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22:26
믿는 자의 3가지 성패의 길
1988. 4. 17. 주일오후
본문 : 창세기 13장 8절 -13절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 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오늘 주일 학생들에게 여기에 대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가 오층에서 들으니까 모두 깨닫고 잘 가르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공과 제목에 우리 믿는 사람들의 세 가지 성공과 세 가지 실패의 길이라 그렇게 제목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 세 가지 성공과 세 가지 실패의 이 사실을 일생 동안 당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 기독자들입니다.
불택자는 그 성공과 실패의 길이 없고 전부 실패의 길뿐이지 성공의 길은 하나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자는 언제든지 현실마다 성패의 길이, 성공과 실패의 길이 같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서 내가 성공의 길로 발자국을 떼놓을 수도 있고 또 실패의 길로 발자국을 떼놓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든지 이 성패가 우리 현실에 같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이 같고 또 거주처가 같고 직장이 같고 이러니까 항상 그 자리인 줄 알고 있지마는 실은 시간마다 변해서 자꾸 가고 있습니다.
그 현실에서 자기는 그 현실을 떠나지 안하고 그 현실에서 살면서 죽는 날까지 성공의 길로 달음질 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 자리에서 내내 실패의 길을 달음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현실에는 이 두 종류의 길이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뭐 공간도 같고 모든 존재들도 같고 이러니까 항상 그 자리 그것이라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거기에서 쉬지 않고 우리는 전진하고 타락하고 향상이 되든지 전진이 되든지 또 후퇴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의 길을 취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기독자가 자기가 성공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성공입니다.기독자의 성공은 어떤 것이 기독자의 성공인고 하니 하나님 부자되는 것이 기독자의 성공입니다. 하나님으로 부자 되는 것.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리석은 부자에게 대해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재물로 부요해야 될 필요성은 느끼면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부요할 그런 욕망은 가지지 아니한다. 하나님으로 부요해라. 재물로 부요하는 그것은 언제 어떻게 될는지 모른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기독자의 성공은 첫째가 하나님을 많이 가져서 하나님 부자 되는 것이 기독자의 성공입니다. 여기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이래 모였지마는 하나님은 조그마치도 자기 하나님 삼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을 다 하나님 전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으로 부요한 것이 우리의 첫째 귀한 성공이요 또 둘째 성공은 사람으로 부요해지는 것이 둘째 성공입니다. 사람으로 부요해지는 것, 사람을 많이 얻어서 많은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사람 부자입니다.
사람 부자.
그러면, 하나님 부자, 사람 부자, 또 그 다음에는 이 물질을 많이 가져서 물질 부자 이 세 가지 부요를 가지면 기독자는 성공이요 행복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가 우리가 투쟁하는 목표요 이 세 가지 성공을 하면 우리는 투쟁 성공을 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성공을 할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 현실에서 자기가 하나님을 기쁘게 좋게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하느냐, 하나님을 기쁘게 좋게 위하는 것으로 현실을 판단해 가지고 그 길로 그 방향으로 현실을 처리해서 나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 현실을 하나님이야 어찌 됐든지 자기 좋고 자기 기쁘게 자기에게 유익 되도록, 하나님 생각보다도 자기 생각을 더 많이 해서 자기 좋게 자기 유익 되게 자기를 위하는 그런 방편으로 현실을 판단해서 통과하느냐 하는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 성공과 실패의 결정입니다.
여기에 기록한 창세기 12장으로부터 13장 19장까지 쭉 내려 읽어보면 그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 롯이 하나님에 인도를 따라서 벧엘로 갔을 때에 하나님이 벧엘에 거기 머물러 있으라 이랬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겠다고 벧엘에 머물고 있으라 이렇게 하셨는데 그들이 벧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흉년이들 고 대단히 그 자리에서 견뎌 배기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아주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려우니까 못 견뎌서 하나님은 거기에 있으라고 했지마는 차차 차차 남쪽으로 옮겨서 애굽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 애굽에 가가지고 아브라함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거기서 참 자기 생명까지 빼앗기게 될만한 그런 어려운 지경에 닥치게 됐습니다.
그때사 이 아브라함이 깨닫고 다시 하나님이 머물라고 하신 벧엘로 올라가야 되겠다 하고서 아브라함과 롯이 모든 사람을 거느리고 벧엘로 지금 올라가는 판입니다. 그 올라갈라니까 아이들도 있고 그때는 보행으로 또 짐승도 얼마 거느리고 이래 갈라 하니까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가면서 그 한 달 두 달 한 해 이태 걸리는 가운데에 벧엘까지 가는 데에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크게 모든 것이 부요해졌습니다.
부요해져서 그 벧엘 지방에 가서 있으니까 처음에야 얼마든지 그 지방이 넓어서 뭐 저거 같은 그런 가족들은 몇 가족이라도 살 수 있었지마는 차차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니까 그곳을 두 숙질의 가족들이 살기에 너무 좁아서 자꾸 시비가 생깁니다.
그 시비가 생기는데 그 시비 생기는데 대해서 롯도 걱정하고 아브라함도 걱정해서 그들이 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게서 서로 시비가 있고 이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이 서로 다투지 안하고 화평함으로 지내게 해 주옵소서 하는 그런 기도를 했지마는 서도 면적이 원청 좁고 하나님이 축복해서 양떼들도 많아지고 또 그 종업자 사람들도 많아지고 이라니까 도저히 그 자리에서 살 수 없는 그런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이르렀는데 그때에 그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하기를 ‘야, 너와 나와 한 숙질간인데 우리가 이렇게 여기에 있으면서 자꾸 다투고 이라면 이 다투는 것이 첫째 하나님 보시기에 섭섭할 것이고 또 근심거리가 될 것이고 사람들 보기에도 이 수치스러운 일이니까 이렇게 다투지 말고 그러면 네가 네 자유로 택해라.
지금 이 앞에는 이 소돔들이라 하는 저들은 물도 좋고 땅도 평지고 또 풀이 좋은 그곳이 있고 이 가나안 이쪽에는 풀도 없는 발간 자산이요 물도 없는 그런 곳이니까 한 곳은 좋고 한 곳은 나쁘니 이제 좋은 곳을 내가 할라 하면은 다툼이 일어날 것이고 내 밑에 있는 목자들은 좋아하지마는 서도 네 밑에 있는 목자들이 싫어할 거고 이러니까 그만 네가 어느 걸 택하든지 택해라. 뭐 소돔들을 택하든지 또 가나안을 택하든지 네가 택하는 건 자유로 해라.
이라니까,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롯이 자기 가족들과도 의논하고 깊이 생각을 얼마동안 했습니다. 해 가지고서 그 롯이 ‘그러면 삼촌, 미안하지마는 밑에 자꾸 닳는 사람들이 저래 쌓고 하니까 그만 제가 이 소돔들을 택하겠습니다.
그래도 좋겠습니까?’ 그 아브라함이 ‘그거야 좋기로. 그러면 네가 어느 것이든지 그 택하고 싶은 대로 택해라. 그러면 소돔들을 택하면 또 나는 그러면 또 가나안을 택하고 그래 가지고 우리가 나뉘어서 이런 시비가 없어야 되지 이런 시비가 있으면 하나님 섬긴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욕도 돌아가겠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하니까 그렇게 하는 게 좋다.’ 그래서 롯은 거기에서 요단들을 택해서 다 이사를 했습니다.
다 이사를 해서 가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와 가지고‘네가 어떻게 큰집인데 네가 좋은 곳을 택하지 안하고 이렇게 아주 발간 자산 이 박토 목축을 할 수 없는 이런 곳을 택했느냐’ 이렇게 물었을 때에 그거는 여기에 기록돼 있지 안하지마는 아브라함이 ‘그라면 그저 시비는 계속할 터이니까 부득이 제가 양보를 하고 그렇게 저 좋아하는 대로 그렇게 해서 서로 나뉘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제부터는 내가 네가 나를 바라고 이와 같이 했으니 그러면 네가 나를 바라고 옥토도 버리고 자산을 취했고 또 네가 나를 바라보고 모든 가족들의 그 웅성거리는 여론도 돌아보지 안하고 내 뜻을 따랐고 또 그렇게 모든 면에 조건이 좋고 형편이 좋은 그런 소돔들을 버리고 이런 자산을 택했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전적 내가 네 일을 돕지 안하면 안 되겠다’ 이래서 ‘이제부터는 내가 네 일을 도와서’ 15장에 보면,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말라” 네가 나를 바라보고 이렇게 취한 이 금번 처리가 사람 보기에는 망할 것 같지마는 서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내가 네 방패가 돼 가지고서 네게 오는 모든 재앙이나 방해나 해되는 것을 내가 다 막아 줄 것이고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내가 너에게 큰 상급이 돼서 너는 나로 인해서 승리하고 나로 인해서 부요해지고 나로 인해서 강하여지리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위로를 해 줬습니다.
그것이 여기 기록한 것인데 간추려서 지금 여러분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둘이 신강하고 있을 때에 롯은 자기도 신앙양심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내가 소돔들을 취하면 삼촌이 섭섭해 하실 것이고 또 큰집을 내가 좋은 것을 주고 그 다음 내가 취해야 되지 좋은 것은 내가 취하고 큰집은 저렇게 다 황무지 같은 저런 것을 취하도록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하는 그런 마음에 가책을 가지고서 많이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은 모두 가족들이 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그라면 나는 뭐 어쩌겠습니다.’ 이 자꾸 뿔룩뿔룩 이리 쌓으니까 이거 그만 롯이 견디지를 못해서 참 이거 내가 하나님도 섭섭해 하겠고 또 삼촌도 섭섭해 하겠고 이러나 어쩔 수 없다 하면서 소돔들을 취했고, 아브라함은 그때에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할 것이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그렇게 말씀을 할 때에는 아브라함도 기도 가운데에 내가 이 소돔들을 취하면 하나님도 섭섭해 할 것이고 또 조카도 저 섭섭해 할 것이고 모든 종업자들도 섭섭해 할 터이니까 내가 이 나쁜 것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내가 좋은 것을 취하고 조카를 저렇게 나쁜 것을 주면은 하나님이 노여워하지 않겠느냐 이래서 그때에 아브라함은 자기 좋고 자기 유익 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그 길을 택하기로 작정을 해서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렇게 결정을 지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를 하나님보다 낮추었습니다. 이래서 택한 게 아브라함 길이고 롯은 그 알지마는 서도 어 짤 수 없어서 하나님 좋아하시는 것보다 자기 좋은 것을 택해서 취해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롯이 처음에 갈라진 일호의 갈라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좋은 편을 택했고 롯은 자기 좋은 편을 택해서 이렇게 그러니까 둘이 갈라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기뻐하고 좋아하시는 그길을 택했고 롯은 자기 좋고 자기 유익 되게 되는 그 길을 택했고 그라니까 둘이 갈라진 것이 일호의 가라진 것이 그것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갈라지고, 또 이호로 갈라진 거는 뭘로 갈라졌느냐 하면은 롯은 자기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종업자들 그 전부 가족들 전부가 다 뭉쳐 가지고 ‘안 됩니다.
아무래도 요번에는, 우리가 뭐 망할 것이 뻔한데 어떻게 아무리 큰집 대우를 한다 하지마는 서도 우리 망할 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러니까 어짜든지 주인이 눈 찌근 감고, 이미 좌하면 우하고 이렇게 말씀을 했으니까 네가 뭐 좌하면 나는 우하고 우하면 좌하고 그래 한다고 큰집 아브라함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으니까 고만 소돔들을 택한다고 하십시오. 그래 안 하면 우리는 망합니다. 그래 안 하면 뭐 저도 뭐 내가 이 망할 데 뭐할 라고 따라 다니겠습니까? 따라다니지 안할 것입니다.’ 아마 그런 말도 했을 것이고 ‘에, 그라면 자꾸 그래 하면 이놈의 영감 나도 같이 안 살고 나는 내대로 다 갈란다.’ 이래도 했을 것이고 또 그 자녀들도 ‘아이구 그라면 내가 아버지 따라가지도 안하겠습니다.’ 이래 가지고 가족들이 막 동맹해 가지고서 야단이 났다 그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롯도 참 이거 난처한 일이라.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택할라 하면 이 가족들이 마구 막 등장을 해 가지고서 시비를 걸고, 또 가족들 비위를 맞출라 하면 하나님 뜻을 어겨야 되겠고 이거 참 고민 가운데 있습니다. 고민 가운데 있다가서 롯은 ‘아무래도 할 수 없다 뭐’ 하면서 그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닳지 안하고 그 모든 가족들 좋아하는 그 길을 택해서 ‘소돔들을 자기가 하겠습니다.’ 그렇게 정했습니다.
그랬는데 사람은 다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그 가족들도 롯의 가족과 꼭 같습니다. 물론 뭐 조금 점잔 하기는 하지마는 서도 그 뭐 목자들이 싸웠다는 거 보면 한쪽 싸워 가지고서 싸울 수가 없습니다. 싸웠다는 건 둘이 같이 맞붙었다 그거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에 있는 모든 종업자들도 다 ‘그렇지만 그래도 큰집이 먼저 좋은 걸 택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작은집이 택해야 되지 그럴 수가 어데 있습니까’ 자꾸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때에 하나님 앞에서 자, 내가 이 사람들의 말을 듣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 내가 사람들의 의사를 딿느냐 하나님의 의사를 딿느냐 이렇게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아무래도 내가 하나님의 의사를 딿느냐 이렇게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아무래도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되지 이 가족들의 뜻을 따라서는 안된다 그라고 단정을 지워서 ‘조카야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할 터이니까 네가 좋아하는 대로 결정을 지워라 뭐 주저하지 말고 그렇게 마음에 고민하지 말고 그저 너 좋은 대로 어디든지 하나 택해라.’ 이렇게 말을 하고 완전히 가족들의 의사를 다 두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저거 택하는 대로 그만 그것을 양보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자기가 그것을 양보하고 그 하는 게 낫지 서로 싸워 가지고 어등거리는 것보다 그게 낫겠다 이래서 그걸 결정을 했습니다. 그것이 둘째로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진 걸음입니다. 두 번째로 갈라진 그 이유가 그 것입니다.
롯은 가족들과 사람들의 뜻을 따랐고 아브라함은 가족들의 의사를 딿지 안하고 하나님 한 분의 의사를 따랐고 이래서 거기에서 두 번째로 갈라졌습니다.
또, 세 번째 갈라져서 다 갈라졌습니다. 마지막에 세 번째 가라진 것은 뭣 때문에 가라졌느냐 하면 이 소돔들로 말하면 참 이렇게 자녀 교육하기에도 아주 소돔 고모라 성은 대도시라 문화 도시니까 자녀 교육하기에도 참 좋고 또 거기에는 모든 문화가 다 들어와 있기 때문에 편리하고 또 방목하고 목축하는 데에도 풀도 많고 물도 많고 평지고 뭐 조건이 다 좋습니다.
자. 도시라서 문화가 풍성해, 풀이 풍성해, 또 물이 풍성해, 또 평지라서 모두 목축하기에 편리가 풍성해, 뭐 조건이 참 좋습니다. 조건이 참 좋고 저 가나안은 거기에는 물도 없고 바짝 마른 곳이요. 그러니 거기 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이름을 자산이라. 붉은 자(者)자 뫼 산(山)자, 풀 없는 발간 곳이요.
이러니 거기는 조건이 아주 나쁩니다.
조건이 나쁘고 한 군데는 조건이 좋고 이런데 롯은 ‘아무래도 내가 이 목축을 하고 있으니까, 뭐 별별 생각을 다 가졌겠지요. 우리 삼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잘되고 또 그 덕택에 내가 되고 이러니까 우리 삼촌은 뭐 아무데 가도 괜찮지마는 나는 이 조건이 좋아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서 롯은 조건 좋은 그 소돔들을 택할 라고 이렇게 해서 소돔들을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에 이제 물론 좋은 조건을 다 버리기가 싫지마는 그 좋은 조건을 안 버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을 라고 하면은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안할 터이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자기에게 하나님이 축복하시기에 좀 어려울 것이라 말이오.
이래서, 아브라함은 그저 조건이 나빠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면 살지 못살 것 뭐 있느냐 이래서 조건이 나쁘든지 좋든지 하나님의 축복을 위주로 해 가지고 택했고 롯은 하나님의 축복도 좋지마는 아무래도 조건이 좋아야 되겠다 해 가지고서 조건 좋은 편을 택하고 이래 가지고 갈라졌습니다. 롯은 조건 좋은 편을 택했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 받는 길을 택했고 이래 가지고 갈라졌습니다.
그라면 몇 번 갈라졌습니까, 손가락으로 ? 네, 세 단계로 갈라졌습니다. 이래서 갈라졌습니다. 갈라졌는데 그러면 그 결과가 어찌 됐는고 보자 한 그것이 그 다음에 기록돼 있습니다.
첫째로 자기보다 하나님을 크게 기쁘게 영화롭게 하나님 좋게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한 첫째 가라진 그 가라짐으로 얻은 수익이 뭐 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 부자가 됐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부자가 됐어. 첫째 가라진 데서 하나님 부자가 돼서 하나님 어데 든지 가시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그러면 하나님을 독차지했습니다.
이래서, 오늘까지도 하나님께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또 그 아들 이삭의 하나님이라. 또 야곱의 하나님이라.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은 그 가정에서 독차지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는 데는, 하나님 부자 되는 데는, 돈 부자가 아니고 하나님 부자 되는 데는 그 부자 되는 방편이 뭐이냐? 하나님이냐 자기냐 할 때에 자기를 비어 하나님을 위주로 중심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 부자 되는 길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 아들로서 하나님 부자 된 것은 ‘자기를 비어’ 자기를 비워 동등 될 걸로 여기지 아니하는 데에서 하나님은 전적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가는 길에 현실마다 반드시 눈을 떠 살펴보면 현실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좋게 하느냐 나를 좋게 하느냐 하나님을 위하느냐 나를 위하느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나를 기쁘게 하느냐 꼭 요 두 길이 대두됩니다.
그럴 때에 자기를 비어 하나님 좋게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는 희생이 되어질 때에 자기는 희생이 되어지고 하나님을 높이고 기쁘시게 할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부요 하고 싶은 자는 언제든지 현실에서 자기보다 하나님을 크게 낫게 기쁘게 좋게 위하는 길을 택하면 하나님으로 부자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면, 롯은 어쨌느냐? 그 자리에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위하는 사람으로 됐습니다. 이라니까 그 결과가 어찌 됐느냐? 그는 하나님이 하나도 없고 자기 빈천이 됐습니다. 자기가 아주, 가난하고 천한 자가 됐습니다. 비천한, 자기가 아주, 비천이라 말은 낮을 비(卑)자 천할 천(賤)자, 아주 롯이 현실에서 하나님보다 자기를 위하는 그 길을 택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니까 롯은 참 비참한 비천한 자가 됐습니다.
얼마나 비천한 자가 됐느냐? 뭐 인간 중에 제일 천한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한 인간이 돼서 마지막에는 참 죄인의 조상으로 다른 사람에게 말도 못 할 그런 천인이 됐습니다. 롯은 참 천인 됐습니다. 롯은 다른 사람에게 말도 못할 아주 그런 천한 사람이 됐습니다.
롯은 어떻게 천해졌느냐? 나중에 살다가 저 굴에 가서 살면서 그저 딸 둘 데리고 살다가 그 딸들 그 유혹에 빠져 가지고서 딸로 더불어 동침해서 죄악의 자손을 낸 그 조상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뭐 그 이상 더 천해질 수가 없습니다.
비참하게 천해졌습니다.
하나님으로 부자 되는 것은 요 방편 취해야 되고 현실에서 하님보다 저를 생각하는 고 길은 의례히 하나님은 없고 자기는 하나님 다 잊어버렸고 자기는 비참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거 똑똑히 명심해야 됩니다. 자기가 비참한 자가 왰어. 아주 비천한 자가 됐어.
또 두 번째는, 그 아브라함은 모든 가족들의 의사를 따를 라고 하면 좋지마는 가족들의 의사를 딸지 안하니까 가족들은 모두 삐쭉삐쭉 삐꿔 돌아갑니다. 뭐 그때, 가정은 다 같애요. 가정은 다 같은데 우리 가정도 보고 아무 가정이라도 보면 다 같애요. 그때 아브라함이 가족들의 의사를 딿지 안하고 이제 하나님의 의사를 따를 때에 뭐 비쭉였을 것입니다. 가족도. 하, 참 못산다고. 이렇게 꼭 고집 통으로 이래 하니까 따라다니며 고생만 하지 이거 뭐 살 수 없다고 이라면서, 종업자들도 ‘나도 보따리 싸랍니다. 나도 뭐 저 발간 자산에 가 가지고 저 목축을 어찌합니까? 물도 없는데 뭘 먹인다 말이요?’ 뭐 참 박지기 되게 긁었을 것이고 뭐 짜기를 되게 짰을 것이오. 이러니까 아브라함이 견디기가 어려웠었을 거라.
이래도‘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되지 이 사람들의 뜻 따라서는 안된다’하고서 그렇게 판정을 했습니다.
했는데, 롯은 아무래도 그렇지만 뭐 내가 뭐 의례히 알기야 알지마는 서도 이 너무 사람들의 뜻을 딿지 안하고 이라면 이 사람 다 잃어버릴 것이고 이 사람과 대립이 다 될 것이고 이 사람 다 잃어버리면 재산이고 뭐 가족이고 다 절단나 버릴 터이니까 할 수 없다. 그저 하나님 앞에 자복을 하면서 아무래도 이 가족들의 의사를 따라야 되겠다 하고서 사람을 잃지 않게 위해서, 사람을 붙들기 위해서, 사람 비위 맞추기 위해서, 사람도 하도 박지기를 긁고 아등거려 쌓으니까 그거 좋도록 하기 위해서 롯은 하나님 뜻 그만 눈 지끈 감고 어기고 사람들의 의사를 따라서 이래 하니까 아마 그때에는 롯 좋았을 것입니다. 롯 좋았을 것이요.
‘아이고, 주인어른, 주인어른, 주인어른, 참 뭐 그저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다 살았습니다.’ 또 롯의 처는 ‘영감 영감 여보 여보’하고서 뭐 맛있는 많이 해 주고 굉장했을 것이요. 또 그 딸네기들도 ‘아빠 아빠’ 하면서 뭐 굉장했을 것이오.
이랬는데 그 결과가 어찌 됐느냐? 그 결과가 롯은 차차 차차 사람 다 없어졌습니다. 없어지고 기껏 자기 아내 딸 둘 자기 너이 살았고 너이 살았는데 그때 소돔 고모라 성에 재앙이 내렸을 때에 천사가 말하기를 ‘ 이 재앙이 내리니까 빨리 피난해야 됩니다.’ 이라면서 ‘지금 자기 네 가족 외에 데리고 갈 가족은 없습니까?, 피난시킬 가족은 없습니까?’ ‘뭐 약혼한 사위 둘이 잇는데 그거는 아무래도 데리고 가야 될 터인데’ ‘얼른 가 소리 하십시요, 데리고 가도록.’ 데리러 가니까 말하기를 ‘그 노망한 영감탕구의 말 안 듣는다. 우리는 안 갈 터이니까 우리는 뭐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으니까 안 간다. 그까짓 약혼한 그것도 다 치워 버리고 안 한다. 가거라.’ 이래 가지고 암만 말해야 안 따라 올라 해서 할 수 없어 약혼한 사위 둘 딸 둘 너이, 자기 부부 여섯인데 그만 약혼한 사위 둘이 떨어지니까 인제 넷뿐입니다. 넷인데 가다가 이 자기 아내는 또 뭐 천사가 있다가 뒤를 돌아보지 말고 빨리 도망치라 했는데 ‘이거 도둑놈이 와 가지고서 살림 뺏들어 가라고 이런 소리 하는 거 아닌가’ 하면서 참 그런가 안 그런가 뒤를 슬그머니 돌아봤습니다. 돌아보니까 그만 천사가 뭐 뒤 돌아보지 말라, 돌아보면 재앙 받는다, 돌아보지 말라 했는데 돌아보니까 돌아보는데 그만 그 유황불비 재앙이 와 가지고서 탁 때려서 당장 그 자리에 죽어서 지금 뭐 영국 박물원에 가 있다 하는데 나는 그 보지는 못했어요. 그 지금 소금 기둥이, 롯의 처 소금 기둥이 돼 가지고 거기에 있대요, 지금도 그러니까 인제 셋 가족밖에 더 잇습니까? 셋 가족이 가 가지고 인제 그 소알 성이라는데 거기 가 가지고 산에서 굴을 파고서 인제 거기서 지금 사니까 거지 중에 거지가 됐습니다. 단지 딸 둘 자기라.
딸 둘 자기 이래 가지고 있는데 나중에 이 딸들이 가만 생각해 보니까 그 부근에 사람은 없지 이러니까 아무래도 씨를 받아야 이거 자손이 퍼질 터인데 달리는 씨받을 수가 없으니까 뭐요 요새와 같이 그렇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없고 또 그 성은 다 유황불비로 불타 버리고 없어 버리니까 없다 말이오. 요새는 뭐 백리가 멀지 안하지만 그때는 백리가 멀어요. 사람들 살 때 보니 옛날 그때는 고 마음에서 딴 마을에 못 가요. 그 뱅뱅뱅 그리 돌아다니지. 요 덤불 밑에 나 가지고 조 덤불 밑에 묻히고 그랬어요. 요새는 미국도 가고 이래 하지마는 서도.
이러니까, 아버지를 술을 취하도록 해 가지고서 오늘 밤에는 언니 네가 동침해 가지고서 그래 인종을 받고 또 내일 밤에는 내가 술취하도록 해 가지고서 동침해 가지고서 그래 인종을 받고 또 내일 밤에는 내가 술취하도록 해 가지고서 동침해 가지고 인종을 받자 그래 가지고서 이제 인종을 받기를 받았습니다.
받았는데 그라고 나니까 나중에 가서 그 지나가고 보니 부녀간도 그만 그 사이가 좋을 수가 없어. 부녀간도 그만 부끄럽고 원수 되고 롯도 생각하니까‘이 딸자식 둘 때문에 내가 이런 비참하고 망령된 이런 인간이 됐다’ 하니까 뭐 같이 있어도 원수같이 천리 만리 거리 멀다 말이오.
이러니까, 롯은 사람 한 사람도 제 사람 없이 거지 돼 버렸습니다. 완전히 사람으로 그렇게 가난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많이 취해서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사람 부자 될 라고 취한 놈의 방편이 사람에 대해서 완전 가난이 돼서 한 사람도 제 사람 없었어. 알겠습니까? 요게 그 결과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사람 의사를 하나님 의사 때문에 사람들의 의사를 버리니까 사람 다 잊어 버려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되겠다 하고서 그 길을 택했는데 그러면 아브라함은 그 결과가 어찌 됐느냐? 아브라함은 그때에 아들은 이삭 하나 독자를 ·주셨지마는 서도 차차 차차 그 자손이 커서 열 두 지파가 되었고 또 신약시대에 와서 십이 사도가 되었고 천하에 택함 받아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아브라함이오. 우리 선조도 아브라함이오 전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됐다고 하나님께서 전부 아브라함 자손을 다 만들었다 말이오.
이러니까, 천하에 역사에 육천 년 동안에 제일 사람 부자가 누구냐? 사람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 사람 부자가 누구냐? 사람 부자가 누굽니까? 000목사님. 사람 부자가 누구요? 예수님이 제일 부자니까 대답은 잘했지만 내가 묻는 사람, 시험관에 따라서 해야 되지, 네, 사람 제일 부자는 예수님이요 제이 부자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됐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사람으로 부자 되는 방편은 사람들 비위와 뜻을 맞추는 것보다 하나님의 비위와 뚯을 맞춰서 하나님 비위와 뜻 때문에 사람 비위와 뜻을 눈물을 흘리면서 버리고 하나님의 비위와 뜻을 맞추는 그 사람이 사람 부자가 되는 것을 여기에서 우리가 똑똑히 잡아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현실에서 사람 비위의 뜻을 버린다는 것이 힘들지마는 서도 사람 비위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비위와 뜻을 찾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사람 부자가 됩니다. 그 사람들이 다 이 아브라함의 사람이 다 됐어.
이래서, 사람 성공하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배우고, 셋째로는 그 롯은 자기가 물질에 대해서 그 모든 조건 좋은 거, 물 좋고 땅 좋고 뭐 문화 좋고 교통 편리하고 자원 넉넉한 이것이라야 부요해지겠다고 롯은 그 길을 택했는데 그 길 택한 그 결과가 어찌 됐느냐? 롯은 그 오두막 집 한 칸도 없어서 저 굴 속에 살았다 해, 굴속에 성경에 보면 굴속에 살았다. 굴속에 살았다 했어. 굴속에 살았으니까 그렇츰 거지될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세상에 있는 조건이 좋아야 되지 아무리 하나님이 섭섭해도 조건이 좋아야 되지 조건 나쁘면 안된다. 하나님의 축복보다 조건을 위주로 삼아서 한 그 사람의 결과가 요렇게 비참한 것을 요렇게 거지 되는 것을 보이고 아브라함은 그라면‘ 뭐 조건 암만 좋아도 하나님의 축복 없으면 안된다.
조건보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되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데에는 아무래도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해야 되지 하나님의 축복을 기다려야 되지 내가 하나님의 축복을 거부하고 좋은 땅 차지하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망치는 것이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라면 내가 부득이, 좋은 땅 차지할 수 있으면 차지하지마는 서도 좋은 땅을 차지할라 하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야 되고 형제를 섭섭하게 해야 되고 이러니까 부득이 여기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서 나쁜 땅을 차지해도 하나님의 축복을 이제 뺏기지 안하도록 하지.’ 이래 취했으니까 아브라함은 뭐 그때도 부자가 됐습니다.
삼백 열 여덟 사람이 자기 재산을 지키는 수위요. 그라고 단독 집으로서 사대 강국을 결퇴하고 전쟁에 이겼습니다. 그라고 아브라함은 그뿐 아니라, 아브라함은 인류의 모든 금생에 내세에 그 소유 전부가 다 아브라함의 소유입니다. 전부 아브라함의 소유요. 이러니까 여러분들 여기에서 간단하게 우리가 요걸 깨닫고 살아야 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랐으니 첫째 그것이 무슨 주의입니까? 그게 무슨 주의요? 신본주의.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랐으니까 그 무슨 주의요? 하나님을 닳는 것을 무슨 주의라 합니까? 하나님 닳는 것을 뭐라 합니까? 신앙. 신앙. 아브라함은 신앙주의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라서 하나님을 지극히 크고 높이고 지극히 거룩하신 분인 것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주의라는 거요, 기독교 신앙주의. 기독교 신앙주의입니다.
또, 인간들의 의사를 딿지 안하고 하나님의 한 분의 의사에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한 분의 의사에 따라서 움직였고 롯은 많은 사람의 다수가 원하는 뜻을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그러면 롯은 무슨 주의며 아브라함은 무슨 주의입니까? 저 0장로님. 뜻을 딿는데? 네, 고거 좀 어려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재주의입니다. 알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독재주의요 한 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동하고 정하는 독재주의입니다. 그러면 롯은 무슨 주의입니까?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롯은 민주주의요.
롯은 인간들의 뜻을 따른 민주주의요. 아브라함은 하나님 한 분 뜻을 따라서 하는 독재주의, 기독교는 독재주의요. 하나님 한 분의 뜻에 따라서 동하고 정하는 이것이 인간들의 뜻에 타협하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총공회의 종다수 가결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 하나를 따라서 하기 때문에 이거는 독재주의라.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주의라. 이렇게 다수가결이 아니고 한 분인 참인 그걸 따라서 가는 것이 우리 총공회라 그렇게 정관에 만들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또, 롯은 그렇게 조건 좋은 것을 취해서 갔고 또 아브라함은 이제 조건 나빠도 하나님의 축복을 따라갔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주의. 하나님의 축복주의. 롯은 현실주의입니다. 현실주의. 롯은 현실주의요.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의 현실주의가 어떻게 망하고 기독교 축복주의가 어떻게 흥하며 기독교 민주주의가 어떻게 망하고 기독교 독재주의가 어떻게 흥하는가? 또 기독교 자기 인본주의. 기독교 신앙주의 그것을 우리가 구별해서 아예 현실에서 요렇게 똑박또박 현실마다 요 아브라함과 롯의 성패의 길을 살펴 가지고서 현실마다 아브라함의 길을 따라가는 데는 절대 실패가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거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하고 하나하고 보탰는데 하나 된다는 말과 같소. 그거 이치에 없고. 물리에도 맞지 안하고 하나님의 주권자의 이치에도 맞지 안하고 진리에도 맞지 안하고 영감에도 맞지 않습니다.
안심하고 현실마다 아브라함과 롯을 공부한 요대로, 고대로 따라 나가면 그 결과는 다 성공이 되고 롯의 길 따라 나가면 다 실패 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