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17:04
믿음의 경주
1982. 5. 14. 금새
본문:히브리서 12장 1절~2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 ‘구름같이 둘러싼 증인들이 있다’ 구역에는 ‘간증들이 있다’ 이래 번역한 데 있습니다, 간증. 자기가 ‘나는 이랬다’ 하는 간증하는 것. 자기의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는, 간증이라 그렇게 했는데, 간증이라는 뜻이 더 정확합니다. 점점 번역은 자꾸 잘돼 나가는 것 같지마는 속화돼 나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현재에 행동하는 그 행동이 자기만이 처음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고 그 행동이 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행동을 하고 갔습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 종류는 뭐 천이라 만이라 말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인데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꼭 같은 행동을 하고 또 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와같이 한 행동을 하고 간 그 사람들이 그 결과가 어찌 됐느냐? 또 그 행동한 그것이 자기가 비판해 볼 때에 그게 멸망할 행동인지 구원얻을 행동인지 영광스러운 행동인지 수치스러운 행동인지 그것이 어리석은 행동인지 지혜로운 행동인지 차마 할 수 없는 그런 아주 수치스러운 행동인지 그것이 존경을 할 만한 그런 행동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네가 하는 그 행동과 같은 그 행동을 하고 갔으니 그 행동을 네가 보면서 비판도 해 보고 그 행동의 결과가 어떻게 된 것도 봐라. 다른 데서 배우는 것보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그 사람을 찾아 가지고 네 행동과 같은 행동을 찾아 보라. 찾아 보면 그 행동이 어떤 행동인지 네가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네 행동을 네게 붙여 가지고 하면 모른다. 네 행동을 ‘내가 이런 행동한다’ 하는 것을 가지고는 모른다. 네 행동과 같은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하니 그 행동이 어떤 행동인가? 가치있는 행동이라면 그 행동할 때에 애로가 있었나 없었나? 어떤 애로가 있었나? 그거 보면 안다. 옳은 길을 걸어간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그들에게 어떤 애로가 있었느냐? 또 네가 애로있은 것을 그것을 알지 못할지라도 어떤 애로가 있었겠느냐?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런데 네가 네게 대한 행동은 마땅히 네 행동이 지금 수없는 그런 애로가 있어야만 하고 애로를 통과해야만 다 사람들이 성공하는데 이런 행동인 줄 알면서도 네게 오는 그 어려움은 이해를 네가 못한다. 또 네가 하는 행동이, 그거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런 수치스럽고 가증스러운 행동인데도 네 행동에 대해서는 네가 수치스럽고 가증스러운 것을 네가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네게 대해서는 네가 무식하다. 이러니까 네게 대해서 너를 평하지 말고 너와 같은 자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자에게 대해서 너와 누구의 행동과 같은가 그것을 찾아 가지고 그 행동이면 그 행동이 어떤 행동인가 네가 한번 비판해 보라. 다른 사람으로서 비판해 봐라 하는 것을 말해서 남을 보아서, 자기를 알 수 있는 이면을 가리켜서 ‘구름같이 둘러싼 간증자들이 많이 있으니’ 나는 이렇게 참 가치있는 일을 하다가 견디지 못해 가지고 나는 망했다. 이런 면이 올 때 내가 참지 못해서 내가 망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때 그때에 정신없이 수치스러운 줄 모르고 이래 걷다가 내가 망쳤다.
그렇게 의의 길에 어려움이 있는 것, 참 그 정욕의 길에 말할 수 없는 그런 욕심과 열정이 있었던 것, 그런 것을 남을 보아서 너를 깨달아라 하는 그말을 여기 말씀한 것입니다. 남을 보아서 깨달아라. 남을 보아서 자기를 깨달아라.
그런데 여기 2절 끝에 보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여기 부끄러움이라고 말하니까 사람들이 조부랍게 생각해서 무슨 수치스러운 일이나 그런 범위 좁은 걸로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 부끄럽다 그말은 아주 자기가 헐어진다, 자기가 헐어진다. 말하자면 자기가 깨진다. 자기가 헐린다. 자기가 작아진다. 적어진다. 낮아진다. 천해진다. 가난해진다. 어쨌든지 자기의 현재보다 자꾸 손해가는, 줄어지고 천해지고 헐어지고 작아지고 없어지고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여기 부끄러움이라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이것은 뜻으로 말하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는 이 부끄러움은 ‘소멸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면 그 뜻이 바로 발표됩니다. ‘소멸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그러면 소멸을, 소멸되는 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십자가를 지는 거는, 십자가는 소멸입니다.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이 말은 피조물로써 조물주에게 최고의 승리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그러면 인내로써 이 말은 계속으로 달리라. 계속으로 달리라. 달리기를 암만 달려도 그 달리는 것은 ‘너무 달렸으니 이것은 후회된다.’ 얼마든지 달리라. 달리되 계속 달려야 된다.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네가 두 가지를 생각해라. 달려야 된다. 달려야 되는 데에는 계속 달려야 되지,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달려야 되지, 목표에 도달하기까지를 계속 달려야 되는 것이지 아무리 처음에는 앞에 달렸다 할지라도 목표에 도달하기 전에 꺼꾸러지면 그건 소용이 없다. 네가 ‘지금만 내가 열심히 달리면 된다.’ 이렇게만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네가 달음질을 해야 되는 데는 이런 조시로 해야 되느냐 좀 눌게 해야 되느냐 좀 빠르게 해야 되느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조절할 줄을 알아야 된다.
이러기 때문에 달리는 것과 끝까지 계속 달려야 된다는 이것을 네가 생각하라. 그러면 이 두 가지를 생각하면 거기서 뭐이 나오느냐? 절제가 나온다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뭐 그렇게 얼른얼른 빨리빨리 그렇게 자꾸 급속히 그럴 것이 아니라 좀 유유하게 끝을 생각하면서 그래 하자.’ 이래 가지고 그만 느려빠져서 헛일입니다. 느려서 헛일이오. 그 사람은 느려서 헛일이라. 또 어떤 사람은 ‘아, 내가 어쩌든지 힘을 다해서 해야 되겠다.’ 이렇게 하기는 하는데 또 급하게 서둘러서 헛일이라.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달음질 안 해서 헛일, 어떤 사람은 끝까지 계속할 그 조절을 하지 않아서 헛일, 이래 헛일 저래 헛일, 헛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달리기는 달려야 되는데 ‘내가 이 달음질을 하는 데에는 거기까지 갈려고 하면 힘을 내가 이만치 내야 되겠느냐 더 내야 되겠느냐?’ 어떤 사람은 달음질할 때 보면 너무 끝까지 자기가 힘을 계속 쓰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너무 그만 힘을 아끼다가 너무 많이 떨어져 놓으니까 제가 따라갈 수가 있습니까? 이래 안되는 사람, 또 어떤 사람은 급하게 서둘러 가지고 다 돼 가는데 그만 그 앞에서 꺼꾸러집니다. 꼼짝을 못해요.
이러니까 ‘내 힘이면 그만침을 달릴려고 하면 어느 정도 내가 뛰어야 되느냐?’ 그것을 연습하는 것이 평소에 필요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만침 자기의 역량에 따라서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조절해 가지고 해야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승리의 길을 걸어가는 데는 반드시 애로가 있는 것입니다. 달음질치는 사람이 경주하는 사람이 경주하는데 되지 않고 무슨 경주가 됩니까? 반드시 된 것은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데는 애로가 반드시 있지 없지는 않습니다. 애로가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대로는 자기에게 필요없는 것은 정리를 하고, 애로가 있을 것을 생각하고 자기 몸을 가볍게 해야 경주를 하지 그 경주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이런 거 저런 거 모든 소지품을 가지고 가면 제가 경주할 수가 없다 그말이오. 다 벗어내 버리고 단벌, 그저 간편한 옷에다가, 혹은 ‘내가 이만큼쯤은 맨발로 뛰어다녀도 되겠느냐? 그 거리가 얼마정도 되니까 내 맨발이라면 그만쯤은 갔다와도 그저 피는 약간 날지언정 견디겠다.’ 그러면 맨발로 뛰는 것이 좋을 것이고, ‘아무래도 맨발로 가 가지고는 나중에 발의 가죽이 다 벗겨져서 못 갈 터이니까 아주 얇은 신을 신고 가야 되겠다. 이 신이면 그만치 갔다오려 하면 구멍이 나겠다. 이만쯤이면 구멍은 안 나겠다.’ 가볍게 옷도 다 벗어내 버리고, 이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리끼고 얽매인 이 모든 삐뚤어진 것, 삐뚤어진 이놈들이 우리가 이 신앙 걸음을 달리는 데에는 못 가게 합니다. 삐뚤어진 것, 삐뚤어진 이놈을 다 벗어버려야 되겠다 그말이오.
어떤 면은 너무 숙달돼서 안됐고 어떤 면은 너무 모자라서 안됐고, 사람마다 이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다 기형적입니다. 이면으로 기형 저면으로 기형, 어떤 사람은 공부만 할 줄 알지 다른 일반 인간 생활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이 일반 사회 어떤 데는 보면 바보로 취급하게 됩니다.
어떤 자는 아주 못된 것만 연습했다 그말이오. 어릴 때부터 나서 자라기를 못된 것만 연습했어. 아주 못된 것만 연습해 가지고 못된 그것만 또 자랐습니다. 이러니까 아이가 어떤 아이는 자꾸 돈 달라 해 가지고 돈만 있으면 나가서 사 먹는 그놈만 자꾸 자라 가지고 자랐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거는 사 먹는 연습만 숙달되고 성장됩니다. 어디 가 사 먹는 것. 또 놀러 다니는 것, 또 못되게 남녀의 이성교제하는 것, 그러기 때문에 부산 같은 데서 공부 안 하고 그 아이가 벌써 국민학교나 중학이나 하고 다른 공장에 가 가지고 딱 붙들려서 가난한 집의 책임을 짊어지고 하지 않고 슬렁슬렁 부모네들 벌어 주고 노라리 하는 그놈은 아무짝도 못쓸 놈입니다. 그놈 아무짝도 못쓸 놈입니다. 아주 쓸모없는 놈이라. 그 벌써 못된 것을 전공을 했다 그말이오. 별별 것들이 다 있어.
이러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기형으로 자랐고 저 사람은 저렇게 기형으로 자랐고, 이렇게 기형 기형으로 자랐으니까 이 기형으로 자란 것을, 이 놈은 이 뿔따구를 끊어야 되겠지 저놈은 저 움푹 들어간 구멍을 메꿔 넣어야 되겠지, 이러니까 그거 할려 하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인도가 자기에게 맞지를 않는다 그말이오. 그 맞지 않는데 거기에 맞도록, 어째? 맞지 않으면 끊으라 하는 것은 끊어버리고, 또 채우라 하는 것은 채우고, 하기 싫은 것을 하라 할 때에는 하고, 하고 싶은 걸 하지 말라 할 때는 안 하고 이렇게 이것이 인도에 따라 조절이 되어져야 그것이 온전한 인간이 되어져 나가지 제대로 하면 그거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걸 보면 이렇게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인도하시는데 그것이 전부 발동하는 것이 뭐이냐? 제가 저절로 자라놓은 그것에게 맞지 아니하고 그것을 조절하고 그것을 제재하고 그것을 원만하게 고쳐 나갈려고 하니까 전부 자기가 헐어지는 것이니 그것이 싫어서 다 못마땅해 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예수님은 자기에게 잘못된 것을 끊어내 버려서 고칠려고 하는 그런 고생은 없었지마는 바로 된 것도 옳은 데 쓰여지고 쓰여져서 없어져야 그것이 이제 다 영생이 되어지는 것인데, 이 나쁜 것을 고침으로 애로되는 애로가 있고, 나쁜 것을 고침으로 애로되는 애로가 있고 나쁘지 아니하고 참 흠없는 것이 되어진 이 흠없는 것이 의롭게 쓰여지기 위해서 애로가 있는 것이 있다 그거요.
이러니까 흠없는, 흠없이 쓰여지기 위해서도 애로를 단마음으로 당하는데 멸망받을 그것을 지금 이것을 치료하는 그런 애로를 당하는 것을 싫다고 하면 그 사람이 죽고 또 죽어 있지 않습니까? 그걸 원치 않으면 죽고 또 죽어, 또 죽는 것.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없는 가을나무라. 봄 같으면 혹 살아날 희망이 있지만 가을이니까, 뭐 다 죽어가는 가을이면 아주 죽어버리지 희망이 뭐 있소? 그것을, 죽는 것, 이면 저면으로 다 희망이 없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우리를 치료하시는 치료가 뭐이냐? 주님이 우리에게 대한 뜻이오. 주님이 우리를 치료하시는 뜻. ‘네가 이렇게 해라’ 하는 것이 치료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인도하시는 그 뜻이 있고, ‘또 네가 이렇게 쓰여져라. 이것을 이렇게 사용해라.’ 사용하라는 뜻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둘이 있습니다.
치료하는 뜻, 사용하게 하는 뜻. 치료하게 하는 뜻은 죄악대로 되어 있는 그놈이 지금 없어져. 제 죄악적 취미, 성질 그놈은 참 망할 놈은 망할 놈입니다. 어쩌든지 섞인 것 없이 멸망할 생각뿐이오. 이것을 이 구멍으로 못 나가게 하면 저 구멍이 멸망할 구멍으로 저리 쏙 불거져 달아나 버려요. 저 구멍으로 못 나가게 그걸 또 막아보면 이 구멍으로 나가요. ‘이거 한번 막아보자.’ 이 구멍으로 나가는 이걸 딱 막아 버리면 저 구멍으로 나가고 저 구멍으로 나가는 걸 막으면 또 저 구멍으로 나가고 그 구멍이 꽉 찼는데, 이것이 바른 길로는 안 가고 자꾸 망할 구멍을 많이 뚫어 놨으니까 그리 나가는 것이라. 그것을 가리켜서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가시와 담으로 막으신다” 못 나가도록.
이러니까 “믿음의 주요” 믿음이 어떤 것이 믿음이냐? 믿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준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자기에게 대한 뜻 그대로 행한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이 현실에서 가르치시는 뜻, ‘이 모든 하나님의 그 뜻은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이니까 네 현실에는 어떤 뜻이 해당되는고 봐라.’ 하는 그게 성경이오.
자기 현실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인도하시는 그 뜻은 치료하는, 치료하는 치료라. 치료하는 치료라. 마귀와 멸망과 이별하는 이별이라. 마귀와 멸망과 영원한 수치와 이별하는 이별이라.
또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하나는 자기와 하나님과 결합하는 뜻이라. 치료해 가지고 결합하는 결합은 어떻게 결합하는가? 결합은 내것이 당신의 것이 되어야 결합이 되지. 이러니까 내것을 당신의 것 만드는 이 결합이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당신이 가지신 그 인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없어지고 없어지고 마지막 다 없어지니까 아버지 우편에 앉았다 그거요. 하나님의 것이 다 됐어. 하나님의 것이 다 됐으니까 이것은 하나님 아니면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하나님이 아닌데 피조물에게 대해서는 영원히 하나님 노릇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보면 인성이니까 피조물인데 모든 행사 하는 것은 하나님 행사 하는 하나님 노릇이오.
이러니까 교회가 피조물에게 하나님 노릇하는데 예수님은 교회가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하나님 노릇하는 하나님 노릇하는 자들에게 제일 머리라 그말이오. 하나님이라. 그러니까 인성이 영원히 신성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그 인성은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자기가 치료하는 것이 어떻게 치료될 수 있느냐? 치료하는 것도 시간으로 말하면 현재, 장소로 말하면 현장, 사건으로 말하면 자기에게 닥친 그 현실, 현 사건 그곳에서만 치료도 받을 수 있고 그곳에서만 하나님과 자기와의 결합도 될 수가 있는데, 그러면 그 자리 그 형편에서 치료를 받을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치료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까 ‘네가 이렇게 해라’ 치료하는 그 인도를 할 때가, 지도할 때가 있으니까 시키는 대로만 그 지도를 받으면 치료가 된다. 또 네가 하나님과의 한덩어리 되는 데에는 어떻게 되느냐? 그 현실에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결합이 된다.
그러면 치료하는 것도, 결합되는 것도 그 원수는 뭐이냐? 치료되는 것도, 결합되는 것도 없어짐으로 치료되고 결합되는데, 없어짐으로 치료되고 결합되는데 없어지기를 싫어하는 자는 안된다 그거요. 없어지기를 싫어하는 자는 안돼. 자꾸 마귀가 주는 거는 어때요? 뭐이든지 있어지기를 원합니다. 커지기를 원합니다. 커지기를 원해. 이것은 커짐으로는 안되고 작아짐으로 되어지고, 또 높아짐으로 안되고 낮아짐으로만 되어지고, 존영해짐으로만 되지 아니하고 점점 천해짐으로만 되어지고, 줄어짐으로, 없어짐으로, 깨어짐으로 되어진다 말이오. 치료도 깨어짐으로 되어지고, 하나님과 결합인 구원도 깨어짐으로 되어지고 다 이 깨어짐으로 되어지지 달리는 안된다 그거요.
그러면 깨어지면 치료와, 치료도 깨어짐으로 되어지면 치료될 때에는 어떤 게 깨어집니까? ○○○선생님? 예? 그러면 하나님과 이질된 것이라 하는 그런 거 말하면 너무 좀 거리가 멀어. 그만 잘못된 것, 잘못된 것 그게 깨어집니다. 잘못된 습성, 잘못된 욕심, 잘못된 소원, 잘못된 마음, 잘못된 지식, 잘못된 평가, 잘못된 평가 비판, 잘못된 행위, 잘못된 기쁨, 잘못된 영광 이 전부 잘못된 것이 깨어지는 것.
이러니까 현재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려고 하니까 잘못된 그것이 깨어지니, 이자는 이제까지 살기를 잘못된 그것 마련하느라고 살았다 말이오. 잘못된 그것 마련하는 것이 제 생활이라. 잘못된 그것이 마련하는 것이 제 생활인데 잘못된 그놈이 깨어지니까 그게 싫다고 지금 발동을 치는 것이라 말이오.
또 하나는 깨어짐으로서 하나님과 결합이 되어지는데, 깨어짐으로 하나님과 결합되어지는 것은 그것은 잘못된 것이 깨어짐으로 하나님과 결합이 됩니까? 흠없이 된 것이 깨어짐으로 하나님과 결합이 됩니까? ○○○? 네. 흠없이 된 것이, 흠없이 된 것이 이것이 깨어짐으로 하나님과 결합되어지는 것이지 더러운 그런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 말이오.
더러운 것을 다 제거하면 옳은 것이 되어집니다. 옳은 것이 됐으면 됩니까? 옳은 것이 이제 하나님과 결합될려 하면 하나님의 뜻을 복종함으로서 하나님 뜻대로 없어져야 그 결합이 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믿음의 주요” 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으로 온전함을 이루신 분이요 또 순종으로 온전을 이루시는 그 건설 작용을 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할 수 있지 믿음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할 그런 아무런 방편이 없다. 기본구원은 당신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믿음 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살려서 믿음 하는 자가 되게 주격을 살렸습니다. 살렸지마는 건설구원, 행위구원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독재로 강제로 단독으로 못한다 그거요.
이러니까 순종을 통해서 치료도 되고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과 결합도 되고 하기 때문에 이 순종하는, 치료하는 순종도 믿음이요 하나님과 결합되는 순종도 믿음이라. 믿음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십니다.
또 주님도 믿음 가지고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주님이 성공하신 그 믿음은 뭐이냐? 흠없는 그것을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다 쓰여져 다 사용되어 없어지는 그 믿음이오. 우리는 두 가지라. 치료되는 믿음, 또 하나님과 결합되는 믿음.
이러니까 우리 현실에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이것은 보배입니다. 자기 현실에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 뜻은 크게 말하면 치료하는 치료요 또 하나님과 결합하는 결합인데, 하나님의 전지를 내 지혜로 삼는 그 순서요, 또 하나님의 전능을 내 전능으로 삼는 그 순서요,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내 영광으로 삼는 그 모든 순서요, 내가 뒤에 후회하고, 후회하고 수치스럽고, 모든 잘못된 것, 모든 내게 더러운 것, 모든 병적이고 모두 잘못된 것 그것을 치료하는 그 믿음입니다.
이러니까 보배로운 믿음이라, 보배로운 믿음. 이것 버리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깨달아야 돼요. ‘아! 참’ 이 세상에서는 그말입니다.
여기 ‘네 육체의 부모도 너한테 징계해도 네가 받거든 하물며 영의 아버지께냐’ 그말은,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그것을 하지 못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일이 부모에게나 선생님에게나 다 있지 않습니까? 자기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왜? 자기 삐뚤어진 것 고치는 것이요 또 옳은 일 하라 하니까 다 하기 싫고 안됐다 그거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 본위로 했기 때문에 가치가 적고, 암만 훌륭한 부모가 자식을 인도한다고 해 봤자 그것은 가치가 있는 것은 가치 표준이 세상에서 있다가 없어질 썩을 것, 내나 썩을 것이라. 이거나 저거나 썩을 것, ‘아 너희 잘못된 것 가지고 있다. 고쳐라.’ 고쳐 봤자 썩을 것 안 고쳐 봤자 썩을 것, 다 썩을 것이라 그말이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는 이것은 그것이 더럽지마는 썩을 것이 아니고, 금생도 네가 몰라 그렇지 좋고 내세도 좋고 영원토록 좋은 그 범위 넓은 온전을 근거해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을 만하지 않느냐? 이런데, 어제 어떤 사람을 내가 만나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요. ‘아, 이것도 괴롭고 저것도 괴롭고 모든 것 다 괴로운데 그 괴로운 중에 제일 괴로운 것이 어떤 게 괴로우냐?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재독하는 그게 제일 괴롭다.’ 하는데 그게 제일 복되기 때문에 제일 괴로운 것입니다. 그럴 것이오.
자, 새벽예배도 괴로울 것이요 대예배도 괴로울 것이요 또 주일학교 반사로 말하면 주일날 아침에 그때는 일찍이, 늦게까지 자는데 와 가지고 예배보는 것도 괴로울 것이오. 예배가 괴로울 것이요, 또 하나님 앞에서 뭐 시키는 것이 괴로울 것이요 성경보라는 것이 괴로울 것이요 기도하라는 것이 괴로울 것이요, 전부 좋은 거는 다 괴로울 것이오. 또 그 중에 제일 안됐는 거는 뭐이냐? 안됐거든 그게 제일 복있는 줄 알아라 그거요.
그러기에 우리는 발을 벗고 나서야 됩니다. 발을 벗고 나서서 이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제는 믿음의 주를 내가 바라보니까 이분이 믿음으로 성공했으니 나도 이분을 따라서 믿음으로 성공하겠다. 또 이분이 나를 치료하시는 데는 순전히 믿음으로만 치료하시니까 이 치료를 받는 데는 믿음 외에는 딴 거 없다. 내가 믿음으로 치료받겠다. 이 믿음! 복종! 이것 작정하지 아니하고, ‘복종하지마는 좀 가려서 복종할련다, 좀 복종이지마는 복종도 제재해서 복종할련다’ 하면 헛일입니다. 복종을 버리면 자기의 영육의 모든 좋은 것은 다 버려 버렸어. 믿음만 가지면 자기의 금생 내세, 자기, 자기에게 속한 모든 자에게 좋은 것은 다 취하게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자기 하고 싶은 것 이놈을 원수로 삼는 이것이 자기에게 굳게 입각되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이놈 원수, 저는 어릴 때에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기를, 그때 안 믿을 때이니까 안 믿는 사람 가르쳐 봤자 그런 것 가르쳐. ‘옷은 입기 싫은 옷만 입고, 음식은 먹기 싫은 음식만 먹고, 행동은 하기 싫은 행동만 하라. 그러면 네가 불쌍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네 손은 값이 없는 보배다, 무가보(無價寶)다. 손은 값없는 보배다. 이거는 놀리기만 하면 자꾸 수입이 되어진다. 이 머리도 무가보다. 이 머리도 값없는 보배다. 그 값을 얼마다 정할 수 없어. 한정없다, 값이. 값이 없어 없는 게 아니라 값이 한이 없다. 머리도 자꾸 쓰면 거기서 보배가 나온다. 수입이 나온다. 손도 수입이 나온다.’ ‘옷은 입기 싫은 옷만 입고 음식은 먹기 싫은 음식만 먹고 일은 하기 싫은 일만 해라. 그러면 네가 천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네가 음식은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입고 싶은 옷만 입고 행동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손은 사용하지 않고 놀리고 머리는 사용하지 않고 놀리고 그러면 비참하고 가련한 사람 된다.’ 그거 암만 해 봤자 세상에서 썩을 것이지마는 이제 거기다 하나님의 그 생명의 지식을 더하니까 그것이 내게 큰 교훈이 됐다 말이오.
이 예수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준해서 이렇게 하면 그만 그게 구원돼요. 그러니까 게을하면 망합니다. 부지런해도 또 그게 탈이라. 부지런한 것이 죄짓는 데는 어떻게 부지런하고 날래고 민첩하고 지혜있는지? 지혜있다 그거요. 이 구멍으로 막으면 저 구멍으로 톡 뛰어나오고 저 구멍으로 막으면 이 구멍으로 나오고. 도무지 이거는, 뭐 지키는 열이 한 도둑을 못 감당한다고, 이걸 어디로 막을 도리가 없어. 막으면 뻐득뻐득하니까.
우리가 이것을 널리 생각해서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판정하면 자기가 어떤 자라 알 수 있습니다. 어찌 아느냐? 하나님과 자기와 항상 대립이라. 대립이니까 자기하지. 하나님이 ‘좋다.’ 하면 자기는 ‘싫다.’ 이래 된다 말이오. 하나님은 ‘이거 해라’ 하면 자기는 또 ‘하기 싫다. 안 한다’ 이리 돼요.
이러니까 하나님 알면 자기 알아 가지고 마지막에 하나님과 자기와 일치시키는 그것이 믿음으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쩌든지 자기하고 원수를 삼아서 ‘이놈을 내가 복종시켜 보겠다. 이놈이 원하는 이걸 내가 원수를 삼아 보겠다. 이놈이 재미있게 하는 이놈을 내가 죽여 보겠다.’ 자기가, 원수 중에 원수가 자기이기 때문에 그놈이 자기 아닌 옛사람이라 말이오. 이놈을 원수인 줄 알고 이놈을 원수로 삼아야 될 터인데 이놈을 말만 하면 듣기 싫어 원수로 압니다. 이놈을 건드리면 그만 원수라 하요.
이러니까 할 수 없어 그런 사람은 말하다가, 말하면 그만 원수가 되어지니까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 그 말에 대해서는 자꾸 말을 하니까 반발이 되어지니, 반발이 되니 말 안해. 그러니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교훈이라도, 아예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말을 안 합니다. 말을 하지 않아.
여러분들, ‘아, 목사님이 아무것이한테는 말을 안 할거다’ 하는 걸 여러분이 찾아 보면 알 거라 말이오. 그런 사람들한테는, 몇몇 사람들에게는 말 안해. 말해 봤자 정반대의 반동이기 때문에, 왜? 그게 꺾어지지도 않지, 잘났기 때문에 다 오기 보따리요 고집쟁이요 강하고 억세기 때문에 그것은 멸망길을 가도, 그대로 두어 제가 엎어져 코가 깨져야 ‘아이구 잘못 왔다.’ 이렇지 만일 가는 걸 가지 말라 하는 날이면 마구 더 배나 강하게 이럴 것이기 때문에 말 안하고 가만히 둬 두는 것이 덜 상우는 것이라 그말이오.
지도받는 사람이 지도하는 사람 앞에서 억센 것은 자기 망치는 것입니다. 억센 것은 자기 망치는 것이라. 또 자기를 지도하되 잘못 지도하는, 잘못 지도하는, 그 결과가 좋지 못할 잘못 지도하는 자에게 굽신거리는 것은 망치는 것입니다. 잘못 지도하는 자에게는 마구 생명 내놓고 항거해야 될 것입니다. 바로 지도하는 자에게도 생명 내놓고 복종해야 돼요.
그래도 자꾸 되어져. 여러분들이 이런 말씀을 듣지 않으면 뭘로 어떻게 탈선돼 가지고 무엇으로 돼 나갈지 모릅니다. 새벽기도를 자꾸 나오면 사람이 되어지는데 안 나오면, 안 나오면 그 사람은 사람이 되어집니다. 안 나오는 사람도 사람이 되어지고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도 사람 되어집니다. 새벽기도 안 나오는 사람은 세상이 볼 때에 점점 사람이 되어지고 지혜있고 능력있는 사람이 됩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은 세상이 볼 때는 바보가 되어지고 하나님 보실 때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사람이 둘이라는 걸 알아야 돼요.
보면 볼수록 그게 잘났다고, 제 잘났다고 하는 것은 네까짓 게 네 생활의 백의 일이 생명에 속한 것은 없다. 전부 썩은 것뿐이다. 네가 기껏해 봤자 돈이나 보고 지위나 보고 권세나 보지 네가 보는 게 뭐 있노? 그 전부 멸망받을 것을 인해서 영생할 것은 다 버리고마는 불쌍하고 가련하다.
또 그자들은 또 볼 때 새벽기도 나오는 사람 보면 ‘저기 무슨 돈에 대해서, 경제 박력에 대해서, 사회 박력에 대해서’ 얘!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것 하는 것이 멸망이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거 우선 끊으라고 하니까 그것을, 너희 딴에는 너희 욕심을 달성하는 것이 성공자이지만 나는 욕심을 죽이는 것이 내가 지금 전공이기 때문에 욕심 죽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그것이 내 전공이다. 너는 땅 위에 자꾸 커지는 것이 전공이지마는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다 쓰여지고 없어져 완전히 없어지는 그것이 나의 목표요 성공이다. 가는 목표가 다르고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더 있소? 여기 새벽기도 안 나오는 사람들, 그거 다 유식한 사람들이오. 불쌍하고 가련합니다. 장로들도 가련하고 집사들도 가련하고 모두 가련해요. 멸망할 지혜뿐이지. 또 그것이 신앙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지혜는 있습니다. 약간 있지마는 능력이 있어야지? 닥치면 헛일이라. 제 욕심을 제가 이겨요? 제 주관을 이겨요? 제 명예를 이기고 제 지위를 이겨요? 그걸 이기고 복종할 수가 있소? 못해. 어림도 없어. 진실한 사람은 알 건데.
6·25가 오니까 거창에 대서, 사법대서 하는, 시골서는 사법대서직이라면 돈도 잘 벌고 상당히 권리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다 법원에서 오랫동안 법원 생활 하다가, 계장이나 과장이나 하던 사람이 나오면 이제 사법대서, 또 검사나 판사하던 사람들은 나오면 변호사 하고 이런 건데, 사법대서인인데, 부자도 있겠지 똑똑하지 사회 지위도 있지 이러니까 교회 나오면 어른이라. 교회 나오면 ‘내가 이런 지위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아주 어른인데, 자기 부인이 제가 집회하는 그 집회에 왔다가 가지고 사람이 달라졌거든. 그 남편이 자꾸 망할 길을 가는 것에서는 같이 보조를 안 맞춘다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분이 나 가지고 그 거창읍교회의 장로들을 전부 다 뭉쳐 가지고 모았다 말이오. 주목사님은 거기 참석하라면 주목사님은 참석 안할 것이고 이러니까 장로 저희끼리 주 모아 가지고 호출을 했어. 내가 그때 집사니까 뭐 그들의 명령이 어디 명령이라고 안 갈 수 있소? 호출을 만나서 갔다 그거요. 그때 집사로 집회했는데. 그때 추순덕집사님은 거창읍교회에 그때 주일학교 반사지? 반사로 있을 때, 호출 만나 가니까 ‘백집사가 어떻게 해 가지고 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람들을 전부 다 광신을 만들고 이와같이 못쓰게 만들었느냐? 남의 가정을 파괴를 하느냐?’ 이래 가지고 분개하면서 ‘시말서 쓰면, 시말서 쓰고 그래 사과해라. 그렇지 않으면 용서 못 한다.’내가 있다가, ‘나는 내대로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했다고 생각을 하고, 내가 시키시는 일 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으니 권능있는 일을 했다고 했는데, 박장로님의 그 사모님도 죽은 자를 살려놨다고 생각하고, 죽도록 만든 박장로님이 죽인 것을 하나님이 살려놨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시말서를 쓰고 회개를 하겠소?’ 이래놨더니만 막 분해서, 분하지마는, 또 자기는 장로지마는 내 속으로는 그 사람들의 신앙행위로 보면 불쌍하고 가련한데, 보기를 그까짓 거 뭐 그들은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하는데 막 시킨 대로 했지만 나는 신사참배 이기고 나왔는데 그들에게 내가 복종할 사람이오? 간이 지금 그 요량하면 백배도 더 되는데. 그래 이래 놨다 말이오.
이러니까 분해서 이러는데 마침 6·25때, 그때 6·25가 지나고 난 다음에 뭐이 생겨졌느냐 하면 사흘동안 거창읍이 공산주의가 됐습니다. 공비들이 내려와 가지고 마구 습격을 해서 딱 포위해 가지고 3일동안은 공산주의 세계가 됐어. 이러니까 경찰서, 군청 전부, 학교 전부 다 파괴됐어. 이랬는데, 이들이 오니까 갑자기 포위가 됐으니 어디로 달아날 수도 없고, 부인에게 ‘아이구, 어찌 해야 되겠소?’ ‘겁을 왜 내 쌓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는데 무엇을 겁냅니까, 겁내기를? 자 그럴려면 이리 들어 가십시오.’ 다다미를 벌떡 들며 ‘이리 들어 가십시오. 내가 여기 딱 다다미를 들치면 들어 가십시오.’ 이러니까 ‘아 됐다’ 면서 다다미를 들어 주니까 얼른 쥐새끼 모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말이오.
들어가 가지고 딱 납작 엎드려 가지고 있는데 그 위에, 그 이집사요? 이집사가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지고 고함을 지르고 기도를 하는데, 이 공산주의 무신론자들이 들어왔으니까 이들을 물리쳐 달라고, 이 황충이 떼가 들어왔으니 물리쳐 달라고, 밑에서 들으니까 고함을 지르면서 기도하니, 그리 안 해도 들어올까 싶어 겁이 나는데 거기서 고함을 지르니까 밑에서 막 녹는다 그말이오.
녹는데, 공산주의자들이 군인들이 자꾸 연발 들어왔다가는 나가고, 들어왔다가 나가고, 들어왔다가는 그래 기도하는데도 아무도 없다 하고 나가고, 아무도 없다 하고 나가고, 보니까, ‘아 여기 아무도 없다.’ 밑에서 들으니까 인민군들이 들어와 가지고는 문을 활칵 열고 ‘아, 여기는 아무것도 없다.’ 고함을 질러서 기도하는데 ‘아무도 없다.’ 들리지도 아니하고 보이지도 아니하고 왔다가는 물러가고 물러가고 하는 걸 보고 그 속에서 그만 울었다 말이오.
인민군이 다 지나가고 난 다음에 나오라 하니 나와 가지고 그 자리에서 이제 그만 엎드려서 ‘아, 여보시오. 내가 자복합니다.’ 그 자리에서 굴복을 하고 자복을 하고 그 자리에서 사법대서 사면하고 ‘나는 이제 하나님의 종이요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말하고 사법대서 내놓고 그때부터 자기가 못났지마는 목회자로 나서겠다고 소릴 해. 그 사람이 목회자 할려 하면 다 당장 세웠소. 그 사람을 목회 할려 해서 목회자로 세웠소.
세웠는데, 그분이 내가 그때 신학교 있으니까 찾아왔어요. ‘장로님, 어째 찾아왔습니까?’ ‘아이구, 집사님 내가 참 내가 죽을 죄를 지었다’ 고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인제 사법대서 다 내놓고 나도 지금 헌신할려고 지금 신학교 입학해 가지고 왔습니다.’ 중간에 입학을 시켰어. 그 사람 그때 다 우리 교계 다 유명해 알았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은 그때부터는 그저 날 보면 저 먼데서부터 땅에 머리가 닿도록 절합니다. 절을 하면서, 유명해서 어디든지 가면 성경 떠나지 않아요. 버스 타고 갈 때도 성경, 앉아서 얘기할 때도 성경, 성경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 가지고 저 서상 가 가지고, 거기서 전도사 했지? 신윤필씨 알지? 첫걸음이 거기인데, 거기 가서 전도사 노릇 하면서 세상 것은 준비 많이 했지만 지식을 바꾸지 않고 이래 놓으니까 전도사 하면서 고생 고생 해도 교회가 부흥이 됩니까? 자기 딴에는 실컷 하는데 그뭐 양떼들이 들어야지? 이래 가지고 참 불쌍하게 비참하게 그렇게 해도 충성하면서 이래 지내다가 그만 일찍 죽어버렸습니다. 목회, 아주 무능한 목회를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봤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죽도록 충성해.
자기 부인에게 대해서는 이랬습니다. 그래 자기 부인이 자기 아들이 의사 노릇을 해 가지고, 전주 가서 의사 노릇하기 때문에 거기 가 가지고 따라가서 거기서 생활하고 있지? 예? 아들한테 가 있지? 그리 갔는데, 그 아들이 의사가 안돼 버렸고 아무 생활이 형편이 못됐으면 그게 이쪽으로 왔을 건데, 잘난 아들 돈 많은 아들이니까 자꾸 모셔 가니까 가 가지고 마지막은 복있는 생활 하지를 못했소. 왜? 못했다 말은 나는, 신앙으로 꼭 살았습니다. 신앙으로 그 지방에서 보배고 그 교회에서 보배요. 그러나 이 교훈을 받지 못하니까 그 보배 노릇 해 봤자 나중에 가 맞추어 보면 틀린 게 얼마나 많겠느냐? 한 10분의 뭐 2, 3이나 맞지 나머지가 맞습니까? 교훈을 그 뒤에 받지를 못하니까, 이렇소.
이러니까 입술로 떠들거려 쌓아봤자 소용없어. 권능이지. 권능이라. 그 딱 그런 참 어려운 직면을, 어려운 일을 딱 당면하니까 이 사람은 믿음이 있으니 담력이 있었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니 하나님의 권능이 같이 하니까 아무도 해하지 못했는데, 제가 세상적으로야 남편이고 강하고 담대하고 억세지마는 속에 하나님과 밀접한 결합이 안돼 가지고 있으니까 그때 담력이 나옵니까? 기쁨이 나옵니까? 큰소리 해 봤자 헛일이지. 지금도 그렇다 그말이오.
우리 교회 잘난 사람들 그거 뭐 6·25 같은 어려운 일 있으면 쥐구멍 찾아갑니다. 사지를 못 써요. 어쩔 줄 모르요. 지금 뻔뻔스럽게 큰소리 하지 그때 닥치면 쥐구멍을 찾지. 그래 놓으니까 딱 닥쳐 놓으면 오만 일 다하지. 주님 저주하라 하면 저주할 것이고, 신앙 배반하라 하면 배반할 것이고, 안 믿는다고 작정하라 하면 작정하고, 다 그럴 것 아니겠소?
이러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에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결합하는 이 결합이 있어야 되지 세상적으로 똑똑한 그까짓 거는 아무 가치 없습니다. 이것으로, 결합된 이것으로 가치를 보는 것이 교회 가치 보는 것이오.
이런데 이렇게 되어도 다른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아, 백목사님도 세상에서 잘난 사람 알아 준다.’ 잘난 사람을 알아 주는 것 아니오. 그것은 구렁이를 구렁이라 하면 듣기 싫어한다고, 구렁이를 용이라 해야 듣기 좋아한다 하는 모양으로 그걸 제 정체를 말하면 당장 삐꿔서 도망을 쳐 버릴 터이니까 고칠 기회도 없으니까 ‘허허 허허‘ 이렇게 말합니다. 이래 자꾸 존경을 해줘. 존경해 주다가 이제 되어지면 틀린다 말이오.
지금 우리 교회의 장로 중 하나 여러분들 보십시오. 이제 ○○○장로님 ‘예 예’ 자꾸 이랬는데 이제 좀 되어집니다. 되어져서 지금은 인제 바짝 눌려지고 꺾어지고 이제 앞으로 바짝 눌려 꺾어져서 죽으라 하면 죽고 살라 하면 살고 그만침 꺾어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제 이것은 하늘의 것이 안된다 그거요.
여러분들이 신앙을 알아야 되지, 교회 평가가 세상대로의 평가되면 안됩니다. 세상대로의 평가되면 안돼. 이제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 그보다 더 크고 좋고 보배로운 것이 없어.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선지자 이 외에 세상의 대통령 그런 것은 두러운 것이 없어.
그러기에 서부교회 교인이 새벽기도 안 나오는 사람은 제대로 저 잘난 재미로 사는 사람이지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도 제가 알 리는 없습니다. 알아 봤자 찍해야 기독교 도덕주의 되고 사회주의 되지, 그러면 사람들은 잘 믿는 줄 압니다. 신앙은 안돼요.
○○○씨 구역에 그 아이 이름이 뭐이지? 새벽기도 안 나왔네요. ○○○씨, 이름이 뭐이지? 걔 이름이 뭐이요? ○○○씨 안 나왔어요? ○○○집사님 한번 가 봐요. 억지로 무리하지 말고.
어제 나한테 와 가지고, 아버지는 못 가게 하고 자기는 오고 싶다고 이래 왔어요. 그러면 여기 있으라 하지만 아버지가 지금 육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는데 아버지를 거스리고 그래 와서는 안돼. ‘아버지와 의논해 가지고 일치되는 길을 걸어라. 네가 아버지를 따라가서 일치가 되든지 아버지가 너를 따라 일치가 되든지 일치되는 걸음을 걸어야 되지 일치되는 걸음을 걸으면 안되니까 그대로 해라.’ 그렇게 해서 보냈어요. 보냈으니까, 아마 안되는 것 같은데, 뭐 길게 기도할 것 없고 오늘 하루만 기도하면 결정된다 이랬어요. 그걸 알려줘야 내가 관리하겠어요.
그리고 ○○씨 왔소? 안 왔어요? 누가 손드는지 손드는 이 뉘라? 안 왔어? 나한테 한번 데리고 와요.
그리고 타자수를 좀 구해 주십시오. 또 지금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은 이 건축하는 데에 경리를 볼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남자도 좋고 여자도 좋은데 월급이 적기 때문에 남자를 구하지 못합니다. 좋은 남반 있으면 좋은데, 남반이 더 좋겠는데 월급료가 적으니까, 그래서 왜? 또 우리는 급료를 적게 주고라도 쓸 수 있기 때문에 급료를 적은 사람을 구합니다.
또 이 건축하는 데에도 노임이 다 앞으로 제가 결정을 할 것입니다. 다른 데보다 노임을 좀 적게 줘도 교회일이고 또 자기가, 어떤 사람은 또 일해 놓고 보니까 하루 일해 놓고 받으러 다니느라고 품은 이틀이나 사흘이나 걸리더구먼. 그걸 다 할당하면 맞는 거라. 그러니까 월급은 적어요. 중간반 반사 월급을 더 주지는 못해요. 그러니까 그런 줄 알고 그런 사람 하나 구해 주십시오. 또 타자수도 좀 구해서 봐서 좀 될 수 있는 사람이면 우리가 타자수를 두 사람은 더 구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