네 차례든지 요렇게 시간을 정해 놓고 그래 기도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수입이 많으리라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자기 생활하는 생활 시간표를 짜 놓고 시간표대로 살라고 해 보면 하루  생활이 얼마나 거짓되고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 시간표를 짜  놓지 안하고 생활하면은 그날 아주 일을 항상 많이 해서 너무 많이 했다고  생각이 돼져서 점점 교만한 사람이 돼지고 모든 일에 대해서 낭만하는 그런  사람이 돼지고, 시간표를 정해 놓고 생활하는 사람은 항상 쫓기고 부족하고  게을하다는 그것이 스스로 자인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루 세 번이면 세 번, 그때 특별히 예배당 가서 다  기도를 못 하고 공장에서든지 자기 어떤 직장에서든지 길을 가면서라도 하루 세  번 기도할 것을 그렇게 우리도 작정을 해 놓고 기도하면은 아마 안 하는 것보다  그것이 수입이 많으리라 그렇게 생각이 돼집니다.

 그래서, 하루 세 번 기도하는 일, 그 기도는 자기의 과거에 대한 반성 기도도  있겠고. 미래에 대한 계획 기도도 있겠고, 현재에 과거와 미래를 일치시키려는  그런 역향의 기도도 있겠습니다. 이래서 그런 기도를 우리가 작성은 안하지마는  그런 기도를 스스로 작정을 해 놓고 시간을 정 해 놓고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가서 기도 못 한 것도 생각나고 또 기도해야 된다는 것도  생각을 하고, 그래서, 자꾸 우리를 길을 들여야 되겠는데 길들이는 데는 제일  뭐이냐? 악습을 이것을 죽이고 날마다 믿음 생활을 계속하는 이것을 우리가  연습을 자꾸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혹 이렇게 안 정해 놓고 못 하는 것이나 정해 놓고 못하는 것이나. '정해  놓고 못 하면 더 죄가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같아도 안  정하고 하지 않는 그자보다 정해 놓고 할라고 애를 쓰다가 또 못 하니까 '아이구,  또 못 했다' 하는 그래도 그걸 좀 희망있게 보지. 알고 죄 짓는 일은 더 크니까  아예 애초부터 모르는 게 낫다 하는 그자와 행할라고 배워서 알고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해서 자책을 느끼고 하는 그 사람을 더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도 마귀의 기묘한 그 꾀에 빠지지 말고 작정을 해 놓고 그렇게  기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구약의 이스라엘은 거의 다 그렇게 했습니다.

 자, 하루 그라면 세 번이면 세 번, 두 번이면 두 번 한 번이면 한 번 이거는  자유인데 그 시간을. 평소 기도 말고 특별히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이 좋은 줄로  아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녜, 놓읍시다. 그러면 자유로 하십시오. 그것이  여기 처음에 있어서 말합니다.

 나면서 앉은뱅이의 사실을 우리가 성경에 기록해 주신 것을 읽었는데 이 교훈을  우리가 들으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이  계시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한 사도행전 3장 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읽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중요하고, 제일 귀중하고 요긴하고 한 이것은,  제일 중요하고 요긴한 거. 제일 중요한 그것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기 남반에  한번 말해 보이소 제일 중요한 것이 뭐입니까? 예? 제일 중요한 게 뭐이지요?  예? 그것이 우리에게 제일 중요합니다.

 곧 이는 우리에게 살아갈 길이기 때문에, 길, 길 없으면 못 갑니다. 길을 잘못  알면 목적지를 가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우리가  꼭 걸어가야 할 우리의 길이라,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앉은뱅이 역사로 우리에게 계시하신 이 계시로써 앉은뱅이가  병이 나은 거와같이 우리들도 병이 나아야 되는 이 사실을 자기가 확실히  인정하고 이 열매가 맺어지도록, 맺어지기까지 이렇게 노력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앉은뱅이 병낫는 이와 같이 우리 병이 낫도록 노력하고 낫기까지  애를 써서 나음을 받는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저 하나의 지나가는 한 역사의  한 토막이라고만 이렇게만 생각하면은 안 됩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병신이 많이 있는데, 그때 그때마다 우리에게 이면 저 면을  가르친 것인데. 여기 앉은뱅이는 그저 걷지 못하는 게 그의 병인데 날 때부터  인간의 걸음을 걷지 못한 것을 여기에 하나 상징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병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 병자가 나은 이  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니까 예수님의 이름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 기독자들의 병은 다 고칠 수 있다, 병을 고쳐야 실지로 효력을 본  것이지 병 고친다는 말만 듣고 아무리 안다 할지라도 병고침이 입으면 아무  소용은 없다 하는 것을 우리사 책임지고 이 도리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불쌍한 자 세 사람을 우리가 어제도 공부하고 아침에도 했는데.

불쌍한 세 사람은 첫째는 앉은뱅이를 성전 미문에 메어다가 놓는 그 사람이 첫째  불쌍한 사람입니다. 메어다 놓는 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이요 사람을 인도하는  사람이요 사람을 돕는 간호하는 사람인데, 사람이 사람을 인도하기는 여러  사람들이 인도를 하지마는 인도하는 그 이면의 성질을 이것으로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사람을 인도하는데 어떻게 인도하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인가?  사람을 인도하는데 어떻게 인도하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인가? 사람을 인도하는데  그 인도하는 목적이 어데 있는고 하니 구걸하는 그 구걸의 이익 배당을 목적으로  삼고 인도하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구걸은 어떤 게 구걸인데? 구걸은 어떤 게 구걸입니까? 자기 손으로 농사를  짓고 공장을 차리고 직장 생활을 해서 월급을 받고 하는 그것은 구걸 속에  들어간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간 것입니까? 그거는 구걸 속에  들어갔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갔습니까? 구걸 속에 들어갔다고 고렇게  깨달은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또. 은혜 속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또 구걸속에 들어갔는지 하나님의 은혜 속애 들어갔는지 아직  더 따져 보기 전에는 모르겠다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봅시다. 녜.

모르겠습니다. 따져 봐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내게 모든 것을 주시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내게 줄 자는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이 내게 주실 때에 사람을 통해서. 토지를 통해서. 만물을  통해서 주시는 그 방편과 도구는 많을지라도 주시기는 우리 주님 한, 분만이 주실  수 있는 부자요 가지고 있지 내게 주는 것을 주님 외에는 아무도 가진 자가 없다  주님만이 주인이시다 그런고로 주님에게 얻어 가졌다고 그렇게, 주님이 주셔서  가졌다 그렇게 자기가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 그사람은 주님에게 받은  사람입니까 구걸하는 사람입니까? 주심에게 받은 사람이라고 고럴게 인정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놓읍시다. 주님에게 받은 사람인지 구걸한 사람인지  아직까지 모르겠다. 살펴서 구별해서 판단해 봐야 알겠다, 그런고로 아직까지는  판정을 지우지 못하겠다 하는 미결로 생각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없네.

여기에도? 나도 미결입니다. 그 사람이 말은 그렇게 하지마는 주님에게 받아서  받아 가졌는지 구걸한 것인지 조사를 해 봐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에게 받은 것은 어떤 것이 주님에게 받은 것인가? 주님의 계명대로  그 법칙대로 지켜서 사는데 그런 것이 이루어져 왔으면 주님에게 받은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받은 것이면 주님에게 받은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법도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해서 주님에게 순종으로 농사짓는 사람이 있고 구걸로 농사짓는  사람이 있고 여러 가지 있으니, 주님에게. 공부 하는 것도 '너 공부하나?' '아,  나는 믿음 지킵니다.' '너 장사하나?' '나는 믿음 지킵니다.' '너 농사 짓나?' '나는  믿음 지킵니다.' '믿음으로 행치 아니한 것은 다 죄니라.' 주님에게 순종으로만  이렇게 하는 그 사람의 생애에 이루어진 거라야 주님이 주신 것이지 입술로는  주님에게 받았다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은 다 저버려 버리고 제 지혜 방법 수단,  인간들의 모든 권고 지도 방편대로 해 가지고서 얻어진 그것이 구걸입니까  그것이 주님에게 받은 은혜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요렇게 자꾸 구별을  해서 살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 하나를 자꾸 구별해서 구걸이냐 하나님의 은혜냐? 은혜 보고  사느냐 구걸 보고 사느냐? 구걸이 아니면 주님의 은혜입니다. 구걸이 아니면  주님의 은혜요 은혜가 아니면 구걸입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구걸이 아니면  은혜요 은혜가 아니면 구걸입니다. 요런 것도 요럴 때 배울 때 딱 확정을 지워  버려야 됩니다. 확정을 지워서,  그러면,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라고 말을 했는데, 은혜라고 말은 하기는 했는데  심사를 두 번이나 해 봐야 됩니다. 그 사람의 받은 걸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고  했는데 그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통해서 주셨든지 주셨다는  것을 확고히 인정을 하고 있느냐? 확고히 인정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은혜 받은 사람이냐? 또 좀 더 살펴봐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라 하는 것을 자기는 확실히 믿고 인식하고 있어도 이제는 그  사람의 행동 면을 살펴봐서 그 사람의 행동이 그 일을 하는데 하나님의 법칙대로  해서 받았는지 사기 협잡 모든 범죄를 해서 그걸 취했는지 조사해 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받아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지마는 그렇지  안 하면 그거는 전부 다 구걸입니다. 인간에게 다 착취한 것이고 인간에게 다  빼앗은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걸이라, 구걸이 아니면  은혜라 하는 요 둘만 여기에서 말해 놨기 때문에 여기에서 크게 강령적으로  우리가 모든 이 세상에서 취해서 가지는 것은 구걸이 아니면 은혜 은혜가, 아니면  구걸이라 하는 요것을 요 단정을 딱 지워서 해 놓으면 앞으로 우리 신앙 생활해  나갈 때에 세밀하게 구별할 때에 그것을 잘 구별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구별이 잘못 되면 행동이 잘못되고 그라면 모든 구원은 다  잘못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제법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아는 거 같은데  현실을 당해 가지고서 그 전후 좌우를 구별할 고 단계 와서 구별하는 거 보면  아주 전혀 판이하게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 그 구별성이 어떻게 정확지 안 한지, 그래서, 작은 일 큰 일을 구별을  바로 하고 사람을 바로 구별하고 사물을 바로 구별하고 시대를 바로 구별한다고  하면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하늘에 있는 너희 아버지의 거룩하심 같이거룩하라  그 말은 하나님은 따지는 하나님이라 그 말이오. 하나님처럼 따지고 따져  가지고서, 그렇게 따져서 참이라는 고 참을 잡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처럼,  수많은 것이 복잡해도 따지고 따져 가지고서 요것은 틀리고 요것은 옳다 요렇게  잡으시는 것 처럼 우리 믿는 사람들도 많은 사람이 말한다고 따라갈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정죄한다고 따라갈 것이 아니고, 천인 만인이 의롭다고 해도 따져  봐야 되겠고 천 인 만 인이 죄라고 해도 따져 봐야 되겠고. 자기대로 성경 지식이  있으니까 따져 보고 따져 가지고서 옳은 참이라는 하나인 옳은 그것을 딱 잡는  고것이 거룩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고렇게 따져서 옳은 것은 하나뿐인데 하나인 옳은 것에  도달할라고 하지 안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대개 학자들이 다 그렇게  썩었습니다. 이것도 또 녹음기에 나갈 터이니까 나가면 학자들이 막 뿔을 내  가지고서 이랄 겁니다. 왜? 학자라고 다 썩은 게 아니라 썩은 학자들이 많지.

학자들은 이 사람 저 사람 많은 말을 들었으니까, 많은 말을 들었으니 많은 것을  가지고 비판을 하니까 참 아주 정확한 고귀한 비판을 할 수 있는 진찰기를 많이  가졌습니다. 진찰 방편을 많이 가졌으니까 그거 진찰 해 가지고서 마지막에  '요거는 틀렸다 요거는 옳다' 그 하나인 하나에 도달해야 되는 것인데, 대개  학자들이 보면은 고만 '이라는 사람도 있고 저라는 사람도 있고 다 뭐 별별,  천태만상으로 말하는 것이니까 이 사람은 이라고 저 사람은 저라는 것이니  이렇게도 말할 수 있고 저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천이고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천이다.' 천 가지 방편을 다 안다 할지라도 '너는?' 나는  요게 옳고 요게 틀렸다 고것이 자기에게 확정되는 고것을 잡지 안하고 중간에  머뭇거리면 고것은 거룩을 저버린 자입니다. 거룩을 저버린 자.

 그러기에, 학자들은 뭣이든지 그렇게 딱 판정을 지우지 안합니다. '무식한  사람들이야 저거 무식해서 몰라서 판정을 지우면 '이래 말하는 저래 말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제 각각 다 깨달음이 달라 그렇게 하는데 뭘 옳고 그른 걸  고걸 할 수 있는가?' '그러면 너는?' '나는 가 봐야 알지.' '가 봐야 알면 너는  모른다 그말이네? 그러면, 가 봐야 알면 너는 모르는 것이니까 너는 살기는 어째  살래? 걸어가기는 어째 걸어갈래?' '가는 대로 걸어가지' 그 답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썩었어.

 나 귀한 말 들었어. 언제 김 현봉 목사님, 직접은 못 들었는데 김 현봉 목사님이  어떤 학자의 저서를 보고서 '그것은 생명이 없는 죽은 글이요 책 보따리다'  이라더래요. '왜 그렇습니까' 하니까. 암만 읽어 봐야 '이 사람은 이라고 저 사람은  저라고 그 사람은 그라고 이렇고 저렇고 이렇고 저렇고' 이런데 너는? '뭐이  옳은지 나는 모르겠다.' 이것도 저것도, 이라는 사람 소개만 했기 때문에 죽은  글이지 산 글은 아니라 말이오. 모두 그래만 해 놨지 자기는 이거라 하는 거 하나  잡고 있는 그게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활이 한 길을 택할 리가 없고 팔방  미인으로 이 사람 만나면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개 학자들의 신앙 걸음이 너무 폭이 넓어 그런 게 아니라 생명이 없어서 요게  산 길이라 하는 그것을 단정짓지 못한다 그 말이오. 이것도 쉬운말 아닙니다.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그 김 현봉 목사님이 큰 말 했습니다. 어려운 말했습니다.

 이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아. 여기에는 구걸이냐 예수님에게 얻는 것이냐 이  둘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 불일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해 붙일 수도  있는데, 그러면, 여기에는 예수님에게만. 예수님에게 얻고 모든 구걸하는 거 두  가지 외에는 없다 요렇게 가르쳤다는. 요 계시의 내용이 요렇게 가르쳤다는, 첫째,  둘로만 얻는 것을 구별해서 가르쳤다. 구걸 아니면 주님에게 얻는 은혜요 은혜  아니면 구걸이다 요렇게 둘만 가르쳤다 하는 요것을 믿는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  그 말이오. 믿는 믿음이, 그 다음에 앉은뱅이 해석하고 뭐 해석하고 하는 거 천  마디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요 계시에서는 요 두 가지를 가르친 요것이라 하는  요것을 일호로 믿는 요것이 제일 중요해. 요것부터 믿어야 고다음에 뭐 돼지는  것이지 기초를 믿지 않는데 그 다음에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문 자답 해  보십시오. 이걸 나는 믿는가? '아이구, 목사님은 원첨 광문 다학을 안 해서, 너무  읽은 것이 적고 좁아서 저렇게 일방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거기에는 이리도  해석하고 있고 저리도 해석해 있고 저리도 해석해 있고' 그러나, 옳은 해 석은  하나 뿐이지 둘은 절대 없다는 것은 그것은 확고한 것입니다. 이것을 요 둘 중에  하나이니 여기에서는 주님에게 얻느냐 인간에게 구걸하는 것이냐? 구걸하는 것은  사람으로 더불어, 말미암아. 사람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거. 피조물로 인하여  얻어지는 거 그 모든 것이 구걸이라, 피조물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이 구걸이라.

하나님으로만 얻어지는 그것이 은혜라. 그러면 은혜냐 구걸이냐 둘이라. 요것  단정을 하고 난 다음에라야,

 그러면 피조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 어째서 그것이 구걸인가 이게 결정이  돼야 되지, 어째 구걸인가? 하나님은 피조물을 내실 때에 피조물은 창조주 그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은 그분 한 분에게만 모든 것을 싶어서 살도록,  그분만 바라보도록. 그분에게만 속하도록 그분만 의지하도록 그분에게만  피동되도록. 그분의 것으로만 살도록 요렇게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요 자리에서  떠나서 피조물 무엇으로 말미암아 무엇으로 말미암아 얻어졌다고 하는 그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 아닌 구걸이다.

 그러면 누가 말하기를 '이런 것에게 직접 얻고 저런 것에게 직접 얻었는데  그것도 그라면, 그거 안 얻고 어찌 살겠느냐? 그것도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냐?'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심지어 너거 아버지 너거 어머니가 널 낳아 준 그것도  하나님이 널 낳아 주신 것이다.' 그만하면 말 다 했지, '아버지 어머니 없는데  내가 날 수 있나? 하나님이 안 계시면 낳을 수 있나?' '너거 아버지 너거  어머니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널 낼 거 같으면 너거 아버지 아니고 다른 사람을  통해 낳았으면 저 김가가 너거 아버지 될 터인데 이가가 너거 아버지로 너 났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기관으로 이와 같이 한 것이니 요렇게 살게 했는데,  여기에는 예수님에게 얻는 거 아니면 구걸이요 구걸 아니면 예수님에게 얻는  것이니까 주님에게 얻는 거 외에 다른 어떤 피조물로 말미암아 얻어도 요것은  구걸이라 요것부터 단정을 확정을 지워야 그 사람의 신앙이 세상을 차고  나갑니다. 세상을 이기고 나가요. 여기에서 확정이 지워지지 안하면 그 사람의  신앙은 물에 물 탄 듯 기름에 기름 탄 듯 이래 가지고서 아무 절대 승리는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학자 쳐놓고 견고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참 별로이 없습니다.

희귀합니다. 칼빈 같은 사람도 사회와는, 사회와는 약간의 5전투를 했지마는  그에게 장기간의 고문과 고행은 겪어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회와  정치와는 많이 투쟁을 했습니다. 내가 그거 전설로 들었는데 그분이, 내가 좀  잊었습니다. 어떤. 뭐 범한 사람을 사형을 했다 하더라? 그거 누가 기억하고  있소? 무슨 계명 어긴 사람을 사형을 했다 하지, 사형을 하라 해서? '칼빈은  사형을 허락했다. 살인자다. 사형을 허락했다' 이래 가지고 그것 때문에 물의가  많이 있는데, 그러니까, 그만침 좀 좀게 깨끗하게 타협하지 안하고 지낸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수는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이라 하는 거 이거 중요합니다. 신신학이라고 신신학이 다 전부  틀린 것 아니오. 성경 도리를 배울 때에 하나만 삐뚤어졌으면. 하나가 인간  중심으로 피조물 중심으로 하나가 해석이 됐으면 고것이 신신학입니다. 그거 하나  틀렸는데, 그거 하나 틀렸지만 하나 틀린 그걸 안 틀렸다고 변호를 할라 하다  보면은 모든 성경을 그걸 옳다고 변호해야 되니까 모든 성경 하나 둘 차차 차차  틀려지기를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모든 성경의 견해가 틀리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꼭 거룩하고 진실이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신앙을 자기는 몰라도 남의 신앙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판단해서 판정은 안하지마는 그런 거 아닌가 해서 자기의 신앙을 깨닫기 위해서  그 사람은 이런 점이 어떤가 그렇게 논평할 수도 있고, 자기가 바로 걷기 위해서  논평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을 접하기 위해서도 논증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적인 정죄적인 논평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하는 것을 자기대로 해 비판해  가지고 거기에서 자기가 험한 길이면 빠져 들어가지 안하도록 가지 안하고 옳은  길이면 따라가고 이렇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관계 없습니다. 다만 심판적으로  정죄적의 판단이 아니면, 폄론이 아니면 죄가 아닙니다. 구원을 위하여 폄론하는  것은 의요 죄가 아닙니다.

 어러기에 그 폄론을 보면 저 사람은 하나님을 못 잡았다 제가 암만 주님을  입으로 하나님 하나님 뭐 한 달 내 일 년 내내 하나님을 주장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절대 길이  하나는 아니다. 저 사람의 앞길에는 세 길 네 길 다섯 길 더 된다. 이러니까 급할  때는 이리 가고 급한 때는 저리 가고 그렇지 한 길 밖이라서 그 길 아니면  죽어도, 그 길 아니면 죽으면 죽었지 그 길 한 길밖에는 갈 수 없는 길 고 길  아닌 길은 아파서 못 가고 두려워서 못 갔으면 못 가도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요 길로 가야 되는데 요 길로 가지 못했으니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요렇게  자기를 정죄해서 돌이킬 수 있는 그런 재료가 그에게는 없는 사람이라 하는 그런  신앙가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요 신앙의 요 촛점 요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보다 여기에는 앉은뱅이를 고친 것인데, 요것은 우리의  구원의 도라 하는 요것이 확고 부동하게 확정이 지워져야 됩니다. 구원의 도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걸어갈 길이다. 걸어갈 길이니 나도 앉은뱅이가 돼야 된다.

내가 걸어갈 길이니까 나도 앉은뱅이 돼야 된다. 앉은뱅이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은 거 같이 나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아야 된다. 앉은뱅이가 낫게 해 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놓지 안하고 따라서 성전 안까지 들어간 요 일을 나도  해야 된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게 요동치 않는 것이 신앙이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흐리멍텅하게 타협주의로 이라니까 그 사람이 넓고 그 사람이  관대한 사람 같고 아주 그 사람이 포부가 큰 사람 같고 전체적인 사람 같지마는  그것은 착각입니다. 창기처럼 신앙의 지조가 없는 사람이요 그의 길은 한 길뿐이  아니고 여러 길에 갈래길에서 가지고서 어느 길이라도 좋은 팔방 미인의  창기성의 신앙입니다. 요것이 확정돼야 되고,  그러면, 구걸이니 예수님에게 얻는 은혜이니 요 둘뿐이라 요것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숙제로 두고서 '어떻게, 거기에서는 성도들이 가는 걸음이 예수님의  은혜냐 구걸이냐 요 둘뿐으로 단정을 지우는데 지울 수 있나? 틀렸다.' 막 틀렸다  하고서, 틀렸다 하고. 틀렸다 하고서 주장을 하기 위해서 성경을 나비는 것  좋습니다. 막 디비서 '보자 보자' 이래 가지고서 나중에 틀렸으면 이거라든지  저거라든지 하나로 확정지워지는 그게 있어야 이제 희망 있는 신앙입니다. 자기가  자꾸 나비다가 나중에 가서 '아, 이것은 나는 처음에 반대할라고 달라들어서 막  성경을 육십 육 권을 디비 가면서 훑어 댔는데 아무래도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것이 아니고 고 말한 것이 옳다. 주님에게 얻어서 병 나은 것이냐 병신으로서  구걸하는 것이냐? 병신은 구걸 했고 나은 자는 성전에 뛰어 들어가서 다른 사람  병 고쳐 주고' 베드로와 요한은 나은 사람이니까 병 고쳐 주고 앉은뱅이는  구걸하고 요 둘 뿐이라 하는 것을 자꾸 심사하고 해 봐 가지고서. 자, 반대를  할라고 석 달 열흘을 넉 달을 막 신구약 성경 막 디비고 이래도 '아 그게 맞다.

그게 맞다. 나는 이렇게 거리 멀게 반대했는데 그분은 이 옳은 길을 잡았으니  그분은 나의 선생이다.' 베드로에게 쭐쭐 따라붙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라면서  '이거다' 확고한 거머쥔 거, 잡은 거. 선 거 요게 있어야 세상을 이기지, 요게  있어야 마귀를 이기지. 요게 있어야 순교를 하고, 순교하라 하면 순교도 할 수  있지, 요게 있어야 세상을 정죄할 수가 있고 세상을 환하게 정평 정가할 수가  있지 그리 안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뭐 그거는 중한 문제가 아닌데 자꾸 안 될 말. 아무 별거 없는 말 자꾸. 지금  다른 말 말하든지 안 하고 그 말만 가지고 자꾸 말한다고서. 지난번에 이 자리 와  가지고서 아브라함에 대한 것을 설교를 내내 했디마는 돌아가고 나서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뭐 사람을 그리 많이 모아 놓고 무슨 할 말이 없어서 자꾸 그  말만 내내 하다가 끝낼까 보냐고 그래 말한다고서. 말을 몰라 그런 게 아니라  자꾸 그렇게 하자는 것이라. 그렇게 하자는 것.

 언제든지 현실에서는 나보다 하나님 높이고, 인간의. 자타의 인간 의사보다  하나님의 의사를 높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 세계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높이자 하는 요것을 그때 내내 말했는데 알아 듣는 사람도 적고 고대로 활용한  사람도 적습니다.

 그러면, 뭣 때문에 롯과 아브라함이 시비하는데, 롯에게 양보한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됐고 롯은 마귀의 자식이 됐어.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는 것은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주님은 화평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화목의 제물이 되셨는데. 보이는 인간 버린 게 하나님  버린 거요. 인간을 귀중히 여기는 게 하나님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을  귀중히 여기면 일호로 귀중히 할 것은 인간 귀중이기 때문에, 인간을 귀중히  여기지 안했기 때문에 롯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어데든지 자기 현실에서 이렇게 자기보다 하나님, 인간의 모든  전론보다 하나님의 뜻. 보이는 모든 구비한 현실보다 하나님의 축복 요 세 가지는  변치 않는 방편이요 유일한 방편입니다. 어떻게 롯에게 양보하는 게 어떻게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축복을 바란게 되는가? 고것이, 롯을  위한 게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롯을 귀중히 대접한 게 하나님을 귀중히 대접한  것이라. 고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모든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과 진실을 가져야 됩니다. 거룩과 진실을 가져야 돼.

신앙은 거룩과 진실이라. 거룩 없는 신앙은 진실 가지지 못해요. 거룩은 어떤 게  거룩이냐? 둘을 가지지 않는 것이 거룩입니다. 둘을 가지지 않는 것이 거룩.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이것도 좋다 저것도 졸다. 이래도 된다 저래도 된다  할 수 없어.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왜 멋대로 흐리멍텅하게 이것도  저것도 다 같다 이렇게 하고 있느냐? 그것이 거룩이 없는 자라. 거룩이 없는 자는  절대 진실에 못 나갑니다. 거룩이 없는 자는. 거룩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에게  핍박이 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화평을 일으키러 온 것이 아니고 분쟁을  일으키러 왔다. 뭐 와 분쟁을 일으키러 와? 거룩이 분쟁을 초래하지, 거룩이  분쟁을 가져오지. 아니다. 그거다 따져 가지고서 자꾸, 옳은 거 참이 하나이고,  그만 이 사람도 좋고 너도 좋고 이라면 좋을 터인데 아니다. 아니다. 해서 하나인  하나님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잡으신 대로  하나님이 걷는 대로, 하나님과 나와 일치될라고 하니까 모든 세상에 마귀와  일치되는 건 다 대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

 이러기 때문에, 주님에게 얻는 은혜가 아니면 다 구걸하는 것이다 요것도 아래도  해석하고 저래도 해석할 수가 있지가 아니라 요것은 이게 아니면 저거, 저거  아니면 이거 둘로라. 그만 뭘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피조물로 인해서  무엇을 얻겠다 하는 거. 그거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 한 것.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면 보이지 안하는 하나님하고 무슨 상대하느냐?  하나님이 없는 가운데 모든 걸 지었기 때문에 지음 받은 것들이 움직이는 것도  그분의 움직이심이요 존재도 그분의 존재요 모든 역사도 그 분의 역사이니,  하나님이 내게 주실 때에 이것 저것을 모두 다 은혜 기관으로 사용하셔 가지고  내게 주시니 주신 분은 그분이요, 주실 때에 밥숟가락으로 떠 주고 젓가락으로  찍어 주고 박지기에 담아 주고 뭘로 주든지 그거는 그릇이요 주시는 이는  주님이시라.

 그러면, 네가 주님에게 얻었다 부모에게 얻었다 형제에게 얻었다 친구에게  얻었다 하고서 주님에게 얻었다 말하니 네가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주님에게  얻었는가 보자. 심사해서 주님에게 얻었는지 안 얻었는지, 주님에게 얻고 얻었다  하는지, 구걸하고 주님에게 얻었다 하는지 그것 보고서 그거 뭘로 가지고  심사하면 압니까? 자, 그 심사 저 ○○○조사. 대답해 봐. 예? ○○○조사 말이오.

 그런데, 고 대답을 잘했는데 많이 어두워졌어. 알겠어? 교회가 좀 부흥이 되나?  예? 많이 어두워졌어, 내가 보니까.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간절성이 그전과 같지  안해 지금 교인 몇 명 나와요? 예? 얼마? 삼십 명이면. 삼십 명이면 상당히 많이  불었구만. 불었지마는 아직까지 뭐 삼십 명 해 가지고서 에헴 할 때는 못 돼. 좀  달라붙어야 돼. 그대로 나가면 자꾸 내려가요. 안 돼. 그전과 같이 간절함이 없어.

주님은 중심 봐. 간절한 그게 제일이지 교인 수 믿으면 그게 무슨 소용있는가?  천인 만인보다도, 하나님은 내가 천인 만인을 구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은 나  하나를 더 중히 여기십니다. 나 하나 버리고 천인 만인을 구원하지 안해요. 나를  통해서 구원할 자는 나만 못합니다. 나 하나 구원해 놓고 그 나머지기 구원 해요.

그러기 때문에 나 하나가 온전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는가 안 살았는가 봐서 말씀대로 살아서 왔으면  하나님에게 얻는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에게 얻은 사람이지.

 이랬는데. 그 메어다 놓은 사람이 와 불쌍한 사람입니까? 일호로 불쌍한  사람이라. 제게 책임있는 사람, 제게 관련있는 사람, 제가 메어다 놓고 끌어다  놓고 업어다 놓고 제가 책임을 질 사람, 책임질 사람. 제가 책임질 사람을  어데다가 인도하느냐? 구걸할 자리로 인도해, 구걸할 자리로 구걸하는 자리로  인도해. 제가 책임진 앉은뱅이가 병신이니까 병신을 고쳐서 병을 고쳐야 되겠다는  거기에 대해서는 착안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없고. 만날 업고 지고 돌아다니면서  구걸할 자리만 찾아 다녀 이러니까, 저 죽고 남 죽으니까 불쌍한 사람이지.

 그 사람이 그 병신을 항상 성전 미문에, 다른 사람 들으면 저거 성전 미문에  있으니까 성전에 있는 사람인 줄 알지마는 성전 안에 못 들어가는 사람이라. 성전  안에 못 들어가. 병신은 못 들어가요. 성소에 들어갈 때야 인간의 모든 이해 못  할 수수께끼가 다 해결이 되어지는 것인데, 자기에게 속한 자를 하나님 만나는  골방으로 성소로 인도할 생각은 하나도 가지지 안하고 구걸하면 구걸하는 그건  갈라 먹는 그 수입만 바라보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 사람을 주님 만나서 구원시킬 생각은 없고 어짜든지 피조물 상대로, 피조물  상대로 피조물의 혜택을 많이 볼 수 있도록, 피조물의 혜택을 많이 볼 수 있도록  그런 사람만 만들라고 애를 쓰고 그런 자리로만 인도하고, 하나님의 교회로  인도한다고 해도 밤낮 소원하는 것이, 가르치는 것이 피조물로써만 제가 복되고  유리할 그것만 생각하지 보이지 않는 십자가의 대속하신 십자가의 대속하신 주님  한 분으로, 그분의 이름으로, 그분으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인간 병을 고쳐야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업고 돌아다니고 이와 같이 하니까 그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전도를 하고 목회를 하고 아무리 해도 그 사람이 인간병이 들었으니 병을  고쳐야 되겠다는 이 관심을 못 가진 자가 인도자의 불쌍입니다. 뭐 주일학생들도  몇십 명 온다, 이렇게 오니까 학생 오는 숫자나 채워서 올라 하는 그것도 불쌍한  이 일호 불쌍에 든 자요, 교인이 많이 와서 자꾸 교인이 많아지기만 원하는  그것만 생각하고, 그 사람은 통통 병신 엉망진창의 병신인데, 엉망진창의  병신인데, 영도 병신이라 중생하기는 했지마는 귄능이 하나도 없어 중생은  했지마는 영의 권능이 하나도 없어. 영이 그 마음을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몸도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마구 막 가는 이 무섭고 어두운 이 세상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고 마구 이렇게 해서 '돈만 벌면 된다. 출세만 하면 된다.

성공만 하면 된다. 공부만 많이 하면 된다, 학위만 얻으면 된다.'  이래서, 인도자로, 지도자로, 책임자로 그 인간의 인간병든 거기에 착안하지  못하고 다른 피조물로 인하여 얻어지는 그것만을 수입인 줄 알고 그 수입되면  나도 부가 있다, '너 요번에 보자. 얼마나 십일조가 나왔노? 십일조 나올 거  얼마나 되지?' 조사해 보고 '아, 그라면 요번에 한 십일조 돈 만 원이나 나올세?  그러면 내 이거 교회 좀 곤란한데 함부래 십일조 뒤에 낼 요량하고 십일조 미리  좀 내 줘라.' 돌아다니며 고런 거나 계산하고, 배를 쫄쫄 골아서. 사람병 고치는  거는 생각 안 하고, '보자, 저게 수입을 했는데 무슨 병신 노릇 했노? 잘 웃기는  병신 노릇을 했나. 연극 잘 하는 병신 노릇을 했나 거짓말 잘하는 병신 노릇을  했나, 배짱 부리는 병신 노릇을 했나, 복술 부리는 병신 노릇을 했나. 계명을  어기는 무슨 이런 저런 병신 노릇을 했나' 그거는 진찰하지 안하고, 사람 죽은 건  생각지 안하고 돈만 들어오니 좋다고, '아, 아무 것이는 한 달에 십일조 얼마  드리는데' 광고를 해서 '아무것이가 한 달에 십일조 얼마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이라니까 '나도 사기든지 협잡이든지 해 가지고서 다음 달에는  내가 십일조 많이 내겠다' 십일조 경쟁을 붙여서, 막 십일조 경쟁을 붙이니까,  수입 경쟁 붙이니 나중에 보니까 거짓말 경쟁 붙였고 사기 협잡 경쟁 붙였고  모든 착취 경쟁 붙였고 양심 팔고 죽이는 경쟁을 붙였으니까 그 지도자가  불쌍하지 뭐이 불쌍합니까?  오늘 교회들이 이래요. 오늘 교회들이 잘하면 교인 나온 숫자 보고 잘하면  연보의 액수나 보고, 연보도 귀중하지. 그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내는 것이니까  귀중하지마는 그것도 바로 돼 가지고 내야 귀중하지 도적질 해다가 연보 내는 게  뭐 귀중합니까?  나는 여기는 모릅니다. 부산서는 국제 시장에 도둑놈은 전부 장로라. 고만  장로라 하면 '아,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그 사람은 뭐 발가벗겨서 반석 위에  놔도 살 사람이다.' '와?' '하 그 사람 장사 못 따라간다. 그 사람 수단 방법을  당할 수가 없어.' '설마 그렇게야 거짓말하겠나?' 설마를 풀풀 뛰어넘으니 뭐,  설마를 한 번 두 변 풀풀 뛰어 넘어서 설마 그렇게야 속이겠나? 설마 그렇게야  거짓말하겠나?' 설마 하나뿐 아니라 설마 둘 셋을 풀풀 뛰어넘으니까 그 사람이  따라갈 수가 없다. 이래도 돈만 많이 내면 장로입니다. 그라던 장로 다  무너졌습니다. 벌써 삼십 년이 안 됐는데 다 무너졌어. 내가. 어떤 교회에  장로들이 다 그래 가지고서 굉장히 돈 많은 교회가 됐었는데 장로들이 다 무너져  버렸어. 다 거지가 돼 버렸어. 그래도 꾀는 있어서 당좌수표는 안 끊어.

당좌수표만 끊었으면 다시금 감옥에 가서 다 태워 가지고 그만 재 가지고 감옥에  재 놓고 있을 건데 요게 당좌수표만 끊으면 요게 나중에 부도나면 형사 문제된다  이래 요걸 알아서 당좌수표는 안 끊어. 어리석어, 당좌수표는 그것은 어리석어서  감옥살이를 마련하는 것이지마는 그래도 당좌수표 끊어 가지고서 부도나서  감옥에 들어간 그 사람이 속성됩니다. 차라리 그게 속성돼.

 여러분들. 보이는 세계 이 이면에 보이지 않는 그 세계, 세상이 모르는 그  세계를 보고 좀 그렇게 평가하고 살아야 합니다. 보이는 외식의 껍데기만  가지고서 뭐 내가 웃는 웃음이나 세상이 웃는 웃음이나. 내가 걱정하는 걱정이나  세상이 걱정하는 걱정이나, 내가 부러워하는 부러움이나 세상이 부러워하는  부러움이나. 내가 멸시하는 멸시나 세상이 멸시하는 거나 똑 같은데 그게 뭐 다를  게 뭐 있습니까? 다 제상이지. 아무 가치 없어. 떠들어 쌓아도, 떠들어 쌓아도  옳은 성령의 사람들은 딱 깔 봐! 그까짓 거야 천 마디 만 마디 있어 봤자  불쌍하고 가련하다 소리나 할까 부러워할 것은 하나도 없어,  인도자의 불쌍이 여기 있습니다. '아, 보자. 저게 인간병이 짙어 가나 인간병이  치료가 돼 가나? 저게 성소 출입이 잦나 성소 출입이 차차 차차 막혀지고 있나?  저것이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만나 가지고서 두려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고  반가워하기도 하고. 보이는 모든 것을 상대하는 거보다 보이지 않는 그분을  상대해서 희로애락을 가지는 것이 좀 그보다 더하나 덜하나? 보이지 안하는  주님으로 더불어 속살거리는 속삭이 있느냐? 그게 그래도 제법 산에도 가고  들에도 가고 골방에도 가고 어데 가 가지고서 제딴에는 없는 가운데에서 계시는  주님을 만나 놓고 좋아하기도 하고 끙끙 울던 거 해결도 지우고 또 좋다고 막  큰소리 텅텅 하던 것이 퍽 꺾어지기도 하고 제법 주님 만난다. 제법 골방 출입을  더러 한다.' 여기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고 '구걸만 많이 해 가지고 오너라.'  어찌 됐던간에 인인 관계로, 모든 사물 관계로 이래 가지고 '네가 모든 과학을,  모든 처세술을 다 능란하게 골고루 활동을 해 가지고서' 피조물에게 얻어지는  것을 많이 얻어 가지고서 이떻게 하려는 거, 그거 많아지기를 원하고 그 수입  바라는 그 지도자가 불쌍하지 누가 불쌍합니까? 회개 안 하면 얼마 안 가서 그  뒤가 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옛날만 사두개교 있는 것 아니오. 오늘도 사두개교가 있어, 예수  믿으면서 땅에 소망 가진 것이 사두개교입니다. 바리새교는 예수 믿으면서 저희의  장점 율법이나 가지고, 교리나 신조나 가지고 떠들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감  역사를 받지 못하고 말라빠진 교리와 신조만 가지고서 떵떵거리고 교파 보수라  하고 천주교 모양으로 이렇게 하는 그것이 다 바리새교인들입니다. 바리새교인.

 이만침 이제 딱지만 떼 줬으니까 가 가지고 '아, 앉은뱅이 메고 다닌 자가  지도자라 하더라. 책임자라 하더라, 주관자라 하더라. 내가 주관할 수 있는 나에게  주관을 당하고 나에게 지도를 받고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나는 얼마나 복있는 사람인가. 불쌍한 사람인가?' 복 있는 사람은 다 같은  앉은뱅이를 당했지마는, 베드로와 요한은 복있는 사람들이라. 달라고 내면서 '한  푼 주십시오 한 푼 주십시오' 하니까 '아이구 불쌍하다. 뭘 좀 줘야 되겠다' 하지  안했어. 주목했어. '이 어떤 사람 뭐하는 사람이지? 병신이로구나. 이것에게 내가  뭘 줄까?' 한참 생각 하니까, 돈이나 줄까 자꾸 거석하니까 주목한 가운데에서  올바른 관찰을 가지고 은과 금을 거부했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 하고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서서 걸어가라'  하는 걸 줬습니다. 그 사람이 지도자로서 행복된 사람입니다.

 지도자로서 첫째 불쌍한 사람 이 사람이 첫째 불쌍한 사람이요.

 둘째로 불쌍한 사람은 저를 메어다가 놔서, 실은 저 비인간 놀음, 비정상적인  인간 생활해서 수입이니 하면 그 수입이나 바라고 이런 저런 중언 부언의  거짓말을 하고, 이런 말 저런 말해서, 어짜든지 병 고쳐서 하나님 상대하는 거는  끊고 그저 그래 가지고 구걸하는 방편, 너는 대학원 가야 된다 구걸하는 방편.

너는 박사가 돼야 된다, 너는 구걸하는 방편 뭣을 가져야 된다, 너는 어떤 데  출세하고 입신이 돼야 된다 이렇게. 예수님 한 분으로써 인간병을 고쳐 주는 그분  외에 자기에게 간섭을 하고 자기를 지도하고, 자기 구걸하는 행위, 피조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그것 있으면 그 혜택이나 바라고 하는 이것이 자기를 망칠  속이는 무능자인 것을 모르고 그 거에게 입히고 들리고 돌아다니면서 '너는 여기  앉아서. 여기 앉아서 해라 저기 앉아서 해라, 병신 놀음을 이리 해라 저리 해라.'  여러분들. 인간이 예수님에게 받지 안하고 인인 관계에서 얻을려고 하는 그것이  다 자기중심이요 자기 위주요 다 이기주의요, 이기주의 아닌 이타주의라고 종교를  말하는 자는 고급 이기주의입니다. 천한 거 주고서 귀하 거 얻을라 하는 것이오.

실은 다 이기주의입니다. 이렇게 이런 수입을 노리고 있는 그것이 자기를 속이는  자요 다 같이 불쌍한 자인 줄 알지 못하고 그에게 속해서 누우라면 눕고  앉으라면 앉고 타라 하면 타고 메이라 하면 메이고 또 사람보고 구걸하라 하면  구걸하고. 이러니까 그게 보호자로 알고. 유일의 책임자로 알고. 유일의 지도자로  알고 그를 따라서 움직이니까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지. 불쌍하고 가련한 자. 제  이호의 불쌍하고 가련한 자. 오늘 이런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뭐 신앙에도. 자기의 신앙의 지도에 대해서도 아주 이래 가지고서 땅의 것이나  주면 좋아하지 정말로 자기를 병을 고쳐서 예수의 이름으로 병 고치기를 말하면  전부 적으로 삼습니다. 좀 전에 ○○ 목사님이 옛사람과 새 사람에 대해서 강하게  증거를 했는데. 참 원수는 은인으로 알고 은인은 원수로 알아서 이렇게 착각해서,  그러기 때문에, 세상은 창기성을 가져야 사람을 사귀어요. 그러기에, 인화주의가  좋은 거 같지마는, 롯은 인화를 안한 것이 하나님 버린 것이 돼 버렸습니다.

'그러면, 인화가 제일이로구만?' 또, 사울 왕은 인화 때문에 죽었어, 망했어. 인화  때문에. 밑에 부하들이 '이랍시다 저랍시다. 아이구. 왕님 이랍시다 저랍시다'  하니까, '이거 만일 이것들 말 안 들었으면 내게 대해서 어떤 배척의 운동이  일어날라 해서 그리 했습니다.' 그것도 인화쟁이가 들어서 또 하나님 배반한 거라.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는 일방적이 아니고 이렇게 저렇게 이리 말하면  이렇고 저래 말하면 저러니까 이 바른 것을 누가 알겠느냐? 어떻게 할지 몰라.

당신이 날 인도하는 것밖에는 바른 길 갈 수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모든 것  맡겨 놓고 당신 하라 하는 대로만 나는 복종할 것뿐입니다.' 하는 사람이 제일  지혜로운 사람이라. 제일 슬기로운 사람, 제일 복있는 사람. 제일 든든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고요히 생각해 봐요. 내가 내게 속한 사람에게 대해서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 자인지?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에게 무엇이 부족 하다고 무엇을  줘야 될 것을 베드로와 요한처럼 주목하고 너에게는 무엇이 없으니 무엇이 네게  필요하다는 이것을 확실히 관찰하고 판정을 가지고 있는지? 자기를 지도하는  자에게 어떤 지금 피동을 받고 있는지?, 자기가 그 놀음을 하면은 얼마나 할  건지? 이 지도를 받아서 나가면, 나중에 나가고 나가고 나가면 뒤에 가서 뭐이 될  것인지 그 종말 계산을 모르는 사람이면 그거는 다 불쌍한 사람이지.

 예수 믿는 사람이 마지막에 결산은. 첫째 아담에게 받고 거기에 소속한 것은  진리와 영감으로 일단 죽어 없어져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없어지는 것이  목적이오.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목적이오. 없어지다니? 없어지는 게 목적이면  없어지는 게 좋은가? 없어지는 게 목적이 마귀에게. 죄에게, 내 주관에게. 모든  불법에게 소유되어 있던 것이 진리의 소유가 되어짐으로 없어지고, 영감의 소유가  되어짐으로 없어지고, 주님의 것이 되어짐으로 없어졌으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옮겨졌고 죽은 것이 영생으로 옮겨졌고 약한 것이  능한 것으로. 혈육이 신령한 것으로 바꿔졌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사는 길인데,  항상 없어지지 안하고, '보관해라 보관해라, 단단히 강직해라 강직해라. 강직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있는 걸 자꾸 끌어당기라 끌어당기라' 끌어당기기만 원해서  구걸만자꾸 이와 같이 하라고 가르치는 그 지도를 받으면서 그게 사는 길인 줄  알고 있으니까 그자가 불쌍한 자 아니오? 둘째로 불쌍한 자가 앉은뱅이로 불쌍  한 자라.

 셋째로 불쌍한 자는 이 앉은뱅 이가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만났으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만났으니까 저를 살려 줄 사람을 만났고, 저를 고쳐 줄 사람을 만났고  영원한 해결을 지워 줄 사람을 안났고, 영생과 생명의 평강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도들 만나 가지고도 여전히 과거에 구걸 하던 거 그것을 지금도  원하고 있으니 불쌍한 사람입니다. 베드로 요한이 응하지 안하고 주목을 하고  보고 있으면 거기에서 깨달아야 될 터인데 지금도 무엇을 그것 줄까 싶어서 손을  내밀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불쌍한 사람이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저를 살릴 수 있는  요 기회. 병신을 고칠 수 있는 기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요 기회 여기에서도,  여기에서도 첫째 아담에게 속한 거 그런 것을 욕망하고 그런 것을 구하고, 성경은  '그런 거 구하지 마라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들의 천부께서 너희들에게  있어아 될 것인 줄 아시느니라 고기 덩어리 병신 된 것도, 그거나 고칠라 하는기  그거 다 모두 불쌍한 사람이오, 셋째 불쌍한 사람.

 병든 영이 고침 받고. 어떤 병신이라도 다 고칠 수 있어. 자기의 병든 영이 고침  받는 것이 일호라. 병든 영이 고침 받아. 병든 영이 고침 받다니? 병든 영이 고침  받는다는 이 말을 하면은 마귀의 물의가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중생된 영도 병  들었으면 그게 내나 범죄했다는 말 아닌가? 병은 들었는데 범죄했다는 말은  아니오. 무능도 죄라, 무능도 죄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죄가 아니라 중생된 영은  자기가 책임진 자기의 소유인. 자기에게 영원 생사가 달려 있는 제 마음을 제  몸을 제가 살리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 해서 그것들이 영원 멸망으로 둘째 사망의  사망으로 영원 멸망으로 옮겨져 가니까 자기는 무능자이지. 무능자의 천대를  영원히 받아야 되지. 불 가운데 구원 얻는 것같이 부끄러운 구원을 얻어야지.

 병도 무능도 병, 지나친 것도 병, 자기 의무와 책임과 본분을 못 하는 것도 병,  자기 지위를 감당치 못하는 것도 병. 영이 자기 마음을 책임지고 살리고 다스려야  될 터인데 다스리지 못하고 책임지지 못해서. 그 육을 책임지지 못해서 그 육이  패망이 되어지니까, 육이 패망이 되어지니 '심신 그 까짓 거 패망 되든지 말든지  영 내게 뭐 상관 있나?' 심신이 패망되니까 그 영은 영제 가도 타고 다닐 게  없어. 영계 가도 제 무기가 하나도 없어. 우주에 와도 다닐 데가 없어. 한 사람의  영은 우주를 일 초 동안에 억억만 바퀴도 주 도는데 이 영은 우주에 와도 육의  기능을 다 죽였기 때문에 뭐 생각할 게 있어야지? 느낄 게 있어야지? 깨달을 게  있어야지? 아는 게 있어야지? 그러니까, 제 심신의 기능을 죽인, 살리지 못한  상당한 보응은 영 제가 받지. 이러기 때문에 가련한 영입니다. 영은 뭐 죄를 지은  죄병이 아니오. 무능병이오, 무능병. 감당을 못 하는 병, 자기 소유를 뺏기는 병.

 이런데, 이 앉은뱅이는 이렇게 살릴 수 있을 때도 엉뚱한 거 그런 걸 지금  꿈꾸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 영을 치료하는 말씀으로. 딴거 없어. 돈드는 거  아니라. 아무것도 안 들어. 여기에서 가르치는 말씀을 '아멘' 믿고 요 대로  확정지우면 살아나. 이제는. 영이 누군데? 여러분들, 영이 누굽니까? 진리의  힘으로, 영감의 힘으로, 예수님의 대속의 힘으로 거기에 붙들려서 그 힘 가지고서  움직이는 내가 영입니다. 알겠습니까? 옛사람이 누구요? 옛사람이 진리와 성령과  주의 대속의 공로를 떠나서 배암의 지식, 배암의 말, 땅의 것을, 첫째 아담의 것을  탐을 해 가지고서 그게 귀중하다고 평가해 가지고서 거기에 붙들려서. 거기에  피동돼서, 그것의 사람이 돼 가지고서 그것으로 말하고 움직이고 그것으로  경쟁하고, 자기의 회로애락과 모든 가치와 행복이 모두 다 거기에 있다고 해서  날뛸 때의 자기가 그것이 옛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영의 병든 것을 고치고 마음의 병든 것을 고치면 고만 그라고 난  다음에는, 영의 병든 거 고쳤어, 마음의 병든 거 고쳤어. 고쳤으니까 이제는 영도  하나님 뜻대로 마음도 하나님 뜻대로인데 고기 멍어리가 병신이라 못 해. 그러면  누가 애터질까요? 누가 애터지겠소? 누가 애가 터지겠소? 그 본인이 애가 터지요,  하나님이 더 애가 터지요? 하나님이 애가 더 터지시요. 죽기까지 당신이 하신  것이 이 목적인데. 영도 강건케 해 놨는데. 마음도 다 고쳐서 강건해졌는데, 영과  마음은 단결이 됐는데 이 고기 덩어리가 뭐 병신이니까 기어다닐 수가 있소 어짤  수 있소? 이러니까 주님이 애 터져 그럴 때 그거 고치기는 문제도 없이 쉬워.

그만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고 고만 고칠라면 고치고 낫아 줄라면 낫아줘.

 이러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순서적으로 영병. 영은 무능병. 자기 의무와 책임을  감당치 못하는 병, 처음에는 감당치 못해 가지고서 영원히 죽었고 두번째는 죽지  안할 생명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죽지는 안하지마는' 영원히 거지가 돼서 심신은  가지고 있으나 심신의 기능은 한 내끼도 없어. 거지가 돼. 부끄러운 구원, 이런데,  죽기 전에 우리에게 영의 실력을 갖출 수 있는 기회가 왔고 마음의 이 모든 병든  것을 이것을 고치는 그 기회에 가서, 아침에 마음의 병든 것을 약간 좀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계속할 겁니다. 마음의 병만 고치면 육의 병은 고쳐지는 것이니  이 시간에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이제는,  중생된 영이 내라. 참사람 내라. 아직까지 영육을 갖춘 나는 아니지마는 서도  중생된 나, 진리대로 하라고 진리에 대항되는 것을 보고서 대항하고, 영감에  대항하는 대적되는 것을 보고 대항을 하고, 주님의 피공로를 벗는 걸 보고서  대항해서. 주의 피공로를 입고 살라고, 영감대로 진리대로 살라 하는 그 내가 참  나입니다. 별스러운 딴게 아니고 그게 내요. 그 사람이 영생을 가졌소. 그러기  때문에, 새사람 나는 영생을 가졌소. 진리대로 살고 싶은 사람 영대로 살고 싶은  나. 주님의 대속을 받아서 무죄로 살고 싶고 영감의. 성령의 피동으로만 살고  싶고, 하나님 하고 하나 되어 살고 싶고 사나 죽으나 주님을 기쁘시게 존귀케  하려는 나, 어데서든지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 한 분만 모시고 주님을  기쁘시게 섬기고저 하는 나, 나는 영생 가진 내라. 딴 내가, 어데 딴 내가 아니라  영생을 가진 내라.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영생  가진 사람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죽여야 될 그 사람으로 살고 있어.

 다 같이 기도합시다.

 이 일을 경영하시고 폭우 속에서도 우리를, 권고하사 이만큼 모여서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너무도 사탄이 쳐 놓은 진과 망이 첩첩이 둘러 있습니다. 이것을 꿰뚫고  모든 미혹을 이기고 확신에 입각하기가 심히 어려운 마지막 때를 당했습니다.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대로 말씀은 많으나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그 권능에 있다고 하시대로 사탄이  주님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농락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들이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참으로 우리를  살리는 말씀인지를 저희들이 심히 분별하기 어려운 때를 당했습니다. 주님께서  당시에 그렇게, 능한 말씀을 하셨지마는 모든 사람들이 조금 이상하게는 보았으나  그들에게 믿음이 생겨지지 안 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로  오천 명이 먹었을 때에 그들은 비로소 믿음이 생겨졌습니다. 주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실 때에 보고 믿음이 생겨졌습니다. 주의 명령대로 고기가 의외에 잡힌  그 표적을 보고 그들이 느끼고 애통하면서 베드로의 새로운 길을 출발하였습니다.

 주님, 이 시간에도 여러 가지로 병들어 있는 영의 모든 무능과 책임을 감당치  못하는 이 탄식하고 있는 영의 모든 미약을 치료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말씀을 믿는 믿음을 저들에게 주사 이제는 영에게 마음이 통치를  받을 때에 영은 영광스럽고 마음은 살아나는 것임을 확실히 깨닫고 이 진리를  굳게 잡게 하여 주시고, 영으로 말미암아 산 마음이 몸을 통치하고 몸은 산  마음에게 통치를 받을 때에 마음도 영광스러워지고 몸도 사는 이 사실을 견고히  잡아 요동치 않게 하시고 마귀의 유혹을 배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영의 마음의 치료를 받아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으나 고기 덩어리가  병들어서 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움을 주님이 보시나이다. 주님이여 이 시간  저들의 고기 덩어리의 병을 주의 능력의 손이 임하여서 이 시간 낫게 해 주시면  나은 거 가지고 죄 짓지 안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각오하는 믿음을  저들에게 주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믿음 생활하기 위해서 낫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믿음을 저들에게 주시고 그 소원과 믿음대로 이 시간 주님의  능력의 손이 오셔서 임하여 치료하여 주시옵소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이제 나은 사람은 마귀의 시험에 들지 마십시오. '나은 것 같기는 같다마는  이랬다가 뒤에 또 재발할라' 고게 귀신이 그라는 겁니다. 이러니까, '나았다고  지금 말했다가 만일 또 다시 도지면 수치스럽지 않나' 고것도 귀신이 그라는  것입니다. 또 '좀 나았기는 나았는데, 좀 낫기는 나았다 마는 나았다 하면 다 낫아  주지 안 할 터이니까 아직까지 안 나았다해야 싹 낫아 주지 않겠느냐 그것도  사욕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가, 어떤 항문 치질 암이 걸린 사람인데,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했는데  낫게 해 주신 것이 확실히 나에게 와서 전화로 연락했습니다. 하니까 옆에 사람이  말하기를 '아프다 소리도 안 하고 훨씬 나았습니다.' 이랬는데, 그 사람에게  '나았느냐' 하니까, 제가 어느 정도 나았다고 했으면 하나님이 그렇지 안했을  것인데 '아직 낫지 안했습니다.' 하는 데서 획 디비져 버렸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뒤에는 다시는 암만 기도해야 들어 주지 안 하시고, 그때에 나았으니, 벌써 그게  나은 게 그렇게 옆에 사람이 볼 만치 나았으니까 그때에 낫게 해 주시는 것을  믿었으면 나아 버리는데 그 사욕을 가지고서 '안 나았다 해야 더 낫게 해 주시지'  하는 그런 죄를 범해서 본인에게 물으니까 과연 낫기는 나았는데 더 그라면  야물게 낫아 주실 줄 알고 그렇게 했더라고 해 가지고서 그 병으로 뒤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욕은 일체 금지입니다.

 이러니까, 낫기 시작했으면 나았으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다시는 의심치  마십시오. 또 나아도 나은 것은 하나님 뜻대로 의롭게 살라고 낫아 주셨지 낫고  난 다음에 죄 지으면 하나님께서 더 큰 증세가 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아직 낫지 안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낫아 주시기 위해서 이곳으로 불렀기 때문에 뭐인가 내가 하나님이 낫게 해  주시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그 무엇인가 자기에게 감추어 있는 죄가 있으니까 그  죄를 사람에게 말하지 안해도 좋으니까 하나님앞에 그 죄를 회개하고 '낫게 해  주시면 내가 요와 같이 살겠습니다. 요와 같이 살터이니까 낮게 해 주시고 요와  같이 낫게 해 주셔 가지고 요와 같이 살지 안하거든 당신이 나에게 이제 더 큰  증세로 뭐 병을 주시든지 어짜든지 해 주십시오. 내가 죄 짓지 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하는 그런 것을 각오하고 하나님 앞에 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나은 자는 다시 죄 짓지 말고 의심치 말고 의심하면 또 헛일이라.

베드로가 물 위로 떠벅떠벅 걸어가다가 의심하니까 빠졌어. 내나 걸어오다가, 뭐  걸어오면 되는데 뭣 때문에 의심합니까? 의심하면 빠져. 나았으면 나은 것으로  감사하고 영원히 낫게 해 주실줄 알고 낫게 해 주시는 것은 나은 거 가지고 죄  짓지 안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면 재배 안 해요. 안 하니까 그대로 감사해야  됩니다. 나은 사람은 자기 구역장에게 말을 해서 여기에 와서 즉시 나았다는 것을  보고하도록 하십시오.

 녜. 저 지난 팔 윌 집회 때에 제가 대티 고개라는 거기 내가 가니까, 여기 왔을  거라, 아마. ○○○ 집사님이라고. 와 가지고서 자궁암으로 복음 병원에 가서  수술했는데 다시 재발이 돼서 가 보니, 가니까 새로 수술해야 된다 뭐 아파 못  견딘다고 수술해야 된다고 그래 자녀들은 '암만 그래도 또, 돈이 들어도 또  수술해야 됩니다. 수술해야 됩니다.' 이렇게 하고 자기는 마지막에, 내가 거기에  논두렁에 지나가니까, 들판에 지나가니까 찾아와 가지고서 내가 이렇게 이런데  어째야 되겠습니까?' '인제 수술 한 번 해도 안 나았으면 그만하면 알 일이지,  믿기나 하고 주님에게 낫아 달라 하면 더 든든하고 좋을 건데 와 그러냐' 하니까  '어짤까 싶어서 목사님에세 묻는데 그라면 나도 그래 할랍니다. 그만 팔월 집회  가 가지고서 기도해 가지고 낫도록 그만 주님에게 낫아 달라고 그래 내가 좀  하면 싶습니다.' 이래요. 그래서 병원만 제일인 줄 알고 있는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고마와서 나무 밑에서서 둘이 '그러면 기도합시다.' 기도를 하는데  기도하는 내 마음에는 낫았어. 기도하는 내 마음에는 낫았는데. 그 본인은  나았다는 것을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 몰라도 내 마음에는 나았어. 나았는데. 그  뒤에 내가 말을 들으니까 뭐라고 말이 들리는 게 아니라 나는 팔월 집회 가서  나은 게 아니고 팔월 집회 준비하다가 나았다 그렇게 말해요. 그이는 또 인제.

팔월 집회가 그때 며칠 안 남았었는데 집회 준비하다가 나았다고, 완전히  나았습니다. 나았는데, 이제 앞으로 문제는 '하나님께서 더 도지게 안 해 주나  도지게 안하나?' 요게 탈이라. 아픈 것도 없이 다 나았으니까 나은 건데 의심하면  의심은 그거 적입니다. 그랬는데, 그분은 하나님에게 얼마나 감사를 했는지  몰라도 자궁암이 그때에 나았어.

 그때, 우리 ○○○ 집사라고 소를 먹이다가 황소가 그만 떠받아 가지고서 번듯이  눕혀 놓고 그만 앞가슴에 그만 황소가 디디고 올라서 버려서 그만 가슴이 푹  내려 앉았어. 가슴뼈가 위에 부러지고 밑에 부러지고 부러져 가지고서 앉으면 이  주먹덩이 요만한 것이 쏙 들어갈 만치 요라고 그 안에는 또 알밤만치 요거  들어갈 만치 폭 들어가 있고 이래 가지고서 지금 앓고 들어 누웠는데. 그래  권찰님들하고 집사님들하고 가 가지고 기도했어요. '네가 하나님이 낫아 줄 것을  믿느냐? 네가 병원에 가서 꼭 해부를 하고 뭐 해야 나올 줄 아느냐?' 하나님 낫아  주시기를 바란다고서. '그러면 네 믿은 대로 될 터이니까 기도하자' 기도하고 나서  보니까 꿀밤 하나 들어갈 만한구 멍은 쑥 올라와 버렸어. 나 그거, 나 그거 하나  올라온 거는 환하게 보여. 나는 올라왔다 하는데 다른 사람이 있다가서 '아 그런  게 아니라 이 주먹 이 쑥 들어갔는데 많이 푹 올라왔습니다. 이랬는데 그 뒤에  수술 안 하고 요번 집회애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의롭게 살라고 하는 자에게, 의롭게 쓸라고 하는 자에게 왜 병을 안 고쳐  주겠습니까? 안 고쳐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쳐 주면 더 죄를 많이 지을 것이기  때문에 안 고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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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3636 불심판 면할 사랑/ 베드로후서 3장 1절-13절/ 820421수야 선지자 2015.11.02
3635 불심판 준비/ 베드로후서 3장 7절/ 870723목새 선지자 2015.11.02
3634 불심판 준비/ 베드로후서 3장 9절-13절/ 870724금새 선지자 2015.11.02
3633 불심판에 대한 표준적 계명/ 마태복음 25장:31절 -46절/ 820317수야 선지자 2015.11.02
3632 불심판에 대한 표준적 계명/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820314주전 선지자 2015.11.02
3631 불심판에 대한 표준적 계명/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 1982년 12 공과 선지자 2015.11.02
3630 불쌍한 사람/ 사도행전 3장 1절-13절/ 850506월밤집회 선지자 2015.11.02
» 불쌍한 사람/ 사도행전 3장 1절-21절/ 850507화전집회 선지자 2015.11.02
3628 불쌍한 세 사람/ 사도행전 3장 1절-13절/ 850505주전 선지자 2015.11.02
3627 불쌍한 의인/ 사도행전 3장 1절-16절/ 790814화전집회 선지자 2015.11.02
3626 불의의 재물로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복음 16장 11절/ 840427금새 선지자 2015.11.02
3625 불의의 재물로 친구 사귀는 법/ 누가복음 16장 9절/ 840420금야 선지자 2015.11.02
3624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요한일서 3장 16절/ 840421토새 선지자 2015.11.02
3623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누가복음 16장 9절-10절/ 880320주새 선지자 2015.11.02
3622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누가복음 16장 9접-10절/ 880322화새 선지자 2015.11.02
3621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누가복음 16장 9절/ 880321월새 선지자 2015.11.02
3620 불의한 청지기의 고민/ 누가복음 16장 3절-4절/ 820614월새 선지자 2015.11.02
3619 불이 섞인 유리바다/ 요한계시록 15장 1절-4절/ 871129주전 선지자 2015.11.02
3618 불행에서 구출 받는 법/ 다니엘서 6장 19절-24절/ 820124주전 선지자 2015.11.02
3617 불행의 원인은 소경된 것/ 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870302밤총공회 선지자 2015.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