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22:42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믿음의 사람
본문 : 고후 5:1-7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떠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우리의 모든 이런 형편 저런 형편 온갖 형편을 우리가 가지고 사나 이 형편도 다 우리가 벗어날 것을 우리가 압니다. 또 우리가 세상적인 마음의 기능 몸의 기능을 입고 사나 세상적인 마음의 기능이나 몸의 기능은 아것은 다 벗을 것이요,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대로 하늘에 속한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을 입고 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도 바꾸어질 것. 또 우리가 살고 있는 처지도 바꾸어질 것. 또 우리가 입고 사는 마음의 기능이나 몸의 기능 그런 것도 다 벗을 것인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압니다.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어떤 세계 참피온을 땄다 해서 세계에 제일 유명한 그 기능도 그 사람이 죽을 때에는 다 벗고 갑니다. 하늘나라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마음의 기능이나 몸의 기능이나 우리 처소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나 이것은 다 벗을 것들이요 우리가 영원히 하늘나라 가서 살 때에 그때에 입고 살 것들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늘에 있는 그 영원히 가서 살 하늘나라를 우리가 준비를 합니다. 또 세상에 있는 이 형편 처지에서 살면서 이 처지를 떠나기 전에 하늘에 가서 내가 막상 어떤 처지에 살겠느냐 하늘에 가서 살 그 처지를 지금 우리가 마련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마음의 기능이나 몸의 기능도 이 기능을 벗어나기 전에 영원히 하늘에 가서 내가 입고 살, 하늘에 있는 마음의 기능 몸의 기능을 우리가 마련 할라고 세상에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 것을, 이 세상을, 세상에 있는 처지를 세상에 속한 기능을 벗을라고 하는 게 아니라 벗기 전에 어쨌든지 하늘의 것으로 덧입도록 할라고 우리가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벗기 전에 바꾸어야 되지 벗고 나면 바꾸지 못합니다. 벗기 전에 바꾸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속한 것은 다 죽은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죽을 것이' '오직' '죽을 것이' 4절 하반절에,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탄식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쉽게 하려 함이라' 죽을 것이라는 것은 차차 시간이 가면은 없어지고 다 제거될 것이라 그 말이요. 제거될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것이 될려고 애를 쓴다. 죽은 것을 산 자가 먹으면 그것이 산 자의 피와 살이 돼 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할라고 애를 쓴다' 그러면 죽은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과 끊겨져 가지고 있는 그것은 있는 것같지마는서도 시간이 지나가면은 다 죽어 버리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끊겨져 있는 것을 하나님과 연결 시킬라고 애를 쓴다 그 말이요.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된 것이 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마음의 기능이나 몸의 기능이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또 우리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처소 이것이 하나님과 연결된 처소가 되어서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한 것같이 내가 이 세상에 사는 처지 그것이 하나님과 연결된 처지가 된다면은 그것도 우리가 가지고 갈 것들입니다. '하려 함이라' 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우리는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냐? 세상에 사는 것은 벗을 세상 것을 입기 위해서, 벗고 갈, 이 벗어 버릴 세상에 속한 마음이나 몸의 기능을, 또 세상에 사는 이 처소를 잘 만들어 살라고 또 자기가 좋은 세상에서 살라고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할 일이 아닙니다.
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려고' 이것 뭐? 세상을 벗기 전에, 벗고 나면 영원한 세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영원한 세계를 이룰라고. 또 세상에서 필요하고 요긴하고 유명하게 쓰여지다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없어질 세상에 속한 마음의 기능이나 몸의 기능이나 이런걸 이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능이 없어지기 전에 하나님과 연결된 기능, 하늘에서 오는 하나님과 연결된 마음의 기능 몸의 기능, 마음의 기능이 뭐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마음의 기능을 입고 몸의 기능을 입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우리가 입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뭐인데? 마음이 마음의 기능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하나님에게 피동된 기능이라면 그 기능은 전지한 기능이요 전능한 기능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입을려고 다시 말하면 뭐인가? 그것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것이 하나님과 연결을 가질라고 하는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려고 세상에 살게 합니다. 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그러면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자꾸 이루도록, 이거 하라고 우리를 세상에 둬 둡니다.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가 이 일을 이루는데 우리는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는데 우리의 할라고만 시작 하는 것만 우리가 하지 할라고 시작만 우리가 하고 또 우리 힘대로 하려 그만 하지 과연 이 일이 가능하나? 가능 안 하다 말이요. 못 한다그 말이요. 우리는 우리 힘대로 하려고 시작하고 하려고 노력하면 이 일을 책임을 지고 이 일을 완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책임지우신 이가 있으니 누구냐 성령님인데 성령님에게 책임을 지우시는 하나님이시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신데, 한 몸이신데. 위만 셋이지 한 하나님이십니다. 위가 셋이라 말은.
위에 대해서는 책임도 있고 또 본분도 있고 자기의 모든 의무도 있고 자기의 모든 권세도 있고 그런 것을 가르쳐서 위라 이랍니다.
동장의 위가 있고 구청장의 위가 있고 시장의 위가 있고 대통령의 위가 있고 할 일.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이, 그 사람이 직장에서는 청장이라 이렇게 부릅니다.
또 그 사람이 사회에 대해서는, 사회에 대해서는 호주라 그렇게 부릅니다. '이 가정은 누가 주인이야?' '내가 호주입니다' 사회에서는 그 가정이 가정의 주인이 호주라 또 그 가정에서는 그 아내에 대해서 '이거 누구야?' '남편입니다' 이 아이에 대해서는 '이거 누구야'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렇게 그 직분에 따라서 아버지 호주 남편 청장 대통령 이거는 다 자기 지위, 자기 지위의 이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하나님이 이런 직책을 맡고 저런 직책을 맡은 그 직책을 맡은 게 다르기 때문에 위가 다릅니다. 한 하나님이 삼위라 그러면 한 하나님이 이런 일을 맡았을 때에는 이런 위로서 이름이 있고 저런 직책을 말할 때에는 저런 위로서 이름이 있으니, 우리에게 대속의 일을 맡으신 분은 성자의 위를 가졌고 또 대속의 위를 맡아 가지고서 십자가상에서 완성을 하신 그 일을 마지막에 마무리, 끝마무리 하는, 대속해 놓은 것을 우리에게 완전히 실질적으로 입혀지게, 실효있게 누리게 하는 그 부담은 누가 했느냐? 성령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하면은 삼위일체를 가르쳐서 하나님이라 이렇게 말 합니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님에게 예수님이 대속해 놓으신 그 공로로 말미암은 우리의 구원을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완전히 이루어지도록 하는 그 책임은 성령님에게 맡겼습니다.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절에 요 말씀을 지금 할라고 제가 오늘 이 봉독했습니다. 6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죽을 아노니'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는 주님하고 같이 살지 못합니다. 이 몸 가지고는 주님하고 같이 살지 못합니다. 왜? 이 몸은 벌써 십년이 지나가면 쭈굴쭈굴하게 달라집니다.
백년이 지나가면은 쭈굴쭈굴하게 달라집니다. 모세는 아주 기력이 강건한 사람이지마는서도 백 이십세가 지나고나니까? 다시 그 몸이 유지되지 못해서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우리가 늙지도 쇠하지도 더러워지지도 안하고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안하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되어야 그 몸 가지고 주님하고 같이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5장에 말하기를, 이 혈육의 몸은 하늘나라를 얻을 수가 없고 하늘나라에 가서 살 수가 없습니다. 왜? 너무 낡아지고 너무 무능하고 약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으면 억만 년 가도 늙어지지도 쇠하여지지도 안하고 억억 억억억만 년을 가도 늙어지지도 쇠해지지도 아니하고 더러워지지도 아니하고, 이런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아야 우리가 주님과 같이 살지.
그러기 때문에 그 몸으로 변화받아 가지고서 사는 것이 우리의 영원, 살 영주처요. 이것은 잠깐 이 몸을 입고 있다가 벗을 몸이기 때문에 이 몸을 상대해서 이 몸에 손해가 가나 이 몸에 유익이 되나 그것을 표준해서 살지 안하고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그 몸을 표준해서 산다 말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이제 이 세상에서 있는, 주와 같이 살 수 없는, 백 년도 입고 살 수 없는 이 몸을 표준으로 살기 쉽고 이 몸을 위해서 모든 것을 갖추어 준비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몸 가지고는 주님과 같이 못 살기 때문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그 몸으로 사는고로 신령한 몸을 지금 우리가 준비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7 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 요것을 오늘 아침에 말할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으로 우리가 하지 않는다 이런 소망이, 우리 소망이 땅에 있지 안하고 하늘에 있고, 우리가 마련하는 것이 땅에 있으면서 하늘의 것을 마련하고 땅에 이 처소에서 살면서 이 처소에서 살 터이니까? 이 처소를 잘 마련하는 게 아니라 이 처소에 살면서 영원히 하늘에 가서 살 그 처소를 우리가 마련하고, 이 세상에 있는 이 모든 기능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이 기능을 가지고 영원한 나라에서 있을 그, 영원한 나라에서 가지고 살 그 기능을 지금 마련하고, 우리가 이 세계에서 살면서 이 세상을 위해서 마려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히 살 영주처인 하늘나라를 마련하는 우리이기 때문에 이 일을 이루도록 우리를 돕는 그 보증자로 성령을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이 받은 구속을 완성시키는 이 일을 하는 일을 책임맡는 그 하나님을 가르쳐서 성령님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내나 한 하나님 하나님이 이 일을 맡을 때에는 이 이름을 말하고 저 일을 맡을 때에는 저 이름을 말하고 또 그 일을 맡을 때에는 그 이름을 말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이 이 일 할 때에는 성자라 이 일 할 때에는 성부라 이 일 할 때에는 성령으로 이렇게 말했으나 한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고로 이 일을 위해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증자로 주셨는데,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하늘의 것을 땅에 있으면서 마련하고, 썩을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 썩지 아니할 것을 마련하고,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을 동안에 하늘나라에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그러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이나 내가 가진 것이나 이 모든 이것은 다 벗을 것들이요 없어질 것들이요 다 나와 상관이 끊어질 것들이기 때문에, 이것이 끊어지기 저에 영원한 것을 지금 덧입어서 그것을 마련하는 우리이기 때문에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이 보증됐고, 책임졌고, 우리가 할 일은 뭐냐? 우리가 할 일은 '보는 것으로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해라' 요것입니다. 우리할 일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안하고 믿음으로 해라'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안하고 믿음으로 행하라' 그 말은 무슨 말이냐? 어제 로마인서 1장 17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제 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 이 새사람은 믿음으로 산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 그 말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대로 지식하는 것이 믿음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그대로 지식하는 것이 믿음의 지식이요. 세상 사람들이 가르쳐 주는 그대로 지식하는 것은 그것은 세상에게 배운 세상 지식이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고대로 지식하는 것이 믿음의 지식이요.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대로 하는 것이 믿음의 행위요. 또 하나님이 요런 사람 되라 하면서 당신을 가르쳐서 나를 닮아라 내 형상을 입어라 내 속성을 입어라 나를 닮아라 나와 같이 되라 하는 그대로 되는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믿음의 사람, 요것을 우리가 목적하고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가 세상 어떤 처지에 어떤 고관 대작의 처지든지 어떤 재벌가의 처지든지 어떤 빈곤한 자의 처지든지 그 처지는 다 벗을 것들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영원한 것을 마련합니다. 자기가 땅 위에서 가련한 처지면 가련한 처지에서, 아, 땅 위에 가련한 처지 하루밤 지나가는 것 이것도 사람이 곤고하고 무가치 하는데, 만일 무궁한 그 처지를 잘못 만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러니까? 땅 위에 빈곤한 것으로서 하늘의 빈곤을 생각하고서 하늘의 부요를 마련합니다. 땅 위에 좋은 처자를 가져서 영광이라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는 걸 봐서, 아, 하루밤 처지에도 좋은 처지 되니까? 영광이니까? 영원 처지는 얼마겠느냐, 좋은 자는 좋은 것을 가진 자는 땅에 좋은 것을 이것도 보니까? 가치 있는 것 보니까? 영원 나라에서 좋은 것은 얼마나 좋겠느냐, 좋은 것을 인해서 영원한 나라의 좋은 것을 더 동경하고 더 자기가 애착하고, 땅 위에 하잖은 것을 자기가 만났으므로서 무궁 세계에 하잖으면 어찌 되느냐 그래서 하잖은 데에서는 무궁세계 하잖은 것을 인해서 거기에서 떠나기를 힘쓰고 땅 위에서 좋은 것을 보면 하늘나라에서 그 좋은 것을 가지도록 노력하고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는' 7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한다' 요거 참 아주 중요한 말씀인데 요것을 우리가 뜻을 잘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믿음으로 행한다 그말은 내나 이제 말한 대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지식을 가지는 것이 믿음의 지식이요. 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의 행위요. 또 하나님의 그 형상을 내가 본받고 닮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이요. 사람이 믿음의 사람 된 것은 하나님 닮은 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러니까?, 이제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행하고 그러면 내가 지식이든지 행동이든지 사람이든지 땅의 것을 원형으로 삼아 가지고서 땅의 것을 본받고 땅의 것을 닮아가고 땅의 것을 배워가고 땅의 것을 표준 삼아 가지고서 가는 게 아니라 순전히 하늘의 것을 표준삼아 가지고서 그걸 따라간다, 사람도 하늘의 것을, 하늘의 누구? 하늘의 하나님을 표준삼아 가지고서 그를 따라간다 그를 닮아간다 그를 배워간다 내 움직임도 하늘의 움직임을 따라서 움직인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하늘의 인도대로 내가 따라서 행동한다. 지식도 하늘에서 가르쳐 주는 그대로 내가 지식한다 요게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치 아니한다' 요것이 문제입니다. 보는 것으로 행치 아니한다 그말은 내기에 보이는 그것에게 내가 피동으로 하지 않는다. 보이는 그것에게 배우지 않는다 보이는 그것의, 보이는 지식, 이 땅에서 보이는 그 지식으로 내 지식 삼지 않는다. 보이는 그것들이 나에게 인도하고 지도하는 그대로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 땅에 있는 보이는 그것을 표준삼아 가지고서 그걸 닮아가지 않는다, ○○○를 닮아가지 낟는다 ○○○를 닮아가지 않는다 ○○○를 닮아가지 않는다 ○○○를 닮아가지 않는다. ○○○를 닮아가지 일는다 ○○○를 닮아가지 않는다 어떤 영웅을 닮아가지 않는다 땅에 있는 것들을 닮아가지 않는다, 하늘에 있는 분을 닮아간다 그 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보이는 그것에게 피동되지 않는다, 보이는 그것에게 따라가지 않는다 보이는 그것에게 배우지 않는다, 보이는, 들리는 땅에 있는 들리는 그 지식을 따라서 내가 내 지식 삼지 않는다, 하나님의 지식을 따라서 내가 지식 삼는다. 신구약 성경으로 지식 삼고 영감으로서 내 지식을 삼는다 또 내가 행하는 것은 땅 위에 내 상관이나 부하나 무엇이나 땅 위에 어떤 것이 이라라 저라라 하는 그대로 내가 피동되어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리 하라 저리 하라 인도하는 그대로 내가 피동 되어서 한다 땅에 있는 어떤 자를 닮지 아니하고 하늘에 있는 내 원형인 하나님을 나는 닮아간다, 하나님을 배워간다 하는 그것을 가르쳐서 보는 것으로 행치 않는다 했습니다.
여기 대해서 잠깐 해석할 것은 뭐인고 하니, 우리가 현실을 닥치면 자기가 현실에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사건이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사는 것이 자기가 현실에서 땅에 있는 어떤 것을 상대하며, 요거 잘 안 들으면 몰라요. 땅에 있는 것을 상대합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것을 상대할 때에 이 땅에 있는 것을 상대하면 상대하는 이것을, 예를 들면은 이것이 상대 여기 쳐다 보십시오. 이것이 상대 됐습니다. 이것이 상대 되면, '이것에 대해서 내가 어찌 할꼬?' 이것이 상대되면 '이것 대해서 어찌 할꼬?' 이것이 내게 상대됐으면 '이것에 대해서 어찌할꼬?' '이것에 대해서 어찌할꼬 이것 대해서 어찌할꼬?' 그것을 따라서 우리가 하는 일 있습니다.
'자, 여기 대해서 하나님 말씀이 뭐라고 말하노?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 대로 해야 되겠는데 이것을 하나님 말씀 대로 하면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러니까?, 예를 들면은 비유컨데 시장판에 이 물건이 보입니다. 이 물건이 보이니까? 이 물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느냐 이 물건에 대해서 내가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내가 상대를 해야 되겠는데 이 물건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또 그 물건 지나가면 그 다음 물건이 옵니다. 그 다음 물건 이 물건에 대해서 어찌 하느냐 그렇게 사는 것이 있고 그 물건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판해 가지고서 그 물건을 상대해서 사는 것이 있고, 또 그 물건에 대해서 하나님 말씀으로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 물건에 대해서 자기 생각이 어떠냐 자기 생각대로 비판해 가지고서 그것에 대해서 상대해 사는 것도 있고 자기 생각도 하나님 말씀도 없이 그 물건을 따라서 움직여서 사는 것도 있고. 요거 구별이 됩니까? 그 물건에 따라서 내가 움직이는 것도 있고 그것에 대해서 내 생각대로 내생각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도 있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신 그대로 따라서 사는 것도 있고 있는데 요 세 가지가 다 못쓸 것입니다. 요 세 가지가 다 못 쓸 것입니다.
아무리 이기 보이고 이기 보이고 이기 보이고 이기 보여도 그거 볼 때에 '이것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하렵니까?' 하는 게 아니고 이게 보일 때에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이거 대해서 어찌 할까요' 이게 아니고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 성령이 나에게 인도하시는 것이 있으니까? 성령이 나에게 인도하시는데 이것이 첫째 둘째 자꾸 이래 보여주고 있으니까? 보여 줄 때에 성령이 있다가서 보지 말라 하면 안 보고 거기에 대해서는 네가 암만 나타나도 보지도 말고 생각지도 말라면 안하고, 그러면 보이는 그것이 나를 움직이는 원동이 되는 것으로 살지 말아라 또 보이는 그것에 대해서 히나님 말씀이 뭐라고 말하는지 그대로도 네가 살지 말아라 보이는 것에 대해서 네 의견과 비판이 어찌 되는지 그대로도 살지 말아라 보이는 것을 따라서도 살지 말아라 보이는 그것을 제목으로 삼아 가지고서 하나님 말씀하는 대로 그대로도 살지 말아라 거기 대해서 네 생각이 어떠하나 네 생각대로도 살지 말아라 거기 대해서 그것이 그것을 따라서, 보이는 그것을 따라서도 살지 말아라 너는 이런 것 저런 것 수없이 볼지라도 그것에 따라서 네가 피동되지 말고 네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님이 너에게 인도 하시는 거기에 따라서 피동되어라. 그러면, 보이는 것, 마귀라는 놈이 이것을 보이고 저것을 보입니다. 보이니까? 보이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거 보이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또 저거 보이니까?, 마귀가 보여 주는 그대로 자꾸 따라가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아무리 한다고 할지라도 보이는 그대로 졸졸 따라가니까? 마귀라는 놈이 결국 끌고 가면은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른다 그 말이요. 요거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반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보이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라고 생각하고 보이는 그것에 피동된 그것을 두고 하나님이 내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 내가 그것 보고 있는, 내가 시장에서 지금 장터에서 물건이, 이 물건을 보니 이 물건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 저 물건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야, 너 장터에 있지 말고 이제 장을 떠나라 너는 예배당으로 가거라 너는 네 직장으로 가거라.'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거기에 따라서 내가 움직이고, 하나님이 보이는 그것에 대해서 '네가 보이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것을 네가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이래라 저래라' 하면은 내가 하지마는서도 보이는 그것이 내가 움직임의 원동이 되게 하지 말아라 보이는 그것으로 행하지 말아라 보이는 그것이 내 움직임의 원동이 되지 말아라, 보이는 그것이 내게 대해서 원동이 되면 보이는 그것에 대해서 움직이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든지 네 욕심대로 움직이든지 네 의견대로 움직이든지 보이는 그것이 움직이는 거기에 따라서 움직이든지 모두다 사망이다 그래 하지 말아라 보이는 그것이 너를 움직이는 능동이 되지 말아라 되게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네게 능동이 돼 가지고 하나님 그분에게, 그분이 네 능동이 되고 그분에게 네가 피동되는 이것으로 살아라 하는 것이 이것이 '믿음으로 살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말아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는, 예를 들면은 자기가 그 직장을 자기가 가졌습니다. 직장을 가졌으면 그 직장에서 직장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그 직장에 대해서 '이 직장에 대해서 내가 이래할까 저래 할까 이래, 하는데 저래 하는데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해야지 말씀대로 해야지' 그것이, 우리 생활 아닙니다. 어제까지는 그 직장에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오늘은 그 직장에 치워 던져 버리고 버려 버리라 그랄란지 모른다 그 말이요. 그분의 명령이 나에게 어떨런지 모른다 그 말이요. 그분의 영감대로 살아라 네가 성경 말씀을 자꾸 이렇게 읽고서 성경 말씀대로 살라고 애를 쓰면 너의 양심이 너를 인도하는 인도가 있고 양심의 인도를 받아서 정리를 하면은 성령이 너를 인도하시는 인도가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대로 그대로 살아라, 이러니까? 내 움직임은 성령님이 나를 움직이는 그 움직임대로 움직이며 살아라 그것이 온전한 행위다 그것이 하늘의 처소를 마련하는 것이요 하늘의 기능을 마련하는 것이요. 그것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그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변화될 몸을 네가 마련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루게 할라고 성령이 보증으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이 책임자이기 때문에 네가 정말로 할라고 애를 쓰면 성령이 너희에게 가르쳐 주고 너를 인도하고 또 성령이 너로 하여금 하나닙의 형상을 입도록 그렇게 노력해 주신다 완성을 하게 도와 주신다 그러기 때문에, 보이는 것에 네가, 피동되지 말아라 믿음으로 해라 믿음으로 행하고 보이는 것에 피동되지 말아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요 말이 무슨 말이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그 말은 보이는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서 산다 말이요 그 의인은 하나님에게 피동되어서 산다는 말이요? 요거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피동됨으로.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에게, 악령이 우리에게 얼마든지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악령이 이거 보여 주니까? 그게 대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또 악령이 조거 보이니까? 또 하나님 말씀대로, 마귀가 보여 주는 그걸 따라서 하나님 말씀대로 했다 할지라도 그 인도의 그 주도력은 마귀이기 때문에 결국은 마귀가 끌고 가고 싶은 대로 우리는 끌려 갈 수밖에 없다 그 말이요.
요것을 똑똑히 구별해야 됩니다. 모르면 구원 이루지 못하요. 이러기 때문에 자기 딴에는 다 구원을 바로 이룬다고 했는데, 사람이 자기 행위는 다 정직하고 옳다고 완전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은 마음의 뜻을 감찰하시느니라' 그 중심이 자기가 중심이 돼 가지고 있고 하사님 중심 안 됐기 때문에 그 모든 결과가 자기중심으로 보니까? 그게 완전하지 하나님 중심으로 볼 때는 다 틀려 버렸다 그 말이요.
그런고로, 우리는 오늘 새벽에 또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어제도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말을 배웠습니다. 이러니까? 세 가지입니다. 자 따라 합시다.
믿음의 지식! 믿음의 행위! 믿음의 사람! 요 세 가지 단단히 기억합시다 믿음의 지식은 뭐이 믿음의 지식이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대로 지식하는 것이 믿음의 지식이요. 이 믿음은 하나님을 딿는다 그 말이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그대로 지식하는 것이 믿음의 지식이요. 믿음의 행위는 뭐입니까? 하나님이 인도하는 그대로 행한 것이 믿음의 행위요. 믿음의 사람은 뭐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입으라고 한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그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산다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산다' 제일 원인을 하나님을 삼고 하나님 외에 딴 것을 원인으로 삼지 말라 말이요. 내 눈에 보이는 그 놈을 원인으로 삼아 가지고서 그것을 하나님 말씀대로 암만 해봤자 결국은 그것에게 끌려 가고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움직임이나 사람이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을 원인자로 삼고 거게 따라서 모두 속하고 피동되고서 하자 그 말이요.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주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는 반사 선생님들이 많이 나오셔서 이와같이 자리가 가득찼습니다.
녜 우리가 놓지 맙시다. 그래 가지고 요 다음 주일에는 우리가 만 명을 구원할라 하면은, 만 명을 구원할라 하면은, 인도할라 하면은 반사 선생님들이 거기에서는 종노릇도 해야 될 것이요 천대도 받아야 될 것이고 모욕도 당해야 될 것이고 뺨도 맞아야 될 것이고 발질도 차임을 당해야 될 것이요 멸시도 당해야 될 것이요 참고 견디기도 해야 될 것이요 떨기도 해야 될 것이요 고생도 해야 될 것이요.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희생 한 거와 같은 그런 희생으로만 우리는 이 일을 이루지 그리 안하면 이루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럴 때에 죄인이라고 욕을 얻어 먹었는데 속에는 의인입니다.
그렇게 멸시 천대할 때에 멸시 천대를 받으니까? 불쌍하고 가련한 자이지마는서도 실상은 영광되고 존귀한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목표한 요 인간 구원을 할라고 하는 데에서 내가 형언할 수 없는 요모 조모로서 우리는 사람이 만들어져 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 구원에서 모욕을 실컷 당하고도 인간 구원을 계속해서 하는 데에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그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를 구원한 그것을 깨닫고 그 속에서는 나도 인간을 구원할라 할 때에 모욕당하는 그것이 상관없이 이 사람을 구원하고저. 무슨 모욕을 당해도 꼭 구원하고저 하는 이 마음이 있으니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나를 구원하고저 하는 그 사랑이 요동이 있겠느냐 내가 사람을 사랑해 봄으로써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땅 위에서 인간 구원을 해 보치 안한 사람은 주님이 나를 구원하는데 대해서 자기가 체험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인간 구원을 해 보지 안한 사람은 하나님이 날 구원하는 그 구원에 대해서 확신이 없습니다. 제가 인간 구원을 해본 사람은, 하나님이 날 구원하신데 대해서 이 악한 나도 인간을 구원할라 할 때에 이렇게도 되고 어떤 모욕이 와도 희생하고 이래하는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할라 할 때에 그 구원이 얼마나 변동이 되겠느냐 변동없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는 이 일에서만 가장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이 용이하고 가속도로 이루어집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는 기도해요. 요번에는 어짜든지, 내가 어제 주일의 배, 어제 주일의 배가 되어야 돼요. 배가 되어야 되니까? 배를 인도해야 만이라는 숫자가 됩니다. 이러니까? 요것을 결심하고 좀 기도하고 이래서, 그것을 결심하는데 와 다른 일이 잘 됩니까? 왜 그것을 결심하는데 다른 일이 잘됩니까? 이것을 결심하니까? 옳고 바른 것을 결심하니까? 그 사람의 정신이 바르고 사색이 바르고 사고 방식이 바르고 모든 소원이 바르니까? 그 사랑의 행위가 바르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니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삐뚤어진 것을 욕심을 내니까? 사상도 사고 방식도 정신도 다 삐뚤어졌으니까? 그거는 패망이 올 수밖에 더 있겠소? 그러기 때문에, 내가 맡은 학생들의 명단을 그런, 자기의 수첩을 보고서 읽어 가면서 '아, 이 학생이 이렇다' 이라다 보니까? 돈벌이가 된다 이러니까? 거리가 멀어서 그게 무슨 돈벌이 돼? 이걸 읽다 보니까? 돈벌이가 됩니다. 왜? 이걸 읽다가 보니까? 하나님이 축복해서 돈벌이 된다는 것보다도 이걸 읽다 보니까? 자기라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깨끗하게 깨끗하게 이래 가지고서 자꾸 수정이 되어서 정리되어서 깨끗한 사람이 돼 버립니다.
깨끗한 사람이 되니까? 거기에서 맑은 마음 맑은 양심이 오고 맑은 정신이 오니까? 모든 사고 방식이 정확하다 그 말이요. 사고 방식이 정확하니까? 그 일이 성공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이래서, 수첩을 하루 몇번씩이라도 들여다 보고서 구원할 이 정신을 가지게 되면은 돈벌이가 된다 하는 그 말은 얼토당토 안한 말 같지마는서도 그것이 많은 순서를 거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은 자기가 점점 수정이 됩니다. 자기 정신이 수정되요. 복잡한 그런 더러운 마음이 제거되니까? 깨끗한 마음이 되어지고 이러니까? 눈이 밝아집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요. 정확한 사람이 되어지요. 이러니까? 정확 무오한 행위를 하니까? 그 행위야 달성되고야마는 것이 필연한 일 아닙니까? 지금 반사 선생님들 많이 나왔는데 요것을 기도합시다. 그래 가지고 이 일 하다 보면 다른 것 다 돼 버리요.
등록된 사람은 사천 사백 열 명인데, 하루, 어제는 팔백 이십칠 명이 기도했습니다. 아마 이것도 더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권사님들은 다 나왔고 장로님들은 여섯분 나와서 어제 기도했습니다. 다른 데서도 다 기도하겠지마는서도 할 수 있는 대로서는 여기 와서 기도하면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될 것입니다. 자기를,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 자기를 보고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요. 자기를 보고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요. 그 사람은 자기가 이리하면 자기 그 사람도 이리 합니다. 이라면 이리 합니다. 자기 따라서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자기 사람이요. 그런데 자기가 잘못하면은 그 사람 다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동무를 때린다 이랬소 동무를 때린다 왜 때리느냐 술이 취해서 때렸소. 술이라니? 세상주의에 도취가 됐기 때문에 이제 그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상우는, 믿음을 상우고 구원을 상우는 일을 하게 된다 그 말이요 때 따라 양식 준다 말은 그 사람에게 좋은 믿음의 본을 보여서 그 사람이 자기로 인해서 믿음이 소생되고 격발되어지는 것을 가르쳐서 양식 준다고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