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22:52
믿음이 더해지는 방편
1981. 7. 24. 금요일 새벽
본문: 창세기 15장 8절-18절 우리가 진리에 굳게 서야 되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권하시고 주장하시고 계시고 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의 그 행위가 어떻게 많고 크다고 해도 그까짓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며칠 만에 지었느냐 엿새 만에 다 지으신 것입니다. 그기 뭐이 지금 이십세기에 사람들이 보고 놀라는 그 과학들을 말하지만은 그 엿새 동안 지은 중에 포함된 것이요.
또 굉장한 역사들이 있는 그것도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예정하신 그대로 하나님이 성취를 해나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이는 이 모든 역사 속에 무엇이 있느냐 그 속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들어 있고 또 하나님의 이 목적 곧 구속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크지 그것은 지어놓으신 것을 벌써 근 육천년 동안이나 이용하면서 해나오고 계시는 것이 곧 이 구속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그 행동의 그 크고 작고 많고 적은거기에 가치를 두는 것 아닙니다. 거게 가치를 두면 기독자가 아닌 이 이종교도 꽤 큰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또 아무리 기독교가 이렇게 양이 많고 퍼졌다고 해도 안 믿는 그 사람들 수만 못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수가 많고 또 안 믿는 사람들의 그 모든 운동이 더 널리 많이 퍼져가지고 있습니다.
사람 보기에 숫자가 많고 또 그것이 크고 넓고 한 그것을 가치로 삼는다면은 두말할 것 없이 안 믿는 불신사회가 훨씬 교회보다는 크고 그 순위를 둘라고 하면 불신 사회가 제일 큰 순위를 차지할 것이고 이 교회라는 것은 아주 그 몇째 가는 그런 순위를 차지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민주주의보다도 숫자가 적습니다. 공산주의보다도 숫자가 적습니다. 또 불신자안 믿는 사람을 통 틀어 말한다면 그 숫자가 작습니다. 다만 기독교를 기독교의 가치는 어디있는고 하니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계약에 일치된 하나님의 계약과 일치된 하나님의 계약이라면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거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거게 가치가 있는데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그것보다 가치의 알맹이는 어디 있는고 하니 예수님의 이 대속하신 요기에 근거된 이것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온 천하보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그것이 가치 있고 하나님의 법도에 일치된 그 하나님의 법도에 합법된 그것이 가치 있다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일치된 그 진리대로 된 그것이 가치가 있고 진리대로 된 그것보다 참 가치 있는 것은 어데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대속에 이 공로를 근거한 대속의 공로와 일치된 것 대속의 공로와 하나 된 이것이 이제 영원한 가치 있는 것이며 영생인 것입니다. 왜? 왜 그런고 하니 하나님이 근본 목적을 그렇게 정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다 타락해서 원죄와 본죄로 하나님과 완전히 원수되었고 죄인되었고 불의한 자로 저주와 사망아래에 있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보통 부정모혈로 난 자는 이 원죄와 본죄로 사망과 저주 아래에 있지 않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망과 저주 아래에 있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가 적게 움직인 자와 크게 많게 움직인 자 그러면 그 두 자를 두고 하나님에게 거슬림이 어떤 것이 크다고 생각합니까? 김성도선생 예. 예 세상에서 많고 크고 위대하다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대한 원수면이 저주면이 사망면이 대적면이 더 크고 강한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요걸 똑똑히 알아 들어야 됩니다. 왜 인생은 다 원죄와 본죄로 인해서 사망 안에 있는 것이요 죄 안에 있는 것이요.
저주 안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원수 속에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 앞에는 더 멸망이 큰 것입니다. 이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분별하지 못하면 세상에 있는 것도 큰 것이면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것인 줄로 알고 이래생각하지만은서도 세상에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이 하나님에게 대적이 적고 적은 것보다는 없는 것이 하나님에게 대적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네가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하는 그 말은 없으면 그것이 하나님과 대적이 제일 덜 되는 것이요. 불법이 없는 것이요. 그기 조그매라도 있으면 고것이 불법이 적은 것이요 세상이 크다 하는 그런 것은 불법이 큰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불법 저주 죄 사망에서 다시 하나님과의 이 생명적 관계를 가진 것이 어떻게 가지게 됐느냐 예수님의 이 대속 이 중보로 인해서 관계를 가지도록 된 것입니다.
이 대속의 중보가 아니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데 대속의 중보를 인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이 하나님과 관계부터 가져놓고 그 다음에 작고 크고 그의 이 대속에 근거한 행위가 있는 것이 그것이 의요 영생이지 여게서 관계를 가지지 안하고 아무리 있어 봤자 그까짓기 가치가 없고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운동이 큽니다. 아주 큰 운동이 있습니다. 큰 운동이 있어도 그 운동이 예수님의 대속에 근거하지 안하면은 그까짓거 하나님이 적 중에 대적입니다. 여게 엑스포 74가 모였고 또 빌리그레함 운동이 많이 모였지만은서도 그것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근거한 이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피와 살을 근거하고 예수님의 대속을 근거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치 있지만은 인간들이 운동하는 운동만 앞세우고 예수님의 피와 살은 말은 하지만은서도 예수님의 피와 살은 뒤로 두고 그러면 근거는 세상이 근거요 예수님의 피와 살을 이것을 이용해먹는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적 중에 대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요것을 잘 구별하지 안하면은 기독교의 가치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기독교에 이단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피를 말하지 안하는 이단이 없고 살을 말하지 안하는 이단이 없고 십자가를 말하는 말하지 않는 이단이 없고 예수님의 대속을 말하지 않는 이단이 없습니다. 이 다 말하면 그라면 되느냐 그런기 아니고 어느 것을 앞세우느냐가 문제입니다. 어느것이 뿌럭지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느것이 근거냐 하는 것이 문제요 어데서 부럭지가 되가지고 어데서부터 동기가 되가지고 어데서 시발된 것이냐 세상으로 시발되가지고 이거 불교에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은 끄 들이야 되겠다 또 기독교에 갖다가 이거 대속이라 하는 이것은 여 끌어드리야 되겠다 막 종합을 해가지고 이것도 이용하기 위해서 어떤 주체가 예수의 이 보혈공로를 이용하기 위해서 보혈공로가 거게 지금 참가해가지고서 거 갖다가 저거들이 말해가지고 있는 것과 이 보혈공로로 인해서 이것이 작든지 크든지 벗어나는 것과 그러면 주님의 이 보배 피 공로의 대속이 요것이 종자가 되가지고서 종자가 되가지고 요 종자가 되어서 종자 안에 있는 생명은 하나님과 결합인데 여 대속으로 말미암아 결합이 됐기 때문에 요 대속이 없는 데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이 피조물 된 사람들로서는 구원의 씨가 된 것입니다. 구원의 씨 구원의 씨인데 씨가 없이 요 씨가 나가지고서 자라서 다만 뭐 눈만 텄더란데도 고거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 고 씨앗이 생명있는 씨앗이 눈이 났기 때문에 잘 가꾸면 커 진다 그말이요. 그러나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저 외국에 가가지고서 만일 처음에 여게 고구마니 그런 것이 우리나라 에 없었는데 고구마 종자를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가져 왔는데 꼭 알밤만한 것을 하나 가지고 와가지고서 요걸 심었더니만은 움이 나서 지금 한한 이삼세치 움이 요만침 나왔습니다. 요만침 나와도 고것이 가꾸면 그기 얼마든지 커 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커지면 고것이 들어서 고구마 종자를 우리나라에다 다 이렇게 퍼질 수 있지만은 그 고구마는 고구마인데 만일 삶은 고구마라서 생명이 없는 고구마라면 이런 고구마가 여러 수십가마 있어도 그거 가지고서는 종자를 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그보다도 고구마가 아닌 다른 무슨 감자나 그런 것이 수만 가마니가 있습니다. 수만 가마니가 있어도 수만 가마가 있어서 많으니까 그것이 많으니 혹 고구마 되리라 생각합니까. 고구마가 되겠습니까. 감자 여러 수만 가마니가 있다고서 그걸 갖다가서 그 심어서 가꿔 기르면은 거게 고구마가 생겨지겠습니까 안생겨집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우리의 구원의 씨입니다. 구원의 씨기 때문에 요 씨는 작든지 크든지 요 씨에서 난 것은 고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져서 생명을 가진 것이지만은서도 이 씨를 근거하지 안한 요 씨에서 나오지 안한 것 씨에서 나오지 안한거는 소용이 없다 이기요 응 그래서 내가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 가지는 포도나무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그러는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대속을 인해서 대속을 인해서 나온 그것이 생명이지 딴거는 소용없는 것이라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나로 인하여 산것만 그기 영생이지 되지 주님으로 인하지 안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 가치 없는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그 만일 그 사람이 지금 아주 능란하고 굉장한 세상에 문화 과학 도덕 율법 막 끌어 넣어서 아주 그 저서해 논 것이 그것이 참 세계에 제일 첫째가는 학자가 기록한 책입니다. 저서입니다. 그 저서일지라도 거게 예수님의 피공로를 근거해서 거게서 나온 그 거기서 시발되고 그로 인해서 자꾸 이래 벗어나온 그 저서가 아니라면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책이요. 죽은 책이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둔해서 쓴 것이 누가 갖다가 어린아이 국민학교가 봐도 이까짓거 책이라도 써 냈나 그렇게 아주 무식하고 너무 허무하고 하다 할지라도 고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그 공로를 인해서 고게서 요렇기 때문에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대속을 받았기 때문에 요렇게 되야 된다 요렇게 되야 된다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시발이 됐으면은 그 책은 세상이 없는 세상이 없는 세상을 떠오르는 세상을 밟고 있는 세상을 탁월한 생명세계의 책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그러기에 그전에 내가 간접으로 들었는데 오종덕 목사님이 말하기를 아무리 그 설교가 훌륭해도 거게 예수님의 그 피가 들어 있지 아니하면 그 설교는 이단이요 설교가 아니다 그런 말 한다 말을 들었어 그분이 아주 구속의 도리를 잘 깨달은 분입니다. 뭐 학자들이 뭐 신학교 박사들 많고 학자들 많지만은서도 나는 늘 그때도 말했고 성경은 오종덕 목사님이 제일 바로 알고 있고 많이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성경에 대해서 무식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학박사들 성경에 대해서 무식하고 주석을 짜다라 많이 냈지만은서도 무식합니다. 오종덕 목사님이 그때 갖다가 고신에서는 성경 지식에서는 제일 이것입니다. 제일 첫째가는 선생이었어.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나따나 말만 많이 하면 되는줄 알지만은서도 그기 아니라 그기요. 그러기에 김현봉 목사님이 여 고려 신학교 있는 것 모든 갖다가서 교수를 갖다 이래 보고서 그 사람들은 생명 없는 교훈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생명 없는 교훈이라 왜 생명 없는 교훈이라 합니까 그분들이 내 논 책은 전부 세계 학자들이 이 학자는 이란다 저 학자는 저칸다 이렇게 모두 이 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저학자는 저렇게 말하지 자기는 나는 요렇게 믿는다 하는 고기 없다 보라 그 있는가. 그기 없다 그분이 잘봤다 말이요 그기 없기 때문에 그건 생명 없는 책이라 자기가 책을 낼라면 어떻게 믿는 그걸 말하는 것이지 이래 믿고 저래 믿는 것은 모두 다 갖다 이것도 좋은 저것도 좋다 하는 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리되면 뭐이 되느냐 진리는 하나뿐이다 그 말이 아주 깨달은 사람의 그 세밀하고 큰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진리대로 된 것이라야 가치 있고 힘 있고 진리대로 된 것이라야 가치 있고 힘 있습니다. 진리대로 된 것이라도 예수님의 피를 근거함이 없으면 생명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근거하지 안했으면 생명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운동이 아무리 큽니다 마구 굉장하여 굉장해도 이것이 성경대로냐 성경대로가 아니냐 요것을 첫째로 비판합니다. 이 비판이 알맹이 비판입니까 껍데기 비판입니까?
이 껍데기 비판입니다. 껍데기 비판이요. 이래 비판하고 그러면 이 운동이 예수님의 그 대형 대행 대화목 예수님의 대속을 뿌럭지로 한 이 대속에서 벗어 나온 것이냐 예수님의 대속에서 움터 나온 것이냐 이것이 그 근원이 어디냐 예수님의 대속에서 거듭 벗어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 다른 것 이런 것 저런 것에게 이것이 벗어나와 커가지고서 예수님의 대속을 이용했다 그말이요 예수님의 대속도 이건 필요하다 하나 거들이 붙여나야 되겠다 예수님의 대속을 끌여들여서 이용을 운동이라고 하면 그 운동은 마귀 운동인줄 알아야 됩니다. 마귀 운동 요것으로 구별하면 여러분들이 아주 간단하게 구별하지만은 이것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크냐 작으냐 세력이 있느냐 없느냐 계시록에 보면 말세에 이단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예 수님은 어린양인데 그건 새끼양이라 했어 더 순진한 것이요.
새끼 양인데 하늘에서 심지어 불을 떨어 뜨리게 하고 땅위에 기이한 이적을 다 행하기 때문에 천하 있는 사람들이 그 앞에 다 머리 숙이고 다 따라간다 했소 그렇지만은 그것이 나중에 가서 계산할 때에 보니까 666이라 인간으로서는 최고지만은서도 하나님의 수는 칠수인데 666이요 7에 도달치 못했다 말이요. 7이 아니라 말이요 신본이 아니라 말이요 인본이라 그말이요. 666인데 짐승의 수요 사람의 수라 그 사람의 수라 말은 인본이라 그말입니다. 암만 해봤자 인간만 좋아하면 인본이라 그말이요. 인간의 지식 인간의 생애만 주 모아 놨다 말이요. 짐승의 수라 짐승은 뭐입니까. 짐승은 뭐이라 했어 계시록에 짐승은 뭐이 짐승이라 하지요? 예 계시록에 공부 안했어 계시록에 짐승을 뭐이 짐승이라고 그 짐승으로 상징했다 했습니까. 응 이러는 것 배워놓은 것 내버리는 모양이라 그래 세상. 세상. 짐승의 수라 세상수라 말이요. 암만 말해도 세상 주 모은 것이라 그말이요. 인간 주 모아 논 것 세상 주 모아 논 것을 가르쳐서 666이라 그렇게 말해 666인데 이 수는 짐승의 수요 사람의 수더라.
그러기에 우리가 이것으로서 구별해야 되지 그러면 그 사람이 아무리 교회서 연보를 많이 하고 뭐 갖다가 전도를 많이 하고 계획을 하고 설교를 잘하고 어떻게 한다고 해도 보자 그 종자가 어디서 나왔노 그 뿌럭지가 어데서 나왔노 그 시발이 어디서 나왔느냐 어데 근거되어 있노 그 뭐이냐 그것이 과학을 근거 정치를 근거 세상 지식을 근거 뭐 이 사회를 근거 뭐 근거 뭐 근거 이라고 예수님의 피에 놓고 예수님의 살에 놓고 예수님의 구속에 감격해서 구속받은 요 자기인줄 알고 깨닫고 고게서부터 시발 되 나온 것이 아니면 전부 미혹입니다. 응 요것을 여러분들이 아고 자기 밖에 있는 이 교회를 구별해야 되고 세상을 구별해야 되고 또 이 모든 교훈들을 운동들을 구별해야 됩니다.
보자 여게 보자 이 운동에 뭣이 세력을 가지고 있노? 여 주체 세력이 뭐고? 인간이가 세상 정치가? 미 교계라 교계라 여게 운동하고 있는 주체 세력이 뭐고? 주체세력이 신구약 성경 진리냐 뭐이냐? 아 진리다 그라면 다 됐습니까 아닙니다. 진리다 그러면 진리인데 그 진리 속에 근원이 뭐고? 피의 역사다 피의 역사다 예수님의 대속하신 그 죽고 부활하신 사활의 역사다 그러면 믿을 수 있습니다. 가다보니까 마구 운동이 겸하고 굉장하기는 하지만은 진리가 없어요 하나님의 진리냐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막 다퉈서 진리로 죽고 살고 진리 가지고서 마구 쪼개고 진리가지고 이래가지고 지금 시비곡적을 가지는 진리를 가지고서 뚜렷이 진리를 가지고 마구 판단해나가는 그 진리의 거슬리는기 하나도 없는 이 진리라는 진리가 없으면 그 까짓거 다 죽은 것이요 아무리 커도 그거는 갖다가 발아래 밟고 침을 뱉아 버리야 됩니다. 예.
이거는 다 사망들이다 대 유혹들이다 이 사탄이 그 양의 껍질을 입은 갖다가 대사탄이다 이것은 저버리야 됩니다. 그러면 이 진리를 가지고 마구 쪼개고 진리를 진리를 가지고서 조개서 이 교리 신조를 가지고서 성경이 이렇고 저렇고 막 성경을 쪼개댑니다. 이래도 그 속에 피의 감격한 주님의 피와 살이 이 대속한 그것이 근본 주체가 되가지고서 거게서 번져 나온 것이냐 할 때에 그것이 없으면 그것도 다 고급 미혹자들입니다. 고급 미혹 자요.
고급 이단자들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속에 예수님의 피와 살에 감격해 가지고서 이것이 보니까 하다 보니까 피 증거 하다보니까 예수님의 살 증거 하다보니까 예수님의 증거 하다 보니까 갖다가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결합된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상관을 가지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람들과 상관을 가져서 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게 접하는 것도 예수를 통과해 가지고 접하고 인간을 접하는 거도 예수를 통과해가지고 접하고 예수 안에 있는 그것이라면 그기 생명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별해야 되는데 요새는 그걸 구별하는 것이 아주 교회들이 그만 다 던져버렸습니다. 던져버렸어. 이러니까 여게 있는 설교를 갖고 가 들으면 그 사람들이 막 듣기를 원한다 하는데 이 게을을 부려서 나도 탈이요 아 때가 되면 아 이 테이프한 것을 녹음한 것을 이것을 좀 서서이 시간을 정해놓고 기독교 방송에서든지 어느 시간을 지금 매일 어느 시에는 그 방송이 있다하는 그것을 할라고 지금 인제 이걸 해야 된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아직까지 그 테이프를 수정하는데를 물으니까 있답니다.
그 뭐 긴것도 좀 좁힐수도 있고 딴말은 못 넣지만은 또 아 어 이 소용없는 갖다 이런 소리도 없애고 그래서 하는 그런 곳이 있느냐 하니까 있다고 그걸 주면 해 가지고 오겠다고 하는 것을 아직까지 내가 그걸 주지 안했습니다. 이래서 아무래도 세계 교회가 살리는 것도 한국교회를 살리는 것도 예수님의 피요 살입니다. 딴 거는 없습니다. 거게서라야 하나님이 우리와 연결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수 있지 그거 없이는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제사 드리는 걸 말할라 했는데 또 시간이 다가서 그 혹 시간이 있으면 오늘 저녁에 할란지 모르겠습니다. 없으면 내일 아침에 하든지 우리가 아무래도 산제사를 드리야 되는 것.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믿음을 구한 것은 요때만 구했습니다. 내가 뭘로 알리이까 업을 누리게 한다는 그 말은 고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부터 죽 내려온 그것을 다 포함해 가지고 마지막에 결론을 들어서 말만 하는 것입니다. 이럴때에 내가 뭘로 알리이까 그 말은 자기가 이것만으로서는 완전한 신앙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한 신앙이 될 수 있는 신앙의 힘을 줘서 신앙의 근거를 신앙의 증거를 신앙을 믿을 수 있는 그거 믿음의 도움이 되는 그런 근거를 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네 근거를 달라고 말하는기라 이럴 때에 짐승 잡아서 제사 드리라 이랬어 응 짐승 잡아 제사드리라 그 짐승은 뭐이지요? 예? 그 짐승은 뭐입니까? 누구를 상징 누구의 모형입니까? 그 짐승은 예수님의 몸이십니다.
도성인신 신인양성 일위이신 예수님의 몸을 모형한 것입니다. 그 짐승은 예수님이요. 그 짐승을 아브라함이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을 때에 그 큰 믿음을 줘서 다시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에 대해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님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됩니다. 예수님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되요 예수님을 죽여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야 됩니다. 응 예수님을 우리가 죽이기는 죽여 놨는데 죽인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죽인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가 죽인 것을 분명이 깨달아 예수님을 자기가 죽인 것을 분명이 깨닫고 예수님이 저 때문에 부활한 것을 분명히 깨달으면 깨달아 여게 감동이 되면 그 감동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연결을 가지고 역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