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9 01:47
둘째 아담의 형상을 입는 방법
본문 : 고전 15:47-49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첫 사람이라는 말은 아담을 가리켜 말하고 또 둘째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했고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서 하늘에 속했습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꼭 같이 입고 있습니다. 땅에 속한 자의 형상을 꼭 같이 입고 있습니다. 첫째 아담이 땅에 속해서 물질에 속해 가지고 있는 아담인데 그와 같이 우리도 물질로 아담과 같은 그런 형상을 꼭 같이 가졌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또 우리가 이제는 둘째 아담 하늘에서 난 하늘에 속한 자 예수님에게 우리가 속하게 됐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예수님이 하늘에서 났고 하늘에 속한 자인데 우리는 하늘에서 난 자는 아니고 땅에서 첫 아담과 같이 난 자이지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난 자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거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하늘에서 난 자 곧 예수님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랬는데 여기 '형상을 입으리라' 하는 것을 과거사로 말하지 안하고 현재사와 미래사로 말해 놓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은 단번이 아니고 자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상에 있는 기간은 길게 있든지 짧게 있든지 그 기간은 다 예수님의 형상을 입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은 다 흙으로 되어 있고 물질로 되어 있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은 다 하늘의 그 신령한 것으로 다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락하기 전에도 땅에 속한 자는 그를 기껏 산 영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기를 코에 호흡을 불어 넣으니까 산 영이 되었다 이래서 산 영이라 이랬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 이랬습니다. 둘째 아담은 우리를 살려서 하늘에 속한 자를 만듭니다.
그러면, 그 첫 아담으로 말미암아 난 자는 첫 아담과 같이 그렇게 그런 모든 심신을 가지고 났고 또 영육을 가지고 났습니다. 났는데 범죄 타락 이후에 난 자들은 영육으로 나기는 났지만 하나님이 산영을 만드셨고 산 육을 만드셨는데 범죄함을 인해서 존재하자 존재와 동시에 이 원죄와 본죄로서 정죄를 받게 됩니다.
이래서. 보통 성육법으로 난 자는 전부 다 죽은 영과 죽은 육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은 단번에 죽었고 육은, 육은 심신을 가리켜서 육이라고 하는데 심신으로 된 이 육은 죽은 것이나 아직까지 다 죽지 안하고 지금 죽은 것이 죽은 상태가 아주 없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마치 산 나무를 베어 놓으면 그 나무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뿌리에서 끊겼으니까 죽었지만 그래도 그것이 아주 시들어서 바짝 마르는데 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거와 같이 우리 육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담에게만 속하고 둘째 아담에게 속하지 못한 자는 다 죽은 영과 죽은 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영의 작용은 하나도 없고 육 그거는 지금 뻐들거리는 것이 죽는 뻐들거리는 것입니다.
마치 산 닭을 목을 끊어 놓으면 그 닭이 지금 완전히 그 몸에 생기가 다 완전히 다 끊어지기까지는 그것이 뛰기도 하고 굴리기도 하고 발동을 합니다. 그러면 목 끊어 놓은 그 닭이 뛰고 굴리고 퍼득거리고 이라는 것은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그거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가고 있는 거니까 그것이 무슨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가 없고 자체를 위해서 올바른 행동 할 수 없고 그저 아무 정신없이 생기가 끊어지니까 지금 환난을 당했으니 발동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람이 영이 죽어서, 영이 죽었으니까 영이 살았을 때는 영이 이 심신을 지배해 가지고 조물주를 알게 되고 거기서 관련된데 따라서 이렇게 동하고 정하는데 조물주와 영이 끊어져 영은 단번에 죽어 버렸고 단번에 죽었으니까 심신이라 하는 것은 아무런 생명 지식이 하나도 없고 생명이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들은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또 결과도 모르고 계산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안 믿었을 때에, 안 믿는 사람들을 말하지만 그 사람들 말하면 도로 오해하고 듣기 싫어할 터이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 예수님 믿지 안할 때에는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이나 뜻이나 소원이나 비판이나 계획이나 이성이나 양심이나 그런 것이 다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척을 분별 못 하고 다 자멸하는 행위만 자꾸 하게 됐던 것입니다.
이러다가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죄와 칭의 화친의 공로로 인해서, 이 공로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 영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중생해서 살아난 것을 거듭났다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시 살아났다 말이나 한가지입니다.
중생이라 말은 거듭 중(重)자 살 생(生)자, 거듭 살아났다 그말이오. 중생이라는 한문 글자를 가지고 그래 했습니다. 이번에 공과는 거듭 살아난 중생에 대해서 가르칠 터인데 거듭 살아났다는 말은 중생이라는 말과 꼭 같은 말입니다.
이래서, 영이 비로소 하나님과 연결이 됐고 진리와 연결이 됐고 성령님과 연결이 됐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성령님과 연결된 것이 어떻게 해서 성령님과 연결이 됐으며 진리와 연결이 됐느냐? 우리는 진리는 거룩하고 깨끗한데 진리는 불이라면 우리는 이런 뿍시미 섶과 같습니다. 진리와 우리와 합하면 타버립니다. 이런데 예수님의 대형, 대행, 대화친의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에 이 공로를 믿을 때에는 하나님과 당당히 교제할 수 있고 죄 없는 완전한 자요 의로운 자요 또 하나님과 완전 화친한 자가 됐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믿는 자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확실히 믿고 또 성령의 감동과 진리의 법칙대로 움직일 때에는 그는 바로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를 믿지 안하고 벗었을 때에는 법적으로 우리가 입고 있는 구원을 벗게 되기 때문에 실상으로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지 안한 자가 돼 버립니다.
대속을 입지 안한 자가 돼지면 영도 그러하고 육도 그러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영은 다시는 대속을 벗지 않고 입고 있습니다. 육은 입었다가 벗었다가 합니다. 이래서 속사람으로는 하나님 법을 섬기고 겉사람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그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과 진리와 연합할 수 없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때문에 연합할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속의 공로를 부인할 때에는 그는 하나님이신 성령과 진리와 연합하면 멸망받기 때문에 연합하지 안하고 성령도 피하고 진리도 피해서, 피 속에 있지 않는 자에게는 성령과 진리가 피합니다. 피하지 안하면 당장 멸망을 받기 때문에 피하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피공로를 확신하는 그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이신 성령과 연합은 절대 안 됩니다. 또 진리와도 연합 안 됩니다. 진리와 연합되는 것은 하나님 법칙 진리 지킨다고 연합되는 거 아니오. 하나님 법칙을 지켜도 그 지키는 것이 동기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고 방편만 지킨다고 다 지키는 게 아니라. 그 속에는 엉망진창의 강도요. 흉측한 악이 들어서 거석하면서 껍데기 형식만 지킵니다.
형식 지키기 때문에 껍데기는 이름이 '예수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하지만 속에, 껍데기를 벗기고 속에 들어가면 똑 같은 자 되기 때문에 성령이 인치지 않습니다. 성령이 찬성을 하고 협동이 돼야 비로소 그것이 성령과 진리와 결합된 자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결합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영육이 첫째 아담과 꼭 같이 영은 죽었고 육은 지금 죽었는데 곧 죽어 말라가고 있는 것이라. 하루 살면 그만침 말랐고 이틀 살면 그만치 말랐고 이제 세상에서 숨이 떠나는 것 세상을 떠나는 것은 그 육이 다 말랐다 그말이오. 이제는 생기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이 다 마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사형받아 있는 것이 죽어가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마귀란 놈이 얼마나 속였던지 죽어가고 있는 게 그게 산 건 줄 압니다. 살아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사는 것이 그것이 살고 있는 것인 줄 알고 그 악령, 악성, 악습의 법칙과 제도와 이런 것을 버리고 공로를 믿고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것은 살아나는 것인데 이것은 죽는 것인 줄 알고 옛사람으로 사는 것은 사는 줄 아는데 사는 줄 알고 산다는 것이 전부 죽고 죽어서 완전히 죽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에, 두 번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은 처음에 옛사람으로 사는 그놈이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 가지고 세상에 살다가 새사람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도로 인해서 마지막 완전히 법도 지키는 자로서 이제 끝이 나 버리면 다시는 유혹이나 시련이나 그런 것을 받을 것이 없이 완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두번째 죽는 거, 그러면 알기 쉽게 해서 그렇게 여러분들에게 표현했습니다. 이거는 뭐 얼마든지 알기 쉽도록 이렇게 말했는데 그런 교리를 그렇게 쉽게 아는 게 아니라. 쉽게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오늘까지도 조직신학에 뚜렷이 나타나 있지를 않습니다. 이러니까 이거 뭐 암만 알아봐야 '의례히 그런 거라' 이렇지 그 가치를 모른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첫째 아담에게 속한 자는, 첫째 아담과 꼭 같은 거와 같이 둘째 아담에게 속한 자는 둘째 아담과 꼭 같이 됩니다. 이게 된 게 아니라 됩니다. 된 게 아니라 되는데 이것은 자기가 행동하는 행동을 통해서 되기 때문에 행위구원이라고 그렇게 표현을 했고 이 구원은 단번에 되는 게 아니고 하나씩 둘씩 차차 건설해 가지고 집짓듯이 자꾸 주 모아서 건설해서 되는 집짓는 거와같이 그래 가지고 완성이 되기 때문에 건설구원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건설구원이란 말을 성경에 안 썼으면 우리가 쓰면 안 되지만 성경에다가 건설구원이라고 집짓는 비유로 한 것은 건설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완전히 그리스도에 성화된 것을 가리켜서 성화구원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과 꼭 같은 그런 형상을 가지는 이건 지극히 큰 소망, 예수님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당신이 완전히 상속받아서 영계와 물질계에 있는 모든 것을 당신이 주관하시고 당신의 것이 되고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은혜 베풀어서 살도록 해서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께 소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모든 피조물이 우리에게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소망을 가지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소망을 가지는 것이 한 개 소망 가지고 어떤 사람은 백 개 소망 가지고 어떤 사람은 소망 가진 것이 비유컨대 한 평만 그 소망 가지고 그 나머지 평수는 그 사람에게 소망 가지지 안하는데 어떤 사람은 영계와 믈질계에 있는 모든 것이다 그 사람에게 소망 가지기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 가지는 거와같이 그렇게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런 영광스러운 구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이 구원은 다 현실에서 자기가 노력함으로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 구원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떤 방편으로 이루어지느냐? 현실에서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 안하면 성령의 감화를 벗지 안합니다. 대속과 성령의 감화를 벗지 안하면 벌써 그 사람은 진리대로 산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하나님이 주신 법칙인 이 진리대로 살라고 애를 쓰고 또 성령의 인침을 받기 위해서 양심껏 그 바로 할라고 애를 써서 우리는 바로 할라고 애쓰지만 하나님이 보실때에 바로 됐으면 성신의 감화가 우리에게 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성신의 감화가 옵니다. 바로 되지 안하면 성신의 감화가 오지 안합니다. 일생 동안 예수 믿어도 성신의 감화 받지 못 하는 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바보 아니오. 우리 구원이 그렇게 이 세상에 뭐 과학의 억억억만 배도 더 되게 세밀하고 철두철미하고 정확하고 공평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꼭 같은 형상을 가진다는 것은 예수님은 신인 잉성 일위의 예수님인데 우리도 신인 양성을 가집니다. 가지는데 예수님은 일위로 되어 있지만 우리는 연합으로 되어 있고 동거 동행 동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거로 돼 있고 동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입고 가진 것은 예수님은 신적 요소를 가졌어. 신적 요소를 가졌고 인적 요소를 가졌는데 우리들은 예수님의 모양과 똑 같은 형상을 가지게 되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신적 요소를 가집니까 인적 요소를 가집니까 거게 대해서는 어찌 됩니까? 어찌 됩니까? 우리는 피조물적인 요소만 가지지 창조주의 요소는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자체가 본질적으로 변화되는 것 아닙니다.
안 되는데 그라면 어찌 그분과 같은가? 같은 것은 우리가 첫째 아담의 자손은 분식으로 다 됐습니다. 첫째 아담이 쪼갱이가 떨어져 나와 가지고 그게 크고 크고 해 가지고 그렇게 분식으로 됐는데 우리들은 분식으로 된 게 아니고 우리는 뭘로 됐다 했습니까? 믿음인데 그것을 종식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종식이라.
좇을 종(從)자, 거게 따라서 그게 되었습니다. 거게 피동으로 우리는 된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신적 요소가 되는 게 아니고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 창조주 요소와 피조물의 요소가 연합이 돼 가지고 된다 하는 이것만 잊어버리지 안하면 됩니다.
연합으로 됐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되는 것 아닙니다. 거게 연합으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연합이 돼 움직일 때에는 산 움직임이 되고 연합이 끊어져서 움직일 때는 다 사망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둘째 아담을 따라서 움직임으로써 우리가 둘째 아담의 형상을 입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 움직이는 이것을가리켜서 거게 피동된다 순종한다 이라는데 우리 순종이라 하는 건 그러기 때문에 하나 순종하는 것이 천하 얻는 것보다도 가치가 더 크다고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소망을 믿으면 되고 믿고 노력하면 됩니다. 믿고 노력하면 되는데 노력을 해본 사람은 구경했기 때문에 압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은 체험적 경험적 지식을 가져야 되지 논리적 지식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거는 소용이 없습니다. 논리적 지식은 그것이 인정하고 난 다음에 실행하는 그 실행으로 옮기고 자체가변화가 될 때에 그때에 효력이 이루어진 것이지 소원도 안 하고 인정도 안 하고 그대로 실행도 안 해서 자체 변화가 안 됐으니까 항상 마귀 형상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의 제일 적이 뭐입니까? 우리의 제일 적이 뭐입니까? 우리의 제일 적이 뭐이요? 적이 뭐 입니까? 악인데 악은 뭐이 악입니까? 자기 중심이 제일 우리 원수입니다. 요걸 알아야 돼요. 전부 자기 중심으로 살면 그게 복된 줄 알고 어리석게 삽니다. 네 중심으로 산 네 중심 그것이 네 영육을 막 망쳐 버린다. 금생과 내세를 다 망친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위하는 것, 하나님 위하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법도대로 사는 이것이 자기를 살리는 것이고 구원하는 것인데 인간들은 마귀에게 끌려 가지고 완전히 거꾸로 돼서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오늘 종일 자기 위주 자기 중심으로 했으면 성공한 줄로 압니다.
어떤 회의에 가 가지고 자기 중심 자기 위주가 떡 하나되면, 교회를 갈라 가지고 나가도 자기 중심 자기 위주가 떡 하나 됐으면 성공이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게 멸망이야, 그게 멸망.
그러면,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가 몇 개나 됩니까?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가 몇 개나 돼요? 저 O조사님. OO.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가 몇이나 되는고? 몇이나 돼? 저기는 또 몇이나 돼? 하나야, 하나.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가 하나인 줄을 알아야 돼. 하나가 이와같이 햇살 퍼지듯이, 이래 다 퍼져도 하나 그걸 찾아 들어가면 내나 하나로 되고 말아. 진리는 하나.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다 외우고 실행 실천해서 거기서 자체가 변화되고 또 거기서 변화된 그것으로 경험하고 체험하고 그라고 나면 가르칠 게 생겨지고 꼭 학생들이 알아야 되겠고 요대로 실행해야 되겠다는 확신과 또 소원이 생겨지고 그럴 때에 거기서 자기를 옳게 살게 하는 그 능력이 나를 통해서 학생들도 옳게 살도록 그렇게 만듭니다. 반사가 그 말씀으로 옳게 살지 못했는데 무슨 그 말씀 전할 때에 옳게 살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전달되겠습니까? 이해가 돼? 요 반사지? 이해가 돼? 제가 실행해서 저를 실행시킨 그 영감이 거기 가고 저를 변화시킨 그 영감이 가기 때문에 제가 변화 영감 안 받은 거는 입술로 암만 해야 거짓 선지자야. 아무 소용이 없어. 실행을 해야 돼. 그러고, 하루 30분 기도 잊지 말고 기도하고. 부장들은 자기 맡은 반사들을 어짜든지 알뜰히 챙기시기 바랍니다.
이거 뭐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데 이 일보다 더 귀한 일이 없어. 이 세계가 주일학교 한 것이 완전히 변해졌습니다. 주일학교가 어떻게 지금 주일학교 반사관이 됐느냐? 주일학교는 학생들 철없는 거 어린것들 할 일 없는 것 꼬마들 그런 것이 주일학교 반사하지 장로가 주일학고 반사를 해? 이라는 것이 거의 세계인데 이거 완전히 뒤벼졌어.
이것을 완전히 뒤비트려서 반사직보다 더 중한 직이 없기 때문에 대통령과 반사와 둘 하면 대통령은 그 사람이 등한히 해도 반사직은 등한히 못 한다.
그보다 더 크다. 그러기 때문에 죽는 시간까지 반사직을 충성하다가 주 앞에 서야 된다 하는 그것을 이 사상에다 밀어 넣어줘서 이것을 들은 것이 한국 교회에서 구백여 교회라. 서부교회로 말미암아 된 것이 구백여 교회라.
이러니까 모두 뭐 내 들은 대로는 교회가 얼마나 부흥되었느냐? 처음에 여기 올 때에 모두 사 배는 불었대요. 사 배 불었으니까 몇 백만이라. 몇 백만 이 인생 구원을 한 거라.
이 큰 역사가 있다는 이것도 이 말만 하면 듣기 싫어. 이 주님이 하신 것인데 백목사 자랑하는 줄 알고 말하면 듣기 싫어. 주님이 하신 그거 말하면 듣기 싫어하는 그자가 바로 마귀에게 속했다는 그 증거요. 이걸 말하면 배가 아파서 듣기가 싫어.
대구나 거창집회 집회 하면 '저놈의 집회 없어져 버리면' 어짤 수 없어 데리고 와도 없어져 버리면 하고 배가 아파. 그 집회에 사람이 은혜 받으면 배가 아파.
그게 뭐이냐? 속에 자기도 모르는, 자기 이성 비판으로는 예수님을 믿지만 속에 본능적으로는 하나님의 원수가 돼 가지고 있다는 그말이오. 이렇츰 가르쳐도 모르는 그게 어찌 알 거라? 부모님들은 돌아가서 중간반 학생들을 빨리 깨워서 보내 주십시오. 어짜든지 그라고 우리가 저녁에 도적 안 맞아야 됩니다. 저녁에 도적 안 맞아야 돼. 저녁에 일찍 자야 돼요. 저녁에 일찍 자서 한 시간 자는 것이 몸에 과로 회복되는 것이 한 열두시 지나 가지고 세 시간 자는 것보다 아홉시쯤 돼 가지고 한 시간 자는 것이 피곤이 훨씬 더 많이 풀립니다. 이러니까 일찍 자고 한 두시쯤이나 일어나 가지고 공부를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
그걸 자꾸 연습하도록 해서, 새벽기도 나와야 그런 사람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절제 있는 지혜 있는 사람이 될 수가 없어. 새벽기도다 나와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