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1 21:12
복있는 사람의 신앙생활
1983. 5. 13. 금새
본문 : 시편 1편 1절∼4절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복있는 사람은" 이 말은 이렇게 행동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고 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 된다 하는 말 아닙니다. 복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움을 받은 사람은, 주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은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인데 복있는 사람이 그 복을 누리고 살면 그 복이 다 복이 되지마는 복있는 사람이 그 복을 누리지 안하고 복을 저버려 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복이 필요가 없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 맺는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나무 제가 뭐 시냇가에 가서 심겨지고 옥토에 심겨지고 또 박토에 심겨지고, 어떤 나무는 심다가 안 심고 그만 마르게 볕에 내 던져버립니다. 그것은 말라 죽게 볕에다가 내 던지는 그것도 나무 저는 권리 없고, 또 박토에 심겨지는 것도 저는 권리 없고, 옥토에 심 겨지는 것도 저는 권리가 없습니다. 나무를 나무 심으는 그 주인이 그것을 심으는 것이지, 심으는 것이고 던지는 것이지 저는 뭐 던지워 지고 좋은 데 심겨지고 하고 하는 그런 권력이 없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시면 복되고 화되게 하시면 화되지 인간이 제가 저를 복되게 어떻게 할라 하는 그런 것을 하고 싶어도 되지 않습니다.
복은 어떤 게 복이며 화는 어떤 게 화인고? 복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그것이 복이고 화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지 못하고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은 원죄와 본죄의 정죄받은 그것이 화입니다.
여기에 복있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사람이라 그말이요, 또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그말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서 참 범사에 행복되고, 범사에 유익되고, 범사에 성공할 수 있는 그런 입장과 처지를 가진 자라 그말입니다. 그 가진 자가 제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주인이 그렇게 해서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돼 있습니다. 우리는 시냇가에 심겨짐을 받은 자들입니다.
여기에 시냇가라고 하는 것은 저수해지는 그런 냇가나 강변이 아니고 관수로, 사람이 그 물이 필요 있어서 봇도랑을 내가지고서 둑을 매서 물을 주인 마음대로 물을 이렇게 저렇게 대는 그 둥천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물을 대 주는 둥천이라.
주인이 물이 항상 있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언덕이라, 또 비가 많이 올 때는 봇둑이니까 물이 쭉쭉 빠집니다.
저 시골에는 가면 보를 막아서 그 물을 대는 봇둑이 있는데 가물 때는 물이 봇도랑에 하나 처렁처렁하고 또 장마가 지면 그 주인이 와서 봇도랑 물 문을 탁 닫아버립니다. 그러면 그만 물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때 가면 뭐 고기, 메기 뭐 뱀장어 그런 게 많이 거기 있습니다. 저도 더러 잡아봤는데.
그래 인제 물을 뺏다 들였다 주인이 하는 그런 언덕을 가리켜서 여기에 시냇가라고 그렇게 해 놓은 건데 그것은 다 그런 언덕을 말한다 하는 것은 성경학자들의 공통된 해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냇가에 심겨져 있는 나무입니다. 우리를 심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또 옥토에 모든 수분이 조절되어 좋은 그것은 조절되는 주님의 모든 은총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은혜를 이게 있어야 될 때는 이걸 주시고 저것 있어야 될 때는 저것 주시고 이렇게 다소, 또 종별 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 합력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인 의를 이루도록 그렇게 하신 그런 입장과 소속을 가지도록 이렇게 하신 이가 주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이러니까 복있는 사람이니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복있는 사람 되는 것 아니고 복있는 사람이 이 복을 우리가 누려야 될 터인데 우리가 이 복을 누리지 안하고 이 복을 버리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우리 복있는 자 되어 있는 우리 생활은 뭐인고 하니 성경 읽고, 묵상하고, 또 그 말씀대로 살고 이 세 가지가 우리 생활이라 그말이오. 복있는 사람의 생활은 이것이 우리 생활이라. 우리 생활은 성경 읽고 기도하고 또 실행하고, 또 실행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또 실행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이것이 우리 생활인데, 우리 생활을 우리가 할 때는 시절 좇아 과실 맺는다.
무엇이든지 모든 것이 합력해서 유익이 된다.
모든 것이 다 몰라 그렇지 어떤 현실이라도 그 현실이 다 참 영원하고 지극히 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게 하신 현실이지 구원에 손해가게 하는 현실은 아니기 때문에 현실 현실마다 다 구원을 이루게 된다. "과실을 맺는다" 구원을 이루게 된다.
구원을 이루게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온전케 하며, 또 그 행위를 온전케 하며, 모든 존재들과 관계를 아주 온전케 화친케 감탄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맺을 수 있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인데 그 일 한다.
이런 현실 저런 현실 그 현실마다 그 속에는 다 아름다운 과실을 맺을 수 있는 과실이 들어 있다. 기도하고 성경 보고 실행하면 다 결과를 맺게 된다.
그런 결과를 맺을 뿐만 아니라 또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안하고 청청하다. 그 생애는 언제나 절망이나 낙망이나 염려나 두려움이나 그런 것이 없고 항상 소망이요, 항상 기쁘고, 항상 평안하고, 항상 담대하고, 항상 희망 속에 계속 열심히 살아나갈 수 있다 하는 그런 것이 다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잎사귀는 겉에 나타난 것인데 그것이 이제 신덕이라 감화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비유컨대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기 태에서 난 아이가 어머니 젖꼭지를 물고 있으니까 그 아이가 젖꼭지를 물고 빨면 자기에게 필요한 젖이 나옵니다. 또 젖을 빨아 삼키면 또 소화가 돼서 아이가 큽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그만 병이 들었든지 운동 부족이든지 이러면 암만 젖꼭지를 물고 있어도 맛이 없어서 빨 맛이 없습니다. 안 빱니다. 물고 있어도 안 빠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극히 큰 소속과 관계를 맺어져 가지고 우리에게는 뭐 무한의 지혜도 있고, 무한의 능력도 있고, 무한의 보호도 있고, 또 무한의 은혜도 있고, 무한의 영광과 존귀도 있고,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다 수입하는 무한의 그 기업이 우리에게 있지마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 누리지 안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아이가 활동을 많이 하고 운동이 정상적으로 되면 그게 제딴에는 활동하는 것인데 활동을 정상적으로 하면 배가 고프고, 배가 고프면 젖꼭지를 물고 젖을 빨고, 빤 젖이 소화가 되고 또 영양이 돼서 자랍니다.
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도 성경 말씀을 읽는 그것은 비유컨대 그 심겨진 나무가 새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새 뿌리. 나무를 심어보면 거기에서 새 싹이 나오면 묵은 뿌리 가지고는 새 움이 나오지 않습니다. 새 움이 나올 때에는 반드시 새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새 움이 나 가지고서 많이 그는 것도 있고 적게 그는 것도 있고 새 움만 나 가지고 마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새 움 그걸 봐서 새 뿌리가 내렸나 안 내렸나, 새 뿌리가 생겨 졌나 안 생겨졌나, 새 뿌리가 굵어 졌나 그대로 있나? 그것을 위에 그걸 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 것은 새 뿌리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성경에는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과 연결돼 있는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 이 면을 깨닫고 저 면을 깨닫고 모든 면을 그게 자꾸 깨달아가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심은 나무가 이 편으로도 또 새 뿌리가 나고 저 편으로도 새 뿌리가 나 가지고 뿌리만 나 가지고 자꾸 빨아 당기면 된다 그 말이오.
새 뿌리 나는 것과 같고, 새 뿌리가 나 가지고서 그 진액을 자꾸 여기에 저게 빨아 당기는 것이, 한 가지 성경에서 깨달아져 가지고 깨달아진 것, '이러니까 참 나는 힘을 써야 되겠다. 이러니까 강하고 담대해야 되겠다. 이러니까 그런 것을 겁낼 것 없다. 이러니까 그럴 때에는 내가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그 힘이 어데서 나오느냐 하면은 이제 기도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게 새 뿌리가 내려 가지고 땅에 있는 진액을 뽑는 것이라.
그러나 위에 그만 그렇게 잘 빨아당기던 그런 나무가 가지를 전부 둥쳐 버립니다. 가지를 둥쳐버리면은 그만 밑에 새 뿌리 내려 가지고 영양 빨아올리던 것이 필요 없으니까 영양을 빨아올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새 뿌리도 자라지도 안하고 그 나무가 아주 둥치 위에 많이 거석해 버리면 죽어버립니다. 끊어버리면 죽어요. 그저 위에 둥쳐도 조금 둥치면 그게 생명은 붙어 있습니다. 아주 싹 둥쳐버리면 그만 죽어버려요.
그것을 많이 둥치면, 아주 둥치면 죽고 조그매만 남겨 두면 생명은 붙어 있고 그저 조금만, 조금만 그 전정을 해서 가지를 전정하면 그 뿌리가 더 힘있게 올라오게 됩니다.
그런데 위에서 빨아당기는 게 없으면 아무리 옥토에 심어 놔도 진액을 빨 필요가 없어. 그러니까 새 뿌리 내리는 것도 할 일이 없고 또 옥토이지마는 그게 소용이 없고, 그러다가 인제 그 뿌리가 싹이 나 가지고 무성하게 되면 자꾸 뽑아올립니다.
또 무성한 가지가 나 가지고 잘 자란다고 해도 그만 장마가 지든지 구름이 끼든지 이래 가지고서 이래 버리면, 비나 자꾸 줄줄 오고 자꾸 구름 끼고 이라면은 그만 그 나무가 암만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도 햇볕이 안 쪼이니까 무손이 받쳐서, 병들지는 안하지마는 자라지는 않습니다. 그 죽지는 안해도 그만 햇볕이 안 쬐고 그라면 그해 과수원 헛일이오.
이래 햇볕이 쨍쨍 쬐이면 햇볕이 쬐우니까 햇볕에 안 마를라고 제 딴에는 진액을 빨아올리는데 빨아올린 그 진액은 제 잎사귀도 되고, 가지도 되고, 꽃도 되고, 열매도 돼 버립니다.
이러니까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이와 같이 살려고 하니까 자기 중심의 사람들이 자꾸 대항이 됩니다. 대항이 되는 그것이 햇볕 쬐이는 것 한가지요. 대항이 되는데 그때에 그만 지면 죽고 대항이 될 때에 대항 되거나 말거나 하나님 말씀대로 자꾸 자기 진리대로 그대로 행해 나가.
이래 행해 나가면 그게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지금 위해서 햇볕이 쬐 이니까, 악인들이 '그래 하지 말아라 이래 하자' 꾀이다가 강제하다가 자꾸 이와 같이 지금 그래 하지 말라고 하는 그것이 햇볕이라. 죄인들이 또 삐뚤어진 길 같이 가자고 자꾸 하는 그것이 햇볕이라.
이것이 다 햇볕이요 또 소통되는 바람 부는 것이요 이러는데, 바람도 말리고 햇볕도 말리는데 바람에 안 마를라고 진액이 올라가다 보니까 튼튼함이 되고 또 햇볕에 안 마를라 하다 보니까 자랐다 말이오.
바람 부는 것은 바람 불 때에 진액이 안 올라오면은 말라버립니다. 바람 불 때에 진액이 올라오면은 바람이 세게 불면 자라지는 못합니다. 자라지는 못하나 이게 올라와 가지고 튼튼하게 만들어 버려 바람 불 때는 식물에게 올라오는 섭취하는 진액이 그 식물을 튼튼케 만드는 것이고 또 햇볕은 그 식물을 자라게 만듭니다.
식물이 자라기는 밤에 자라고 낮에는 안 자라니까 햇볕이 못 자라게 하는 것 같지마는 그게 아니오. 햇볕이 쬐어서 자꾸 찌우니까 암만 올라와 봤자 햇볕이 너무 많이 쬐우니까 햇볕에 증발되는 그걸 보충만 돼지지 여분이 없으니까 자라지를 못한다 말이오.
그러나 그러다가 해가 슬그머니 지니까 그만 되게 햇볕이 쬐인 그 이튿날 아침에는 가 보면은 새 움이 쭉 나와 있습니다. 쭉 나와 있어. 이 햇볕에 안 마를라고서 밑에서 싸우던 것이 싸우는 적이 없어지니까 적이 없으니까 적하고 싸우던 그 힘이 쑥 자라서 새 순이 쭉 자라버린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햇볕이 쬐일 때에는 그때는 자체가 자라게 되고 또 바람이 셀 때는 자체가 강하게 됩니다.
이러니까 토지를 살 때에 햇볕이 많은 토지를 값을 많이 주고 삽니다. 또 햇볕만 많아도 통풍이 안 되는 그 토지는 가치가 적습니다. 햇볕은 많지만 통풍이 적으니까 곡식이나 과실이 약해서 곡식이면 쓰러지고 나무면 결실을 잘 못 한다 말이오. 햇볕 좋고 또 소통, 통풍이 잘 되고 또 밑에 수분이 있고 하면은 그 땅은 제일 옥토로서 값이 제일 비쌉니다.
우리가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이것이 다 우리에게 핍박이 있고 어려움 오는 것은 자기 중심의 사람들이 자기 중심을 따라서 그를 따라 살려고 하는데 우리가 그를 따라 안 살라 하니까 그게 어려움이 온다 말이오. 또 성경 말씀대로 이탈해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같이 살자 하는데 우리가 안 살라 하니까 또 어려움이 온다 그거요.
그게 뭐이냐? 그렇게 살자 할 때에 안 사는 것이 뭣인고 하니 안 사는 것이 내가 무한하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그 연결의 관계를 써먹는 거라.
무한한 연결을 가지고 있는 건데 그 모든 악한 자 또 죄인 이들이 대항을 이렇게 하는데 하는 그걸 거기에 속해서 그만 이것 버리고 거기 붙지 안하고 아무리 그래 해도 나는 그대로 지금 해 나가는 그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소속해 있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끌어오는 거라 말이오. 그것 대항할라 하는 게 그게 무한한 능력을 끌어오는 것이요 무한한 지혜를 끌어오는 것이라. 무한한 그 은혜를 끌어오는 것이라 이것을 대항하다가 그 대항이 그것이 없어지면, 밤이 되니까 없어지면 그만 그 동안에 벌컥 자라버려.
이것 모양으로 그것이 그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시냇가라는 그 옥토의 효력이 어데서 나오느냐? 옥토의 효력은 새 뿌리가 나와 가지고 그 진액을 빨아야 되는데 진액을 어떻게 빨 수 있느냐? 진액을 빨아서 그 진액이, 새 뿌리가 진액 빨아 가지고 그 진액이 대궁으로 올라가 가지고서 저 잎사귀까지 올라가야 된다 말이오. 잎사귀까지 올라가야 되는데 올라가는 게 뭐이냐? 그것이 우리 실행이라.
악인이 제 주장대로 하자고 할 때에 안 하려고 하니까, 안 하려고 하니 무엇을 네가 배경을 삼고 안 하려고 하느냐? 하나님 배경 삼고 안 할라고 한다 그말이오. 안 하려고 하면 하는 그것이 뭐인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것이요 써먹는 것이요 자라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자꾸 무럭무럭 자라버려.
이러니까 우리는 어짜든지 악인의 꾀 좇지 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안하고, 오만한 자라는 것은 자기 정복인데 자기가 그만 거기에서 만족을 하고 과대평가하고 바리새인 모양으로 그렇게 있지 아니하고 자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같이 갈급해서 자꾸 더 부족해서 자기를 더 복종시켜 가지고서 더 더, 더 깨끗 더 깨끗, 더 거룩 더 거룩 자꾸 이렇게 하려고만 하면 배후에 자본자가 있다 말이오. 배후에 보급자가 있어. 보급자는 뭐이냐? 시냇가에 옥토라 말이오. 그거는 뭐이냐?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입니다.
그 은총을 받으려고 하면은 새 뿌리가 나야 되는데 새 뿌리가 나는 것은 뭐이냐? 성경 말씀을 하나 깨달으니까 또 새 뿌리가 났다 그 말이오. 하나 깨달으니까 못 빨아당기던 것 또 빨아당기게 됐다 말이오. 맛을 못 보던 또 그 기운을 맛 보게 됐다 그말이오.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하는 그게 뭐냐 하면 새 뿌리 나 가지고 그 빨아당기는 게 묵상이라, 빨아당기는 게 묵상. 빨아당기는 것은 이미 실행을 해야 빨아당길 필요가 있지, 실행을 해야 기도할 필요가 있지 실행 안 하면 기도할 필요도 없고, 위에 실행하니까 대적이 있으니까 그 대적을 대항하려 하니 '어라, 성경이 뭐라 하는가 보자.' 성경을 상고하게 돼. 성경을 상고하게 돼. 성경을 상고해 보니까 '이것은 이렇게 대항하면 된다. 이런 것 염려할 것 없다.' 염려할 것이 없다 말이오. '모든 염려 다 주께 다 맡겨버리라' 하니까, 소망 중에 달리라 했으니까 그대로 하면 된다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는 복있는 사람인데 우리가 실행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가 없습니다. 실행이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성이 없습니다.
실행이 없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 없어.
이제 공산주의가 와서 그럴 때에 '주여, 나를 도우시옵소서.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을 더 가지게 해 주옵소서.' 자꾸 이래 쌓는 그것이 뭐냐 하면 진액 빨아올리는 거라.
그런 데는 자기가 성경을 모르니까 '여기 대해서는 모르겠다' 이랬는데, '모르겠다' 이라니까 그 면에 대해서는 새 뿌리가 안 났다 말이오. 성경 말씀을 보고 새로 하나 깨달으니까 새 뿌리가 착 났다 그말이오.
새 뿌리가 나 가지고서 새로 깨달은 그 면에서 이제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을라고 이제 기도하는 그게 빨아당기는 거라 말이오, 그래 가지고서 위에 실행에서 대항하는 그것을 지지 말고 자꾸 이래 하니까 그게 뭐냐 하면은 필요 있는 햇볕과 같고 또 통풍, 바람과 같습니다.
이러니까 실은 하나님이 짓기를 우리가 배운 대로 하나님이 뭣 때문에 예정을 했느냐? 예정하신 것이 당신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예정했고, 창조하신 것이 달성하기 위해서 창조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지금 지음 받은 피창조의 목적이, 저거들이 있는 목적이 뭐이냐? 로마서 8장에 보면 '탄식하고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뭇아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이라' 자유함에 이른다 그말은 진리와 영감대로 사는 게 자유인데 진리와 영감대로 사는 것을 지금 원하고 있다 말이오. 그라면 저거도 부가 있어.
이렇게 사는 것이 그것이 얼마든지 무진장의 것을 자꾸 빨아당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입장과 소속이 이렇기 때문에 햇볕 나는 것, 또 통풍 그것이 적 같지만, 공산주의가 저래 와 가지고서 저래 쌓는 것이 적 같지만 그게 적이 아니고 참 파고 거름 주는 것 한가지고, 저렇게 됨으로써 그 대적에게 안 질라고, 그 햇볕에게 안 마를라고, 햇볕에게 마르지 안할라고 하다 보니까 그게 자기 됐다 말이오. 햇볕에 찌여서 마르지 안하려고 전액 뽑아당기고 보니까 그 진액이 올라와서 잎사귀 되고, 새 움도 되고, 꽃도 되고, 열매도 됐다 그거요.
그것에게 지지 안하려고 함으로써, 안 지려고 하니까 무한하신 은혜를 내가 힘입어야 돼지니까 안 지려고 하니 무한한 은혜를 힘입어야 되고 얼마든지 무한한 은혜를 입고, 우리 환경과 주위에 어떤 어려움이든지 있는 그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하니까 무진장의 지능이 와 가지고 은혜가 와 가지고서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하면 극복한 게 좋은 게 아니라 극복하려고 하니까 극복 할 수 있는 자신이 되는 자신이 온전해지고 튼튼해지고 자랐으니 그게 좋다 말이오.
이것은 극복을 한 그 사건이 물론 승리해 다니엘이 사자구덩이에 들어가도 기도한 그게 승리니까 그 한 행사가 좋지마는 행사 그게 좋은 것 그것보다도, 행사 그것만 있으면 필요 없습니다. 행사 그것보다도 그 행사를 할 수 있는 다니엘이 돼 버렸다 말이오. 다니엘 자체가 자라져 버리고 온전해졌어.
그러니까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그 시냇가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 무한하신 사랑, 어쩌든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 그 무한하신 능력 거기에 얼마든지 그것을 빨아당길 수 있도록 소속을 가지게 됐다.
하나님이 옥토가 아니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역사 은혜가 우리에게는 옥토라 그말이오. 이런데 거기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 중보자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하나님의 무진장의 무한의 은혜를 우리가 다 내것을 삼을 수 있도록 딱 연결시린 그것이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입니다.
그러니까 거기다가 좋은 데다가 옥토에다가 심어놓은 심은 자가 누구나? 예수님이 심었다 말이오.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를 거기에 심어서 그런 연결을 관계를 가졌어.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의 중보자시라 말이오.
이렇게 중보자가 돼 가지고 연결됐는데 이 연결이 된 얼마든지 옥토에 수분이 좋은 옥토에 빨아당길 수 있는데 이것 뭐 햇볕이 나야 일이 되지. 햇볕이 나야 일이 되겠고 바람이 불어야 일이 되는데 햇볕이 안 나고 아무리 옥토에 있지마는 햇볕이 안 나니까 소화가 돼야지? 자랄 수가 없어.
이제 밑에는 옥토고 좋은데 위에 햇볕이 쨍쨍 쬐어서, 땅이 얕은 데는 뭐 뻐쩍뻐쩍 말라죽고 물 없는 데는 말라죽고 할 그때에 옥토에 심은 거는 많이 자라게 된다 말이오.
또 그러고 바람이 불어서 이래 부니까, 바람이 없으면 그만 부드럽기만 해 가지고 그만 넘어져 다 헛일인데 바람이 세게 부니까 이런 환난 저런 환난 똑 바람 같은 환난, 이러니까 이런 연단받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려서 뭐 참 간장국에 조른 뭐, 시골에 가면 그런 말이 있어. '그 사람은 뭐 간장국에 조른 사람이라.' 이런데도 졸려보고 저런 데도 졸려보고 뭐 짜운 장에다가 이리 졸아보고 지져봤다 말이오. 지져봐 놨으니까 이런 것 저런 것 오만 것 다 경험하고 체험해 놨으니 뭐 어떤 게 와 봤자 눈도 꼼짝거리지 안한다 그말이오.
그것이 우리를 다 연단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저 우리의 입장을 우리가 알고, 우리의 소속을 알고, 무한한 우리의 근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주위의 환경이 자꾸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우리가 구해야 되겠고, 찾아야 되겠고, 또 받아야 됩니다.
이기는 것은 필연적으로 돼 가지고 있다 말이오. 이기도록 '감당치 못할 시험은 당치 않게 했다' 감당 못할 시험은 당하지 안하기 때문에 다 이기도록 돼 가지고 이길 정도로 딱 했기 때문에 무조건 우리 현실 당할 때에는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이 생활을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절해서 해 주시기 때문에 낙망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서 가능하니 할 욕망을 우리는 가지고 하고, 그렇게 하는 데는 하나님의 무진장의 은혜지마는 그걸 자꾸 성경을 봐서 새 뿌리를 내려야 되겠다 말이오. 깨닫고 이라다 보니까, 성경을 보면 힘이 납니다.
힘이 나니까 사람이 저 혼자 할 때는 힘이 없다가도 성경 보고는 '주여, 이제 내가 잘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힘을 써서 싸웁니다. 이제는 그대로 계속하겠습니다.' 이런 힘이 나오게 됩니다.
이러니까 무한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결이 됐다는 것, 연결된 그 효력은 이 햇볕이 와야 되고 바람이 와야 되고 그래야 효력이 있지 그게 없으면 효력이 없다는 것.
햇볕은 뭐인데? 악인의 꾀, 악인들이 지금 나를 대항하는 그것이 좋은 햇볕이요 좋은 바람이요 또 죄인들이 같이 가자고 자꾸 하는 그것이 대항할라 하니까 힘이 들지마는 그게 좋은 바람이요 좋은 햇볕이라. 또 내가 자꾸 게을해서 '아이구 그만, 그만 앉아서 먹자.' 하는 것으로서 자꾸 게을할라 하는데 게을하는 그것도 자기 안에 있는 그게 햇볕이요 공기요 자기에게 있는 병이라.
이러니까 그것도 자기가 이렇게 자꾸 해 나갑니다. 그래도 자기를 복종시켜서 자꾸 더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는 것은 못 할 건 하지 안했기 때문에 거기다가 표준을 딱 두고 하나님의 명령은 감당 못 할 건 하지 안하고 꼭 다 해야 될 것만 우리에게 말해 놨기 때문에 자기 몸에 좀 과해도 그대로 해 나갑니다. 해 나가면 이제, 제게 없는데 어째 해? 해 나가면 없는데 있게 됩니다. 어째 있게 되는가? 저 시냇가에 뿌리를 박아 가지고 있어. 그러기 때문에 행하게 된다 말이오.
그래 가면은 뭐이냐? 성경을 봐서 새 뿌리가 나야 돼. 새 뿌리가 안 나면 헛일입니다. 새 뿌리가 나야 되지. 이러니까 뿌리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마는 가지마다 그 뿌리 속한 게 있어. 나무를 캐서 보면은 요 뿌리를 끊어 가지고서 끊어버려 놓으면, 다른 것 다 냅두고 그 뿌리 하나만 끊어놓으면 다른 나무는 다른 순애기는 다 잘 자라는데 한 가지, 한 가지 그놈만 고생하고 그놈만 안 자랍니다. 그놈이 안 자라요, 그만. 안 자라고 이래 가지고 목숨은 붙어 있지만 그러다가 차차 차차 자랍니다. 자랄 때에 밑에 파 보면 끊어놓은 그 뿌리에 새 뿌리가 차차차 생겨져 나옵니다 그것 다 계통이 있어. 그 계통이 '반렬 찾아 모신다' 찬송에 있는 것처럼 자기 계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성경을 깨달아야 자랄 점이 있고 저 성경을 깨달아야 자랄 점이 있고, 이러기 때문에 성경 새로 깨닫는 그것이 새 뿌리 내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껍데기로만 알고 이와 같이 있는 것은 뿌리가 땅에 박히지 안하니까 또 아무 소용이 없는 거라. 보면 나무가 안 자라는 것은 묵은 뿌리만 있지 새 뿌리가 안 나와요. 새 뿌리가 나오지 안한 것은 자라지 안해.
새 뿌리가 뭐인가? 새뿌리는 내가 성경에 모르던 부분을 깨닫는 것이 그것이 새뿌리요 또 내가 성경을 묵은 뿌리만 알았지. 묵은 뿌리로만 알았어. 묵은 뿌리로만 알았지마는 거기에서 새로 더 깨달아 깊이 깨달아 들어가는 것, 그게 자꾸 새 뿌리 나 가지고 되는 거라. 성경을 보고 새로 깨닫게 되는 것, 이미 깨달았던 성경을 또 더 깨닫게 되는 것 그런 게 다 새 뿌리 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 우리는 참 무한한, 무한한 분에게 무한한 그 은총에 뿌리박고 있으니까 우리에게 어떤 그 현실을 당해도 능히 이기고 남는 그게 있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바울은 말하기를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날이랴? 무엇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겠느냐? 이기고 남음이 있다.' 이랬습니다.
이런 입장과 소속을 가진 우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되고 또 우리에게 온갖 현실에 어려움이 오는 그것이 참 식물에 좋은 햇볕도 되고 좋은 통풍도 되고 이래 하는 것이니까 우리는 기쁘고 즐거움을 가지고 자꾸 빨아당겨 이기면 돼.
그러나 우리를 참 해하는 것, 우리를 하지 못하도록 이럴 때 우리는 자꾸 신앙으로 생활해 나가면 되는 것이고 우리를 해하는 그런 것은 내게 해로운 것은 나는 제거를 못 합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해로운 걸 제거할라 하지만 제거는 못 합니다.
포도나무에 거기에 버러지가 붙으면, 저는 포도나무를 좀 길렀는데, 안 기르는데 어째 그때 하나님이 길러라 해서 길러 가지고 포도나무 한 나무 가지고 포도 한 세 가마니 네 가마니 땄습니다. 커단한 가마니로. 뭐 포도 쳐놓고는 아마 그만치 많이 여는 건 없을 겁니다.
이런데 버러지가 들면 버러지가 들어도 그놈 포도는 열 힘이 있지 마는, 빨아당겨 무성해지지마는 벌거지 잡을 힘은 없어. 그러니까, 포도가 많이 여니까 주인이 가 가지고 벌거지를 보고서 싹 뭉캐 죽여 버리면 돼.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오는 해는 우리는 방어할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오는 해는 우리는 방어할 능이 없어요. 그것을 방어할라고만 자꾸 애를 쓰니까, 우리에게 오는 해는 방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 살지 못하게 하는 거기에는 우리가 자꾸 사는 그거는 우리 할 일이요 우리가 우리를 염려해서, 자기가 자기를 염려해서 뭐 자기를 행복되게 자기를 유익되게 할라 하는 그런 것은 다 주께 맡겨서 주님이 할 일이지 자기가 자기를 행복되게 절대 못 합니다. 또 자기가 자기를 존귀케도 못 합니다. 또 자기가 자기에게 오는 이웃이 해하는 그 해를 자기 힘으로 막지 못합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까 내게 맡기라' 이랬다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자기 할 일 자기가 하고 또 주님에게 맡길 것 맡기고 그래 하면 우리는 참 뭐 하나님같이 거룩하고 온전하고 깨끗하고 여기에까지 자라갈 수 있는 우리의 모든 거는 다 돼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모르고 안 해서 탈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아직도 뭐 봉사원이 필요합니까? 이제 이거 아마 끝이 돼 가는 것 같습니다.
봉사원들이 도무지 안 나오는 모양이로구먼. 날마다, 교인들이 강퍅하면 하나님이 지으라는 예배당, 짓지 말라는 것 또 인제 당회에서 결정해 가지고서 분수에 넘는 것 짓는 것도 있고 그것도 탈, 하나님이 지으라는 것인데 지으라는 것도 짓기는 지어야 되는데 연보 한 번에 안 되니까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몇십 번이든지 해서 하면 그것이 강퍅한 연고라. 봉사할 때 쭉 나와 가지고 해 버렸으면 이것 뭐 두 번 광고할 것 없는데 아침마다 봉사원 봉사원 광고를 해도 아직 많이 남았답나다, 할 일이. 뭐이든지 끝굴림을 해야 되지 그렇게 끝맺음을 못 하면 안 됩니다. 오늘은 나와서 좀 봉사를 하도록 하고 그라도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