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실상은 하나

 

1988. 10. 12. 수새벽

 

본문: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여게 찬송하리로다 하는 이 말씀은 찬송하라 찬송해야 된다 하는 그런 권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찬송하게 된다 뭐 찬송하라 해서 찬송하는 것이 아니고 권해 그런 것도 아니고 제가 찬송을 안 할라 해도 안 할 수 없는 필연적 찬송이 나오게 된다 하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찬송해야 된다 찬송하라 그런 말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 구원을 자기가 깨닫게 되면 깨달은 것만치 필연적인 찬송이 나오게 된다 하는 그런 뜻을 여게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떤 구원인데? 그 구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러면 우리 주라고 말하는 것은 내 개인의 주님이 아니고 우리라는 그 복수가 돼 있는데 「우리 주」 그라면 우리 주라 말은 내가 복수가 돼야 주님이 우리 주님이 되지 복수가 안 되면 주님이 안 됩니다.

그러면 복수면 첫째로 무슨 복수인가? 복수는 예수님과 나와의 하나가 되는 때로부터서 비로소 주님은 우리 주님이 되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끊어지면 예수님은 우리 주님이 될 수 없고 주님으로 부를 수 없고 또 하나님 아버지도 그러합니다. 여게 복수로 말한 것은 주님과 나와 둘이 합해져야 비로소 내가 주님으로 부를 수 있고 주님이 우리 주님이 됩니다. 복수 안 되면 우리 주님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나타나신 분이지마는 자존자시요 창조주시요 하나님이신데 이분과 우리와 이와같이 주의 관계를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앞에 닥치면 소멸돼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는데 예수님과 우리와의 하나가 안 되면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라고도 부를 수도 없고 아버지라고 할 수도 없고 주님이라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그리 되면 우리가 주님을 만난다든지 아버지를 만난다든지 성령님을 만난다든지 만나게 되면 즉시 소멸돼 버리고 맙니다. 그만 소멸돼 죽어 버리고 맙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면 우리가 소멸되기 때문에 마치 어두움이 있는데 그 어두움에 빛이 오면 그만 어두움은 그건 녹아져 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말할 수 없는 그 불의가 되어 있고 죄가 돼 있고 삐뚤어진 것이 되어 있는 것도 삐뚤어진 것은 옳은 것이 오면 삐뚤어진 것은 절단나 버립니다.

만일 천 명이 모였는데 구백구십아홉 명이 삐뚤어진 걸 말을 해서 다수로 승리했다 할지라도 옳은 것이 하나 있으면 결국은 옳은 것 앞에구백구십구는 녹아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완전이시요 거룩이시요 참이시요 빛이시요 생명이신데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면은 즉시 녹아져서 소멸돼 버리고 맙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만날라고 이와같이 암만 불러도 만나 주지를 안합니다. 왜 만나 주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도 하나님을 또 만나기를 원해서 뭐 이래 기도하러 산에 가면은 하나님 만날라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주님 만날라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또 그 만날라고 애를 쓰는 것은 성경에 그분 만나면 좋고 그분 만나면 모든 것이 다 깨끗해지고 거룩해지고 완전해진다고 하기 때문에 만나기를 원하고 또 좀 만나본 사람은 뭐 세상에 무엇을 만난 것보다도 주님 만나니까 먼저 자기가 깨끗해지고 모든 것이 온전해지고 또 밝아지고 의로워지고 이라니까 주님 만난 그 맛을 본 사람은 못 견딥니다. 만날라고 자꾸 애를 쓰지요.

어제도 저는 한 십오 년인가 이십 년 만에 금정산에 올라갈 수 있나 없나 해서 한번 가 봤습니다. 갔는데 가니까 거게 성도 네 분이 와 가지고서 우리 가고 난 다음에 와 가지고 찬송하고 예배보고 기도하고 거게서 도시락 먹고 그 산으로 올라가는데 내가 묻기를 ‘자주 옵니까?’ 이라니까 `금년에는 처음입니다' 이래요. 그래 어느 교회냐 하니까 ○○교회 있다고서. “교회 그래 누구입니까?’ 이라니까 내나 ○○○목사님인가 내나 여게 있던 그 목사님이십니다. 그래 아주 교회가 잘되는 모양이오. 한 오백 명 된다 해요, 장년반이.

그런데 그분들도, 그래 모두 보니까 산에 가서 어짜는고 보자 하고 보니까 산에 가 가지고서 애를 쓰는데 그뭐 누가 뭐 주일날이라 올라온 게 아니고 주님 만나러 왔어. 주님 만나 가지고서 거기서 인제, 모든 걸 우리 자신이 병이 들어 가지고 환경이 전체가 병들어 보입니다. 우리 사람의 주관이라 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자기 주관이 기쁘고 평안할 때는 모든 그 환경에 있는 게 기쁘고 평안하고 자기가 전부 비관될 때는 전체가 비관돼지고 자기가 원망스러워지고 낙망되고 할 때에는 전체가 낙망적이고 원망적이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객관은 꼭 같은데, 객관은 나쁘든지 좋든지 꼭 같은데 다만 주관인 내가 이리저리 변동됨에 따라서 자꾸 모든 것이 다 변동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옥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천국 생활할 수 있고 천국 속에서도 지옥 생활할 수 있는 것은 그 자기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주님 만나면 좋기 때문에 다 만날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도 주님을 만날라고 애를 쓰고 주님도 우리를 만날라고 애를 쓰고 이렇게 애쓰니까 둘이 만나고자 하니까 대번 만나질 것 아닙니다. 그거야 쇠하고 지남철 모양으로 들어붙는다 말이오. 쇠도 그놈 지남철에 붙기를 또 원하지 지남철도 쇠를 또 끌어 당기기를 원하지 이러니까 그만 딱 들어붙는 건데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도 원하시지 우리도 원하지 이러니까 원하는 것이 동질이라 그거요.

될 터인데 왜 안 되느냐? 안 되는 이유가 뭐입니까? 우리가 주님 만날라고 가서 금식을 해도 주님을 못 만나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뭐 얼마 동안 참, 주님 만나면 모든 게 다 해결이 되고 기쁨이 되고 평강이 되고 문제가 다 해결되니까 근심 걱정이 다 물러가고 모두가 다 원망 불평하던 것도 전부 다 만족이 돼지고 별별 죄악이 다 없어지니까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말이오. 이런데 주님 말날라 해도 주님 못 만나요.

그래 가지고 어떤 사람은 주님 만날라 하다가 주님 못 만나니까 기도하러 간 사람들이 자기가 기도하러 가기 전에 자기 속에 불만 불평이 있는 그것만 가지고 자꾸 생각합니다. 그것만 자꾸 생각하니까 불만 불평이 이제 땐땐 야물어져 가지고서 아주 흙 같은 그 죄악이 돌덩이같이 야물어진다 그말이오. 그러면 야물어지는 건 뭐이 야물어지는가? 자기 주관으로 야물어져요. 자기 주관으로 자꾸 야물어지기 때문에 그 사람은 기도하러 갔다 오면은 그 악이 더 뭉칩니다. 독이 더 뭉치고, 죄가 더 뭉치고, 시기면 시기가 더 뭉치고, 원망이면 원망이 더 땐땐하게 뭉쳐지고, 불만 불평이면 불만 불평이 더 뭉쳐지고 그 죄악이 더 견고해집니다.

그거는 뭐인가? 주님은 만나 주지 안하고 주님 못 만나니까 자꾸 저만 만났다 말이오. 주님 만나지 못하고 저만 만나니까, 저만 만나니까 제 생각이 또 나오고 제 생각 나오고 생각 나오고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세상에 전부 원망되는 환경뿐이고 자기는 다 너무 다 피해 보고 손해 보고 있는 것뿐이라 놓으니까 그 사람이 자꾸 악인이 되고 만다 그거요.

주님을 만날라 해도 못 만나는 그 이유가 뭣 때문에 못 만나는가? 못 만나는 이유가 뭐입니까? 한번 대답해 봐요. 저 학생. 지금 학교 다녀요? 한번 말해 봐. 또 그 옆에 안경 쓴, 자기. ○○교회서 온 사람. 우리가 안 돼 그래, 우리가 안 돼서. 우리가 안 되면 못 만나요. 우리가 안 되면 못 만납니다. 우리가 안 되면 아무리 만날라 해도 주님 못 만납니다.

이러니까 주님 못 만나면 누구 만나요? 주님 못 만나면 자기 만나지, 뭐. 자기만 자꾸 생각하지. 자기 주관만 나오지. 자기 만나면 자기는 누구하고 합작인가? 주님 없는 자기는 누구하고 합작이요? 주님 없는 자기는 누구하고 합작이지? 주님 없는 자기는 누구하고 합작이야?} 마귀하고 합작이라. 주님 없는 자기는 마귀하고 합작입니다, 주님 없는 자기는.

이러니까, 주님 만나러 산에 올라갔지마는 주님은 못 만나니까 자꾸 자기 생각만 나오니까 자기만 만나지 자기 만나는데 자기는 뭐인가? 주님 없는 자기는 뭐입니까? 주님 없는 자기는 마귀 있는 자기라. 주님 없는 자기는, 주님이 자기 속에 안 계실 때에는 마귀가 자기 속에 지금 주관하고 있는 거라. 성경이 그렇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불신자들은, 불신자들은 뭐 예수 안 믿는 사람들만 불신자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 중생된 목사라도 믿음이 없을 때에는 그거는 다 불신자라, 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께 속하지 안한 사람, 하나님께 지금 순종해서 하나님께 따라가지 않는 사람,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좇아가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게 믿음이요, 하나님만 배워 가는 게 믿음이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게 믿음이요, 하나님과 연결 가진 그게 믿음인데 믿음 없을 때에는 그만 마귀하고 합작이 됩니다.

사람은 독립성 없다는 것, 사람은 처음에 하나님이 지으실 때부터 벌써 혼자는 못 살구로 해 놨어요. 못 살구로 해 놓은 것은 사람은 자존자 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하나돼 가지고 살도록 이렇게 하나님이 만들기를 이래 만들어서 우리를 가리켜 성경에 하나님의 전이라, 성전이라 이랬어. 성전이라 말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 모시고, 마음 가운데 모시고 산다는 것을 가리켜서 성전이라 그렇게 말했고 하나님은 머리고 우리는 또 지체라고 이랬어.

이러니까, 혼자는 못 살구로 했는데 하나님 못 만나면 마귀 만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독립은 못 해요. 우리는 혼자는 못 있습니다. 하나님하고 같이 있든지 마귀하고 같이 있든지 둘 중에 하나지.

마귀하고 같이 있는 데에는 우리가 안 된 사람은 전부 마귀하고 같이 돼요. 우리가 안 되는 사람은 마귀하고 다 같이 돼요. 하나 있어요. 마귀하고 같이 있다니? 우리가 안 된 사람은 마귀하고 같이 있다니? 우리가 안 된다는 것은, 그러면 아버지하고 나하고 둘이도 우리요 또 아내하고 남편하고 둘이도 우리요 우리라 하는 거는 복수만 되면 우리 아닙니까? 복수만 되면 우리 아니요? 이러니까, 이렇게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고 이렇게 대답을 했는데 그 대답이 바른데 그 우리는 나 혼자 있으면 안 되고 복수가 돼야 되는데 복수는 누구하고 합한 복수입니까? 주님하고 나하고 합한 복수가 돼야 돼요.

주님하고 나하고 합한 복수가 되는 거는 뭐라 말인가? 주님의 대속하신 사죄, 칭의, 화친. 주님의 이 세 가지 대속의 공로를 내가 믿음으로 입고 이 대속의 공로 받은 자인 것을 깨닫고 대속의 공로를 입었으니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산 주님의 것이 되었고 그러니까 주님에게만 따라 살 주님의 종이 되었고 또 주님의 성전이 되었고 주님의 지체가 되었고 주님의 몸이 되었고 이렇게 이것을 자기가 믿음으로 깨닫고 그런 자인 것을 알고 주님의 공로를 힘입었을 때에는 그만 주님하고 나하고 둘이 하나가 돼요. 우리가 돼 버려. 그러면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주님은 내 주님이 되시고 거게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우리 단독으로는 못 만나고 주님과 합해야 만난다 하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을 해요. 이거 뭐 쉬운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자꾸 잊어버려. 기도하러 가 가지고 어떤 사람은 ‘하이구, 암만 기도할라 해도 기도가 안 돼서 기도 못 했다, 기도 못 했다.’ 기도 못 한 이유는 왜 기도를 못 합니까? 기도를 못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기도는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인데 기도는 하나님 앞에 이야기하는 것이요, 교제하는 것이오. 자녀가 아버지하고 만나 이야기하기가 얼마나 쉽고 좋겠소? 어머니하고 만나는 것 꼭 한가지인데.

만나면 거게서 첫째는 감사가 나오게 되고 또 그다음에는 이렇츰 감사한데 내가 잘못했으니까 잘못했다는 자복이 나오게 되고, 감사 기도가 나오게 되고 자복 기도가 나오게 되고 그다음에는 자기의 모든 사정을 고백하는 도고하는 ‘이런이런 일이 있습니다’ 서로 의논하는 기도가 나오게 되고 그라면 그다음에는 무슨 기도하게 돼요? 간구의 기도를 하게 돼요. 필연적으로 되는 거라.

이런데 왜 기도가 안 돼? 안 되는 이유는 주님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이라면 내나 하나님이요 아버지도 주님이요 주님도 주님이요 꼭 하나라. 한 분이신 하나님이신데 우리에게 나타나 역사하시기를 셋 격위로 역사했기 때문에 삼위인데 일체인 하나님이라고 이렇게 성경에 기록해 가르쳤습니다. 이랬는데, 우리가 되지를 못해서 만나지 못해요. 우리가 되지 못해 만나지 못하다니? 사죄, 칭의, 화친을 우리가 벗어 버렸기 때문에 만나지 못해. 사죄, 칭의, 화친을 어떻게 입는가?

그러면 사죄, 칭의, 화친을 우리가 입는 것은 요새 세 가지로 말해 줬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어떻게 어떤 그 수고를 하셨는가? 수고 했다 말은 고생받았다 말이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서 어떤 고생을 받았는가? 사랑하심으로 고생받은 것도 우리가 한번 연구해 보고, 사랑함으로 고생받은 것도 연구하고,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서 어떤 고생을 했는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고생하신 그 고생을 연구를 하면은 어떤 고생했다 하는 걸 알게 되고 또 내가 하나님이 어떤 수고를 한 고생이냐? 하나님이 수고, 하나님이 날 위해서 어떤 고생한 사랑이냐 또 그렇게 꺼꾸로 붙여서 또 우리가 생각해 본다 말이오.

그러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고생하신 사랑’ ‘고생하신 사랑' 이 말, ‘나를 위해서 이런이런 수고를 이런이런 고생을 하신 사랑.’ 하는 거와 또 사랑함으로, 나를 어떻게 사랑했느냐? 사랑함으로 나를 이렇게 이렇게 나를 위해서 고생을 하셨다 하는 그것이 다른 것을 여러분들이 거게서 말을 알 거라.

사랑의 고생을 연구하는 것과 고생의 사랑을 연구하는 것, 사랑을 끌고 가 고생의 사랑을 연구하는 것, 자꾸 이리 연구하고 저리 연구하고 자꾸 연구를 해서 봐야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주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사랑하심으로서 어떤 고생을 하셨는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연구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사죄, 칭의, 화친, 이것은 다 예수님이 무엇으로써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죽으심으로 줬습니다.

사죄, 칭의, 화친은 주님이 나에게 사죄, 칭의, 화친을 주시기 위해서 죽으심으로써 사죄, 칭의, 화친을 주셨습니다. 그냥 뭐 금이나 은이나 그런 것 가지고서 이래 만들어 준 게 아니고 돈 주고 사 준 게 아니고 친히 당신이 사죄, 칭의, 화친을 나에게 주시기 위해서 당신이 희생하심으로써 주신 그 사죄, 칭의, 화친이기 때문에 사죄, 칭의, 화친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이 사죄, 칭의, 화친을 주시기 위해서 나에게 아주 죄를 없애는 죄의 형벌을 없애기 위해서 또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케 하기 위해서, 우리가 입으로만 자꾸 이라는데 그걸 실지로 공심판을 통과하기 위해서 어떤 그 고난을 받았는가? 이 세 가지 위해서 고생 받은 것을 자꾸 생각한다 말이오.

또 나에게 칭의를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영원히, 그분이 어떤 분인데 영원히 피조물 사람이 되어서, 사람이 되어 가지고서 영원히 사람을 벗지 안하고 우리 때문에 항상 사람의 그 피조물을 입고 있게 된 그것도 사랑도 이렇게 자꾸 생각한다 말이오.

이래서, 주님의 이 사랑의 고생을 우리가, 내게 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나를 어떤 사랑으로 어떤 고생을 어떤 고난을 받아가면서 나에게 이 구원을 주셨는가 하는 것을 자꾸 자기가 연구한다 말이오. 알아요. 연구해요.

이러니까, 기도하러 가 가지고서 딴걸랑은 자꾸 가서 ‘하, 내가 요번에 아무래도 내가 이 소원을 이뤄야 되겠다, 나는 우리 지금 가정에 이 부채 문제가 있으니까 가 가지고 어짜든지 이 부채 문제를 해결을 지워야 되겠다, 또 이 사업 문제를 해결을 지워야 되겠다, 뭐 가정에 불화가 있으니까 불화 문제를 해결을 지워야 되겠다.’ 그런 것만 제 욕심, 제 욕심만 가지고 자꾸 가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 다 벗겨 주고 싶지마는 벗겨 줄 수가 없어. 없는데, 왜 그러냐 그거는? 우리가 되지 안해서 그래요.

그러니까, 기도하러 가면 들장 딴거 하지 말고 우리부터 돼야 됩니다. 우리부터 돼야 되니까 주님이 나를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죄없는 자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사랑하심으로써 어떤 고생으로 가지고 나를 죄없는 사람으로서 사죄를 주셨는가? 어떤 형벌을 대신 받으셨는가? 이것을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하고 또 내 대신 하나님의 공신판에 통과하는 의를 주시다니, 대신 행하셔서.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해서 주님의 이 구원의 사랑의 이 수고, 구원의 사랑의 수고, 수고라 하면은 뭐 좀 물 한그릇 떠 주고 짐 한번 져다 주고 하는 그런 수고로 그만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그 수고라고 해야 말이 범위가 넓고 하기 때문에 수고라고 말해. 수고라는 것은 받을 수자 고통 고 자, 괴로울 고자. 받은 고통이라, 받은 고생이라 그말입니다, 수고라 말은.

주님이 나에게 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어떤 고생을 당하셨는가? 그 고생이라면은 죽으신 것도 고생이고 부활하신 것도 고생이라. 부활하신 것은 영원한 고생이요 또 죽으신 것은 영원 전부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까지, 영원 전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까지 고생당한 것이 죽으심의 고생이요 또 이제 부활의 고생은 이는 부활하신 그때부터 영원 무궁토록 고생하는 고생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이 고생을 자기가 자꾸 이렇게 알라고 노력해요. 알라고 이렇게 노력해서 자꾸 하나 조금 알아지면은 조금 더 알아지면은 자기에게 그 더러운 죄악이 물러가고 조금 더 알아지면 의가 들어오고 자꾸 이렇게 자기가 변화가 돼진다 말이오. 이러니까 기도하러 가거든 이것부터 그래요. 이래 가 가지고서, 그러니까 이걸 다 근본적으로 이렇게 말을 못 하니까 ‘가 가지고 죄를 회개해라’ 하는 그런 말만 그저 사람들에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 사죄로 인한 그 죄의 문제 또 주님이 나를 대행하셔 가지고 하나님의 공심판에 의인으로 통과케 했으니까 내가 내게 닥친 계명을 지켜서 의를 행하는 의의 문제, 또 하나님을 모시고 화친한, 하나님을 모셔서 불목한 것을 없애기 위해서 주님이 고난당하셨으니까 하나님으로 더불어 내가 끊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끊치지 않는 게 이게 제일 어려워요. 하다보면 하루 종일 주님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 많습니다. 주님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 많아.

잠깐 식사할 때라도 식사 시작할 때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밥 먹으면서 항상 주님이 나를 대속하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밥을 먹고 그러면 밥을 먹어도 주님께서 이 밥 먹은 것이 소화도 잘되고 그렇게 결과가 좋은 결과를 맺게 해 주옵소서 이것을 밥을 먹으면서 할 수 있다 그거요. 밥을 먹으면서 할 수 있고 씹으면서 할 수가 있고 또 물을 마시면서도 할 수 있고, 이래 마시면서 한번 해 봐요. 해 보면 소화가 잘 되는가 안 되는가? 또 이라면은 자기가 무엇이 좀 변화가 되는가 해 봐요.

이렇게 자꾸 자기가 이렇게 주님의 고난을 자꾸 자기가 알라고 노력합니다. 주님의 이 구원에 대해서 주님이 어떤 자본을 들였는가, 이 구원에 대해서 주님이 어떤 자본을 들였는가? 나를 어떻게 사랑했는가? 어떤 고난을 받았는가? 구원 위해서 고난받으신 것을 자꾸 자기가 좀 성경이 가르친 대로 깨달아 봐요. 자꾸 생각해 봐요.

생각해 보고, 둘째로는 이 구원이 얼마나 큰가, 이 구원을 자기가, 둘째는 뭐이지요? 누려봐요. 이 구원을 누려 봐요. 이 구원을 누려본다는 말은, 누려본다는 말은 자기가 이 구원을 받아 가지고 지금 그 혜택을 보는 것이라 말이요, 혜택 보는 것.

하나님이 너는 머리털 하나까지도 세신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지마는 천부께서 허락지 안하면 떨어지지 안하는데 너는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신다. 그러기 때문에 너를 누가 해할까 염려하지 말아라 하는 이 말씀을 하신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인데, 이 구원을 자기가 받았지마는 실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데서든지 생명을 바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을 자기가 누리는 게 뭐입니까? 누리는 게 뭐이요? 보호하고 계심을 자기가 누린다 말이오.

참으로 그 보호하고 계심을 자기가 그 혜택을 효력을 본다 말이오. 누린다 말은 효력을 본다 말 아닙니까? 누린다 말은 효력을 본다 말이오.

다니엘은 그 효력을 언제 봤어요? 효력을 언제 봤어요? 이제 조서를 내리면서 ‘기도하는 자는 다 사자구덩이에 잡아 넣어서 죽인다’ 할 때에 다니엘이 기뻐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은 뭣을 누렸어요? 뭣을 누렸어? 하나님의 보호를 그때부터 자꾸 입을라고 애를 쓰고 누렸다 말이오.

누리니까, 다니엘이 그렇게 감사하고 담대한 것은 뭣 때문에요?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누렸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셔서 찰나도 놓치 안하시고 항상 동행하시는 것을 누렸고, 하나님이 지키시니까 피조물이 아무도 해할 수 없는 이 계약을 믿으므로서 누렸고 자꾸 누리는 그 누리는 거기에서 기쁘고 즐거웠고, 다리오 왕이 하루 종일 그렇게 신강해도 그 왕 앞에 ‘아이고, 내가 그거는 못 합니다. 나는 기도는 내가 끊치지 못합니다. 기도는 계속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조아도 그래 한 것이 그 무슨 효력이요? 무슨 효력입니까? 그거 무슨 효력이지요? 무슨 효력이라? 누리는 효력이라, 누리는 효력. 하나님이 자기에게 계약으로 선포해 놓으신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노력이라 말이오.

자꾸, 나는 하나님이 말씀했으니까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니 당신이 내게 대한 말씀하신 대로 계약하신 대로 해 주시는데 내가 믿지 못하니까 나에게 그 효력이 오지 않는다 그말이요, 믿지 못하니까.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라’ 이랄 때에 주님이 처음에 말할 때에는 ‘주님이 하라 하시면은 그대로는 다 된다’ 이러니까 ‘오라 하십시오’ 할 때는 오라고 하시면 뭐 하나님이 나를 갈 수 있도록 다 하시기 위해 그렇다는 것을 다 믿었기 때문에 오라 이라니까 그만 그 배에서 푹 뛰어내렸다 말이오. 그때는 믿었어.

하나님의 계약을 믿으니까 그 효력이 어찌 됐어요? 효력이 물 위에 징검징검 걸어갔어요. 걸어갔는데 나중에 의심할 때는 효력을 입고 있습니까 효력을 뺏겼습니까? 효력을 뺏겼어. 효력을 왜 뺏겼어? 안 믿기 때문에 뺏겼지.

이러니까, 이제 다니엘도 그런 모든 유유한 생활이 하나님의 이 보호의 은택을 누리기 때문에 그렇소, 누린 것. 또 누렸는데 만일 다니엘이 사자구덩이에 들어가 가지고서 거게서 사자들이 우 몽쳐서 이렇게 오니까 이렇게 몽쳐서 이래 오면 그때에 어찌 돼요? 사자가 오면 그만 뭐, 어제 내가 동물원도 이제 구경 못 한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 집에 일하는 사람들 동물원을 구경 못 했다 해요. 그래서 인제 저 산에 갔다 오다가 잠깐 들렸는데 그놈이 내가 보니까 하품하면서 입을 벌리는 거 보니 입이 이만해요. 이만한데 그런 놈들이 이래 자꾸 옆에 여러 마리가 들이 오면은 어찌 되겠소? 오면은 그래 쫄리고 나중에 겁이 나지 않겠어? 그게 뭐이냐 하면은 자, 이거 하나님의 보호를 믿을라 하니까 자꾸 의심하게 되고 의심 안 하고 믿을란다 의심 할란다 이러니까 믿음에, 믿어서 어데까지 믿느냐? 믿어서 사자가 와도 하나님이 허락지 안하면 네가 내게 대해서 털끝 하나도 상하지 못한다는 그 믿음으로 효력을 입어야 될 터인데 이 효력을 못 입으면 탈이라 그말이오. 효력을 입으니까 다니엘은 걱정이 없었어.

좋았는데 그때 만일 그만 의심을 다 해 버리고 효력을, 의심하는 증거는 뭐이요? 저 양성원 학생,여기 이 학생. 한번 대답해 봐. 자기. 한번 대답해 봐, 여게. 이름이 내가 뭐인지 몰라. 의심한 증거는 뭐이야? 자기, 손 들어 봐. 그래. 의심한 증거는 뭐이라? 의심한 증거는 뭐이야?} 그래, 의심한 증거는 효력이 자기에게 없어. 효력을 누리지 못해요. 효력을 누리지 못하는데 효력을 누리지 못한 증거는 뭐이겠습니까? 사자한테 꽉 잡아먹혀 버려.

믿는 그 효력을 누리는 거는 뭐인가? 평안하고 즐거워하고 담대해. 그러면 평안하고 즐거워하고 담대한데 평안하고 즐겁고 담대하다 할지라도 버썩 깨물었으면 그만인데 또 효력은 뭐이냐 하면은 사자가 먹지 안하고 조금도 상하지 안하고 그만 그 털 속에서 아주 밤에 잘 잤다 그거요. 그게 뭐이냐? 우리에게 하나 계시로 보여 주시는 것인데 모든 것이 그런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첫째는 주님의 이 구원에 대한, 구원에 대해서 주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어떤 고생을 해 가지고서 나에게 이 구원을 주셨는가? 이 세 가지 구원에 대해서 주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은 주님이 말로만 사랑한다 하면 그렇지마는 그런 고생을 하기까지 했으니까 그 사랑을 믿을 수 있다 말이오. 주님의 사랑의 고생을 내가 연구하는 그 일을 해야 돼요. 그 일을 자꾸 연구하고, 또 이제 둘째로는 이렇게 큰 힘 들여서 나에게 주신 이 구원을 내가 둘째로는 무슨 연습을 해 봐요? 누리는 연습을 해 봐요, 누리는 연습. 누리는 연습. 누리는 연습을 자꾸 해 봐요.

또 셋째로는 뭘 해 봐요? 셋째로는 기념하는 연습을 해 봐요. 기념하는 연습이.

기념이라 하는 건 여러분들 뭐 기념비 세운다고 하지 안해요? 기념이라 하는 것은 그때에 과거 어떤 한 때에 되어진 그런 것을 그 후 세대에 그때 된 그거와 같은 것을 그 후 세대에 다시 되풀이 해 가지고 꼭 그때와 같이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기념이라 그렇게 말해. 그러면 기념이라 말은 해석이 맞아요? 기념이라는 건 그런 것이라.

주기철 목사님의 기념관 하는 그것은, 기념관이 있다 말은 주기철 목사님이 왜정말년에 주님의 명령을 위해서 고생받은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그 후대에도 그것을 생각하면서 그때 주기철 목사님이 신앙 지키느라고 신사참배 때에 고생한 그 고생과 같은 고생을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고 그와같이 지금 그런 고생을 자기가 받아 가지도록 하는 그것이 기념하는 거라, 기념하는 것.

그래 인제 기념하는 걸 해 봐요. 주님의 구원에 대한 고생을 기념하고 또 그 효력을 자기가 기념해서 자기도 현재에 ‘주님이 내게 사죄 주신 것을’ 사죄 주신 것을 기념하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사죄 주신 그 일을 나도 한번 해 본다 그말이오.

주님이 사죄 주신, 사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이 죽기까지 하셨어.

그러면 내가, 죄가 와서 죄를 범하라고 할 때에 죄를 범하지 안할라고 함으로써 고생당하는 그 고생은 조그만한 고생이면 그것은 예수님의 사죄에 대해서 기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자기가 ‘주님이 나에게 죄를 없애기 위해서 이렇게 큰 고생까지 하셔 가지고서 죄를 없애 주셨으니까’ 하고서 ‘내가 다시 어찌 내가 이렇게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나에게 사죄 주신 것을 내가 다시 더럽혀서 죄를 지을 수가 있느냐?’ 죄를 안 지을라고 하기 위해서 고생당하면 고생당하는 것 그것이 주님이 사죄 주시기 위해서 고난받으신 그 고난에 대해서, 사죄에 대해서 기념을 하는 겁니까 안 하는 겁니까? 그게 기념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그게 기념하는 거라.

기념하는데 그 기념은 꼭 같습니까 기념이 새끼 기념이 있고 큰 기념이 있고 뭐 크고 큰 기념이 있고 그 기념도 큰 것 작은 것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기념이 큰 것 작은 것 있소 꼭 같소? 기념이 크고 작은 게 있는가 꼭 같은가? 꼭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죄 안 지을라 하다가 죽는 그 기념이나 그 죄 안 지을라고 거짓말 한 마디 안 하는 고난이나 죄 안 짓기 위해서 주일날 장사 안 하고서 점방 문 닫는 그 고난이나 그 고난 기념이 꼭 같아요 달라요? 층어리가 있어요 같아요?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 손 한번 들어 봐요. 이 잘 몰라 이거 무슨 말인지. 내가 하는 말이 이거 여러분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는 것 같아. 내가 너무 빨리 합니까? 그래, 이 구원을 기념해 보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이 구원은 주님이 나에게 어떤 고난을 받으셔 가지고서 이 구원을 주셨기 때문에 이 구원을 건설하는, 이 구원을 건설하기 위하신 주님의 그 노력을 나도 몸소 지금 체험해 보는 것이 그것이 기념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래서, 유월절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이 떡을 먹을 때마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말은 우리가 주님이 지금 사죄, 칭의, 화친을 주시기 위해서 피와 살을 찢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가 고생을 기념하는 것이라. 주님이 나에게 이 구원 주시기 위해서 고생당한 그것을 나도 이 구원을 인해서 고생을 내가 한번 겪어 보는 그것이 기념이라.

그러면 죽기까지 하셨으니까 내가 기념을 완전한 기념을 할라면은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그래 했기 때문에 나도 죽어도 죽었으면 죽었지 죄짓지 안하는 그것이 주님의 사죄를 기념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기념하는 것.

그 말 알겠어요? 이거 말을 모르면 일이 안 돼. 말로 알고 힘을 쓸라 해도 안 되는데 모르는 거 어째 힘을 쓰겠어? 어제 어떤 사람 그 사람들 보니까 이래 하기는 하는데 이게 뭐 방언파라, 보니까. 자꾸 이래 말하고 이래 해도 예수 믿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 막 힘만 쓰지. 자, 믿사옵나이다 하는 믿사옵나이다는 믿는다는 그 이치를 도리를 모르니까 ‘믿사옵니다.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음. 믿습니다.

음. 믿었습니다. 믿어 뒀습니다. 음. 믿습니다.’ 암만 해 봐야 소용 없다 그거요.

믿는다는 건 뭐이냐면 자기 현실에서 주님의 그 뜻을 자기가 발견해 가지고 그 뜻대로 실행하는 힘쓰는 그것이 믿음을 힘쓰는 것인데 이거 자꾸 이거 믿음이 없어 그렇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 하니까 이 믿음의 정의를 모르니까 ‘믿습니다, 내가 꼭 의심없이 믿습니다, 믿었습니다, 믿어 뒀습니다.’ 자꾸 암만 해도 안 된다 그말이오.

그래도 안 돼.

믿는 것은 그 현실에서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서 그 뜻대로 순종하는 그것이 믿는 것이라는 요 도리를 깨달은 사람은 주님이 나를 사죄, 칭의, 화친을 주신 것을 믿고 이제는 내가 현실에서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그게 믿는 거라.

그러니까 힘을 쓰면 어떻게 힘을 써? 믿사옵나이다 그래 힘을 써요 그 뜻을 찾을라고 힘을 쓰고 그 뜻대로 행할라고 힘을 쓰고 그래 힘을 써요 믿습니다 하는 자꾸 그걸 힘을 써요? 믿습니다 그 힘을 써 가지고 두 주먹을 거머쥐고 골병이 들어도 안 돼. 아무 소용없어. 이제 뜻을 깨달을라고 힘을 쓰고 실행할라고 힘을 쓰면 거게서 일이 된다 그거야.

그래,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기념하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어떤 그 사랑으로, 어떤 사랑으로 어떤 고난으로 나를 구원하신 것을 나도 이 죄에 대해서 한번 죄를 없애는, 죄를 짓지 않는, 죄 없애기 위해서 이런 경험을 내가 고난을 한번 당하고, 또 의롭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 배반치 안하고 살기 위해서 이렇게 어려움을 실지로 자기가 겪어 보고 느껴 보는 것이 그것이 기념하는 것이라.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이라. 그 말 알겠어요? 이 말을 알아야 이제 돼지고 이 말을 알고는 자꾸 알고는 그대로 힘을 써야 돼.

그러면 오늘 아침에 자, 주님이 주신 구원에 대해서 첫째 우리가 노력할 게 뭐이야? 노력할 게 첫째 노력할 게 뭐입니까? 사랑의 수고, 사랑의 고난이라 말이오. 사랑의 고난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또 둘째로는? 이 고난을 누리기 위해서? 구원을 누리기 위해서? 뭐 고난을 누려요 구원을 누려요? 구원을 누리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 주신 그 구원을 실지로 내가 그 구원을 받아 가지고 누려야 되는데 이걸 자꾸 연습해야 돼. 누리기 위해. 누리는 노력을 해야 되고. 또 세째로는 뭐이요? 내가 실지로 이제 기념하는 노력을 하고. 그러면 몇 가지요? 여게서 생명이 나오고 여게서 능력이 나오고 여게서 하나님과 접선이 되어지고 심령도 밝아지는데 이거 없이 자꾸 말로만 중얼중얼해 가지고 생전 신앙에 한번도 실지로 살아보지 안했기 때문에 실험과 경험과 체험이 없는, 그거는 실행하지 안하는 사람은 실행하지 않는 사람의 설교를 듣기 좋아하고 실행한 사람은 실행한 사람의 설교를 듣기 좋아한다 말이오. 실행하는 사람은 실행하지 않는 사람의 설교를 들어 가지고는 ‘암만 해 봐야 그거는 허무한 소리다. 암만 그래 봐야 일이 되지 안하는데.’ 그러기 때문에 실지로 살라 하는 사람과 자기가 말로만 가지고 마는 사람이 다르다 그말이오.

오늘 아침은 그러면 뭣을 몇 가지 노력을 해, 손가락으로? 세 가지, 세가지 노력. 이 세 가지를 노력을 하는데 하나는 그 사랑의 수고를 알라고 노력하고, 또 둘째로는? 뭘 누려요? 구원을 누려요.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실지로 자기가 받아, 누린다 말은, 누린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그 말이 참, 누린다는 말은 효력을 본다 그말입니다. 누린다는 말은 효력을 본다 말이야.

누린다는 말은 효력을 봐. 하나님의 보호의 효력을 보는데 그 효력을 보는 데에는 어떻게 하면 봅니까? 내가 믿으면 봐. 믿으면 효력이 내게 와. 효력이 오니까 죽은 자도 살고 사자도 불도 해하지 못했어. 오늘도 그래요.

그거 우리에게 뭘 보이느냐 하면은 불과 같은 혹독한 환경, 또 사자와 같은 아주 맹수 같은 환경, 아무리 그래도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있을 때는 그들이 해하지를 못해. 이러니까 이 자꾸 실지로 자꾸 한번 실지로 한번 누려본다 말이오.

누려보고 난 다음에는 내가 또 그다음에 셋째는 뭐해야 돼요? 기념해 봐야 돼요, 기념을. 예수님이 나에게 이 구원 주시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가 하는 것을 기념해.

주님이 나에게 죄를 없애기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가 하는 것을 내가 죄없이 살기 위하는 것으로써 기념을 해 봐. 죄없이 사는 요 생활로써 내가 주님이 ‘그때에 나에게 죄를 없애기 위해서 이런 고난을 받았는데 내가 죄를 없애 주신 이 없애 주신 것을 나는 가지고 죄를 다시 짓지만 안할라 해도 어렵구나’ 할 때 그걸 알 수가 있다 말이오. 그래서 주님의 이 세 가지 그 구원에 대해서 내가 기념해 보고 누려보고 또 연구해 보고 이제 이것이 신앙 생활이라.

뭐 여기 지금 그래서 내가 요새 양성원 학생들이 이거 공부한다 하는 게 이거 다 모두 껍데기 공부를 해요. 이래서 내가 언제요, 다음 주간이요? 다음 주간 내가 경건회 시간에 가면 내가 좀 그런 말을 할라고 하는데, 그래 그 다른 것은 자꾸 이거 좀 공부를 해야 돼요. 공부 안 하면 안 돼.

공부하고, 이 공부하는 건 무슨 공부하느냐? 이 지금 둥구나무가 말이요, 둥구나무가 아름드리 둥구나무가 있는데 이 둥구나무는 사과 둥구나무입니다. 사과나무가 이래 아름되는 사과나무가 있는데 이게 그만 고목이 돼서, 고목이 돼 가지고 둥치가 아름드리 되지마는 이거는 뭐 잎도 안 피고 꽃도 안 피고 열매 안 맺어. 둥치는 살아 있는데. 이러면 이거 둥치 살아 있는 이 둥치 살아 있는 데는 문제가 뭐이 문제냐 하면은 움이 터서 새로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그게 중대한 문제라.

이제 여러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모든 교리 신조, 이런 것은 그 잘못된 거는 아니지만 옳은 교리 신조는 그것이 둥치야, 둥치. 둥치인데 둥치는 암만 있어 봤자 그거는 열매를 안 맺으니까 소용이 없어. 없는 것 한가지라. 걸거치기만 하지. 그거 둥치에 새 움이 나야 된다 그말이오. 둥치에 새 움이 나야 돼. 둥치만 있는 데는 소용없어. 둥치 공부는, 둥치는 다 벌써 오랫 동안 해 가지고 사람들이 문서화시켜 가지고 문서로 만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꾸 읽으면 돼. 자꾸 읽으면 그거 알 수 있어. 읽지마는 거게서 이 세대에 거게 새 움 같은 깨달음을 가지지 안하면 안 돼.

그거는 둥치는 자꾸 책을 읽으면 되는 거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새 움 이것은 참 자기가 연구해서 알든지 경험 체험해서 알든지 배워 알든지 알아 가지고서 요 세대에 어떻게 된다는 거 새 움만 알면 새 움 요것만 기르면 다 돼요. 그러면 새 움 기르면 이 새 움은 어데서 진액을 빼요? 둥치에서 진액을 빼요.

그러니까, 지금 오늘 고정돼 있는 교리 신조는 이것은 하나의 둥치입니다. 그러면 둥치, 사과 둥치에 새 움이 나면은 사과 열고 또 바위 덩어리 둥치에서는 새 움이 나요 안 나요? 새 움이 안 나요. 또 가시나무 둥치에서는 새 움 나 봤자 가시나 열지 딴거는 안 열어.

이러니까, 옳은 교리와 신조의 둥치적인 이 교리 신조가 중요하고 둥치적인 교리 신조 위에 새 움 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옳은 둥치가 중요하고 새 움이 중요해. 이러니까 양성원 학생들이 이렇게 배우면서 여게서는 뭐 둥치도 가르치고 새 움도 가르치기 때문에 이 둥치는 우리가 배운 둥치와 같나 안 같나 이렇게 봐서 둥치가 같으면 그거는 둥치고, 같은 둥치에서 새 움이 나야 돼, 새 움.

자, 또 그러면 앞으로 계속할 터이니까, 자꾸 이래 가지고서 오늘 아침에 세 가지 배웠습니다. 요걸 기도하러 가거든 요걸 가지고서 이 세 가지만 가지고도 ‘오늘밤에는 내가 여기’ 엊저녁에 뭐 저 묘지, 공동묘지 가 가지고 기도하러 갔다 하는데 거기 가 가지고서 기도할라고 주여 주여 암만 해 봐야 소용없어.

기도하는데 제일 처음에 누구 만나야 돼요? 기도할라면 누구를 만나야 돼요? 주님 만나야 돼. 주님 만날라 하면은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 돼야 돼요, 우리 돼야 돼.

우리되다니? 우리가 주님하고 나하고 하나된다는 말은 사죄, 칭의, 화친, 부활 이 네 가지 대속으로 나와 하나가 돼야 돼. 하나가 되면은, 하나가 돼 자꾸 그거 연구하다 보면은 주님과 가까와지고 그거 자꾸 연구하다 보면 눈물 나오고 눈물 나오면 주님 만나고 또 만나니까 평안하고 즐거워하고 하고 이래 순서의 길을 알아야 되지 길을 모르고 자꾸 날뛰면 안 돼요.

거기 가서 하면은 집에 있을 때는 생각이 안 나다가 가 있으니까 곰곰히 생각해서 아, 뭐 욕심나는 건 더 강하게 욕심이 납니다. 또 원망스러운 거는 강하게 원망이 나옵니다. 또 시기 나오는 것도 강하게 시기가 나옵니다. 분한 것도 강하게 분함이 납니다. 자꾸 이라니까 이제 마귀로만 땐땐 굳어지고 자기 옛사람 자기로만 굳어져 버리고 마는 거라.

그러니까, 우리가 꼭 돼야 됩니다. 그러니까 때문에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또 우리 죄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전부 우리라. 우리가 안 되면 아무것도 안 돼요.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나만 더 물어 보고, 이 모든 성경 말씀과 뭣이 하나라고요? 성경 말씀과 뭐이 하나라고요? 저 뒤에 한번 대답해 봐요. 내가 이름을 부를까? 이 성경에 기록한, 성경 말씀과 뭣이 하나라고요? 저 뒤에 큰 소리로 해 봐. 그거 큰 소리로 해도 부끄럽지 안한 소리야, 그거는. 자, 이 성경 말씀과 뭣이 하나라고요? 실상, 실상이라. 실상하고 하나라. 둘이 아니라.

이런데 우리는 어떻게 돼 가지고 있어요? 성경 말씀하고 실상하고 갈라져 있어요.

성경 말씀은 성경 말씀대로 실상은 실상대로 이러기 때문에 이 사고가 됐어, 사고가 났어. 이 둘이 하나인데 그 사이가 갈라져 가지고 있어요. 갈라져 가지고 있는 그 사이에 쐐기가 뭐이 들어 가지고 있어요? 무슨 쐐기가 들어 가지고 있어요? 그 속에 무슨 쐐기가 들어서 이 둘이 갈라져 가지고 있어? 뭐? 무슨 쐐기가 들어 가지고 그만, 이 말씀과 실상은 하나인데 이 사이가 떡 벌어져 가지고 있어. 서부교인들은 말씀은 다 알아요. 알기 때문에 여기 서부교회 다니는 이 진영에 다니는 교역자들은 이거는 뭐뭐 아주 속성이 가속도입니다. 지금 이거 뭐 목회는 게을해 하지 못해. 그거 어데 강단에 세워 놨으면 일주일 동안 뭐뭐 대부흥사를 할 것입니다. 부흥사는 잘할 거라. 그거 누가 시켜 줘야지, 인제. 안 시켜 줘 그렇지.

이 말씀과 실상은 하나인데 그 사이에 뭣이 쐐기를 쳐서, 쐐기 또 말도 알아요? 뭘 모르면 안 되는데 쐐기라는 말 이거 나는 사투리 말이 아주 재미가 있어요. 쐐기 뭐인지 알아요? 쐐기 아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쐐기 아는 사람? 쐐기 몰라? 나무나 쇠를 이래 만들어 가지고 조그매 틈만 있는데서 막 위에 뚜드려 대면 쑥 들어가서 자꾸 갈라져 나간다 말이오. 그게 쐐기라.

쐐기가 뭐이 쐐기인데? 뭐이 들어서 갈라뜨려 가지고 있어? 어누리? 의심, 불행이라.

순종 안 하고 의심하고 순종 안 하니까 떡 벌어져 가지고 있어. 그놈만 쑥 잡아 빼면 돼요. 의심하고 순종 안 하는 그것만 잡아 빼, 쐐기 빼버리면 딱 들어 붙어요.

알겠어요? 장작 패다가 이래 겨우 이래 쐐기를 이랬는데 이래 가지고 때리다가 이 쐐기가 쑥 빠지면 딱 들어 붙어버려. 이래 이제 그 속에 있는 의심 그놈 쏙 잡아 빼버리고 또 행하지 안하고 요 게을부려 ‘행함 강조하면 율법주의 된다’ 대마귀 소리야. 어데 이런 소리를 하고 있어, 있기를? 이래도 떡 듣고 거게서 그 배우고 이게 그래 가지고 옳다고 생각하는 그자는 게을한 자는 다 그거 배워요. 게을한 자는 다 그 소리 들어요. 게을한 자는 그 소리 들으면은 ‘좋다. 참 됐다. 그렇지. 너무 그렇게 자꾸 할 게 뭐 있는가?’ 신앙 생활 바로 하는 자는 ‘죽자껏 힘을 써도 잘 안 되는데 게을부려 가지고 되나? 행함을 죽자껏 해도 안 되는데.’ 그거 틀린 걸 알게 돼.

쐐기만 빼면 그만 돼요. 의심하고 행치 않는 것만 잡아 빼버리면 그만 믿고 행하면 그만 말씀이 실상이요 실상이 말씀이고 그만 한가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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