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10:19
맹세하지 말라
본문 : 약 5:12-20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너희 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이 맹세한다는 것은 육체의 이스라엘 된 그 백성들이 무슨 일을 할 때에 자기가 지금 생각하고 선포한 그 일은 무엇이 어떻게 된다 할 지라도 한다 하는 그런, 여게 말로 말하면 장담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 말하는 것 보면 '내가 이것은 죽어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하늘이 두쪽이 나도 내가 이거는 한다' 그런 것 다 그와 같은 장담한다는 말입니다. 장담하는 것.
장담한다는 말인데 그 말에 주체가 되는 그 뜻은 뭣인고 하니 뭣이든지 자기가 그것은 할 수 있다 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작고 크고 우리는 단독이 할 수 없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세상은 어떤 게 세상인고 하니 크고 작은 것을 다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하는 그것이 세상입니다. 교회는 '작고 크고 자기는 할 수 없다. 하나님이 하게 하셔야 할 수 있다.' 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러면 어느 주장이 옳은가? 세상 주장 그것은 전부 다 틀린 것입니다. 하나도 맞은 것이 없습니다. 주권자가 계시는 것을 믿는 사람은 주권자가 계시니까.
그분이 안 하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모든 것을 시간, 공간, 인간 심리, 생사, 모든 움직임, 전체를 혼자 주권하시는 그분이 있는데, 모든 것을 영원 전에 딱 예정하시고, 주권적 의지로 예정하시고 주권의 능력으로 성취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하지 않는 것이 뭐이 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는 '크나 작으나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주권하고 계시고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요. 또, 주권적 능력으로 이루어지게 하신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그러면 내가 그것을 활용하며 이용해야 되는가?' 하는, '뭐하라고 하나님이 이런 일을 내게 이루어 놓으셨는가? 뭣 때문에 이런 범죄를 하게 하셨는가? 뭣 때문에 이런 승리를 하게 하셨는가?' 이루어 놓은 것은 '무엇 때문에 주님이 이렇게 하셨는지? 이루어 놓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을 할까?' 하는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이루어 놓은 것에 대해서 영광은 하나님에게 돌립니다.
세상은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는 제가 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좋은 것은 영광을 제가 취하고, 또 잘못된 것은 그 책임을 어떤 사람에게 돌리고, 또 그렇지 안하면 우연에게 돌리고, 자기 운명에 돌리고, 또 안 믿어도 어떤 무슨 대 세력을 가진 어떤 존재에게 돌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안 되면 조상 탓 한다. 안 되면 이거 조상이 안 도와서 이리 됐다. 또 누구 때문에 이리 됐다. 잘된 거는 전부 또 제가 다 잘한 것으로서 영광을 독차지 합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우리는 거게서 그게 순전히 다 사망을 향해서 나아가는 죄니까 거게서 돌아서서 자기가 해 놓은 일은 무엇 무엇을 이용해 가지고 도구로 삼아 가지고 그 일을 이루어 놨다 할지라도,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자기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잘못된 것을 원망하거나 자기에게 대해서도 원망하지 않고 자기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시면 될 수밖에 없는 아무 실력 없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루어 놓은 것을 어떻게 이용할 건가? 어떤 것은 "너는 이렇게 약하니 네가 이 일이 있기 사전에는 이것을 반대했고 이것에 반대되는 좋은 것을 원했지마는 이루어지지를 안했느냐? 그거는 안 이루어지고 오히려 원치 안한 것이 이루어지지 안했느냐? 네가 생각하기는 '오늘 종일 깨끗하게 의롭게 거룩하게 살고 싶다' 했는데 하루 종일 생활이 어떻게 됐느냐?"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깨닫게 하는 데에 이용하는 것도 있고, 자기가 관련된 사람들에게 대해서 깨닫게 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고 '누구누구를 접촉을 하니까, 사람을 접촉하니까, 어떤 사물을 접촉하니까, 물건 중에도 어떤 물건 접촉하니까 그만 내가 변동돼 가지고 이렇게 했다.' 그것을, 자기를 아는 데에 이용을 하든지 또 다른 모든 사람이나 일이나 물건이나 그런 것을 깨닫는 데에 이용을 하든지, 또 거게서 자기가 지혜를 얻어서 '미래적으로는 내가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될 것을 알려 주실라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구나.' 그 미래에 대해서 어떻게 할 그 방편을, 어떻게 해서 위험을 방지한, 위험 방지를 하든지, 또 어떻게 모든 요소 조건들을 다 구비해 가지고라야 좋은 성과를 맺는다는 조건 구비를 하든지, 어쨌든지 잘못된 것도 공연히 잘못된 것 아니고 잘못된 그것도 깨닫고만 이용하면 이용 가치가 잘한 것만치나 가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를 부인한 그것이 아주 그 참 말 못할 잘못이지마는 그 잘못을 베드로는 잘 이용을 했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대해서는 아주 보배로운 그 은혜 중에 은혜일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언제든지 닭소리를, 지금은 시계 있으니까 닭이 없지마는 때를 맞추기 위해 닭을 다 기르는데. 닭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언제든지 통곡하는 통곡으로 자기를 깨끗게 했고, 자기를 새롭게 했고, 모든 교만병, 또 자긍병, 또 월권병, 남용병, 모든 허망 허영병, 그 모든 인간의 병을 다, 닭이 울 그때는 다 치료가 됩니다.
울면서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고 주여 당신이 하게 하시면 이것 저것을 하고, 살게 하시면 내가 하루고 일 분이고 살지 당신이 하게 하시지 않으면 나는 주권적으로 하는 것은 털끝만한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인간병을 잘 치료하는 그런 데 아주 좋은 치료약으로 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된 것도 그러 하고 또 잘된 것은 그것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잘된 것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서 하나님이 그와 같이 또 잘되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러면 그것만으로 하면 또 안 됩니다. 잘되게 해 주셨으니까 잘된 그것도 하나님이 해서 주신 선물이니까 '이 잘된 것 이것은 어떻게 이용해야 보나? 이것을 어떻게 이용하라고 주님께서 잘된 이것을 해 주셨느냐?' 잘됐으니까 그것으로써 그만 자긍하고 교만하고 그렇게 그것만 거 머쥐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이 잘된 이것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주셨느냐?' 하는 것을 자기가 혼자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그러면 잘된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합니다. 잘된 일에.
'노아가 참 아주 승리한 잘된 일을 했는데 그 잘된 일하고 난 다음에 조심하지 안하다가 큰 과오를 범했다. 또 모든 의인들이 그러하다. 아브라함도 믿음을 지켜서 따라 나왔지마는 자기가 참고 견디지 못 함으로서 대실패의 길을 걸었다.
또 다윗 같은 사람도 잘된 뒤에 실패를 했다.' 그 모두 다 잘되고 난 다음에 위험성이 있는 그 위험성을 가지가 깨달아서 잘된 뒤에는 어떤 위험성을 방지해야 될 것.
또 잘되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자기가 한 양으로 영광을 가로취해 가지고서,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다 행하지도 못하고, 다 죽이라 했는데 아각도 죽이지 안 하고 짐승도 죽이지 안 하고 하나님은 지금 진노해서 '내가 사울을 왕 세운 것을 후회를 한다. 사울이 아주 내 명령에 대해서 복종치 않는 고약한 사람이다.' 이렇게 지금 하기 때문에 사무엘은 걱정이 돼서 근심이 돼서 다서 이 사울 왕에게 찾아와 가지고 어떻게 그리 됐는가 권유해서 고칠 수 있는 것이라면 고칠라고 오는데 자기는 지금 기념비 세우러 갔습니다 어데 갔느냐? 기념비.
'내가 이만치 지금 승리를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잘 복종했기 때문에 참 내가 이렇게 흘륭한 일을 했으니까' 자기 잘한 자기의 기념비를 세울라고 '사울 왕이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서 어떻게 승리를 해서 이렇게 했다. 여호와의 명령을 이렇게 잘 감당했다' 기념비 세우러 갔고, 사무엘이 가니까 '주여, 내가 이렇게 지금 당신의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나를 인해서 당신이 앞으로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더 은총을 입을 것입니다.' 이렇게 반대적으로 깨달은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잘해 놓고 난 다음에는 영광을 자기가 취해 가지고서 그만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기에 잘한 일에서 하나님을 배반하느냐 하나님으로 더 가까이 하느냐, 또 죄를 범하느냐 의를 행하느냐, 그것 네 가지. 또 잘못한 일에 대해서도 잘못한 그것으로써 하나님을 가까이 하느냐 또 멀리 하느냐 죄를 범하느냐 의를 행하느냐 그것이 그 결과적으로 이루어지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의 단독 주권 성취를 믿어야 됩니다. 예정하지 안한 일이 하나도 없고 예정한 대로 하나님께서 혼자, 예정도 혼자 했고 이루시는 이도 혼자 이루십니다.
그러면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그 속에 우리를 넣어 놓고서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또 우리를 가르치시고 또 우리를 그 모든 가치가 적다 많다 하는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게 하시고 또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비판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 성취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배우고, 모든 것을 고치고, 모든 것을 준비 하고, 또 모든 것에 대해서 자기가 바로, 바른 생각, 바른 소망, 바른 위치, 바른 사상, 바른 계획, 이래 가지고서 이렇게 저렇게 월권하고 치우치고 허영되고 허욕되고 또 참람되고 가증하고 거짓되고 한 이런 것들을 그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의 현실이라는 자기 생애라는 그 속에서 고쳐서 마지막에 목적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에게만 소망을 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것이 되어져 가지고서 사는 이것을 하게 하려는 이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정을 무엇 때문에 예정하셨느냐? 예정 하신 것은 무엇 때문에 예정을 했습니까?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예정하신 것입니다. 창조는 뭣 때문에 했습니까?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창조했습니다. 창조된 것을 보존 하고 계시는 것은 뭣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보존하셔 가지고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활용을 합니다. 그것을 이용합니다. 이렇게도 사용하시고 저렇게도 사용하시고, 두 번도 사용하시고, 백 번도 사용하시고, 천 번도 사용하시고, 이렇게 여러모로 사용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섭리 역사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역사라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시는 것은 뭣 때문인가? 그것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적이 뭐인데? 목적은 피조물이면서 창조주 당신과 꼭 같은 자로 당신의 전심 전력 다 기울여 가지고서 당신과 꼭 같은 자로 창조해서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하나님의 그 틀림 없는 모형, 지식면도 모형, 지혜면도 모형, 능력면도 모형, 행위면도 모형, 인격면도 모형, 모든 사상면도, 또 속성면도 전부가 하나님과 꼭 같이 보면은 그저 하나는 피조물이고 하나는 창조주고, 하나는 그로 인하여서 생겨졌고 하나는 영원 자존자고 이것만 다르지, 자존과 또 피조가 다르고 그저 그분은 지극히 크시고 완전하시고 이것은 그와 같기는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아니하고 그분은 영원 불변성을 가지셨고 완전성을 가지셨는데 그와 꼭 같기는 같은데 이거는 영원성을 가지지 못했고 완전성을 가지지 못했고, 그는 나타날 때는 억억만 각도로도 더 나타나는데 그분은 단일이라, 하나라.
하나이면서 그 외부에 나타나는 역사는 억억만도 더 되는 억억만도 더 되나 그것이 하나에서 나오신 단일성을 가지신 것인데 우리 사람들은 그것 다 집합성 종합성들이다 그것입니다.
이러니까 참 알기 어려운 속에 알맹이는 가 보니까 이것이야말로 참 얼마나 차이가 많은 천지의 차이가 있는 이 차이가 많은 것이지마는 알맹이는 차이가 많은 것이지마는 껍데기는 보니까 꼭 같다 말이오 하나님과 꼭 같애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만드시기 위해 가지고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평가하기를 좋다 나쁘다 하는 좋은 평가도 나쁜 평가도 하는 것도 그 사람대로 그렇게 평가를 하지마는, 또 하나님 말씀이 이거는 죄라 이거는 의라 뭐 이렇게 다. 하나님 말씀을 준해서 이렇게 평가를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 목적이 무엇이냐 그말이오. 그게 존재 목적이 무엇이냐? 그게 무엇 때문에 그게 생겨 졌느냐? 사람들은 그만 그 연결을 못 시킵니다.
못 시켜서, 그것도 말이요, 어떻게 평가를 하고 어떻게 비판을 하는 어떤 것이든지, 최악의 것이라도, 최악의 것이라도 최악의 것이 무엇 때문에 있느냐? 최선의 것이라도 최선의 것이 무엇 때문에 있느냐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 때문에 예정됐고 하나님의 전능의 능력으로서 창조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그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단일성이라 하는 것은 이리 가도 저리 가도 언제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과, 또 하나님의 예정과,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섭리와 요것이 거게 들어맞아야 고거 우리가 깨달은 것이 바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 요것도 거게 맞춰도 맞고, 우리의 해석이나 사상이나 주장은 여기에 강령적으로 요 근본에 딱 들어맞아야 그게 바로 깨달은 것이지 그렇지 안하면 제 맘대로 깨달아서 바로 깨닫지 못한 것이 되어진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데서든지 하나님의 예정은 갖다 붙여야 됩니다 어데서든지 하나님의 예정을 갖다 붙여 하나님의 예정대로 됐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어데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갖다 붙여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붙여야 됩니다. 어데든지 무엇에든지 하나님의 목적을 갖다 붙여서 하나님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됐다는 것입니다. 그걸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어데든지 갖다가 붙이기를 고거는 하나님이 사랑하심으로 한 것이지 하나님이 달리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심으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소망으로 하신 것입니다. 거게는 반드시 유익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본인에게 유익이 있느냐? 본인에게 유익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있어도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개체 그것만 보고서 개체 그것뿐이 아니고 그 개체는 모든 전체에 소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개체가 깨어짐으로 전체가 일어서고, 개체가 더러워짐으로 전체가 이제 좋아지는 것!- 졸면서 눈만 감고 자꾸, 눈을 감고 안 조는 체 하고. 졸 때는 아주 그놈이 잘 나옵니다. 마귀란 놈이 잘 나와 가지고 '졸아도 네가 그냥 졸면 안 되니까 말씀할 때 감탄한듯이 이래 눈을 감고 이래 감탄한 듯 이라며 졸아라,' 그게 내나 꼭 몇시에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구로 깨워 달라 했는데 떡 깨우면은 '이제 해결이 돼서 엊저녁에는 내가 그리 부탁을 했지마는 해결이 됐으니까 안 깨워도 됩니다. 안 일어나도 됩니다.' 그렇게까지 감쪽같이 해 댔는데 뒤에 가서 깨고 나 보면 후회를 하고 원망을 한다 말이요.
손양원 목사님 내가 초대하러, 강사로 청하러 가면서, 어떤 여관에 잤는데 보니까 옆에 방에 들으니까 '내일 아침 네시에 내가 차를 안 타면 큰 낭패가 됩니다. 깨워 주십시오.' 이래 그래 내가 이쪽에서 들으며 '저게 깨워 달라 하는데 잘 깰란지 모른다' 하고서 들어 보니까 그때 그 주인이 깨우니까 '엊저녁에 누구를 만나 가지고 이리 이리 되고 이렇고 이렇고 해결이 돼서 네시에 안 일어나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녜, 고맙습니다.' 떡 이러고 자더니마는 나중에 일어나 가지고는 호독 거리면서 깨우지 안 하고 그런다고서.
그럴 때 그 지혜가 얼마나 있소? 그거 마귀 지혜는 그렇게 민첩한 것이요, 넘어지게 하는 지혜.
우리는 말이요, 우리는 자기가 닥친 현실에 대해서, 또 현실이 좋은 것을 만들어 지나갔든지 나쁜 것을 만들어 지나갔든지 현실이 지나간 과거가 되는 그 과거에 대해서, 또 자기가 앞으로 닥치지 안한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언제든지 현재 과거 미래 거게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을 시켜야 됩니다. 하나님하고 연결을 시켜 가지고 생각해야 됩니다. 또 하나님의 그 속성들과 연결을 시켜 가지고서 거게 대해서 연구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자라, 전지자라, 완전자라, 불변자라, 영원자라, 주권자라, 그분이 딱 예정해 놓은 예정 안에 든 것이라, 또 이 일을 이루시는 데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시는 것이라, 뭐 할라고? 그것을 조그맣게 그 개별적으로 보면은 이거는 불행이라 행복이라 이렇지마는 이거는 없어지면 좋겠다 이렇게 보여지지마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전체면을 봐서는 있어야 된다 그거요.
부자집에는, 부자집에는 불집게도 있고, 또 소제하는 도구도 있고 소제하는 도구는 만날 소제만 합니다. 또 어떤 데는 모기약이 돼 가지고서 모기 죽이는 모기약도 있습니다. 그뭐 부자집에는 그것이 굉 장히 많은 종류가 있을 것이오.
그 전부가 다 합해 가지고서 그 수준의 그 집으로 유지하고 건설해 나가는 데에는 그런 모든 종류들이 없으면 안 된다 그거요.
그러기에 모든 존재에 대해서 이거는 필요 없다 이거는 필요 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모든 그 과거에 대해서도 하나님과 연결을 시켜서 그것이 다 하나님이 당신이 예정한 대로 된 과거요, 주권의 능력으로 성취해 놓은 과거요, 하나님의 사랑이 해 놓은 과거요, 또 하나님이 섭리로 보존하는 것이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우리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러면 과거를,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있는 것이니까 '과거를 그냥 한번 지나가 버리고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다 잊어버리고 말자. 과거는 과거로 청산하자.' 아주 위험천만한 말입니다. '과거는 과거로 청산해서 과거를 잊어버리자.' 안 됩니다. 믿는 사람은 과거를 잊어버리지 안 하고 그 과거가 죽는 날까지, 다 들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과거인 젖먹을 때 것뿐 아니고 과거인 어머니 모태 속에 있을 때의 과거까지를 전부 다 연상하고 그것을 자기의 현재에 그것을 이용을 했고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그런 것도 자기 현재에 이용을 해서 그 모든 것을 합해 가지고서 현재를 조성하니까, 미래에 대해서 모든 잘못 욕망한 것, 그것이 다 조절이 되어져서 바로 되어지고, 과거에 그 모든 이해 못했던 것이 그것이 다 이해가 되어 가지고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넓고 크고 깊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 됩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살펴보면 과거에 어디에 가 가지고 어떤 동무들 하고 잠깐 논 것, 또 어데 가서 잠깐 구경을 한 것 그런 것도 하나도 쓸모 없는 게 없다 그말이오. 구경한 것, 그걸 '그때 나는 멋모르고 봤는데 그걸 보니까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현재에 요걸 대할 때에 그 과거에 내가 그런 것을 한번 경험했는데 그 경험한 것과 요 현재를 맞추니까 그 과거 경험 하고 현재를 딱 맞추니까 요것이 요 현재를 바로 경영하고 바로 욕망하는 데에 요게 도움이 되고 참고가 되는구나.' 이러니까 과거라는 그것이 다 보배요 재산입니다. 예를 들면 재산이요 자본이오. 과거가 인격의 자본이요, 또 그것이 모든 믿음의 자본이요, 의의 자본이요, 그러니까 하나도 쓸모 없는 것이 없어. 과거에 뭐 좋다 나쁘다 좋은 것도 보니까 쓸모가 같고 나쁜 것도 보니까 쓸모가 같애. 이러니까 베드로는 과거에 그런 것도 다 쓸모로 삼아서 그게 평생 요긴하게 써 먹었습니다.
이러니까 과거를 전부 다 쓸모, 또 자기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것을 경영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과 연결을 시키면 그게 현재에 좋은 제품이 돼 나옵니다.
그러면 좋은 제품이 돼 나오면, 좋고 나쁜 것을 우리가 성경대로 평가하지마는 좋고 나쁜 것이 돼졌다 하나 그것의 이용 가치는 또 같다 말이오. 이용 가치는 또 같애. 좋은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용 가치가 있고 크게 평생 이거는 두 번 범할 수 없는 일이다 싶은 것 그것도 이용 가치가 꼭 같이 이용 가치가 있다 그거요.
이래서 모든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인 내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또 그분이 완전자요 전지자요 전능자요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못박히시기까지 하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루어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그저 바쁘니까 그만 얼렁뚱땅으로 해서 그렇게 실수로 이루어진 것도 하나도 없고 또 그분이 하다 보니까 그만 부주의로 된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이 부주의로 된 것도 없고, 모르고 된 것도 없고, 실수로 된 것도 없고 영원 전 계획한 그대로 착착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내게는 없어서는 안 될 내 행위요, 없어서는 안 될 내가 귀로 들은 것이요, 없어서는 안 될 내 눈으로 본 것이요, 없어서는 안 될 내 감사한 것들이요, 이런 것이니까 그 모든 것이 다 전체적으로, 이리 저리 입체적으로 전체적으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이 사실의 주님의 구원에 사랑의 이 품 속에, 아니, 사랑의 주님의 구속의 사랑의 주님의 태 속에,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태 속에서 자라는 것처럼 이제 사랑하는 주님의 태 속에 나는 있는 자이다. 그러니까 이리도 연구해 보니까 주님의 사랑이요 '이리도 연구해 보니까 주님의 사랑이요, 이리도 생각해 보니까 주님이 나를 만드실라 하는 역사요 저리도 생각해 보니까 만드 시는 역사요, 모든 전부가 다 주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와 당신의 목적인 그 완전을 이루는 모든 역사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한 죄를 범하고 그걸 그만 잘못됐다고 끙끙 앓고 있으면 그것으로써 다 되는 줄 알아도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빨리 잘못됐다고 판단하면은 잘못된 데 거게는 어떻게 주님이 그 잘못된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그걸 우리가 원치 않는 사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잘못에 한번 담군다 말이오. 잘못에 한번 담구니까 '아이구 내가 원치 안합니다.' 하는 그것이 없어. 없으면 또 한번 잘못에 담구고, 잘못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결과에 무서운 징계가 오는 그걸 보고서는 '아이구, 그거 안 할랍니다.' 또 그다음에 담굴라 하니까 '아이구, 나 안 담길랍니다. 그거 나는 안 할랍니다.' 이래 가지고 사람을 점점 성화시켜서 변화시켜 구원을 하시는 이 광대하신 주님의 광대의 구속 역사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어떤 것에서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태 속에 하나님의 사랑의 태 속에 내가 든 것이기 때문에 그로 통해서, 그로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의 그 모든 은총이 나에게 배 들어와서, 동글동글한 태 속에 아이가 들었으면 그 태에는 무슨 탯줄 그리로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탯줄로만 들어가는 게 아니고 아이는 있는데 어머니의 태가 싸 가지고 있는 그 태에 요리도 요소가 들어가고 요리도 요소가 들어가고 양사방 요소가 들어가.
사람이 음식을 소화해 가지고서 이렇게 용변으로 내려가지 않습니까? 내려가면 그것이 아무 입도 없지마는 그 장 전부가 다 섭취하는 섭취하는 그런 역사를 하기 때문에 위에서 쪽 내려가는 가운데에 몸이 좋을 때는 영양을 섭취를 다 해서 이제 배설한 것이 아무 영양 하나도 없이 다, 배설한 것이 다 배설이 됐다 말이오.
나는 그걸 배웠는데, 용변해 놓고 물에 둥둥 뜨면 인제 영양은 다 그게 섭취된 것이고 그게 안 뜨고 말이요, 물에 뚝 가라앉는 거는 영양이 그냥 내려갔대요.
이 섭취를 다 해서 그게 영양되는 것처럼,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태 속에 있는데 태에는 어머니의 요소가 다 이래 지금 계속적으로 지금 들어가고 있는데 그것을 안에 어린아이가 섭취를 해서 등어리로 섭취하는 것도 있고, 궁둥이로 섭취하는 것도 있고, 발바닥으로 섭취하는 것도 있고 뭐 모든 전체로 섭취하고 또, 태로도 섭취 하고 이래 가지고서 되어지는 것과 같이 이 모든 내가 살고 있는 이 모든 세상은, 이 우주는 내가 우주가 멀지마는 나는 가 보지 안했지마는 이제 달에서 어떻다 그걸 귀로 듣는다 말이오. 한번 소식으로도 듣고. 또 요새는 테레비로도 본다 말이오. 테레비로도 보고.
이렇게 하는 나의 현실이라는 이 현실, 나의 과거라는 모든 과거 나의 미래라는 모든 미래, 이 전부는 사랑의 주님의 태다. 이 태 속에 나는 들어 있다. 여게서 전부 주님의 나를 온전케 하는 이 구속의 은총을 받아서 당신과 꼭 같은 자가 태 속에서 자라는 것처럼 당신과 꼭 같은 자가 이제 내가 이루어진다, 이 모든 영양을 섭취하지 안하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것을 하지 못하게 할라고 하는 것이 뭐이냐? '맹세하지 말아라' 그말은 너는 지극히 작은 것도 하나님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이제 말하는 대로 자존자는 그분 한 분뿐이요 너는 전부 그분으로 말미암아, 된 것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됐고 앞으로 될 것도 그래 될 것이고, 또 좋은 것도 그렇고 나쁜 것도 그렇고 다 그분으로 됐는데 그분을 떼놓고 네가 단독이 뭐 하겠다 하는 그런 것을 하지 말아라 그말입니다.
맹세하지 말라 말은 네가 주권자 되지 말아라. 네가 주권자 되지 말아라. 네가 주장자가 돠지 말아라. 네가 네 왕이 되지 말아라. 네가 네 주인이 되지 마라.
너는 그분의 것이요, 그분에게 소속해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는 잘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서만 인간이 또 망하는 것도 돼지지, 지옥도 그분으로 말미암아서만 되지 단독이 지옥에 가는 것도 안 된다.
이러기 때문에 자존자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 자존자로 말미암아 소망하고 자존자로 말미암아 움직이는 것 되어서 자꾸 이것을 연습하고. 연습해 가지고서 '그분이 자존자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는 지음 받았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진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좋은 것 되어 진다.' 이제 우리의 성공은 뭐인고 하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게 됐으면 완성입니다. 그게 완성이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에 '주여, 이제는 주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면 그 힘 전부 다 가지고서 주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주의 것으로 살겠습니다. 주의 성전으로 살겠습니다. 주님의 지체로 살겠습니다. 주님의 몸으로 살겠습니다. 절대 주에게 속해서 주로 인 하여 살겠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동행입니다.
주님과 동행할라고 하면 그러면 그만 자기의 구습이라 하는 것이 '주여, 주님하고 내가 동행하겠습니다.' 이렇게 명상만 해도 말이요 명상만 해도 '주님과 나는 동행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겠습니다' 하니까, 과거에 무슨 했던 그것이 썩 생각이 나니까 자기도 모르게 주님하고 살겠다고 해 놓고, 지금 묵상하고 기도하는데 과거에 뭐이 생각이 나니까 그 생각 가서 실컷하고 이래 돌아보고 그 생각 실컷 하다 보니까 그만 시간 지나가 버리고 주님은 잊어버렸어. 그것이 뭐냐 하면은 구습이라는 놈이 끌고 간 겁니다, 구습.
구습이 끌고 가고 또 악성이 끌고 가고, 여게는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구습이 끌고 가는 것을 못 끌고 가도록 끌려가지 말아라 하는 말입니까 악성이 끌고 갈 때 끌려가지 말라는 말입니까, 악령이 끌고 갈 때에 끌려가지 말라는 말입니까? 그 서이가 하나는 하나지마는 특별히 말하면 여게는 무엇에게 끌려가지 말라고 하는 말로 맹세하지 말라 했습니까? 서이 중에 뭐입니까? 악습? 악습? 뭐라 해, 악습이라 해, 뭐라 해? 악성. 녜, 악성입니다. 악습이 아니고 악성입니다.
악습이 아니고 악성. 악성 그놈이 끌고 간다 말이오.
악성 그놈이 끌고 가고, 악습 그놈이 끌고 가고, 악령이 끌고 가고 그것 다 하나는 하나니까 악성이 끌고 갈 때도 대표만 악성이 그놈이 섰지 그 배후에서 조종하는 놈은 악령이라 말이오. 악습도 그렇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현실은 보배로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현실을 허비 않도록 참 이 현실이라는 현실은 다시 오지 못하는 것이니까 귀중한 현실입니다. 귀중한 시간입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은 '귀중한 것' 하는데 과거에 무슨 귀중한 일이 있는데, '내가 이 현실은 귀중한 거니까 참 이거는 바로 살아야 되겠다'하는데, 그때 딱 살며시 꾀우기를 '네가 과거에도 그 현실에서 요렇게 잘못하지 안했느냐? 그러니까 조심해라.' 하는 것이니까 '현실에 그런 것도 안 하고 조심해야 되겠습니다' 했는데 그렇게 보다가 나중에 그만 그것을 생각하면서 쭉 생각하다 보니까 한 시간이고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주욱 가서 그놈 하고 가 가지고 실컷 돌아다니면서 그거 하고 상대하다 보니까 그만 시간 헛일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러면 그건 또 뭐이냐? 그것도 주님이, '봐라, 너는 안 팎에 눈이 있어야 되고, 항상 깨어 있어야 되고, 너는 그저 하나님에게 속해서 하나님이 네 생명이 되고, 네 지혜가 되고, 하나님이 네 중에 네가 돼 가지고서 사는 요것이 이루어져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의 목적인 완전을 이루지 못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됩니다. 시간 많이 지나갔는데.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쩌든지 새벽기도 나와서 배워야 되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아이고, 목사님 설교 어떻게 어렵게 하는지 도무지 아무 재미도 없고 막 주리가 틀리고 죽을 지경이라.' 하는데 죽을 지경인 그놈이 죽어야 됩니다. 죽을 지경이라도 요동치 말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죽을 지경인 그놈이 죽습니다. 그놈이 죽고 나면은 그놈이 주관했던, 나쁘게 주관 하던 그놈이 죽고 나면은 그다음에는 성신이 주관할 수 있으니까 모든 진리가 환하게 깨달아지고 기쁘고 즐겁고 거게서 새생명의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에게 맞은 것을 받을라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에게 맞은 것 받으면 항상 자기 되풀이 아니겠소? 어떤 사람은 필기를 하는데 필기를 할 때에 '요거는 요긴하다.' 그래 필기합니다. 그 요긴 하다는 걸 그거 누가 선택했소? 설교를 들을 때 '요거는 요긴하니까 기록해야 되겠다.' 요긴한 것만 들어서 기록을 하면 그 요긴한 것을 선택을 누가 했지요? 녜, 그것을 비판한 자가 자기요 평가한 자가 자기입니다. 이러니까 그것만 하면 항상 돌아가 봤자 항상 자기요 자기만 기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필기하는 데에는 자기가 요긴하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보다도 자기가 이해 못 하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거는 자기 아닌 객관의 것이기 때문에.
객관의 것이기 때문에 이해 못 하는 걸 기록해 놓고서 '이게 이해가 안 되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이거 벌소리인가? 이거는 혹 목사님이 실언한 것 아닌가? 이거 뭐인가?' 자기가 자기와 거리가 멀어서 이해 안 되고 모르는 것 가치로 여겨지지 안하는 그게 자기가 변화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 그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없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살펴봐서 '아, 과연 이렇구나.'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자기가 깨달음 때에 이해되는 깨달음에서 깨달아지지 않는 데까지 가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연구에는 모순된 것을 가려야 된다 말이오. 처음에 '이게 틀렸다' 틀렸다 싶은 것을 가려 가지고서 그것을, 하나님 말씀은 정확무오하기 때문에 틀렸는데 그걸 가려 가지고서 틀리지 안 하고 그게 과연 맞다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변화되어지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는 왔다가 시간이 되거든 그만 가도 돼요. 자기 맞출, 그것도 맞아야 되지 그거 조절해야 되지 그것 안 하면 안 되니까. 시간 딱 되거든 가 가지고서, '어제 새벽기도 나갔더만 시간 너무 길어서 그만 낭패됐다. 나가면 안 되겠다.' 이래 하지 말고, 나가서, 십 분 참석하면 십 분 참석 하고 나가고 오 분 참석하면 오 분 참석하고, 그래도 온 것도 된다 말이오.
여기 와서 첫째 유익은 뭐이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첫째 유익 아니오.
첫째는 '하나님 앞에 내가 이날 첫날 첫시간을 하나님에게 바쳐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접선하는 이것을 하리라' 하는 그것이 새벽기도에 제일 유익, 그다음에는 이제 하나님의 도리를 듣는 것, 그 다음에는 자기가 거기서 변화가 되어지는 것, 이익의 순서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