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8 12:37
두 가지 결정이 되는 우리의 현실
본문 : 엡 1:19-23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어제 아침에 증거한 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이미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택함을 입고 부름을 받아 중생된 자에게는 지극히 큰 능력이 이미 속에 와서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된 것과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 안에 와서 있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와서 있기는 있지마는 믿지 아니하면 이 기능이 완성되지 못하고, 있지마는 기능은 죽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하나님의 몸이 되어있는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심신의 기능에 연결되어서 우리 심신이 이 기능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기본구원은 이미 받아 놓았고 지금 건설구원을 이루는 단계입니다.
건설구원은 어떤 게 건설구원인고 하니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이 이 심신 안에 와서 우리의 심신이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을 가진 심신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이 하나님의 몸의 기능을 가지는 것입니다.
영은 완전한 구원 얻었고, 몸은 완전한 구원이 약속되어 있고 또 와서 있지마는 아직까지 이것은 완전 구속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현실을 통해서 완전 구속을 받기도 하고 현실을 통해서 받은 이 구속을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실에서 지극히 큰 능력의 그 심신으로 살 수도 있고 또 주님의 몸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또 우리는 주님의 몸으로 살 수 있도록 주님의 몸 되어있는 것이 다시 범죄해서 주님의 몸을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배반하고 다시 자기 몸으로 찾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몸으로 이 심신 이 행사할 수도 있고 자기의 몸으로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몸으로 행사할 수도 있고 자기의 몸으로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몸으로 행사하면 이는 하나님의 몸이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몸 노릇을 합니다.
몸 노릇을 어째 하는고 하니 만물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충만케 하시는 이 충만을 교회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주님의 몸으로 살지 아니하고 자기의 몸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몸은 마음까지를 다 합해서 육을 가리킨 것인데, 우리의 육이 자기의 육으로 살 수도 있고 주님의 육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몸으로 행동할 수도 있고 현실에서 자기 마음으로 자기 몸으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은 자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현실에서 우리의 심신이 주님의 몸으로 살면 지극히 큰 능력으로 산 것입니다. 그러면 지극히 큰 능력이 됐습니다. 산 것만치는 지극히 큰 능력으로 완성됐고 이제는 다시 시련이 없습니다. 현실에서 받은 시련은 다시는 시련이 없고, 그 다음 현실에서는 이번에 받지 못한 그것이 또 그 다음 현실에서 시련을 받습니다. 또 받은 것은 다시 두 번 받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받는 것은 아직까지 받지 아니한 남은 부분 그것이 시련을 받습니다.
시련을 받을 때에 그때에 '아, 이 심신은 내 몸이라 내 마음이라.' 내 마음으로 내 몸으로 살 수도 있고 구속받은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몸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과 몸으로 살면 지극히 큰 능력이 되는 것이고, 만물에게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의 몸이 되는 것과 자기 몸이 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이 되는 것 자기 마음이 되는 것, 지극히 큰 능력의 것이 되는 것 아무런 능력 없는 사망밖에 못할 것이 되어지는 것, 그러면 영생과 멸망의 것이 되어지는 이것이 현실에서 결정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고린도전서 15장 42절에 이하에 보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고,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고, 혈육의 것으로 심고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산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심는 것은, 심는 것이나 버리는 것이나 먹어 없애는 것이나 불태워 없애는 것이나 자기 가진 것이 없어지는 것은 꼭 같습니다. 불에 태워 없앴든지 버려 없앴든지 그 씨를 가지가 먹어 없앴든지 어쨌든지 없어지는 것은, 먹어 없어지는 것이나 써서 없어지는 것이나 버려 없어지는 것이나 불에 태워 없어지는 것이나 없어지는 것은 같습니다.
그렇지마는 그 결과가 다른 것은 심어 없어진 것은 그것이 자연에서 몇십 배 몇백 배도 더 커지고 많아지고, 버려 없어졌든지 불에 태워 없어져 버렸든지 먹어 없어진 것은 없어진 과정은 같지마는 그 뒤에 오는 결과가 다릅니다. 그 결과는 결국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없어진 과정은 이래 없어지나 저래 없어지나 꼭 같이 없어지지마는 심어 없어진 거는 그 결과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요 하나 비유로 이와같이 이렇게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주의 몸으로, 하나님의 몸으로, 또 지극히 큰 능력으로 사는 것은 자기 마음을 버려서 주의 마음 만들어야 됩니다. 자기 몸 버려서 주의 몸 만들어야 됩니다. 자기가 일단 내놔야 됩니다. 자기가 내놔서, 자기 것을 내놔서, 내 몸으로 내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몸으로 살 수 있기 때문에 내놓는 이것을 가리켜서 심는 거와 같이 없어지는 것. 그러나 주의 것으로 내놨으면 이것이 지극히 큰 능력으로, 만물에게 충만케 하는 하나님의 몸으로 이렇게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현실을 만날 때에 마음과 몸을 자기 것으로 사용을 하느냐 그렇지 아니하면 주님의 것으로 움직이느냐? 주님의 것으로 움직이는 그것이 심는 것이요 자기의 것으로 움직이는 그것이 주님의 대속의 공로에서 되찾아서 자기 것 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사망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