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21:52
미래관. 존재관. 전체관
1988. 12. 30. 금새벽
본문: 히브리서 11장 8절∼10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읕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블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사람은 다른 모든 생명을 가진 동물이나 곤충이나 그런 것들과 같지 않습니다.
곤층도 동물도 다 생명이 있지마는 그것은 생명이 끊어지면 즉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 존재가 아주 완전히 없어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것들과 달리 영육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사람인데 영도 영원히 멸해지지 아니하고 육도 영원히 멸해지지 않습니다. 이래서 인생은 불멸의 존재라, 멸해지지 않는 존재라, 없어지지 않는 존재라.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존귀하게 되면 한없이 존귀하게 되고, 또 비천하게 되면 한없이 비천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존귀가, 비천이 언제나 현실이라는 이 현실에서 미래를 만들어서 나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의 실패는 영원한 실패요. 현실의 성공은 영원한 성공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죽는 날까지 그 현실을 바로 걸어갔다고 하면 그 사람의 영원은 생명과 평강이 됩니다. 그러나 현실을 실수했다고 하면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과 평 강은 다 실패되고 불리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은 이 현실만 보고 맞추어서 삽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현실만 보고 사는 게 아니고 현실은 미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미래라는 그 원인을 생각하면서 현실에서 조절을 하려고, 조정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만 잘 살려고 보고 살고, 또 수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수많은 종교들이 있는 그런 종교의 사람들은 다 죽은 후 무궁한 세계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를 생각하면서 거게서 손해가지 않도록 준해서 그렇게 삽니다.
그러나 장래만 보고 살면 되느냐? 장래를 보고 산다는 그 준비 생활로 항상 매일 매일을 생활하는 것은 좋기는 좋은데 그것이 바로 되느냐, 잘못 되느냐 하는 데 대해서 문제가 또 있는 것입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현실로 사는 그것은 좋지마는 사는 데에는 또 그 안에 들어가서 잘못 사느냐, 바로 사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살아야 하겠고, 또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사는 데에는 바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잘못 살면 안 되겠습니다 바로 살아야 하는 데에는 현실이라는 그 모든 생애는 어느 구멍에서 나오는가? 현실이라는 그 생애는 지혜와 총명에서 나옵니다. 지혜와 총명에서 나오는데 지혜는 어떤 것을 가리켜 지혜라고 하는가? 미래를 아는 것을 가리켜서 지혜라고 말하고 또 총명이라 하는 것은 미래 파거 현재 모든 것에 대해서 아는 것을 총명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미래를 아는 그것을 지혜라고 하고, 또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 또 자기, 또, 만물, 또 창조주 하나님 이런 데 대해서 그런 것을 아는 것을 가리켜서 총명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총명이 참 보배고 지체가 보배인데 보배인 것만치 총명이 참 보배인 동시에 아주 크게 화가 되고 지혜가 화가 됩니다. 이래서 지혜와 총명을 가시서 미래나 모든 것을 다 아는 총명이나 그것을 가졌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또 그것이 바로 가졌느냐, 잘못 가졌느냐 하는 그것이 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와 총명이 땅에 속한 거 있고 하늘에 속한 거 있다. 그러면 하늘에 속한 것이라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이요, 땅에 속한 것이라 말은 모든 피조물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땅에 속한 것은 그것은 다 사망이요, 하늘에 속한 것은 다 생명과 평강인 것입니다.
이래서 그것을 성경에 다른 말로 하기를 뭐 라고 말했느냐?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 했는데 영의 생각이라 말은 성령의 생각이라는 말이니 하나님의 생각이라 말이요, 육체의 생각이라 말은 심신의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심신은 전지자가 아닙니다. 인간의 심신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만들어 낸 그 생각이 그것이 바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대로 하면 사망이오. 영의 생각이라 말은 성령을 가리켜서, 하나님 영(靈)자 영입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 그러면 생각이 어데서 나왔는가? 그것이 지혜와 총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에서 나오는 그 생각대로 살면 생명과 평강이 되고, 또 하나님 없이 인간의 심신 지혜와 총명에서 나온 생각대로 살면 사망이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현실을 조심해서 미래를 잘 건설해 나가고 잘 닦아서 나가야 하는데, 미래를 위해서 현실을 조심해 나가는 데에는 하늘에서 주시는 그 지혜와 총명을 배아야 현실을 바로 살아 나가지 그게 없으면 바로 살아 나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지혜가 뭐인데? 지혜라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미래관이라 그렇게 탈할 수 있어. 미래관. 아직까지 닥치지 아니한 앞에 있는 그런 것들을 네가 어찌 보느냐? 관이라 말은. 볼 관(觀)자를 쓰는 건데, 그러면 미래를 어떻게 네가 보고 있느냐? 미래를 잘못 볼 수도 있고 바로 볼 수도 있습니다.
미래를 바로 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만이 바로 보게 하고 땅에 속한 지혜는 미래를 전부 삐뚤어지게 꺼꾸로 보도록 해 놨습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주장하는 영이 악령이기 때문에 악령은 인간을 멸하는 것이 저의 목적이요, 저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두 영 사이에 끼어 있어서 우리가 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살 때도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살 때는 다 생명과 평강이요, 악령으로 말미암아 살 때는 다 사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령으로 사는데 악령 이것이 우리 속에 와서 우리 마음과 생각과 모든 몸을 그놈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 그게 주관이 되면 우리 마음과 몸이 완전히 변질이 돼서 이것은 완전히 사망을 자취하는 그런 게 되고 맙니다.
에덴 동산에서 악령이 아담 해와에게 들어왔을 때에 아담 해와는 얼마나 변질됐던가!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지혜가 왔을 때에는 '선악과는 먹으면 죽는다' 이렇게 알았는데, 마귀가 들어와 가지고 그에게 오든 지혜와 총명을 줬습니다.
마귀의 지혜와 총명을 받았습니다. 마귀의 지혜와 총명을 받고 보니까 선악과가 그렇게 자기에게 좋아서 안 먹고는 안 될 만치 그렇게 좋았습니다. 좋았는데 따먹고 나니까 그만 멸망이고 헛일이 되고 말았어.
이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도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총명을 받을 때와 배암의 지혜와 총명을 받을 때에 이렇게 아주 판이하게 달라진 것처럼 우리도 현실 현실마다 이렇게 판이하게 달라지니 우리가 조심하지 않고 살아서는 낭패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멸망할 지혜와 총명을 가진 것이 누가 가졌습니까? 멸망할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멸망할 지혜와 총명을 활용하는 자가 누굽니까? 멸망할 지혜와 총명을 활용하는 자가 누굽니까? 활용하는 자기 자기 마음이요 자기 몸입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이요 자기 몸이면 자기 마음과 몸이 이것이 완전히 변질이 됐습니까 자기 마음과 몸이 물들은 거 모양으로 잘못된 감염 이됐습니까 변질됐습니까? 변질됐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감염됐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저 뒤에는 안 드네요. 감염이라 말은 물들었다 말입니다. 물든 것은 탈색하면 됩니다. 탈색하면 물이 빠져나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성령이 우리 심신의 주인될 수도 있고 악령이 우리 심신의 주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래서 악령이 심신의 주인된 이것을 가리켜서 옛사람이라 이러는데 이것을 '벗어 버리라' 했습니다. 탈색해라. 벗어 버리라. 또 '새사람을 입으라.' 새로 성령으로 물들여서 감염을 받아라 하는 그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사망과 생명이 한테 붙어 있고, 성공과 실패가 붙어 있고, 하늘의 지혜와 총명과 땅의 지혜와 총명이 둘이 한테 붙어 있습니다. 이것을 떼지를 못합니다.
언제 떨어지느냐? 세상을 떠날 때에, 천로역정에 보면 비유를 해서 마귀란 놈이 성도를 꾀우는 데에 꾀우다가 제가 그만 안 되면 손 떼 버리는가? 그렇지 않고 오른발을 천국문에 들여다 놔도 달라붙어서 지금이라도 유혹하려고 하다가 원발을 다 들여다 놔도 또 그래도 유혹하려 하다가 다 들어가고 문을 딱 닫아 버리면 '아이고, 실패했다'하고 돌아온다 그렇게 표현을 해 놨습니다. 그러기에 마귀는 끝까지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성령과 마귀를 이것을 생각하고 성경을 보면 성경이 그것을 낱낱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출애굽에도 보면 모세는 하나님 편에서 성령의 역사를 했고 바로는 마귀 편에 서서 마귀 역사를 했습니다. 마귀의 성격이 어떤가? 그놈이 얼마나 끈질긴가? 얼마나 끈기가 있는가? 그것을 보면 바로가 벌써 아홉 번이나 재앙을 만나도 놓지 않았습니다. 항복하고 또 달려들고 또 달려들고 이러다가 마지막에 장자 재앙 할 때도 놓지 않았습니다. 홍해에서 완전히 매장이 돼서 전멸이 되고 난 다음에라야 그 다음에 할래야 할 수 없어서 손을 떼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는 우리에게 끈질기게 따라다닌다는 것을 이것을 알고 우리는 저항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늘에 속한 지혜와 총명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무슨 말이냐 하면 미래관을 하나님에게 받고, 또 총명은 제가 다른 말로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만물관. 총명은 만물관. 만물 관이라 말은 모든 만 가지 모든 일을 보는 것, 일을 이렇다 저렇다 자기대로 자기 나름대로 말하는 것, 또 모든 존재들을 보는 것, 모든 인생들을 보는 것, 또 창조주를 보는 것 이런 것을 가리켜서 만물관이라, 만 존재관이라, 인생을 보는 것을 인생관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데 이 만물관을 바로 가지는 것이 중요하고 또 미래관을 바로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 존재관을 바로 아는 것을 가리켜 총명이라, 우리 속에는 만존재를 바로 알려고 하는 그것이 우리 속에 들었습니다. 그게 총명이오.
사람마다 총명, 그 양심이라는 요소가 있고, 총명이라는 요소가 있고, 지혜라는 요소가 있고, 이성이라는 요소가 있고. 감정이라는 요소가 있고, 정서라는 요소가 있고, 욕심이라는 요소가 있고 한 마음 속에는 모든 많은 기관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바로 된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우리가 바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지혜라 말은 미래를 보고 미래를 아는 것을 지혜라 말하고, 총명이라 하는 것은 미래 현재 과거 오든 존재 전부를 아는 것을 총명이라 이러는데, 전부 아는 이것이 참 보배지마는 전부를 바로 알면 한없는 보배지마는 전부를 잘못 알면 멸망이라. 전부를 잘못 알면 멸망이고 또 미래를 바로 알면 보배지마는 미래를 바로 모르면 낭패가 된다 그거요.
그러면 이 미래를 아는 지혜나 총명이 바른 것 있고 틀린 것 있다. 바른 것 있고 틀린 것 있는데 바른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위에서 온 위의 지혜와 총명이라 그래 말했고, 하나는 아래 땅에 속한 지혜와 총명이라 이렇게 말을 했는데. 위의 것은 바로 아는 것이고 땅의 것은 삐뚤어지게 아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아 사람의 지혜와 총명이 바르면 그 사람의 모든 현재와 미래는 성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바로 아니까 아는 그대로 사람은 행동하고 아는 그대로 계획하고 아는 그대로 소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미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실패자입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 미래의 하나를 말한다면 우리 미래는 사람이 죽고 나면 반드시 그 다음에 부활해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아 가지고 영원 무궁한 보응을 받게 된다 하는 그것이 우리가 아는 것인데. 불교에서는 또 어떻게 아느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그것이 다시 환생을 한다. 사람이 죽어 가지고 다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배암이 될 수 있고, 개가 될 수도 있고, 풀이 될 수도 있고 이러기 때문에 네가 뭐이 될지 오르기 때문에 네가 만물을 사랑해야 된다. 네가 배암될지 아나? 네가 들이 될지 아나! 네가 개가 될지 아나? 이러기 때문에 네가 개가 될지도 모르면서 네가 개를 잡아먹는 것은 너를 잡아먹는 거와 같기 때문에 안 된다.
이래서 그 불교에서는 그렇게 보는 그걸 말해서 불교의 윤회론이라 이럽니다.
윤회 빙빙 돌아간다. 사람이 개되고 개가 사람되고 자꾸 이렇게 빙빙 돌아간다고 해서 불교의 윤회론을 가르쳐서 말합니다. 그게 틀렸어. 이러니까 그 육만 봤어.
녜, 육만 보면 그렇게 보기 쉽습니다. 왜? 사람이 죽으면 흙이 되고 흙이 되면 그것이 또 뭐 이런 거 저런 거 모든. 거 풀도 되고, 또 물도 되고 모두 다 이런 거 저런 거 되지 않습니까? 되나, 하나님이 빌립보서 3장 끝 절에 보면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능력으로 그 모든 것을 다', 본인의 육체는 본인의 육체로 다 다시 수립을 하십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부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래 가지고 자기의 뭐 손톱 하나도 딴데 가지 않고 그것을 다 살려내서 자기 손톱은 자기 손톱 자기 눈은 자기 눈. 자기 귀는 귀 요렇게 다 살려냅니다. 살려내 가지고 그 이목구비 수족의 심신의 천체가 땅위에 있을 때에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그 공변된 보응의 심판을 하나님이 하셔 가지고 영원한 그의 보웅의 대우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불교는 벌써 거게서 그것이 육으로써 자꾸 이거 윤회론을 말하고 기독교는 부활론을 말하고, 그들은 석가모니는 피조물이요 인생인데, 인생이 그들에게 교주가 되고, 또 그들은 무슨 불(弗)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저희 상상으로써 꾸며 놓은 것이지마는 불(弗) 이 저희는 자꾸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마는 기독교는 없는 가운데서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 대주재가 있어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불교는 불경이 진화론입니다. 자꾸 이거 하나씩 둘씩 보태 가지고 연구해서 진화된 것이고 기독교는 계시론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걸 하나 보여 주면 알고 둘 보여 주면 알고 이래 그분이 인간에 따라서 이렇게 지금 보여 주시는 것이고, 이거는 인간들이 자꾸 만들어 가지고 지금 연구에 신구를 가해 가지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는 철학입니다. 불교는 철학 중의 철학이오.
유교는 그 철학성보다 도덕성이 많기 때문에 그거는 하나의 도덕이라고 말하고 이제 불교는 완전한 그 철학입니다. 철학이라 하는 건 사람에서 뿌럭지 받아 가지고 올라가는 게 철학입니다.
이래서 이 지혜 미래관, 총명 모든 존재관, 이것을 바로 알아야 되겠는데 그러면 인생이 뭐이냐? 만물이 뭐이냐? 이 세상이 뭐이냐? 그러면 이 세상은 영원히 있으리라고 이래 생각하는데 또 성경에는 보면 이 세상은 앞으로 불탈 세상으로 그렇게 말씀했다 말이오. 그러면 이렇게 지혜와 총명 온전한 지혜와 총명 미래관을 바로 가지고 전체관을 바로 가지는 지혜와 총명을 올바른 걸 가지려고 하면, 올바른 걸 가지려고 하면 어데서 배워야 올바른 걸 가질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걸 배울 수 있는 것은, 위에서 내려온 지혜와 총명이라 말은, 위에서 내려온 지혜와 총명이 어데 있는데? 위에서 내려온 지혜와 총명이 곧 우리에게 주신 신구약 성경 말씀이요. 성경 말씀으로서는 그걸 다 기록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 말씀 속에 은밀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문서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문서로 우리에게 가르쳐 줬다고 해서 문서 계시라 그래. 문서로 열어 보이셨다. 또 문서로 열어 보이신 그 안에는 은밀 계시라, 무한한 은밀을 은밀히 열어 보이신 것이 있으니까 은밀 계시는 뭐이 은밀 계시인가? 은밀 계시는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알려 주는 그것이 은밀 계시입니다.
그러면 바른 지혜와 총명을 우리가 받으려고 하면 어데서 받아야 되느냐? 성경에서 받아야 되고 영감에서 받아야 됩니다. 성경에서 받는 것은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또 자꾸 읽고 읽고 자꾸 연구하고 연구하고 이래야 됩니까? 성경을 바로 아는 데에는 성경을 바로 아는 그 방편을 가리켜서 학습 문답 할 때에 뭐라고 배웠습니까? 성경을 바로 아는 방법이 뭐입니까? 알고 실행하는 거. 알고 실행하면 알려 주시는데 아는 거 실행은 안 하고 자꾸 알고 더 알려고 하는 자에게는 삐뚤어지게 나가게 만들어 버리지 하나님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알고 실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순종 안 하기 때문에 안 알려 주는 것인데 알기만 하고 자꾸 더 알려 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안 가르쳐 주니까 그 기회에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꺼꾸로 가르친다 말이오.
이러니까 책상 위에 앉아서 성경을 연구한 신학자들이 다 삐뚤어지게 나갑니다 다 삐뚤어지게 나가고, 그 신학자 가운데서 자기가 책상 위에서 연구하면서 그대로 실행 실천을 하는 그런 신학자는 점점 바로 알아 나가지마는 그 실행은 하지 않고 행하지는 않고 자꾸 성경을 알기만 자꾸 하는 그런 사람들은 바로 알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바로 아는 사람은 신학자보다도 성경을 아는 대로 실행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글도 오르는 무식한 그 사람이 성경을 바로 알 수도 있다 그거요.
이래서 우리의 영원한 흥망성쇠는 하늘에서 내려온 그 지혜와 총명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흥망성쇠의 원인이 된다. 바른 지혜와 총명을, 바른 미래관과 전체관을 가지는 그것이 우리의 흥망 성쇠의, 생사화복의 원인이 된다. 왜? 그것이 들어서 현실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현실에서 영원 장래는 결과로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알아야 되겠는데 성경 말씀을 바로 아는 그것이 곧 바른 지혜를 아는 것이요 바른 총명을 아는 것이니까 성경 말씀을 바로 알아야 되겠는데 바로 알려고 하면, 바로 알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바로 알아집니까? 성경 말씀을 바로 아는 방법을 좀 말씀해 보십시오. 여기 성결교회서 온 분? 그 실행하는 거. 요게 간단하지마는 요게 모르면 모른다 말이오. 꼭 성경을 바로 아는 데는 뭐 주석을 들여다보고 하는 거, 주석 들여다보는 것은 뭐이냐 하면 다른 사람이 어째 보느냐? 사람 말하는 거 따라가는 것이고 자기가 아는 대로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는 대로 실행하면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말했다 말이오. ''내 말에 거하면 채 내 제자가 되고 너 아는 대로 실행을 하면 네가 변화가, 사람이 변화가 되어지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렇게 말씀했어.
이러니까 우리에게는 현실 생활이 중요하기 때문에 현실 생활이 바로 되는 데에는 바른 지혜와 총명을 가져야 되겠고, 바른 지혜와 총명을 가지는 데에는 신구약 성경 말씀을 알고, 아는 대로 행하고, 또 양심을 써서 자꾸 영감을 받도록 이렇게 해야 된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길은 바로 나가는 데에는 신구약 성경과 영감의 인도를 받아야 되는데 성경 인도를 받는 것은 성경을 아는 대로 행하는 것이 성경 인도를 받는 것이요, 또 영감받는 것은 아는 대로 행하면서 자시 양심을 써 가지고 자꾸 이와같이 지금 아는 대로 행하면 영감 받는다. 성경을 아는 대로 행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변화가 되어지고 또 아는 대로 양심을 써 가지고 행하면 뭐 받습니까? 양심을 써 가지고 행하면 뭘 받습니까? 영감받아.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이렇게 하라 할 때에 양심 안 쓰고도 그대로 할 수 있습니다. 양심 안 쓰고도 그대로 할 수 있어. 성경 말씀대로 행하기는 행하는데 양심 쓰지 아니하고 성경 말씀을 하나의 법칙으로 삼아 가지고 그 법칙대로 행하는 그것은 양심을 쓰지 않고 하기 때문에 그대로 행하는 것만치 그 가치의 댓가를 받지마는, 댓가를 받아 자기가 좀 육체가 변화가 되어지지마는 성신의 감화는 못 받는다 말이오. 아는 대로 행하는 데에는 자기 양심을 써 가지고 행하면 영감을 받는다 말이오.
그러면 영감은 성신의 감화, 성령 받는 건데 영감은 뭣로 받느냐? 양심 쓰지 않고는 절대 영감받지 못합니다. 또 사람이 이런 거 저런 거 바로 아는 데는 성경이 아니면 바로 알지 못합니다. 성경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바로 알기는 압니다. 알지마는 영감을 받지 못해. 양심을 쓰기 전에는 영감을 받지 못해.
이러니까 그것이 중요하니 우리가 성경을 알아서 성경 인도, 영감 인도를 받아야 되는데, 오늘 아침에 지금 이 본 말씀은 뭣 때문에 이 말씀을 보느냐?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보고 영감을 받으려고 애를 써도 또 이것만으로 다가 아니고 또 무엇이 있다 그말이오. 있는 그것을 지금 말하는데.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요게 중요해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고 인도를 졸졸 따라가면 되는데 그래서 앉아서 성경 연구하고 영감 인도하는 그것도 중요하지마는 그걸 모르면 그만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또박또박 한 자욱 한 자욱 따라가면 된다 그말이오. 따라가면 돼요. 한 자욱 한 자욱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을 그때 모세를 시켜서 성막을 지을 때에 성막을 쭉 한목 이래 말해 놓으니까 그 성막 짓는 걸 그걸 한목 이래 말해 줬지마는 사람은 잘 오른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쭉 한번 말해 주고 난 다음에는 성막을 지을 때는 어떻게 했느냐? '네가 요거 한 조각을 끊어라.' '요걸 또 요렇게 해라.' 하나씩 하나씩 시켰습니다. 하나씩 시킬 때에 그 하나 다 해 놓고 나면 그다음에 또 '요거 또 해라.' 요렇게 하나씩 하나씩, 그러니까 우리에, 그와 마찬가지로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한목 다 주지마는 우리의 구원, 우리 성전을 만드는데 성전을 만들고 우리 구원을 만드는 데에는 한목 신구약 성경 말씀을 준 이거 가지고 만 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거 가지고 우리가 하지 못합니다. 하나 하나 시켜요.
하나 하나 시켜. 하나 하나 시키는데, 그러면 하나 하나 시키는 그것을 어떻게 시킵니까? 요거 해라 조거 해라 시키는 그것이 어떻게 시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가 원 하든지 안 원하든지 당신이 내게 대한 현실 현실을 자꾸 줍니다. 계속해서 현실을 주십니다. 계속해서 요 현실 주시고 조 현실 주시고 자꾸 그 현실 주시는 고것이 뭐이냐? 하나 하나 만들라 하시는 것이요.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일생을 어째 살아야 되느냐, 어째? 그거 지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고걸 우리가 생각해 가지고는 안 된다 말이오. 우리가 생각할 만한 그만한 총명이 없고 지혜가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세에게 성막 지을 때에 '요거 하나 해라' '고거 하나 하라' 그말이오. '구슬을 만들어라', 또 '요거 베를 짜라',또 '요거 또 나무를 이거 깎아라', ' 얼마치로 깎아라', '무슨 나무로 해라' 하나 하나 말하는 대로 그대로 해 가지고 나중에 성막이 됐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 되었음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라.
그러기 때문에 그때는 하나님이 하나 하나 성막 짓는 걸 시켰지마는 오늘 우리는 우리 자체를 하나님이 영원히 내주 하실 수 있는 성전으로, 하나님의 집이 되는 거,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거,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말은 우리말로 표한 말인데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 가지고 그분이 내 마음의 주인이 되고, 몸의 주인이 되고, 생각의 주인이 되고, 영의 주인이 되고, 내 주인이 되면 그분이 주장하면 내 몸이라 하는 것은 완전의 도구가 되고 만다 말이오. 완전의 기관이 되고, 완전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하나 하나 시키는 것은 뭐이냐? 우리에게는 한 현실 한 현실 줄 때에 한 현실 한 현실에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것이 바른 이 성화구원 바른 건설이 됩니다. 그러면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짓는 사람이 되고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사람이 안 된다 말이오. 우리 건설구원 우리 행위 건설이나, 또 우리의 지식 건설이나, 우리 자체 건설이나 이 모든 건설을 할 때에 하나님이 하나 하나 시키는 그대로만 해 나가면 이거 완전 건설이 된다 말이오. 하나 하나 해 나 간다는 것은 그거 뭐이냐 하면 현실을 주는데 한 현실 한 현실 그 현실 하나 그 현실에서만 바로 하려고 애를 써서 그 현실에서만 바로 하면 다 된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복잡성을 다 또 이제 지금 제하고 이 단순성으로 해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한 자욱 따르고 두 자욱 따르고 가는 데로만 따라가는 것이 뭐인가! 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이 현실을 자꾸 바꿔 주시는데 현실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현실 현실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고것이 하나님 인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이 따라간 것같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따라갔다 '하나님이여, 나를 인도해서 이래 가면 어데로 갈 겁니까? 가면 어찌 됩니까?' 이렇게 하지를 않았어. 그저 가자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갔다 그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현실 현실, 내가 이 현실에서 그만 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죽을 수도 있다 말이오, 보기에. 죽든지 살든지 그저 그 현실에서 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네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선택을 하고, 또 네 양심을 가기고 선택, 양심 가지고 선택하는 것은 영감 받으려 한다 말이지, 네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양심을 가지고 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이 뭐인가 그것을 찾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며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너를 건축하는 것이다.
그러면 건축하면 건축하는 데는 주의할 것이 뭐이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 요렇게 순종하면 뒤가 어찌 되느냐? 그것은 생각지 말아라.' 아이고, 내가 이 시간에 지금 말씀대로 순종하면 사형 받겠는데, 이 시간에 말씀대로 하면 내 직업이 떨어지고 영 아주 그만 직장이 떨어지겠는데, 이 시간에 말씀대로 하면 이 사람하고 원수가 되겠는데' 그런 거는 생각지 말아라.
그거는 네 생각이지 생각지 말고,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셔서 좋은 결과를 맺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현실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만 따라서 그렇게 행하라. 그래야 되지 제가 앞으로 생각해 가지고서 이래 순종하면 될 것 같다 하면 순종하고, 이러면 틀림없이 된다, 좋겠다 싶으면 하고, 이렇게 순종하면 낭패되겠다 하면 그만 순종 안 한다 그 말이오. 낭패되겠다 싶으면 순종 안 해.
그러면 낭패되겠다 싶으면 순종 안 하는 그것이, 그것이 다 순종입니까 자기 주관을 지금 따라가는 것입니까, 어떤 것이요? 자기 주관 따라가는 것이라. 자기 주관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되는 것 같지만 안 된다 그말이오. 자기 주관 따라가. 이러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다는 요거 중요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그러니까 우리가 순종하면 앞으로 어찌 되겠다는 그거 생각하는 건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야, 녜가 이렇게 순종하면 네가 큰 일 난다.' 왜정 말년에도 그랬고, 6.25 때도 그랬고 우리 현실 생활에도 다 그렇습니다. 그 현실을 줄 때에 '순종하면 이러면 어찌 되겠노!'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순종 못 합니다. 뭐 '순종하면 낭패되겠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 이러니까 그 순종하면 그만 백 세에 난 독자가 다 없어져 버리니까 절단 안 납니까? 그래도 그게 상관없어. 하나님이 잘해 주시리라는 걸 믿기 때문에 '아 이제는 번제로 드리라 하니까 번제로 드리라 해도 약속이 아들을 티끌같이 많겠다고 했으니까 이제는 구경하겠다. 내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려 바짝 태우면 재가 이제 사람되는 거 가지고 재가 사람 돼 가지고 아이 낳는 거 보겠다.' 이걸 믿은 것이 아브라함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데에서 자기의 모든 주관의 이런 저런 모든 낭패되는 거, 의심나는 거 그런 것을 다 부인하게 돼 버렸어. 그러고 자기가 생전 모르던 인간의 부활이 있다는 그 지식을 발견했어. 이 발견했기 때문에 그 자손들에게 부활을 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그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래' 가다가 자기가 가다가서, 꼭 약속을 했는데, 약속을 했는데, '여게 네가 있을 것이다. '억게 있을 것이다.' '요거 네것이다.' '네 집이다.' '여게 있을 것이다.' '네 집이다.' 하나님이 분명히 말했는데 그 집이 자기 당대에도 안 왔고 자기 아 들대에도 안 왔고 손자대에도 안 왔어. 안 오니까' 하나님이 나한테 준다 해 놓고 안 주는 것 보니까 이거 거짓말 했는 갑다.' 거짓말했다고 아브라함이 믿었습니까? '이거 안 되는 것 보니까 이것보다 더 좋은 게 있으니 더 좋은 걸 주려고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요것을 믿었다 말이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요 신앙을 가져야 되고, 자기가 따라갈 때에 자기 생각과 맞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삐뚤어진 그런 것이 자기에게 닥쳤을 때에 '아이구, 나는 하나님한테 속았다. 이거 실패다' 이렇게 하지 않고, 자기가 볼 때에 약속하신 대로 그 일이 안 되니까 '하나님이 나 속였다 거짓말했다 내가 실패했다' 그리 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에 안 되니까, 자기 생각대로의 것이 안 되니까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믿으면 요래 되리라 했는데 생각대로 안 되니까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했습니다.
자기를 어떻게 부인했습니까? '이것은 나는 요걸 바라지마는 하나님 은 요것보다 무한히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이래서 그럴 때에도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면 어찌 되겠노?' 이러다가 그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좋게 인도하시니까 좋을 것이다, 낭패가 돼도 좋을 것이라.' 이러니까 다니엘이 사자구덩이 들어가니까 '이러다가는 나중에 내가 사자밥이 되겠다', '사자밥이 되고 안 되는 거는 하나님의 뜻이고 어 쨌든지 나에게 좋게 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이 사자굴에 들어가도 그것이 자기에게는 복이 되리라' 하는 것을 믿었다 말이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것이 자기 눈에 생각에 오든 것보다 더 믿어지는 그 일이 돼야 됩니다. 시간 다 됐어.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믿음을 만들어 가지고 자라야 되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받지를 못합니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외우고 실천하고 체험하고 경험한 고 지식을 보태 가지고 가르쳐야 그것이 젖이 됩니다. 또 하루 삼십 분 기도 어쩌든지 놓지 말고 계속을 합시다.
그러고 각 층에 있는 부장 선생님들은 자기에게 소속한 반사와 보조반사, 반사 보조반사는 자기에게 속한 보조반사들 학생들 이것을 우리 마음 안에다 넣어 놓고 기르도록 합시다. 우리 마음 안에다 넣어 놓고 양육을 하지 않으면 양육하는 곳이 없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