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 13:27
노아의 아들들에 대하여
1981. 6. 12. 금요일 새벽
본문:창세기 9: 21-27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어제 아침에 증거하다가 중단했습니다. 셈은 장자 황인종의 조상이고 또 구주가 이 계통해서 나고 함은 흑인종의 조상으로서 인종 가운데에 가장 불행스러운 그 위치를 가지고 있는 인종이며 또 야벳은 백인종의 조상으로 세상살이에서는 셋 인종 가운데에 가장 앞선 그런 형편을 가지고 살도록 노아 때에 이렇게 노아가 축복하고 저주한 그 예언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크게 말하면 셈은 그 은혜에 대해서 깨닫고 또 행동한 것이 제일 원만하고 우수하고 그 다음에 함 둘째 아들은 은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또 배반하고 무시한 그런 사람이었고 야벳은 그 장형을 따라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그런 일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여게는 셈 함 야벳에 대해서 이렇게 축복 저주 또 축복으로 이래 된 그것은 순전히 은혜에 대해서 어떠한 중요성이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영원 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예정하시는 그 예정대로 이 일이 된 것이고 또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창조하신 그것들이 창조되어서 이런 형편들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 모든 사람들이나 사물들이나 그런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과 같게 봐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 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특별계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요. 또 거기에 관련된 모든 존재들은 계시 기관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게서는 이 보통있는 이런 일로 예사롭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 도리를 가르치는 이런 중요성과 권위성 천하에 두어도 다 기록할라면 둘 수 없는 거게서서 간추려져서 참 획 하나가 이 천하보다 중량을 크게 가진 이런 계시로서 이치로서 우리에게 주신 이런 중요성과 중대성을 우리가 모르고 성경 읽고 들으면 안 됩니다.
간단한 이 일로 인종의 영원히 결정됐습니다. 인종의 영원히 결정됐습니다.
인종이 세 가지 인정의 이 노아 때로부터 예수님이 재림 때까지 세상 일이 이대로만 결졍된 것이 아니고 인생이 부활 영원히 무궁까지 그대로 결정이 되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셋 인종의 그 미래를 미래의 영원을 결정지은 그 일이며 또 노아가 그들에게 선포한 것은 영원성을 있었고 영원성을 가졌고 완전성 불변성을 가진 이런 선포인 것을 우리가 여게서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일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중요해서 그 인종의 조상이 된 그들의 잠깐한 그 행동으로서 그 종자 인종의 자자손손의 영원히 그대로 결정이 됐을까 하는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이 먼저 중요성 중대성 귀중성 이것을 여게 포함되 있는 줄 알고 여게 내포돼 있는 줄 알고 달라 들어서 연구를 해야 되지 이것이 우리가 하루도 수없이 듣고 보고 하는 그런 모든 시청각의 것들과 같이 그렇게 그런류로 생각해서 그만 예사롭게 지내보내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성경에 대한 도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그 귀중성 권위성 절대성 영원성 불변성 이것을 깨닫고 이 성경 말씀을 대해야만 되지 이것을 한 그저 허탄한 얘기책 허탄한 얘기라고 성경에 말한 것은 인간들이 지절거리는 그 모든 이 성경 빼놓은 세상에 있는 모든 문화, 문화라면 사상 주의 정치 예술 그런 것들을 다 합해서 문화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것을 허탄한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런 거와 같은 그 수준에 가치를 가졌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길가밭이 되어 가지고 길가밭이 되어서 그런 것들에게 공연히 짓밝혔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의 어두어지고 강팍해서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도 이 세상 어떤 그 성현군자가라고 하는 철인이라고 하는 위대한 무슨 인물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의 말과 같은 유명한 말 한마디라 그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길가밭으로서 그만 그 다음에 희망이 없습니다.
다 멸망뿐이지 이런데 함에 대해서 어제 아침에 증거하다가 말았는데 첫째 그 함은 자기가 현재에 가지고 있는 이것이 어떠한 가치를 가졌는가 하는 그 가치를 전혀 잊어버렸습니다. 누운뱅이도 죽기를 싫어합니다 앉은뱅이도 죽기를 싫어합니다. 소경도 입으로는‘아이구 이래 사니 그만 죽고 싶다’하지마는 죽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살하는 그런 사람은 그 현재에 자기의 그 사는 것보다 더 큰 위협이 자기를 위협하기 때문에 거게 충격받아 가지고 하는 것이지 자기 스스로 생명이 끊고싶어 끊는 것은 끊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인간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는데 하면은 아무리 불쌍하고 가련한 비참한 처지라도 자기의 현존한 그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마는 어디서 품느냐? 불마는 자기보다 낫은 사람을 보고 불만을 품는 것이이지 자기의 현존을 그것을 없어지는 것보다는 그대로도 있는 기 좋다는 그 본능적 계산이 뭐이냐 하면 아무리 어떤 자라도 안 죽을라고 애를 쓰는 것은 없어지는 것보다도 그대로 있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참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자기의 무슨 그 신체상 현존이나 또 자기의 위치상 또 자기의 무슨 평강상 자기의 경제상 자기의 그 지능상 그런 면으로 자기가 어떤 그 현존이 되 가지고 있든지 사람이 그것이 어떠한 가치를 가져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내가 존재케 되는가? 그 자기에게 대한 연구 그 자기를 아주 무가치한 것으로서 그렇게 던져 버리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있는 그것만을 탐하고 좋아하고 하는 그런 욕심 그런 욕심에서 인간들이 다 어두어지고 이 함의 가는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아무리 거석해도 자기를 애끼지 안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문둥이도 아주 보면 자기의 고름을 더러워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그것은 어짜든지 보호해서 좀 더 잘 되게 좋게 할라고 하지 자기의 몸으로 애끼지 안하는 자가 없어고 자기 생명을 애끼지 안하는 자가 없고 또 자기의 것을 귀중히 애끼지 안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불행은 어디서 가져오느냐 하면 자기를 애끼고 귀중히 여기면서 그것에 가치를 연구해서 자기라는 그 존재가 어떠한 가치며 어떠한 희망성이 있는 것이며 하다는 그것을 생각치 안하고 자기에게서 자기의 가치를 발견할라고 하지 안하고 그 건너다 보고 남의 가치를 보고 욕심을 내는 거기에서 사람들이 이 저주가 오는 것입니다. 불행이 오는 것입니다.
그 함은 이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자기가 수많은 그 인류 가운데에서 인류의 그 멸망 가운데에서 멸망을 피하고 단지 남자로서는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요.
모든 소유가 다 저희들의 네 사람의 것이 되어지는 것이요. 인류의 조상의 삼분지 일은 차지한 그 자기인데 자기가 어떠한 자라는 그것을 자기의 가치가 어떠한 가치를 가졌으며 자기 의무와 책임이 어떤 의무와 책임을 가졌으며 자기의 그 존재 목적이 무엇이이며 자기로 인한 어떤 그 것들이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 하는 거게 대해서 자기의 가치에 대해서 전연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자기라는데 대해서 남용합니다. 자기라는 데 대해서 뭐 이거 이렇게 좀 잘못하면 어찌 된다. 이기 참 귀중하다 요긴하다.
이것이 식물로 말하면 움싹과 같다. 이러니까 이 싹이 지금 얼마나 커나가고 어떻게 된다는 이것을 잊어버리니까 자기의 가치에 대해서 아주 무식하고 잊어버리고 거게 대해서 생각하지 안하다가 보니까 자기라는 존재를 남용하게 됐습니다. 아주 마구잡이로 쓰는 사람됐소.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뭐이 되느냐? 그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어졌습니다.
무감사의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함은 아무 기쁨이 없었습니다. 자기라는 가치를 깨닫고 자기를 이걸 조금 잘 쓰면 굉장하고 잘못 쓰면 큰일난다. 이것을 자기가 깨닫고 나면 자기가 자기된 그것이 스스로 된 것이 아니고 이것이 순존히 은혜로 됐기 때문에 감사함이 자기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사람은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 될터인데 함은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함은 점점 하루 이틀 살아 갈 수록이 자꾸 독이 자랍니다. 독 독만 자라게 되요. 감사 없지 기쁨 없지 자기의 가치 없지 마구잡이로 쓰지 이러니까 점점 독이 자라는 사람이 됐다 말이요. 그래 가지고 그 아버지에게 하는 행동도 그게 독한 그 독의 하나의 그 활동입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에게는 지혜라 하는 것이 하나도 생기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지혜기가 없소. 그러면 미래에 대한 재료 다 잊어 버렸지. 목적 다 잊어버렸지.
가치 잊어버렸지. 마구잡이로 살지. 이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온 은혜의 줄기를 다 잊어버리니까 감사가 없지. 이러니까 독만 자라지. 또 그러니까 아무 미래에 대한 지혜가 하나도 없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사람은 자기는 자기된 것이 제가 스스로 된 것이 아니고 전적 은혜로 됐는데 어떤 은혜로 하나님으로 근원된 그 시발된 은혜가 자기의 부모라는 은혜 기관을 통해 가지고 자기라는 존재가 하나님에게서부터 죽 계통이 서 가지고 그 계통으로 자기가 온 순전히 은혜로 자기가 된 것인데 이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은혜 베푼 근원도 잊어버리고 기관도 다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은혜 베푼 근원도 잊어버리고 기관도 다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도 잊어버리고 다 그렇게 아주 막살이 불효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로 된 것인 것을 잊어버리고 나니까 은혜의 근원과 기관도 잊어버려서 없는 자 되어졌고 이러니까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아무 두려움이 없었어. 두려움이 없는 사람됐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되니까 조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심없는 사람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그만 자기 주관만 자라게 됐습니다. 자라게 되고 그러니 마지막에는 그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 됐습니다.
마치 비유컨데 이런 식물 하나를 이것이 자꾸 이것이 저 혼자만 살고 싶다고 사는 기 아니라 그밖에 수많은 것이 다 두러싼 그 자기 아닌 타의의 혜택으로 살고 있는 것인데 그 타의 혜택이라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은혜인데 그걸 다 잊어버리니까 저 혼자만 살고 있지 다른 것을 다 제가 털어버렸다 그말이오.
이걸 이래 마치 뽑아 뽑으면 흙이 없어졌지. 또 이래 털면 없지. 물에다 싹 씻어버리면 아무것도 없이 저만 남았습니다. 이 저만 남은 거와 같이 이래 되어지니까 이 나무는 아주 무능한 나무입니다. 그 시간부터 저는 마르고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순전히 자기 아닌 이 객관의 은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인간만 아니라 모든 존재도 그런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그 식물이 옥토에 심어졌다 그말은 객관의 그 은혜가 풍부한데 있다 말이요. 돌짝 밭에 심어진 것은 그 식물로 말하면 객관의 은혜가 끊어지는 돌이 가루어져 가지고 끊혀지는 그런 불행스러운 자리에 심어졌다 그말이오. 인간이 사람으로 더불어 끊어지는 것 또 하나님과 끊어지는 것이 꼭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은 이매 은혜로 된 것인 것을 잊어버리고 보니까 자기는 미래로 큰 거나 작은 기나 모든 것은 은혜로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은혜로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순전히 남의 것을 받아 가지고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제 힘으로 산다 자기 스스로 힘으로 산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자기 힘으로 산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함에게 속했기 때문에 그것 이 결국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전체가 망하는 법칙뿐입니다.
미래적으로 전적 은혜로 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니까 은혜 줄을 가꿀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의 줄을 가꿀 필요가 없어요. 이거 뭐 하나님에게 대해서 또 그 아버지 어머니에게 대해서 형에게 대해서 그걸 애끼고 가꾸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아무데도 매인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참 자유의 사람입니다. 지금 요새 이십세기에 아주 이 모든 그 불의의 자유가 어떻게 그 무성해지는지 그래서 요새 보면 제가 저 뭐이 아이, 아이의 날이라더나 그 뭐 뭐 무슨 날이지 어린이날, 어린이날이라 하는 그 날에도 참 저주를 많이 끌어오는 걸 봤습니다.
어린이날에 방송하는 그 사람들이 물론 무식하기는 무식하지마는 그 인간의 근원을 모르니까 성경을 모르니까 그 인간대로지마는 어린이날이라 하는 그날도 어짜든지 부모는 부모라고 생긴 것은 어린아이의 그 사람 그 어린 아이들 기준해서 그가 원하는대로 좋아하는대로 그의 하자 하는대로 이렇게 들어주는 것이 이것이 그만 그 아이에게 어떤 자유든지 그 자유를 살려서 자유에 소원에 응해주는 것이 부모라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을 방송하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부모 노릇하는 것이다.
그까짓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없는 데서 네가 낳아서 생겨졌고 또 그것이 전체가 네기에 배워야 되고 그 받아야 되고 하는 것이니까 그 이 줄 자가 모든 걸 그에게 줘야 되고 살려야 되고 길러야 되고 가르쳐야 되고 해야 될 자가 이자가 선구자로서 앞잡이로 서 가지고 가야 될터인데 그걸 앞잡이 세워놓고 막 따라갑니다.
이러니까 미국 나라에 효라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효가 없는 것은 하나님 공경하는 자가 없다는 것과 꼭같은 성질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 날은 어린이날이기 때문에 ‘아 애가 바짝 정신 차려서 어린이에게 참 본이 되지 아니한 것, 유익되지 아니한 것, 또 저희에게 필요한데 네가 주지 못한 것, 내가 저희에게 해를 끼칠 것, 해를 끼친 것 이것을 반성해서 고쳐야 되겠고’그이에게 유익을 줄 것을 유익 주지 못한 그것이 거석하니까 얼마나 지금 그 애비 어미가 할 것이 어린이에게 할 일인데 이거는 아니고 어린이의 그이의 소원대로 그까짓기 뭐 압니까.
이러니까 그 하루를 대해서 얼마나 인생은 방종해지고 타락해지고 악한 자유가 발달되는지 모릅니다. 이래서 요한계시 18장에 결론해 놓기를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며 사치하였든지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줘라 너는 멸망치 안할라면 그 죄악서 나오라’이렇게 했습니다. 인생 멸망이라 하는 것이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만 사는 그것이 멸망이요. 인생이 사는 것은 가깝게 말하면 자기 아닌 피조물 그 혜택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는 어떠한 사람이 되느냐? 자기 아닌 피조물 거기에게 필요있고 유익 된 자기가 되는 것이 그게 자기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요 살리는 것이요.
그 다음에는 이 탁월해서 자기 아닌 창조주 그로 인해 살기 때문에 그에게 필요해야 되고 이러니까 자기 아닌 피조물들에게 필요한 자기가 되어지고 자기 아닌 창조주에게 필요한 것이 되어지는 이것이 영생입니다. 이 간단한 이것이 영생이요.
이런데 이 그만 함은 이런 사람이 되니까 자기의 미래나 과거가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 하나도 그게 아니고 된 것은 아닌 것인데 이것 잊어버리니까 어떤 사람이 되어지느냐? 은혜의 줄을 가꿀 필요가 없어. 아버지도 마구잡이고 엄마도 마구잡이 형도 마구잡이 선생도 마구잡이 그 뭐 제가 이거는 스스로 독존자 같이 되어버렸다 말이요.
이러니까 그것을 가꿀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은 매인데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런 만사의 재한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방종의 무한이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끝이 없이 타락으로 달립니다.
타락으로 달린다 말은 끝이 없이 자기로 달린다 말입니다다. 녜 타락으로 달린다 말은 끝이 없이 자기로 걸어 자꾸 자기에게로 집중이 된다. 자기로 달려집니다.
자기, 자기, 자기에게로 모든 자기만 되는 그것이 뭐이냐? 이 식물로 말하면 이거 흙 다 씻어버리고 물 바짝 말라버리고 그러면 저 죽습니다. 타락이라 말은 자기에게로 달린다 말이오. 또 이 향상이라는 말은 자기 아닌 이 모든 객관을 향하여서 달려서 객관 하나를 사귀고 둘 사귀고 서이를 얻고 너이를 얻고 열 얻고 자꾸 이래 얻고 모든 피조물 얻고 창조주를 얻고 자꾸 얻어서 그 그를 얻은 그것이 향상입니다.
그러면 그를 얻는 방법은 뭐이냐? 그 내가 취할 실력이 없기 때문에 내가 그것에게 필요한 것이 되어지는 것이 그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모든 존재에게 필요한 것이 되어지는 것은 모든 존재가 내기에 필요한 것이 되어지게 하는 것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함이라는 사람은 마지막에 어떠한 사람이 되어지느냐? 자존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스스로 된 사람이 자존자가 되어지고 또 그 다음에 저는 저 혼자 살 수 있는 독립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 되어지요. 그 다음에는 그 뭘 만드느냐? 자기에게 은혜 베푼 시은자가 적이 됩니다. 은혜 배푼자가 적이되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보다도 부모가 적이 되요. 모든 사람보다도 자기 스승이 적이 됩니다. 다 스승이 적이 되버리요. 네 적이 되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은혜를 줘야 될 그 자가 적이 됩니다. 그러면 가까운 자가 적이 되요. 그러니까 자기 위에 대해서는 시기하고 자기 아래에 대해서는 멸시하고 그러니까 저주와 종되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맞이할 수 없는 그 필연성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자꾸 가만히 생각하면 나옵니다.
마지막의 결론은 이래 된 사람은 자기가 어떤 것에게 매였다는 것을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겨졌다는 것을 모릅니다. 자기가 창조주와 또 어떤 피조물들과 그로 인해서 자기가 존재하게 됐다 하는 그것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이요.
이 바로 된 셈이나 그 나중에 셈을 배우면 되지마는 셈은 그는 자기가 존재한 것이 먼저 하나님, 모든 자기가 아닌 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존재됐기 때문에 자존자가 아니고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것 그 시은의 것이라는 것. 이것을 자기가 아니까 여게 대해서 마음대로 못하고 저게 대해서도 마음대로 못하고 또 그 은혜의 줄이 만일 절단나니까 아버지가 벌써 술취해 가지고 벗었으니까 이기 셈으로 말하면 지금 기절할 일이라 말이오. 그 은혜의 기관이 이래 됐으니까 뭐 보고 하체가 아랫도리 벗고 있으니까 흉보고 뭐 벗었더라 어째 조롱할 것이 아니라 그 기가 찬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옷을 가지고 가되 어깨에 메고 간 그것이 뭐이냐? 그 위에 그 은혜 기관을 경외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옷 그까짓거 들고가면 되는 것이지 들고 가는 기 아니라 그 경외하니까 옷을 그 가볍지 가벼운데 뭐이 둘이 어깨에 메고 가겠소. 그게 나타난 것이라. 그 또 그 하체 벗은 것을 볼 수가 없어. 이렇게 안 볼라고 한 그것은 뭐이냐? 그 보고 조롱하는 것보다 자기는 보고 조롱하는 멸시하고 참 그 흉을 본것이지만 이는 그걸 좋아하는 기 아니라 그게 기가 막히고 두려워하고 그 애끼고, 이러기 때문에 그 자기가 가꾸고 애끼고 기대한 것이 이래 되니까 기가 막혀서 보기가 싫다 말이요. 그 애착한 것입니다.
이래서 함은 아무도 없습니다. 독립할 수 있는 사람이요 독립 할 수 있는 사람.
그 객관성을 개관성없이 뭐 저 하나만 살 수 있다 하는 그 사람이 되어지면 비참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교만해져. 우리 여 가르치는데 보면 제가 배우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러면 그걸 다 잊어버리고 나니까 자기가 스스로 자기가 잘났어. 자기가 된 사람이요. 그러면 독존자 되지. 뭐 나 혼자도 할 수 있다. 있지마는 그 모든 윤리라는 것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거게 메이지 안하면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지혜로 깨닫지 못하는 것들이 절단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효가 없는 사람은 망합니다. 아무리 가정이 가난해도 효가 있는 가정이면 한 줄기는 희망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 가정은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은혜의 줄기가 튼튼하면 그 될 것 아니겠소. 공산주의가 반드시 자기가 길러놓은 후배면 그 후배에게 다 독살당했고 암살당했고 그것을 한 삼사대 했습니다. 이러니까 지금은 공산주의자들이 절대로 자기가 자기 후배를 기루지 않습니다. 후배를 기루지 않고 저절로 자랐는데 저절로 자라는데 자라는 그것을 보면 반드시 제일 삼가해 가지고 저기 날 독살시킬 자라 요래 가지고 경계를 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 모든 그 공산주의의 제일 유력한 인물들이 죽기를 누구에게 죽었느냐 하면 자기가 제일 애착해서 기룬 자기 바로 제일 수제자 그 후배 그이에게 다 암살 독살을 당한 것이 그것이 통계입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그이에게 그 주는 것을 재한해 주고 주지 안할 것이라 그말이오. 또 그걸 너무 잘하면 자꾸 경계를 해서 얼마든지 자라게 보호하고 가꾸지를 안할 것이라 말이오. 그러니까 그 사상이 뭐라고 쌓아도 끝이 없이 그만 좀 자라고 나면 자꾸 옆으로 퍼지지 얼마든지 사상이 향상해 나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세째로는 교만한 사람 됐습니다. 그 넷째로는 교만한 사람 되고 나니까 제일 가깝게 접촉하는 것이 자기에게 은혜 기룬 은혜를 베푼 그 시은자기 때문에 시은자가 일대 적이 됩니다. 시은자가 일대 적이 돼. 이렇게 되면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시은자가 제일 감사하고 경외해야 될 그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시은자가 첫째 적이 됩니다.
그 은혜 잊어버렸으니까 제일 가까운데 자꾸 이거 말하고 경계하고 책망을 이것만 들으니까 은혜를 잊어버리니까 은혜에 있었든 그런 것을 자꾸 이렇게 멸시하다 보니까 제일 일대 적이 된다 말이오. 그 스승하고 제일 적이 되고 부모가 제일 적이 되고 그 왜 그러냐? 가깝기 때문에 적이 된다 말이오. 왜 가깝다고 적이 되는가? 그 은혜받은 그것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고 하니까 자기가 자존자요. 독립자요. 교만해져 버렸고 이러다 보니까 시은자가 일대 적이 되고, 그 다음에는 또 자기가 은혜를 풀어야 될 그자 자기가 자기 아니면 안 될 은혜 베풀어야 될 그 자가 적이 됩니다. 그 은혜를 베풀어야 될 그 자가 적이 돼.
그러면 선생은 그 제자가 적이 되고 또 부모는 자녀가 적기 되고 상관은 부하가 적이 되고 이렇게 되는 것이 함의 걸어가는 길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자기보다 낫은 자기 보다 낫은 기 있어야 거서 흘러 나오지. 이런데 자기보다 낫은데 대해서는 전부 시기 되버립니다. 자기보다 낫은 것에 대해서는 시기가 되버려요. 자기보다 낫은 것은 볼 때에 그것이 내기로 넘어 나올 것이고 할터이니까 좋아하지 안하고 시기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자기 밑에 대해서 멸시하게 됩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은 여덟째 저주받고 아홉째로는 종되는 길 외에는 아무 것도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함은 하나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함은 은혜를 잊어버린 것은서 이렇게 대대로 망했다. 그러면 은혜를 잊어버리면 망합니다. 은혜를 잊어버리게 되면 배은이 되고 배은이 되면은 그 다음에 자기에게 은혜 베푼 자에게 대해서 시기하고 적이 되게 되고 이러니까 자기를 가꿔 줄이가 아무도 없소. 가꾸어 줄 이가 없소. 죽는 날까지 죽는 날까지 인간으로서는 제일이 부모입니다. 제일이 보모는 자기에게 무슨 줄 수 있는 것이 끝까지 있다말이 아니요. 무능한 기 있습니까? 없지마는 섞임없이 자녀에게 제일 좋은 것을 줄라고 하는 이는 부모입니다. 그 정신이 제일 낫다 그말이오. 또 자기의 선배입니다. 자기의 상관입니다.
그러나 차차차 상관은 그 밑에 사람들이 은혜를 알고 그러면 얼마든지 기루고 싶지. 얼마든지 기루고 그걸 참 자기보도 낫기를 원치마는 요기 돌아섰기 때문에 제일 삼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상관들은 자기 밑에 부하가 자꾸 커 올라오면 이놈이 들어서 난중에 나 절단내겠다 싶어서 삼가서 그걸 할 수만 있으면 끊어서 그 정도로 이상 크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 그것이 이 모든 악의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함에 대한 것을 많이 연구를 해야 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