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2 12:39
부활
1988. 6. 15. 수야
본문: 고전 15:37-44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말씀은 부활을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이 실물을 가지고 비유해서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비유는 본래 아무리 정확하다 해도 실상만치는 정확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비유든지 그 비유로 가르치고 있는 그 실상은 더욱 더 확고한 것입니다.
씨뿌리는 것을 비유해서 이렇게 부활을 가르치셨는데 36절에는 보면 뿌린 것이 죽지 아니하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하는 것을 첫째로 말씀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누구든지 다 죽고 부활을 해야 영계에 갑니다. 혹 안 죽고 변화하는 그런 일이 있는가 하는 그런 허망한 생각을 가지면 안됩니다. 그것은 다 이단들이 하는 말입니다.
또 37절에는 뿌리는 그 씨의 형체와, 뿌리는 씨의 종자의 형체와 그종자가 뒤에 자라는 형체는 다릅니다.
씨가 굵다고 자라는 그것이 굵은 것 아니고 또 씨가 잘다고 자라는 그것이 작은 것 아니고 씨가 넙덕하다고 자라는 것이 넙덕하지 않고 동글다고 해서 자라는 것이 동글지 않습니다. 씨의 형체와 자라는 그 장래에 심어 놓고 난 뒤 나서 자라는 그 형체와는 다르다 하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볼끈 잡아야 되지 이거 다 미끄러져 가지고서 그만 실패합니다.
씨는 뭣을 가리켰는고 하니 우리의 모든 세상 행위를 가리켜서 씨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런 행위 저런 행위 하는 행위를 씨로 비유했고 또 행위는 그라면 씨는 어데다 심으는가? 씨 심으는 밭은 자기가 만나는 그 현실을 가리켜서 비유한 것입니다.
현실은 밭과 같고 우리 행위는 씨종자와 같고 심으는 것은 현실에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심은 것입니다.
그런데, 씨종자의 형체와 부활의 형체가 아주 다릅니다. 사람들이 자기 현실에서 이런 행동 저런 행동을 할 때에 그 행동이 참 재미가 있어서 못 견딜만치 재미있는 그런 행동이라도 이 다음에, 장래 형체는 부활을 말한 것인데 부활할 때도 그렇게 재미있느냐 하면은 재미있는 것 아닙니다.
또, 행동할 때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해서 아주 그 행동을 존귀히 대우하고 아주 높이 평가하고 부러워하고 존대하고 또 그 행동에 눌리기도 하고 종노릇도 하고 이렇게 아주 영광 있고 존귀 있는 그런 행위입니다. 그러면 그 행위가 뒤에 부활할 때에도, 그 행위로 말미암는 그 부활할 때도 그 부활이 그렇게 영광스러우냐 하면은 그런 것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의 그 행위가 모든 사람이 천대하고 멸시하고 하나도 환영하지 안하고 모두 침 뱉고 또 다 거게 가까운 사람들은 다 욕을 하고 도망을 쳐버리고 이렇게 하니까 그 행동은 참 모든 사람이 저주스러운 행동이요 아주 무가치한 행동으로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가장 불행스러운 그 사람의 생활이다 이렇게 보아지는 것도 이다음에 부활할때에는 굉장한 영광으로 부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마지막 행동하시는 것이나 평생 일생 동안 행동하신 그 행동은 모든 사람들이 다 설설 싫어하고 버렸고 마지막에 예수님이 그 제사장들에게 정죄받아서 끌려갈 때에 그때에 예수님이 행동한 그 행동은 제자들도 다 버리고 도망쳤고 저주도 하고 도망치고 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한 그 행동의 죽음으로써 부활할 때에는 그 영광이 굉장히 컸습니다.
이러니까, 요것을 여러분들에게 내가 여러 수십 번 말했는데, 여기지금 거듭거듭.’ 믿는 사람의 행동은 씨종자와 같고 고 행동을 심기는 어데다가 심느냐 하면은 자기가 닥친 그 현실에다 심습니다. 현실이라는 현실에서 자기 행동을 합니다.
현실에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 것은 씨를 심기 시작하는 것이요 행동을 해서 그것으로서 현실에 끝이 났으면 씨는 벌써 심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사람들이 행동하는 그 행동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행동 다음에는 부활의 장래가 있는 것입니다. 행동 하나에 부활의 장래 하나 있고 행동 백이면 부활의 장래가 백이 있고 행동마다 부활의 장래가 있는데 이 행동할 때의 모든 사람들이 가치로 여기는 평가하는 것과 비판하는 것과 부활할 때의 그 부활을 보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은 아주 판이합니다.
이러니까, 대개는, 꼭 그런 거는 아닙니다 마는 이 행동에 좋은 것은 부활할 때에 허무하고 행동에 아주 허무한 것은 부활할 때에 좋은 부활로 그래 나는 그런 것이 대개로 그래 맞습니다.
이러니까, 이 행동과 부활이 딴게 아니고 하나라. 고 행동에 대한고 부활이 딱 정해 가지고 있는 건데 사람들이 고 행동에 대한 부활이 어떤 부활이 있다는 것을 연결된 것을 모르기 때문에 행동의 가치만 보고 가치 있는 행동을, 다른 사람한테 칭찬받는 행동을, 존대받는 행동을 이렇게 할라고 애를 쓰고, 이 행동하면 이 다음에 부활이 어찌 되느냐 하는 것은 생각지를 안하고 사람들이 살기 때문에 요 성경에, 씨를 심는 것은 장래 형체를 심는 것이 아니고 다만 여러 가지 씨알을 심는 것인데 그 씨알마다 다 이다음에 살아날 때에는 어떤 걸로 다시 난다, 나온다, 자라 나온다 하는 그것이 정하여 있는 거와같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행동한 그 행동에는 요 행동에는 요 부활 조 행동에는 조 부활, 마치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또 팥을 심으면 팥이 나고 이렇지 콩심는데 옥수수 날 리가 없고 또 옥수수 심어 놓은 데 팥이 날 리가 없는 거와같이 이 세상에서 사람의 행동과 그 행동에 대한 부활은 이거는 뭐 변개할 수가 없이 네가 고 행동 했으니 고 부활로 행동했으니 조 부활 행동과 부활은 그거는 틀림없는 고대로 꼭 응보되는 것인데, 고것을 사람들은 요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고만 고 행동에 쉽고 좋고 모든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가치 있다고 영광이라 존귀라 하는 그것을 취해서 그런 행동이 가치 있는 줄 알고 그런 행동을 취해서 행동하고 부활이라 하는 것은 전연히 생각지 못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게 됩니다.
행동과 부활은 그 씨종자와 그 다음에 나서 자라는 것은 변동을 못합니다.
변동을 못 하고 그 씨면 그런 것으로 나서 자라고, 그 씨면 넝쿨로 자라고, 그 씨면 나무로 자라고, 그 씨면은 풀로 자라고, 그 씨면 뭐 꽃으로 자라고 이제 그 씨마다 자라는 것은 딱 정해 가지고 있습니다. 이거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딱 씨종자마다 그것이 나서 자라기는 어떻게 나서 자라느냐 하는 것은 딱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정되어 있는 것이지마는 그 씨종자를 보고 농사를 지어보지 못했고 경험이 없고 또 이 씨종자는 어떻게 자란다 하는 그 설명을 모르는 사람들은 씨종자 보고는 그것이 나서 자라면 키가 크냐 넝쿨이 되느냐 또 몇 해냐 사느냐 그런 거는 전연히 모른다 그거요.
그거 모양으로,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행동은 틀림없이 고대로 하나님이 심은 종자대로 나서 자라는 것처럼 변동 못 하게 고대로 되는데 사람들은 행동과 영원무궁의 보응이라는 이 부활의 보응, 부활의 보응이라 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전혀 모릅니다. 이 행동에는 어떤 부활로 되느냐 저 행동에는 어떤 부활로 되느냐 하는 그것은 사람들이 전연히 모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책에는 천하 책을 다 주 모아도 그 부활이라 하는 것이 없습니다. 요새 모두 거짓 종교들 모두 그런 종교 유사 단체들이 기독교의 것을 따다가서 전부 저거도 뭐 부활 있는 것처럼 이렇게 말했지마는 그들은 부활을 모릅니다. 말해도 부활을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아시고 성경으로 당신이 하나님 백성들에게 가르친 것뿐입니다.
이래서, 행동과 부활은 변동할 수가 없는 그거는 절대성 가진 고정적인데 사람들은 행동과 부활이 상관이 없는 줄로 또 행동에 대한 그 부활이 어떤 부활인가 하는 그것을 모르는데 신구약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을 것은 행동이 좋다 나쁘다, 쉽다 어렵다, 괴롭다 평안하다 이렇게 이 행동만 볼 것이 아니고 그 행동의 결과는 부활이니까 부활이 어찌 되느냐? 이 행동에는 부활이 어찌 되느냐?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인데. 부활이 어찌되느냐? 그 부활을 보고 행동을 해야 될 터인데 사람들은 행동만 보고 우선 좋은 것 취하지 부활에 좋은 그 행동을 취할라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 이것을 가리켜서 말씀을 했습니다.
행동과 장래 그 부활은 하나인데 변동 못 하고 고정으로 절대 정해 가지고 있는 하나이나 행동의 그 영광이나 가치나 존귀나 모두 다른 사람들이 다 평가하는 그 행동의 평가와 이다음에 부활의 평가는 다르다고. 그러니까 행동 좋은 것만 취합니다.
또 38절에는, 이제 두 가지 배웠습니다. 부활에 대해서. 씨가 썩지 아니하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고거 배웠고, 또 심으는 씨와 장래의 형체는 같지 않다 하는 고거 배웠고 그러면 둘 배웠습니다.
또, 셋째로는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세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그러나 종자마다 변동할 수 없는 부활 형체가 있다.
종자마다 부활 형체가 절대 정하여 있어서 이거는 변동을 못한다. 행동은 이래 행동하면서 부활은 저런 부활 얻을라 해도 안 된다.
행동한 대로 부활된다 요것을 또 가르쳤습니다. 행동한 대로 부활된다. 그러면, 우리가 부활할 때에는 참 천한 부활도 있고 영광스러운 부활도 있고 존귀한 부활도 있는데 좋은 다시 말하면 좋은 부활도 있고 아주 나쁜 부활도 있습니다.
좋은 부활도 있고 나쁜 부활도 있는데 좋은 부활을 자기가 취할라고 좋은 부활을 선택할라고 하면은 이다음에 부활을 받을 때에 선택해야 됩니까 지금 행동을 할 때에, 선택해야 됩니까? 행동할 때에 선택해야 되지 이다음에 부활할 때는 선택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행동할 때에 선택해야 됩니다.
이런데, 행동할 때의 그 형편 행동의 모든 가치와 부활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행동 가치 좋은 것 보고 행동 취하지 이 행동에는 부활이 좋고 이 행동에는 부활이 나쁘다 부활 좋은 것 보고 행동을 취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행동 좋은 걸 보고서 행동이 평안하고 좋고 기쁘고 즐겁고 재미있고 이렇게 평안하고 수월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것 이렇게 행동 좋은 것 보고 취하지 그 행동은 암만 좋아봤자 하룻밤 나그네와 같이 잠깐 지나가는 것인데 그 행동에 그 보응인 영원한 부활이 있으니까 부활이 어떠냐 하는 것을 생각해서 부활의 가치를 보고 행동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지혜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많지를 못합니다. 요거 단단히 기억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영원한 좋은 부활을 우리가 취할라고 하면 그 좋은 부활은 언제 선택해야 됩니까? 지금 행동에서 선택을 해야 됩니다.
그런 것은 여러분들이 각각 한번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두 행동에 모두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거 많이 있는데 성경을 보면은 저 행동은 어떤 부활 받겠다 저 행동은 어떤 부활 받겠다 하는 것을 성경을 보면은 그것이 상세하게 나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할 때는 부활을 생각지 못하는 것이 미련한 인간이오.
벌써 행동할 때에 부활을 생각하고 ‘내가 우선 이 행동은 좋지마는 부활에는 참 비참하겠다’ 이래서 행동을 선택할 때에 부활을 보고 행동을 선택하고 행동 보고 행동을 선택 안 하는 것이 그것이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개 보면은 행동 보고, 세상에서 그 행동 보고 가치 보고 선택하지 그 행동에 결과라고 영원한 부활을 보고 선택하는 사람들은 많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그런 생활 어떻게 했소? 무슨 행동할 때에 이 행동 가치를 보고서 선택했느냐 그 행동에 따르는, 절대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그 부활을 보고서 행동을 선택했느냐 하는 것을 자기가 좀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은 다 모두 행동 좋은 거 이 세상에서 그 행동하는 그것이 영광이 있다, 쉽다, 권세가 있다, 존귀하다, 돈이 많이 들어온다, 호의호식이 된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고 칭찬하고 존대한다, 그거 모두 좋아서 행동 좋은 거 보고 취하지 그 행동에 따르는 부활 보고 선택하는 사람이 적다 그거요.
그런데, 그 행동과 부활이 마치 종자에 그 뒤에 자라는 장래 형체, 콩은 콩 심으면 콩이 반드시 났지 콩을 심었는데 나무가 날 리도 없고 팥을 심었는데 벼가 날 리도 없고 고게 종자마다 꼭 고 자기 형체를 가지고 나오는 것처럼 이렇게 사람의 행동에는 절대 변동할 수 없고 가감할 수도 없는 영원한 부활이 있는 요것을 명심하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부활에 우리 소망을 두고서 항상 좋은 부활 얻을라고 우리가 노력해야 되는데 좋은 부활을 얻을라고 애를 쓰면은 어데서부터 힘을 써야 됩니까? 좋은 부활의 원인되는 고 행동에서부터 힘을 쓰고 선택해야 됩니다.
그 빌립보 3장에 보면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은 사도 바울의 개인의 말이 아니고 성령이 그를 통해서 말씀하신 말씀인데 사도 바울은 땅위에 문벌 학벌 뭐 지위 권세 시민권 영광 뭐 오만 거 다 있고 지식 오만거 다 있지마는 그것을 이제 배설물과 같이 여겨 버렸습니다.
왜? 알고 보니까 영원한 부활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부활 좋은 부활받는 그것을 지금 준비해야 되지 이 세상에서 암만 좋다 해 봤자 그까짓 거 오늘 끝날란지 내일 끝날란지 모르기 때문에 이걸로 말하면 찌끼다. 배설물이다.
사람들이 깨 가지고서 참깨 가지고서 기름 짜러 갔으면은 깻묵은 배설물이요 그 안에 있는 기름은 알맹이 진짜 아닙니까? 이러니까, 이 세상 부귀 영화 이거는 껍데기로구나. 이 껍데기 속에서 참으로 신앙을 지켜 가지고서 영원한 부활을 만들고 있구나. 어떤 사람은 대통령 자리 앉아서 다른 사람 보면 그 사람 대통령 하는 것 같은 대대통령 자리 앉아서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믿음 지키는 일 새 가지고서 그 사람 부활을 지금 만들고 있어. 좋은 부활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한자리에서 두 사람이 같은 행동하지마는 하나는 하늘나라 가고 하나는 지옥 간다는 그거는 뭐이냐 하면은 껍데기는 꼭 같지마는 그 사람이 속에는 지금 거게서 부활을 만드는 부활에 좋은 부활의 행동을 취하고 어떤 사람은 그만 행동만 보고 막 그게 다인 줄 알고 날뛰고 있습니다.
이러기에, 이 세상 사랑들은 행동만 보지 부활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행동의 가치만 보고서 세상들이 부러워하고 존귀히 여기는 그 행동 그것을 하면서 그 가치 있는 줄로 알고 그것만 하고 그 행동 속에서 진짜 영원한 부활이 되는 알맹이 고것을 빼야 되는데 고게 대한 관심을 못가지고 행동하기가 쉽다 그거요.
38절에는, 각 종자에게 다 형체를 줬다. 그러니까 각 행동에게 다 부활을 줬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각 종자에게 형체를 다 정해 주셨다. 각 행동에게 다 부활이 정해져 가지고 있다. 부활이 정해져 가지고 있다. 요걸 알아야 돼요, 요거. 요걸 알아야 돼요. 요거 모르면 그까짓 거 뭐 아무 걸 가져도 다 그거 짐승 한가지요. 그뭐 무슨 가치 있습니까?
39절에는,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 하나는 짐승의 육체 하나는 새의 육체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 이래,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 육체 속에도 종류가 많고 가치가 않다 그랬습니다. 그거 무슨 말인고? 그러면 우리가 행동을 꼭 같은 행동을 해 가지고서 부활을 같은 부활을 받았습니다. 같은 부활은 다 받았어.
부활은 받았는데 부활 받았으니까 됐느냐? 부활은 받았는데 육체해도 사람 육체, 짐승 육체, 새 육체, 물고기 육체 이 육체 수많은 종류가 있는 것 마찬가지로 부활을 해도 부활의 종류가 한없이 많다 그. 말이오. 부활의 종류가 한없이 많다.
그러면, 같은 현실에서 같은 행동을 했으면 다 부활은 받지마는 같은 행동했으면 꼭 같은 부활 받을 터인데 왜 같은 행동했는데 부활은 종류가 많은가? 사람들 보기에는 그 현실에서 다 같이 계명 지켰고 양심대로 다 성경 말씀대로 행했지마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게 천 층. 만 층이라 그거요. 요렇게 부활에 대해서는 세밀히 구별합니다.
부활은 했지마는 육체 하면 다 육체면 꼭 같은 육체인 줄 알아도 부활하면 다 같은 부활인 줄 알지마는 육체 해도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뭐 구더기, 버리지 육체 꽉 안 찼습니까? 그거 모양으로 이제 행동을 해 가지고 부활을 받았다 할지라도 받은 부활에는 종류가 심히 많다.
그러면, 종류가 심히 많은 것은 고 현실에서 다 같은 계명을 지켰지마는 계명 지키는 데에는 벌써 하나님 보실 때에는 천 층 만 층 구 만 층으로 층하가 많이 있다. 이렇게 세밀히 구별해서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또,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그러면 속한 거, 부활한 것이 속하기는 다 같은 데에 쫓은 데에 속해 있다. 다 같이 좋은 데에 소속된 부활을 받았다 할지라도 다 같이 부활을 받은, 부활 받은 것이다 같은 소속을 한 부활을 받았다 할지라도, 다 같은 소속을 받은 부활을 했다 할지라도 소속이면 같으냐? 소속도 크게 나누면 하늘에 소속한 거 있고 땅에 속한 거 있고 그 구별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소속을 개도 다르다. 소속을 해도 다르다. 그러면 이 부활에 대해서 세밀한 하나님의구별로서 심판성을 말합니다. 구별 심판성을 가리켜 말합니다.
또, 속한 것도 그러고, 또 영광도 따로 있다.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다.
그러면, 하늘에 속했으면 영광이 꼭 같으냐? 하늘에 속해도 영광이 수천천만 층도 넘고 땅에 속해도 수없는 층어리가 있는 것처럼 부활에는 이렇게 층어리가 많다.
꼭 같이 동시에 같은 사건에서 같이 행동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에서는 그 가치가 차이가 많고 영광도 차이가 많고 존귀도 차이가 많다 이랬습니다.
이래서, 이제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이러니까 그 형체는 해도 한 형체, 별도 한 개의 형체, 또 바위돌도 한 개의 형체, 모래알도 한 개의 형체, 형체라는 말은 같은 거와 마찬가지로 부활하기는 다 부활은 했지마는 부활했다고 꼭 같은 게 아니라 부활을 해도, 그 행동 해 가지고 부활을 했다 할지라도, 생명부활 받았다 할지라도 생명 부활 받은 것이 마치 말하면 뭐 모래알 형체도 있고 바위돌 형체도 있고 뭐 이런 빌딩 형체도 있고 딸의 형체도 있고 별의 형체도 있으니까 그 형체의 가치와 권위가 얼마나 차이 있느냐?’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부활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렇게 그 가치의 영광은 차이 있다 말씀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죽어야 살아납니다. 죽기를 두려워하는 자는 항상 죽음의 종입니다. 죽기를 두려워함으로 일생동안 종노릇하는 자를 놓아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대속을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담대히 죽어야 됩니다. 죽기를 원해야 됩니다.
그러면, 일차적으로 현실에서 죽어야 살아나는데 뭣이 죽으면 살아납니까? 뭣이 죽으면 뭐이 살아납니까? 옛사람이 죽으면 새사람으로 살아납니다. 이 현실에서 옛사람 죽일 줄 알아야 되지 옛사람 죽는 것을 싫어하면 그거는 살아나지 못해, 새사람으로 살아나지를 못합니다. 옛사람 죽이기를 싫어한다 말븐 무슨 말입니까? 자기중심 자기 위주를 죽이는 것을 싫어하고 어려워한다 말입니다. 그 사람은 못 살아납니다.
자기를 꺾을 줄 모르고 자기를 양보할 줄 모르고 자기를 비울 줄 모르고 자기 주장, 자기 고집, 자기 욕심, 자기 권위, 어찌 됐든간에 자기중심의 것으로 모든 사람이 자기를 딿도록 하고 자기에게 뭐 집중되도록 이렇게 할라 하는, 세상은 잘난 사람들이 다 그 사람들이 자기중심 그것을 달성하고 달성하면 좋다고 누가 자기중심에 따라오면 너는 돈도 좋고 뭣도 주겠다 자기중심에 따라오면 좋아서 그래서 사람을 열 얻었다 백 명 얻었다 천 명 얻었다 뭐 명만 명 얻었다, 이번에 대통령 선거에서는 제일 많이 얻은 사람이 몇 명 얻었어? 얼마 얻었습니까? 우리 대통령 선거할 때는 제일 많어 얻은 사람이 몇 얻었어? 이거 참 예수는 잘 믿는다. 그런 거는 생각 안 나는 거는. 몇 얻었어? 젊은 사람들은 알고 있어야지. O 조사님 몇 얻었어? 칠 만 얼마인가 육만 얼마 아니가? 제일 많이 얻은 사람이 팔백만 얻었어? 그래. 자기중심을 딿는 사람을 모두 많이 딿도록 할라고 애를 쓰는데 그래 그만 이분 중심 어느 후보자의 중심으로 많이 따르면 그것이 영광되다고 이라는데 이 하늘나라는 자기중심을 완전히 죽여야 살아납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자기중심을 죽여야 참사람으로 살아나지 자기중심을 죽이지 못하면 참사람으로 살아나지 못합니다. 자기중심을 죽이면 어짤라고? 자기중심은 죽이고 진리 중심 하나님 중심, 진리하고 하나님하고는 하나입니다. 참 중심, 참이라는 참 중심, 이 중심을 가진 자라야 그게 이제 산 것인데, 죽여야 살린다 하는 거, 이거 뭐 복잡해 놔서 자꾸 그만 잊어버리는 데 자, 죽여야 살아난다. 자기중심 피조물 중심의 자기 사상이나 주의나 행동이나.
욕심이나 요걸 죽여야 유일하신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 참 중심 진리 중심 이것으로 살아납니다. 이것으로 살아나야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이것으로 살아난 것만치는 죽지 안해요.
처음에 심은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 하는 것은 옛사람이 죽어야 새사람으로 살아나고 새사람으로 살아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새사람으로 살아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게 좋습니까? 새사람으로 살아서 신앙생활 하던 사람이 이제 죽어 버려야 좋습니까? 어느 게 좋습니까? 죽어 버려야 좋아, 왜? 새사람으로 살아난 사람이 살아 있는 게 좋지 뭐 죽어 버리면 죽으면 좋아요? 왜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게 좋은 것이 뭣 때문에 죽는 게 좋습니까? 살아 있으면 아직도 미완성이기 때문에 시험을 받고 뒤에 실패할지 모르지마는 이제 새사람으로 살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 끝나 버렸으면 다시 시험이 없는 완전 승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요거 제일 처음에 부활에 대해서 제일 알고 있어야 될 지식이고,
둘째로는, 행동과 영원한 부활은 이것은 하나인데, 하나인데 행동을 세상에서 가치로 여기는 가치와 부활의 가치를 이거 다른데, 행동의 가치와 부활의 가치는 다른데 이 행동에는 어떤 부활이 따른다. 저 행동에는 어떤 부활이 따른다 그걸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행동 좋은 것만 보고 선택하니까 행동 좋은 것 선택한 것은 전부 부활에 대해서는 모두 엉망이 돼 버리고 만다.
뭐 그런 거는 여러분들이 자꾸 좀 생각해 봐요, 뭐이든지. 전부가 다 그렇습니다.
행동의. 형체와 영원한 부활의 형체는 다른데 행동의 모든 가치와 부활의 가치가 다른테 사람들은 부활의 가치는 볼 줄 모르고 행동의 가치만 보고 선택하기 때문에 행동 가치 좋은 것만 보고 선택하니 부활에 가서 볼 때는 전부 엉망이 된다. 그거 이해가 됩니까? 행동의 형체와 부활의 형체가 아주 판이하다.
호박씨는 보면은 커단한데 솔씨는 보면은 조그만합니다. 솔씨 그거는 뒤에 자라기를 여러 아름되고 낙락장송으로 여러 구백 년 칠백 년 모두이래 살지마는 호박 그거는 한 해밖에는 못 살아. 씨 보고는 몰라.
이 세상에서는 이 사람이 참 홍포 입은 부자가 그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그 홍포 입은 부자의 생활은 모든 사람이 다 부러워하고 존귀히 여겼지마는 그것이 물 한 방울도 차지 못할 그런 그 영원한 부활로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했지. 꼭 그와 같습니다. 그걸 왜 우리에게 보였습니까? 그러니까, 이 우선 지금 행동 좋은 거 그걸 취하면서 ‘내가 우선 좋은 거 이 행동을 취해서 여게 대한 부활은 지금 비참할 터이니까 이거 내가 어서 그만 말아야 되겠다. 말아야 되겠다.’ 이게 있어야 될 터인데 이게 눈이 어두워 놓으니까 그 행동의 가치 보고서 좋아서 배를 쑥 내고 아주 뭐, 영광스럽지만 오늘이라도 숨 딱 끊어져 버리면 비참한 영원한 부활로 바꿔지는 것인데 그걸 모른다 그거요.
행동과 영원한 부활은 모양이 다르다 고거 두 번째 기억해야 되고, 또, 세 번째는 행동마다 부활은 절대 불변으로 정해지고 있다. 행동마다 부활은 절대성적으로 불변으로 돼 가지고 있다. 행동마다 부활은 결정되어 있다.
결정되어 있는 것이 종자마다 뒤에 심어 놓으면 날 때에는 어떻게 나서 키가 크게 자라든지 뭐 풀로 자라든지 나무로 자라든지 자라는 것처럼 행동에는 반드시 영원한 부활이 딿는데 행동과 영원한 부활은 나눌 수가 없다. 요거 기억합니까? 기억이 돼요? 이해가 돼요? 양성원 학생들 이해가 돼? 행동과 영원한 부활은 절대 나눌 수 없는 하나이다 이것을 기억을 해야 될 것입니다.
네째는 이제 다 같이 행동을 해 가지고, 행동을 하는데 어떤 행동한 것은 심판 부활 받아 가지고서 멸망받고 어떤 행동한 것은 생명 부활을 받아 가지고서 영생합니까? 그러면, 생명 부활은 어떤 자가 받으며 심판 부활은 어떤 자가 받는다고 했습니까? 심판 부활은 어떤 자가 받는다고 했습니까? 악을 행하는 자, 악을 행하는 자. 또 생명 부활은 어떤 행동하는 자라고 했습니까? 선을 행하는 자.
그러면 선이 뭐입니까? 선이 하나님 한 분만의 중심이요 악은 뭣이 악입니까? 자기중심? 민족 중심은? 모든 피조물 중심은 다 악이 됩니다. 인류 중심이면 선하지마는 그것도 악입니다.
자존자 창조주 유일하신 완전자이신 그분 한 분의 중심만이 선이지, 그분 한 분을 떠난 것은 뭐 많은 사람 중심이나 전 인류 중심이나 국가중심이나 가정 중심이나 뭐 문화 중심이나 어떤 것이든지 다 악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해야 됩니다.
요걸 마귀란 놈이 숨겨 놔서 악과 선의 정의가 오늘까지 나오지 안했습니다.
오늘까지 나오지 안했어. 악과 선의 정의가 오늘까지 조직신학에 안 나왔습니다.
요게 안 나왔어.
안 나왔는데 악을 이 사람들이 말한 도덕적인 악 그걸 말하고 선이라면 도덕적인 선 그걸 말했지 이 선과 악이 자존자 유일하신 하나님중심 그 외에 피조물 중심을 악이라 하는 거로 요 지금 선악의 정의가 요렇게 나오지를 안했었다 그말이오. 이제 처음으로 나왔다 그말이오. 요걸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돼요.
그러니까, 선한 일 하나님 중심으로 한 사람들은 다 생명 부활을 받는데 생명 부활을 받았는데 부활이라는 말 같고 부활은 같이 받았지마는,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 사람, 짐승, 새, 물고기 육체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생명 부활을 받아도 생명 부활 받은 그 중에는 층어리가 많다. 수많은 종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다 같은 현실에서 행동을 했어도 하나님 보실 때는 그 행동이 천 층 만 층이라 그말이오. 이렇게 하나님은 세밀히 심판하고 계시는데 인간들은 아무나 따나 그저 어림짐작해서 되면 된 양으로 그만 그렇게 저거 모양으로 하나님이 탁한 줄 알고 그렇게 흐리터부리 할 줄 알고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 그말이오.
그러면 부활에는, 이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 네 가지 종류로 말했는데 네 가지 종류뿐 아니라 백 가지 종류도 넘지요. 곤충 종류도 있고 뭐 구더기 종류도 있고 뭐 지렁이 종류도 있고 뭐 육체가 꽉 안찼습니까? 또 영광스러운 사람의 육체도 있고 말이오.
그거 모양으로 이 부활에 다 같은 생명 부활을 받아도 그 생명 부활의 종류는 심히 많다 고걸 여기서 알아야 됩니다. 종류는 심히 많다. 물고기의 육체,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하는 거 모양으로 요거 넷째로 요거 알아야 되고,
그 다음에는, 또 부활을 생명 부활을 받아도 소속이 다르다. 생명 부활을 받았다 할지라도 소속이 다르다 하는 것을 또 말했습니다. 소속이 다르다.
이래서 소속은 하늘에 속한 것도 있고 땅에 속한 것도 있다. 이래서 말이지요.
소속이 다르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 꼭 같은 부활을 받아도 나중에 보니까 소속이 달라서 하나는 하늘에 속해 버리고 하나는 저 땅에 속해 버리고 이렇게 차이 있다 그말이오. 소속이 다르다. 이 소속이 다르다는 이게 몇째야? 소속 다른 게 다섯째가? 다섯째.
또 여섯째는, 영광이 다르다.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과 땅에 속한 자 영광이 다르다. 영광이 다르다. 그러면 꼭 같은 생명 부활을 받았는데 영광이 다르다.
영광이 다르다. 여섯째 영광이 다르다
또 일곱째는 영광이 어떻게 다르냐? 형체라 말은 다 같고 모두 형체를 가지고 있기는 있지마는 그 형체마다 가치와 권위와 영광과 존귀가 다르다. 형체는 가지고 있는데 어떤 형체는, 모래알도 형체요, 또 파리 새끼도 형체요, 구더기도 형체요, 자갈도 형체요, 한국도 형체요, 지구덩어리도 형체요, 별도 형체요, 달도 형체요, 해도 형체요, 바위 돌도 형체요, 다 형체라 말이오.
형체는 형체인데 형체마다 크고 작기도 다르고, 모래알 형체와 저 하늘에 있는 별 형체와 어느 게 큽니까? 저 양성원 학생. 모래알 형체하고 여기 저 별 형체하고 어느 게 큽니까, 별은 눈에 보일 똥 말똥한데? 어때? 저 양성원 학생, 별의 형체가 커? 얼마나 큰고? 한 여남은 배 될까? 몇 백 배 돼? 모래알 요량하면 뭐 억억억억,,,,,,,배 도 더돼. 다 같이 부활은 했는데 부활하기야 했지마는 부활한 자의 이 그 크고 작은 대소는 이렇게 차이가 있다.
또, 땅에 있는 모래알 그것도 형체인데 그런 건 사람들이 질근질근 밟아 다니지마는 하늘에 있는 해의 형체, 해의 영광, 해는 만민이 만일 해가 한 달만 안 뜨면 백성들이 다 죽을라 할 것이오. 한 보름만 해 안 뜨고 장마 지다가 다 해가 뜨면 막 모든 사람이 좋아하지 않습니까? 모든 만물이 해의 혜택을 입고 사는 것처럼 이 부활한 자도 어떤 자의 부활한 자는 모든 우주와 영계 모든 존재들이 그 혜택을 입고 살고 어떤 존재는 부활하기는 했지마는 아무도 혜택 입힐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가치가 이렇게 적다, 가치가 없다.
이래서, 이 여덟 가지를 배웠습니다. 여덟 가지를 배웠어. 배웠는데 인제 한 가지만 배우고 맙시다.
그래 이래서, 요것을 요 알면 참 아주 귀한 진리를 배운 것입니다. 귀한 진리를. 아주 귀한 진리를 배웠소.
자, 행동은 언제 합니까? 이 세상에 현실에서 하는데 행동과 영원한 부활이 혹 다를 수가 있습니까? 행동과 영원한 부활이 다를 수가 있습니까? 그 행동에는 그 부활이고, 그 행동에다가 부활을 혹 변개시킬 수가 있든지 가감시킬 수가 있습니까? 행동과 부활은 딱 정해져 가지고 있는데 그 연관성을 혹 가감이나 변동할 수가 없는 절대성 가진 관계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네, 절대성 가진 관계입니다.
그라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기가 이 현실에서 이런 행동 저런 행동을 취하는데 취하는 것은 이건 행동 저런 행동을 취합니다. 어떤 사람은 제 욕심에 맞은 행동 취하고, 비위에 맞은 행동 취하고, 롯 모양으로 저거 가족들 비위 맞춰서 행동 취하고, 이런 행동 저런 행동 또 돈을 위주로 해 가지고서 행동 취하고, 자기 공부하는 학을 위해서 행동 취하고, 출세 입신 양명 자기 권세 취직 이런 거 뭐 위해서 행동을 취하는데, 그 행동 취하는 것은 뭐를 지금 취하고 있는 것입니까? 뭐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까? 영원한 부활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부활을 취하고 있는 것이오.
영원한 부활을 취하고 있는데 자기 행동이 영원한 비참한 부활이라도 우선 좋으면 사람들이 합니다. 우선 좋으면 하요.
그거는 왜 그렇습니까? 행동의 형체와 부활의 형체의 그 절대적인 그 연결성되어 있는 것을 알아서 그렇습니까? 몰라 그렇습니까? 알아 그렇습니까? 몰라 그렇습니까? 몰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이게 누굽니까? 이게 누구요? 변하지 못합니다. 변하지 못해.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정신 차린 사람은 뻘뻘 떨면서 하루를 마음 놓고 살지를 못하고 한 시도 자꾸 또 심판받고 주님 앞에 또 사과하고 또 수정하고 자꾸 이렇게 할라고 애를 쓰는데 이 총공회 예수 믿을라 하면은 바빠서 예수 못 믿는다. 놀러 갈 시간이 있나 뭐 좀 친구하고 만나 얘기할 시간이 있나? 아이구 징그러워.
총공회 예수 믿기 징그러워! 총공회 예수 믿기가 징그러워! 이거 뭐 마음대로 한 시도 놀지도 못하지. 하고 싶은 거 하나도 하지 못하지. 이것도 저것도 못하지. 재미 하나도 없지. 막 달달 똑 철판 위세 단 철판 위에다 놓고 볶는 거 모양으로 다글다글 볶아 사람이 뭐 쪼려져서 죽을 지경이라.
그러면, 그만하면 만점입니까? 그만하면 만점입니까? 바울은 그렇게 살아도, 이렇게 살아도 바울은 지금 그 마음이 눌리기를 뭘로 비유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마음을 졸이고 졸이고 자꾸 또 하루 지내가니까 더 깨닫고 보니까 아이구 더 기가 차고 또 조심. 하고 더 힘이 쥐이고 더 마음이 눌리고 눌리고 한데 그 마음이 눌리는 그 비유를 뭘로 했습니까?, 저 O집사? O장로 동생 O집사. 그래.
무거운 짐진 것같이 시간이 흐를 수록. 정 그래 O집사? 내가 보니까 안 그런 거 같은데? 요새 세상 안 보나, 세상 안 봐? 세상 보지? 요새 좀 낮빤대기가 안 보이는데. 뭐 세상 뭐 하러 다녀? 행동과 부활은 딴것 아닙니다. 오늘 내가 행동 취한 그것이 바로 영원한 부활을 내가 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행동보고 선택해야 되겠소 부활보고 행동을 선택해야 되겠소? 부활보고 행동을 선택해야 돼.
인제 고 다음에는 뭐 빨리 하고 맙니다.
42절,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위에 해석한 거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다 말이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그러면 이거 심는다, 내가 가지고 싶는 씨종자를.
씨종자는 뭐이라고 했지요? 씨는 꿜 비유했다 했지요? 행동. 행동을 비유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씨종자 이 씨종자를 이것을 심을 수도 있고 이 씨종자를 볶아 턱을 수도 있고 삶아 먹을 수도 있고 까먹을 수도 있고 씨종자를 버릴 수도 있고, 자, 이 씨종자를 호박씨 까먹듯이 이 씨종자를 까먹는 사람, 이 씨종자를 밥을 해 가지고 먹어 버리는 사람, 그러면 이 행동을 자기 행동을 세상에서 먹는 것, 자기 행동이 세상에 이용이 되어지고 세상에 유력해지고 세상에 유익되는 거, 자기 행동을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것은 고것은 씨를 먹고 사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행동 우선 쉽기 위해서 하는 것 이 자기 행동을 이 세상에 유리하도록 이용해서 하는 자는 행동을 지금 막 씨를 복아 먹는 자고, 그러면, 이 행동을 심는 자는 어떤 게 심는 것입니까? 심는 것은 씨를 가지고 있는 게 심는 것입니까? 씨를 없애는 것이 심는 것입니까? 씨를 심으는 자는 이 씨를 가지고 들고 있는 게 심는 것이요 씨를 이걸 장래 희망을 바라서 더 많은 추수할라고 이 씨를 땅에다가 뿌리는 것이 그 심으는 것입니까? 어떤 게 심는 것이요? 땅에 뿌리는 것이라.
‘썩을 것으로 심고’ 그 말은 심는다 말은 더 큰 추수를 바라서 이제 한 알을 심었는데, 한 알을 심었는데 그것이 서숙으로 말하면 몇 배 된다고 그전에 계산해 봤지요? 서숙 한 알 심으면은 뒤에 추수할 때 가서 알이 몇 배나 나옵니까, 서숙 한 알 심으면? 몇 배 나와요? 잘된 서숙 봤어요? 잘된 건 천 배 나와요, 천 배. 알겠습니까? 천 배나와, 서숙 한 알 심었는데 심으면 그놈이 한 대여섯 가지 그래, 대 여섯 가지 올라오는데 아마 천 개 아니라 천이 아니라 영만 개 될 거라. 이 서숙 이삭이 이만해요, 하나가. 이런 거 봤지? OO권사님 이북에 이런 거 없어요? 이만해요.
이만한데 한 알이 들어가 놓으면 이놈이 가지가 벌어지고 벌어져 가지고 한 너 댓 가지 벌어져요. 너 댓 가지 벌어지니까 이 너 댓 이삭을 그것을 빠사 놓으면 아마 수만 개 될 거라.
심는 것은 한 알을 심어 놓고 더 많은 수입을 하기 위해서 투자하는 걸 가리켜서 심는다 이랍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것을 행동하는 것을 당장 오늘 행동하는 것이 오늘 수입 볼라고, 오늘 행동한 것을 오늘 수입 보는 사랑 있고, 그것은 뭐이요? 날품꾼. 오늘 행동한 거 오늘 수입 보는 것은 날품꾼.
또, 행동한 것을 육 년 후에 수입 볼라 하는 그 학생은 무슨 학생이야? 그 학생 무슨 학생? 육 년 동안 행동한 것을 육 년 후에 수입 볼라하는 그 학생은 무슨 학생이라, 대답해 봐. 국민학생. 국민학생은 육년 동안 행동해 가지고서 육 년 후에 그때 인제 육 년 졸업 봅니다. 또, 자기가 거기서 중학, 고등학교. 대학, 대학원, 학위 또 이래 가지고서 한 십 오년 한 이 십년 동안 이렇게 공부해 가지고서 그 수입보는 건 뭐이냐 하면 뒤에 박사가 됐다, 또 무슨 장관이 됐다, 무슨 학장이 됐다 하는 그런 거 다 그걸 보고서 심는다 말이오. 그걸 보고 심는 거, 그것도 보고 심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추수할라고 심는 사람, 이 세상에서 추수할라고 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게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심었는데 썩지 아니, 할 것으로 사니까 썩지 아니할 것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 있는 사람 손들어 봐요. 없어요.
이러니까, 이제 썩을 거 모든 거 이 육체도 썩을 거 아니요? 명예도 지위도 권세도 재물도 다 썩을 것입니다. 또 그런 거 다 약한 거 욕된 거 그 증거 다 혈육의 것 이랬는데 이 세상에서 모든 행동할 때에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을라고 행동하지 안하고 영원한 부활을 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행동을 다 가리켜서 심는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영원한 부활을 받기 위해서, 영원한 부활을 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그 행동이 다 심는 행동입니다. 심는 행동. 심는 행동.
이러니까, 우리 행동은 육체 가지고 하는 것 또 이 세상에 없어질 물질 가지고 하는 것. 또 썩어지고 늙어지고 없어질 거 죽어질 거 이런 거 가지고 하는 것 모두 다 이 세상에서는 또 약한 것으로 하는 것 뭐 암만 육체의 힘 까짓 거 약하지 뭐 뭐 세상에 힘이 다 약하다 말이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살고. 또 욕뒨 거 밑 욕된 것은 모두 천한 거 그런 것 가지고 심어 가지고 영광스러운 것으로서 이 혈육의 몸으로 심어 가지고서 신령한 몸으로.
이래서, 이제 부활이 있기 때문에 부활이 있으니까 부활과 이 행동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 절대 불분이라. 절대 나누지 못해. 행동과 영원한 부활은 나눌 수 없어.
그러나, 행동할 때의 그 형태와 부활할 때 형태와 다르기 때문에 행동할 때의 형태만 보고 좋은 거 보고 선택하니까 부활할 때의 형태는 모르기 때문에 거기 대해 상관 안 하고 우선 세상에 행동할 때 좋은 그것만 택했다가 나중에 부활에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이랬는데, 이 도리를 아니 이제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고, 심는 것은 이 심어 가지고서 이 세상 추수를 바라는 것도 있고 심어 가지고 영원한 추수를 바라는 것도 있고, 이런데, 심어 가지고 속히 추수하는 것이 수입이 많습니까? 오래 만에 추수하는 게 수입이 많습니까? 그래 이 학생 뭐 아무것도 모르고 짐작이 그렇지. 속히 추수하는 것은 추수가 적어요. 오래 있다가 추수하는 건 추수가 많아요.
그래서 모두 일 년 동안의 계획, 일년 지계는, 곡식 심으면 일 년 만에 추수하고 나무 심으면은 십 년 만에 추수하고 사람은 심어 놓으면은 백 년 만에 추수한다 그거 더 이상 몰라, 세상 사람들은 그 이상 몰라 세상에서 심으면 영원무궁세계에서 추수한다! 이것을 알고 우리가 살아야 됩니다.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가 모두 다 ‘뭐 오만 거 다 할 수 있는데, 우리 중간반 반사들도 이거 다 모두 다 사장들이라. 모두 조그매씩, 그거 아마 사장들 지금까지만 사장노릇 했으면은 상당히 재벌가가 됐을 것입니다.
이랬는데, 그 내가 물으니까 ‘너는 수입을 얼마 하노?’‘그저 한 달에 한 오십만 원 됩니다’ ‘너는 얼마 하노?’ ‘겨우 한 사십 오만 원 됩니다’ ‘너는 얼마나 하노?’ ‘그저 한 육십만 원도 되고 이리 됩니다’ 그런데 너 반사하면은 오만 원밖에는 안 주는데 하겠느냐?’ ‘하이고, 하겠습니다.’ 그거 버리고 오만 원 받고 중간반 반사했어.
이런데, 그거 인제 다 나가 버렸어. 전도사로 다 나갔기 때문에 좀 있으면 목사 다 돼요! 할렐루야! 제가 중간반 반사들 끌어들여 가지고서 이래 중간반 반사 했는데 몇 해 안 됐는데 그만 다 인제 목사 다 됐어. 이제는 목사 뭐 후보자가 됐으니까 목사되는 거는 틀림이 없어.
또, 이 농사 지금 심는 농사 이 큰 뭐 대농가라. 대농가라 뭐 몇십 명도 데리고 몇백 명도 데리고 이래 데리고서 떡 자꾸 심으니까 이 추수가 어찌 될 거라? 여러분들이 정말로 영원한 추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심는 자가 되면 영원한 부활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부활의 소망, 부활의 유익, 부활의 성공을 위해서 이 세상살이에 자기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이런 것들을 다 그 소망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 그 소망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 그 소망을 악해서 희생해 행동하는 것이 그것이 다 심는 것입니다.
국민학교 학생이 졸업하는 것은 몇 해 심어 가지고서 영 해 만에 추수했어요? 육 년 만에. 중학교는 몇 해 만에 추수해요? 삼 년. 고등학교는? (삼 년) 대학은? (사 년) 또 그 다음에 자, 인제 그만 그 다음에 그만할까? 대학은 사 년.
그라면 그래 가지고 지금 사장이 됐습니다. 사장이 됐어. 사장 추수는 언제 할 건고? 사장 추수 또 고관대작 추수는 어째 할 거라? 그 추수는 마구 먹어요. 막 싸그리 먹는 거라. 오늘 심은 거 오늘 추수 먹고 자꾸 먹기만 먹어. 자꾸 거될 먹고 뭐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거둘 것 없어. 혹 죽고 나면 정년퇴직으로 뭐 퇴직금이나 나올란지 몰라도.
여러분들, 다 소망 중에 기뻐합시다. 소망의 투구를 쓰고 살아야 됩니다.
무가치하게 살지 말아요. 한 번만 인생으로 났다가서 사는 이 인생살이를 허송세월 말아요. 한 번만 났지 두 번 거듭 나지 못해. 한 번 밖에는 사람으로 나지 못하는 한 번만 온 인간의 일생을 영원을 좌우하는 것인데 이걸 알지도 못하고 썩어지고 없어질 거 거기다 대고서 투자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노릇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원한 부활을 위해서 오늘에 현실 행동을 잘 선택할 것입니다.
자, 여게 동감 가진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이거 소원하는 사람 손들어 봐요.
한번 놔 봐요. 자, 영원한 부활의 추수를 위해서 세상에서 힘껏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든지 심고 싶은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새로 한번 들어 봐요. 심고 싶은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아이고. 심고 싶은 사람, 심고자 하는 사람 손 한번 새로 들어 봐. 자 심고 싶은 사람 손 들어 보소. 막 이래 가지고 막 뛰어 올라가면 싶으지, 할렐루야. 자, 한번 할렐루야 해. 할겔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천지는 없어져도 문제없어.
찬송 하나 할까요? 59장.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