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01:05
말씀과 현실을 통해 온전
본문 : 벧전5:6-7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길로 주신 이 길은 믿음이 아니고는 암만 들어도 알지도 못하고 또 거게 깨달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아는 것 인간의 모든 지식 그것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께서 사망으로 가득 찬 사망의 지식 안에 있는, 사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지식을 주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지식과는 다릅니다. 또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지식들만 가득 찬 땅위에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지식이기 때문에 또 다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하나님의 지식은 순전히 새로 받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믿지 안하면 안 됩니다. 무조건 받아들여서 그 지식으로 내 지식을 삼아야 되지 내게 있는 지식은 전부 삐뚤어진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식을 비판해서 맞으면 받아들이고 안 맞으면 거 부하고 그러면 내나 내게 있는 죽음에 속한 죽이는 지식, 하나님을 대적하는 지식 그 지식이 비판하고 평가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린다고 하면 내나 예수 믿지 안할 때의 가진 지식과 꼭 같은 지식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국민학교 들어가는 그 아이가 자기에게 없는 지식을 학교에 가서 배우게 되기 때문에 그저 학교에서 기역 하면 기역 따라하고 이것 기역인 줄 알고, 니은 하면 니은 따라 하면서 니은인 줄 알고 요렇게 하나씩 새것을 받아들여서 자기의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 요것과 같으면 쉽지마는 요것과도 다릅니다. 왜 다르느냐?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에게 없는 거게다가 인간의 지식이 우리 속에 가득 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지식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식을 반대하는 인간 지식이 내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한쪽으로는 인간 지식을 부인하고 또 하나님의 지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국민학교 들어가는 아이가 기역자도 모르는 그 아이가 가서 공부를 해서 하나씩 둘씩 받아들임으로 알게 되는 그 지식보다 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받아 들여야 되지 또 이미 있는 지식과 반대기 때문에 이미 있는 지식을 부인해야 되지, 이걸 부인해야 되지 받아들이지 이러기 때문에 심히 어렵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두 가지를 가져야 이 생명의 도를 배울 수가 있고 생명의 도를 걸어갈 수가 있지, 제일 어려운 것이 뭣이냐? 하나님의 지식에 반대되는 인간 지식이 가뜩 들어 있는 그것이 부인 하기가 힘듭니다. 뭐 공부를 한 사람이나 안 한 사람이나 별 차이 없이 가지고 있습니다.
공부를 한 사람은 글에 써 가지고 있는 공부했지마는 공부하지 안한 사람도 자기의 생각으로 자기 보고 듣고 접한 그 모든 것으로서 자기 속에 자기대로의 지식이 돼 있습니다. 듣고 보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체험한 그런 것이 다 삐뚤어진 지식인데 그 지식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무조건 받아들여서 말씀하시는 다 그대로 그게 참으로 참임을 인정해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참 하나님의 도를 받아들이는 데는 자기와 세상 부인, 또 하나님의 지식을 무조건 인정 이것이 돼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은 인간을 간섭하지 아니하시고 악령이 인간을 간섭해 가지고 모든 지식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 태서부터 난 사람들, 아주 주일학교 학생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받아 들이기가 조금 쉽습니다.
왜? 하나님의 지식에 반대되는 이 방해하는 지식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주일학교가 제일 받아들이기 쉽고 그다음에는 아마 중학생이 될 것이고 그다음에는 고등학생이 될 것이고 나중에 대학생이 받아들이기가 제일 어려울 것입니다.
이 사회에 또 학교는 안 다녔어도 여러 살 수십 년 살면서 세상에 하나님의 지식과 반대되는 사망하는 법칙, 하나님을 대항하는 법칙, 만물보다 거짓된 자기를 위주로 삼는 그 법칙, 이 법칙이 자기 속에 가뜩 들어 있기 때문에 참 하나님의 도를 받아들이기가 심히 힘듭니다.
그러면 세상 지식을 이것을 전연히 모르면 좋겠다 해서, 그러면 학교에 가는 그런 배우는 일을 전연히 모르면 그게 낫겠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나 또 그것도 아닙니다. 왜 그런고 하니 아무 때라도 그 사람이 세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접촉해 가지고 살게 되고 또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접촉해 가지고 살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미혹을 받아서 안 되게 됩니다.
미혹을 받아서 안 되는고로, 하나님께서 마귀의 지식 이것을 왜 받도록 하느냐? 무서운 그 전염병이 다닐 때에 그 병에 들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그 병균을 넣어서 예방 주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병균을 이길 수 있는 면역성을 기르기 위해 가지고 예방 주사를 놔서 기릅니다.
그러면 그 병에 병균이 들어와 가지고 자기 몸에 조그매 들어와 가지고 해하는 것을 약한 병균이 그 병균이 실하지 못하고 실험을 많이 해 가지고서 그 병균이 몸에 들어가도 강하게 역사하지 못하고 조금 역사하다가 없을 수 있는 그런 병균을 만들어 가지고 사람에게 예방 주사로 놓으니까 그 불균이 들어오니 자기 몸에서 그 병균하고 싸우다가 이기고, 또 한번 더 놔 가지고서 한번 더 싸워 이기고, 또 한번 더 놔 가지고 더 싸워 이기고 자꾸 이래 몇 번 이기면 이제는 뒤에 그 병균이 사람이 여러가지로 연단시킨 조화시킨 그 약한 병균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강한 병균이 척 접한다 해도 그 병균을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 지식은 사람을 죽이는 병균과 같은 것인데 왜 그 지식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느냐? 왜 필요하냐? 필요한 것은 그 지식을 면역하는 그 예방 주사와 같은 그런 지식으로 사람이 받아 들여 그 지식을 처음에 좀 받아들였을 때에 하나님의 지식으로 가지고 그 지식을 다 박멸을 해서 '이 지식은 이러니까 이 지식은 잘못됐다' 하나님의 지식으로 세상 지식에 잘못된 것을, 삐뚤어진 것을, 세상지식대로 하면 죽는다는 것 이것을 자기가 차차 차차 알아 가지고서 마지막에는 세계에 있는 지식 전부를 다 자기가 접해도 그 지식은 멸망할 지식이라 하는 것을 확실히 판정할 수 있는 그런 이제 단계에 나아가면 세상 지식 그것을 아무리 접해도 그 사람이 손해보지 안하고 도리어 세상 지식으로 인해 가지고서 자기는 예비, 멸망시키는 그 지식에 대해서 예비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멸망시키는 지식을 다 알았기 때문에 그 지식에게는 손해를 보지 안하고 아무리 그 지식이 세계에 가득 차도 그 지식에게 하나님의 지식대로 실행을 함으로 말미암아 세상 지식 그것을 누르고 꺾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참 일찍부터 신앙 생활 하지 안한 그것이 크게 손해고 또 그것만은 아닙니다. 일찍부터 뱃속에서부터 신앙 생활 하지 안한 사람도 아주 돌변적으로 해서 오히려 세상에 있는 지식을 한꺼번에 다 부인해 버리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비유에 말씀하시기를 '진주를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진주를 만난 사람도 있지마는 진주를 찾아 돌아다니지 안하고 오다가다가 어떻게 보화를 만나는 그런 사람과 같이 그런 사람들도 있다' 자기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서 이 세상 지식을 자꾸 면역 예방 주사와 같이 그것을 대항해서 그때 그때 하나님의 지식이 언제든지 커나가면서 이 세상 지식을 누르고 꺾어서 이래 가는 일이 있고 그만 그런 일 하지 안하고 세상 지식만 자랐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지식을 만나보고 보니까 세상 지식이 아무것도 아니라 하는 것을 단번에 부인해 버리고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는 그런 은혜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쨌든지 늦게 믿든지 일찍 믿든지 세상 지식을 부인해야 되고 또 하나님의 지식만을 인정하는 그 사람이 되기 전에는 안 됩니다.
오늘 아침에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라' 이 겸손하라 말은 구역에는 순복하라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순복하라 변역하지 안하고 겸손하라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면 겸손하라는 그 번역이 조금 알아듣기에는 어렵지마는 범위는 좀 넓습니다.
겸손하라 그말은, 순복하라 하는 것은 그저 하나님에게 순종하라 그말이고.
겸손하라 그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네가 알고 그 분에게 거리끼지 안하도록, 그분에게 망령되지 안하도록, 그분에게 대해서 철없는 버릇없는 그런 일이 되지 않도록 그분에게 너로서 어떻게 태도를 하며, 어떤 정신과 마음을 가지며, 어떤 사람으로 그분에게 대해야 되겠느냐 하는 그것을 네가 알아서 대하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순복하라 하는 그것보다 범위가 조금 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이렇게 구속하신 목적이 뭣이냐? 하늘나라에 가서 피조물 중에 제일 존영하고 영광스러운 피조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한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행락이 없는 줄 알아도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고 높은 고급 행락, 아주 제일 귀한 행락을 취하신 분은 예수님의 인성이십니다. 이 세상 것은 행락이 다 죽은 행락이요,죽은 행락이기,때문에 껍데기는 행락 같지마는 속에 파고 들어가면 행락이 하나도 아닙니다. 기쁘기도 하나도 아니오.
전부 세상 행락은 취하고 난 다음에는 후회를 합니다. 당장에 후회 하는 것 있,고, 또 몇 달 후에 후회하는 것 있고, 또 몇 해 후에 후회하는 것 있고, 마지막에 늙어 죽을 때에 후회하는 것 있고, 사람들이 세상 행락 세상 행복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후회되지 아니할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런 것들을 과거에,후회할 것, 살았다 했는데 결국은 죽는 것, 좋았다 했는데 결국은 해로운 것, 참 재미있다 했는데 결국은 기가 막히는 것, 다 그런 것이 세상에 속한 것이요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은 얻을 때에 좋은 것보다 가져 보니까 더 좋고, 있어 보니까 더 좋고 햇수가 지나갈수록 더 좋습니다.
마치 한 가지 예를 든다고 하면 어떤 청년이 참 부자의 자손이요 또 그 사람이 지금 자기가 희망을 가지고 모든 공부를 하고 있는 그 청년인데 창기에게 꼬였습니다. 창기에게 꼬여 가지고, 꼬일 때는 어쩔 줄을 모르고 그만 공부고 뭐이고 모든 것이 다 안 보이고 부모의 교훈이 안 보이고 그 창기로 더불어 음행하는 것이 그것이 어떻게 그뭐 마음에 하고 싶고 좋아보이고 이래서 떡 그래 가지고 얼마 동안 그 창기에게 꼬여 가지고 그만 학교도 퇴학을 당하고, 또 부모에게도 불신임을 받고 또 자기에게 있는 모든 재산도 다 허비돼 버리고 하면 그 사람이 뭐 가슴을 칠 것입니다, 후회가 돼서. 후회가 돼서 가슴을 치지마는 소용이 없다 그거요. 꼭 그와 같습니다.
어떤 청년은 그 창기로 더불어 자기가 아주 정욕이 불타 가지고서 그렇게 욕심이 나지마는 잠깐 동안 관계 가지고 나니까 그다음에는 그만 정신이 돌아오기를 후회가 된다 말이오. 그래 잠깐 빠졌다가 일어서는 사람, 어떤 사람은 일 년 빠졌다가 일어서는 사람, 어떤 사람은 일생 동안 빠졌다가 일어서는 사람, 사람이 각각 다르나 세상은 꼭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다 좀 지혜 있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안 믿는 사람들도 붙택자들도 세상 일 이런 것 저런 것 모든 접촉해 가면서 자기가 시작에 좋고 끝이 나쁜 것을 똑똑히 구별하고 또 시작에는 나쁘나 끝은 좋다는 그걸 구별하고, 또 좋기는 얼마 좋고 나쁘기는 얼마 나쁘다 하는 그것을 구별하고, 또 나쁘기는 얼마 동안 나쁘나 좋기는 참 오랫 동안 좋다 하는 이것을 구별하기 때문에 학생 때에 머리를 싸 짜매고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또 젊을 때에 남한테 동무들하고 같이 놀지 못하고 뿍뿍 일을 해서 돈을 모아 가지고서 재산가가 되는 그런 사람도 있고 세상에서도 내나 세상 것을 가지고도 그것이 좋다가 나쁜 것 있고 나쁘다가 좋은 것 있고 이런 것 있다 그거요. 그렇거든 하물며 하늘나라의 것은 더군다나 더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의 보배피 공로로 구속 하신 것이 뭣 때문에 구속을 했느냐? 우리를 피조물 중에는 제일 좋은 자 제일 복있는 자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이 구속의 이 길이 자기에게 아무 재미도 없고 행복도 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그렇게 보여지는 것은 왜 그렇게 보여 지느냐? 그것은 자기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가지고 과거를 현재에 끌어다가 과거 그때, 과거가 다 현재가 지나간 것이 과거인데 현재가 지나간 것이 과거인데 그것이 '오늘 과거가 돼 가지고 있는 그것이 현재로 되어 있을 때에는 내게 어떻더냐?' 그것을 생각해 보고, 또 '그것이 지나가 가지고 과거로 돼 있는 건 어떻더냐?' 그 과거 것이 현재로 되어 있을 때 그때에 내 생각과 내라는 사람과 과거가 되어 있는 그 오늘에 생각과는 영 다르다 그말이오.
그것이 만일 과거 그것이 현재로 되어 있을 그때는 그렇게 좋았는데 그것이 벌써 지나가 버리고 나서 뒤로 돌아보며 생각해 보니까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이 참 속는 일이고 다 소용 없는 일이라 하는 것을 자기가 알아서 요렇게 비판 비판을 하는 사람은 세상 범위 안에서 비판하는 사람, 또 세상 범위를 넘어서 인간의 영원을 두고서 비판하는 사람, 이렇게 그 비판하는 것이 있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이 생명길을 걸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사망에 속한 것보다 생명에 속한 것이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좋고, 또 점점 쇠해져 가는 쇠퇴해 가는 그 행복보다 점점 소생되어서 자라가는 행복이 훨씬 낫지마는 사람들이 이 모든 세상 것만 보고 악령이 그것이 현재로 되어 있을 때와 지나가고 난 뒤에 돌아볼 때와 가치가 어떠냐 이것을 반성이라는 그런 것이 도무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정평 정가를 못 하게 됩니다.
자기가 창기한테 꼬여 가지고서 자기의 재산이 다 없어질 때까지는, 다 없어지기까지 꼬이고 거기 대해서 과거와 현재를 반성해서 비교하지 못하는 사람은 있는 재산 다 없어지고 난 다음에야, 다 없어지고 난 다음에는 탕자와 마찬가지로 '내가 참 후회가 된다' 이렇지마는 그것이 없어지기 전까지는 후회를 못 합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사람은 단번에, 며칠 동안 그 유혹에 빠져 가지고서 있다가 나중에 보니까 후회가 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빠지기도 전에 벌써 다른 사람을 보아서, 다른 사람의 모든 후회를 봐서, '그 사람이 좋아서 거기 미쳐 가지고 정신없이 그리 날뛰더니마는 그 좋은 살림살이 온전히 그 창기에게 솔빡 다 넣고 저렇게 비참하게 됐다' 자기가 경험해 보지 안했지만 다른 사람 경험을, 남을 보아서 깨달으라고, 남을 보아서 깨우치라고 남을 보아 모든 구름같은 간증이 있는 그것을 보고서 아예 거게 들어가지도 안하고 그렇게 방비해서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이 중생된 새사람의 양식이 되는, 새사람은 중생된 새사람은 뭘로 먹느냐? 움직임으로 먹고 행동으로 먹고, 옛사람은 고기덩어리 입으로 먹습니다. 입으로 먹지마는 중생된 사람은 행동으로 먹는데 자기가 새사람이 먹어서 양식이 돠고, 새사람이 자라고 새사람이 강해지고 하는 새사람의 양식은 옳은 행동인데 옳은 행동은 쪽발과 새김질, 과거를 반성하는 반성으로 자기가 현실을 조사하고 또 둘로서 구별하는 조사를 하고, 쪽발 조사와 새김질 조사 이 두 가지 조사와 하나님의 성경 말씀과 또 이 영감과 이 넷이 합해서 과거를 반성하는 그 반성하는 방편과 자기가 둘로만 구별하는 방편과 그 두 가지 방편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하고 합하니까 서 이입니다. 서 이로 합하니까 자기 현실에 닥친 것을 제법 바로 판단하고 따로 일 수가 있다 말이오.
그런 사람은 거게서 하나님이 성신의 감화가 안 되면 안 된다고 했기 때문에 성신이 감동시켜서 더 바로 좀 옳게 깨닫게 해 달라 요렇게 하면 거게다가 성신의 감화가 들어붙으면 이제 너이 된다 말이오. 넷이 합해 가지고 자기 현실을 살피면 정확한 답안이 나옵니다.
'여게는 요러면 죽고 요러면 산다'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행동을 해야, 그 행동은 말하자면 온전한 행위인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온전한 행위가 하나도 없었는데 그 행동은 온전한 행위요 그 행위는 하나님에게만 피동된 행위니 곧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한 행위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건설구원이 성화구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새 지금, 내가 저아레 오후, 엊저녁에 재독한 것이 언제 것입니까? 오전 것이요 오후 것이요? 오후 것? 오후 것 내가 설교를 들었는데 설교를 잘했다 그말이오. 나도 설교를 해 놓고 가서 생각하니까 또 이것, 내가 여러분들 때문에 공연히 내게는 아무 소용 없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좀 인정을 해 줘도 손해, 높여줘도 손해, 또 내가 그거 그런 말을 해서 그게 자랑이 됐으면 하나님께 싹 상급이 깎이기 때문에 그래도 손해, 손해지마는 부득이 여러분들이 모르니까 알게 한다 그말이오.
그래서 '내가 자긍하는 말을 했나? 도로 내 자랑하는 그런 말을 했나? 교만한 데 속한 걸 하지 안했느냐?' 근심이 돼 가지고 걱정이 돼서 우리 집에 일하는 분들 보고서 '내가 오늘 오후에,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한 설교에 뭐 잘못된 게 없소? 내가 좀 걱정이 돼요.' 내가 이래 물었다 말이오. 그래야 그분들이 모른다 그말이오. 깜깜해. 그러니 언제 거게서 천리 만리 거리가 먼데 무슨 구원이 돼 나가겠느냐 말이오. 깜깜하게 몰라, 전연히.
모르는데, 그래 내가 그날밤에 좀 늦게까지 거게 대해서 생각을 했어. 생각을 하고 비판하고 비판하고 하니까 주께서 내게 깨닫게 해 주시기를 '네가, 선지자는 본래 어두운 사람들에게 바른 것을 말하다가 욕을 얻어먹고 배척을 당하고 별별 정죄를 받고 이렇게 하는 것인데, 그게 선지자 아니냐? 그러기 때문에 상이 더 큰 것이고 네가 과거에 그런 말을 해 가지고서 정죄를 받고 그와 같이 지금 배척을 당하고 오만 소리를 다 당했지마는 네가 그걸 했기 때문에 내가 너와 함께 해서 이렇게 교회가 부흥이 됐고 커졌고 네가 네게 속한 또 교회가 그렇게 점점 많아지고 이 교훈이 이게 차차 차차 자꾸 퍼져나가고 이떻게 되어지니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지 옳은 것을 주장하고 옳은 것을 따르고 하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절대로 쇠퇴하지 않는다 하는 것을 네가 보고도 또 그따위 걱정을 하고서 그런 소리 하고 있느냐?' 책망하는 그 소리를 듣고서 내가 그때에 '주여, 옳습니다. 앞으로는 내가 그런 욕 얻어먹을 게 아니라 마지막에는 내 목이 달아나는, 생명이 끊쳐지는, 요 말 하면 생명이 끊쳐진다 하는 그 말을 해야 가치가 제일 있겠는데 그 말까지 거침없이 다 하겠습니다.' 요것을 작정을 했어. 그래서 안심을 했다 그거요.
바울이 말하기를 '너거가 나 위해서 기도할 것은 내게 깨달은 이 진리를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담대히 말할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를 해 달라' 그것을 요청했다 그말이오.
그 담대히 말해 놓고 그걸 뒤에 가서 겁이 나서 쩔쩔쩔 매는 것은 것은, 그뭐 겁을 내는 것은 뭐이냐? 그 사람들이 오히려 또 이거 오해하고 이래 가지고서 이러면은 도로 이 복음 운동에 방해되지 않을까 그래 겁나지 뭐 그들이 와 가지고 뭐 뚜드릴까 그런 겁은 나는 게 아니라 그거요.
이랬는데 어떤 분 두 분이 와 가지고서 나한테 역부러 왔습니다. '오후에 설교한 그 설교에 대해서는 그것은 요렇게' 하고 그것만큼은 하지 안하고 그저 그 비교하는 것도 좋은데 그렇게 다른 것은 이것은 뭐 틀렸다고 이래 해서,' 뭐 좀 아마 깨달음에 내같이 이랬던 그런 느낌을 가졌던 모양이라. '그건 좀 걱정이 돼서 그래 말하러 왔습니다 내가 그 말을 하니까 이분도 그래 말하고 서로 둘이 동감이 돼서 그래 이 말을 하러 왔습니다' 그때가 무슨 때나 하면 내가 벌써 밤에 밤새껏 기도해 가지고 해결을 받은 그 후라 그말이오.
그래서 내가 그분에게 말하기를 '예, 고맙습니다. 그만치라도 깨달았으니까 다행은 다행입니다. 물어보니까 거기 대해서 무슨 설교 했는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뿐인데 그만큼이라도 깨달았으니까 그래 감사 하기는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말 한 것은 사탄이 말하기 때문에 사탄아 물러가라.' 내가 그랬어. '사탄아 물러가라. 미안하지만 이 말에 대해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거게 대해서는 내가 이제 미혹을 받지 안할 것입니다 왜? 내가 거기 가서 나도 그래 생각하고 그 문제 가지고 밤새껏 좀 기도를 하는 가운데서 해결을 받아서 주님 앞에 대책망을 받은 그 일이기 때문에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여러분들이 와 가지고 나한테 말한 것과 꼭 같은 생각인데 그 후에 주님에게 기도해 가지고 주님 앞에 책망받은 지금 내 마음이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내 마음과 당신들 마음과 두 마음은 달라서 내 마음은 책망받은 마음은 처음에 내가 생각한 그 마음도 사탄의 마음이라 내가 물리쳤는데 당신의 말한 것도 사탄의 깨달음입니다.
물러가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그렇기에 환경을 그것을 너무 하나님보다 과대평가해, 하나님이 옳다 하고 이게 틀렸으면 천하 인간이 다 그렇다 해도 하나님이 옳다 하는 그분을 대접해야 되고 그분을 높여야 되지 '뭐 인간들의 비위와 인간들의 생각이 어떻게 되느냐?' 어쨌든지 그분의 좋아하도록만 해 버렸으면 됐지 그다음에 생각할 것 없는데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 해 가지고서 이래 된 것이라 그것을 말했습니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만들려고 우리를 구속하셨느냐 하면 하나님과 꼭 같은 사람을 만들기 위해 가지고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꼭 같은 사람을 만드는 데에는 만드는 그 시공 방편, 하나님이 당신과 꼭 같은 사람을 만드는 그 방편, 만드는 제작 방편, 조성 방편,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모형을 만드는 방편, 그 방편은 뭘로 가지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없는 가운데에 만드실 때에? 뭘 가지고 만들었습니까? 없는 가운데에 천지를 만드실 때에 뭘 가지고 만들었지요? 녜, 하나님이 말씀을 해 가지고서 말씀애 순종함으로 그게 만들어지는 그 방편 썼습니다.
나는 이거 눈물이 자꾸 나와요. 그래서 내가 감사의 눈물을 많이 흘리지 못하니까 이제 노쇠한 이거 병 눈물이 나온다 그걸 지금 내가 생각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릴 만치 흘리면 이 눈물이 그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병눈물이오. 이건 뭐 감사의 눈물도 아니고.' 그러며 또 그러니까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이삭도 눈이 어두웠고 야곱도 눈이 어두웠고 모두 사도 바울도 눈이 어두웠다' 그걸 떡 거기다 떡 들어붙입니다.
나는 그게 아니야. '사탄아 물러가라. 그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래 우리를 하나님과 같은 자를 만들려고 하시는데 만드는 시공 방편은 뭘 가지고 시공하느냐 하면 일차 창조를 하실 때에 뭘 가지고 창조했느냐? 일차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뭣을 보내 가지고서 창조했습니까? ○OO집사?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뭣을 보내 가지고 천지를 창조했습니까? 자신이 없다 말이오. 이리 하더만 '말씀' 그래 가지고서 뭣이 되겠느냐 그말이오. 맞기는 맞았는데 그래 가지고는 틀렸다 그거요. '말씀!' 하나님이 없는 가운데 모든 걸 일차 창조로 엿새 동안에 창조하실 때에 당신이 와서 손으로 뭐, 손이 없는 분이시오. 무형의 존재요. 완전 전지 전능을 가졌지마는 무형입니다. 이러니까 말씀하실 때에 말씀대로 다 됐다 그말이오.
말씀으로 모두 창조했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일차 창조 해 놓은 것은 그것은 변동될 수 있고 사망될 수 있고 이런 요동될 수 있는 불완전한 일차 창조인데 불완전한 일차 창조를 두 번째 이차 창조하는 것은 진동되지 아니할 것, 아니할 나라라 이랬다 말이오. 진동되지 아니할 것들, 변동되지 안할 것, 전부 영생하고 완전의 것들을 창조하는 이차 창조, 재창조, 이차 창조, 그건 재창조가 아니고 이차 창조.
다른 걸 만들어 놓은 것을 가지고 또 그걸 가지고 그걸 만들고, 아버지를 만들어 가지고 또 아들을 만들고 자꾸 이래 한 것은 재창조.
이차 창조, 두번째 창조하는 이차 창조는. 이것은 완전한 창조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완전한 창조는 하나님이 하실 때에 무얼 가지고서 하시려고 하십니까? 자, 일차 창조는 말씀 가지고서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서, 말씀하니까 그 말씀이 다 창조를 했다 그말이오. 말씀은 진리인데 진리는 능력입 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신 말씀이, 하나님이신 말씀이 말씀을 보내 가지고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말이오.
말씀을 보내신 말씀은 누굽니까? 누구? 누구? 뭐라 하노 큰 소리로 해 봐.
인자. 예수님. 제이위 하나님. 성자라 말이요,성자. 왜 그말을 하느냐 하면 말씀으로 창조했다 하니까 이 말씀을 말씀이 말씀하신 말씀인지, 또 말씀을 한 말씀인지, 말씀을 한 주인인 말씀인지 주인인 말씀이 말씀해 놓은 말씀인지 그것을 구별 못 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또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필요 없는 말은 안 한다 그거요.
그러면 지금 신구약 성경은 누가 말해 놓은 말씀입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는 그 말씀입니까 그 말씀이 말해 놓은 말씀입니까? 말씀이신 하나님이 말해 놓은 말씀입니다. 알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말, 하나님의 말이 이 천지를 창조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이라 했는데 말씀이라고 한 그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를 했습니까? 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말씀이라고 이름을 지은 그 하나님이 말한 그 말이 들어서 모든 만물을 창조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기록해 준 이 성경 말씀과 같은 동등의 말입니까 다른 말입니까? 동등의 말입니다, 동등의 말 동등의 말인데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존칭을 써 가지고서 말씀이라 이런다 말이오.
동동의 말인데 그 말이 엿새 동안에 모든 것을 창조를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요한복음 1장에 '그분이 창조하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말은 그분이 말을 해 가지고서 창조가 됐다, 그분이 말하지 아니하고는 창조된 게 하나도 없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일차 창조로 우리를 지어 주신 모든 일차 창조할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는 실지의 실제 그 시공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 그 말이 들어서 모든 것을 창조했다 그거요.
이런데 이미 일차 창조한 그것을 다시 거기다가 이차 창조를 가합니다. 이차 창조를 가해 가지고 이제는 일차 창조에 만들어진 그것은 불완전한 것인데 이차 창조를 가해 가지고서 완전한 것을 만들어서 영원 불변 완전의 것을 만드는 것이 이차 창조 곧 성화 역사요, 중생 역사요, 구속 역사라 그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를,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산다' 썩을 것을, 심는다 말은 썩을 것을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내놓으면 바치면 하나님께서 썩지 안할 것으로 만들어 내 주신다. 이제 일차 창조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면 하나님께서 이차 창조를 그것을 가공을 해 가지고 이차 창조의 능력으로 개조를 하는 이차 창조 개조를 하면 그것은 완전하고 영원하고 불변하고 하나님과 꼭 같이 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이루어진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차 창조로 첫째 아담에게 속한 이것을 이차 창조를 하려고 우리를 불렀는데 이차 창조는 둘째 아담 일차 창조는 첫 아담과 꼭 같고, 눈도 같고 귀도 같고 꼭 같소. 물론 얼굴이 좀 다르기는 다르지마는 일차 창조된 아담과 꼭 같습니다. 아담과 세포도 같고, 눈도 같고, 귀도 같고, 코도 같고 꼭 같소.
그와 마찬가지로 이차 창조를 하기 위해서, 이차 창조는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되는 창조인데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인데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나는 것은 둘째 아담과 꼭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리켜서 고린도전서 15장에 '땅에 속한 자가 아담과 꼭 같은 것과 같이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에 속한 자와 꼭 같이 된다' 땅에 속한 자의 새끼가 땅에 속한 아담과 꼭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속한 둘째 아담에게 속한 것은 둘째 아담의 새끼는 둘째 아담과 꼭 같이 된다 그렇게 15장에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를 이차 창조를 하시는데 창조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꼭 같은 자를 만드는 것이 이제는 이차 창조요. 이것이 완성이오. 이제는 완전히 완성하는 이 완성 단계에서 완성하는 이차 창조인데 이차 창조는 무엇으로 한다고요? 무엇으로 한다고요? OOO? 이차 창조는 뭘로 하지? 이차 창조는 뭘로 해요? 망치로 해요 톱으로 해요? 다이나마이트로 해요? 원자력 가지고 해요? 이차 창조는 뭘 가지고 하지요 저기 맞는가 한번 말해 봐 이차 창조는 뭘 가지고서 창조하지요? 일차 창조한 것은 이제 완전 창조로 이차 창조로 완전 창조를 만듭니다. 그 창조는 뭘로 해요? 큰 소리 해 봐. '틀리면 어짤꼬?' 틀리면 틀리는 그놈이 '틀렸다' 했으면 다시 그거 알아야지요.
그러니까 틀렸으면 틀렸어도 유익을 보요. 자기가 대중 앞에서 말했다가 틀렸으면 그것은 평생 안 잊어버려집니다. 틀렸으면 틀려 유익보는 것, 또 바로 됐으면 바로 됐다고 많은 사람에게? 저 사람은 저 바로 깨달으니 나도 바로 깨달을 수 있겠구나' 해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 끼치니까 또 유익된 것, 이래도 저래도 유익인데 뭣 때문에 큰 소리를 못 하고 하느냐? 그건 옛사람 그놈이 들어서, '야, 그러다가 우사할라?' 그놈은 언제든지 삐뚤어지게만 우리에게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이차 창조는 뭘로 가지고서 창조합니까, 창조하는 실제 창조하는 그 시공을 뭣이 하지요? 말씀이라. 말씀이 말씀한 말. 하나님의 말. 하나님의 말이 와서 창조를 합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이 누구의 말입 니까? 하나님의 말이오.
존칭을 붙여서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 가지고서 창조를 하는데 신구약 성경은 딱 정해 가지고 있어. 정해 가지고 있는데 요 말씀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고 저 말씀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시는데 하나님께서 그러면 요 말씀을 순종해라 저 말씀을 순종해라 뭐 그렇게 하나 하나 소리를 냅니까 뭘 냅니까? 소리로 하지도 안하고 글로 써 주지도 안하고 우리에게, 지난밤에 배웠지요? 하나님이 요 말씀을 네가 순종해라 저 말씀을 순종해라 자꾸 차례 차례 요렇게 순종하도록 우리에게 한 말씀 한 말씀 해 주는데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해 주실 때는 뭘로 주시지요? 예, 요 현실을 주니까 그 현실에 죄짓지 안하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 하니까 요 말씀 지켜야 되고 또 저 현실 주면 저 말씀 지켜야 되고 그래 가지고서 한 말씀씩 줘 가지고서 그 말씀이 들어 창조를 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 우리 현실에, 현실을 바꿔 줄 때에 현실을 그렇게 바꿔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요 바꿔 주신 것은 그 현실에 맞은 순종을 하라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라 하는 것으로서 그 현실을 주신 것이니까 우리가 현실을 새 현실을 만났을 때에는 거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현실에 요렇게 해라 하는 말씀이 성경 가운데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 있는 그 말씀이 있어서 그 말씀대로 요 현실에서 하는데 그때 현실에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보고서 나는 찾지마는 그때 그 현실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바로 할 때에 그때에 내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뜻을 내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문서로 주신 것입니까 그때에 하나님이 직접 문서로 우리에게 뭉텅이로 한목 문서로 주신 것을 그 현실에 그 한 마디를 하나님이 따로 그 현실에 나에게 직접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어떤 것입니까? 직접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직접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심령이 어두워서 듣지를 못하니까 신구약 성경을 보고서 '여게는 어떻게 해야 되나?' 이렇게 나는 더듬어 찾지마는 그때에 성경 보고 찾고 성신의 감동을 받아 가지고서 더 바르고 옳게 깨끗하게 그것을 찾아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았을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차 창조를 하시려고 그 능력의 말을 나에게 직접 말해 줘서 그 말을 내가 직접 듣고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에 내게 온 하나님의 그 말씀은 이차 창조를 하려고 일차 창조할 때에 창조한 그 능력과 꼭 같은 능력이 이번에는 이차 창조 하려고 나에게 그 하나 하나 창조해 나가시면서 하나 창조하려고 지금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현실에 나에게 해당된 하나님의 뜻인 그 말씀은 문서로 내가 보고서 찾았지마는 하나님이 직접 나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은 창조의 능력 가지고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인데 나에게 그때 말씀하실 때에는 그 말씀하시는 말씀이 내게 왔습니다. 내게 왔는데 내게 온 그 말씀의, 목적은 뭣입니까? 그 말씀이 뭐 하러 왔습니까? 그 말씀이 성경에 있는 말씀입니까 주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말씀입니까? 직접 하는 말씀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성경 보고 살지 말고 네 속케 기름부음이 너에게 옳고 바르게 가르쳐 주는 그대로 하라 그말이오. 그러면 그때에 성령님이 와 가지고 직접 나에게, '천지야 되어져라 하늘과 땅아 되어져라' 하 니까 그대로 됐다 말이오.
그 능력을 가지고서 주님이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인데 그때에 내가 그 말씀한 대로 순종을 하면 그 말씀대로 하면 뭣이 돼? 말씀대로 하면 이차 창조가 되는데 어떤 이차 창조가 되느냐? 말씀대로 하면 그 말씀대로 한 그것이, 말씀대로 한 그것이 바로, 말씀대로 한 내가 온전한 사람이 됐고, 이차 창조로 온전한 사람이 됐고 우리가 말씀대로 행동한 그 행동이 곧 온전한 행위의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때에 내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그 순종이 '바다야 모든 생물을 내라' 했을 때에 그대로 바다가 내니까 내어졌다 그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차 창조의 그 말씀을 직접 그때에 내게 '요렇게 해라' 요런 그 말씀을 들어서 그대로 하는 그게 바로, 그대로 함으로 뭐이 되는 게 아니라 그대로 한 그 사람이 이차 창조를 받은 사람인데 그것은 죽지 않는 사람입니다.
영원한 사람 영생을 가진 온전한 사람이요, 그것 또 요렇게 해라 하는 그 행동은 온전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그 실력입니다. 온전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그 실력이 이차 창조로 창조됐고 또 그 행동한 그 일 그것도 다 온전한 것이지마는 그 행동을 하는 그 행동한 기능, 행동한 기능, 행동한 기술 행동한 그 능력이 일차 창조의 능력의 것이 이차 창조의 능력을 받아 가지고 완전의 것으로써 이차 창조 되어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현실에서 와지는 요 말씀은 이것인 것을 우리가 깨닫고 믿어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은 털끝만치라도 틀리면 안 됩니다. 이런데 오늘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나따나 '믿으면 구원된다' 하기 때문에 이건 침 천부당 만부당 말이라 그말이오.
이래 가지고 무엇을 옳게 말해 주면 다 별스러운 말한다고, 그게 다 전부 마귀 역사라 말이오. 별스러운 말 한다 하면서 자꾸, 이 성경을 바로 가르쳐서 요렇고 조렇고 구별해 가지고 옳게 바르게 가르치는 그것은 따라오다가 귀찮으니까 '에이, 까다롭다.' 제가 대구 가 가지고 주암산에서 집회할 때에 대구에 있는 목사님들이 많이 와 참석을 했습니다. 참석을 해 가지고 그분들이 뭐 봉산 집회도 따라가고, 따라가면서 말하기를 그만 걱정이 돼 가지고 탁 숨이 죽어 져 버렸어. 죽어져 가지고 '백 목사님 설교 말씀을 들으니까 꼭 옳기는 옳은데 우리 한 것은 다 틀려 놨으니, 다 틀려 놨으니 이것을 다 고칠라 하면 지금 이제 입학생 모양으로 지금 목사로 입학을 해 가지고 다 고쳐야 될 모양인데 참 이것 큰 걱정입니다.' 이러니까 다 고쳐야 될 줄 알고 다 고치려고 달라들어서 보니 참 힘이 들고 애를 쓰고 모든 행동이나 사상이 다 다르니까, 한 일을 만나서 해결하는 것도 그 사람들 해결은 이렇고 이거는 이렇고 그러니 다르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다 틀렸으니 이것을 언제 다 고칩니까?' 그러니 고칠 마음은 가지고 달라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아무래도 고쳐야 되겠다. 우리는 다 틀렸고 이제까지 예수 믿어야 다 헛예수 믿었네 다 잘못 믿었네.' 이랬더라 그말이오.
이랬는데 마귀란 놈이 무슨 큰 일을 해서 다 잡아먹었느냐 하면 마귀란 놈이 있다가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게 틀렸다. 중생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 하지마는 중생된 사람이 얼마든지 범죄를 하는데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안한다 중생된 영은,' 영은 그 사람들이 마음으로 보거든.
마음으로 보니까 '중생된 사람의 마음도 하루 열 번도 죄를 범하는데 중생된 영은 범죄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니까 이거 백 목사 주장이 틀렸다' 하니까 이 사람들이 '됐다! 됐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가 이제 까지 배운 것은 다 틀릴 리가 있느냐? 그러면 그렇지. 그게 틀렸구나.' 백 목사가 틀렸다 하니까 어떻게 기뻐서 즐거워서 막 온 노회서 결정을 했어. 온 경북노회서 '그렇지. 백 목사가 틀렸지,' 기뻐서 결의를 하고 '이제는 그러니까 우리 배운 것이 이것이 다 옳고 이러니까 고칠 필요가 없다.'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우리 배운 것 그전에 안 것은 전부 다 틀렸기 때문에 다 고칠라 하니 지금 목사가 들어서 주일학교 학생이 돼야 될 모양이니까 이거, 기가 찼는데 이제 그게 백 목사 주장하는 게 틀렸다 하니까 어떻게 좋고 안심이든지, 왜? 자기의 전부를 고쳐야 될 터인데 고칠 게 하나도 없으니까 안심이 된다 그말이오.
그러나 그 안심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까지 가 가지고서 안심이 됐으면 좋지 심판 앞에 가 가지고 그때사 '아이고, 그때 고칠 걸 그때 안심을 준 그놈이 들어서 우리를 망쳤다.' 나중에 집중 사격이 올 것이라 그 말이오.
중생된 영은 절대 범죄 안 합니다. 틀리지 않소. 안 틀렸소. 안 틀렸는데 그걸 내가 논문을 내라 뭐 하라 하는 그것은 왜 그러냐? 너무 세워 대면은 그 사람들이, 자꾸 세워 대면은, 틀린 것도 자꾸 세워대다 보면 뒤에 가서 냇들 힘으로 뒤에 가서 백지 세우다가 '아, 우리가 틀렸습니다.' 이 말하기가 참 인간이 어렵다 그말이오. 그 부패성이 있어 그말 못 하게 하거든. 이러니까 가만히 둬 두면 저희들이 이와같이 설설 깨달아 가지고 돼지지 싶어서 내비두는 것인데 중생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그것은 거의 사람들에게 배어 들어가서, 주장은 해도 속으로는 '중생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 영이 뭣인가? 영이 마음?' 마음은 혼이오. 마음은 혼이요 영은 영인데 짐승도 혼은 있다 했어. 짐승 마음이 있어 없어? 짐승 마음 있어 없어? 있습니다. 마음이 사람과 꼭 같소.
책임도 꼭 같소. 침팬지라 하는 그 원숭이는 크기가 우리만합니다 우리만한데 가족에 대해서 책임을 얼마나 잘 지든지 먹이고 입히고 하는 것 전부 책임 다 집니다.
저녁으로도 누워 잘 때는 나무 위에 가족들은 저거 아내나 딸이나 아들이나 전부 나무 위에 다 올려 앉혀 놓고서 호주되는 그 숫앙고라는 나무 밑에 딱 밤새껏 이래 그 밑에 거기서 파수하고 있어, 뭣이든지 밑에서 기어올라가지 못하도록.
인제 날아다니는 것은 밤에 날아다니는 것 가지고는 올빼미 그런 것은 잡아먹지 못하기 때문에 밑에서 기어올라 가는 것, 배암이나 뭐이 그런 게 기어올라가는 날이면 그만 절단나니까. 그놈이 기어올라가면은 배암을 닥치면 배암을 싸워 가지고 제가 죽기까지 싸워서 기어코라도 못 올라가도록 그래 가지고 그러면 벌써 올라가기 전에 기별을 해 가지고서 다 딴데로 피해 도망을 가도록 이렇게 한다 말이오. 그렇게 그 책임감을 가져.
그게 마음이 없소? 책임감이 없소? 그것이 지혜가 없소? 예산이 없소? 추억이 없소? 계획이 없소? 감정이 없소? 사랑이 없소? 정이 없소? 다 있다 그말이오.
그것이 뭐이냐 하면 '짐승도 혼은 있다' 사람은 영은 다 죽어버리고 혼뿐이라.
혼하고 고기덩어리뿐이라. 그게 사람이라고 '사람이 육체가 됐다' 성경에 말하지 안했소? 이렇게 얼마든지 말해 놨는데 그만 어두워지니까 그걸 모르고 냇들바람으로 자꾸 세워 댄다 그말이오.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가르쳐 놓은 것이 전부 다 삐뚤어지게 가르쳐 놨다 말이오. 삐뚤어지게 가르쳐 놨는데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떡 바로 가르치니까 삐뚤어지게 가르쳐 놓은 그것이 절단납니까 안 납니까? 절단나니까 이 삐뚤어지게 가르친 서기관 제사장들이 예수님의 제일 적이 됐다 말이오. 예수님을 없애야 되지 예수님을 두니까 예수님이 와서 가르치는 게 전부 저거 가르치는 게 삐뚤어졌다 이래 되니까 저거 한 것은 거짓말 한 것밖에 안 되고 이러니까 예수님을 없애야 되겠다 그거요. 그들이 옳은 줄 알았지마는 저거 가르쳐 놓은 게 헛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반대했고.
반대해 가지고 그다음에 예수님을 인제 죽였다 말이오. 죽이고 나서 예수님을 없애야 되기 때문에 죽였다 말이오. 죽이고 난 다음에는 그 마음에 불안해.
그분이 가르쳐 놓은 건 옳고 우리 가르치는 건 틀렸는데 그부을 죽였으니 우리 가르쳐 놓은 것이 그대로 없어지지 안하고 그대로 사람들 속에 점령을 해 가지고 있지마는 우리 가르친 게 틀렸다.' 고통이 된다 말이오.
고통이 되지마는 '그때 죽이지 말고 우리 가르친 것이 틀렸을 그때 그만 고칠 걸 이제 죽이기까지 해 놨으니 지금 우리 가르친 것이 틀렸다 이 말 하는 날이면 모든 백성들이 우리를 잡아 죽일 터이니까 이게 문제다.' 차차 책임이 더 무거워져 간다 그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그래 그만 냇들바람으로, 죽인 그걸 속으로는 고통이 되지마는 후회가 되 지마는 죽여놨다 말이오.
이래 놨는데 어제 죽은 가운데 살아났다 말이오. 살아난다 했으니까 만일 살아나는 날이면 큰일이라 말이오. 살아나면 큰일인데 또 살아나지 못하도록 군대를 지켜 가지고서 야단을 지켜서 이렇게 해 놨다 말이오.
이래 가지고 자꾸 깨달아지고 나니까 자기네들, 주님을 반대하고 나니까 깨달아지니 과거에 반대 안 했더라면 좋을 뻔했는데 반대를 하고 나서 보니까 지금은 그 깨달은 대로 그대로 하려 하니까 너무 자기들이 희생이 크니까 안 됐다 또 뒤로 미루고, 미루고 미뤘는데 이제 지옥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서 그 일이 나타날 때에 그때에 그때는 그럴 거요. '아이고 내가 살았을 때 죽기 전에 어짜든지 내가 그때라도 마지막 죽을 때라도 '주님의 말씀이 옳다' 이 말 한 마디라도 하고 왔으면 내가 이 심판을 면할 것인데 원통하다. 자꾸 잘못된 게 갈수록 원통하고 원통하지마는 오는 벌이 크기 때문에 미루어 나가는 것과 꼭 같다 그말이오.
저거가 틀렸지마는 틀린 걸 말하면 저거 주장이 지금 팔아먹지 못할 것이고 밥통이 떨어질 것이고 이러니까 지금 옳은 걸 알고도 하면서도 이걸 말하면 안 될 터이니까 반대를 해 나간다 그말이오. 여러분들이 속으면 안 돼! 자꾸 미친 사람 돼라고 자꾸 내 자랑같이 내 말만 자꾸 이래 하니까 그 한번 말할 때 그 파동이 파문이 많이 가지니까 그 영향이 내게 대해서는 굉장히 커지는 것인데 이걸 또 말해도 안 듣지 또 말해도 안 듣지 이러니까 탈이라 그거요. 그래, 속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 오늘 아침에, 이걸 왜 자꾸 시간 늦추느냐? 요 가르치던 끄트머리에 그 시간을 지내면 거게까지 오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이제 그만 딱 중단해 버리고 뒤에 새로 시작할라 하면 크니까 자꾸 말하는 것이라.
자, 우리를 예수님의 대속으로 대속하신 것은 어떤 자를 만들기 위해서 대속을 하셨습니까? 누구와 같은 자? 하나님과 같은 자를 만들기 위해서 대속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거 룩하심같이, 깨끗하심같이 깨끗해라' 하는 이 말을 '사람이 그럴 수가 어데 있느냐?' 이래 가지고서, '이 말을 그러면. 뭣 때문에 했겠느냐?'이 말 한 것은 아무라도 자기가 깨끗하다 의롭다 아무리 말해 봤자, 깨끗하다 의롭다 아무리 말해도 그 사람에게 '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온전하냐? 거룩하냐? 그러면 그만 거기 딱 정죄를 받는다 말이오. '이 대가리 들고 나서는 자들을 대가리 들고 나서지 못하도록 정죄하기 위해서 누르기 위해서 그 말씀을 해 놓은 것이다' 그렇게 일등 학자들이 주석에 해석을 다 그리 해 놨습니다. 이걸 보고 좀 알라 그말이오.
그랬는데 성경을 바로 알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하나님 꼭 닮아서 그 온전한 부분만 갑니다. 이 고기덩어리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서 이 껍데기 윤곽은 가지마는 그 속에 기능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처럼 온전한 것, 하나님의 것이 와 가지고서 믿음으로 자기에게 와 가지고 자기 속에서 자기 것이 되어진 그것만이 그 성화가 되고 그것만이 하늘나라 갑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거룩하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어. 비슷한 것 하나도 없어.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고 온전하고 깨끗한 그것만 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것이 어데가 되느냐? 이 세상에서 행동으로 되어지는 것인데 그러면 그와같이 하는 그 일차 창조의 것을 두번째 이제는 '진동되지 안할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했다' 히브리서에 말씀했다 말이오. '일차 창조의 것은 다 이것은 불타고 다 없어지고 이렇지마는 이차 창조는 진동되지 아니할 것들을 창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왔다' 이렇게 말했다 말이오.
그러면 일차 창조를 할 때에 뭘로 창조했습니까, 큰 소리로 자, 모두 한목?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 이제 거기는 말이라 해, 말이라 합시다. 일차 창조를 뭘로 했습니까? 누구 말이요? 하나님의 말로 이래 놓으니까 '말씀'하고 이래 놓으니까 혼돈이 돼서 그래 말하는 것이라 하나님의 말인 말씀이 와서 창조했습니다. 그러면 일차 창조한 것을 다시 이차 완전 창조를, 이차 창조로 완전 창조 이제 완성을 만든다 그말이오. 완성을 만드는 이 완성 창조 곧 이차 창조는 무엇으로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십니까? 뭘로? 자, 한번 해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로! 하나님의 말로! 이 '말씀으로' 하니까 별스러운 건 줄 아는데 하나님이 하신 말로 그말이오.
말씀이라는 건 존칭을 해 가지고 말씀이라 해 놨다 말이오 하나님의 말로.
하나님의 말인 말씀으로, 그러면 '말로' 그래 하면 불 경죄를 짓기 때문에 말씀이라 이래 하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이 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그말이오.
창조를 하는데 그 말씀이 신구약 성경에 있는 이 말씀이 창조합니까 신구약 성경에는 한목 뭉텅이로 우리에게 줘 놨는데 이 말씀을 이렇게 줘 놓고 하나님께서 한 마디 한 마디 그때 그때 직접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그 말씀이 창조합니까 신구약 성경 글로 써 가지고 있는 이 말씀이 창조합니까, 이차 창조를 무엇이 합니까? 직접 말씀하신 이 말씀이 창조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할 것이 아니라 네 속에 기름부음이라는 건 중생된 영감을 말하니까 중생시킨 하나님이라 그말이오. '네 속에 영감이 너에게 직접 말해 줄 때 그대로 해라. 그러면 옳고 바르고 참되니까 그대로 하면 옳고 바르고 참되게 된다. 그러고 그 안에 거하라.' 이렇게 말씀했다 그거요. 자 오늘 아침에는 여게까지.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그 말, 하나님이 직접 지금 내게 말하는 그 말하는 말씀, 그 말씀이라야 나를 이차 창조하는데 그 말씀은 언제 나에게 말합니까? 언제 나에게 말합니까, 저 뒤에도? 현실에 말합니다.
현실에 말하는데 하나님이 당신이 이 말씀 하고자 하고 이 말씀을 나에게 명령하고 싶고 저 말씀을 나에게 명령하고자 하면 말씀을 글에 써서 우리에게 줍니까 뭘로 이 말씀 저 말씀을 당신이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이와 같이 직접 말씀해 주십니까, 어떻게 주십니까? 어떻게 주십니까? 글로 써 줍니까? 소리로 해 줍니까? 뭘로 줍니까, 어떻게 줍니까? 어떻게 줍니까? 자 글로 써 준다고 생각하는 분 손 한번 들어 봐. 음성으로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 감동으로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는 분 손 들어 봐.
현실을 가지고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요게 맞아! 요게.
요 현실 주면 요 말씀 지켜 하지. 요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내 현실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그 바른 뜻은 주님이 직접 나에게 이차 창조로, 창조의 능력으로 말씀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행한 그러면, 그 말씀대로 하면 그 말씀대로 한 그것이, 그 말씀대로 한 그 사람이,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된 것이요 그 행동이 온전한 실력이 된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받은 건 그만치, 그 시간에 것은, 그 시간에 것은 그 부분은 완전이 됐다 그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여러분들이 듣고 나서 잊어버려 버리면 헛일이오. 들은 것을 하루 종일 '옥토에 뿌린 씨' 듣고 나서 들은 것을 하루 종일 놓지 말아요. 하루 종일 놓지 말고 꼭 그 말씀을 자꾸 새김질해서 잊어버리지 안하고 하면 그 말씀이 우리의 뼈와 살이 됩니다.
오늘 아침에 많이 늦었는데, 그만 오늘 아침에 많이 늦어서 권찰회 안 합니다.
권찰회 안 하고 광고만 합니다.
앞으로 금년에 졸업하는 주일학교 학생을 졸업하면 중간반이 되는데 중간반이 될 때에 과거에는 중간반 학생이면 무조건 전부 중간반 반사들에게 다 떼 맡겨서 이렇게 심방도 하고 예배도 같이 인도를 하고 이렇게 했었는데 을해는 좀 그것을 바꿉니다.
왜 그러냐? 주일학교 반사들이 육 년 동안이나 길러 놓은 그 학생을 중간반에 갖다 맡겨버리니까 중간반이 심방도 옳게 잘 하지도 안하고 또 남이 길러 놓은 남의 자식이 돼 놓으니까 애착도 별로 없고 해서 맡아 가지고서 똑 제가 낳지 안한 것 남이 낳은 자식을 기르려고 하니까 애정도 안 가고 이러는 것 모양으로 별로 애착 없이 기르니까 그만 그 학생들이 다 죽어버립니다. 이런데 또 주일학교 반사들이 가서 심방을 한다고 해도 와 가지고서 서로 거리껴 가지고서 이와 같이 안 되고 그러니까 그래 가지고 다 죽이는 거라.
그러니까 차라리 그만 주일학교 졸업하는 학생들을 우리에게 맡겨 주면 우리가 끝까지 관리해 가지고서 그러면 좋겠다 하는 그런 사람들이 주일학교 반사 중에 많습니다.
많이 일어나서 그것 가만히 생각하니까 주일학교 반사들은 벌써 육 년 동안 길렀으니까 정이 들어 가지고서 제 새끼가 됐는데 이것 중간반 반사들은 갑자기, 제가 만들어 놓지 안했고, 제가 기르지 안했고, 제가 낳지 안하고, 제가 전도하지 안하고, 제가 낳지 아니한 이 주일학교 학생들이니까 남의 자식 맡은 것과 같이 아무 관리한다는 것이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그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예사로 취급해 가지고 가야, 가면 학생도 뚜루 하고 반사도 뚜루 하고 이래 놓으니까 그 조화가 잘 맞지 안하니 안 됐다.
이래서 금년에는 그리 안 하고 주일학교 졸업하는 그 학생을 그 반사가 자기가 '이것은 요 학생은 내가 맡아 가지고서 기를 터이니까 요 학생이 중간반에 가서 예배 볼 때,-출석은 중간반에 가서 해야 됩니다.-중간반에 출석을 내가 시킬 터이니까' 중간반에 어느 반사에게 부탁을 하면서 '요 학생을 예배드리러 내가 데려다 줄 터이니까 예배 드리는 그 한 시간은 잘 관리를 해서 이 학생이 시험에 들지 안하도록 그렇게 잘 관리해 주십시오' 그래 부탁하는 것을 위탁을 한다.
그러면 중간반 선생이 위탁으로 받은 학생이 있고, 또 어떤 학생은 그 학생을 누가 아무도 자기가 맡을 주일학교 반사가 없는 학생은 할 수 없어 그 학생은 중간반이 그걸 심방도 자기가 다 맡았고 예배 볼 때도 맡았고 그 학생을 관리하는 것도 맡았고 그렇게 맡아 가지고서 이제 하는 그런 학생도 있고, 그러면 그 학생이 있는데 구역장이 '요 학생은 요거 우리 구역이니까 요걸 잘 심방을 해서 돌봐서 알뜰히 돌봐 가지고 잘 길러 주십시오.' 그렇게 구역장이 부탁을 하는 그 구역장 부탁을 심방 의탁과 예배 의탁을 둘 다 의탁을 받아 가지고서 기르는 그런 학생이 있겠고, 그러면 그러는 데에는 그겻이 구역장도 일주일에 한번은 가서 그 학생을 심방을 해야 되고 반사도 한번 심방해야 되고, 요러는데 구역장이 맡기기만 해 놓고서 심방을 안 합니다. 심방을 일 년이 가도 심방을 안 해 안 하면 이것은 구역장이, 그것 두 달 하련지 그걸 지금 아직 정하지 안했는데 두 달 동안 한번도 심방하지 안한 학생은 '이 구역장 당신이 이름만 맡아 가지고 도무지 이 학생에게 관심이 없으니까 이거 되겠습니까? 구역장이 지권찰을 누구를 보내든지 보내서,' 자기가 맡은 사람은 얼마 안 된다 그말이오. 그 밑에 지권찰이 맡고 이러니까 자기가 맡은 사람은 찍해야 몇십 명 더 안 돼요, 다 보면.
구역에서 맡아서 심방을 두 달을 하련지 석 달을 정하련지 그거 모르겠습니다, 아직 정하지 안했습니다. 이제까지는 심방은 한 달을 말해 놨어 반사 심방을 한 달 말했는데 아마 구역 심방도 한 달 해야 될 것이야. 한 달 동안 한번도 안 했으면 '이것은 한 달 동안 당신이 한번도 안 했기 때문에 이래 가지고는 안 되니까 그것을 고소를 한다 그말이오.
그걸 이제 이 이 중간반 책임자에게 고발합니다. '이 구역은 지금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서 한 달이 지나가도 한번도 심방 안 했으니까 이름만 구역장이지 아무 소용이 없이 활동이 없으니까 그거 그래 가 지고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중간반 책임자가 불러 가지고서 '이 구역에서는 한 달에 한번도 심방 안 한다 하는데 이러면 안 되니까 심방을 못 할 판이면 내놔 버리든지 그리 안 하면 심방을 하든지 좌우간으로 하십시오.' 그러면 나중에 그 구역에서 '좀 심방을 나는 못 해도 좀 해 주십시오.' 하면 과자를 사 주든지, 과자를 사 가지고서 달래서 '심방을 좀 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든지 '그러면 내가 돈을 얼마를 댈 터이니까 심방을 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든지 자기 몸이 하는 대신 안 되면 돈이라도 내든지, 과자라도 내든지, 떡이라도 사 내든지, 밥이라도 사 내든지 뭐 있어야 될 거라 말이오.
그러면 그렇게 해 가지고서 어짜든지 중간반 반사가 심방을 부지런히 하도록 그렇게 만들고, 또 중간반 반사가 이것은 맡기만 맡아 가지고 한 달 내 심방을 한번도 안 했다 그말이오. 그러면 구역장들이, 구역장과 반사들이 둘이 합해 가지고 중간반 반사를 고발을 합니다. 고발을 중간반 책임자에게 고발하고, 책임자에게 고발하면 ○목사에게 고발하면 O목사에게 고발하고 또 ○선생에게 고발하고 그러면, 일부 부장에게 고발하면 그 부장이 고발한 것이 중간반 책임자에게 올라가고, 책임자에게 올라와 가지고서 해결 못 하면 중간반 교장되는 저에게 또 올라온다 말이오.
제게 올라오면 와 가지고서 '이 반사 네가 맡아 가지고 한 달에 한번도 심방하지 안했으니까 네가 이거 이래 가지고는 그 학생을 네가 내놓든지 해야 되지 네가 거머쥐기만 거머쥐고 있어 가지고 학생을 죽이니까 그 심판을 얼마나 네가 만나려고 그러냐?' 이래 권유를 해 가지고 심방을 하게 하든지 내놓게 하든지 이렇습니다.
그러면 다 내놓으면 어찌 되느냐? 다 내놓으면 이제 그것은 누구든지 자기가 줍습니다. 누구든지 주워 가지고 심방하는 사람을 자기가 심방하든지 해 가지고 하나씩 둘씩, 한 달 동안 심방 안 함으로 내놓는 것, 또 두 달 동안 교회 안 나옴으로써 그 중간반에 내놔 주는 것, 중간반 몇 달이라 했지요? 넉 달이라 했습니까? 출석은 넉 달로 했어? 석 달. 석 달 동안 안 나온 학생들은 자동적으로 회개를 하고서 '내가 지금이라도 돌볼 터이니까 이제 뺏기지는 안할랍니다' 하는 건 안 뺏길 것이고 뭐 뺏기든지 어짜든지 하는 사람은 뺏겨버리고,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것은 주워 가지고 자기가 주워 가지고 권찰이 줍든지 중간반 반사가 줍든지, 이 사람 내놔 중간반 반사가 줍든지 또 주일학교 반사가 줍든지 구역장이 줍든지 평신도가 줍든지, 줍는 것은 다 자기가 줍습니다.
자기가 주워 가지고 그 사람을 심방을 해 가지고 예배에 참석시키는 것은 데려다 시킵니다. 예배에 참석시키는 것은 그것은 다 유급의 반사들이 있으니까 '이분을 예배 볼 때는 좀 책임 맡아 주십시오' 하는 것을 예배 의탁이라. 예배 시간만 의탁한 것, 의탁하면 그 예배 시간에 맡아 주고 다를 때는 자기가 관리하고 심방도 하고 이러니까, 그래 가지고 이부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는 장년반으로 가면은 그때는 구역장에게 의탁을 합니다. '구역장이 이 사람을 좀 맡아서 이걸 좀 의탁을 해서 이것을 관리해 주십시오.' 의탁을 한다 말이오. 의탁하고 심방은 제가 해.
주일학교도 제가 했지, 중간반도 제가 했지, 이부에도 제가 했지 장년반에도 제가 했지 그러니까 그 사람의 자녀라 말이요, 그 사람의 자녀.
이래 가지고서 이것이 차차 차차 숫자가 많아지면 그게 뭐이냐 하면 자기의 자녀입니다. 자기의 권속이라. 자기의 군대라. 이래 가지고서 자 열명 스무명 백명이 돼 놓으면, 백 명 안 되고 한 오십 명만 이래 나와도 그 사람을 할 수 없어서 장년반 여자면 여구역장을 만들어야 될 것이고 이제 남자는 남자 구역장을 만들어야 될 것이고, 이러면 그 사람이 정말로 자, 밑에서 기어올라가 가지고 실력으로 실지로 돼 가 지고서 구역장 된 사람이기 때문에 이래 가지고 자꾸 이래 커 나가면 어떤 사람은 자기 밑에 속한 교인이 장로도 있고, 집사도 있고, 이래 가지고서 자기가 길러 놓은 사람이 천 명 되는 사람, 백 명 되는 사람 되어지면 얼마든지 이래 커집니다.
커지면 나중에 가서 어떤 때가 되면 그것이 다른 한 교회로 갈라져 나가도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똘똘 뭉쳐 그것은 한 교회가 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가 어짜든지 사람을 구원하는 게 목적인데 구원하는 게 목적인데 잘못하면 자기 숫자로만 계산한다면 '암만 그것이 한 달에 한 번일랑 냅두고 일 년에 한 번만 나와도 내놓지 아하고 있으면 일 년에 한 번이라도 한 숫자라도 불어지지 않는가?' 이래 놓으니까 그런 욕심을 가지고 사람 죽이는 뒤에 가서 심판 받을 건 생각지 안하고 그 숫자만 생각하고 붙들어 놓고 있는 이것은 아주 비 양심적이요 하나님 앞에 심판을 자꾸 마련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그리 하기로 했으니까 각 구역장들이, 그러니까 자꾸 인물 양성이라. 자기 구역에 남반사 여반사들을 많이 양성해 놓은 사람은 주일학교 졸업하는 학생들 뭐 중간반에게 맡길 게 하나도 없어. 요거는 자기가 길러 놓은 주일학교 반사가 '요저는 내가 맡겠습니다. 내가 맡겠습니다.' 요래 다 맡아서, 남녀공학을 했기 때문에 중간반부터는 갈라지니까 그 선생이 남선 생이면 여반을 여학생을 다 끝까지 관리는 못 하지마는 자기 구역 내에 있는 여선생이 있으면 그리, 딴 구역으로 보내는 것보다도 그 여선생에게 보내면 쉬울 터이니까 그때 갈라지되 한 구역 내니까 남반사는 여학생을 기르되 그게 어리지마는 차차차 육학년이 되면 그게 이성이 자라고 거게 위험성이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것 또 그러면 여학생은 남반사에게 정을 붙이고 달라 붙기를 좋아하고 이러니까 남반사는 그때 가서, 둘이 달라붙을라 하면 딱 들어붙습니다.
누가 뗄 수도 없어. 그것은 지켜봤자 소용 없어. 지키는 열이 도적 하나를 못 막는다고 안 돼.
그러나 그런 비양심적, 자기 구원이 다 헛일이니까. 모든 음행은, 다른 죄는 자기 몸 밖에 있지마는 음행은 자기 몸 안에 있기 때문에 음행이 끊어지기 전에는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도 안 된다 그말입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다른 죄는 몸 밖에 있지마는 음행죄는 자기 몸 안에 있다고 이렇게 말해 놨어.
이러니까 그것을 남반사는 여학생에 대해서는 그걸 살살, 대번에 딱 끊어버리면 그게 병날 터이고 환장한다 그말이오. 사람 정이라 하는 것 무섭습니다.
이러니까 미리부터 그 준비를 해서 남선생이 여학생을 기를 때에 그렇게 정이 붙도록 하지 안하고 자꾸 교훈에만 붙도록 요렇게 살살 만들어 가지고서 미리 졸업하기 전에 '지금, 인제 졸업하면 어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우리 구역으로 말하면 어떤 그 여선생이 그 사람이 좋으니까' 그리 설설 미리부터 자꾸 연결을 시켜서 교제를 시켜서 이래 가지고서 여반은 여선생하고 딱 붙이고 남반은 남선생으로서, 여선생은 남학생을 또 설설 그래 가지고 '우리 구역에 어떤 남반사 좋은 반사가 있으니까 그리 앞으로 거석할 터이니까' 그래 설설 미리부터 교제를 시켜 설설 정을 붙이고 이러면 딱 대번에 끊지 안하고 그와 같이, 고드름 끊듯이 딱 그래 뿔라지지 안하고 설설 이래 돼지니까 그것이 살아나갈 수 있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자기 구역에 사람을 많이 길러 놓은 사람은 뭐 주일학교 나가 봤자 그 학생들 중간반 반사에게 맡길 게 하나도 없어. 전부 자 기네들이 맡아 가지고 심방 다 해서, 심방해 가지고 안 데려다 줘도 딱 나오도록 같이 이래 해 가지고 같이 해 가지고, 중간반 학생들이면 그래도 쓸모가 있는 머리가 큰 학생들이니까 '네가 아무것이 데리고 오라 아무것이 데리고 오라' 이것을 이용해 가지고 중간반 학생을 주 일학교 반사가 이용을 해 가지고 누구 데리고 오라 누구 데리고 오라 이래 많이 데리고 와야 주일학교 학생도 많이 나오지.
그래 가지고 '너는 예배일랑 중간반에 가 봐라. 중간반에 가면 아무 선생한테 의탁을 해 놨으니까 그리 가 봐라.' 서로 연락을 해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 가면 또 그 선생이 있다가 '이제 오나?' 거기 다,-이게 참 중요한 건데.-명부가 있기 때문에 거기서 그 반사가 올라오면 '아, 아무것이 인제 오나?' 이래 환영을 해 가지고서 같이 예배를 보고, 이러니까 하나도 딴데 보낼 게 하나도 없다 말이오.
이부될 때도 그러하고 그리 해서, 그러니까 이제 이번에는 참 좋은 걸 발견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한 달포 걱정해, 한 달 동안 내치 걱정을 하고 자꾸 이렇게 이리저리 많이 생각하고 이러다가 마지막에 저아레 저녁에 여게 주일하교 총무하고 또 내 밑에 일하는 0○0집사하고 있는데 거기 가서 이래 좀 마지 막으로 이런 걸 저런 걸 좀 물어보고 그래 가지고서 결정을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구역에 반사가 없는 사람은 할 수 없어. 일꾼이 없는 사람.
반사가 없는 사람은 할 수 없으니까 자기가 지금부터라도 자꾸 이거 주일학생을 길러서 보조반사를 만들고, 보조반사 원반사를 만들고 자꾸 이래야 자기 일해 놓은 일이 깨어지지 안하고 자꾸 일해 놓은 일이 옳아서 예수님 앞에 갈 때 그 일 해 놓은 게 다 온전이 돼어지지.
우리가 지금 하는 건 이 세상 걸 보고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 앞에 가서 만날 그것을 보고서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예수님 앞에 갈 때 그것이 바로 된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이번에 여기 어떤 OO○목사님이 요번에 도미 수속을 하다가 목사는 미국을 안 보내 줄라 해. 목사는 미국을 안 보내 줄라 해서 할 수 없어 안 됐어. 그거 인제 생각하기는 연세대학에 다닐 때에 자기를 사랑해 주고 하는 그 교수가 미국 사람인데 그 교수에게 말하면 되지 않겠다? 그 교수가 자기 말은 꼭 들어 줄 터이니까 안심을 하고 그걸 믿었는데 가 말하니까, 아무리 선교사도 하도 그래 쌓았는데 보내 주면 안 오고 보내 주면 안 오고 이러니까 선교사의 신용도 딱 그만 떨어졌다 말이오. 떨어져서, 그래서 암만 말해야 안 듣는다고 함부레 갈라고 생각지 말라 하더라고.
그러면 그 선교사가 누구냐 하면 그 선교사가 우리 나라에 초대 교회에 선교한 아따 그분 이름이 뭐인데 또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잊어 버려. 그 선교사의 손자라. 할아버지가 이 나라에 와 가지고서 인간 구원에 이 야만국에, 그 문화국에서 잘 살 수 있는 데서 이 야만국에 와 가지고서 사람 구원하려고 고생을 얼마나 했습니까? 할아버지가 여기서 늙어서 이 민족 위해서 죽었고 또 자기 아들이 그 계대를 해 가지고서 여기 와서 일하다가 죽었고 자기 손자, 삼대나 여기 왔다 말이오.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보고 일하고 그 나라에 가 가지고 살 그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단결해 가지고 합니다. 우리가, 그말 듣고서 내가 '참 미국 사람들은 복 받을 우리가 모를 속에 알맹이가 있다. 참 이 신앙이 있다.' 이렇게 인간 구원에 대해서 인간 구원이 얼마나 가치 있는 줄 알기 때문에 그분들이 다 최고의 학부를 졸업하고 그러니까 미국 가면 다 대가리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데 그걸 다 버리고 이 한국에 와 가지고서 한국 민족에게, 다르게는 못 하니까 대학에 들어가 가지고 교수로 있으면서 그 진리를, 교수에서 다른 이 과학을 가르치면서 과학 속에 진리를 넣어 줘 가지고 해서 그래 가지고라도 한 사람 두 사람 믿도록 하려고 이래 하는 것이니까 그분들이 얼마나 귀중히 알고 그와 같이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대번에 가 가지고 예수 믿으러 학생들 가자 하면 쭉 따라온다 그말이오.
이것은 뭐 영 아주 그만 공짜배기로 마구 뭐 노다지를 지금 껌고 있는 것입니다.
노다지를 껌으니까 이 등신 사람들이 알지도 못 하고 이 전도해서 사람 구원하는 것이 이 가치가 뭐 있겠나? 이래서 하다가 낙심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말이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생명이 뭣보다 귀하다고요? 뭣보다 귀하다 고요? 천하보다 귀하다. '한 사람의 생명이' 고기덩어리의 생명입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하고 연결한 그 생명입니까? 자, 고기덩어리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생각하는 분 손 들어 봐. 그까짓 것은 가치 없어. 한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 하나님과 연결된 한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다 하는 것으로 그렇게 아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녜,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됐으면 그 사람이 우주와 영계를 다 통치 합니다.
이렇게 귀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우리 전도라 그거요.
그러니까 구역장들은 지금 앞으로 졸업학생들을 지금 빼서 달라 해 가지고 그것을 챙겨서 단단히, 요는 요번에 졸업생들이 중간반에게 예배만 의탁시켰지, 예배만 의탁시켰지 심방 의탁은 하나도 없는 그 구역이 제일 잘하는 구역입니다.
그 구역이 자꾸 부흥돼.
뭘 바라겠습니까? 그래 가지고서 자기 전도한 것이 죽지 안하고 자꾸 살아야 될 것 아니겠소? '내 참 아들 디모데라' '내 참 아들 마가라' 바울은 이렇게 믿음으로 길러 가지고서, 길러놓은 부모도 있고 낳은 부모 낳은 부모는 전도해 가지고 처음에 예수 믿기로 작정시킨 중생시킨 그 사람이 낳은 부모요 그것을 이렇게 길러 놓은 것은 기른 부모라 그말이오. 그러면 기른 부모, 낳은 부모, 가르친 부모, 여러가지 있지 않습니까? 요렇게 똑똑히 가르쳐도 모르는 것은 몰라요. 할 수 없어. 가르치는 대로는 내가 힘대로 가르칩니다. 인간이 가르친다고 되는 건 아니요 내가 이래 가르치는 건 하나님이 이렇게 가르치도록 하니까 안 가르치면 벌받을까 싶어서 또 가르쳐서 알도록 하려는 그 사랑에서 이래 가르치는 것이지 암만 인간이 가르친다고 되는 건 아닙니다. 내가 가르쳐도 안 된다는 걸 내가 알아, 많이 안 것은 어떤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아마 백 배도 더 가르쳤소. 하나도 안 듣소.
그러니까 가르쳐야 되는… (여기까지 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