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9 22:23
마음이 정결한 자
1984. 2. 10. 금새
본문: 마태복음 5장 8절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아래서, 우리는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보수해야 되고 또 파수해야 되는데 보수하고 파수하는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을 보수하고 파수해야 된다.
보호하고 지킨다 말입니다. 보수라 말은 지킨다 말이요 또 파수해야 된다 말도 내나 지킨다 말입니다. 마음을 지켜야 된다. 왜? 마음을 잊어버리면, 모든 것을 가졌으나 결국은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마음을 자기가 찾아서 자기 마음을 자기가 가졌으면 장차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과 육 이 두 가지로 되어 있는 사람인데 성경에 영과 육이라, 영육으로 된 사람이라 이랬는데, 일반 교회들이 영육이라 이래 가지고, 사람은 둘로 나눌 수 있다 이래 가지고서 그것을 이분설이라, 둘로 나눌 수 있는 그런 설명이라 이분설. 또 사람을 셋으로 나눌 수 있다 그거는 삼분설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분설은 영과 육이 둘로 나누어서 이분으로 할 수 있다 해서 이분설, 또 삼분설은 영과 혼과 이 몸, 혼은 마음을 가리키는데 영과 마음과 몸 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어 삼분설이라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좀 열심 있고 또 믿는 데에 주력을 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깨닫고 주장하는 것이 그만 이분설이 됐습니다. 이래서, 영육의 이분설이라 하는 것이 세계의 정통이라 이렇게 돼서 사람들은 그만 이분설이라 이래서 이분설을 많이 주장하고 또 고러면 삼분설은 틀렸느냐? 삼분설도 틀리지는 안했다 이래 가지고, 현재의 세력은 이분설이 세력이 많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분설도 정통이요 틀리지는 안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분설과 삼분설의 장단점이, 다 각각 좋은 전도 있고 나쁜 점도 있습니다. 이분설은 나쁜 점은 어떤 것이 나쁜 점인가? 이분설의 좀 안됐는 단점은 영육이라 이라시까, 사람을 둘로 나누니 서이인데 둘로 나누니까 그만 둘로만 보고서 그 속에 무엇이 빠졌는가 하니까 영이 빠져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은 보니까 마음과 몸 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고, 영은 영이라 하지마는서도 영은 보이지 안하니까, 참 영은 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말이오. 사람은 제일 귀한 것이 생명이지마는 생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 제일 가에 울타리를 하고 또 울타리 안에 방이 있고 또 방 안에 자기가 들어앉아서 자기를 이렇게 보호하는 것처럼 뭣이든지 좀 천한 것은 밖에 있고 귀한 것은 또 천한 것이 둘러싸고 있고 그래 차차 차차 귀한 것일수록 이 속에 들어 있고 또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 볼 라 해도 그 집에 울타리 보기가 쉬운지 그 집에 있는 그 내실의 방을 보기가 쉬운지 주인 보기가 쉬운지, 제일 쉬운 것은 겉에 울타리 보기가 쉽고, 그 다음에는 그 사람들 집 보기가 그 다음으로 쉽고 주인 보기가, 만내기가 제일 어려울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몸보다는 마음이 귀하곤 마음보다는 영이 귀합니다.
이러니까, 영은 잘 안 보인다 그거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영육이라고 이렇게 이분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영은 잘 보이지 안하고 분명히 마음과 몸 두 가지는 뚜렷이 따로 있고. 마음이 몸이요 몸이 마음이요 그럴 수는 없고, 둘은 따로 있고 영은 보이지 않고 이라니까 그만 이분설은 말하는 사람들은 영을 모릅니다.
모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마음, 둘인데, 영 육 해서 둘이라고 이렇게 할라고 하고 보니까 셋은 아니고 둘이니 뭣 뭣 둘이겠느냐? 마음과 몸이 아니겠느냐 이래서, 그러면 영은 뭐이냐? 영은 마음을 영이라 하는 것이다 이래서 마음을 영이라 영이 마음이라 이렇게 마음하고 몸하고 이것이 사람이다, 그러면 영은 뭐이냐? 내나 마음을 영이라 한다 이래 가직고 이분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영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별로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한국에는 이분설을 주장하는데도 웨스트 민스트 신학교라 하는 그 신학교에서 졸업한 사람들이 우리 한국에 많이 나왔기 때문에, 거기에 서는 이분설을 주장을 사실 합니다. 거기에 서는 또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에 대해서는 아주 희미합니다.
그러기에 영이 살아났으면 그 중생된 영은 영생으로 살아났는고로 다시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 것은 범죄치 안해야 죽지 않는다 이라니까 이 사람들이 '그 이상하다 영이 마음인데 마음은 아무리 중생된 훌륭한 위대한 목사라도 그 마음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 마음이 죄 짓는 것이 없다고 하지마는 죄 짓는 것이, 마음이 죄 짓는 것은 보이지 안하니까 그 마음이 다 자기 마음을 살펴보면 그저 한 시간에도 잘못하면 마음이 안 생각할 것 생각하고 또 마음이 요동되고, 요동되는 것도 죄요 안 생각할 것 생각하는 것도 다 죄인데 마음이 어떻게 죄를 안 지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중생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 말은 틀렸다' 이래 가지고 그만 간단하게 해서 틀렸다고 해 붙여 버렸습니다. 이래 가지고 '이단이라.' 모두 다 그 교훈을 받은 사람들이 이단이라 했는데, 자꾸 이렇게 나가 보니까 '아무래도 사람 속에 중생된 그것이, 영이 죄를 안 짓는다고 하면은 아무래도 현실과 틀리다' 이래 가지고 그 사람들이 이제 자꾸 연구하다가 '중생된 영은 죄를 짓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 그것을 틀렸다고 해 놨으니까, 맞기는 맞은 건데 틀렸다고 해 놨으니까 이것을 고쳐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서 그 사람들은 표시하기를 뭐라고 표시 하느냐 하면은 '속사람은 죄 짓지 않는다.' 지금 요새는 인제 ○○ 교파에서는 속사람은 죄 짓지 앉는다 그거는 판정이 났답니다. 속사람 말이요. '속사람은 죄 짓지 않는다.' 속사람은 그것이 중생된 사람이기 때문에 속 사람은 죄 짓지 않는다 그래 그렇게 말하고, 또 그 신학교에서 졸업하고 나온 우리 한국의 제일 위대한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속에 그게 살아나기를 시작한, 살아나기를 시작한 그 씨가 있다 살아나기를 시작한 씨가 있으니까, 예를 들어서 마음이 이 책상 만하면 요 책상 귓대기에 요 손수건 만한 요 귓대기 요거는 살아났는데 요거는 죽지 않는다 또 그렇게 그 사람들이 주장을 했습니다. 그거는 ○○○ 목사님이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자꾸만 마음을 그것을 영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그 진리가 납득이 안 돼고 이래 가지고 하다가 지금은 인제 말하기를 '속사람은 절대 범죄하지 않는다' 하는 것이 ○○교파에서, ○○측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절대 범죄하지 않는다.' 그 속사람은 범죄하지 않는다 하는 그 말도 모순입니다. 모순인 것이, 왜 그러냐? 사람이라는 것은 영과 육이 아울라져야, 둘이 합해야 사람이지, 영은 영이요 육은 육인데, 사람이라면 영육이라야 되는데 속사람이라면 그것은, 자기네들은 영이라고 말하지 안할라고 이제 다른 사람이 영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영이라고 말하지 안하고 아무래도 속에 죽지 안하고 범죄하지 안하는 것이 속에 있기는 있는데 그것을 이제 같은 말로 표현하면 따라 가는 것이 되니까 이거 새 말로 표현해야 되겠다 해서 속사람이라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것이 무슨 시험에 들어서 그러냐 하면은 하나님 중심이 되어서, 나도 너도 하나님을 중심해서 하나님이 가르친 것이라면 갑이 말했든지 을이 말했든지 하나님에게 배워서 말하는 것이면 그거는 바르다 이래 돼서 자기도 의례히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되고 또 다른 사람도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하여 가르친, 이 사람에게 가르쳐서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도 있고 저 사람에게 가르쳐서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도 있으니, 누구를 통해서 전파하든지 하나님께서 나온 것이면 지체하지 안하고 속히 속히 받아야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거기에 서 무슨 시험이 드느냐 하면은 자기를 통해서 가르친 것이면 그것은 인정을 하지마는서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 가르친 것이면 인정치 안할라 하니까 그것을 잘 분석을 해서 자꾸, 분석을 해 가지고 나누고 나누고 갈라 보면 그 속에 자기라는 원죄 그것이 중심이 돼 가지고, 원죄가 그 속에 주인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분설은 둘로만 나눌라 하는데 사람은 실상 서이다 보니까 그 속에 하나를 뽑아 버리는 이런 위험성이 있어서 그것이 단점입니다. 또, 삼분설은 어떻게 해서 삼분설에 단점이 있느냐? 삼분설은 서이라고 말을 하니까, 서이라고 말을 하니 사람이 행동할 때에 영, 마음, 몸 이런데 마음과 몸을 이것을 둘로 나누어 놓으니까, 나누어 놓으니까 행동은 마음하고 몸하고 둘이 합해서 한 행동을 하는 것인데, 마음과 몸이 합해 가지고서 한 행동을 하는 것인데 마음의 행동 따로 몸의 행동 따로 이렇게 그 행동을 둘로 나눠 놓으니까 이것이 합해지들 안해서 그것이 이제 단점입니다. 그러나 실은 영 있고 마음 있고 몸 있고 세 가지로 되어 있는 그것이 확실한데 삼분설에는 마음과 몸이 행동할 때에 하나가 되어서 일치 행동한다는 그것을 그만 잊어버리고 둘이 각각 행동하고 일치되지 않는다 하는 그렇게 행동에 나눠 놓는 요것이 단점이고 이분설은 하나를 뽑아 버리는 것이 이것이 단점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요, 또 구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요 구원을 받을 사람들인데, 구원을 이미 받아 놓은 것은 무슨 구원을 받아 놨는가? 우리 영이 중생된 구원은 받아 놨습니다. 또 무슨 구원을 받았는고 하니, 우리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공 지성의 그 법에서 구원이 되어야 되지 아무리 그것이 잘 됐다 할지라도 법에 위반되면, 법으로 심판하니까 법에 해결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기에, 법에 해결되는, 이 지성 지공법인데 이 법은 하나님의 공심판입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의 해결을 받아서 공심판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공심판 구원을 받아야 되고, 또 사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심판인데 사심판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공심판 구원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도 그 공심판 통과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공심판은 어떻게 엄중하고 엄격하고 세밀하고 철두 철미한지 인간이 암만 해봤자 공심판 통과할 만한 그만한 깨끗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공심판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공심판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공심판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사죄를 받았고 칭의를 받았고,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이 화친된 이 화친을 받아 가지고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심판 구원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받은 사람들이 이제는, 그러기에, 정죄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죄 아래에 있지 안하고 사죄 아래에 있고, 칭의 아래에 있고, 하나님과 화친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래 됐기 때문에, 공심판에서 예수님이 대신. 전부 우리 대신 행하셔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를 공심판에서, 대신 행했기 때문에 공심판에서는 예수님이 대신 행한 사람들은 다 내 줘 버렸습니다. 공심판에서는 내놨소. 공심판에서 붙들고 있을 수가 없어.
공심판에 심판 통과자로 그렇게 인정 돼서 내놔서 그 사람들을 주 모아 가지고 있는 것이 뭐이냐 하면은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여기에 서 지금, 우리가 공심판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면했고 이 그리스도의 심판은 우리의 자신의 행동으로 면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의 행동으로 이 사심판, 이걸 사심판이라고도 하고 그리스도의 심판이라고도 하는데 공심판은 전체를 모든 사람을 다 심판하는 것이 공심판이요 사심판은 어떤 것이 사심판인고 하니 공심판에서 면제된, 공심판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만 따로 갈라 가지고서 심판하는 것이 이것이 사심판이요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심판은 어떻게 면하는고 하니 공심판을 면한 사람들에게는 죄로 인해서 끊어져 있던 그 끊어져 있던 그 단절이 연결이 됐습니다. 재연결이. 연결이 됐는데 어떤 연결이 됐는고 하니 하나님과 연결이 돼서, 다시 말하면 성령님과 연결이 됐고 또 진리와 또 연결이 됐습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진리와 연결이 되어서 먼저 영이 살았고 그 다음으로 이 마음과 몸이 둘을 지금 살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세상 노력입니다. 이러니까, 이것을 건설 구원이라 성화 구원이라 이 심신의 기능 구원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되느냐 그 본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어진다.
그러면, 본인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어지면 사람이 어떻게 영원히 멸하지 아니하는 그 행동을 할 수가 있으며 영원히 멸망받지 않는 것으로 변화가 될 수가 있느냐? 변화가 될 수 없고 있다. 변화될 수 없는 것은 공심판을.
공심판에서 거기에 서 합격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이룰 수가 없다. 공심판에 합격된 사람들은 이룰 수가 있다. 공심판에서 정죄하지 안하니까 이룰 수가 있다. 그러면, 공심판에 합격된 사람들은 이룰 수 있는데 어떻게 이룰 수가 있느냐? 이룰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연약하고 무지함으로서 이루지 못하는 것을 성령님과 진리가 이 공심판을, 거기서 벗어난, 예수님의 대속으로 공심판을 벗어난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던 그 지극히 큰 능력, 그 지극히 큰 능력이 무슨 능력인고 하니 성령님의 능력이요 진리의 능력인데 지극히 큰 성령님의 능력과 진리의 능력이 그 두 능력이 이제 공심판을 면한 사람들의 그 마음 속에와 몸 속에 들어 가 가지고서 역사한다. 그러니까, 그 두 능력이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서 공심판을 면제받고 공심판에서 구원받은 그 사람들 속에 가서 역사해 가지고 이제는 죽지 안하고 썩지 안하고 쇠하지 안하고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정죄받지 안할 수 있는 그 기능과 그 행위를 이룰 수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우리는 지금 뭘 하고 있는 사람인가? 우리가 천국을 가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기본구원을 다 얻은 사람들입니다. 자. 기본구원 열 가지 한번 해 봅시다. 첫째. 예택구원. 또 둘째, 예정 구원. 녜, 예택 구원이라 말은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신 그 목적 안에서 우리를 지으신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미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있어서 구원된 것이 아니고 없는데 이 목적 안에 어떤 어떤 것을 구원해야 되겠다 하는 그렇게 작정한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예택 구원입니다. 예택 구원. 또 예정 구원은 어떤 것이 예정 구원인가? 하나님께서 이 예택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하실 때에, 그 예정하실 때에 우리는 구원되도록 돼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예정 구원이라.
그러면, 예택 구원과 예정 구원이 좀 다른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될 것입니다.
예정 구원.
고다음에 무엇입니까? 창조 구원. 하나님이 창조할 때에 우리는 벌써 구원 받은 자로 창조했다 말이요. 하나님의 그 목적 안에서 우리를 창조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창조된 것은 벌써 예택 된 자로. 또 구원하기로 예정된 자로 이제 창조됐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몇째 됐습니까? 셋째 됐지요? 또, 넷째는 뭐입니까? 예수님의 대속 구원. 대속 구원.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대형 대행 대화친해 가지고 대속 구원 했습니다. 이건, 대속 구원은 무슨 구원입니까? 사심판 구원입니까 공심판 구원입니까? 예? 공심판 구원입니다.
공심판 구원. 인제 대속 구원을 얻었습니다.
고다음에 인제 다섯째는 뭐입니까? 예? 예? 녜. 중생 구원. 그 다음에는, 이제 중생 구원이라는 것은 셋이 있는데 셋이 다 중생을 했습니까 둘 했습니까 하나 했습니까? 중생은 하나만 했습니다. 영만 중생됐지 마음도 중생 안 됐고 몸도 중생 안 됐습니다. 요 하나만 됐습니다. 또 중생 구원.
또 고다음에는 또 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구원. 하나님의 아들 구원.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이지 우리가 아무리 행한다고 하나님의 아들되는 것 아닙니다. 이것도 우리가 나기 전에 벌써. 나기 전에 이것이 돼 가지고 있는 구원입니다. 자 하나님의 아들 구원.
또, 그 다음에 일곱째는 뭡니까? 녜,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것도 나기 전에 된 것입니다. 이는 하늘나라의 백성이라 이렇게 하늘나라의 백성이 돼 가지고 있다 말이요. 우리가 하늘나라의 백성 될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전부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된 것이라 그말이요.
또, 고다음에 여덟째는 뭐입니까? 뭐요? 세 가지 보증 구원. 세 가지 보증 구원, 세 가지 보증 구원인데 하나는 뭐입니까? 예? 자 세 가지인데 제일 처음이 뭐입니까? 녜, 제일 처음이 성경에 가르치기를 성령을 제일 처음 가르쳤고, 고다음에는? 진리를 가르쳤고, 고다음에는? 주님의 피를 가르쳤는데 우리는 성경에는 이미 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해주지마는서도 우리가 찾는 데는 주님의 피로 인하여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로 인하여 성령에 들어갑니다. 녜, 이 순서는 이제 또 꺼꾸로 됩니다. 이 꺼꾸로 된 이것이 실은 옳은 건데 성경에는 그렇게 발표를 해 놓은 그것이 또 가치적으로 권위적으로 하기 때문에 거기가 먼저 이렇게 권위적으로 말하면 성령. 진리 이렇게, 거기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순서를 말하고,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 나온 순서를 말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에게 들어가는 순서는 뭐입니까? 첫째 피, 둘째 진리, 셋째 성령 이렇게 들어갑니다.
그러면, 아홉 째는 또 뭐이지요? 성화 구원의 씨라. 그 씨는 무엇을 가리켜서 말합니까? 예? 녜, 성화 구원의 이 씨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벌써 성화 구원이 되도록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딱 인정을 해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인정을 받고, 성화 구원을 할 수 있는 그런 소망을 받았습니다. 성화 구원이 될 수 있는 그런 소망을 받았고, 성화 구원 이룰 수 있는 인정을 받았고, 이러니까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우리 성화 구원이 벌써 거기에 서 발족했고, 또 하나님께서 이 성화 구원의 소망을 우리에게 줬고, 소망의 씨가 생겨졌고, 또 그라고 나서는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이 성령, 성령 진리 보혈, 이 도움, 이 도움, 모든 이 도움을 우리가 다 힘입을 수 있는 그런 권세를 가지고 벌써 힘입기 시작했다 그말이요. 그걸 가리켜서 씨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씨 요것 잘 알아야 돼요. 씨. 하나님의 공심판의 혜택,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영원한 소망, 요 소망, 또 세 가지 보증, 또 하나님의 모든 예정 그 전부 하나님의 창조 그 전부, 이 전부를 우리가 다 우리 성화 구원을 위해서 이용 할 권세를 얻어 가지고 있다 그말이요. 우리가 노력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벌써 그것이 우리가 이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취급되어 있고, 얻어 가지고 있다 그거요. 그것을 가리켜서 성화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시발이나 모든 조처가, 구비가 다 돼 가지고 있다 하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해서 성화 구원의 씨라 그렇게 표시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열째는 뭐입니까? 생명의 부활. 이다음에는 심판의 부활이 있고 생명의 부활이 있는데 생명의 부활도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게 아니고 생명의 부활도 벌써 하나님 앞에서 얻어 놓고 있다 말이요. 생명의 부활은 기능 부활입니까 이 몸뚱이의, 마음과 몸의 이 형체 부활입니까? 형체 부활입니다. 이 껍데기 형체 부활이요. 속에 기능 부활은, 그러면 이 생명의 부활 받는데 생명의 부활은 받는 시기가 언제입니까? 언제 받습니까? 예? 예. 예수님 재림 때 받습니다. 재림 때에, 그러면 기능 부활은 어제 받습니까? 예? 기능 부활은 지금 받아야 됩니다. 기능 부활은 지금 받고 이 형체 부활은, 생명 부활은 예수님 재림 때에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 하늘나라로 가는데. 하늘나라로 가는데 하늘나라로 가기는 무엇 무엇이 가고, (저 ○ 집사, 눈 똑 떠. 뭐 생각해 가지고서 지금 잠 마귀한테 들렸어. 아 처음에는, 잠 마귀 안 들 때는 얼굴이 벌거이 화색이 나고 대미인 이디마는서도 이제 마귀가 와서 잠 마귀가 들어 오고나니까 똑 내가 보니까 송장은 아닌데 송장 비슷하다. 저 우리 질부라. 내가 지금 보니까, 아 좀 깨야 될 터인데, 보니까 아 처음에는 얼굴이 벌거이 보기에 화색이 나고 좋디마는서도 그만 잠 마귀 그 놈이 들어오니까 그만 반 송장이네. 이 다 바로 깨달아서 알아야 되지 그리 안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에 하늘나라를 가고 또 이 땅에 있고 하는데 뭣뭣이 하늘나라로 갑니까? 영하고 또 마음, 마음. 마음은 기능 된 대로 갑니다.
마음이라면 마음의 실력이 기능입니다. 마음의 기능 마음하고 둘이 하늘나라로 갑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말하기를 사람의 혼은 죽을 때에 하늘로 올라간다 그 말 한 것은 이 마음은 하늘나라로 같이 간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나사로나 홍포입은 부자의 마음이 세상을 떠날 때에 이 세상에 처져 있습니까 갔습니까? 예? 갔습니까 세상에 처져 있습니'가? 갔지요. 그런데 홍포 입은 부자의 마음온 어데 가 있습니까? 예? 음부에 가 있었지요. 음부. 또 이 나사로의 마음은 어데 가 있습니까? 낙원에 가 있지요. 이러니까, 이 둘은 가고 무엇이 땅에 처져 있습니까? 몸 이것이 처져 있습니다. 몸과 몸의 기능은 땅에 처져 있습니다.
있는데, 이것이 인제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에 예수님과 그 영과 마음과 예수님과 같이 옵니다. 개인 개인의 영과 마음과 예수님과 이래 같이 옵니다.
같이 오면은 그때에 이제 몸이 살아납니다. 그러면 고거 살아나는데 어떤 사람은 심판의 부활 받고 어떤 사람은 생명의 부활 받는다 생명의 부활 받는 것은 이제는, 이제는 영원히 썩지도 쇠해지지도 낡아지지도 안하는 변화한 몸을 입기 위해서 살아나고, 또 심판의 부활 받는 것은 변화하기 위해서 살아나는게 아니라 그것이 영원히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심판받아서 형벌받기 위해, 형벌받기 위해서 살아난다. 그러기에, 이 몸이 다 살아나기는 살아 나는데 형벌받기 위해서 살아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심판의 부활을 받는 다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몸이 부활은 하기는 하는데 부활하니까, 마치 사람이기 절했다가, 사람이 기절했다가 깨어납니다. 한 뭐 이틀까지 사흘까지도 기절해 가지고 있다가 깨어나는 사람 있습니다. 기절했다가 깨어났는데, 비유컨댄 두 사람이 기절을 해 가지고서, 기절 했으니 두 사람 다 송장인데, 송장인데 깨어나고나니까,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아주 글씨를 잘 쓰던 사람과 죽기 전에 글씨 하나도 쓰지 못하는 사람과 송장됐을 때에는 둘이 똑 같앴는데 이것이 깨 어나면은, 깨어나면은, 꼭 같은 송장인데 깨어나니까 글씨 잘 쓰던 그 송장은 깨어나니까 글씨를 잘 쓰고. 또 글씨를 하나도 쓰지도 못하고 글자도 모르는 그 송장은 깨어나니까, 죽어 있을 때에는 꼭 같앴지마는서도 깨어났을 때 그 기능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예? 다르지 그. 고와 같은 것입니다. 고와 같이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짜든지 우리가 죽기 전에 이 구원을 이루어야 되겠는데, 그러면 이 구원을 이룰라면은 그 구원 이루는 시기는 언제냐 하면은 현재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는 것은하나님을 보니까 알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정결한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또 그 다음 뭐라했습니까? 만나게 되고, 또 그 다음에 뭐입니까? 은혜를 받게 되고 이러니까, 사람이, 벌이 꿀 맛을 보면 죽어도 옵니다. 죽어도 벌이 이 꿀 맛을 보면 방에다가. 방에 들어오면 죽을 줄 아는데 방에 꿀이나 뭐이나 놔 놓으면 벌이 날아 들어옵니다.
꿀 냄새 맡고. 꿀 뜨자면 거기에 초가 있는데 그 밀 밀 그걸 가지고서 초를 만들어 가지고 딱 켜 놓으면은 저 벌이 그 냄새 맡고 온다 그거요. 오는데 오는 걸 한번 때려서 슬그머니 때려서 맞았다 말이요. 그 오면 죽겠다. 이 놈이 놀래서 달아났지마는 또 옵니다. 기어코 와서 거기 와서 죽습니다. 꿀 냄새를 맡아 놓으니까 죽어도 안 올 수가 없다 이거요. 그렇게 되는 그것을 가리켜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하는, 즐거워 한다는 그 즐거워 하는 것은 마치 벌이 꿀을 즐거워하는 거와 같은 그런 성격의 즐거움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하나님 만나 가지고서 알고 보니 하나님을 안 만날수 없고 또 하나님을 만내고 보니 그 분의 은혜 외에 딴 거는 사모할 것이 없어. 그분의 은혜를 받지 안할 수 없고 이러니까, 그 사람이 이제는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주님 외에 사모할 것이 없어.
이러니까, 마음 정결한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정결해야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인지 알게 되고 또 하나님을 만내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함으로 깨끗해지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함으로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은 성경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하는 그것이 하나님 말씀을 이제 제가 접하는 것이고, 기도는 뭐이 기도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가 살행해 볼라고 애를 쓰는 것, 마음으로 애를 쓰고 또 자기가 봄으로 연습을 해 보고 이렇게 자꾸 알고 난 다음에는, 기도는 실행에 속한 건데. 기도는 행함에 속할 것인데 하나님 말씀을 알고 난 다음에는 그대로 행할라고 하다가 또 안 되니까 또 새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또 행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자꾸 읽든지 듣든지 그렇게 하면 거기에 서는 뭐이 생겨지는고 하니-연구하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연구하면은 논리적으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 읽든지 듣든지 자꾸 하니까 거기에 자기가 모든 깨달음이 있고 또 소원이 생겨지고 그것이 생겨지는데 생겨지는 그것이 바로 나갈라 그 하면은-요 꼭 이와 같애요. 과학자가, 과학자가 무엇을 연구할 때에 자기 혼자 책상에 앉아서 아 요렇겠다 요렇겠다 요렇겠다 요렇겠다 자꾸, 이것을 자 가리켜서 무슨 연구라고 말합니까? 논리 연구하는 논리 연구. 논리 연구. 논리로 자꾸 이렇게 해 보면 이래 됩니다. 요러니까 딱 들어 맞았거든. 논리 연구로 나가면, 논리 연구만 자꾸 해서 이라면 된다 된다 이랬는데 나중에 실지로 해 보면 되는 것이 많겠소 안 되는 것이 많겠소? 안 되는 것이 많다 그말이요. 이러니까 논리 연구를 해 가지고 인제 됐다 하고서 해 보니까 안 되거든. 이러니까 일생 동안 사람들이 논리 연구로 또 했다가 또 안 돼고 안 돼고, 논리 연구는 똑 됐는데 해 보니까 안된다 그거요. 그게 실험입니다. 실지 연구하는 것.
그러면,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리를 생각하고 깨닫고 소원하고 이렇게 하는 그것을 그렇게 소원하는 것이 되는가 안 되는가 해 보자 또 실행을 해 보면, 해 보니까 그게 좋은지 안 좋은지 해 보자. 내가 깨달았는 것이 잘못됐는지 바로 됐는지 해 보자. 자기가 실지로 행해 보니까 안 되더라 그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아는 것과 행함이 하나가 되어져야 비로서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현실에서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고 또 현실에서는 하나님이 가르친 대로 그대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받고, 그러면, 현실에 우리가 받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뭐 뭐 받습니까? 그것을 가리켜 뭐라 합니까? 지혜 지식. 예? 지혜 지식을 현실에서 받고 또 하나는? 예? 능력 받고, 그라면 몇 가지 받았소? 두 가지 지혜 지식과 능력을 받는데 그 두 가지 능력을 받는 그 실력을 가리켜서 뭣이라고 마태복음 25장에 비유했지요? 예? 기름이라고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 실력을 받으니까 밤중에 뭐 들수 있습니까? 등불 들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 밤중은 무슨 밤중입니까? 밤중은 무슨 밤중이라 했지요? 삐뚤어지게 알게 하는 밤중이라 말이오. 삐뚤어지게 알게 하는 밤중. 그러니까, 바로 알지 못하게 하고 삐뚤어지게 알게 하는 그것이 밤중이라.
또 하나는, 바로 행하지 못하게 하고 또 삐뚤어지게 행하게 하는 그것이 밤중이라. 밤중. 그런데, 그럴 때에 등불 든 사람 뭐이냐 하면은 온 천하가 다 삐뚤어지게 알게 할라고 애를 쓰도 자기는 자기에 거기에 설복되지 안하고서. 또 바로 아는 것을 아무리 바로 알지 못하게 하고 나중에는 삐뚤어지게 알게 하는 것을, 알게 하도록 자꾸 이렇게 자꾸 이래 말하는 그걸 가리 켜서 강압이라 했습니까 유혹이라 했습니까? 예? 유혹이지요. 유혹. 유혹을 가지고서 삐뚤어지게 알도록 이렇게 하는 그 강한 역사가 있을 때에 자기는 삐뚤어지게 아는 그걸 받아들이지 안하고, 이제 받아들이지 안한 것이 등불이라. 또 바로 알지 못하도록 자꾸 방해하는데도 자기는 바로 알아. 그게 또 등불이라, 이 등불. 또 밤중은 뭐인고 하니 빠뚤어지게 행하도록 살살 꼬아 가지고서 달게 가지고 이래 하다가 그래도, 삐뚤어지게 행하게 해도 삐뚤어지게 행하지 안해.
또 바로 행하는 걸, 그래도 바로 행할라 하니까 이제는 강제로 바로 행하지 못하도록 강제를 가지고서 고문과 고행을 하면서 이렇게 합니다. 이래도 바로 행하는 그걸 그대로 한다 그거요. 그러면 그게 뭐입니까? 무슨 생활이지요? 빛 생활, 등불 생활, 그게 등불 생활이라.
그러니까, 그 실력을 언제 마련해야 됩니까? 현재에 마련해야 돼. 현재 뭘로 마련해야 됩니까? 주님에게 배우고, 주님에게 배우는 것은 성경 말씀을-요것 자꾸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하면 안 돼요. 배우기를 어째 배웁니까? 성경 말씀을 읽음으로 배우지요. 또 성경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들음으로 배우지요. 고거 배우는 것은 하나님에게 배웠습니까 사람에게 배웠습니까? 사람에게 배웠소.
하나님에게는 언제 배우는고 하니 그 현실에 자기가 이 세상이 이렇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라 또 세상은 이렇게 안하면 강제로 눌려서 안하면 너 죽인다 이래도 또 하나님께서는 요렇게 알아라 할 때에 그 현실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그대로 자기가 지식하는 그것이 배우는 거라. 고때 배울 때 진짜 배우는 것입니다. 고러면, 그것이 자기에게 실력적인 지식이 된다 그거요. 자 그 다음에, 앞으로 다음에 하겠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감으로 깨끗해지는데, 자꾸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또 그대로 실행을 하고 요런 가운데서 우리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자꾸 이래 실행하고 연구하고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지요? 자 여반에 한번 대답해 봐. 뭣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신구약 성경을. 자꾸 배우고 익히고 실험해 실천해 보고 이렇게 자꾸 실험을 해 본다 말이요. 실험을. 되는가 안 되는가 실험을 해 보는 것. 실험 해 보는 것. 우리 국민학교 다닐 때에, '자 이 물체에 열을 가하면 물체가 커진다.' 이라니까 그 마음에 '그게 커질까?' 이랬는데 '그러면 커지는가 안 커지는가 한 번 실험을 해 보까?' '예 실험을 해 봅시다.' 요만한 구멍에 다 요 동그란 걸 요걸, 쇠를 동그란 걸 요거 구워 가지고 것다가 대니까 구멍이 들어가지 안하고 딱 걸리는데 또 싸늘하이 식으면 싹 들어간다 그거요. '아 이 물체는 열을 가하면 커지고 열을 빼면 원상으로 돌아가서 작아지는구나' 하는 것을 해 보는 그게 실험이라 그거요.
이제 뭐 묻다 말았지? 예? 뭐라 하노? 성경은 뭘 가르치고 있느냐? 내게는 좀 파악이 잘 안 되는데. 아 내 그만 어데로 가 버렸어. 그거 아닌데 그 계속하던 그 순서가 있는데. 그래, 또 성경을 읽고 듣고, 또 시험하고 그라면, 아니야.
뭐이라이 나왔는데 그만 그 빛을 잃었어. 다른 것 그만 비유할라 하다가 빛을 잃었다 말이요. 그러니까, 이거 진리를 말할 때는 비유를 이거 자꾸 말 못 해, 많이 비유를 지금 모르니까 자꾸 비유 말하는데 비유 말하다 보면 딴 데로 그만 삐뚤어져서 아주 밝은 진리는 그만 가리워지기가 쉽다 그거요. 뭐인지 나 몰랐어. 잊어 버렸어. 다음 시간에 가르치겠습니다. 그걸 알아야 오늘 결론이 되는데 그 뭣이 결론인데 그만 그걸 잊어 버렸어. 녜 예? 예? 뭐? 하나님의 뭘? 배우기는. 실상으로 배우기는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그대로 배우는 것이 현실에서 배우는 것이고 그러면 사람에게 배우는 것 있고 하나님께 배우는 처 있고. 또 사람에게 얻는 것 있고 하나님에게 얻는 것 있는데. 그것은 그 전에 말했고 뭣이. 그 다음에 뭐 있었는데 여러분들도 다 잊어버리고 나도 잊어버리고 다 잊어버린 모양이라.
어짜든지 우리가 요 마음이 정결해야 되는데 마음이 정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아, 인제 알았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과 이것이 우리가 자꾸 배워서 아는데 그만 신구약 성경을 자꾸 읽고 듣고 또 자기가 실험하고 이렇게 해서 자꾸 연구를 하면 이 성경과 실험과 성령이 나중에 이렇게 자꾸 배우고 배우면은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어데로 끌고 가서 뭘 가르치고 있습니까? 신구약 성경과 성령과 그 전부가 뭣을 이제 종착으로서는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런데, 자꾸 이 신구약 성경을 자꾸 읽고 하면 우리 마음이 깨끗해지는데 마음이 깨끗해지면 깨끗해지는 목적지와 종착지가 뭐이냐 하면은 그 전부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신구약 성경의 어느 진리든지 그 진리를 자기가 듣고 깨닫고 또 실험하고 알고 행하고 이 두 가지를 가지고서 자꾸 바로, 안 것만 가지고 안 돼고 안 걸 실험을 해 봐야 이게 바로 알겠는데, 알고 시험하고, 말하자면 논리적 연구를 하고 실험적 연구를 하고 이래 가지고서 이것이 바로 들어맞았다 말이요. 들어맞아 가지고서 그러면, 바로 들어맞아서 바로 알게 되는 것인데 그 전부가 지금 목적이 어데 있으며 무엇을 최종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 전부가. 영감과 진리와 실험과 이 전부가 똘똘 뭉쳐 가지고서 우릴 지금 가르쳐서 끌고 가는데 우리를 끌고 가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데 뭘 가르치고 어데로 끌고 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끌고 가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는 종착이 어데입니까? 종착이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경이 가르치는 종착이 예수 그리스도시요. 영감이 우리를 인도해서 어데로 인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또 실험해 가지고서 자꾸 실험해서 점점 깨달아가는 데에 거기에 최종적으로 우리의 마지막에 도달할 도착할 종착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면은 뭣이 있습니까?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세 가지 대속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세 가지 대속과 나와에 합해 가지고서 세 가지 대속 안에 내가 들고 세 가지 대속은 내가 되고 이 세 가지 대속과 나와 완전히 화합되어지는 이것이 완성입니다. 완성. 인제 오늘 아침 그것을 말할라 했는데 그걸 잊어버렸다 그말이요. 그걸 말할려다 그만 잊어버렸어.
이러니까 우리 마음이 정결하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중보자 하나님, 그 중보자 하나님을 통해서 이렇게 볼 수 있다 그 말이요. 중보자 하나님을 통해서. 이 현미경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중보자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볼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