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실수-환경

 

1981. 5. 30. 새벽(토)

 

본문:창세기 9장 20절∼29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세에 죽었더라

 

온 천하가 정죄 받을 때 노아는 홍수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는 이렇게 했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했느냐? 너희들이 어떻게 되는 것이  마땅하냐?’ 하시면서 천하 인류를 정죄해서 멸망시켰습니다. 이 노아에게  대해서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구원 얻은 장점을 말하자면 노아는 하나님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피조물 중에 그 어떤 것을 하나님에게 거리끼기까지 좋아했지만  노아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것보다 하나님을 좋아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해도 하나님보다 좋아하는 어떤 것을 가지기 쉬운데 노아는 하나님을  제일로 좋아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도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자기  좋아하는 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 좋아하시는 대로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택해서 한 귀한 장점을 가졌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의인이 있었지만 엘리야는 자기  혼자 남은 줄 알고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생명을 불러달라고 했는데, 노아는  여덟 식구 외에는 신앙의 길에 동지가 없는 큰 고독의 길을 걸었으나 물들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노아의 귀한 점입니다.

또 노아는 자기와 가족만이 걸어가는 고독한 독보의 신앙걸음을 걸으면서도  교만하지 않았고 하나님 명령대로 다 준행했다고 성경에 기록됐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대로 준행한 것이 노아의 장점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무엇인가? 하나님 모시고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이 네 가지 귀한 점이 노아에게 이루어졌고 세상을  정죄하고 홍수 심판을 면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노아가 세상을 정죄했다는  말씀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노아가 세상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노아를  들어서 세상을 정죄하신 것입니다. ‘노아는 너희와 같은 시대에서 바로  살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살았느냐?’ 할 때 그들이 아무런 핑계도 댈 수 없는  그 시대에 의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노아가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와서 첫 행위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것도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큰 실수를 했습니다. 홍수 심판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홍수심판에서 구원을 받았고, 방주에서 나와서 번제 드린 후에는 350년을 더  살았지만 우리에게 유익줄 만한 것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이 데려가실 때까지 계속 동행한 기록이 있고, 아브라함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증거했습니다. 약속한 가나안 땅이 3대가  지나도록 허락되지 않았으나 ‘아,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는다. 영원 부동의  가나안을 주시려고 이 변동 많은 가나안을 주시지 않은 것이라!’ 하면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소망은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번제 드린 이후에 큰 실수를 했고 그 후에는 가치있는 일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농사를 짓다가 포도주에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는데 그 모습을 둘째 아들이 훼방하는 심정으로 행동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노아가 함을 저주함으로 지금까지 함의 자손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인종  가운데 혹인종은 영과 육이 아울러 불행의 길을 걷는 것에 제일 앞서 있습니다.

장자 함은 황인종이요 마지막 아들 야벳은 백인종의 조상인데, 그 후에 많은  인종이 생겨났으나 근본을 따지면 이렇게 세 종류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장막이라고 한 하나님의 구원 세계는 황인종 셈의 자손에게  약속되어서 그 계통에서 구세주가 왔습니다. 백인종의 후손으로 구세주가 온 것  아닙니다.

그러면 노아가 의로운 사람으로 구원을 얻었으나 후에 이런 큰 불행을 당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냐? 그것은 노아의 환경이 좋지를 못해서였습니다.

홍수 이전에 노아의 환경은 좋았습니다. 홍수 전에는 온 천하가 훼방하는 가시밭  같은 자리에서 동지도 없이 고독한 독보의 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대적하거나 훼방하는 사람도 없고, 동물도 생물도 무생물도 노아에게 복종하는  노아의 세상이 됐으니 자유롭고 마찰없이 평안을 누렸습니다. 노아의 큰 불행은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대적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평안하기를 원하고, 동지 동역 동업 동류를 원하고, 대립되고  마찰되는 것을 싫어하고, 십자가 없는 자리를 원하는 것은 인간 생각이지  하늘나라를 이루어 가는 이면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도 주님에게 칭찬 받은 그 자리에서 당장 사탄이 되어 주님에게 버림을  당했는데 그것도 꼭 같습니다. 평안을 하나님보다 더 생각한 것이 사탄 되는  길이었습니다.

노아가 홍수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렇게 환경이 몰아쳐도 ‘하나님이  나에게 지시했으니 이 일이 허사가 되면 안 된다!’ 하는 돈독한 마음이 자꾸  생겨났고, 박해와 고독이라는 환경은 노아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밀접하도록  만들었고 하나님에게로만 집중되어 결합하도록 했습니다.

그러기에 노아가 좋지 못한 환경을 만나서 농사짓는 가운데에서 첫째는 자기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됐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자기와 가족들도 그 사람들과 꼭  같은 사람들이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을 잊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시체를 목견하면서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같은 입장에서 같은 행위를 했는데 그들은 멸망받았고 자기는 구원받았으니까  우쭐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자기에게 어떻게 하실지 생각하면 교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대해서 두려워서 머리가 숙여지고, 감사함으로 머리가 숙여야 할  노아가 어떻게 해서 교만하게 됐는가? 이것은 자기가 자기 된 것이 스스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됐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는 날까지 ‘내가 나된 것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로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목전에 어떤 못난 사람, 천하에 제일  무능하고 비참한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앞으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들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 밑천이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도 죄와 허물로 죽은 근본이 같은 자라는 것을  잊게 되면 하나님이 자기를 만드셨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셋째로 나오는 것은 교만입니다. 노아가 아들을 저주한 그런 결과 밖에는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노아는 멸망받은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자라는 것과  그들이 멸망받을 때 자기만 구원 얻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잊어버린 것이 노아의 첫째 큰 실수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환경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요. 이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을 버린 데에서 이렇게  됐습니다.

또한, 노아가 농업을 했는데 농업은 좋은 업이요 나쁜 업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을 버리고 차차 농업에 피동이 됐습니다. 천하의 고독의 독보의  길을 걸을 때도 감염되지 않았는데 몇 해 지나지 않아서 농업에 감염됐고,  자기가 만든 포도주에 완전히 삼켜져서 포도주의 사람이 됐는데 그것은 환경에  물든 것이요 벌써 환경에 감염된 것입니다. 이렇게 노아가 생업에 감염됐고  거기에는 실수할 수 있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나체가 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을 버린 연고인데 왜 이 사실을 문서로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셨느냐? 우리가 성공한 뒤에 실패하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다윗 같은  위인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무리를 잘했기 때문에 실패자가 아닙니다.

그는 성공자이기 때문에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가 가라사대…’ 하늘나라의 제사장 선지자 왕 가운데  왕권의 승리의 계통적으로는 다윗의 계통인 예수님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또 신앙  계통에서는 아브라함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계통이라고 증거한 것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노아는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업에서 하나님과 동행 없이 업을 하다가  차차 속화되고 타락되어서 그런 실패를 했습니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업에는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목회 업에서 실패합니다. 농업하는 사람은  농업에서 실패합니다.

어제 아침에도 말했지만 저는 부산에 와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는 성공했으나 내 구원에 대해서는 실패했다고 봅니다. 과거와  같은 하나님과 그렇게 밀접한 주관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큰 태산을 넘어 다니면서 여러 교회를 봤는데, 산을 넘어갈 때마다 밤이든  낮이든 금수들이 동행을 해줬습니다. 수천 마리의 금수들이 나 혼자 외롭게 가는  길에 모여들어서 마을이 나타나기까지 동행해 줬습니다. 그럴 때 나는 그들에게  이야기하면서 걸었습니다. 설교를 하면서 걸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아주 가까이  접근해서 동행했습니다. 밤이면 큰 짐승들은 내게 가까이 오지는 않아도 멀리서  흔적을 끼치면서 내 외로움을 면해줬습니다.

그러나 부산에 온 뒤에는 변질되지 않은 하나님이 만드신 그대로 있는 것은  하나도 접하지 못하고 죄와 허물로 죽어서 더러워진 인생들만 만나게 됐고  기도할 시간도 없습니다. 이번에도 아플 만한 원인은 없는데 금요일이나  수요일이 지나면 병이 납니다. 금요일은 언제든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11시나 12시가 되어야 아침 식사를 합니다. 내 몸이  회복이 덜 됐는데 엊저녁에도 그분들이 내게 의논할 일이 있어서 나는 앞서가고  뒤에 따라오는데 뒤로 듣고 말하면서 갔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과 교제할 시간이 적습니다. 그때와 같은 객관적 은혜나  하나님의 역사는 더 크다고 보지마는 내 주관적인 은혜는 아주 빈약해졌다  말입니다. 내게는 하나님에게 대한 간절하면서도 쉬지 않는 동행, 하나님에게  대한 애모의 여가가 없어졌고 성경 볼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목회하는 사람은 목회에 성공이 있지마는 실패하기 쉽고, 농업하는  사람은 농사하는 선에서 실수하기 쉬운 것을 여기서 가르칩니다.

노아가 분명히 농업하다가 하나님과 동행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잊어버리고 그 업으로 먹고 마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지  칭찬 받을 일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도하고 기도하고 설교하고 자선으로 구제하는 그런 업도 좋은 것이로되  하나님과 동행만은 못합니다. 하나님과 동행이 없으면 생명은 없기 때문에  결국은 썩은 결과를 나타내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버리고 할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을 더 고조해서 사람 만나는 시간은 좀  줄이고 하나님 섬길 준비하는 일, 성경보고 기도하는 데 힘을 쓰려고 결심해도  실천이 안됩니다. 그래서 이런 생애로서는 김현봉목사님을 존경하는데 그 어른은  이런 면에 자유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니까 그 업을 인해서 차차 지나쳤습니다.

포도나무도 심을 수 있고 포도주를 먹을 수도 있으나 지나치게 되니까 나중에는  포도주에게 제어를 받아서 만취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업을 가졌더라도 하나님 모시고 동행하는 것을 잊어버렸다면 설사  목회를 하더라도 후회될 일을 만들고, 또 하나님에게 부끄러운 일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미안스러운 일을 만들지 영광될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업에서 하나님 잊어버리는, 동행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고 문서계시로 주셨습니다. 노아는 혼자 생업하다가 결국 자기를 망쳤는데  이것은 자기 환경에 피동이요, 포도주에 피동이요, 자기 생업에 피동이요,  동산을 다스리지 못한 것입니다. 아들 함의 부정에 대해서 저주한 것이 동산을  지키지 못한 행위입니다. 원인은 자기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잊어버리고 업에 피동되어 술의 사람이 됨으로 아들이 큰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으면 책임을 아들에게 전가할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배반하고 술 취해서 실수를 했습니다!’ 자복했을 것이고 이랬더라면 함을  저주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에 함을  저주해서 멸망시켰는데 그 다음에는 분명히 후회를 했을 것입니다.

그 후에도 보면 노아가 350년을 살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한 흔적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추론 추측해보면 노아는 육의 멸망과 구원에 대한 계시를 받아서 그 면에  총력을 기울였지 홍수심판 후에 육의 구원을 초월한 하나님과 영의 관계에  대해서 힘쓴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노아는 자기가 자기 된 것을 잊어버렸고, 생업에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동행도 잊어버리고 생업에만 열중했는데 목회자도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에 열중하다가 하나님 잊어버리고 기도만 하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40일 금식기도 한 것을 집회 때마다 자랑하는데 그는 기도하면서 분명히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자기 마음은 40일 금식기도에 열중했지 하나님과  동행은 그 다음으로 돌렸습니다.

이렇게 노아가 생업에서 더러워진 것이 자기 멸망의 원인인데 그 책임을  독단적으로 함에게 전가시켜서 저주했고 함은 저주 받았는데, 두 사람이 꼭 같은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일곱교회는 일곱 별에서 나왔습니다. 저주할 데에 했으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미가엘이 사탄을 대해서 말할 때도 감히 훼방하는 말과 저주를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네 행위를 꾸짖으리라!’ 하는 것으로서 끝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함이 왜 저주를 받았는가? 그는 저주받을 행위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연구해보십시오. 5계명은 인간의 선조 선배 위에 있는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총칭해서 묶어 놓은 것입니다.

마귀 교훈을 받는 사람들은 운동장에 갈 필요 없습니다. 가면 손해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유익 볼 사람은 유익을 봅니다. 저는 그곳에서 큰 은혜 받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고, 별별 수단을 부리고, 또 못난 점 부족한  점이 많아도 생명 역사는 영감에 있는 것이고 영감은 외부에 나타나는 방편이나  운동에 있지 않고 말씀을 증거하는 그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수십만 명이 모였더라도 죽고 사는 것은, 말씀 증거하는 사람이 말을  잘못해도 좋고 성경 해석을 잘못해도 좋습니다. 잘못 증거해도 좋다는 말은 그  사람의 언변이 부족해도 좋고 지식이 부족해도 하나님이 붙들고 역사할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내가 평소에 많이 했지만 이번에 강하게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아무리 열심을 내더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주체되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됐느냐 하는 것이 문제요,우리는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일시뿐입니다.

그러면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서 뒷 책임은 누가 맡습니까? 성령이 맡기 때문에  성령이 맡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그곳에서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지금 운동장에 가면 손해본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열심이나 흥분이  이곳에서 증거하는 말씀 속으로 들어가도록 길을 열어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가진 흥분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 껍데기 감정이기  때문에 처음 믿는 신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입문이 되는 대단히 좋은  운동이 되겠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꿰뚫고 들어가는 그 면은 가로막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쉬운 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해서 주력하는 것이 많았으면 좋겠고,  말씀을 깨닫게 해서 힘을 얻는 것이 다른 것으로 힘 얻는 것 보다 낫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기에 왜 그런 곳에 참여할 필요가 없느냐 하면 이렇게 세미한 음성을 말할  때에 도리어 감각이 둔해지게 된다 말입니다. 이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흥분을 일으키는 찬송을 하고 나면 말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흥분도 여러  층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은 고요히 생각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영감이 됩니다. 진리는  여기서 배우고 불은 거기서 받아야 된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면을 이용하려던 사람들이 결국은 그리 치우쳤지 진리로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왜? 인간이 최종적으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밤중 환난에서 등불을 들 수 있는  힘은 고요히 생각하는 진리에서 나오지, 기분 좋고 흥분되는 힘은 그때에는 꼭  지장이 됩니다. 흥분이 없어지면 그만 사람이 푹 시들고 맙니다.

진리와 영감의 힘으로 사는 것은 평소에는 약한 것 같이 보여도 꿰뚫고 나가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환난을 이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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