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 13:29
노아의 아들들에 대하여
1981. 6. 11. 목요일 새벽
본문: 창세기 9장 21절∼27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이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서울에서 온 목사님 새벽마다 참석했는데 지금 참석했습니까? 손 한번 들어주십시요. 서울에서 온 목사님 새벽마다 며칠 아래 참석했는데 나왔으면 손 들어 주십시요. 안 나왔지. 올라갔어. 그 동안 자기가 기대하고 왔던 것이 그대로 자기 기대대로 되지 안하니까 여게 시간을 공연히 밥 사먹고 있을 이유가 없다 생각해서 갔으리라 제가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살펴보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 내 요사이 주시는 말씀은 참 알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게 중대한 것입니다. 징조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해야되지 뭐 금식하고 충성하고 희생하고 연보하고 전도한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을 어느 모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바로 알아서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을 바로 알아 가지고 이 하나님을 바로 상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지 하나님이 자기를 상대하시는 것과 자기가 하나님 상대하는 것이 삐뚤어져 놓으면 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게 부민교회 있던 그 장로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이 내가 오래 되 잊어버렸어.
성이 배장로인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기억하고 있는지. 그분이 자기가 하나님 앞에 꼭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고 해 가지고 단식기도하러 가 가지고 기도해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단식기도한지 17일만에 죽어서 그 자리에서 죽어서 장례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다 죽었으니까 복있는 줄 알지마는 그는 범죄하면서 죽은 시체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고 계신지 이것을 알고 뭐 모든 노력이 있어야 되지 이거 모르고 노력있는 것은 어떤 노력해도 그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러기에 지난밤에도 거게 대한 말씀을 줬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제 거게 대한 말씀을 그만 두고 이러는데 여러분들이 그걸 기억하고 지금 이 비오지 않는 것이 재앙입니다. 그저 이 비오지 않는다 그래 생각하면 안됩니다. 뭐 비 안 오면 흉년 드니까 배고프겠다. 배고파 봤자 굶어 죽는 것 밖에 더 되겠소. 죽는 것으로 인간은 끝나는 기 아니요. 더군다나 성도들은 끝나는 기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이 삐뚤어진 것을 세상에 있는 동안 이것을 바로 잡아 가지고 가야 되지 이걸 바로 잡지 않고 죽으면 끝나는 것 아니요.
그러므로 기억하고 지난밤 말씀같이 우리가 회개해야 됩니다. 그 회개할 것은 간단하요. 암만 말해도 못 알아 듣는 자 못 알아 듣지마는 우상섬기는 그것이 뭐이냐? 우리에게는 주님의 피로 구속했기 때문에 주의 것입니다. 그러면 주의 것으로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 마음대로 할 것 아니겠소. 또 주를 위해 쓰실 것 아니겠소. 또 주님이 보호하실 것 아니겠소. 이러니까 주의 것으로 알고 사는 것.
그러기에 주관은 주님만 바라고 의지하니까 그분 비유 외에 딴 것을 맞출기 없지 않습니까.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니까 그의 비유만 맞추지 다른 비유 맞출 필요가 뭐 있는가. 그분이 좋아하면 됐고 그분이 싫으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럴려고 하니까 그의 시키는대로 해야 좋아하지 안하면 안된다 이기요.
이러니까 이 안팎이 되는 것이 우리 신자인데 이것을 버리고 암만 운동해 봤자 하나님 앞에는 노만 끼치지 소용 없습니다.
제가 요사이 어쩐지 여러 군데서 모두 단체로 이렇게 많이 와 가지고 이 돌아다니는데 우리 교회만 오는 것이 아니고 아마 전국적으로 큰 교회 다니면서 뭐 형편을 좀 알아보려고 자기네들이 다니는 것 같습니다. 어제 그분들은 아마 근 백 명되지 아마. 얼마라지? 팔십 명이라 하는데 나중에는 또 말하기를 한 백 명 된다 하더라는데 모르겠소.
그 목사님들이 그렇게 여러분이 여게 왔다 또 부산에 여러 교회 돌아보고 또 대구로 가 가지고 뭐 돌아보고 이런다고 하는데 와서 묻는 것이 전부 인간 조직이 어찌 되느냐? 인간 조직이 어찌 되느냐? 또 사람들이 하는 그 방편이 어찌 되느냐? 하는 그것만 관심을 가지고 묻지 하나님께 대해서나 진리에 대해서나 영감에 대해서나 거게 대해서 묻는 것은 별로이 없었습니다.
그 한 사람이 그러면 그 가르치는 설교를 어찌 하느냐 그말 아니고 주보를 주보를 안 내느냐 하기 때문에 제가 설교하는 것을 공연히 그들에게 덧붙여서 말을 했습니다. 모두 다 다니는 것이 여기는 어떤 수단 방법을 가지고 이렇게 하는가? 어떤 조직 가지고 되어지는가 또 어떤 그 운동으로 되어지는가 그 이것만 묻고 돌아다니지 하나님에게 대해서나 진리에 대해서나 영감에 대해서나 여게 대해서는 묻는 일이 별로이 없었습니다.
없으나 제가 말한 것은 자꾸 동문서답 같으나 그것만 자꾸 골자를 두고 말을 했습니다. 말을 하니까 처음에 말할 때에는 좀 이상한 것 같지마는 나중에는 그분들도 조금 깨달아서 어떤 분들은 자꾸 말을 그만 여 더하고 더 하자고 하는 그것이고 딴데 갈 기 뭐 있는가 여서 그만 좀 그 필요있는 말 듣고 그만 가면되지 꼭 돌아다닐 긴가 그카는 사람들도 그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뭐할라고 자꾸 어데 다닐고 여 들을 말 있는데 듣지’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 보니까 혹 그 면을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조직과 또 방편 그 노력 이기 좋기는 좋지마는 근본이 잘 되구로 해야되지 그까짓거 암만해야 소용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기와의 바른 관계 가져야 되지 하나님의 뜻은 알지 못하고 제가 열심이면 뭐하며, 절제면 뭐하며, 충성이면 뭐하며, 노력이면 뭐하며, 희생이면 뭐하며, 봉사면 뭐합니까. 예. 제가 사랑하면 얼마나 사랑해 박애면 무슨 소용 아무 소용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이 가뭄 온다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한 계시 중에 하나기 때문에 그 뿌럭지를 파고 들어가면 중대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21절‘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어깨에 메고’옷가지 뭐이 거석해서 어깨에 메고 그 들고 가면 되지,‘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그만 들어가면 되지 뭐할라고 뒷걸음쳐‘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또 안 볼라고 얼굴을 돌이키고‘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셈은 그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라. 약속이 저의 약속이라. 찬양은 제 모가치라.‘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야벳은 창대케 했지마는 하나님은 제 하나님 아니요.‘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셈의 혜택으로 됩니다.‘더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녜. 그러면 요 셈에 대한 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됩니다. 간단하게만 말하겠고 뒤에 또 자세히 말할런지 모릅니다. 강령만 들어 말합니다. 함이 자체는 자기가 이매 가지고 있는 것에 가치를 잊어버렸습니다. 자기가 천하 사람들이 다 망하고 자기만 홍수에서 구원얻은 자기 여덟식구만 구원얻은 이것도 그가 잊어버렸습니다. 또 수많은 부모가 있고 자녀가 많치마는 노아의 아들에게는 이것도 잊어버렸어. 또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그 경고의 말씀을 받은 어쨌든지 자기에게 있는 그 현존한 이 현존의 가치를 잊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만일 누운뱅이라 합시다. 누운뱅이면 누운뱅이는 내야 무슨 은혜가 좋은 기 뭐 있는가? 내야 감사할 것 하나도 없다. 누운뱅이 만들어 준기 무슨 그 은혜가 감사해. 이래도 그 누운뱅이가 안 죽을라고 애를 씁니다.
누운뱅이 그것도 없는 것보다 있는 기 낫기 때문에 안 죽을라고 애를 쓰는 것이요. 사람들이 안 죽을라고 애를 쓰는 것은 그기라도 그기라도 없어지는 것 보다는 낫다는 것이 자기가 벌써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가진 것에 가치를 잊어버리고 불만 불평을 품기 쉽습니다. 노아는 그대로 쓰십시요. 노아는 이매 가진 것에 가치를 알지 못했고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그가 현재에 속한 것입니다. 현재는 참 이것을 알아야 되는데 둘째는 그것이 은혜로 된 것임을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과거를 전부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 저절로 된 것도 아니고 제가 원해 된 것도 아니고 이 순전히 은혜로 된 것인데 은혜로 된 것인 것을 그가 잊어버렸습니다. 셋째는 자기가 미래적으로 은혜로만 되어진다는 이 사실을 몰랐고 또 알았던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이러면 그 사람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다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그 현재 있는 그 현존의 귀중성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남용합니다.
벌로 씁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그걸 모르기 때문에 귀중성을 모르기 때문에 남용합니다. 둘째는 자기에게 은혜 베푼 자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은혜의 근원과 기관이 없어지게 됩니다.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근원과 기관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근원은 하나님이요. 기관은 자기 아버지겠습니다. 또 셋째로 그러니까 은혜의 줄을 가꾸고 애낄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의 줄을 가꾸고 애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셈과 야벳이 그를 덮고 보지 안할라고 그러는 것은 그 은혜의 줄이 상하는 그것이 너무 아파서 상하지 않도록 또 그 상한 것을 너무 자기에게는 엄청나기 때문에 기대가 크니까 볼 수 없어서 못보게 된 것입니다.
이러니까 첫째로 그 함은 감사가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감사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기쁨은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기쁨이 어디서 나오느냐? 기쁨은 감사에서 나오는 기쁨은 산 기쁨이요. 감사에서 나오는 기쁨이 아니고 감사 없는 어떤 현실에서 오는 기쁨은 그것은 죽은 기쁨입니다. 그것은 자꾸 망하는 길로 달리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으니까 기쁨이 없었고 기쁨이 감사의 기쁨이 없으니까 그 사람에게는 독이 자꾸 자라게 됩니다. 자꾸 독만 자랍니다. 독이 자랍니다. 그 독이 자라고 이러니까 그 다음에는 무지한 사람이 됩니다. 지혜가 안 나옵니다. 그에게서 지혜가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둘째로 경외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만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두려워 하는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 하는 것이 없으니까 그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조심없는 사람이 됩니다.
조심없는 사람이 되니까 그 다음에는 주관만 자꾸 자라게 됩니다. 자기대로 하는 그 주관만 자라게 됩니다. 주관만 자라게 되니까 그 사람은 어찌 되느냐? 무능한 사람이 됩니다.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그게 자꾸 무능해지는 것입니다. 왜? 인간은 객관의 소산입니다. 객관으로 말미암아 되어진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꾸 주관으로 돌아가니까 객관이 없어지니까 마치 화분에 심어 논 이 식물이 화분을 없애버려 화분을 벗어나 또 흙을 벗어나 나중에 물에다 싹싹 씻어 가지고 저만 동그리 공중에 노는 것 한 가지 때문에 그거는 무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이라 하는 것은 자기 아닌 다른 것의 힘이 그것이 자기 힘입니다. 객관의 힘이 자기 힘이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자기 힘이 되는 것이고 창조주가 자기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셋째로 그 메인 데가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함은 아무데도 메인 데가 없어요. 메인 데가 없는 사람이 되니까 그 사람은 무엇인든지 한정이라는 하는 것이 없습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이것도 요만침 하면 그 이상하면 안된다 뭐 제한이라는 그 절제받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한이 없습니다. 제한이 없으니까 그 사람은 끝없이 타락하게 되고 그 사람은 그 방종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 사람은 타락과 방종이 끝이 없습니다. 끝이 없이 그만 절절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뭐 쌓이는 것이 없습니다. 쌓이는 것이 없다 말은 객관과 자기와의 쌓아 놓은 것이 없습니다. 자꾸 갔다 자기 아닌 다른 것과 자기와의 쌓아 놓은 것이 없습니다. 자꾸 그 자기 아닌 다른 것과 자기와의 하나를 싸놓니까 그게 있어 둘이 쌓아 서이 쌓아 자꾸 이거 쌓니까 마치 이 식물이 공중에 들어났던 이것이 그 흙 한 줌이 와 덮어 두 줌이 와 덮어 석 줌이와 덮어 자꾸 이렇게 지금 싸지고 또 그 공기가 좋은 공기가 싸지고 또 때를 따라서 좋은 수분이 올 수 있는 수분이 싸지고 또 그 다음에는 좋은 햇빛이 싸지고 그리되면은 그 식물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인데 이것은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마지막에 결말은 저주와 종노릇밖에는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시간 다 됐는데 내일 아침에 요기에 대한 해석을 해주겠습니다.
첫째는 이매 가진 것의 가치를 그 사람이 잊어버렸다. 자기의 가진 그것이 없을 때와 가졌을 때와 그것을 없을 때를 생각지 아니하고 또 자기의 가진 그것이 무엇에 어데 쓰라고 하는 것인지 그걸 잊어버렸다 그말이오. 가치를 잊어버렸다 말은 여게 종이 있지마는 이 종의 가치를 잊어버리는 이걸 무슨 밥먹는데 쓴다든지 이것을 그렇지 않으면 담싸는데 쓴다든지 그러면 이 가치는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이 가치를 아는 것은 이 종을 이것을 바로 이렇게 종치는데 여게 쓰는 줄 알았으면 그 가치가 살아 있습니다. 가치를 잊어버렸다 말은 자기의 가진 것이 무엇 때문에 가져지게 되었으며 그 어데 써야 되는지 그 가치를 잊어버렸다 말입니다. 그 좀 뜻을 알기는 어려운데 가치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현재는 죽은 것입니다. 그것을 그 위해서 자기의 현재가 있는 것인데 자기 현재는 자기 현재라 하는 것은 그것이 지금 있어야 자기 현재가 필요하고 그 현재를 통해서 그것은 참 존재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인데 그 가치 그 되니까 그 현재가 자기에게는 오랑케 현재 현재가 자기에게는 원수의 현재가 되고 맙니다. 가진 것의 현재를 잊어버렸다. 또 은혜로 된 것을 잊어버렸다. 그것이 스스로 된 기 아니라 어디서 왔다 그말이오. 어디서 왔는데 온 것인 것을 잊어버렸어.
그러니까 그게 제재를 안받지. 아는 기 없지. 앞으로 모든 것은 은혜로 자기에게 하나 둘 와지지. 자기 스스로는 만들 것이 하나도 없다 그말이오. 그 뭐이냐 하면 자존자가 아니라 그말이오. 그 은혜로 된 것을 잊어버렸다 그말은 자존자라 그말이오. 자존자로 안다 그말이오. 은혜로 될 것을 잊어버렸다 그말은 자기 그 시은자로 되는 시은으로 되는 기 아니고자기가 독립으로 된다는 것을 아는 자기 혼자 뭐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 시은자를 잊어버리고 보니까 그 뿌리와 기관을 잊어버렸어.
뿌리는 하나님이요. 기관은 자기 아버지 자기 아버지는 아버지 육으로 아버지요, 은혜로는 선생이요, 또 시은자요, 또 자기에게 대해서 선지자요. 이런데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기에게 은혜의 줄를 가꿀 필요도 없고 귀중히 여길 필요가 없는 기라. 그러니까 그게 벗은 것이 자기 은혜의 줄이 지금 병이 든긴데 자기 은혜의 줄이 병이 든긴데 하나님과 지금 과거같은 그런 밀접한 관계가 벌써 끊어져 있는 것인데 그 병드는 것인데 거게 대해서 병들어 봤자 흉이나 보지 뭐 거게 대해서 아무런 마음의 아플 것이 하나도 없다 그말이오.
이렇게 그 현재에 있는 그것을 가치성 귀중성을 잊어버리니까 마음대로 남용하게 되지 그 시은자를 잊어버리다 보니까 그 근원과 기관이 다 자기에게는 끊어지게 되지 또 그러니까 은혜의 줄을 가꿀 필요가 없으니까 마구잡이가 되지 그러니까 감사함이 없지 감사함이 없으니까 기쁨이 감사로 말미암아 하늘나라부터 내려온 그 기쁨이라야 되는데 그 기쁨이 없어. 감사가 없으니까 기쁨이 없어. 그러니까 독만 자라요. 그 사람이 자꾸 독이 자라요. 독이 자라게 되고 독이 자라니까 자꾸 무지하는 것 미련한 것 무지하게 됩니다.
무지하게 되지 또 그 사람이 그러니까 아무 두려울 것이 없어. 그게 아니면 내가 죽고야 이래야 뭐 되지 그 사람이 회사에 다녀도 그 회사 나가면 저거 식구가 다 굶어 죽는 줄 알아야 그 회사에 지금 벌벌 떨면서 복종하지 이까짓거 없으면 지금 딴데 더 좋은 기 있는데 하면 그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두려워 함이 없는 것은 거게 대해서 내가 아무런 그게 없으면 안 된다. 그런 필요성의 느끼지지 못하니까 두려움이 없어진다 말이오. 두려움이 없어지니까 좋은 줄 알아도 위에 속한 두려움이 없어지니까 조심이 없어집니다. 조심이 없어지니까 그 사람은 뭐이냐? 자기 마음대로 하는 주관만 자라게 됩니다.
주관만 자라게 되니까 이러니까 자구 떼버리니까 무능한 사람이 된다 그말이오.
이 식물 이걸 암만 청청하게 살았지마는 이걸 쑥 뽑아 가지고 물에다 싹싹 씻어 가지고 넣어 놓으면 당장 이거 죽습니다. 이런 걸 자꾸 떼버리니까 자기 무능한 자가 된다 말이요. 무능한 자가 되는데 아무 객관의 협조가 없는 저 혼자만 힘을 가지니까 그 힘이 뭐이지요? 객관의 협조의 그 혜택의 힘은 없어지고 저 혼자의 힘만 그 강하게 가지니까 그거는 뭐이지요? 예. 그게 뭐이요? 그 여러분들이 알기가 어려워. 그게 악독입니다. 그게 독이요 독, 혜택이 없으니까 자꾸 거게 대해 불만 불평하게 되고 자꾸 자기 혼자만 힘쓰게 되기 때문에 이것이 전부 자기 주위 환경을 다 배격해서 배척해서 버리버리고 배척해버리고 자기 단독이 되있는 것이니까 그게 뭐이냐 하면 독이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독만 자라게 되고 그러니까 무지하게 되고 두려워 함이 없으니까 조심이 없게 되고 주관만 자라게 되고 그러니까 무능하게 되고 또 메인 데가 없으니까 재한이 없어. 메인 데가 있어야지 아무 메인 데가 없으니까 제한 없는 사람이 되요. 그러니까 타락과 방종이 끝이 없는 사람이 되집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자기에게 짜이는 기 없어 자기 자꾸 하루 살면 자기만 더 자기뿐이고 또 이틀 살면 자기 아닌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버리버리고 이틀 사니까 또 더 자기만 깨끗이 씻어버리고 또 사흘 사니까 옆에 아무것도 없고 전부 씻어서 자기만 더 남고 이러니까 마지막에는 자기 밖에 없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아무 싸이는 것이 없습니다.
하루 사니까 또 먼지 만침 덮고 또 이틀 사니까 모래만침 와서 덮어주고 또 사흘사니까 흙이 와서 뿌리 둘을 덮고 나흘 사니까 뿌리 셋을 덮고 열흘을 사니까 뿌리 열 개를 덮고 일 년을 살고 나니까 온 뿌리를 다 덮고 또 더 일 년을 더 살고 보니까 그 뿌리에 또 수분이 와서 연결이 되어지고 일 년을 더 살고 보니까 이 태양 빛이 혜택을 마련해서 태양 빛이 또 자기를 협조하게 되고 또 일 년 더 살아 보니까 이 좋은 공기가 와 가지고 협조하게 되고 이러면 그 식물이 잘 자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함은 자기가 저주와 저주 남아 있으면 종되는 것 그것 밖에는 되는 길이 없는 것이 필연성의 것입니다. 요것을 앞으로 여러분들이 가지고 가 가지고 많이 생각하십시요. 많히 생각하고 하면 좀 이것을 좀 깨닫게 생각하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넒어지고 커지고 포부가 좀 커질것입니다.
인자 그러고 나서 셈과 함의 셈과 야벳에 대한 것을 또 필연성에 대한 것을 여러분들이 알게 되면 그렇게 못되게 경거망동하고 자기 주관이나 사욕이나 그런 걸로 사는 그 자살 행위를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니까 계명을 지키고 말씀대로 행하고 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에 반드시 당신이 주시는 영원이 있습니다. 응답이 있습니다.
당신의 그 보답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할 때에 당신이 나에게 내 지식에 맞추어서 감사할 수 있는 그 감사의 일이 이루워집니다. 자기에게 무슨 기분적으로 주관 면에 기분적으로 무슨 내적 성화가 이루어지든지 내적 깨달음이 이루어지든지 무슨 감동이 이루어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슨 타나난 물질이 뭐 오든지 무슨 인간 인인관계가 무엇이 좀 달라지게 되든지 무엇인가 이루어지는 일이 있다 그말이오.
알아 들립니까? 이해가 됩니까? 요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요기 없으면 소용이 없어. 요거 깨닫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나무가 이런 큰 뿌리 가지고 사는 줄 알고 큰 뿌리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큰 뿌리의 자잔한 자잔한 뿌리 그것이 잎도 되고 꽃도 되고 열매도 되집니다. 이 큰 뿌리는 잔뿌리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잔뿌리는 생산자요 이 큰 뿌리는 운반자요. 이 큰 뿌리는 운반만 하지 생산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무를 심으는 사람이 그 원둥치 뿌리를 다 끊어도 그게 자잔한 뿌리 몇 개 있는 그것을 소망을 둡니다. 그것이 없으면 원뿌리에 움이 나도 원뿌리에 새뿌리 자잔한 뿌리가 나리라 하는 그것 바라봅니다. 그것 안 나면 헛일이요 그것 안 나면 그만 그 다음에 썩어버리요.
우리가 일반 인간이 상상하지 않는 느끼지 않고 지내 돌아다니는 그 속에 이면적인 그걸 깨달아야 됩니다. 그걸 깨닫지 않으면 헛일이요. 그 사람은 항상 외식 신앙이 됩니다.
우리가 모든 태양이 감옥에서 들었던 사람이 해방되면 얼마나 평안합니까? 중병에 걸렸던 사람이 그 병이 나으면 얼마나 기쁩니까? 중병 치료 본 사람 있습니까? 자기가 큰 중병이 들었다가 수술을 하고 나니까 시원하고 이제 차차 경과가 좋게 되면 그 성한 사람보다 기쁘고 금할 수 없습니다. 어떤 중병에서 병증이 끊어지면 기쁜것입니다. 큰 절망속에 들었던 자가 해방되게 되면 기쁜것입니다.
기독자들이 기쁜 생활, 또 든든한 생활, 언제나 그 희망이 넘치는 생활 이기 희망이 넘치는 것 든든함이 넘치는 것 평안함이 넘치는 것이 어데 있습니까? 돈에 있지 않습니다. 어리석지 마십시요. 권세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에 있지 않소. 주님을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랑에 있습니다. 예. 사랑에 있소. 이 사랑에 있는 것은 내 주관만이 아니요. 주관이 내가 먼저 든든하요. 기쁘요.
희망이 넘치요. 내 주관으로만 이래도 실제로 안되면 헛일 아닙니까? 아니야 내 주관이 있는 것 만침 객관 역사는 전능자이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될 것이 없어.
그대로 다 이루어져.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행복이 주님을 사랑함에 있는 것인데 이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해 가지고 날뛰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반드시 배고프고 목마를 것입니다. 수많은 역사에 지나간 사람들이 배고파 죽었고 목말라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를 사랑한 자는 배고프지 않습니다. 숨이 끊어지는 그때는 배가 더 부릅니다 그 때도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때는 만족이 더합니다.
그러기에 주를 사랑함은 기독자들의 주관적 행복과 객곽적 행복이 일치되서 실질적으로 실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주님을 사랑함이 이것이 우리에게 행복인데 지금 주를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말이 들리지 않으면 헛일이오.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고 사랑이 되지는 줄 압니까? 아니오. 주님을 바라본다고서 바라봐지는 줄 아닙까? 의지한다고 의지가 되어지는 줄 압니까? 암만 의지해도 자기 옆에 있는 어린아이 하나 있는 것만치 의지가 안 되는 걸 어찌 합니까? 일류의 대왕 다리오 왕이 아무리 말해도 다리오 왕 그것은 다니엘이 의지하는 그분과 비교 못하기 때문에 그까짓 것 의지하지 않했습니다. 하루 종일 말해도 의지 안한다 했소. 하루 종일 말해도 의지 안한다 그말이 듣지 않으면 의지 안한단 그말이오. 미루어 더 큰 의지를 자기가 알고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까짓 의지가 보여지지 안해.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고싶다고 사랑이 되어지는 줄 압니까? 사랑하는 이 사랑이 가배추 사랑과 같이 사랑이 자라가야된다 말이오. 사랑이 자라가야 돼. 한 현실에서 주를 사랑함이 그만침 가배추 한 잎이 더 생기는 모양으로 조금 더 커지는 모양으로 더 생기고 더 생기고 더 커지고 이렇게 되어야 주님을 사랑함이 자라가야 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내가 깨달음이 자라가야 되고 주님의 사랑을 내가 받아 자라가야 됩니다.
‘우리가 장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모세를 엘리야를 주님 이렇게 계시도록 여게서 삽시다’ 할 때에 주는 없애고 공중에서 소리나서‘저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자니 너는 저의 말을 들으라’그는 산지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저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내 사랑을 다 받은 자요 전적 나를 다 사랑한 자라. 내것은 다 저의 것되고 저의 것은 다 내것이 됐다.
이 예수는 저의 세포 하나도 내것이 아닌 것이 없다. 하나님 나는 나에게 있는 전부가 다 그의 것 아닌게 하나도 없다. 그말을 가르쳐서‘저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고 표시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자라가야 되는데 사랑이 자라가는 이것이 실질인데 이것이 안 되면 안 되는데 이것이 나무로 말하면 새뿌리 자잔한 새뿌리인데 이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걸 말하는데 들리지 않는 사람은 그게 안 들리는데 무슨 구원이 이루어 지겠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은 자라가야 되는데 자라가는 것은 자기가 쉽게 자라갑니다. 힘 안 들고 자라갑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맘만 있으면 자라갑니다.
사랑이 자라가는 것은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는 그거 외에는 사랑하는 길이 없소. 내가 주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이리 말해도 내라는 주관이 당신에게는 상대되지 않습니다. 비로써 주의 피를 의지하고 주의 계명인 이 진리라는 이 산을 타고 진리라는 이 줄을 타고 진리라는 관을 통해서 당신에게 연결이 됩니다. 이 진리 외에는 주의 피 이 진리 외에는 연결이 안 돼.
이러기 때문에 성령과 또 뭐라고 했습니까? 물과 또 피, 피는 예수님의 대속을 말하는 것이요. 이 물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오. 성령은 우리를 보증한 이 영감 하나님의 감화 감동을 말합니다. 이것으로써만 하나님께 연결이 될 수가 있소.
그러기 때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사랑이 될 수가 없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키기 쉬운 계명에서 지킬 때에 주를 사랑하는 아주 새뿌리가 조그만한 것이 내린 것이오. 새뿌리가 조그만한 게 내렸소. 또 주의 계명을 한 번 더 지킬 때에 새뿌리 하나가 더 내렸소. 또 그 계명을 두 번 지킬 때에 새뿌리가 조금 더 길었소. 또 세 번 지킬 때에 더 깁니다. 그러나 한 계명만 자꾸 지키게 되면 새뿌리 하나면 길어봤자 그거 가지고 위를 감당치 못합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요 현실을 주어서 요 계명을 지키도록 당신이 하셔서 요 새뿌리가 됩니다. 무슨 새뿌리입니까? 무슨 새뿌리지요? 무슨 새뿌리요? 무슨 새뿌리? 무슨 새뿌리? 이 비유 말하면 이 비유는 비유대로 다 떨어져 나가 버리지 무슨 새뿌리입니까? 사랑의 새뿌리 사랑의 새뿌리 뭘 듣고 있습니까? 사랑의 새뿌리가 내린단 말이오.
현실을 섭리로 주실 때 쉬운 계명 하나를 지키면 그것이 당신을 미약하게 사랑하는 것이오. 쉬운 계명이니까 생명을 받치지 않하면 사랑할 수가 없는 그것은 장성한 뿌리가 생겨진 것이오. 장성한 뿌리가 당연히 생겨집니까? 생겨지는 이치가 없소. 이것이 모두 다 식물이나 모든 것이 다 자연계시요.
자연을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오. 성경은 문서로 특별 계시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요.
이러기 때문에 나무가 심어놓은 것이 당장 이 팔뚝씨같은 뿌리가 당장에 생기는 것이 어디 있소. 없습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가는 뿌리가 요게 눈 트듯이 해처럼 조그만한 게 생겨져 가지고 차차차 그것이 볼록해 가지고 그것이 볼록하다가도 조금 더 있으면 어묵 톡 튀어나오다가 그것이 나중에 위에 오면 가지가 되고 밑에 차면 뿌리가 됩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게 차차 차차 자라 가지고 머리털 같은 뿌리가 됐습니다. 하얀 뿌리가 됩니다. 그것이 자라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현실에서 지키기 쉬운 계명 그 자 계명인데 같은 그 계명인데 그 계명인데 지난번에는 지키기가 쉽지만 이번에는 지키기 어렵습니다.
왜? 환경이 지키기 어렵도록 만드니까 지키기 어렵지요. 지키기 못하게 하면 마지막에는 그 계명을 그 계명도 지킬라 하니까 목숨을 안 내놓으면 지킬수 없도록 되어있을 때 있지요. 그건 뭐요?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신 것이라 그말이오.
그럼 그게 뭐 입니까? 그렇게 생명 내놓치 않으면 지킬수 없는 그런 환경을 당신의 섭리로 마련해 주시는 것은 당신의 요구가 뭐입니까? 뭐 때문에 그래 만듭니까? 여반 한번 대답해 보시오. 뭣 때문에 그래 만듭니까? 예? 남반에 무엇 때문에 그래 만듭니까? 봉월씨? 어? 어? 어? 사랑하기 때문에? 서원구씨? 어? 가까와지라고? 다 말이 대답은 다 비슷듬이 다 삐뚤어졌어.
주님이 우리의 생명보다도 내 생명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할 수 있는 이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큰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요. 큰 사랑을 요구하는 것 생명을 내가 포기하지 안하면 생명을 내놓지 안하면 그 계명을 지킬 수 없도록 환경을 몰아 여어서 이래 만드는 이것이 뭐이냐? 나 죽일려고 합니까? 계명 지키는 것이 뭐이라 했어? 사랑의 뿌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뿌리가 커다란 뿌리 큰 뿌리 그것이 자라는 것이요.
생명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사랑이 생명보다 더 큰 사랑 당신을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더 큰 사랑 생명보다 인간의 생명보다 큰 사랑의 뿌리 원하는 것입니다. 신사참배 처음에는 신사에 가서 공을 드리면 아들 낳고 딸낳고 한다고 신사에 참배하던 자가 하나님께서 그런 우상숭배하지 말아라 신사참배하지 말아라 하니까 누가 하라 하는 강요도 아무도 안하는데 그까짓기야 자기가 하나님께 소망만 두면 안하지 그러니까 신사참배 그 안하기는 힘도 안 들지 무슨 힘이 들겠소.
이렇지마는 마지막에는 생명 안 내놓으면 신사참배를 안하지 안할 수 없는 생명을 내놔야 신사참배 하라는 데에 참배를 안할 수 있는 그런 환경으로 변해진다 말이오. 그런 시대로 변해진다 말이오. 그렇게 변하게 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여려분들? 다 같은 계명인데 그 계명을 지키기가 쉬운 그런 현실을 만들어서‘그 계명 지키기가 무엇이 힘이 들어’할 수 있는 그런 현실로 만드신 이가 누구며 그렇게 지키기 쉽던 계명이 이제는 참 소유와 몸과 생명을 내놓지 않으면 안될 수 있는 생명을 내놓지 않으면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그런 현실로 만드는 그분이 누구요? 그분이 내나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혼자 그렇게 만드시요.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다 사랑의 역사입니다. 당신과 나와의 밀접한 사랑의 이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요. 지극히 큰 분이 이 천한 만물의 뼈와같은 이 더러운 우리로 더불어 당신이 사랑하시겠다고 내 더러운 사랑을 당신이 요구하시겠다고 이렇게 지금 하는 이것을 깨달으면 그 사람이 힘 안나고 뭐나겠습니까? 그 사람에게 소망이 뜨거워지지 않고 뭐 뜨거워지겠습니까? 이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행복의 이게 전부인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길러가야 됩니다.
사랑을 길르는 길은 다른 길이 없소. 자기 현실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 힘이 안듭니다. 처음에는 힘이 안듭니다. 힘이 안들고 그 다음에 차차 차차 지키나가면 신앙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 힘이 안들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 그에게 절대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렵지 안았소.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대개 고단하기는 고단하겠지마는 밑에서 한자욱 뛰놓는 것이나 위에서 한자욱 뛰놓는 것이나 한자욱 뛰놓는 것은 꼭 같습니다. 이렇지마는 그것은 밑에서 한자욱 한자욱 밟아 올라가면 누구든지 올라갈 수 있는 곳이지마는 밑에서 밟아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밑에서 한발자국으로 천메타나 뛰올라 갈라 해 가지고 올가갈 사람이 어디 역사에 있습니까? 아무도 없소. 날짐승도 안 돼요. 많은 날개를 쳐야 올라가지.
그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로 보여주는 것이라.
우리가 주의 계명을 처음에서부터 지켜 나갈 때에는 그때는 큰 계명도 어렵지 않고 지키지마는 제가 지키지 않는 자가 큰 계명을 지킬라고 어림도 없소.
그러면 우리가 어째야 합니까? 자기가 지킬 수 없는 없는 그 계명을 우리가 지킬라고 해야 됩니까? 지키기가 어려워서 못 지킬 아무리 지킬라 해도 이 계명은 참 지키기가 힘든다.
지키기 힘드는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계명 지키는 것입니까, 자기가 쉽게 지킬 수 있는 계명 지키는 것이 우리의 계명 지키는 길입니까? 이동화목사님 어느 것이지요? 어느 것이지요? 어느기 이동화목사고 어디고? 이동화 목사요? 이동화 목사요? 박금태씨이라는데 왜 자기가 남의 이름 부르는데 자기가 말해. 자기가 지금 대답할 기 아니라. 내가 대답할 사람에게 물었는데.
자 여러분들 이것도 여러분들이 쉬운 것 같지마는 평생 예수 믿어도 모른 사람 모릅니다. 자기가 느끼지 못하면 못 알고 삽니다. 목사 우목사 박사가 되도 못 느끼는 사람은 못 느낍니다. 이러니까 말을 해도 다 흘려 지내버리고 만다 그말이오. 자기에게 상관없는 상관없는 거짓말 자기에게는 해당도 되지 않는 그런 말은 하면 들려지고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은 들리지 않기 때문에 실질력이 없다 말이오. 왜 그런가? 진실이 없기 때문에 그래. 진실이 없기 때문에 그래.
그래 우리가 지킬 계명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킬 계명은 무엇이요? 지킬래야 지킬지 못하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 지킬 계명입니까, 자기가 지킬라고 하니까 지켜지는 그 계명을 우리가 지킬 계명입니까? 어느 계명입니까? 예? 어느 계명이요? 자기가 지킬랴야 지킬 수 없는 그 계명을 다시 이 계명을 지키야지.
아주 이를 갈아붙이고 다부지게 지킬라고 애를 씁니다. 지키도 헛일이요. 못 지키도 헛일이요. 헛일입니다. 그것은 다 초절입니다. 그것은 초절이요.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됩니다. 신앙 생활은 다 자연스럽게 되어지요.
기쁨으로 가는 걸음이요. 수월하게 가는 걸음이요. 자기가 목숨을 내놓아야 되는데 목숨을 안 내놓을려고 뻘뻘 떨고 겁이나 가지고 쫄아지면서 목숨을 내놓았다 할지라도 그 목숨 내놓은 것은 공연히 생명이 죽었소. 속에는 성령의 역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앙 지키는 것은 기쁨에 생활이요. 즐거움에 생활이.요 그렇기 때문에 단마음에 생활이요. 피곤치 않는 생활입니다.
겉이 순교를 당하는데 어떤 사람은 못견뎌서 기뻐 즐거워서 감사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이렇게 버리시나이까 기뻐 즐거워 못견뎌서 죽은 사람 있고, 이제 죽는 것이 싫지마는 하나님의 계명이 이래 놨으니 안 지킬 수 없고 안 지키고 이렇게 나가면 계명 어긴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내가 이 결말이 어찌 되고 또 나가서 신앙 사회에 가 가지고 어떤 천물이 되어질 것이고 이것도 다 생각하고 여러 가지 이성 비판해서 생각하고 또 다니엘처럼 행여나 요행심으로 이래 목숨 내놨는데 살려준다 하니까 목숨 내놓은 것이 뒤에 보려해 목숨을 구출하게 될런지 알수 있나 하는 그런 허망심도 그 속에 분석하면 기하도 않는 불씨가 신앙이 아닌 기이한 더러운 것이 들어 가지고 역사합니다.
제가 해방 직후에 어떤 사람들 집회 가운데 만내 봤는데 많이 그것을 그걸 알아 볼려고 그래 왔는데 보니까 외정 말년에 신사참배 안 한 사람들 있는데 안 한 그 간증을 내가 해보라고 하니까‘내 이놈들 일본놈들 요놈들 나를 찌지 먹든지 복아 먹든지 아무런든지 해 봐라. 내가 신사참배 하는가’그것이 주를 사랑하므로 계명지킨 것인가? 아닙니다. 아니요. 그것이 참으로 이름은 주의 이름인데 속은 마귀요. 공산주의가 지키는가 민족주의자가 애국자가 지키는 것 그런 것이지 그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므로 정사하는 것과 같은 그런 것도 안 됩니다. 그것도 못 되는 것이요.
순교는 그럴 때에 전설에 말하면 베드로가 꺼꾸로 못박아 주기를 간청했던 거처럼, 손양원 목사님이 기쁘고 즐거워서 가면서 그렇게 증거를 하려던 거 예수님께서 기드론 시내를 지내가면서 기뻐 찬미하면서 내가 이 죽음 죽기를 원하고 원하였다고 하시면서 가는 것, 6.25 때에 그때에 추조사님하고 이장로님하고 주목사님하고 서이 셋이 가 가지고 계평교회 가서 설교하고 내무 서원이 하나 와서 다 적어 가지고 잡아 가지고‘동무 가자’해서 잡아 가지고 가서 말하기를‘요놈들은 그냥 사형 시켜서는 안 되고 요놈들은 어짜든지 우리가 해방시켜 놓고 요놈들을 참 다 갈아서 잔치를 해야 되겠다 하면서 그때에 그때에 두 사람도 주의 계명 때문에 갇혔고 주남선 목사님도 갇혔고 서이 갇혔지마는 다른 사람들은 생이 새파라이 벌써 사형받기 전에 거의 반츰이나 죽어가는데 주목사님은 기뻐 즐거워서 십 분도 안 되어서 쿨쿨 주무시고 있더라고, 쿨쿨 주무시고 있더라고 게 계명 지키므로 당했지마는 속은 다르지요. 속은 두 사람은 어서 벗어나기를 원하겠지. 벗어나기를 원하는 것은 주를 사랑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지 주를 떠나기를 원하는 것이지 주남선 목사님은 주를 사랑하므로써 더 사랑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지 그러기에 우리가 계명지키는 계명은 자기가 자연스럽게 수월하게 지키는 계명입니다. 수월하게 지키는 계명을 지키면 모든 계명이 수월하게 지켜집니다.
수월하게 지킬 수 있는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사고입니다. 수월하게 지키지 안하는 그 계명을 지키지 안하는 데서 모든 사고는 모든 구원은 중단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킬 수 없는 그 큰 계명을 지키지 않는 데서 그 구원이 중단되어 있는 것 아닙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됩니까? 이해를 하는 사람들이 적은데 아주 숫자가 적은데 이 말은 속에 들리지를 안하는데 그 사람이 신사참배를 왔는데 신사참배를 못하고 그만 신사 앞에서 견디지 못해서 신사참배를 굴복을 했습니다.
그때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그러니까‘너는 괜찮다 나가거라’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다시 신사참배 그것을 다시 안하겠다고 날뛰야 됩니까, 그 신사참배 지키지 안하려는 그런 계명을 지키는 그것이 자기가 지킬 계명입니까, 자기가 그 밑에 밑에 그기까지 올라오는 과정이 되는 그 밑에 다리를 놓는 자기에게 자기 지킬 계명이 따로 있습니까? 어데 있소? 신사참배 안하는 그 계명이 자기 지킬 계명입니까, 자기 지킬 계명이 따로 있습니까? 어데 있소? 신사참배를 내가 하라는데 이계명을 범했으니까 일계명 이계명 범한 것인데 그 계명을 범했으니까 이제 다시 신사참배를 해야 되겠다 하는 그 신사참배 안하는 그 계명을 지켜야 됩니까, 자기 지킬 계명이 딴데 있습니까? 신사참배를 했으니까 다시 신사참배를 안하겠다는 신사참배 안하는 그 계명을 지킬 것이 자기 당면된 지킬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자기 지킬 계명은 지금 그 계명이 아니고 따로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왜 여반은 안 듭니까? 따로 있습니다. 따로 있어. 거게서 제가 계명지킬라고 해봐 안 돼. 따로 있어. 따로 무엇인가 자기에게 지킬 계명이 있어.
자기가 당장이라도 돼. 자기 현실에서 그 현실에서 지킬 수 있는 계명 지켜.
절제해야 될 것이면 절제하고, 조심할 것 있으면 조심하고, 양심쓸 일 있으면 양심쓰고, 성경 상고할 수 있으면 성경 상고 하고, 자기에게 거리낌이 있는 것 발견되면 거리낌 있는 것 회개하고, 기도할 수 있으면 기도하고 이것이 자기에게 지킬 계명이야.
여게에서 신사참배를 그 하라는 그 강령에 대해서 그런 어려움 당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한없는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해서 그 시기를 주신 것을 주님 앞에 기뻐하면서 신사참배를 이것을 내가 이제는 이 계명을 지키겠다. 가 가지고 원하고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나는 과거에 신사참배 하겠다는 그런 죄를 지은 것을 자복합니다. 용서해 다오. 내가 신사참배 하겠다는 말로서 하나님의 계명 어긴 죄를 하나님 앞과 당신들에게 범했기 때문에 내 죄를 용소하라. 내가 이제는 회개했다.’하면서 속에서 한없는 기쁨으로 감사하므로 그 신사참배를 이겼을 때에 그때에 이긴 것입니다. 그때 이기는 것이요.
수월하게 기쁘게 즐겁게 이길 수가 있어.
신사참배를 안한다고 뚜드리니까 어찌됩니까 뚜드리니까 아프기야 아프겠지.
맞으니까 기쁩니까, 분합니까? 예? 기쁩니까, 분합니까? 어떻소? (뒷부분 녹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