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2 12:31
부자와 나사로
1984. 12. 2. 주일오전
본문 :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여기에 기록된 부자와 나사로에 대해서 비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비유가 아닌 실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 보면 비유라고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는 없고 본문으로 이렇게 아는 것이 그것이 바르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홍포 입은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자기를 호화롭게 하였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잔치로 지냈습니다. 나사로는 그와 반대로 이 세상에서 건강도 가족도 재물도 없는 참 거지요 병든 사람으로 부자의 대문에서 지나면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서 연명을 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나사로가 죽으니까 천사들이 그들을 영접해서 낙원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했습니다. 또 부자도 죽어서 장사가 되니까 음부에 가서 머물게 됐습니다.
음부에 있는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시켜서 자기에게 물을 적셔서 자기 혀를 서늘케 해달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케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이 고민이 심하나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라니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네가 세상에 있을 때에 너는 네 좋은대로 소원 성취를 다 했고 나사로는 고난 받은 그것을 기억해라.
나사로는 여게서 위로를 받고 너는 그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그것이 마땅하니라.' 그렇게 말을 하고서 또 말하기를 '그뿐만 아니고 여기에서 너에게로 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너에게서 우리에게로 오고자 해도 올 수 없는 그 가운데는 큰 구렁으로 경제가 되어 있다' 하는 것을 말을 했습니다.
그때에 부자가 말하기를 '그러면 나사로를 우리 부모의 집에 보내가지고 내 형제 다섯이 남아 있으니 이런 고통 받는 데에 오지 아니하도록 그 좀 이 사실을 좀 전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거기에는 모세가 있고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듣고 회개해서 네가 있는 곳에 안 올 자는 안 오리라' 이렇게 말할 때에 또 부자가 말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죽은 가운데에서 살아나서 그 소위 그 사실을 전하면 다 회개할 것입니다.' 했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비록 죽은 가운데에서 살아난 자가 가서 말한다 할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대답하고 끝났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비유로 했다 할지라도 비유나 그 실상이나 다 다를 바 없습니다.
비유라면은 비유보다도 실상은 더 참되고 강하다 그렇게 볼 수 있고, 이 실상이라면 실상 이대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유라고 봐도 이 사실이 거게서 에누리 되어서 깎여질 것이 없고 또 실상으로 본다고 해서 뭐 더 그게 강해질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비유이든 실상이든 거게 대해서는 우리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비유보다 실상으로 우리가 봐야만 하는 그런 내용들이 다 되어 있습니다. 비유라도 이 사실보다는 더 그 형편이 강할 것이고 또 실상이라도 이대로는 되어 있는 그 진상입니다.
주님이 이 사실을 우리에게 하나 끌어다가 보여 주신 것은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들로 하여금 깨닫고 구원에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부자와 나사로에 대해서 우리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는 이 진상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고 깨달아서 본받을 것은 본받고 또 우리가 벗어나야 할 것은 벗어나도록 해서 구원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첫째로, 홍포 입은 부자는 세상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하늘나라도 몰랐습니다. 지옥도 몰랐습니다. 홍포 입은 부자는 이 세 가지에 대해서 바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제대로는 각각 다 알기는 알았지마는 바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게서 훙포 입은 부자와 같이 자기대로 아는 그 지식을 이 말씀과 대조해서 잘못됐으면 이 지식은 고치는 것이 지혜입니다. 만일 고치지 안하고 그만 한 한토막 세상 생활이 지나가 버린다고 하면 우리는 후회할 것이 심히 많은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바로 모른 것은 어데서 나타났는고 하니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 이랬습니다.
그저 자색과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기에 이렇게 저렇게 해석을 붙여도 되겠지마는 별로이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면 어쨌든지 세상에서 보기 좋고 입기 좋은 값진 좋은 옷이라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 되겠습니다. 아주 의복이 찬란하고 또 편리하고 몸에 가장 적절한 그런 좋은 의복이라 그렇게 생각을 가지면 고 깨달음을 가지면 그만하면 족합니다.
또, 그는 그렇게 좋은 의복을 입어서 호화롭게 했다 그 말은 아주 자기를 아름답게 꾸몄다 그 말입니다. 호화롭게 했다 말은 자기를 아주 아름답게 꾸몄다 의복으로 꾸미고 뭐 이런 저런 온갖 단장으로서 자기를 아주 아름답게 영광스럽게 위험스럽게 보기 좋게 그렇게 잘 꾸몄다 하는 그것을 여게 말씀합니다.
또, 날마다 연락한다 그말은 잔치 연(宴)자, 즐거울 락(樂)자입니다. 사람으로 더불어 이렇게 저렇게 둘이 만나고 셋이 만나고 열이 만나고 몇이 만나든지 사람으로 더불어 만나서 즐거운 잔치를 해서 모든 사람이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를 위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그렇게 모든 것을 역사했습니다.
그러면 홍포 입은 부자는 한말로 말하면 자기를 모든 어떤 사람보다 사람보다 자기를 아름답게 호화롭게 위엄스럽게 영광스럽게 존영하게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모든 사람들이 높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굴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인기를 높이는 그 일을 힘을 썼습니다.
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자기를 기쁘게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도록 모든 사람을 접촉할 때에 자기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자기를 존귀케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도록 자기에게 있는 모든 소유를 들여서 역사를 했습니다.
그러면, 홍포 입은 부자는 자기의 외모를 아주 아름답게 꾸미는 것과 자기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과 이 두 가치의 전심 전력을 기울여서 살았던 그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 세상이 그러한 일을 하는 세상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세상을 바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또 그렇게 살면 그 생활의 결과인 세상에서 언제 죽어도 죽기는 죽는데 죽음 너머 영원한 세계가 있으니 그 영원한 세계와 이 세상에서 이 두 가지를 위주로 삼아서 사는 자기의 생애와 그 생애의 열매인 영원히 자기가 그 열매를 먹어야 할 그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금생과 내세를 몰랐습니다. 또 그는 알 수도 없지마는서도 세상은 지옥을 마련하는 세상이요 영생하는 하늘나라를 마련하는 세상이라는 이것도 몰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홍포 입은 부자는 천국도 몰랐고 지옥도 몰랐고 세상도 모른 사람이라.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중심 자기 위주인 원죄 그대로 원죄로 독실한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원죄 생활을 권위 있게 한 사람입니다. 원죄대로 사는 것이 그것이 성공이요, 복이라고 생각하고 서슴치 아니하고 자기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과 모든 것으로 자기를 기쁘게하는 그 노력으로 일생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그와 달랐습니다. 나사로의 이 기록돼 있는 것을 보면 나사로는 참 처지가 심히 가련하고 불쌍했습니다. 건강도 없지 가족도 없지 재산도 없지 그저 목숨만 붙어 자지고 있는 모든 면이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게 기록에 보면은 한번도 고민한다든지 불만 불평을 품는다든지 하는 그런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기록하신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사가 없이 바로 사실대로 기록하는 성경이요 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사를 그대로 발표 한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에는 세상의 이런 거 저런 거 일들을 인용해서 기록한 역사적 사 실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용해서 기록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그 절대성의 그 진실성. 권위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렇게 사랑하셨지마는 다윗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록하실 때에 다윗의 속속들이 깊은 밑절미까지 하나도 가리지 안 하고 고대로 다 기록하셨습니다.
여게 저게서 볼 때에 우리는 억지로 해석을 해서 나사로를 좋게 그렇게 해석을 자유대로 붙여서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지럽게 해서 거기에 더하거나 덜하거나 할 때에 그 형벌은 심히 크다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더 하는 자도 성경에 기록된 형벌로 더하고 감하는 자도 구원에서 감한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일시에 사람들에게 호감을 위주로 해서 또 그들에게 그 청감을 위주로 해서 혹은 자기의 무슨 인기를, 위주로 해 가지고 확신 없는 그 말을 벌로 할 수 없는 것이 성경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받을 심판이 크다고 야고보서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거지 나사로는 그가 아브라함 품에 가서 있는 것이라든지 또 그가 세상을 떠날 때에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사들이 이래 모시고 올라갔다 하는 그런 받들었다 말은 모셨다 그 말입니다. 천사들이 나사로를 모시고 아브라함 품으로 영접했다 하는 그 결과를 보아 그분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어떻게 살았다 하는 것을 우리는 담대히 추론할 수 있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가 하늘나라인고 하니 자기를 호화롭게 꾸민 그것들이 가 가지고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무엇으로 자기를 호화롭게 했든지 이십 세기의 문화로 자기를 호화롭게 했든지 흑은 모든 사람을 박애하는 그 박애로서 자기를 호화롭게 했든지 무슨 권세나 지위나 물질이나 이런 어떤 공로나 어떤 걸 가지고서 자기를 호화롭게 했든지 자기를 호화롭게 한 것은 그 나라에는 용납되지를 않습니다.
이 세상에 노벨상이라고 하면은 대단히 그 사람은 참 각 종류대로 아주 호화로운 사람들이 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중심이 사람이 보기에는 자기 호화롭게 된 것만 보기 쉽고 그 속에 주님을 호화롭게 한 것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만일 그 모든 것이 자기를 호화롭게 한 것뿐이라고 하면은 세계 역사의 전 인류가 그 호화로움에 감탄하고 머리를 숙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하나님께서 용납지를 않습니다.
용납시키지를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다만 자존하시고 창조주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멸망 가운데에 있는 우리들을 대속으로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대주재가 되어 계시고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 그분의 어떤 면을 호화롭게 했든지 그분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고운 세마포 옷을 입히고 그분에게 영광을 입히고 그분에게 존귀를 입히고 그분에게 감사를 입히고 그분에게 찬송을 입혀 그분만을 호화롭게 한 것만 그 나라에 용납되지 딴것은 용납되지를 않는 나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약속의 신실한 분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은 자기 생애에서 나타내서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보니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약속의 신실하심을 그는 모든 인류에게 나타내서 하나님은 약속의 신실하시다는 그 호화로움을 하나님에게 입혔다. 그는 하나님은 약속면에 신실하심의 그 호화로움을 아브라함을 인해서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에 있게 됐다.
요셉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도는 불을 닥치든지 죽음을 닥치든지 천한 상품이 되든지 억울함을 당하든지 감옥에 가든지 어쨌든지 신실하시고 사랑의 주님이 인도하시는 인도는 반드시 생명과 평강의 행복의 길로만 인도하신다 하는 것을 그는 역사에 나타내서 하나님은 인도에 신실하시다. 하나님의 인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데서라도 의심하면 저는 속는 일이다 하나님의 인도는 어데 까지 어데서라도 의심할 수 없는 진실하신 사랑의 인도라 하는 것을 요셉은 그 일생을 통하여서 주님을 호화롭게 인도에 신실하신 분이라는 그 호화로운 영광을 주님에게 입혔습니다.
다니엘은 그와 같이 어려움을 당한 그 포로에 갔지마는서도 그 포로 앞에 대학원 특수 학원에 유망한 소망이 있었고, 참 포로되게 한 그 하나님은 그때에 보잘것이 없는 거 같았고 느부갓네살 왕은 굉장한 그 호화로운 영광의 권세 같았지마는서도 그는 하나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구주이시지 하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틈, 저런 형편에서 하나님 외에 너를 구원하는 구주를 바꾸라는 그런 토막 토막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자굴에서 던지워 죽는 일이 있고 거게서 구줄하는 일이 있고 그런 생명에 관계되고 일생의 성패에 관계되는 그런 극단에 비상의 그 난점들이 있었지마는 그는 구주를 바꾸지 아니하는 것으로 천추 만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변치 않는 그 책임지시는 구주의 그 책임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영화롭게, 참 일편 단심 자기는 죽고 천해지고 희망이 있여지고 없어지는 거 다 그거 다 무릅쓰고 어쩌든지 주님은 내 구주시니 주님이 구주이심을 나타내서 그분을 영화롭게 그분만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그분만을 호화롭게 이렇게 나타내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알리려는 그것이 그의 일편 단심의 소원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존귀케 할까 영화롭게 할까 내 이름이 올라가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서 이렇게 존대케 할까 모든 것으로서 자기를 위하여 거게서 기쁨을 누리려는 그런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일을 성도들은 하지 안했습니다.
이 홍포 입은 부자는 너무 너무 참에 대해서는 무식합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시요 주재자가 계시는데 어떻게 지음받은 한 존재의 아무 힘없는 것이 하나님이 받아야 할 그 영광과 존귀를 자기가 받을려고 하는 그런 무서운 그런 일을 모르고 했습니다. 그 일은 무식으로 인한 그 일은 결국은 음부에 가 가지고야 알게 됐습니다.
바울 같은 이도 참 자기가 지중해에서 그 십 사 일 동안 풍랑 가운데에 있을 때에도 그의 소원은 하나님에게 아름다운 옷을 해서 입혀야 되겠다 하나님의 잔치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으로 그 즐거움으로 자기네들 즐겁게 하려는 하나님의 애연의 하나님의 사랑의 잔치에 거게서 즐거움을 누리려는 그것만이 중심에 소원이 되어 있기 때문에 십 사일 그 풍파 중에서도 일편 단심이 이들로 더불어 그리스도의 피의 이 사랑의 사랑을 나누는 이 사랑의 잔치에 즐거움을 가질려는 그것이 소원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보다가 감동되어서 천사를 보내서 말하기를,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배 안에 있는 사람을 다 하나님께서 오늘 네게 다 주셨다. 이들로 더불어 네가 소원하는 대로 사랑의 잔치를 만족히 할 수 있는 그 잔치의 기간을 주실 것이요. 또 조용한 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애연을 베풀어서 애연의 그 즐거움을 누릴 것이라고 하는 위로를 했습니다.
그 말 듣고 그는 대뜸 그 대중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니 하나님께서 지난밤에 천사를 보내어 우리 중에는 한 사람도 생명을 잃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 우리들이 안락한 어떤 섬에 가 가지고서 얼마 동안 하나님의 이 사랑의 이 은혜의 잔치로 만족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안심하라.' 그렇게 그들에게 기뻐서 선포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멜리데 섬에서 석 달 동안을 지내면서 하나님의 이 사랑의 복음으로 그들은 다 만족히 여겨서 참 기뻐하는 그 잔치를 이루었습니다.
제가 싼다싱의 전기를 보니까 어느 산곡에 사람 자욱이 있는데 여게도 가면 사람이 있을 것이 아닌가 해서 가다 가다가 저물고 올라갈 수 없어서 가다 보니까 온 팔과 발에는 다 터져서 피가 나고 너무 거머쥐고 돌을 거머쥐고 올라갔기 때문에, 올라가니까 첨첩 산중에 한 사람의 가구가 있는데 그 사람이 살고 있더라고서. 그 사람 만나 가지고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기뻐하고 그 사람들 복음 듣고 기뻐하고 이 주님의 피의 잔치, 사랑의 잔치 이 대속의 잔치로 그는 즐거움을 누릴라고 그라고 그 자리에서 복음 전한 그것이 교회가 됐다는 그 전기를 들었습니다.
자기 강대국, 선진국, 복음을 먼저 받은 나라들은 다 강대국이요 다 선진국이요 부강한 나라들인데. 복음을 먼저 받은 그 선진 강대국 호화로운 그 나라에서 자기의 그 호화로운 나라를 버려 두고 미개, 야만 주어도 감사할 줄 모르고 생명을 주면 죽일라고 달라드는 그 야만. 그 후진국 미개국에게 와 가지고서 당 대 이 대 삼 대를 그들이 다 희생한 것은 주님 모시고 이 복음의 잔치에서 기뻐하는 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이 사람의 복음 잔치. 이것으로서 어느 잔치를 베풀면 주님이 거게서 오셔 가지고서 흠향하시고 참 낙을 누릴까 하는 그것을 바라서 다 그분들은 후진국에 그 미개국에 와 가지고서 당 대 이 대 삼 대를 다 제물로 희생해서 기어코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호화로운 잔치를 꾸몄던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저렇게 주님의 이런 면을 영화롭게 나타내고 저런 면을 영화롭게 나타내고 이 면의 자비를 영화롭게 나타내고 저 면에 참고 견디심을 나타내고 어떤 면에 하나님은 끝없는 그 용서하시는 그 용서의 면을 나타내는 그 일을 해서 어쨌든지 주님을 호화롭게 아름답게 단장하고 그렇게 주님의 그 영광을 드러내는 그것이 구속 받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할 일인 줄 알았기 때문에 성도들이 땅 위에서 간략한 호화로 움도 자기를 위해서 갖추지 아니할라고 단정짓고 사는 것이 성도들이 그 중심에 원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의 어떤 만물로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그런 일을 꿈에도 하지 아니할려고 하는 것이 성도요, 그렇게 잠깐 동안 실수로 몇 시간, 며칠 어느 기간 동안이었으면 그 일이 원통하고 후회돼서 참 생각할 때마다 어떻게 기쁘시게 할 분은 주님뿐이신데 주님을 기쁘시게 내가 접촉하는 사람, 접촉하는 모든 만물, 모든 사건 거게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될 터인데 사건이나 물질이나 사람이나 접촉하는 것마다 그 전부를 모아 가지고서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이 천부당 만부당의 하는 이 일을 얼마나 우리가 어리석어서 무지해서 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 세상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그는 참 다른 사람은 하나님 공경하는 사람들로서 아주 대궐에서 사는 사람도 많고 이런 모든 부요로 구비한 사업을 겸해 가지고 사는 사람도 많고 또 호화롭게 고관 대작으로 사는 사람들도 많고 그렇게 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렇게 저렇게 다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영광을 누려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면으로 예수 믿으니까 저리 잘 된다 하는 그런 호화로운 그런 면을 갖추어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나사로는 그 면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사로는 그 면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어느 자녀로 인해서 호화로운 점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질로 인해서 호화로운 점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지위나 권세나 다른 사람들에게 인기 인기로 다른 사람이 존대하는 그 대우로도 하나도 호화로운 면이나 영화로운 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서 내게는 천하의 모든 인간의 현실보다 이 현실이 내게는 좋기 때문에 주셨다 하는 그것을 참으로 믿었습니다. 참으로 믿고 그는 만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사로가 걸은 이 걸음을 걷지 못하고 범죄한 일이 많았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 대해서 불만을 많이 품었습니다. 그것이 심한 교만 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제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모든 죄는 교만에서 망령됐고 조심 안 해 가지고서 죄 가운데에 빠지고 어두워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왜 이렇게 자녀들이 다 목사가. 자녀가 다섯이면 다섯, 여섯이면 여섯. 일곱이면 일곱 다 하나님의 종들이 됐는데 내 혈통에서는 하나님의 종이 하나도 나지 않는가? 왜 이렇게 가정은 콩가루 가정이 되는가? 왜 내게는 내가 기도실 하나 구할라고 그렇게 그래 쌓아도 몇 해를 다니며 구해도 기도실 할 만한 그런 장소, 내가 보기에 됐다 싶으면 하나님이 막아서 안 되고 또 구해도 물 좋은 곳도 구해도 안 되고 공기 좋은 공도 구해도 안 되고 몇 해나 다녀도 안 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얼마든지 주시는데 왜 그럴까 이래서 내 속에 늘 불만과 불평이 가득 찼던 죄인이었습니다.
얼마전 하루 밤에 기도 가운데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로마인서 12장을 보라.
한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어 다 여러 지체가 같은 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체는 이런 일하고 저 지체는 저런 일 하고 사람마다 받은 은혜가 각각 다른데 네가 네게 주신 은혜로 족하게 여기지 안하고 남의 받은 한 가지, 두 가지의 좋은 은혜 다 네게 없다고 불만 불평하니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은혜 다 네게는 다 구비해야 된다 말이니 그러면, 네가 뭣 되려는 말이냐?' 내가 하나님 되려는 말인 것을 깨닫고 거게서 내가 회개를 했습니다.
회개를 하고 나니까 당신이 요한복음 21장에 있는 말씀을 주시면서 '베드로야 네가 나이 늙으면 네가 팔을 펴리니 다른 이가 너에게 띠 띠우고 너를 원치 안하는 데로 데리고 가리라 이는 어떻게 죽어 주를 영화롭게 할 것을 말씀함이라' 했는데, 그럴 때에 베드로가 옆에 있는 사도 요한을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이렇게 물을 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사람을 내가 올 때까지 머물러 있게 하고저 할지라도 지금 죽게 하든지 그 사람을 산 채로 하늘나라로 데려가게 하시든지 재림 때까지 살아 있게 하시든지 그 사람을 어떻게 호화롭게 영화롭게 어떤 지위 권세 어떤 평강 어떤 것을 주시든지 그거는 내가 할 것인데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올 때까지 머물러 있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것은 머물러 있게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고 내가 그에게 대해서 어떻게 할지라도 너는 이 사람에게 대해 어쩌나 그거 상관할 거 뭐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너는 네게 따르는 것만 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 그 성구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까지 회개하지 못하던 죄를 회개를 했습니다. '주님이여 다시는 내가 어떤 면으로서라도 불만 불평을 내가 원망 불만 불평을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주님 앞에 약속합니다.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거 주님이 붙들어 주셔야 되지 붙들어 주지 안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으로 기도했습니다. 또, 이제는 내게 주신 은혜, 주님이 내게 시키시는 일 그 일로 충성하다가 갈 일이지 다른 사람의 이렇든 저렇든 남보고 남의 간섭하고 남 이런데 나는 왜 이런가? 남과 나와 비교하는 그런 일을 내가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것을 주님 앞에 약속했습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시면 잘 열매 맺을 것이고 또 주님 붙들어 주시지 안하면 그것들도 다 헛일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참 나사로는 그가 거게서 불만 불평 없고 원망 낙망 원통 없이 그저 주님이 주시는 자기 처지, 자기 형편. 신체적인 형편, 경제적인 형편, 인인관계의 대우적인 형편, 고락의 형편 거게 주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불만 불평 없이 그 자리에서 주님만 그저 바라보면서 그날만 사모하고 있었던 이 나사로의 신앙이 너무 그립습니다. 너무 그립습니다.
그래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제일 성도 중에 먼저 머리를 숙일 것은 바울에게 머리 숙이는 것보다도 나사로 앞에 가 가지고서 머리를 숙이고 싶습니다. 내가 하늘나라 가면은 제일 먼저 주님 앞에 허락 받고 '나로 하여금 나사로 그 성도를 면접하게 해 주옵소서' 하고서 나사로를 찾아서 가서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은 그 은혜를 받고 싶습니다.
너무도 이 홍포 입은 부자는 참 꼭 우리와 같이 어리석게 살았습니다. 어리석게 살았습니다. 나사로는 너무도 그는 참 위대합니다.
오늘 우리는 여게서 홍포 입은 부자가 하늘나라도 몰랐고 지옥도 몰랐고 세상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이미 택함을 입은 자들이요 중생 받았고 부르심을 입어서 주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지극히 큰 대속을 받았습니다.
오늘 내가, 사 층에서 설교할 때에 '주님의 대속의 그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의 그 무한함을 알 자가 없다.' 그 대속이 우리에게 어데까지 필요한지 어데까지 요긴한지 어데까지 효력이 있는지 그 광대하심을 영원히 알아도 우리는 다 모릅니다. 주님의 대속은 얼마나 넓고 필요하고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아무도 모릅니다. 세상에 왔다 간 사람 쳐 놓고 안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아는 것만치 알았지. 그는 무한합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니 우리는 성경이 있고 성신의 감화 감동이 있고 우리의 부족에 다 내어대서 족함을 얻을 수 있는 주의 대속이 있고 우리의 당한 모든 함정과 모든 얽힌 그 결백을 얼마든지 풀어서 자유할 수 있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있는 우리들이니 우리가 이렇게 홍포 입은 부자와같이 땅 위에 있는 동안에 천하 인간이 다 자기 꾸미고 자기 가정 꾸미고 여기에 전심 전력 기울이는 세상 속에 파묻혀 살지마는서도 우리는 이제 늦게나마 깨달아서 우리가 주님에게 아름다운 세마포 옷을 만들어서 입혀야 되겠습니다. 주님을 호화롭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면 저 면으로 일생 동안 한 건. 한 건 사건에서 일생의 그 생활하는 베 짜듯이 일생을 짜서 올라간 그 일생 생애에서 어떤 성도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주님의 사랑을 주님의 능력을 주님의 인내를 주님의 관용을 주님의 자비를 주님의 그 지혜를 주님의 신실하심을 주님의 인도를 그저 일생 동안 자기는 그 한 면의 주님의 영화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해서 일생을 애끼지 않고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기울이는 그 성도들이 다 그렇게 살았는데.
이렇게 산 성도들을 우리가 가 만나기를 잠시 후면 만날 것입니다. 주님 구름타고 오시면 우리가 만날 것이고 또 우리가 부름 받으면 가서 만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만날 그날 주님을 호화롭게 자색 옷과 고운 베옷으로 자기 단장 꾸몄는데 일생 동안 날마다 언행 심사의 전생활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영화롭게 할까, 주님을 존귀케 할까, 주님의 이 무한하신 그 사랑과 그 자비와 그 인내와 그 관용과 그 깨끗함을 나타낼까 하는 그 깨달은 성도들을 따라서 우리도 이제 얼마 남지 안했으나마 이 길을 돌아서서 걸어야겠고, 자기 기쁘시게 하려는 이거 '이제 완전히 이만하면 족하니까 벗어서 어떻게 하면 주여 기쁘시게 할까 떠나든지 거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려는 것 그 호화로운 잔치에서 그 한 두 사람 모였어도 그들 가운데에 주의 피공로를 찬양하고. 그들 가운데서 진리와 영감의 도움을 입어서 주를 찬양함으로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 한 사람 모아도 두 사람 모아도 열 사람 모아도 거게 어려워도 찾아가고 죽음 있어도 찾아가고 찾아가서 서로 만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이 참 주님의 사랑의 애연의 숨은 암초가 되지 말고 숨은 암초가 되지 말고 사랑의 애연에 우리가 기뻐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잔치를 베푸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사로를 배워서 우리에게 주신 현실로 정말로 만족하고 기뻐하고 아무 불만 불평 없이 원망 시비 없이 낙망 없이 만족하고 주님 만날 그날을 생각하면서 조그마치라도 거기에 흠 없이 주님은 나를 이렇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는데 알지도 못하고 그분에게 대해서 감사치 못 하고 불만 불평하는 그런 일이 될까 하는 것을 우리는 삼갑시다.
제가 사 층에서 말씀을 증거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서 감사 감사가 없는 고 시간은 죽은 시간이라고 강조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될텐데 감사 없다는 이것은 얼마나 교만한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얼마나 교만해서 감사함이 없는지, 감사함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뒤따라서 원망 불평 불만의 원통의 그 무서운 죄악이 들어올 것이고 그게 들어오고 나면은 거침없이 어떤 죄악이라도 막 먹고 막 삼키는 참 비참하고 가련한 우리가 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홍포 입은 부자 자기를 호화롭게 했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연락한 그것을 우리가 거게서 우리에게서 완전히 뽑아 버립시다. 이 나사로의 신앙을 본받아서 참 나사로 같은 우리가 되어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