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22:50
믿음이 더해지는 방법
1981. 7. 18. 토새
본문 : 창세기 15장 6절-11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가 져서 어둘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지난밤에 증거한 대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방패와 지극히 상급이 되시겠다고 하신 이 약속이 아브라함에게만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계대된 것을 여게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씨 이삭이 그 자손이요, 또 예수 그리스도가 그 씨 자손입니다. 이 아브라함이 이 큰 구원을 자기가 누구에게 상속하겠습니까 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 물었을 때에 하나님은 이것을 아주 만족히 여기셨습니다.
껍데기만 보면 이것은 억지로 끌어다 덴 해석이지 아브라함은 자기 혈육의 자손 보편 인간들이 다 자기 손을 펴주기를 원하고 계대하기를 원하는 이와 같은 성질의 것으로 아브라함이 말했는데 그 이 두 가지 축복을 전달할 그것을 말했다 하는 것은 그것이 억설로 해석하는 것이다. 마귀는 어쩌든지 이렇게 해 가지고 이 사실을 우리들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할려는 것이 마귀의 총력입니다.
그런고로 사람들이 그만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이 두 가지 큰 구원이요 축복이요 큰 약속인 이 약속을 예사롭게 생각을 하고 그렇게 중하게 다루지를 아니했고 또 이 중대성을 느끼지를 못하고 그만 그대로 지나가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만일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아브라함이 자기가 육체의 소욕 육체의 소욕 그것을 하나님에게 구했다고 하면 육체의 소욕을 구하는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그 씨 이삭보다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땅의 것을 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이 두 가지 이 큰 것을 예사롭게 생각해서 이것 주셨을 때에 뭣 그 까짓거야 주나 마나 그거는 귓전에도 들어오지 아니하고 육체의 자손이나 주십시요 이렇게 아브라함이 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씨를 주실 것을 말씀하시고 또 그 씨 주시되 그 씨가 천하 만민이 만민에게 택한 자들이 그의 씨가 될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신약 성경에 보면 분명한데 이렇게 말씀을 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그것일랑 듣지 아니하고 육체의 자손이 그리 되겠다. 하는 이런 육체의 소욕만 가지면 이는 성경 전부가 다 가르치기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의 적인데 이랬을 때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참 자손이 많겠구나 인정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의로 여기시고 칭찬했다 이럴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이 말을 자꾸 하는고 하니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방패와 상급이 되어지겠다고 이렇게 하신 이 큰 구원이 아브라함 이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개별적으로 참 하나님 앞에 독특한 그런 충성을 가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줘서 개인은 이 은혜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아벨도 입었고, 노아도 입었고, 또 에녹도 입었고, 이렇게 입었지마는 이 은혜를 그 후손들에게 상속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상속을 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라.' 이 껍데기는 보면은 육적 같지마는 그 뒤에 그 육적 같은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족히 여기시고 아브라함에게 또 의로 여기시고 그에게 하신 그 일을 보면 그 하나님도 육적 하나님 아브라함도 육적의 그 사람 이렇게 참 오해 할 만침 그럴 때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 것도 다 그것이 지저분한 그저 하나 이야기 중에 하나 같이 보여지고 또 '상급 된다' '방패 된다' 하는 것도 그렇게 예사롭게 보여지지마는 신약 성경에서 증거한 것을 보면은 그때 아브라함이 성경에 나타내기는 이렇게 나타냈고 말은 외부적인 말만 기록되어있지마는 그 속에 하나님 만족하실 수 있는 그런 신앙이 속에 있었고 또 정평 정가가 속에 있었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어떻게 바라봤다는 그것을 여게서 알 수 있습니다. 그걸 자꾸 느끼야 됩니다.
왜 이렇게 이 두 가지 축복에 대해서 지난밤에도 조금 말하다가 말았는데 이 큰 것이 우리에게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이 상속됐다는 것, 아브라함이 지금 '내가 누구에게 상속을 해 주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축복해주니까 바로 그 대답하기를 말하기를 '나한테 무엇을 줄랍니까?' 이래놓고 '자 내 상속자가 나는 없으니 이 사람이 상속자겠습니까?'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말을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은 이런 많은 씨가 되겠다. 하는 그 씨는 곧 이상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삭을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그 혈육 계통을 통해 가지고 메시야가 난다는 이 메시야를 말해서 그 씨라고 말한 것입니다. 구약에는 자주 나왔는데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축복의 구원이 아브라함의 자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씨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씨요 우리는 예수님의 씨입니다. 예수님의 자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것이 어데서 시작됐는고 하니 이 두 가지 큰 축복을 하나님이 주시고 그때에 계기가 되고 그때에 동기가 되고 그때에 원인이 되어 가지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요 또 우리는 그의 자손이라. 다윗이 그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 그 씨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네 씨는 이러하다' 하는 그 씨를 가르친 것이 이삭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친 것이니 요 간단한 말씀 가운데에 얼마나 큰 것이 포함됐으며 또 그 씨가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은 이리 많은 수를 가지게 되고 그 씨가 이 구원을 상속할 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이 구원을 상속될 것을 이것을 말씀하신 이것이 뭐 신구약 성경이 다라 성경 다라고 신구약 성경 다라고 할 수 있는 이렇게 중대하고 큰 사건입니다.
사건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내가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 주겠다' 이렇게 하실 때에 그 여게만 보면은 '하나님이여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에게 뭣 주실랍니까?' 한 이 묻는 걸 보면 그때에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엉뚱한 육적으로 돌아가 가지고 육적의 자손만 있기를 원하고 했다고 하면은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할 수가 없고 그에게 이 씨를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은 이 큰 많은 씨 예수 그리스도를 그에게 주실 그런 말씀을 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아브라함이 육적으로 육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도 제가 못했을 것이고 껍데기로 말하면 육적의 자손만 이렇게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기시고 기뻐하셨다" 로마서 말은 아브라함이 그 믿으니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을 얼마든지 하고 그것을 우리 구원에 적응시키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에게 이 구원을 주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구원이 되신 이 구원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상속됐다는 것 아브라함의 씨가 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조상이 됐고 그 구원이 우리에게 상속됐다는 요것을 확실히 가져야 됩니다. 요것을 가지는 것이 우리에게는 건설구원의 뿌럭지입니다. 예. 건설구원의 기초가 되는 것이요. 암만 말해도 여게 대해서 뭐하려고 한소리를 또 하고 자꾸 그 말을 할까 아무런 뜻도 없고 의미도 없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요게서 뿌리를 박아야 됩니다. 요것이 근거입니다. 요게 중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서 굳게 잡을 것은 이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 되는 되겠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희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 되겠다. 하신 이 큰 구원이 우리에게 상속된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네.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방패와 상급 여게 대해서 좀 간단하게 조그만 더 증거하고 우리에게 닥치는 현실은 받드시 해와 유익, 파괴와 건설, 또 뽑는 것과 심는 것 이 양면을 가지고 있는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 현실로써 이 양면을 가지고 안한 현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현실이든지 이 양면을 가졌습니다.
가졌는데 이 양면에 파괴 건설 이것은 이 파괴를 인간으로써 방어할 자 하나도 없습니다. 이 파괴를 인간으로 방어할 자 하나도 없고 또 건설을 인간으로 건설할 자 하나도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 혼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혼자만이 우리 현실 현실을 닥치는 그 현실에 파괴를 방어도 하나님 혼자만이 할 수 있고, 건설도 혼자만이 할 수 있고, 또 해도 해를 방어하는 것도 하나님 혼자만이 할 수 있고, 또 그 현실에 있는 유익을 유익으로 취하는 그것도 하나님 혼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뽑아버리는 것을 방어할 수가 있고 또 심는 이 일도 심는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다 해로운 것, 유익된 것 이 두 가지 양면을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깊이 자꾸 느껴지고, 느끼고 자꾸 새겨야 되지 그걸 말을 하면 한이 없는데 그저 말 안해도 알아야 될 터인데 한번 말하면 자기가 참 깨달으면 놀랠만한 그 문제인데 이 현실이라 하는 거는 언제든지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양면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으로서는 현실에 있는 해를 방어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방어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방어할 만한 실력도 없습니다. 방어해야 할 줄 아는 '이거는 해다' '이걸 방어해야 되겠다.' 하는 그걸 아는 자도 없습니다. 인간의 현실에 있는 해를 아는 자도 없고, 해를 방어하고저 하는 자도 없고, 방어할 실력을 가진 자도 없고, 방어한 자도 하나도 없습니다. 이거는 하나님만이 방어할 수 있습니다.
또 현실에 유익이 있는데 영적 유익, 육적 유익이 있는데 이 유익이 있는 줄을 아는 자도 하나도 없고 인간으로서는 이 유익을 취할라고 하는 자도 없고 유익을 취할만한 실력 가진 자도 없고 유익을 취한 자도 하나도 없습니다. 요거는 순전히 하나님 단독히 하지 하나님만 하지 아무도 못합니다.
이제 이 큰 것이 우리에게 상속됐습니다. 하나님만이 혼자 하실 수 있습니다.
있는데 이것을 우리가 믿음만 가지면 믿음만 가지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만 가지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실 수 있는데 믿음을 가지지 안했을 때에는 하나님은 이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는 이 방어할 것을 실상으로 방어하시고 또 유익되게 할 것을 실상으로 유익되게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기에 요것이 상속 아브라함에게 참 이 귀한 것이 아브라함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서 허락이 됐는데 이 허락을 또 이 자손에게 상속 시켜서 물려줄라고 이렇게 하는 그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이 만족하실 수 있는 그 계대해서 상속하고져 하는 그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걸 만족하시고 이것을 상속하실 때에 믿음으로 상속했습니다. 믿음으로 상속하고 믿음의 자손이 믿음으로 이것을 상속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우리가 자손됐고 믿음으로 우리는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 됐고 믿음으로 이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허락한 이 큰 것이 우리에게 상속이 되어서 우리의 것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우리 것이 된 이것을 굳게 잡고 우리가 우리 것 된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요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된 이 약속으로 하나님이 선포로 상속으로 우리의 것 된 이것을 내가 믿음만 가지면 요것이 실상이 나에게 되어집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는 언제 일 년에 한 번 닥치느냐 십 년에 한 번 닥치느냐? 언제 하나님이 내 방패가 되어 가지고 나에게 해를 방어해 주시는 이 하나님으로 역사하시는 이 역사가 일년만에 한 번 필요할까 십 년 만에 필요할까? 매 현실마다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매 현실마다 우리에게는 필요한데 그 매 현실은 뭐 있다 말인가? 매 현실은 우리에게 육적 해와 영적 해가 현실마다 들어있습니다. 또 육적 유익과 영적 유익이 현실마다 들어 있는데 들어 있는 이 해는 누가 이것을 방어해서 제거해주며 들어 있는 유익은 누가 취해 줄거냐? 하나님 외에는 방어할 자도 없고 취해 줄 자도 없는데 하나님 한 분만이 이 일을 가능할 수 있는데 영원한 해를 누가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방어 못합니다.
이 영원한 사망도 영원한 해가 되겠습니다. 또 영원한 지옥도 영원한 해가 되겠습니다. 또 영원한 수치도 영원한 해가 되겠습니다. 하늘나라에 가기는 갔지마는 그 영원한 영광을 빼앗긴 그것도 영원한 해가 되겠습니다. 또 하늘나라에 영원한 영광을 취하는 그것도 유익이 되겠습니다. 그 현실에 다 있습니다.
현실에 있는데 현실에 영원한 해를 누가 방어하며 영원한 유익을 누가 취해줄 수 있느냐? 하나님만이 영원한 해를 방어해 줄 수 있고 영원한 유익을 취해줄 수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해, 세상 해, 영원한 유익, 세상 유익, 다시 말하면 신령한 해, 신령한 유익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 현실 현실에 이것을 해 주시도록 요렇게 하는 데에는 우리는 하나님이 해주시도록 되어 가지고 있는 이 계약도 받았고 이 큰 축복의 구원을 받기는 받았는데 내가 다만 믿음으로 받았기 때문에 네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요 역사를 하tu 가지고 현실 현실마다 육적 해 영적 해 다 제거되고 육적 유익, 영적 유익이 우리에게 오도록 되는 요것이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믿음 외에는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요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하나님은 요 일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현실에는 이렇게 이해가 참 세상 영원에 이 이해가 들어 있다는 것, 요 현실에는 들어 있다는 것, 들어 있는데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이 해가 하나님만이 이 해를 방어할 수 있지 아무도 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요 유익을 우리 유익으로 취해줄 수 있는 요 유익을 내가 믿기만 하면 고 현실에 하나님이 '요렇게 해라' 하는 고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고걸 바로 찾아 가지고 고대로 시행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찾는 요것은 요 믿음을 만드는 요것을 찾은 것이요.
요 믿음을 만들었을 때에 하나님이 내 현실에 직접 일해 주시 가지고 그 성과를 내가 내 것이 되도록 하는 요것이 요 현실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과 고대로 내가 순종하는 이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요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성경에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것을 요걸 말하는 것이고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하는 고것이 요 순종은 다 한다 그말이오. 해 다 방어했으니까 해에 대해서 다 방어했고 유익에 대해서 다 취했으니까 다 한 것 아닙니까 금생 내세에 다하는 것입니다. 요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하고 또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에게 '무엇 줄랍니까?' '여게 이 계대를 줄랍니까 저 계대를 줄랍니까?' '무엇을 줄랍니까?' '이 큰 복을 어데 무엇을 줄랍니까?' '이 계대를 줄랍니까 저 계대를 줄랍니까?'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은 네 계대자가 이렇게 숫자가 많을 예수 그리스도를 도성 인신을 너에게 줄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천하의 만민이 너로 인해서 구원 얻으리라' 하는 이 큰 것을 아브라함에게 허락해 주셨으니 그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이 큰 구원을 둘을 얻고 이 구원에 대한 관심을 어떻게 가졌기에 이 구원을 상속하려는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만족이 됐기에 하나님께서 아니라 네 몸에 씨인데 씨로 되는데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은 이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씨로 나 가지고 하나님이 도성인신하신 그 하나님이 네 씨가 되 가지고 천하 만민을 이렇게 이 구원을 줘 가지고 너로 말미암아 난 그 계대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라는 것을 구약에다 말해놨습니다. 아브라함의 씨 곧 동정녀 마리아를 말했습니다. 이렇게 이 큰 상속을 많은 상속을 참 위대한, 권위있는 이 상속을 아브라함에게 줬습니다. 상속을 줬습니다.
그러면 여게서 우리가 깨닫을 것은 우리가 전도를 해 가지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그것이 아브라함이 이 구원을 상속시킬라고 하는 내 상속자가 누가 되겠습니다.
엘리에셀입니까 내 집에서 기룬 자들입니까?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 간절히 소원하는 그 소원을 만족히 여기시고 이삭과 백세된 그 아브라함 늙어 쪼그라진 그 할머니에게서 이 씨를 주시는 것과 그것보다도 이 씨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 가지고 만민의 조상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조상입니다. 우리는 자손입니다. 예수님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이렇게 큰 상속자를 아브라함에게 주신 여기에서 우리가 우리의 계대자를 우리가 찾는 건데 목회자가 아무것도 없는 그 지방에 가 가지고 전도해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을 만들려는 그것이 곧 자기가 받은 이 도의 계대자 이 도를 받아서 보존할 자 이 자를 찾는 것 아닙니까? 이거 찾는 다는 것 인식이 됩니까? 자기가 육적으로 자손을 놔낳지마는 이거만으로서는 도리어 "젖먹이는 자가 화가 있다" "아이 벤 자가 화가 있다" 육적으로만 노아 가지고 그것을 이 상속자 이 자손을 만들지 못한다면 믿음의 자손을 만들지 못한다면 그는 다 화라고 했는데 그 화지요. 그 상속시키지 못해서 그것이 지옥에 가 있으면 그 지옥에 안 보이는 게 아닙니다. 화가 되지요.
이러니까 자손에게 어쩌든지 자기가 모신 하나님, 자기가 받은 바의 그 축복,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실 것을 소망하는 그 소망을 자손이 소망하고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소망과 전부가 되셔 가지고 역사하시는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역사의 축복이 자손에게 계대되어서 그 자손이 이것을 받는 그 자손 되기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자녀가 신앙의 사람되기를 원하는 것 아닙니까? 그거 아닙니까? 왜 그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느껴지지 않는 게 아무것도 없소.
느끼면 느끼는 그 표가 눈에도 나타나고 이 피부에 나타납니다. 아무 감각이 없어요.
여러분들에게 암만 내가 말해야 나 혼자만 말하고 있지, 이렇게 해도 왜 그것이 안 되느냐? 왜 개척교회에서 개척교회를 가서 하는데 왜 개척교회가 안 되느냐? 또 목회를 하는데 왜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느냐? 내가 원하는데 왜 그 사람이 안 되느냐? 안 되는 그것은 요 아브라함의 이 평가성 아브라함의 이 보존성 아브라함의 이 상속성 요것이 있어야 요걸 가지고 하나님이 일하시는데 요 점수를 보시고 요 중량을 보시고 하나님은 거기 따라서 일을 하시는데 요 중량이 우리에게 없으면 껍데기라 암만 돌아다녀야 소용없습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말한 것을 껍데기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니요. 그 참 뭐 믿음의 조상의 가치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요새 아들 없으면 요새도 모두다 아들 없어도 양자할라고 하지 안하고 없으면 없는대로 딸이면 딸대로 하나님이 주신대로 하고 또 아주 없으면 없는 대로 이러는데 믿음의 조상이 되 가지고 아들이 없다고 이래 가지고 걱정한 그것뿐이라면 가치 없습니다.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큰 것을 그에게 맺기지 않습니다.
이 큰 것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겼을 때에 우리가 껍데기로 보니까 다 사람이 자기 된대로 해석을 합니다. 모든 일을 볼 때에 마음 집어서 남의 말한다고 제가 그런 사람이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해석을 하게 됩니다. 제가 제게 되어 있는 대로 모든 보는 것을 그대로 해석하요. 자기 주관대로 모든 것을 해석한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가 우리 주관대로 보면 그 아브라함이 인간 주관대로 봐서 이래보면 무가치한 것이지마는 하나님께서 응한 것을 봐서 아브라함이 어떤 요구를 했고 어떤 정신이 됐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브라함에게 어떤 의가 있기에 어떤 가치성이 있기에 어떤 실력이 있기에 이 큰 것을 아브라함의 어깨에 딱 매어 주면서 '아나 아브라함아 받아라' 하며 아브라함에게 줬든가 그말이오.
이 분량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곧 전도의 실력이요 목회의 실력이요 인간을 구원한 구원의 실력입니다. 일은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해주십니다. 아무도 할 이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하는데 하나님이 와서 일하도록 또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러서 내가 가진 이 구원을 상속하도록 이렇게 만드는 데에는 하나님이 하시지 아무도 할 사람 없습니다.
"아버지가 보내지 안하면 올자가 하나도 없다" 했는데 이러니까 교인을 서로 쟁탈할라고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면서 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말고 아무리 훼방을 해서 누가 말하기를 '우리를 이단이라고 한다고' 엊저녁에 말들으니까 '백파가 이단이지마는 교회가 부흥이 자꾸 되니까 좋은 점을 우리가 본 받아야 될 것 아니냐' 고 말을 빼고 하면 하나님이 축복을 하지마는 고 말을 빼지 안하고 했을 때에 그 본받는 데서 복은 가지마는 고 사람에게는 그 만침 가려져 어두어집니다.
이러니까 자꾸 백파 백파 그 백파라고 이름을 그 지었는데 그 백파가 여러분들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요. 아 새까만 흑파보담은 흰 게 안좋소. 흰 게 좋지. 뭐 흑파보다야 백파가 좋지 나쁠 게 뭐 있는가요. 그래도 그거는 그 사람들이 지었지 우리가 지은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지었지 우리가 지은 건 아니요.
지금은 다 모두 뭐 무슨 파니 무슨 파니 다 있는데 이러니까 전 여기와서 같이 들었는데 교인은 서이를 들었는데 자기는 찍해야 말해야 둘을 말하면 시시하이 나만도 못 하는데 참 월급주기 아깝다. '뭐 교역자, 무슨 교역자' 이렇게 멸시와 천대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니까 요렇게만 하면 여 교인들 데리고 옴으로 자꾸 거서 배우고 또 여와서 새로 두 번째 배우니까 더 낫다 이래 가지고 얼마나 그 교인들이 그 교역자를 귀중히 여길 것이며 은혜를 받으며 또 그 교회를 떠나지 안 할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이러니까 잘 받아야 된다 이거요. 이제 조는 사람 때문에 엉뚱한 말이 됐어. 요거는 외의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참 뚱딴지 같은 말 같은데 이 큰 재물 주니까 말도 없이 나에게 무엇을 줄랍니까 어떤 계대자를 줄랍니까 이럴 때에 예 백세에 이삭과 예수 그리스도를 줘서 천하에 역사에 있는 네 받은 이 하나님과 이 구원을 소유할 상속자 계대자가 하나님의 별의 수와 같이 많게 해주겠다 하는 이 하나님의 주심을 아브라함이 무엇 가지고 받았느냐? 요것을 우리가 깨닫고 아브라함의 요 신앙 요 심정을 가져야 그 사람의 설교에 그 계대자가 생길 것이고 또 상속자가 생길 것입니다. 호별 방문해도 거기서 생기게 되고 또 개척교회도 거 생기게 되고 그 양이 있는 것 만치 그 교회는 부흥됩니다.
제가 지난밤에 어떤 사람 만나 가지고 사직동교회가 이제 우리 진영에서는 양적으로 말하면 제 이 위를 차지했더라 내가 그것을 말했습니다. 제 이 위를 차지했더라 뭐 다른 것 이런 것 저래 보지마는 제 이 위 달산교회가 제 삼 위를 차지했습디다. 이렇게 어떻게 해서 어떤 사람은 가는 곳마다 자꾸 올라가고 부흥이 되는데 어떤 사람은 자꾸 내려오느냐 그 말이오. 왜 올라가고 부흥이 되는데 어떤 사람은 자꾸 내려오느냐 그 말이오. 왜 올라가고 내려가는 게 어디 있느냐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이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 된 거와 꼭 같은 존재입니다. 다른 성질 없소. 거기 있습니다.
지난밤에도 내가 최권능목사의 말을 했지마는 그 일하는 사람을 방해하는데 무슨 전도가 되겠소. '예수를 믿었으면 좋을걸' 하는 그 무슨 전도가 돼. 외부의 말은 그렇지마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에게 넘침이 가득 참이 있어 가지고 그 말을 통해서 거기 찌를 때에 그 처녀가 고만 즉시 병이 들어 가지고 다시 예수를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것이 도화선이 됐고 여게 있으니까 이렇게 말해놨든지 저렇게 말해놨든지 도화선으로 이 구원이 그에게 전달되서 불이 붙었던 것입니다.
그 뭐 최권능목사가 전도한 그 말들을 들으면 참 은혜되는 일이 많습니다. 그 전한 것이 참 두루뭉시같은 뺨 맞을 전도를 했소. 뺨 맞을 전도를 했지마는 한 마디 하고 쫓기 달아난 뒤에도 그가 전한 씨는 심어져서 싹이 나 가지고 삼 년만에는 다 교회가 됐어. 그래 생전에 칠십 몇 교회를 세웠어.
그것이 외부에 사람이 볼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마는 그 속에 하나님이 만족하실 수 있는 이 구원의 가치를 참 알아서 그 인간으로서는 높이 평가했고 인간으로서는 아브라함보다 더 이상 평가한 사람이 없이 평가를 했고 그 씨 예수님은 더 평가를 해서 모든 걸 다 기울렸고 이 평가를 했고 '이 가치 있는 이 구원을 어떻게 네가 전달할까?' '어떻게 상속할까?' 하는 요 구원의 가치성에서 상속하고저 하는 고 마음도 생기지는 요 두 가지 그에게 충만했을 때에 그가 전도 안 했지마는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은 많은 수를 그에게 허락해 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내 현실 현실마다 내게 오는 모든 해를 다 방어해 주시고 내게 올 유익을 다 내것이 되어지도록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이 일, 육과 영의 금생과 내세에 이는 참 말할 수 없는 지극히 큰 것인데 이 지극히 큰 이 사실의 가치를 자기가 알고 있는 것 만치 전도자의 실력이요 목회의 실력이요 또 이 가치를 안것만치 자기는 이것을 보존하고 상속시키고저 하는 마음이 가치를 안것만치 상속시키주고저 하는 고 강력이 실력이 생기지고 고 원하는 고 힘 양만치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렇게 모든 걸 주실 수 있는 그 상속하고저 하는 그 뜨거운 마음이 아브라함에게 있었고 가치성을 가졌기 때문에 이것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방패와 상급이 되는 요 진리를 우리가 요게서 굳게 깨닫고 이것은 뭐 간단하게 말했지마는 여러분들에게 다니엘도 고 현실에서 현실에서 믿음을 가졌을 때에 하나님이 그의 방패됐고 그의 상급됐습니다. 엘리야도 그러했고, 사도 바울도 그러했고, 베드로도 그러했고, 모든 선지들도 다 그러했고, 성도들도 다 자기 현실에 참 생벼락같은 그런 다시 역사에 유가 없는 그 참혹한 멸망 고것이 자기에게 온 고게도 믿음을 가졌을 때에 하나님은 지체하지 안하고 그에게 방패가 되어서 해는 방어했고 그것이 들어서 큰 유익이 됐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인민군이 총살해 죽였는데 총살해 죽였는데 감옥에 갇힌 그 순간 순간 그 현실 현실 그것이 뭐 손양원 목사님 좋으라고 그리 감옥에다가 가두워 놨겠습니까? 좋으라고 가서 총살했겠습니까? 했지마는 그 해할라고 했지마는 손양원 목사님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해는 하나도 안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총살해서 총에 맞아 죽었지마는 총에 맞다 총으로 죽인 그 해는 하나도 없었고 총에 맞은 죽은 그 해는 하나도 받지 안했고 총에 맞아 죽음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큰 상급으로 그것이 변해졌습니다. 변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현실 현실에 이렇게 되어지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할 것 요게서 굳게 잡아야 됩니다. 요것이 아브라함의 그 간청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우리에게 요것이 상속된 것 요 계대된 것 요것을 우리가 또 확실히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들리지지 안해 이것이 들리지지 안하고 그저 껍데기 말만 이래하고 아브라함이 껍데기 말한 그까짓게 무슨 가치 있소. 예 그 속에 하나님이 감탄할 수 있는 속에 알맹이가 있었다 알맹이 그걸 가지라 그걸 가지라 그말이오. 지금 감탄할 수 있는 속에 알맹이 그게 있었어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설교하는 껍데기 설교 한 그거는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요. 그 속에 하나님 보실 때에 하나님이 감탄할 수 있는 알맹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알맹이 그게 있어야 된다 말이오. 그게 있어야 돼. 그게 없으니까 그게 없을진데야 녹음 갖다놓고 하지 뭐 하려고 사람 세울 필요가 뭐 있겠소 있기를 셋째는 요 아브라함이 어떤 심정을 가졌기 때문에 계대가 됐느냐? 어떤 심정을 가졌느냐? 네가 어떤 심정을 가졌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느냐? 네 구역이 부흥이 안 되느냐? 네까짓게 천 번 만 번 가 말해도 왜 그 말이 효력이 없느냐? 그를 하나님께서 네 손에 붙여서 줄만한 네 속에 불이 없다 뜨거움이 없다. 그 구원이 없다. 네 속에 구원이 없다. 구원이 비었다. 입술로만 말하지마는 네 속에 구원이 없다. 그 구원의 힘이 없다. 능력이 없다. 하나님이 감탄하면은 네 속에 네가 가진 구원이 없다. 네가 구원은 하나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입술만 일생 두고 설교해 봐라 가는 곳마다 교회는 내려앉지 가는 곳마다 네가 설교는 대예배 다 설교하고 새벽예배 암만해도 교회는 내리 앉는다. 네 속에 빈깡통이니까 거기 마귀나 당겨버리고 그거 마귀나 주지 딴 거 줄 게 뭐 있느냐? 요걸 우리가 요게서 느끼야 되겠고 고 다음에 또 보면 아브라함 그걸 생각지 못했습니다. 네가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해 가지고 이 가나안으로 인도한 것은 이 땅에서 네가 이 업을 누리라고 이 땅을 네 너의 업으로, 업은 사업이라 말입니다. 네 업으로 너에게 줄라고 인도했다 이랬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무엇으로써 내가 이 사실을 인정하도록 증거를 뭘 줄랍니까?' '무엇을 가지고 나에게 알게 해주실럽니까?'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 모르는 데에 이 큰 구원은 이 상속될 사람만 아니라 고 장소가 있어야 된다. 요것이 오늘 아침에 말한 내나 현실입니다. 요 장소가 있어야 된다고 아브라함이 생각지 않는 것을 '요게서 네가 이 업을 누린다' '요게서 네가 이 업을 누릴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해 놓은 장소에서라야 업을 누리지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정해준 장소가 아니면 안 됩니다. 그들은 제한된 장소였지마는 우리에게는 현실, 현실을 우리가 받는 것이 '요 현실을 네 업으로 줬다' '요게서 나를 섬기도록 줬다' 요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현실을 주신 요것이 자기가 방패라는 것, 인정하는 것, 또 보존 상속에 대해서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것, 자손에게 계대하는 것, 그 다음에는 중점이 뭐이냐 하면은 요 업을 누릴 수 있는 장소가 '시간이다' '공간이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요것이 어긋나면 안 됩니다. 안 되니까 고것이 뭐이냐? 우리에게 현실입니다. 바로 현실 예.
그랬는데 아브라함에게 뭘로 이것은 내가 알겠습니까? 여게 대해서 아브라함이 이렇게 자기가 확신을 가졌지마는 확신을 가졌지마는 이 업으로 누릴 것을 뭘로써 알겠습니까 하는 것은 껍데기만 들으면 거기서 살 때에 무슨 농사 지 가지고 밥 사느냐? 그걸 말하는 것 아닙니다.
네 그 신약에서 보면은 아브라함과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속에 하나님하고 둘이 영통이 되어 가지고 말하는 것은 그 안에 어떤 걸 말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이런 신앙을 가졌지마는 하나님 앞에 '나에게 더 믿어질 수 있는 나에게 더 믿어질 수 있는 믿음이 더 해지는 믿음이 더해지는 것을 뭘로 주실랍니까' 물었습니다. '믿음이 더해지는 것을 뭘로 주실랍니까?' 아브라함이 그것을 물은 것이 여 거기서 뭐 저 농사짓고 하는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자기 생시에 가나안에 나그네로 지냈고 우거 했지 거 가지고 자기의 땅으로 상속받아 가지고 있지를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기 대해서 조금도 동요가 없었고 터가 있는 그 생을 바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껍데기 보기에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마는 그 알맹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통하는 것은 이것을 탁월한 아주 고차원에서 지금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물으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이 짐승을 잡고 새를 잡아 가지고 제사를 드리라' 이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네 요것은 시간이 없으니까 여러분들이 가서 우리가 믿음이 더해지는 것 우리에게 자꾸 속에 확신이 생겨지고 또 자기가 본거 같이 그렇게 자기 속에 요 하나님을 참 자기 방패로 상급으로 역사하도록 하는 요 믿음 또 요것을 자기 자손에게 계대해주도록 하는 요 믿음 요 믿음이 더 해지도록 요 믿음이 강해지도록, (○○○목사님은 잠에 깊이 들었는데 고걸 벗어나지 안하면 교회 부흥 안 됩니다. 고걸 벗어나야 됩니다. 그 잠들게 하는 마귀 고놈이 들어서 교회 방해하는 놈이요, 그놈이 들어서 나에게 지옥을 만들어 주는 놈이요, 내 천국을 빼앗기게 하는 고놈입니다. 고걸 꼭 그 지금 오늘 지적만 했으니까 '요놈이 내 원수로구나' '요놈이 왕 원수로구나.''원수 중에도 요거 왕 원수로구나' 그게 여기에서는 졸게 하지마는 그 나 혼자 성경 진리를 깨닫게 할 때에는 고 삐뚤어지게 하고 인본으로 하고 고만 그 껍데기로 해버리고 알맹이 모르게 그래 한다 그말이오.) 아브라함이 "내가 뭘로 알리이까" 그 말은 자기가 뭘로써 증거를 받겠습니까? 그말이오. 뭘로써 이 사실을 더 믿을 수 있는 확신을 주겠습니까? 뭘로 확신을 내가 가지게 되겠습니까? 네가 믿음이 더해지는 방법 '내가 확신을 가지는 것은 제사를 드리라' 요거 말했습니다. 제사 드렸을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가지고 그 제물을 태우는 데에서 아브라함에게 확신이 더 생겨졌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는 믿음이 더해지는 방법은 요 제사 드리는 것입니다. 요 제사 드리는 것은 예수님이 이 짐승 대신 요 짐승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한 형을 짊어진 이 짐승이요, 또 우리가 행한 것을 대신 짊어지고 행하신 짐승이요 제물이요, 또 우리가 원수되어 있는 것을 대신 화친케 하는 그 화친의 제물인데 요 대형의 도성인신하신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이분이 나를 내 대형, 내 대화친의 화목의 제물된 요것을 네가 하나님에게 바쳐라 요것을 바치라.
이래 가지고 대형으로써 사죄, 대행으로 칭의, 대화친으로써 새생명 요것을 하나님이 받히라고 요것을 바치는 것 요 세 가지를 자기가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 요 세 가지를 자기가 가지는 것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 사죄 받았으니 사죄 바치는 것, 칭의 받았으니 칭의 바치는 것, 화친 받았으니 화친 바치는 것 요 바치는 것 요 생활 요것이 믿음이 더 하는 유일의 방법이고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 "먹는 자마다 다 영생이 그에게 있고" 먹으면 고 먹은 사람은 영생이 있고 영생이 있다. 요 "나로 인하여 산다" '나로 인하여 산다.' 나로 인하여 살면 완전 믿음이지 그 이상 뭐 있습니까? 믿음이 더 해지는 방법은 요게서 가르쳤고, 고게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고것이 하나님 위하는 것은 고 외에는 위하는 게 없습니다.
사죄 칭의 새생명 요 노래 부르는 것이 하나님 노래 부르는 것이요. 요거 찬양하는 것 하나님 찬양하는 것이요. 요것을 바쳐서 요 생활 바치고 요거 하는 것이 요것이 하나님 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위하는 것이요 요것이 하나님 위하는 것입니다. 요것이 하나님에게 전적 위함을 받는 것입니다.
네 이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도가 끝없는 그 접을 가지고 껍데기 속에 알맹이 알맹이 속에 알맹이, 알맹이, 알맹이 이것을 해서 전하는 것도 자기 인간의 방언으로 전할 수 없는 그것을 인간의 방언으로 전할 때에 전할 때에 그것이 신령에 속한 것이지 인간의 방언으로 다 전할 수 있는 다 있는 그것만은 아무 소용없는 일인데 그것만은 소용없습니다. 그 속에 인간의 방언으로 전할 수 없는 것 성신의 감동이 아니면 알아들을 수 없는 것 그게 전하는 것이 생명의 도입니다.
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다. 신구약 성경을 백독을 하고 외운다 해도 그 사람은 이 도에 대한 이 생명의 복음으로서는 하나도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사람 될 수 있습니다. 고거는 성령의 감화로만 알 수 있습니다. 고거는 인간의 방언이 전하는 것 아닙니다. 인간의 말로 전하는 것, 인간의 말로 전하는 이 속에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할 수 없는 영감 역사가 또 있어야 된다 그 말이오. 그렇지 안하면 다 헛일입니다.
이러니까 돌아가서 믿음이 더해지는 것은 이 잡아서 제사 드리는 것 제사 드리는데 고 제물을 솔개가 와서 덮칠 때에 솔개가 덮었으면 재물은 부정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 솔개를 아브라함이 쫓아라.' 불이 내려올 때까지 쫓았습니다. 우리가 요거 예수님이 제물되신 요 요것을 기념하라 했는데 기념하라 말은 고것을 계속하라 나타내라 그 말입니다. 요럴 때에 요것을 빼앗기지 안해야 되지 요것을 빼앗기면 헛일입니다. 솔개가 마귀요. 솔개가 오늘 이 제물을 방해하는 오늘의 마귀라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서 거석한 것을 기억하고 가 가지고 혼자 앉아 새김질 할 때에 속에 불이 일어나고, 뜨거운 열이 일어나고, 인간의 말로 암만 말해야 속에 있는데 이래도 말해보고, 농업으로도 말하고, 공업으로도 말하고, 상업으로도 말하고 별별 말을 해싸도 자기 속에 말로 할 수 없는 요것이 자기 속에 채여 가지고 요것을 더 이상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말로 자꾸 하지마는 인간의 말로 해도, 자꾸 하고 해도 요것이 전달이 안 되고 하기 때문에 하는 고 설교가 아니면 소용없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하 노트 필기한 꼭 그대로 해도 안 되는데' '이 설교를 잘 못하니, 하는 그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더니마는 그 사람이 지금 조금 맛을 봤는지 이제 그 설교에 가는 곳마다 은혜를 안 받고 교인들이 배척했는데 지금은 은혜를 받고 교회가 부흥이 되고 한답니다. 그 본인이 느낄 것이요. '아 설교에 이게 아니로구나' 하는 걸 그러면 속에 양 그것이 많으냐 아니냐? 거기서 능력입니다.
예, 한 십분 기도하고 권찰회 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