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18:45
무한한 관심의 사랑
1980. 3. 14. 금새
본문: 요 15: 1- 2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이 비유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주권을 가지시고 크고 작은 한 생명도 한 움직임도 다 홀로 주권하시고 또 책임지신 분이 여기에 가르친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그 농부라" 이 아버지는 이제 말한 대로 그러하신 분을 가르쳐서 아버지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창조주시요 주권자시요 모든 죄와 의를 다 담당하신 분이시오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가르쳐서 아버지라 이랬습니다.
또 밭은 세상입니다. 밭은 세상이요 하나님은 농부요 포도나무 둥치는 예수님이시오 또 그 가지는 교회 곧 우리들을 가르쳐서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일 중요한 문제는 뭐인고 하니 과실을 맺으면 이 하나님도 전부를 다 기울여서 이를 잘 되도록 위해서 가꾸시고 과실을 맺지 않을 때는 찍어서 불에 사른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던 존재인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중요하고 존귀한 소속과 입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전 섭리가 전 노력이 우리를 위하도록 되는 이런 우리도 될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전 지능이 우리를 제해버리시는 이러한 우리도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그 관계가 심히 측량 못할 만치 큰 관계를 갖게된 것은 예수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에 그 밭이라는 그 흙은 포도나무를 다 위하는 것 같지마는 위하는 흙도 있고 또 위하지 못하는 그런 토질도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가 포도나무를, 포도나무를 가꾸어 위한다고 할 때면 토질도 얼마든지 변개시킬 수 있고 도 거기에 해 되는 해하는 모든 것을 다 제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는 세상에 사람이나 물건이나 또 어떤 물질이나 이 우주에 있는 것 이 세상에 있는 것 어떤 것이든지 그 전부를 다 우리를 위하는 것들이 되어지도록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요 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전부를 다 기울여서 전 지능을 다 기울여서 우리를 위할 수도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해주시는 주심을 위해주심을 받을 수도 있는 우리들이요 또 전부를 기울여 우리를 해하시는 그 해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창조하신 모든 것에 위해 주심을 받을 수도 있는 우리들이요 또 해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심히 미약한 존재였지마는 예수님의 공로로 인하여 창조주와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가 이렇게 커졌습니다. 이렇게 커진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는 티끌같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나 한 사람이라는 이까짓 거야 무슨 존재가 있으며 무슨 큰 관련성이나 결과가 뭐 있을 그런 것인가 그저 버러지처럼 나서 꾸물거리면서 배고프면 먹고 먹을려고 하니까 이것저것 수고해야 되고 먹기 위해서 일하고 또 일하다 보니까 피곤하면 쉬고 먹고 편하니까 또 각각 제 취미대로 움직이다가 죽어지는 것 하나의 곤충에 불과한 인생이라 내라는 존재가 무엇이 뭐 있어 하면 또 얼마나 큰일을 하며 못하면 얼마나 또 해칠 것이 있겠느냐? 그렇게 우리의 존재를 참 지극히 작은 것으로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과거에는 그래했습니다. 한사람의 사상이 이렇게 움직이고 저렇게 움직이는 그 움직임에서 한꺼번에 수십만이 다 죽어지고 수백만이 다 죽어지는 이거 뭐 참 짐승 한 마리 죽는 것보다도 더 천하게 전쟁만 한 번 일어나면 공연히 앉아서 저거끼리 이래보자 한 사람 두 사람의 마음이 이래 됨으로써 수많은 인생이 마구 쓰러져 죽고 하는, 지금도 세계에서 이런 것 저런 것 소식을 들어보면 한사람의 생각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사형을 받고 하는 그런 것을 본데도 내라는 존재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이니까 무슨 가치가 있으며 무슨 존재가 있으며 움직여 봤자 무슨 큰 움직임이 있으며 재를 저질러 봤자 무슨 큰 재를 저지르겠느냐 악을 행하려고 해도 힘이 없는 자요 의를 행하려고 해도 힘이 없는 자요 심히 빈약하고 미약한 존재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평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던 자들입니다.
이렇지마는 예수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우리는 아주 달라졌습니다. 영계와 우주를 창조하신 이 창조주 주재 전지전능 전지자이신 이분에 전 움직임이, 한사람 한사람을 향해서 가꾸시기도 하고, 온 피조물로 우리를 위하지 않는 것을 위하는 것이 되어지도록, 이렇게 변질을 변화를 시키는 일도 하고 그런 것들이 아무리 우리를 본능적으로 위할려고 해도, 이 주재되신 하나님께서 위하는 것이 되어지지 못하도록, 아무리 위하는 일을 할려고 해도, 땅은 포도나무를 위해도 위하는 것이 되지 못하도록 농부가 잘라버린다 그거요.
옥토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가지가 잘라지는데 이러한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과에 직접적인 이 관계, 그 전부가 우리를 위할 수도 있고 그 전부가 우리를 해할 수도 있는 이런 직접적인 이런 관계를 가져, 모든 피조물 그 전부와 나 한사람과에 제일 직접적인 이 관계 그 전심전력에 그 관계를 가진 지극히 큰 대상이 되어졌습니다.
지극히 큰 대상이 된 것이 우리들입니다. 창조주의 상대가 된 것이 우리들이요 모든 피조물이 상대가 된 것이 우리들로서 우리의 여하에 따라 창조주와 모든 존재들이 섭섭하게도 하시고 또 분히 여기기도 하고 또 기뻐도 하고 우리를 돕기도 하고 우리를 절단내기도 하는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과의 그 존재 전부와 나 하나와 직접적인 상호 관계를 가지는 이런 대상의 존재가 된 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티끌 같은 인생에게 인생으로서 한 사람의 생각의 움직임에 따라서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이 참 허무하게 버러지 죽는 것보다도 더 허무하게 죽어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존재가 아니요. 우리는 과거에 그런 존재였는데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조물주 되신 이 주재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피조물 이 존재 전부와 나 한사람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나 한사람으로 인하여 그 전부가 기뻐할 수도 있고, 나 한사람으로 인하여 그 전부가 노여워할 수도 있고, 나 한사람을 그 전부가 위할 수도 있고, 나 한사람을 그 전부가 노여워서 멸할 수도 있는 이런 아주 측량 못할 큰 존재가 된 것입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버리시고 과실을 맺는 가지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5절에「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내라는 존재가 일반적인 인생의 존재와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리면 아흔 아홉 마리 양을 그대로 우리 안에 버려 두고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목자는 간다."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믿는 예수님의 구속으로 구속해 놓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모든 존재와 우리 한사람과 이렇게 비중을 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물론 가치야 많은 사람이 많겠지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간다 그러면 우리 한사람은 구속받은 모든 자의 전부와 나 한사람과에 주의 관심과 주의 역사에 이 비중이 같이 되어지는 이런 존재입니다. 우리가 귀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가 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내라는 존재가 인간이 아무리 알라고 해도 우리의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도 구속해 놓으신 구속에 그 가치도 위대함도 아무도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알아봤자 다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한성을 말합니다.
이러한 존재로 나를 구속해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나따나에 존재가 아닙니다. 아무나따나 잘해봤자 그 실효가 별로 없고 못해봤자 해가 별것이 없는 이런 존재가 아닙니다. 나 한사람이 모든 존재를 노엽게도 할 수 있고 모든 존재를 기쁘게도 할 수 있고 나 한사람이 모든 존재가 나를 기뻐서 내게 전부를 기울일수 있게 할 수도 있고 나 한사람의 잘못으로서 모든 존재가 섭섭해서 나 한사람으로 인해서 분히 여기고 해치는 해침을 받을 수 있는 이런 존재가 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이 예수님 믿기 전에 자기라는 존재가 얼마나 참 미약하고 허무하다는 것 안 믿는 사람으로서 인생을 바로 깨달은 참 철인들 양심가들 바른 비판과 평가를 가진 사람으로서 인생을 바로 깨닫는 참 철인들 양심가들 바른 비판과 평가를 가진 사람들은 인생 된 것이 불쌍하다고 인생이 불쌍하다는 것을 일생동안 느끼면서 한순간 눈물로 세상을 통과한 철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양심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 종교에, 종교에 뛰어들지도 안하고 종교를 부인하고 인생으로 탄식하고 세상을 지나갔습니다. 그 사람이 양심이 바른 것이요 모든 것을 넓게 보고 바로 평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던 존재입니다.
뭐 한사람이 한두 사람이 앉아 가지고 '자, 이래볼까' 세계 1차 대전은 독일에서 '야! 우리 민족을 좀 위대한 것을 좀 세계에 보여줘야 되겠다 그 우리를 위대한 줄 알아야 그들이 우리를 따르겠고 우리를 따라야 인생의 행복이 온다. 전쟁을 한번해서 우리 위대함을 나타내자' 장난삼아 한 그게 세계 1차 대전입니다.
그러면 인생은 허무한 것입니다. 한사람이 앉아서 지금도 뭐 6.25때 전쟁 그것도 그 김일성이라는 그 한사람에 욕심이요 미국 대통령 그 한사람의 낭만과 그 안일주의의 삐뚤어진 사상에서 일어난 모든 살해입니다. 그것 허무한 것입니다.
이런 존재인데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해서 얼마나 위대해졌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큰 대상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뭐라고 비유할 수 없습니다. 아주 거지 중에 거지를 큰 거부가 데려다가 아들이 없어 자기의 장자를 삼아서 호적에 올려 놨지마는 그게 항상 얻어먹는 거지로만 생각하지 그렇게 백만장자가 된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 보다도 더합니다.
저 피투성이가 되어 가지고 이제 낳아서 피가 벌거이 이제 갓 낳아놓은 것을 배꼽도 끊겨진 그대로 집어던져서 다리 밑에 집어던져 내던져 놓은 것 그것을 갖다가 길러서 왕의 아내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냅두면 뒤질 거 그 피투성이를 기르고 길러 가지고서 왕이 아내를 삼았다고 했소. 우리를 비유해서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천한 것이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해서 얼마나 존귀하게 된 줄 모릅니다. '아,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 전부가 나를 상대하고 있다니 나를 상대하고 있다니' 나 한사람의 언행심사에 그 하나 하나로서 모든 존재들이 참 희로애락을 가질 수 있는 것 나 한 존재로 모든 존재들이 기뻐할 수도 있고 섭섭해 할 수도 있고 분히 여길 수도 있고 전력을 나를 위해서 기울일 수도 있고 전력을 나를 위해서 나를 해칠 수도 있는 이런 측량 못할 위대한 존재가 되어진 이것을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서 성도들은 자기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위대한 존재가 된 그것을 깨달아 느끼면서 이전에는 자기가 어느 정도의 허무하였던 존잰가 하는 것을 그것을 찾아서 느끼면서 이렇게 허무하였던 자를 이렇게 키워주신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다 성도들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존재를 만들어 주신 자기로서 위대하다고만 생각하지 않고 위대한 존재인 자기가 된 것을 생각하면서 옛날은 얼마나 허무했다는 것, 바울이 이렇게 바울 자기를 만들어 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자기가 이전에는 어떠한 자였다는 것을 그것을 깨달아 이렇게 허무하였던 이렇게 몹쓸 자를 이런 자로 만들어 주신 것은 까닭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네게 대해서 이렇게 허무한 자를 이렇게 만들어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이렇게 허무한 자들을 위하여 주님이 네게 대해서 하신 거와 같이 나와 같은 허무한자에게 주님이 네게 대해서 어떻게 하셔서 어떤 자를 만든 거와 같은 나도 그렇게 허무한 자였기에 내가 어떻게 해서 그 허무한 자들로 나같이 이렇게 존귀한 자가 되게 하는 이 일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전하지 안 하면 화가 있겠다. 죽도록 충성하고도 그는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형제들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을 다 고린도서에 기록한 것은 하도 바울이 어떤 자인 것을 모르고 자꾸 바울을 오해시키는 바울을 오해시키는 그 마귀의 역사로 이 어리석은 형제들이 바울을 오해해서 주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해를 받기 때문에 오해하는 두 형제의 구원을 인하여 바울이 그것을 증거하면서 네가 너희들에게 이 말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마는 내게 대해서는 내가 미친소리를 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자기를 나타내어 자기를 말할 수 없는, 왜 미친소리냐? 주님이 자기를 위해서 한 그것을 지금 자기는 해야 될 것인데 형제에게 해야 될 터인데 주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하신 그 일과 자기가 형제에게 대해서 한일을 보면 그는 억만 분의 일도 안 되는데 한 것을 말을 하고 이렇게 네가 위대한 일했다 하는 것을 말하니 미친 소리라 말이요 미쳐서도 너희들 위해서 미쳤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내가 어떠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옛날과 다릅니다. 옛날에는 나 하나가 죽어봤자 살아봤자 죄를 저질러 봤자 또 힘써 일해봤자 그까짓 것 하건 말건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한 움직임에 모든 존재가 기뻐할 수도 있고 섭섭해 할 수 있고 노여워 할 수 있고 모든 존재가 본능적으로 그 전부를 나를 위해서 기울일수도 있고 모든 존재가 본능적으로 나를 해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지극히 큰 대상이 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꾸시기도 하고 우리를 잘라버리시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 토질 되어있는 이 세상을 나에게 유익 되게 변질시킬 수도 있고 나에게 해 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한 사람으로써 인해서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안 믿는 세상도 기독자로 인하여 그들이 악화될 수도 있고 성화 될 수도 있고 그들이 망할 수도 있고 흥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간단한 것으로 우리에게 표시해서 하나 실물로 알려준 것은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안하고 다시스로 갈 때에 요나 한사람을 인해서 온 바다는 흉용하게 움직였습니다.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을 지경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자 한사람을 인하여 전 우주와 세계를 움직이고 전 인류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요나 한사람이 그 배에 제거되었을 때에 즉시 풍랑은 잔잔했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평강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자 된 한사람을 인하여 모든 존재와 전 인류가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고 있는 이런 상대가 된 우리들인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해서 나한사람의 존재가 위대해 졌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위대하니까 얼마든지 교만부리고 배짱부리고 날뛸 수 있다고 그럴 수 없습니다. 위대한 동시에 잘못되면 모든 존재가 집중 사격을 하는 것이니까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대케 한 것은 우리가 위대함으로 패역케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있는 충성을 다해서 우리를 위대케 하신 자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이런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요 이런 자가 되면 뭐 하려고 세상 떠나는데 이런 자가 되게 하셔서 무궁세계에 모든 존재를 기쁘게 하는 존재로 모든 존재를 유익 되게 하는 존재로 그 위치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 위치에서 우리를 영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이요 얼마나 큰 구원인지 측량 못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사소하게 여겨도 안됩니다. 위대하게 위대해진 것만 생각하고 과거에 어떤 자이었던 것을 몰라도 안됩니다. 과거에 어떤 자가 어떤 자이었던 것을 이렇게 구속해 주신 우리로만 알아도 안됩니다. 이렇게 된 우리들에게 조물주에 구속주의 요구가 무엇이며 나의 하나의 일동 일점에서 일어나는 파동은 파문은 심히 귀하다는 것을 또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