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 13:22
노아의 신앙
본문 : 창9:20-27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셈은 황인종의 조상이 되었고 함은 흑인종의 조상이 되었고 야벳은 백인종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 노아가 그 둘째 아들 함의 행위가 미워서 이 저주함으로 이 함은 대대손손이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아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그 저주는 계속됩니다. 그는 이 흑인종들입니다.
그러면 이 노아의 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기록해서 주시는 이유가 뭐인가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진리를 깨달아 노아와 같은 그런 범죄를 하지 아니 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가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또 노아의 사랑하는 자손 천하에 있는 인간이 멸망 받을 때에 의인으로 구원을 받은 노아의 아들 함이 이렇게 멸망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하는 그것을 우리가 여기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어제 양성원 학생들에게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 하나 연구 문제를 내줬는데 답안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를 이적의 식물을 먹여서 호렙산으로 인도하셔 가지고 그에게 계시하신 일이 있습니다. 네가 굴에서 나와서 이 산에 섰으라 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네 소원과 네게 대한 하나님의 맡긴 사명을 다 완수하게 되리라 하는 그 경고를 받고 엘리야는 섰습니다. 섰는데 제일 처음에 큰 바람이 불어 산이 갈라졌습니다. 또 바위가 다 깨어집니다. 그러면 굉장한 바람 아닙니까? 엘리야는 이렇게 큰 능력이 나타나니 여호와 하나님이 이 가운데에 계시는구나하고 암만 봐야 그 가운데 계시지 안했습니다.
또 그리고 나니까 큰 지진이 나가지고서 막 땅을 뒤흔들고 야단입니다. 아! 이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하시는 것인데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는가보다 또 안계셨어. 그 다음에는 불이 나타나 가지고 엘리야가 놀랬습니다. 아! 불 가운데에 계시겠구나 했는데 거기에도 계시지 안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가 세 번이나 기대하고 인정했던 것이 다 헛일입니다. 여기에는, 여기에는 여기에 계신다, 여게 계신다, 안 계셨어. 안 계셨어. 그 뒤에 아주 가는 세미라 말은 가늘 세(細)자 가늘 미(微)자 아주 가느리한 그런 소리입니다.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데 거게 여호와가 계셨습니다. 계셔서 이 여호와 하나님이 엘리야야 네가 왔던 길을 도로 되돌아가라 돌아가서 다멕섹에 가가지고서 하사엘을 불러서 이방인의 왕이 되게 하고 예후를 불러서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해라. 이 여호와의 명령을 받고 가서 그대로 이방의 왕, 이스라엘의 왕, 하나님의 그 진실한 백성들의 선지 이 세사람에게 기름부은 것이 엘리야로서 마지막 역사입니다. 기름을 부었는데 말씀하시기를 하사엘의 칼을 피한자는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한자는 엘리사가 죽이리라 말했습니다. 그 후에 엘리사는 엘리야는 이 아합왕과 이세벨에게 쫓겨서 다니는 판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해도 그들을 정복하지 못하고 굴복시키지 못하고 그들에게 쫓겨다녔습니다. 그들을 처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미한 음성중에서 나타나신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 거기서 완전한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엘리야가 기름 부은 예후가 이세벨을 죽여서 땅에 떨어지게 하고 그 피를 모두 개들이 다 핥아먹도록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람으로 지진으로 불로 그 다음에 세미한 음성을 줬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기록하면 천하에 두어도 그 책을 둘 곳이 없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간추려 주신 이 전체가 영생인데 이 도를 업신여깁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그저 바람 지진 불 그래 나타내 가지고 세미한 음성을 나타냈다 이렇게 생각하지 그것이 얼마나 큰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다 말이요. 세미한 음성 그것이라야 거게라야 인간이 최후 승리를 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엘리야가 이제까지 다니며 했지마는 항상 미진이요 그 원수를 전복하지 못했고 멸하지 못했습니다. 기손강가에서 그 거짓 선지자를 죽였지마는 그것 때문에 엘리야는 지금 쫓겨다니고 죽일라하니까 피해서 도망쳐서 얼마나 급했든지 하나님이여 내 생명을 불러 주옵소서라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그게 뭐이야 깨닫지 못하는 자는 하나도 깨닫지 못해 깨닫는 자는 깨달아도 다니엘서 12장에도 보면 그렇고, 요한계시록에도 보면 말세가 되어 갈수록 깨닫는 자는 점점 깨닫고 못 깨닫는 자는 하나도 못 깨닫고 또 더러운 자는 점점 더러워지고 깨끗한 자는 점점 깨끗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거기에 그 바람을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여 주셨느냐? 그 하나님이 하신 역사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땅위에 교회에는 이 바람은 성경에 보면 전부 운동을 가르쳐서 말씀했습니다. 운동을 말할 때에는 바람으로 상징했습니다. 굉장한 운동들을 하나님이 일으킵니다. 굉장한 운동도 하나님이 일으켜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성도가 최후의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은 거게는 없다 이거요.
운동가운데서 요한 계시록에 보면 성전 밖마당은 속량하지 말고 성전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만 속량해라 그거는 속량할 필요가 없다, 그거는 이러니 저러니 논평할 필요가 없다 이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성전으로 알지요.
성전 울타리 안이니까 성전으로 알지 않습니까? 알지마는 안에 들어가 보면 성전 밖마당은 성전이 아니요, 밖마당 안에 성전은 조그만한게 있습니다. 세상이 볼때에는 교회가 크게 보이고 이기 다 교회다 싶지마는 문선명이 그것도 교회요, 통일교회도 교회요, 전도관도 교회요, 그 외에 모든 교회들 많은데 다 교회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교회이지마는 그건 성전 밖마당이라 밖에서 볼때에 교회지 안에 들어와 보면 성전이 아니라 교회가 아니라 그거는 세상에서는 문선명 통일교회를 제일 권위있는 교회로 봅니다. 통일교회가 지금 세계에 제일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 없는 데가 없습니다.
또 사람이 미칠만큼 변동이 되어 가지고서 따르는 것은 통일교회뿐입니다.
나라에서 막을라고 해도 못막고 막을라 한데마나 더 왕성했습니다. 미국에 가니까 어떤 사람이 가니까 미국 사람이 와가지고서 절을 하더래요. 왜 절을 합니까? 우리 어버이 나라 사람들이기 때문에 절한다 하면서, 문선명이를 자기 신앙의 아버지로 자기의 주로 삼아 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그 문화인들이 미국인들 다 대학 졸업했고 다 유력한 사람들 그런 청년들이, 이것이 다 성전 밖마당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하는 것이요, 그거는 속량하지 말아라. 이러니 저러니 논평하지 말아라. 그거는 다 심판 밖에 있어서 취급하지 않는다 이랬어, 다만 제단과 그안에 경배한자 이 셋만 심판해서 비판해라 그외 것은 다 제외해라, 바람운동, 바람운동에도 엘리야가 최후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승리의 은혜는 거기에 없었어, 지진 운동은 변동시키는 걸 말합니다. 변동시키는 것 사람을 어떻게 변동시키고 어떻게 지금 변화를 시키고 변화도 좋소, 그래도 그거 가지고 아닙니다. 또 불이 나타난 것을 이것은 그 뜨거운 걸 말합니다. 뜨거운 것 마음이 뜨겁고 정신이 뜨겁고 행위가 뜨겁고 열심있는 것 그래도 계시지 않했소. 마태복음7장에도 보면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했고 능한 노릇을 하지 안했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날지 못하노니 악한 자들아 나를 물러가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면 행위로 들어간다 말이 아니요? 행위로 들어갑니다. 기본구원은 행위로 들어가는 것 아니요, 이러기 때문에 구원은 두 가지로 구별합니다. 구원을 두 가지로 구별한다고 사람들은 많이 훼방하고 욕했지마는 이제 그것은 그 욕이 언간히 끝났습니다.
기본구원 사죄와 칭의 받아서 영이 중생되는 것도 기본구원이요. 또 부활도 기본구원이요. 다 예수님의 공로로만 되는 것은 기본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로 얻은 구원을 가지고 이 구원을 사용해서 이 구원받은 자가 노력해 가지고 건설하는 구원은 그건 성화구원이요. 주여 주여 하는 이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말은 성화구원은 자기가 주님의 뜻대로 딱 된 것이라야 그대로 된 것이라야 성화가 성화구원이에 들어가지 영생이 되지 그거 아니면 안된다 했어.
요한일서에 보면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자니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그 속에 없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말했소. 믿는 사람이 일생동안 살아도 이 자기 심신으로 심신의 기능으로서는 영생하나 못 얻는 자 있습니다. 일생동안 신앙생활해도 그럴 수가 있겠는가?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짓고 금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데 그 공력이 타지 안하고 있으면 상 받고 공력이 타면 그는 구원을 얻되 불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 같다 이랬습니다. 자기 일생 행위 자기가 가지의 그 심신의 기능건설, 자기건설, 행위건설, 소유건설, 이 건설을 아무리 해 놨지마는 하나님의 심판이 당신의 뜻에 딱 맞지 않으면 헛일이라 당신의 뜻이 뭐인데 성경에 맞으면 아니야 성경에 맞는 거 아니라 삼십 팔 년된 병자를 예수님이 낫아 주셨는데 그들이 안식일날 병 고치고 이런 것 했다고 정죄한 것이 성경적이 아닙니까? 성경적이요 예. 이랬는데 성경적인데 왜 그것이 예수님을 자기 구주를 정죄하는 그런 일이 성경대로 한 것이 왜 구주를 정죄합니까? 그것이 성경에는 맞지마는 친히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라하는 친히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 저의 개별적으로 지시한 거기에는 맞지 안해. 지금도 우리가 성경대로 한다고 해서 의가 되는 것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내 성경대로 하겠다. 창세기 1장에서부터 차곡차곡 오늘은 이 성경대로 살고 내일은 저 성경대로 살아도 소용없어,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에게 배우지마는 내가 어떻게 할 것은 사람들에게 묻지 말라 네 안에 기름부음이 널 옳고 바르고 참되게 너를 가르치시리니 그대로 행하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런 운동을 했어도 세미한 음성을 듣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세미한 음성이 무엇입니까. 넓은 범위에서 이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있지마는 신구약 성경 말씀이 이 세상 넓은 범위에서는 세미한 음성이요. 좁은 범위에서는 신구약 성경 중에도 자기가 성경 안에 바로 깨달아지는 그것이 세미한 음성이요. 66권 성경은 꼭 같지마는 왜 이 교파가 여러 수백 교파로 지금 나누어졌습니다. 그 성경보고 깨달음이 다르다 그 말이오. 깨달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거라 안식교는 우리가 이단인줄 압니다. 모두가 다 안식교는 이단이라고 다 정죄합니다. 그들 성경을 다 봤지마는 안식일을 그것을 변케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안식일 그것이 구원의 근거인줄 알기 때문에 이단이라 그 말이오 응 안식일이 주일날 변개된 걸 몰랐다고 이단이 아니라 그들은 안식을 지키고 안지키는 거기에 구원과 멸망이 근거된다고 하기 때문에 그게 이단이라, 왜 성경봤는데 성경보고 깨달았는데 어찌 그게 바로 됐습니까? 그런고로 바른 깨달음이 이것이 문제입니다. 2세에 이세교회 가인과 아벨이 이세교회인데 이세교회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받은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교리 신조에 대한 박해입니다. 교리신조는 생명이 끊어져도 형제의 인륜이라는 것이 그때는 아담이 아들이 그러니까 그것밖에 이세밖에는 안낳았는데 그렇게 가까운 형제 관계지만 그 관계 때문에 교리와 신조를 타협하거나 양보하거나 할 수가 없어. 자기 생명이 끊어져도 타협이나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거게서 우리에게 계시로 또 그 사실을 보여 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바람도 좋고 지진도 좋고 불도 좋지마는 세미한 음성 그걸 들어야 됩니다. 그러면 성경가운데서는 바로 깨닫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또 자기가 바로 깨달았다고 됩니까? 바로 깨달은 그 다음에는 자기 현실을 만났을 때에 성령님이 각자에게 너는 이래라 저는 저래라 하는 기름부음이 옳고 바르고 참되게 가르쳐주시는 그걸 받아야 돼. 그거라야 믿음이 됩니다. 다른거는 믿음을 만들라고 하는 것이고 믿음은 당신의 뜻에 명중되어서 같이 하는 이게 동행이요. 이게 동행. 이것이 전능이요 만능입니다. 이것만 남아, 이것만 이다음에 심판 때에 남아 있어 다른거는 남지 안해.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 노아의 이 실패하는 것을 봤는데 여게는 무수한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면 실패한다 이러면 구원을 얻는다. 예수 믿는 도가 항상 낙망에 속한 것 사망에 속한 것 그것만해도 그것이 다 가룟유다와 같은 그 성격이 되고마는 것입니다. 같이 있어야 돼요. 율법으로 죽는 것과 복음으로 살아나는 것이 같이 있어야 돼 그러나 논리적인 순서로는 율법으로 정죄받아 죽어야 복음이 필요있지 죽지 안한자에게는 복음이 필요가 없어, 율법없이 복음만 가질려고 합니다. 이거는 공중누각이요. 좋은 것만 말합니다. 좋은 것만 말하니까 벙긋벙긋 다 웃기만 웃지마는 거기에서 네가 이런 지금 암병이 들었고 이런 것 들었고 있는데 네가 지금 기뻐하는 그 기쁨이 며칠 가겠느냐 하면은 그때는 퍽 쓰러지고 말것이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병을 알고 그 병을 다 치료해서 다 고치고 난 다음에라야 그 다음에 건강하지 않겠소? 이 노아가 이제 여러 날 아침에 말했는데 노아가 이 구원을 성공을 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그가 성공을 했소. 홍수 후에는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동행했다는 말이 없어, 동행을 안했어, 동행을 안하니까 그 사람이자기가 하는 그 사업에서 처음에는 제가 사업을 했지마는 사업은 했지마는 제가 사업을 만들었지마는 농사를 지었지만 하나님 없이 그가 농사 안짓고 뭐하겠소 농사지어야 하지 않겠소? 농사짓는 것 나쁜 것 아닙니다. 우리가 사업하는 것 나쁜 것이 아니요. 금하지 않는 사업은 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데 하나님 모시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저 혼자 온업을 하다 보니까 처음에 시작은 제가 농사를 지었지마는 마지막에는 농사에게 제가 짐을 받았습니다.
농사가 저를 지었소, 농사가 저의 조작물이 되었지마는 제 제작물이 됐지마는 저의 산물이 됐지마는 마지막에는 온사의 산물이 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농사의 산물이 제가 되다니 처음에는 제가 포도주도 다제가 만든 것이요. 마지막에는 포도주의 소산입니다. 포도주가 노아를 만들었소. 순전히 노아는 포도주대로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포도주가 노아 만들었소. 이러고 나니까 뭐 됐소.
이러고 나니까 벌거벗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의 형식 상징 계시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벌거벗었소, 별수 없이 그 사람이 하나님 모시지 안하고 사업하면 처음에는 제가 사업을 경영도 했지마는 마지막에는 그 사업에 피동되는 그 사업의 소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 이계명의 우상이라 하는 것은 뭐입니까. 내가 만든 것이 우상 된다. 어떤 자가 제가 만들어논 업을 거석해놓고 이 업 아니면 나는 못산다. 이 업에게 내 생명이 달렸다 그 업을 자기의 모든 운명과 행복이 다 거게 달린 줄 알고 그것을 제일 숭배하는 그것이 우상숭배요, 우상숭배자 이러니까 나중에 그것에게 피동되니 포도주대로의 사람되고 말았어, 그래서 모두 말하기를 처음에는 사람들이 술을 먹지마는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 이랬어, 삼켜진다 그 말이오. 포도주의 사람이 되고 말았소. 그러니까 별수 없이 그 마지막에는 벌거벗었어. 그 수치스러운 사람이 됐다 그 말이요. 오늘도 이 지금 창세기 이렇던 순서로 이번에는 이거 간추려서 그저 간단하게 이래 해 가지고 있는데 보면 계시록 보담은 창세기가 제일 요긴합니다.
그때 제일 같추려서 제일로 중요한 것 이로 중요한 것 방편을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열해서 우리에게 주셨어. 일로 안되니까 이를 내고 이가 안되니 자꾸 퍼져 나갑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아들에 들쳐놓고 그 참 이러니까 마음에 안타까와서 견디지 못하는 그런 아들도 있지마는 조롱하고 멸시하게 됐다 그 말이오. 그럴 것 아니요 벗고 있으니까 벗고 있으니까 멸시하고 조롱하게 됐다 이기요. 다윗이 벘었기 때문에 그 아들이 멸시하고 조롱하지 안했습니까? 그 아들이 다윗을 죽일라고 하기까지 그렇게 멸시를 하고 조롱했다 그 말이요. 그건 다윗이 옷을 벌거벗어 그런기라. 그러면 하나님 처음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인데 하나님 잊어버리고 정치하다 보니까 그 정권 가지고 그 정치 행정하다 보니까 처음에는 제가 행정했지마는 나중에는 그 행정의 소산이 되고 말았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이 다윗이 벌거벗지 안햇소. 다윗이 그 도덕이고 예의고 체면이고 의리고 다 벗어버렸다 말이요. 이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도 멸시를 당할 뿐 아니라 가까운 아들에게까지 멸시를 당했지 죽이라고 까지 했지, 내나 그거와 똑 같은 이치입니다. 함에게시와 천대를 당했어, 멸시와 천대를 당했으면 멸시 천대받는 것이 당연한대 아들로서는 그렇게 하는 일이 아닐지라도 자기로서는 멸시 천대받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그 말이요. 하나님과 동행했으면 내가 어떻게 해서 이래 술의 사람이 되가지고서 술이 벗으라는 대로 벗고 정신 없이 미치광이가 되어 가지고 내가 이렇게 됐느냐 하나님을 자기가 그때 생각만 해도 반성하고 거시서 탄식을 하고 하나님앞에 자복해서 언제 뭐 아들이 자기 벗은 몸이라고 이렇게 훼방하고 흉본 것 그거 생각없이 하나님 앞에 지금 매달려서 거게 까지 나아가지 않했을 것인데 하나님돠 동행하지 안하고 하나님 잊어버리기 때문에 이제 일대 일로 그가 자기에게 잘못한다 해가지고서 저주를 해서 이와 같은 대대 멸망을 하는 이런 일을 저질렀다 이기요.
이것을 우리에게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 버리고 믿는 사람들이 무슨 업을 하든지 제일 귀한 것은 목회업이겠습니다. 목회 업을 해도 그렇습니다. 상업을 해도 공업을 해도 무슨 업을 해도 믿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안하고 업을 하면 처음에는 제가 업을 시작했지마는 마지막에는 업의 사람이 됩니다. 업이 주일 범하라 하면 주일 범하고 업이 거짓말 하라 하면 거짓말하고 업이 꾀를 쓰라하면 꾀쓰고 업이 가장하라면 가장하고 그 업에 맞춰서 사는 그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나면 별 수 없이 저는 벌거벗은 사람되고 맙니다. 그게 술취한 거라.
이래서 계시록에는 음행의 포도주라 포도주라 자꾸 그렇게 말했어 포도주라는 것 포도주 입니까? 그것이 모든 세상 사상 교훈 가르치는 것인데 그러면 거게 피동되면 결국은 옷도 다 벗고 자기에게 자기의 수치를 덥고 가룰 예의도 벗고 체면도 벗고 양심도 벗고 도의도 벗고 대속도 벗고 주님하고 다 벗는기라 지혜도 벗고 다 벗어 이러니까 완전히 자기에 대해서는 반성하는게 하나도 없고 전부 눈은 남에게만 기울어져 있지 자기에 대해서는 눈이 기울어지지를 않는다 그 말이오.
그라고 나면은 자기에게서 가까운자에게 부터 멸시 천대받는다, 멸시 천대 받을 때에 왜 멸시 천대를 받느냐 하여 멸시 천대하는 그에게 복수해서 다시는 거둘래야 거두기 어려운 그런 저주의 행위를 하게 된다 하는 것을 여게 표현한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저 정신 없이 날뛰고 울렁거리고 떠들기만 해가지고는 안됩니다. 그 좋은 은혜지마는 거기에 도취되면 그 심령이 하나님을 향하지를 못해, 거기까지는 좋지마는 그 다음은 안돼, 요새 보니까 기독교 영화가 많이 나오는데 기독교 영화에 그 모든 성남 성녀들의 영화가 나오는 것은 가서 보십시오. 볼라면 보십시오, 그것은 죄되지는 아니합니다.
송양원목사님의 영화가 나왔다 뭐 또 '죽으면 죽으리라' 영화가 나왔다 하는데에, 예, 보기는 보지마는 성경에 기록한 인물들은 안됩니다. 그거는 계시기관으로 하나님이 쓰신 것이요. 그것은 장사꾼들 돈벌이 하는데에 거기에 이용되면 안되는 것이고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인물이 크냐 하나님이 그 계시에 이용했기 때문에 그게 대한 한 사적을 말한 그 한 획도 천지가 없어지는 것보다 그 획 하나가 무섭습니다. 그런데 마구 반거짓말로 이래 섞어 논 그거 안돼, 이러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흥회 열 번 하는 것보다 영화관에 가가지고서 한번 영화보는 것이 훨씬 교인들이 은혜가 있다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 그것도 은혜가 되지요. 제가 처음에 예수 믿은 지 그 얼마 되지 안했었는데 그때 왜정때입니다. 왕중왕이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그때 그 부흥회하고 사경회하고 난 다음에 자 왕중왕 영화가 있으니까 다 은혜 받으러 가자 하며 나도 뭐인지 모르고 따라갔소. 가니까 그 왕중왕,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보고 마구 곡성이 진동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그때 그 많이 산골서 하는데 모였는데 마구 울면서 곡성이 진동해, 은혜 아닙니까? 하지만 그것은 못씁니다. 왜 그것을 보고 해 놓은 사람은 자기가 눈을 감아도 그것만 보지 거게서 이 예수님께서는 글씨 하나도 써놓지 아니하시고 이 모든 형상을 떠나서 이 신구약 성경가운데에 영감가운데에 거게서 우리에게 소개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되는데 거게 가다가는 그 영화 그까지만 가고서 기도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하나 형체보고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 안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이 그린 것을 초상이니 성화라 하는 그런 것을 제가 반대해서 이 결국은 그 안을 뚫고 들어갈라 하는 사람에게는 그게 가로막는 우상이 되고 만다. 우리는 이 상상으로 또 영감으로 이래가지고 주님을 만나서 그 무형의 존재요 예수님은 그 성경 가운데 있는 예수님의 그 66권은 예수님의 그 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게서 예수님의 그 신성 예수님의 그 인격성 예수님의 그 속성 하나님의 속성 그분을 상대해서 우리가 가야 되는데 이 보이는 것 가지고 가로막는다 그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보이는 운동 그런 것은 이 처음에 이 전도로서는 좋지마는 전도 받은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갈라 하는 데에는 그것은 자로 막힌다는 것을 자기가 체험하지 못하면 어두운 심령이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