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16:35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1987. 1. 29. 새벽 (목)
본문:히브리 11장 5절∼6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합니다. 믿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됩니다. 믿는 것 외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은 자기 몸을 드려도, 생명을 바쳐도, 있는 소유를 다 바쳐도, 일생을 주를 위해서 산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서 당신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바쳐봤자 없는 가운데서 당신이 만드신 것이요 또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치나 안 바치나 당신의 것이요 또 당신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 뭐 하나님에게 바친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뭐인데? 하나님이 이 신인 계약으로 우리에게 선포해 놓으신 모든 조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이요, 요구하시는 것이요, 또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조목들을 다 알고 참되다 인정하고 그대로 실행하는 것을 당신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생명을 바쳐도 당신이 바쳐라 할 때에 바쳐야 되지 당신이 바쳐라 하시기 전에든지 후에든지 제맘대로 바치는 그거는 자살 행위지 하나님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또 무슨 소유를 바치는 것도 당신이 하라 하는 대로 순종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지 물질 바치는 것이 가치 있는 거 아닙니다. 당신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그것이 가치 있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는 그것이 가치 있고, 당신을 인정함으로 하는 그것이 가치 있지 아무 다른 거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에녹이, 죽지 안하고 승천한 사람이 두 사람 있는데 하나는 에녹이요 하나는 엘리야입니다. 에녹은, 이 둘 다 계시의 표본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에녹이 죽지 안하고 승천했고 엘리야가 죽지 안하고 승천했으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도 잘 믿으면 죽지 안하고 하늘나라 가지 않는가?’ 그런 오해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또 죽어 가지고 부활하지 안한 사람은 하늘나라 가지 못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에녹과 엘리야는 갔는가? 에녹과 엘리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는 계시의 기관으로 쓰셨습니다.
그러면 에녹은 무슨 기관으로 썼는가?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영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하나 계시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영생이라. 우리 공과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다 영생이요’ 하는 것을 그 공과에 기록했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은 다 사망이라’ 그것도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엘리야는 어떻게 산 채로 승천했는가? 엘리야는 그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영생이라. 믿음은 죽지 않는다. 믿음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켜서 계시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엘리야는 하나님께 순종이 그것이 전체가 순종입니다.
순종 표본으로 나타냈고 이 에녹은 표시하기를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떤 게 믿음인가?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인데 그러면 뭘 아는가?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다 읽어서 열람할라 하면은 아직까지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그렇게 성경을 다 열람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론 요새 지금 성경 공부를 하는 사람들, 또 오랫동안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다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믿는 사람들, 혹 무식한 사람들이 성경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간추려서 요령을 들어서 가르치는 것이 항상 설교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어떤 그 지엽과 같은, 잎사귀와 같은 그런 것을 가르치는 그런 설교도 있고 또 원둥치와 뿌리를 가르치는 설교와 같은 그런 설교도 있습니다.
대개 서부교회서 가르친 것은 원뿌리와 둥치 이 근본을 다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전 성경에서 다 들어 가지고 간추려서 강령을 들어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는 것은 뭘 알아야 되는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일곱 가지를 알면 다 아는 것 됩니다. 일곱 가지 알면 다 아는 것 됩니다. 구약은 앞으로 있을 일곱 가지 대속을 예언해 놓은 예약해 놓은 말씀이고 또 신약은 예약한 대로 일곱 가지 대속을 이루어 놓으신 후에 이미 예약한 것이 다 이루어져서 이루어 놓은 그 일곱 가지 대속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신약 성경입니다.
그러면 일곱 가지 이 대속을 자꾸 압니다. 자꾸 알고 또 알고 또 알고, 또 믿고 또 믿고, 또 그대로 행하고 또 행하고, 이것이 뭐 이거면 신구약 성경 다 여게 다 내포돼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친이 돼서, 하나님과 화친이 돼서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되었고 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피동되는 것 그것이 대속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것은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이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께 피동입니다.
그러면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이, 예수님에게는 아버지의 하시는 일이 전부 다 나타났습니다. 또 성도들 가운데서는 나타나는 차이가 어떤 사람은, 다니엘 그 시대에 다 모두 한 달 동안 다른 데에 기도하면 다 사자구덩이에 잡아 넣는다 할 때에 그때에 들추어 난 사람이 없는 걸 보면은 다 기도하는 표시를 다 하지 안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다니엘은 기도를 계속하고 그를 잡아서 사자구덩이 던졌을 때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서 나타나서 사자가 그를 해하지 못했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서 그를 해하지 못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 같은 그런 이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서 나타나서 그가 지내가는데 행주수건 이 무슨 손수건 말이요, 손수건 이런 것만 이래 한번 대여도 다 그 권능이 나타나서 다 나았습니다.
또 베드로는 이래 지내 갈 때 그 그림자만 지나가도 다 나았습니다. 그게 똑 같은 우리와 같은 하나님과 화친이 된 사람이지마는 그 화친된 그 화친을 믿음의 분량이 달라서 많이 믿는 사람은 많이 나타났고, 적게 믿는 사람은 적게 나타나고, 또 하나도 안 믿는 사람은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안하고, 그러니까 우리가 자꾸 이렇게 아는 것을 더 알라고, 또 더 믿을라고, 또 더 그대로 행할라고 애를 쓰는 그것이 하나님이 제일 요구하시는 것이요 우리의 할 일의 전부인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도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을 자기가 인정하고 믿을 때에는 물위로 걸어갔는데 그만 믿음이 끝나자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것도 우리에게 하나의 계시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바다는 세상을 상징한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연결을 믿고 하나님과 연결돼서 화친이 돼서 나는 하나님에게 속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이 사실을 믿는 것만치 그에게 능력이 나타나서 세상을 이기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물위에 걸어간 것은 세상을 발아래 밟고 걸어간 그것은 우리가 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알려서 세상을 이용하고 세상을 다 이기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물위에 걸어갔지마는 오늘 우리는 물위에 걸어가는 그런 것을 하나님 하지 안했는데 자기가 물위에 걸어갈라고 달라드는 거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요 잘못입니다. 그것은 계시로 보였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물위로 걸어가는 것은 어떤 것이 물위로 걸어가는 것인가? 이 세상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세상을 이기고 나아가는 그것이 물위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그 전지의 율법을 그걸 다 완전히 이행해서, 전지의 율법을 이행한 것은 그것은 뭐이냐? 완전 자유입니다. 완전 자유요 절대 자유입니다. 또 죄를 이기고 자유하고 사망을 이기고 자유하고 마귀를 이기고 자유하는 자유는 그 자유는 부분적 자유고, 우리에게 필요한 세 가지 자유고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그 자유는 완전 자유요 전면 자유입니다, 전면 자유. 모든 존재에게 대해서 다 자유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모든 존재에 대해서 법칙을 냈는데 그 법칙대로 하니까 모든 존재도 다 좋아하고 모든 존재도 다 환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알고 완전 자유를 어데서든지 믿는 것만치 자기는 쓰고 쓰는 것만치 자기에게는 자유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영생도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하나니” 믿음 없으면 기쁘시게 못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믿는 것은 영생을 하는 것이 그것이, 믿는 것은 영생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계시하기 위해서 에녹이 죽지 안하고 승천했고 엘리야는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이는 거, 하나님께 순종. 하나님에게 순종은 죽지 않는다 하는 것을 보여 준 상징 계시용입니다. 계시 기관입니다. 계시 기관으로 그렇게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나 믿는 것이나 꼭 하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일곱 가지 이 대속의 구원 얻었는데 그 일곱 가지가 합하여 몇 가지입니까? 일곱 가지가 합하여 몇 가지 됩니까? 한 가지. 저거는 알아. 저 바보같이 생겼는데 저거 안다 말이라, 저거. 저거 인제 제일 일등 목사 될 것 같애, 저게. 내가 보기에. 바보 같애. 너 보자, 공부 얼마나 했노? 국민학교 했나? 국민학교 졸업 못 했나? 졸업했어? 중학교 졸업했어? 그만하면 뭐 대대목사 되러구만. 거짓이 없으면 잘 깨달아요. 속에 거짓이 있어서 안 돼요.
어제 어떤, 양성원 학생인지 편지가 왔는데 ○○○교회 있으면서○○목사님이 뭐 말하는 것이 좀 거린낀다고 그라면서 편지를 했어. ‘그래 내가 지금 좀 알고 싶어서 합니다’ 그 내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오늘 새벽에 내가 두시에 일어났어요. 두시에 일어나 가지고 모든 것 좀 기도 좀 하고 이래 좀 하다가 그것도 편지가 있어 그것도 성구만 써 놨어. 성구만 써 놔서 내가 성구 너이를 써서, 다른 편지는 쓸 여가 없고. 성구 너이를 써서 ‘네가 이것을 읽어 보면은 네 속에 오해가 다 풀릴 것이다.’ 자기 주관이 있으면 주관이 있는 것만치 하나님의 도는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분이 잘못 가르친 게 아니라 제가 주관이 잘못돼 가지고 그 못 깨닫고 있는 거라. 그래서 고거 내가 성구를 써 놨습니다.
오늘도 이 모두 주일학교 반사 선생들님과 또 중간반 일이부의 반사 선생님들이 기도하러 간다고 했는데 그 기도할 제목이 몇 가지로 어제 말했지요? 녜, 세 가지로 말해 줬습니다, 세 가지.
하나는 반사 노릇 잘할 수 있도록 거게 대해서 기도하고, 또 하나는 자신이 모든 학생들에게 본이 되기 위해서 기도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자기에게 나타나 있는 것을 보여 주도록 그렇게 기도하고 이래 세 가지 기도하라 했는데 그 세 가지 기도하라는 그것이 내나 일곱 가지 가운데서 그 세 가지가 나오지 다른 데서는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러면 사람을 구원하는 데 대해서 성경에 뭐라고 말했는가? 사람을 구원하는 데 대해서 그러면 성경에 뭐라고 말했는가? 그것을 이제까지 들은 것이 있고 읽은 것이 있으니까 그걸 자꾸 생각합니다. 사람 구원에 대해서.
사람 구원이 얼마나 중요하며 얼마나 힘써야 되는가, 뭐 어데까지 우리가 힘을 써야 되는가 그걸 자꾸 들은 대로 아는 대로 그걸 생각해. 사데 교회가 “어떻게 받은 것을 생각하고 들은 것을 지켜 회개하라” 했어. 그러면 듣고 읽고 하는 그것을 자기가 자꾸 이렇게 하나 깨달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됩니다, 하나 깨달으면.
또 하나 더 깨달으면, 점점 깨달으니까 점점 인간 구원에 대한 그 힘이 강하게 나오고 또 믿으니까 강하게 나오고 그대로 실행하면은 또 능력이 강하게 나옵니다.
또 자기가 모든 학생들에게 좋은 본을 보이는 것 그것도 내나 일곱 가지요. 일곱 가지 행동하면 본보입니다.
또 일곱 가지 그것을 행동하면은 자연히 그 모든 학생들은 저절로 구원됩니다.
또 일곱 가지 그것을 행하면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의 이 도리는 여러 수천 수만 가지로 말했지마는 그것을 간추려 들어가면 하나입니다. 단일성이오. 하나에서 그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이러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한 성구라도 거머쥐고 자꾸 파고 들어가면 그 다음에는 모든 것 다 만납니다. 모든 성구 다 만나고 모든 도리 다 만나고 하나를 지켜서 바로 하다 보면은 모든 것 다 하게 돼요.
다만 사람들이 주님을 향하여 하지 안하고 자기 사욕을 위해서 하는 사람은 그 하나 행함으로써 한 탈선으로 기어 들어가서 죽고 또 둘로 들어가면 둘로 들어가고 이렇지마는 하나님을 상대해서 나아가는 것은 어데로 나가든지 그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뭐 서울을 가는 사람이 동에서도 서에서도 남에서도 전국에서 다 출발해도 목적이 서울이니까 서울 가면 다 만납니다. 또 세계가 한국 서울을 갈라 하면은 어데 세계에 나섰든지 목적이 서울이면 거기 가서 만나게 되고 한 군데로 가게 된다 그거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요것이 목표를 가지고 어느 성구든지 어느 행동이든지 시작하면은 결국은 모든 도리를 다 깨닫게 되고 모든 것 다 하게 됩니다. 왜? 신구약 성경 전부가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요,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을 다 행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 단일성이라는 뜻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도 행하는 종류가 다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 하지 마라 하라 하는 거 있는데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고 하라는 것을 하는 것도, 하지 말라는 걸 자기가 안 하는 것도 자기가 벌 받지 않기 위해서 안 하는 사람 있고 또 하라는 걸 해도 자기가 복 받기 위해서 하는 사람 있고, 그러면 하지 말아라 하라는 이 성경 말씀을 지킬 때에 자기가 화 받지 않기 위해서 복 받기 위해서 하는 거 그것 다 좋습니다.
화를 면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사는 것도 좋은 것이요, 또 복 받기 위해서 말씀대로 사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다 좋은 것이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가운데 뭐이 제일 좋습니까? 어느 게 제일 좋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일호 이호는 좋은 것이지마는 가다가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깨닫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죽은 자와 같이 두려워하는 거와 같은 그런 전환이 없으면 안 돼. 그런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없으면 그 길도 내나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를 면하고 복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거게, 종착이 거게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거 다 소용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리 가거나 저리 가거나 결국은 다 됩니다. 그러기에 기쁘시게 하는 것이 제일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밤에 어떤 학생이 여기 오늘 새벽에 왔는지 모르겠는데 ‘이 ○○○교회는 말씀대로 살아서 이거 복을 많이 받고 이 아주 이렇게 기적과 표적이 나타나는데 우리 서부교회는 그런 것이 좀 덜 나타나니까 우리보다 거기 잘 믿지 않습니까?’ 녜, 잘 믿습니다.
잘 믿는데, 거게는 잘 믿어서 그러하고 또 여게는 지금 그런 복도 못 받고 있는 그런 것은 잘 못 믿어 그러하고, 또 그런 복은 또 그것은 아예 “이런 것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필요한 것인 줄 알기 때문에 이런 거는 구하지 말아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이랬으니까 이제 그런 것을 구하는 거와 같은 그런 것도 또 있습니다. 베드로가 처음에는 고기 잡았지마는 고기 잡고 난 다음에는 이제 그것은 다 집어 던져 버리고 자기 속에 갈급 있는 사람 취한다는 그 말씀을 할 때에 만족한 거와 같은 또 그런 사람도 있어.
그러면, ○○○교회보다 잘못 믿는 사람도 있고 또 ○○○교회보다도, ○○○교회와 같이 잘 믿는 사람도 있고, 그보다 잘 믿는다 하면 탈나고. 그만치 그와 같이 잘 믿는 사람도 있고 또 못 믿는 사람도 있고, 그런데, 내가 그래서 어제 간단하게 그런, 요 가다가 만나서 그런 성구 했어.
골로새 3장 1절에 보면 “네가 만일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중생됐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걸 더해 주신다” ‘더해 주는 것은 돈 많게 해 준다 말이냐?’ 이라니까, ‘돈 많게 해 준다 말이냐 너희가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에 세상 그런 것들이 필요한데 그 필요한 것을 가장 적절하게 해 준다 말이냐 더해 준다는 건 많이 준다 말이냐?’ 하니까 ‘적절하게 해 준다 말입니다’ 그래 알아들어요. 그만하면 그만 다 나중에 집에 가서 자꾸 기도하고 하면 바로 깨달아져요.
오늘도 가 가지고, 어떤 그 반사 선생님이 ‘오늘 가면 우리 기도할 때 뭘 하랍니까?’ 그러면 자기네끼리 쭉 모여 앉아 가지고 그것도 좋아요. 모여 앉아 가지고 ‘자, 우리가 그라면 오늘 말하기를 목사님이 셋을 말했는데’ 나도 가서 뭐 세 가지 말한 거 세 가지 퍼뜩 내게 생각이 나와서 말했지 내가 그런 계획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니라.
아닌데, 신앙 지도자가 그렇게 세 가지를 말했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이 주일학교 반사 사명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계약을 알아야 된다 하는데 반사 생활을 잘 하는 데 대한 이 계약이 어떤 계약이 있는고 우리가 한번 여기서 공동으로 연구하자.’ 앉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면서 ‘자, 너거 반사 노릇을, 반사 직책을 잘해야 된다는 데 대해서 들은 것이 있으면 각각 말해라.’ 그러면 열 명이 하나 한 마디씩 말하면 열 마디 안 되겠소? 또 중간반 반사들은 삼십 몇 명이 간다 하니까 삼십 몇 명이 하나 한 마디씩 말해도 삼십 몇 종류나 돼. 이렇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 된다 하는 그런 거 삼십 몇 종류를 또 연구하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라면 요 성구가 있으니까 그 성구에 보면 관주가 있어요. 관주라고 여기 기역 니은 디귿 리을 이렇게 해 가지고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이렇지요? 이런데 그것으로서 관주가 돼 가지고 있어. 관주가 돼 가지고 있으니까 그 보면은 관주 있는 것은 그와 같은 그 뜻을 표시하는 것보다도 그와 같은 단어를 표준해 가지고 관주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대로 또 찾아봐요. ‘야, 이 관주가 이런 관주가 있다.’ 그러면 여기 대해서 또 찾아보면 또 하나 더 나오고 더 나오고 또 나올 수가 있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래도 또 찾고, 그리 안 하면 ‘우리가 모든 양무리의 본이 돼야 된다는데 본이 돼야 된다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본이 되느냐?’ 본 돼야 된다는 데 대해 또 말씀을 보고 어떻게 본 돼야 되는가 또 거기 대해서 들은 게 뭐꼬, 아는 게 뭐꼬 자꾸 이래 주 모아서 그라면은 또 그라고, 그러면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있다는데 어떤 기적과 축복이 따랐노? 그 기적과 축복이 자기에게 따르게 되는 데는 어떻게 하니까 기적이 왔고 어떻게 하니까 축복이 왔던가 또 그거 연구하자.’ 이래 가지고 그런 기회에 모여 앉아 가지고 잠깐 연구해 가지고 또 그러면 ‘이 제목으로 기도하자, 또 이 또 연구하자, 제목으로 기도하자.’ 이라면 뭐 하루뿐 아니라 며칠이라도 모자랄 거라 말이지. 그래서 그런 기회에 이 세상좀 떠나 가 가지고 좀 믿는 이 도리를 좀 찾아서 깊이 들어가는 그런 일을 하면 좋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내가 광고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도 설교록에 기록되겠는데.
우리가 자연을 이렇게 보호해야 됩니다. 자연 보호한다는 그것이 아주 우리 나라서는 처음 되는 말이지마는 선진국에서는 일찍부터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자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이 자연을 만들라고 애를 쓰는 그런 나라도 많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한테 말 들었는데, 여기 내가 ○○○집사님한테 내가 그런 말 들었는데, ○○○집사 손 들어 봐요. 저 뒤에 앉았구만.
일본서는, 그분 일본 있다 왔거든요. 일본서는 아주 낭떠러지에 돌이 얄궂게 돼 가지고 있는데 거게는 저거 아름다움이 없으니까 그 아름다움이 없으니 거게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해서 거게다가 누가 나라에 시키지 안하고 개인으로서도 말이지요. 그런 거 보기 싫어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거게 나무 한 포기를 살도록 만들라고 하면은 돈이 뭐 여러 수백만 원이 드는 데도 자기 개인 사재를 들여 가지고 거거다가 어떻게 사람을, 거기 새나 날아갈까 못 올라가는 데인데 거기다가 어떻게 해 가지고 거게다 나무를 하나 심어 가지고 보고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아름답게 보여지도록 그 나무 하나 자연 하나 만들기 위해서 사재를 여러 수백만 원 들여 가지고도 그걸 만든다 그 말을 나는 들었어요. 나도 그말 듣고 나니까 그게 기억이 나요.
아마 일본 갔다 온 사람들 보면 더러 봤을 것인데 이번에 여기 ○○○목사님이 일본 갔다 왔는데 뭘 보고 왔는지? 보면 그 사람들이 자연 보호에 대해서 그뭐 하나도 낭떠러지든지 산이든지 뭐이든지 이거 낭떠러지든지 뭐이든지 하나 아름답게 꾸며지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자연을 보호할라고 애를 씁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오.
이러니까 타락하지 안한 이 짐승들은 범이, 그 산에 범이 뭐 십 년을 살고 있고 짐승이 몇 해씩을 살고 있어도 그 짐승 있는 흔적이 없어. 그 자연을 훼손하지 안했어요. 장 다니는 그 구멍으로 요리요리 다니면서 그 자연을 참 아껴서 요렇게 했어요.
뭐 우리는 저 양산동 산 전부 다 들판 다 돼 버렸어. 마구 이 학생들이 가면 모처럼 가 놓으니까 산에 제 마음대로 막 뛰어 돌아다니니까 전부 밑에 있는 풀이니 나무니 다 꺾어져 버리고 풀은 다 망가져 버리고 이러니까 아마 그 초목들이 탄식을 할 거라. ‘아이구, 이것들이 와 가지고 이거 괴롭혀서’ 탄식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또 어째 생각하면 ‘하나님의 뭇아들들이 왔으니까 기쁘고 즐겁다’ 하기도 할 거라 말이오. 이러니까, 자연을 우리가 좀 보호해야 되겠습니다.
자연 보호가 몇 가지라고 했습니까? 엊저녁에 내가 몇 가지로 간단하게 말했지요? 세 가지. 세 가지. 요것이 자연 보호의 근원입니다. 하나는 형질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형체 말이오. 이 형질을 변경하지 말아요. 빼쪽하게 나온 것은 빼쪽하게 나온 대로, 폭 들어간 데는 폭 들어간 대로 냅둬야, 그놈을 사람들이 가면 전부 다 뿌숴 버립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형체를 깨뜨리지 안하고 그대로 보호하는 것이 자연 보호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나서 자라게 하는 그 초목을 그대로 자라도록 하는 그것이 자연 보호입니다. 또 하나는 뭐입니까? 하나는 뭐이요? 더럽히지 안하는 거. 이래 떡 올라가다 보면 말이요, 사람들이 천막 친 데 요거 자기 아마 해 놓은 것은 내가 어데다 짜맸던고 요걸 모르니까 뒤에 와서 처음에 찾을 때에 천막 칠 때에 그 줄 맬 때를 찾지 못해서 많이 애를 쓴 경험이 있으니까 고게다가 끊고 요만치 남궈 놨습니다. 새파라이 남궈 놨어요. 고거 분명히 그 뒤에 맬 가지를 찾기 위해서 표로 그래 놓은 줄 알기는 압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자연을 훼손했어. 보기 싫어.
그래 놓고 모두 요래 가지고 또 어떤 사람은 조그매 해 놓고, 체면 있는 사람은 쪼끄매 해 놓고 어떤 사람은 뒤에 와서 이 거 맺을라 하면은 높은 데 올라가 안 됐으니까 이제 기단하게 잡기 좋도록 한 발이나 또 달아 놨습니다. 한 발 달아 놓고, 또 어떤 사람 보면 뭐 껌종이니 이런 거 꽉 늘어 있어요.
그래 척 가서, 자기네들 가 보십시오. 가 볼 때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어. 사람이 다닌 길만 있고 다른 흔적이 없으면은 아주 개운합니다. 상쾌하요. 그것이 자연 보호하는 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오. 자연 보호가 자기 보호요. 자연 보호가 자기 수명을 길게 하는 것이오. 자연 보호가 장수법입니다. 뭐 때문에 이 자꾸 자연 속에 들어가는 줄 압니까? 장수할라고 들어가는 거라. 자연 보호가 장수요, 또 자연 보호가 건강이요, 자연 보호가 자기 감정을 아주 쾌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래 가 가지고 아무것도 없는데 흔적이 없는데 가면은 새로와지는 것이 아주 새 정신이 맑아지고 좋은데 거기 ‘여게는 아무도 안 왔는갑다’ 했다가 거게 무슨 사이다 병이나 무슨 비니루 병이나 하나 턱 깨어져 가지고 있으면은 그거 벌써 몇 십 년이 됐는지 몰라도 ‘여게 사람들이 하나 왔다 갔구나’ 하면은 벌써 그거 자연이 벌써 감정에 벌써 그만치 속화됐다 그말이오. 이러고 거게 사람들이 삐진 자국이 있으면 그래요. 거게 만일 똥을 눠 놓으면 더 그래.
이래 놓는데 이거 전부 뭐 종이로 더럽혀서 이래 놨지, 또 푸른 줄 붉은 줄 나무마다 주렁주렁 달아서 이래 놨지, 또 파서 천막 자리를 만들어 놨지, 깔비를 거머다 호복하게 놨지, 이 깔비만 좋으면 좋은 거는 좋은데 말이지 이래 놓으니까 저는 하면 좋지마는 실은 다른 사람이 해 놓은 거는 그렇게 자연의 미가 없어졌다 말이오. 이렇지, 저 만당에는 이제 가서 살펴보니까 뭐 똥이 어떻게 많은지. 그걸 모르고 짐승 똥이라고 알고 보니 만져 보니까 사람 똥이라. 이래 가지고 그 똥이 뭐 몇 무더기가 아니라 여러 수십 무더기 있어요. 이게 다 그 관심이 좀 아직까지 어리고 약해 그렇습니다. 아주 유약해서 어려서 그렇습니다.
이러니까, 어떤 구역장에게 내가 말 들었어. 아예 산에 올라갈라 하면 아무도 못 올라가구로 하고 아이들한테 자꾸 똥 눠라 오줌 눠라. 이제 나는 점잖은 말 안 씁니다. 그거 쓰면 잘 실지로 실감이 없어. 이러기 때문에 용변하라 그말 한 하고 소변 용변 할 게 아니라 똥 눠라 오줌 눠라 그만 자꾸 그란대요. 똥 눠라 오줌 눠라 자꾸 이라면, 그래 인제 말하기를, 그래 내가 있다가 ‘그말 하면 무슨 소용있느냐?’ ‘사람은 똥 말하면 똥이 누고 싶고 오줌 말하면 오줌 누고 싶고’ 그거 맞아요. ‘똥 오줌' 자꾸 이리 쌓아면 그래 가지고 자꾸 `누고 가지 안 눈 사람은 못 간다.’ 이러면 다 뉘어 놓으면 가 가지고 그런 일이 없대요.
또 그런 일 있을까 싶어서 아예 비니루 봉지 커다란 거 하나 하고 신문지 하나 넣어 가지고 가 가지고, 급하면, 사람 무슨 일 닥칠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그래 저도 천막에 신문지하고 비니루 봉지 하나하고 딱 이래 묶어 놨습니다. 그 묶어 놓은 뒤로 한번도 사용하지는 안했는데 장 묶어 놔요, 사람이 어떤 일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 놓으면 신문지 펴 놓고 용변해 가지고 그만 똘똘 뭉쳐 비니루 속에 딱 넣어 가지고 그래 달랑달랑 들고 오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어짜든지 오늘 그 학생들 통솔해 가지고 가는 분들 비니루 종이든지 뭐 신문지 이래 좀 준비해 가지고, 자기네들이 수백 명이 갔다 와도 똥 하나 눈 데가 없어야 돼, 오줌은 어짤 수 없고. 오줌은 누면 또 나중에 없어져 버려. 속으로 들어가 버려. 똥 하나 눈 데가 없이 그러면은 자연에 대해서 미안치 안한 것이고 누가 봐도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많이 와도 이거 참 아주 놀랠 만한 수양 받은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내 천막 밑에는 똥 눈 일이 없어요. 혹 요 종이 쪼가리는 떨어져 있지마는 그런 게 없으니까 항상 향기는 공기는 좋소. 향기는 좋고 이렇게 자연의 향기가 나와서 좋은데 그만 내 천막 위에는 그래. 위에는 위에 간 그 사람들이 전부 다 그랬어.
위에 간 사람들이 어쟀든간에 눴어요.
또, 그 만당에서 저 넘어가 가지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그 밑에 좋은 데가 있고 소나무들이 굵고 깊습니다, 좀. 엄컴하이 여름에는 지금은 추워요. 거기도 내가 가 봤는데, 거게 가도 똥이 있어. 거기 있는 거기 가는 사람도 있어요. 거기 가는 사람도 있어.
그 사람은 그렇게 안 했겠지마는 ○○○권찰님 구역에 어떤 사람이 그리 갔는데 고거 나한테 어떻게 했냐면은 학생이 그뭐 삐대고 돌아다녀요, 그래 내가 있다가 ‘너 어찌 왔노? 기도하러 왔나?’ ‘예, 기도하러 왔어요.' `그러면 너 혼자 왔나?’ ‘어머니는 저 아래 있어요.' 어머니는 그 밑에 내려갔다 말이오. 너 내가 어머니 만나 보지 못했어요.
이래 가지고 인제 그랬는데 그런 사람들이 말이요, 그분이 했다 말 아니고 거게 모두 그런 사람들이 그 위에 다 여기는 머니까 여기 목사님도 안 보이고 머니까 괜찮지 싶어서 그만 용변을 해 놨다 말이오. 용변해 놨는데 하나 발견된 것은 그분들이 거기 기도하러 갔었는데 여기 뭐 쓰레기가 거기 있고 비니루 봉지도 있고 밀감 껍데기도 있고 한 무더기 있더랍니다. 그래 가지고 그것을 어제 파고 묻었습니다. 거기 가서 전부 거둬 가지고 파서 묻었어요.
이러니까, 그 묻어 놓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안 보이지마는 그대로 환하이 보이면 누가 볼 때에 ‘허, 이 사람이 와 가지고먹은 저는 좋지마는이렇게 밀감 먹고 이렇게 껍데기 버렸다.’ 밀감 껍데기만 먹고도 그 흘리면 그만 기분 나쁩니다.
그렇지 안해요? 산에 가다가 다른 사람이 밀감 먹고 그 껍데기 흘린 거 또 껌 먹고 껌 종이 흘린 거 그런 거 보니까 반가운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그 마음에, 마음에 불쾌한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그런 거 볼 때 불쾌한 사람? 다 불쾌해요, 우리가. 그러니까,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남에게 좋게 하고 부담을 주지 안하고 불쾌를 주지 않는 그게 신앙 생활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기쁘시게 하면 그런 것 다 들어가 버려요. 신앙 생활을 몰라 그렇지 예수 믿는 신앙 생활을 반대하면 그 사람을 데리고 앉아서 얘기를 해요. 신앙 생활은 모든 인간이 다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신앙 생활 하는 것은 만물이 다 환영하지요.
예수님이 신앙 생활 했는데 신앙 생활 한 것을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다 주라 시인하면서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안했습니까? 이 신앙 생활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공법, 완전 자유 법, 만물들이 다 좋아하는 그 법을 이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다 만물이 좋아하고 다 환영하고 영광을 돌리요.
이러니까, 오늘 가거든 그거 좀 합시다. 여기 벌써 수원지는 좀 신용을 얻었어요.
수원지는 서부교회 교인이라 하면 ‘그 사람들이 오면 뭐 있는 거 전부 쓰레기 통에 줍지 어지럽히지 안하고 또 그 사람들이 와 가지고 자연을 훼손하지 안한다.
보호한다.’ 이래 놓으니까 거기 다니는 신용 얻은 사람은 ‘오십니까?’ 인사하고 기도 많이 하고 내려오라 하고 그뭐 그분들이 가면 불날 거 방화하지 또 자연 잘 보호해서 가고 나면 깨끗이 뭐 그 사람들 한 떼 가고 나면 그만 밑에 구질구레한 거 다 주워서 깨끗해지고 하니까 다 원하고 있다 말이오. 꽃마을도 다 그렇게 벌써 인정을 받고 있어요.
이런데, 어떤 사람들이 들어서 하나가 들어서 그만 버려 버려. 뭐 거지판에는 곱사가 뭐한다 하더나, 뭐라 한다 하는 말 있는데 그 어떤 사람 하나가 나쁜 사람이 가 가지고 그만 전부 욕 다 얻어먹이요.
어짜든지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우리가 자연 속에 들어가서 기도하게 될 터인데 자연을 잘 보호해서, 그 천막 치는 사람들은 이미 깔비를 모았든지 어쨌든지 해 놓았으니까 가 칠라면 거기 쳐요. 딴데 치지 말고. 저게는 천막 자기 터가 있으니까 남의 터에 치면 안 되지마는 여게는 자기 터가 없습니다. 한번 누가 만들든지 만들어 놨으면 거게 또 칠라면 거게 치고, 새로 터 잡지 말고 거게 치고, 또 거게 쳐 또 없으면 또 다른 사람이 와도 또 뒤에 그 암만 만든 사람이 와도 자기 것이 아니라. 만든 사람이 와도 그러니까 쳤다가 또 다른 사람이 오면 또 딴데 하고.
그라고 될 수 있는 대로는 늘 거기 가서 상주해서 매일 거기 가 가지고 있을 그런 사람들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계속해 있을 그런 사람들은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거운 짐을 지지 마십시오. 천막 그런 거 해 가지고 뭐 이렇게 친다는 그런 것보다도, 비니루를 그 큰 거 두 발을 해요. 두 발을 해 가지고 맨끄트머리 저기 한 군데는 뽈끈 짜매 버립니다. 뽈끈 짜매고 또 이 쪽은 열어 놓고, 그래 놓고 한 두 발 되면 말이오. 두 발 되거들랑은 뒤에 반 발 남궈 놓고 앞에 반 발 남궈 놓고 가운데 한 발은 매요. 한 발을 매는데 어째 매느냐 하면은 널찍하게 이래 매지 말고 위에 요만치 매요, 요만치. 위에 넓이를. 넓이를 요만하고, 넓이 요만치 요게 하나 딱 짜매고 요게 하나 딱 짜매고 또 한 발 저 끝에 또 요래 두 군데 짜매고 요래 딱 들면 요거 지붕같이 요래 가지고 비가 와도 다 흘러 내리고 요래 놓으면, 그래 놓고 난 다음에 이 끄트머리 이거는 이래 땅에다 떡 이래 들이 냅둬요. 그라면 공기 잘 들어가고 이래서, 또 아이들 데리고 가면 그만 저 굴 안에 저 들어가서 뭐 염려도 없고 굴 안에 저 안에 넣어 놓으면 몇이든지 다 안에다 넣어 놓고 어머니는 밖에서 딱 이래 앉아 가지고 기도하고 이라면 좋고, 그라다 그만 비니루 들고 오면 되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거 필요 없어. 비 올 때는 그게 좋지만 비 안 올 때는 그것도 안 됐어요. 그만 여기 비니루 한 장 가지고, 가면 우리 그 산에는 오목오목하게 전부 앉을 자리입니다. 한 장 가지고 가 가지고 이 자리 떡 깔고 그만 거기 앉아 그만 기도하다가 또 햇볕이 조리 가면 햇볕 따라 가고 또 더우면 요리 오고 그뭐 하루 자연을 몇 군데든지 오막오막하이 가랑잎이 떨어져 있는 데는 거게 그만 앉으면 돼요.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자유 있고 좋고, 천막만 쳐 놔도 매입니다. 나는 천막을 쳐 놓고 있으면서 그거 뭐 하기가 미안하지마는 나는 그것이 벌써 몇 해를 두고 자꾸 지금 이래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장 그래 할 수는 없고 그러고 그래서 또 교역자들은 아무래도 오도록 해야 되겠다 해서 천막 치는 것을 허락을 했습니다.
다른 이 천막 치는 것은 오늘○○○장로님도 거기 사람이 있으면 있고 사람 없으면 철거해 버릴 겁니다. 또 ○○○집사님도 사람이 있으면 냅두고 사람 없으면 철거해 버릴 것입니다. 인제 밑에는 ○○○씨는 거게 늘 거기 살아요.
거기 사니까 그 천막을 냅두고, 또 여기 ○○○씨는 그 만당에다 해 놨는데 언제든지 일주일에 사흘 밤은 꼭 거기 가 잡니다. 거기 가서 기도하고 또 이까지 걸어오고 이라니까 그 둘 외에는 다 안 냅 둘 겁니다. 그러니 그리 알고 누가 오늘 기도하러 가면 좀 도와 주면 좋겠어요. 그 나무에 전부 이거 줄 매어 놓은 거 그거 다 끌러버리고 또 이미 천막 터 해 놓은 것은 그대로 냅두고 그라면 뒤에 거석하고, 우리가 지금 입산 금지라는 걸 알아야 됩니다. 제가 제일 처음에 양산동 가 가지고 그 묏등 있지요? 묏등 위에 묏등이 아니고 밑에 발 옆에 있는 묏등입니다.
그 묏등에 갔어요. 묏등에 가니까 붉은 모자 쓰고서 올라와요. 그래서 좀 바람 쐴려고 여기까지 왔다고서 사정을 하고 그때 뭘 대접을 하고 그래 근근히 거기서 좀 바람 쐬고 내려왔습니다. 그 산에 올라가는 게 아니라.
이런데 우리는 여기 그만 여기 대신동도 기도한다 하고 또 아는 사람들이고 이래 놓으니까 우리는 뭐 입산 금지라는 거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입산 금지를 완전히 잊어버렸어요. 아주 우리 뭐 아무 데 가면 된다. 그런 게 아니오. 딴데 가도 산에 못 올라가게 합니다. 못 올라가게 하는 건데 입산 금지가 우리 그만 입산 금지의 법을 우리가 잊어버렸고 또 더군다나 그 천막이라 하는 것은 산에 못 칩니다.
이런데 우리가 예사롭게 생각하는데 오늘도 그쪽에 가는 사람들이 입산 금지가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은 이 불법인데 우리 양심은 가책이 안 되는 것은 불법인데 입산 금지를 왜 시키느냐? 산화 때문에 입산 금지를 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산화가 나면 끌 사람이요 불을 낼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양심에 가책 없이 ‘그들이 몰라 그렇지’ 하고 우리가 지금 그래 하면서도 현재 법이 입산 금지가 됐기 때문에 그걸 알아야 되겠고, 그들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들 불 안 낼 사람 같으면 가는 게 아무 상관없는데 불 안 낼 사람들이 가는 것 보고 다른 사람들 불 낼 사람들도 ‘저 사람들은 가는데 우리는 왜 못 가게 하는가?’ 이런 폐단이 있기 때문에 그게 문제입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그러니까, 그거 그런 줄 알고 조심 있게 해서, 우리가 또 하나님 앞에서 뭐 기도하기 위해서 산에 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산인데 누가 금하겠소? 우리가 불 안 내고 말이오. 이러니까 그런 데서 양심 해결을 짓고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불법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이래 하는 것이니까 그런 줄 알고 체면을 차려서 이래 해야 되고 또 자연을 더럽히는 건 우리는 그런 권리는 없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반사들 가거들랑은 꼭 짐승 다니듯이, 다른 사람 발자국 디딘 데 거기 디디고 새로 발자국을 디뎌서 그 모든 자연을 깨뜨리지 말아요. 그러니까 솔솔솔, 짐승은 뭐 십 년이 아니라 대대로 살아도 그 다니는 흔적이 별로 표가 안 나요. 자연을 훼손하지 안하고 이래 다녀요. 이러는데 우리 사람은 가면 그만 자연을 파서 헤쳐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