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2 14:03
불심판에 대한 표준적 계명
1982. 3. 14. 주전
본문 : 마태복음 25장 31절 - 46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자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 성구 해석에 대해서 시비가 있는 것은 오른편과 왼편에 나누어 있는 양과 염소가 기본구원을 가르친 것이냐 행위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냐 하는 것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대개는 행위구원이 아니고 기본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으로 오른편에 양떼는 택함을 입은 자들이고, 왼편에 있는 염소는 불택자들을 가르친다 그렇게 해석들을 합니다.
그러면 그 구원과 멸망이 그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서 된 것이니 과연 기본구원이 행위를 따라서 되는 것이냐 주님의 공로로 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만일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택한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에게 부딪힌 이 여섯 가지 주님을 대접하는 의로운 행위가 반드시 필연적으로 있다 결과적으로 이 여섯 가지 행위가 없는 자이면 불택자라 하는 이것으로서 판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택한 자들이라도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 상을 받는 행위도 있고 다 불탐을 받아서 수치를 당할 그런 행위도 있다고 성경이 기록했기 때문에 그런 변명은 다 무효로 돌아갑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말씀하신 이 말씀은 기본구원을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행위구원에 대해서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행위구원에 대해서 말씀했으면 저희는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간다 하는 이 문제가 문제되지 않느냐? 그 성구를 가지고 시비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영벌이라 하는 것은 거기에 의인이라는 말이 없고 저희는 영벌이라, 성경에 구속받은 사람들이라도 죽도록 충성하라 그렇지 안 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러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택한 자라도 그 행위구원은 둘째 사망으로 영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집 지은 비유에 보면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과 같이 자기 구원을 건설한 자들은 하나님이 불로 심사할 터인데 그 공력이 남아 있으면 상을 받고 그 공력이 다 불타면 저는 구원을 얻으나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도 행위구원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이 성구를 기본구원으로 해석한 데에서 기독교는 부패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아 선택받은 사람들은 다 오른편에 서서 영광의 구원을 다 받는다. 그거는 주님이 대신했기 때문에 그 공로로 인하여 받는다 요런 억지 해석을 끄다 붙였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공로만 믿지 믿으면 되지 행위에 대해서 힘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 미혹이 되 가지고 구원을 절단 냈습니다.
또 마태복음 25장에 열 처녀 비유에 행위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인데 그것도 기본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교회를 속화시킵니다.
우리는 영과 마음 몸이 있고 안 믿는 사람들은 영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마음과 몸만 살아 있지마는 그래도 인격이 있고 그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잘못 깨달으면 전부가 멸망이 됩니다.
이 성구에 대해서 제일 주의할 것은 이것이 기본구원에 대해서 가르치신 말씀이냐 행위구원 건설구원에 대해서 가르치신 말씀이냐 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요건 행위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고 기본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또 둘째로 주의할 것은 여기에 여섯 가지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나그네 되고 옥에 갇히고 병들었을 때에 이렇게 봉사한 이 봉사 이것이 육의 봉사를 말씀하는 것이냐 신령한 구원에 대한 봉사를 말씀하신 것이냐 하는 이것이 둘째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는 이 몸이 배고프고 옷 없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옥에 갇힌 것 방문하는 이것을 표준해서 말씀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신령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도 악령은 육신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 가지고 심령에 대한 중대한 문제를 버리고 육신이 봉사하는 것으로 이렇게 오해를 하도록 해 가지고 천주교에서는 육신 봉사하는 거기 전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육신을 봉사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 중요할 수도 있고 범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약한 사람을 배고픈 사람을 밥을 먹여 이것을 끄내끼로 삼아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했으면 그는 뒤에 성공을 하든지 못하든지 의가 되겠습니다.
영의 구원은 생각지 안하고 고깃덩어리의 배고프니까 이것을 동정한다고 했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 났다고 하면 그것은 귀중한 보배의 그 재물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것을 인간 구원에 쓰지 안하고 멸망에 썼기 때문에 그는 낭비자로서 그 소비된 것이 절대로 하늘의 상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 사람의 육에 대해서 어려움을 돕는 그런 일을 하는 동기가 주님의 피의 운동을 인한 동기가 돼야 되겠고 목적이 주님의 피 흘려 구속하신 이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그 행위가 되어야 하겠고 그 일이 그렇게 해 가지고 완성이 됐다고 하는 그 완성이 어떤 것이냐 과연 그것이 그 사람을 구원하는 데에 도움이 됐고 구원을 이렇게 오는 하는 중매와 같이 도화선이 됐다고 하면 가치 있지마는 그것이 그 멸망의 하나에 협조가 되었다고 하면 상은 없을 것이나 동기와 목적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정죄는 받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도 왼편에 있는 염소도 다 택한 자들인데 택한 자들 가운데에 이런 행위 양 같은 행위 하는 자가 있고 염소 같은 행위 하는 자가 있으니 염소 같은 행위를 하는 자는 그의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은 완전히 그는 멸망을 받습니다. 그만 멸망 받을 때에 그 행위를 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구속받은 새사람이 아니고 옛사람입니다.
옛사람 그자라도 유황불 구렁텅이에 타고 옛사람에게 이용된 심신의 기능들도 영원히 유황불 구렁텅이에 탑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과 같이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 된 새사람 참사람 그 사람에게 쓰여져서 그 심신이 새사람에게 쓰여져 의의 도구로 의의 도구로 의의 병기로 쓰여진 그것은 그 몸의 기능이나 그 마음의 기능은 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의인에게 속해서 그를 주관하는 자도 새사람 의인이요, 그에 속한 것은 의로운 병기가 되어서 다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이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기본구원에 관한 말씀이냐 구원 건설구원에 관한 말씀이냐 이 대접하는 것은 그 심령에 대한 말씀이냐 그의 순전히 고깃덩어리 이것을 위한 대접이냐 요것을 분별해야 됩니다.
왜 이것을 강하게 말하는고 하니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교계에 나가면 이 해석이 이단이라고 정죄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을 거꾸로 하는 데에서 믿는 사람은 예배당에 다니면 됐지 예수 믿는데 힘써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중요한 것은 여기에 보면 자신이 깨끗하게 산 것도 있을 것이고 정직하게 산 것도 있을 것이고 열심히 산 것도 있을 것이고 조심해 산 것도 있을 것이고 물론 그 신앙행위는 수많은 행위가 있지마는 딴 거는 다 제외입니다.
딴 거는 다 일소해 버립니다. 일소하고 여기 보니까 단지 배고플 때에 목마를 때에 헐벗었을 때에 나그네 되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옥에 갇혔을 때에 대접한 요것만 딱 들어서 판단했습니다. 이것도 구별해서 알아야 합니다. 딴 것은 거게 말씀하시지 안 했습니다. 요 여섯 가지만 가지고 여섯 가지 대접한 생활이 있으니 너는 이 물질계를 창조하실 때에 그때에 같이 창조하는 영원한 세계를 유업으로 받아라 너는 이 여섯 가지가 없으니 마귀와 함께 영벌의 유황불 구렁텅이로 들어가라 요렇게 판단했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섯 가지에 해당되지 안한 욕심쟁이 신앙 행위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만한 신앙 행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있지마는 그것은 인간에게는 대우를 받지마는 마지막에 이 심판대 앞에서는 소용이 없습니다.
이 심판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심판 앞에는 서지를 안 합니다. 공심판 앞에는 가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이 공심판을 대신 받았기 때문에 공심판에서 다 떼어 내 가지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본구원에 관한 것이고 심령에 대한 대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그때도 하나님의 명령이 자기 사생활에 공생활에 국민 생활에 가정 생활에 경제 생활에 모든 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다 구비하게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 있다고 우리는 추리할 수 있습니다. 추론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생겨난 지 이천 년이라는 긴 역사가 쌓여 나왔고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필연적으로 과학도 생겼을 것이고 역사도 생겼을 것이고 많은 그 기능들도 발달돼 있었을 것이고 또 거기는 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입법도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주신 말씀도 법도가 있었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에도 사람들은 사람만을 생각해서 인인 관계에 인인 생활을 안녕 질서를 방해하면 정죄 했을 것이고 다 안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그 입법으로 이것이 사회나 단체나 국가나 가정에 서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실 때에는 그 가정에서 어떻게 알뜰히 했다 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심판은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사회에 어떤 그 선량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소용없습니다. 단지 그때는 하나님께서 방주를 모으라는 요 방주 모으는 요 계명 지키는 것 요것만이 그때에 구원이 된 것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도 허다한 말이 아니고 해석이 아니기 때문에 나가면 의논이 분분할 것입니다. 이단이라 말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옳은 것은 옳은 것을 아는 자는 틀렸다고 하는 그 말에 대해서 힘이 나지 거기 대해서 공포나 염려가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노아 홍수 심판 때에 온갖 하나님의 법칙이 있었지마는 모든 법칙은 다 제외하고 홍수를 면하기 위해서. 홍수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 배를 모아라 하는 요거 하나 순종으로 홍수 심판을 이기고 하나님의 모든 후사가 되어졌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이 심판은 불심판인데, 기독교에도 윤리에 관한 것 사회에 관한 것 국가에 관한 것 경제에 관한 것 가정에 관한 것 온갖 도덕에 관한 것 지능에 관한 것 모든 것이 빠짐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모여져 있는 것이 신구약 성경입니다.
그러나 불심판이신 예수님의 재림인 이 마지막 말세 심판이 심판에는 노아 때는 방주 만드는 고거 하나만을 구원에 자유의 원인으로 삼은 거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 때의 구원과 멸망의 그 근거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만일 핀트가 삐뚤어졌으면 헛일입니다. 그게 바로 되어야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는 데에는 이 여섯 가지 여섯 가지 봉사한 요거 가지고 멸망과 구원을 판정했습니다.
그랬는데 거기 보면 여섯 가지를 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렇게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나를 대접했다'고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요것이 중대합니다. 주를 생각하고 했고 주를 위해서 했고 주님의 소원이기 때문에 한 것만이 책임 있지 그 외에 저 명예 위해서 지위를 위해서 권세를 위해서 자기 사회를 안보하기 위해서 자기로 인성을 싸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은 주님에게는 상관없다는 것을 또 명백히 가립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 때문에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구속해 주셨기 때문에 어쨌든지 이 때문에나 저 때문에나 무슨 때문이든지 주님 때문에 인간을 구원한 이것만이 불심판의 심판을 면하는 하나의 법칙이 되어 있다 하는 것을 여기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2절로 13절에는 보면 '악한 것이 성함으로 모든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겠으나 끝까지 견디는 사랑을 끝까지 가지는 자는 구원 얻으리라' 그렇게 거기는 말씀했습니다. '악한 것이 성함'이라 말은 인간들이 자기 중심 피조물 중심 인류 중심도 피조물 중심입니다.
창조주시며 구속자이신 하나님 중심이 아닌 어떤 피조물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많은 것이나 적은 것이나 어떤 것이든지 인간들이 말세가 되어갈수록 조물주, 주재자, 주권자, 구속주, 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위주로 하지 아니하고 제 꾀대로 요때는 요걸 중심 해야 요게 좋다 하겠다 간교한 요 간사한 마귀신이 들어 놓으니까 요때는 요걸 위주로 해야 날 알아주겠다 조걸 위주로 해야 알아주겠다 해서 하는 그런 것을 총칭해서 한 말로 하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악의 정의도 성경학자들의 정의는 동일치 않습니다. 악한 것이 성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나 악의 악에 반대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요, 하나님에게만 가지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왔으니 그 사랑은 곧 진리와 영감으로 나타났습니다. 진리와 영감으로 나타나도 인간이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진리와 영감대로 대속의 제물이 된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는 순전히 조물주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이 둘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여 이를 위해서 있었고 이를 위해서 다 쓰여진 것이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 중심인 이것이 성함으로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될 때에 하늘에서 내려온 이 사랑 이 주의로 하나님과 이웃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소원대로 이름을 구원하기 위한 요것만을 가진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렇게 명백히 구별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2절에 보면 "너희는 말에나 행실에나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로 알고 말도 하고 행함도 해라 긍휼이 없는 자는 긍휼없이 심판할 것이요 긍휼이 모든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 긍휼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니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것이 긍휼이요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자들이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요것만이 긍휼입니다. 이종교에는 긍휼이 없습니다. 세상 모든 도덕에는 긍휼이 없습니다. 이 긍휼은 하늘에서 내려온 긍휼이니 산 긍휼입니다. 이것도 같은 말입니다.
불심판을 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여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소원하는 이웃 구원하는 요거 외에는 아무 것도 가치로 보지를 않는다 그것은 너희들이 재생에 살 때에 지켰으니까 지킨 그만치 너희들이 지킨 효력을 본 것뿐이지 불심판에는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5절로 5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겨 그들만이 칭찬하고 영접한 그것은 어떤 것을 원인을 삼아서 그렇게 하는가 말씀하시기를 맡은 식구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 나누어주는 그자에게 베풀어준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어떤 자에게 가는가 주객으로 더불어 술 먹고 술이 취해 가지고 자기 맡은 식구를 때리는 자를 영벌에 취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양식 나누어 줘서 힘있게 만드는 자가 누구인가? 그에게 언행심사의 모든 생활로 그의 믿음을 그의 신앙인격을 하나님에게 대한 동경을 하늘나라에 온 동경을 부활에 대한 사모를 어쨌든 주님을 향하는 이 구원에 사람을 강건케 하는 것이 양식 주는 것입니다.
구원에 사람을 해치는 것이 때리는 자입니다. 술은 뭐인가? 음행의 포도주입니다.
세상주의 육신주의 인본주의 안 믿는 사람들이 소망하는 소망과 같은 그런 소망을 예수 믿는 자가 가지고 이것으로 자랑하니까 어리석은 신자가 땅과 땅에 있는 그런 것이 부러워서 하늘을 향했던 것이 나는 어리석은 생활을 했다 저 사람 저래 믿어도 잘 사니까 나도 저길 가야 되겠다 해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고것만을 바라보는 이 사람을 세상 문화시키고 진화시키는 그자가 때리는 자입니다. 이자에게는 복수가 하나님의 영원한 복수입니다.
이것도 노아 홍수 때에 방주 하나에 기인된 것처럼 하나님의 소원인 인간 구원 하나에 모든 것은 기인된다 하는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 1서 3장 16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으니 너희들이 형제 구원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했어 그 밑에 "이로" 그 밑에 "형제의 궁핍을 동정하지 않는다"는 그 말은 목숨을 버린다는 거게 소속한 말씀입니다.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생명도 버리는데 네가 물질 가지고 형제를 구원하는 데에 필요한 그 물질을 쓰지 안 한다면 어떻게 너희에게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겠다고 하겠느냐? 하나님의 사랑 없으면 소용없다 하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로 13절에 보면 '내 계명을 지키는 자는 내 사랑 안에 있는데 내 계명은 무엇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다시는 종이 아니고 나의 친구라고 당신의 동등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나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비용으로 투자한 것이 주님의 사랑이십니다. 이것도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 3장 14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것이 사망 중에 있는 증거요. 너희들이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그 성질로 그 목적으로 그 동기에서 그것을 위해서 사랑하는 이 사랑 그것을 위해서 사랑하는 이 사랑 그것이 너희에게 없으면 너는 사망 중에 거하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보면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 마지막 말씀하시고 승천을 어떻게 했던가 마지막 하신 말씀하신 말씀이 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해 줘라. 내가 너희들에게 한 것을 너희들도 모든 사람에게 가서 그대로 전하고 그대로 하라 내가 너를 위해서 모든 것 다 바친 것처럼 너도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바쳐라 요 말씀하시고 9절에 그대로 갈릴리에서 승천했습니다. 예수님의 유언이십니다.
마태복음 10장 42절에는 보면 이 구원을 위해서 냉수 한 그릇의 수고되는 그 수고도 결단코 당신이 상을 잃지 않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구원의 표준은 뚜렷합니다.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아 때에 오만 계명 다 지켰어도 배 안 만들었으면 헛일입니다. 왜 그때 의인들이 없었겠습니까? 배를 안 만들었기 때문에 헛일이요. 오늘도 훌륭한 가정생활 훌륭한 사회생활 훌륭한 민족생활 훌륭한 국민생활 훌륭한 도덕생활 아무리 구비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구속의 사랑에 붙들려 자기의 전 생애 목적과 자기의 사명은 인간 구원하는 것이 사망인 줄을 알고 앞집 뒷집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내 입장에서 가정생활 사회생활 이것을 바로 함으로 다만 얼마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서 이 구원이 전달되리라 하는 이 목적과 소원을 가지고 했으면 그도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한 역사가 되어지겠지만 이것이 아니고 제 위신이나 제 명예나 제 행락이나 제 행복이나 모든 가정대 가정의 암투 사회대 사회의 암투 이런 것을 위주로 중심으로 가지고 했다면 그런 것 다 불타버리고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불심판에는 주님의 구속의 이 사랑을 깨닫고 이 구속의 관련자 이 구속에 붙들린 자 되어 주님이 내게 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나에게 전파하라고 이 화목의 이 연결에 사명을 맡겨주신 이것을 깨닫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런 것 저런 것 한 요것만을 하나님이 기준해서 심판하고 그 외에 것은 다 이 세상에 너희들이 살 때에 그 값을 다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영원한 세계에 갚을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잘 살아서 살아 사회에 인정받아 돈 많이 모았으면 돈 많이 모았으니까 자기 잘 사는 것 됐고 만일 그 일을 하지마는 나 예수 믿는 사람인줄 아는데 요걸 잘해야 복음이 욕되지 안 하지 복음을 가루지 안하고 했으면 한 거만치 거기에 불심판에 대한 효력이 있을 것이고 요렇게 모은 재물 요거 가지고 인간구원에 투자했다고 해서 인간구원에 마치면 불심판의 효력이 있을 것이고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구원 위해서 하는 요 본질과 본성 요 요소가 아니면 다 허사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값을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불심판의 표준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 사랑입니다. 그 방편은 뭐인가?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 방편은 뭐인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이 두 사랑을 인하여서 투자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방편이 없습니다.
반성합시다. 자기에게만 힘대로 온갖 조심 온갖 열심 온갖 인내 온갖 절제 충성했지마는 정말로 구속하신 주님과 형제구원을 위해서 마음에 간절함으로 그거 한 일이 있는지 그를 위해서 한 일 있는지 그것으로 인하여 동기가 됐는지 그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인지 예수의 이름만 가지고 예수님의 그 구속만 공짜배기로 제 것인 줄 알고 요것만 하나 인정하고 전 생애는 자기를 위해서 이렇게 생애를 했는지!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교회에 장로직이라면 성직으로서는 최고직입니다. 성경에 장로라고 번역한 것은 목사도 장로고 장로도 장로입니다. 최고직입니다.
최고직이지만 아직 어린 아이다 장로가 승격되는 것은 어른이 아니라 어린아이 하나라도 그의 생명을 붙들고 요걸 어떻게 하면 구원할까 요게 구원에 멸망에 빠질까 어떻게 하면 되어질까 하는 요 사랑의 입각함이 있어야 되고 요 사랑의 역사가 있어야 되다니 주일학교 반사되는 거는 승격이다 장로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장로가 승격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학벌 어떤 문벌 어떤 생애 어떤 명예 어떤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일학교 반사가 한 학생이 주일을 범하고 나오지 안 하려고 하니까 그 학생을 주일에 나와서 예수 믿어 구원을 얻도록 하려고 애터져 하는 마음 속썩이는 마음 참는 마음 간절한 마음 요 마음 한 학생을 하루아침에 데리러 갔던 고 마음과 같은 고 도수와 고 성질의 것이 일생동안 장로로서는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깨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내가 인간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가졌으며 저것이 이러면 시험에 들까 저 믿음이 떨어질까 저것 저건 세상 속화되어질까 믿음을 잊어버릴까 나쁜 동무에 거기서 믿음을 다 빼앗기게 될까 하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품은 것이 있는지 없는지? 예수님의 심정화됨이 있는지 없는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 독사와 시랭이같이 일생 동안 제 욕심만 생각하고 가족에 부모 형제 부부간까지 모두 다 이렇게 하면 자기에게 유리할까 하는 요런 흉측한 죄인이 반사가 되어 가지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오늘 잠을 멈추고, 말을 조심하고, 걷지 안 할 걸음을 걷고, 안 할 말을 안 들어먹을 욕을 먹어. 안 참을 걸 참고하는 이런 반사가 된 것이 이것이 똥 덩어리를 금덩이로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감사한 줄 알고 감사의 그 감격해서 해야 되지, 내가 반사 노릇 하는 것이 권찰 노릇 하는 것이 이것이 무슨 억센 공로를 베푼 것같이 교만해 가지고 오만한 자리에 앉아서 겸손히 하지 못하고 하고도 불충 마음을 부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하는 그런 반사는 귀한 자리 앉았으나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멸망할 짐승과 같은 그 결과가 맺어질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표준 계명을 알았은즉 내가 공장에서 일하든지 가정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것도 양심 생활하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생활하는 것도 모든 전 생애가 하나라야 합니다.
나를 구속하신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구원을 위한 요것 때문에 모든 걸 해야 되지 돈 때문에 하는 것도 소용없습니다.
주님에게는 상관이 없소. 돈 때문에 한 것은 돈벌이 해 가지고 제가 상당한 값을 받았습니다. 명예 위해서 한 것도 주님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불심판에는 상관이 없어. 권세 때문에 한 것도 상관이 없어. 사회심판 때문에 한 것도 상관이 없어. 지위 때문에 한 것도 소용이 상관이 없고 다만 예수님의 피로 인간 구원하는 이 구원 때문에 한 것만 심판법에는 상관이 있습니다.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내가 예수 믿은 지 오래 되어서 세상 교회도 세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런 것 구비하니까 교회서 알아주고 했지마는 암만 알아줘도 소용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는 대로 내가 주님의 구속에 그 사랑에 감격이 조금 있든지 많이 있든지 그 사랑 구속의 사랑에 대해서 감격한 것이 나에게 얼마나 있으며 내가 현재에 구원을 위해서 마음의 역사가 얼마나 있으며 몸의 역사가 얼마나 있으며 내 행위의 역사가 얼마나 있었는가 요것이 문제입니다. 요것만 불심판에 관련됩니다. 요거 하나를 굳게 잡읍시다.
일생동안 예수 믿어서 장로까지 되고 주일학교 반사가 그 학생을 구원하기 위한 그 심정에 하루 같은 심정도 평생 모아봐야 그런 것은 하루 아침 심정에 양만치도 없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 말이요. 하루 아침은 놔두고 그 한 학생에게 대해서 마음을 쓰고 노력하고 원하고 하는 그때에 그 마음과 같은 그 도수에 그만 한 도수의 뜨거운 도수의 마음을 평상 한번도 품어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놀랄 일입니다! 정신 차립시다! 우리는 갈 사람들이요. 주님이 오시면 이 모든 것은 일단 정리됩니다. 모든 것 정리돼. 오늘인지 내일인지 몰라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언제 될지 모르니까 마음놓고 살자 말 아닙니다. 내일이라고 할 수 없다 말입니다.
다음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말입니다. 왜? 이 시간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한 시간도 하루도 여유를 두지 말고 급급히 준비하라는 것을 말씀하신 말씀인데 악령은 정 거꾸로 우리에게 반영을 시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죽이는 일 하지 말아요. 사랑한다 하면서 죽이는 일 하지 말아요.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친구가 친구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여 이것도 다 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