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 13:18
노아의 신앙
1981. 6. 3. 수요일 새벽
본문: 창세기 9:20-27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요사이는 참 복잡하고 어지러운 때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고 명철하고 또 광문 다학을 해서 그 시야가 넓고 문전이 많다 할지라도 인간으로서는 자기 길을 바로 찾아서 걸어갈 수 없도록 점점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사이비한 것이 많고 거짓이 많고 참 길은 자기에게는 하나뿐인데 갈레길들이 심히 많게 이렇게 복잡하고 분주하게 세상이 되어 가는 것은 우리가 원망이나 불평을 할 것이 아니고 그것을 만드신 이가 주님이십니다.
그렇게 만드시는 그 이유는 택한 자를 연단해서 능히 영계의 천군 천사와 물질계에 있는 모든 것을 통치하며 관리하며 영원히 그들을 기룰 수 있는 은혜에 기관으로 교회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두는 중보자로 해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영원한 천국을 영원토록 계속하는 그 터전되는 인품을 인질을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언제든지 그러하지마는 인간의 모든 지능이 차차 성장되갑니다. 교회 안에 신령한 지식도 점점 듣고 연구하고 배워서 성장해 가고 또 세상 모든 것들도 다 진화되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하느냐?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면 바른 것을 찾지 못하고 또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바른 길을 갈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만드실까? 그것은 전적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을 신망해서 하나님에게 하나씩 둘씩 귀속 연결을 되게 하려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원인이 하나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 천국에 있는 모든 교회 하나님의 사람들 뿐만이 아니고 그 외에 있는 모든 것도 그 나라에서는 참으로 하나님 한 분으로 전체가 동하고 정합니다. 그분 한 분으로 움직입니다.
(속 잠 깨야 되지 안 깨면 들어야 몰라. 응 저분 말이오. 저분 졸고 있는데) 그러기에 거게는 두 사상이 없고 두 소욕이 없어서 마찰이나 거리낌이나 그런 것이 없습니다. 또 그 나라에는 언어가 없습니다. 다 같으니까 아니까 같다면 개성이 없으니까 무슨 미가 있겠느냐 하지마는 모든 인간이 억만분의 일도 발견하지 못하고 모두 좋다고 야단지기는 그 모든 것을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요. 그 하나님과 같이 되기 때문에 미가 없는 것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이 아는대로 하나님이 비판 평가 경영하는대로 그대로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세상에서 한 번 했으면 그만침 실력있고 열 번 하나님이 이것을 보고서 하나님은 이것이라. 이것은 예를 들면 검다 했는데 자기도 거 따라서 검다. 어떤 사람은 거게 따라서 하면 검다 할터인데 자기 생각대로 희다 이래 했습니다. 붉다 이래 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사는 데에서 하나님의 지식에 피동되는 그 연성이 되고 또 하나님의 능력의 피동되는 그 연성이 되고 하나님의 온갖 그 신성 신성의 피동되는 그 인격성이 되어가는 그것이 한 번 된 것은 그대로 영생입니다.
이러니까 한 번 두 번 되어서 모다 가지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는 것이 열 개가 있고 한 사람은 백 개가 있고 한 사람은 억억만 개가 있고, 이런데 어떤 사람은 한 개가 있다 하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 가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동하고 정하는 것이 하나밖에 세상에서 연습해 가지고 가지 안했기 때문에 그것만이 자기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있으니까 그것이 백 년만에 돌아오면 그 사람은 백 년만에 한 번 하나님과 함께 동하고 정해서 역사할 수 있습니다. 천 년 만에 돌아오면 천 년을 기다려야 천 년만에 한 번 돌아오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면 하루 종일 만 가지가 나왔는데 만 가지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연결됐기 때문에 만 가지 다 자기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실력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으로 인하지 아니하면 안 되도록 하는 것이 그게 뭐이냐?‘너희들이 시험을 받는 것은 금을 불로 연단하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이 있는 연단이다.’무슨 연단인데? 믿음의 연단이다. 믿음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하나님께 피동 연단이다.
자기가 하나님하고 서로 같은 의사가 맞아서 같이 일을 했습니다. 일을 했으니까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에게 피동된 것으로 된 줄로 자기도 알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차차 차차 하나님께 피동됐으면 무난히 통과하고, 피동되지 않고 자기 주관과 하나님의 것과 둘이 합해 가지고 통과했으면 반밖에는 통과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나님과 자기와 합해서 이렇게 나갔지마는 실은 자기가 주체가 되고서 하나님은 거게 좀 제가 제 주관으로 보태서 이래 가지고 나갔으면 하나님께서 그 현실을 만들어 줘서 결국은 자기대로 가버리고 하나님은 아주 배반해 버릴 수 밖에 없는 요런 그 현실을 만들어 가지고 자꾸 연단합니다.
해서 그 모든 하나님이 만드신 현실이라는 것은 얻는 것도 되고 얻었나 못 얻었나, 됐나 안됐나 하는 그것도 되고 또 못 된 것을 새로 만들어 되게 하는 것도 있고 그렇게 파괴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이 지식해 주시는 그 지식에 연결되지 안하면 도무지 구별할 수 없도록 그렇게 사이비한 것 복잡한 것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고 또 하나님의 능력과 연결이 안 되면 그 세력을 능가 할 수가 없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자꾸 현실을 만들어서 우리를 연단시킨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현실은 하나님과 결합이 안 된 것을 결합을 되게 하기 위한 현실이요. 하나님과 결합이 되지 안했는데 자타가 된 줄로 안 그것을 안됐다는 그것을 발표시키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연결을 가질라고 하면 어떻게 가지느냐? 반드시 연결을 가질 때에는 값을 내야 연결을 가집니다. 값은 뭐이냐? 값은 자기 내놓은 것이요.
자기 부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과 진리를 그 현실에 나타냈을 때에 자기에게 이 진리를 내가 내 진리를 만들고 요 진리와 나와 하나 될라고 하나님과 나와 하나 될려고 하면 여게는 돈이 손해가겠는데, 돈 손해 안 볼라고 하면 둘 차지 못하고 둘을 찾이 할라 하면 돈을 손해봐야 됩니다.
아 또 어떨 때에는 이 둘을 하나님과 진리를 차지 할라고 하면 명예가 손해가겠고 이거 주먹을 내고 한번 나도 한번 해 가지고 권위 한번 보여야 되겠는데 이거 억울하게 매장을 당하고 푹 죽는 듯이 있을라고 하면 그래야 하나님과 진리를 차지하겠는데 이걸 또 손해 안 볼라면 하나님과 진리 내놔야 되겠고, 이러니까 그럴 때문에는 하나님 때문에 진리 때문에 속을 썩우고 있고,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고,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손해를 당하고 있고,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매를 맞고도 복수하고 싶지마는 복수를 못하고,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이거는 번연히 살 수 있는 길이 있지마는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생명을 내놓는 수 있다 말이오. 다니엘은 하나님과 진리 때문에 생명 내놓지 아니했습니까.
이렇게 해서 내놓는 것을 가리켜서 뭐이냐? 값을 낸다 그말이오. 응 그것이 파는 자에게 가서 기름을 사라. 그것이 기름 사는 것입니다. 그게 기름 댓가 내고 기름 사는 것이요. 그러면 자기 부인하고 하나님 인정하고 자기와 하나님과 바꾸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러기에 우리 현실은 이런 복잡한 현실을 자꾸 줍니다. 갈수록이 자꾸 복잡해집니다. 우리가 생각하기를 내가 이렇게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서 이래 놓으면 이제는 그 다음은 잿만당 올라 갈때까지는 수월하지마는 되지마는 고개를 척 넘겨 놓으면 그는 수월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마지막 죽는 그 시간 그것이 최고봉입니다.
제일 높은 산만당이요. 이래 가면 갈수록이 우리의 현실은 복잡해집니다.
사이비한 것이 많습니다. 구별하기 어려운 점점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 더 어려운 것이 나오고 비판하기 더 어려운 정평 정가한 것이 더 어려운 것이 나오고 또 거게서 하나님과 진리를 내가 모시고 지키기 더 어려운 것이 자꾸 나오는 줄 알아야 됩니다.
이러기에 이 복잡한 현실을 가는 우리들이 이 신구약 성경 말씀만이 우리 발에 등불입니다. 우리 발의 등불이요. 우리 발자국을 어떻게 떼놔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등불같은 빛입니다. 천하에 있는 많은 지식들이 있지마는 이십세기 과학을 자랑하지마는 그거는 우리 가는 길을 어둡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과학의 제일 발단에 걸었던 그 원자 학자 강도의 그 원자를 던지게 한 그 학자가 던지고 난 다음에 자기가 자기 갈 길을 가지 않고 영원히 인간 살생의 심판을 받아야 된다는 그걸 알고 자기가 그것을 다 버리고 삼 년 동안을 근신 하면서 그가 돌이켜 회개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이러기에 이 신구약 성경만이 우리 발의 등불이요. 또 우리 안에 우리를 진리와 성령으로 살려준 이 영감만이 우리 눈입니다. 우리 밝은 눈이요. 그 어두워도 눈이 밝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은 보니까 나는 어두워서 도무지 모르고 터덕거리는데 보니까 젊은 사람은 뭐 이 어두운 것도 별 가리지 안해. 이 눈이 잘 보이는 모양이라. 그 과거에 우리도 그랬어. 응 등불보다 눈 밝은 기 낫고 또 어두운 것보다 등불 있으면 낫지요.
이러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지지 않고는 자기 앞길을 어떻게 가야 될 줄을 모릅니다. 또 성경 말씀 가지고 자기가 자기 현실에서 바로 걸어가야 될 것을 안다 할지라도 등불 정도요. 등불을 암만 밝게 들었지마는 눈이 흐미하면 됩니까. 눈이 흐리면 어름하지 어찌 아요.
그래서 우리를는 이 성경 말씀을 준하지 안하면 안 되는데 여게 노아가 천하의 의인입니다. 당시의 완전자라 했습니다. 완전자요 의인이지만 그 사람은 천하를 정죄하고 홍수에서 구원얻었지마은 구원얻고 난 다음에는 큰 실수 실패 범죄를 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자기가 정죄해서 지금부터도 흑인종은 해고나지 못합니다. 흑인종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그들은 천대받고 멸시받고 고난당하고 그렇게 천한 인종으로 살게 됩니다. 맏아들 셈은 황인종이요. 여게서 노아가 예언한대로 하나님의 장막이 거게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구원이 셈의 자손에게 있단 말이오. 야벳은 창대케해서 셈의 장막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셈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했소. 야벳이 세상에서는 창대해진다.
뭐라고 해도 백인종이 예수님이 재림 때까지 세상 세력은 잡습니다. 둘째 아들 함은 종과 저주받아서 종이 됐어. 흑인종은 재림 때까지 가장 천한 인종이 됩니다. 지금도 그렇소. 제일 삐뚤어진 종교를 많이 믿는 것이 그들이고, 미신 많은 것이 그들이고, 가난한 것이 그들이고, 굶어 죽는 수많은 것이 그들이고, 비참한 기 그들이고, 악을 행하는 것이 그들이고, 이렇게 큰 실수를 하기를 노아가 했는데, 노아가 이렇게 처음에는 그런 의인이 된 것이 딴거 없었소.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가 고독도 견뎠고 독보도 걸어갔고 또 하나님의 경고하심도 감당했고 준비도 했고 하나님과 동행해 보니까 하나님보다 더 좋은 이가 없거든 그보다 좋은 것이 노아에게 없었어.
하나님과 같이 가다가 보니까 하나님 좋은 걸 택해야 돼지. 저 좋은 걸 내 놓을 수가 없어. 그렇지 않소.
큰 예를 들면 대통령을 자기가 모시고 가는데 대통령 좋아하는 그걸 택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좋은 걸 그걸 택할 수가 없을 기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 좋아하시는 걸 택할 수 밖에 없었고 또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 그는 세상에 물들 수가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그분 말하는대로 안할 수가 없었지.
이랬는데 성공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요 사실을 믿고 요 사실을 인정하고, 인정 안해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십니다. 자기 주관으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신 어떤 분이신데 이분이 자기와 함께 계신 것을 계시고 있는 이것을 자기가 인정하는 것인데 인정하면서 인정하니까 인정을 어느 정도 할긴가? 인정을 하는 그것이 이분의 눈을 거슬릴 수가 없고, 이분의 성미를 거슬릴 수가 없고, 이분이 뜻을 어길 수가 없고, 이분을 대항할 수가 없고 자연히 이렇게 되어지는 그 결과가 열매가 맺기까지 해야 그게 맺어야 이분이 참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입술로는 함께 계십니다, 계십니다, 해도 함께 계시는 것이 자기에게 인정이 되나 안 되나 하는 그것은 자기의 되어지는 행동을 제가 보면 되고, 자기 그 주관이나 감정이나 그걸 보면 될 수 있다 그기야.
아주 지식에 아직까지 유치한 그 어린아이도 동무들하고 싸우다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 있는데 쫓아가서 턱 안기고 난 다음에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지마는 안기고 난 다음에는 그 동무들에게 조롱을 하면서 ‘아나 때리라! 아나 때리라! 아나 때리라!’조롱을 할 수 있는데, 왜? 아버지와 어머니 품안에 들었기 때문에 그까짓거 보다는 아버지 어머니가 강하니까. 이 어린것들이 본능적으로 압니다. 아무리 유치한 지식이라도 이렇다 이기요.
우리가 전능하신 주님이 자기와 함께 자기를 보호한다고 하면 두려울 것이 뭐 있으며 또 생명까지 애끼지 않고 주신 이분이 자기와 함께 계신 것을 인정하면 무엇이 모지란다고 궁핍성을 느낄 것이며 또 이분이 자기와 함께 계신다면 자기가 무슨 고독이나 그런 것을 허무나 허젓한 것이나 공허감이나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아 이분이 이래 계시는데 이분이 계시는데 이분의 마음에 거슬리고 눈에 거슬리는 그런 일 할 수가 없다 그말이오. 동행한 사람도 하나님과 동행을 노아같이 잊어버리기 쉽다 말이오. 잊어버리면 실수해. 다윗도 잊어버렸고 노아도 잊어버렸는데 다윗은 잊어버리고 잊어버림으로 말미암아 큰 실수하고 난 다음에 이전보다 몇배 그는 깨어서 좋아졌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내 뜻이 합당한 다윗을 만났으니 내 모든 뜻을 이루겠다”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신약에 인용해 놨는데 그것은 다윗이 실수하고 난 다음에 경성하고 난 다음에 그 다윗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 이렇게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또 원수가 되어 있다가 예수님이 공로로 인해서 동행할 수가 있다 그기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증거는 하나님 모셨다 그말이오. 하나님 우리 밖에 있습니까? 우리 영 안에 계십니다. 우리 영 안에 계시는데 동행이라 말은 우리 마음, 우리 몸둥이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오.
우리 마음과 몸둥이가 영 안에 계시는 중생시킨 이분이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증거는 뭐이냐? 자기가 자기된 온유를 보면 알 수 있소.
온유와 조급과 비급과 담대를 보면 알수 있다 그말이오. 자기가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가 이것을 보면 하나님과 지금 제게 동행을 하고 있는지 입술로만 말하고 있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지 그걸 알 수가 있고 또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동은 뭐이냐? 그분이 동행할 때 동하고 정할 때 정하여 그분이 내게 대한 뜻을 말씀할 때에 그 뜻에 명중이 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행동에 결실이라 그말이오. 이기 동행인데, 노아가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던 자가 동행을 잊어버리고 농업을 했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잊어버렸느냐? 농업을 시작할 때에 잊어버렸을까? 농업을 시작할 때에 잊어버리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이거는 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왜? 하나님 앞에‘내가 뭘 해야 되겠습니까?’이싸니까 하나님께 물었을 기라 말이요.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고 난 직후니까. 이랬는데 그분이 농사를 했는데 농사하는 가운데에서 차차 차차 농사에 열중하다 보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잊어버렸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농사에 열중했습니다.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나쁩니까? 잘했소. 포도주를 담았습니다. 포도주를 담았습니다. 잘못했습니까? 잘했소.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마셨으면 잘못했습니까? 아니 식물로 줬으니 마신 일 잘했소. 이랬는데 취해서 벌거벗었소.
하나님이 포도를 심으라는 것도 허락하시고 하나님이 포도주 먹는 것도 허락하시고 먹는 그거는 뭐이냐? 포도주를 먹어 자기 식물로 줬기 때문에 자기 식물로 먹어. 자기 식물로 이렇게 먹어서 자기가 포도주를 만들었고, 자기가 그것을 먹어서 자기 영양을 삼았고 이랬지만 그 다음에는 마지막에 노아가 포도에 취해 가지고 벌거벗었으니까.
아 그 벌거벗은 노아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누가 만들었소? 벌거벗은 노아로 누가 만들었소? 포도주가 만들었소. 이기 그 다음에는 포도주의 재작물이 됐습니다. 포도주의 소산이 됐소. 포도주의 소산이 되고 난 다음에는 뭐이요? 인자 그러니까 포도주에게 삼켜졌지.
아 포도주 먹어라고 하니까 포도주에게 먹혀져 버렸어. 포도주의 것이 되고 포도주에게 먹혀졌어. 이러고 나니까 두말할 것 없이 벌거벗었소. 여게 벌거벗은 요것으로 지금 이리 된 것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영원전 하나님 목적을 정하시고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해서 예정하신 그 예정 순서입니다.
응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예정한 것이요. 그러니까 노아가 포도주 안 먹을 수 없고 또 그렇게 하니 그렇게 안할 수 없고 이것이 하나님이 예정으로 된 것인데 이것이 우리가 구원 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것은 다 우리의 구원 도리를 계시해 주는 기관인 것입니다. 그가 벌거벗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자기가 하는 업에 열중하다 보니까 공부하는 자는 공부하는데 열중하다 보니까, 양성원 학생들은 지금 성경을 지금 공부하고 있는데 성경공부해도 거게서 하나님 모시고 할 수 있고 하나님 또 버리고 성경공부 열중할 수 있습니다. 성경 공부 열중하는 그것도 여기 노아가 농업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요. 예.
요새는 지금 양성원 학생들이 성경 그 읽기를 지금 하고 있으니 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과자 대접하던 이분들도 대접하는 기 좋겠고 또 그 식사에 좀 영양을 채워줘야 되니까 대접하는 분들도 대접할 분들도 구역장에게 그것을 줘 가지고 구역장은 또 배종일 조사님에게 주면 거서 모아가지고 저 한테 물으면 양성원으로 이양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공부를 일주간 동안에 그 한 문제 했으면 그거 답안을 일주간 동안 다 해야 됩니다. 어쨋든지 그면을 연구하면서 일주간 동안에 그 신구약 성경을 한벌 읽어야 그게 된다 그말이오. 한 번이야 그거 빼지. 일주일 한 번 읽고 또 거게 있는 그 문제를 연구해야 되는 그러니까 빠작 빠작 말라.
그러니까 고기도 해 대접을 해야 되고 해서 먹어야 되고 자꾸 영양을 하나님의 권능도 있지마는 다니엘같이 하면 문제없지마는 다니엘같이 해도 여기는 안 돼.
우리가 뭐 부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거는 먹고 해야 되는 것이지 안 먹어도 된다 하는 그 다니엘 하는 것을 쓰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고 한 요행심이기 때문에 안 되요. 그래 쳐박아 둬야 되지. 그러니까 모두 대접할 분들은 돈을 내십시요.
그래 성경을 읽으면서도 성경 읽는데 열중하다 보면 하나님 잊어버립니다.
하나님 잊어버리요.
내가 이 서부교회 와 가지고 그전에 내가 실수한 것 큰 것 둘을 말했는데 셋은 말했는데 셋을 말했는데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말 안해도 여러분들이 거의 알 것입니다. 내가 그거는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내가 시작해 가지고 해 가지고 난중에 그 수치를 당했다 이기야.
하나는 내가 말해줍니다. 신이섭씨하고 예배당 지를 때에 시비한 것 그 할 일이 아닌데 우리가 그때 이기기는 이겼소. 이겨서 세상적으로는 권위가 들어놨지마는 실은 그 할 일이 아니라 말이요. 나로서는 할 일이 아니라.
목회하면서 목회에 자꾸 열중하고 예배당만 지어야 되겠다 하니까 그만 그때는 하나님 잊어버리고 동행 안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안한 걸 내가 그 뒤에 알았다 이기야. 목회를 하면서도 그래. 하물며 장사이겠소, 하물며 돈별이겠소, 하물며 세상 정치이겠소, 하물며 세상 것에 공부하는 것이겠소.
성경 공부하면서도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동행을 버리고 하는 일은 성공이 되든지 많이 성공 되든지 켜졌든지 적어졌든지 간에 얼마 안 가서 난중에 자기 하는 그 일이 자기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 일이 자기를 지배하게 되요.
이 포도주가 주정이 노아를 지배한 것처럼 노아가 포도주에게 지배당한 것처럼 자기는 그 업에게 지배당합니다. 오늘은 이것 참 주일이지만 내 업이 지금 절단나느냐 어짜느냐 문제이니 오늘 주일은 이거 어찌할 수 없다 기가 차지마는 그 업이 들어서 주일을 범하게 만드요. 돈이 들어 주일을 범하게 만드요. 또 자기의 있는 맺어 놓은 정치가 들어서 행정이 들어서 자기 지위 권세가 들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을 이거는 알고 어기지 안하면 안 되게 만듭니다.
그러면 벌써 자기가 이 세상 살이를 어떤 살이를 하든지 그 살이 그 살이에게 자기가 피동되어서 그 살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에게 거슬린 줄 알고도 그걸 안 할 수 없는 그 세상이 어떤 살이라면 그것이 우상이 됐어.
그것이 자기에게는 우상이 됐어. 벌써 자기에게는 자기를 벌거벗게 만들 그 포도주 그 주정에 취하게 된 것입니다.
취했으면 그러고 난 다음에 옷벗지 안했소. 취했으면 옷벗은 것, 옷벗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하신 이 사죄 죄없게 한 것도 사죄도 잊어버렸고 칭의도 잊어버렸고 이 대주재와 자기와 화친된 이것도 잊어버렸고, 이러니까 자 죄에 대해서 잊어버려서 이제 죄있는 것이 벗은 것이지 죄없는 옷을 입었는데 벗으니까 죄가 그대로 나왔지. 의를 입었는데 의를 벗어버리니까 불의가 그대로 나왔지. 하나님과 화친된 이걸 벗어버리니까 하나님과 원수된 그대로 나왔지. 이기 벗은 것이요.
응 신조도 벗어버렸고, 교리도 벗어버렸고, 신앙 인격도 벗어버렸고, 양심도 벗어버렸고, 모든 사람의 감화 감동도 벗어버렸고, 덕도 벗어버렸고 다 벗어버렸다 그말이오. 벌거벗어 버렸어. 벌거벗으니까 자기에게 제일 가까운 자에게 멸시 천대 받았지.
함에게 멸시 천대받지 안했소. 제일 가까운 자에게 멸시, 천대, 공격, 대적 받았습니다. 그 천해졌소. 뭐 그만큼만 했으면 됐는데 멸시 천대 받았으면 자기가 받울 걸 받았기 때문에 심판거리를 마련하지 안하겠는데 멸시 천대받고 난 다음에 어데까지 나갔느냐? 함을 저주해 버리고 나니까 함을 저주했을 때에 심판거리가 생겼다 말이오.
멸시 천대받을 때에 거게서 지당하다 내가 이런 멸시받고 천대받는 거는 지당하다 지당할 줄 알고 돌이켰으면 뭐 심판거리 없겠지. 없지마는 함을 저주했거든 그건 제게 원인이 제게 있는데 제가 포도주 먹고 취해서 그렇지 않해 벗고 있지 안했다면 둘째 아들이 그렇게 안하지.
그런고로 우리가 이 말씀을 잡아야 됩니다.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 없소. 그 내가 여 운동장에 가봤는데 그 그들이 지금 뭘 어리석게 얼뜩 가서 보면 막 궁창 궁창 그 이렇게 막 찬송 막 이렇게 하고 쩍쩍 조직과 이 모든 분위기 이기 되어 있으니까 그게 힘인 줄 아요. 아니요. 그 사람들의 힘이 그게 아니요. 그 사람들 힘이 그거 아닙니다. 그것뿐이라면 그 사람들도 열 적고 나중에 힘없어 다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뿐 아니요.
그 안에 있는 것은 뭐이냐? 그들이 그래도 금식기도 하고 금식기도 하고 열심히 전도 할라 하는 이걸 가지고 이 두 가지가 그들에게 힘입니다. 전도 금식 그것도 힘이요. 그 힘이 암만 할라해도 그까짓 힘 가지고는 소용이 없어. 다 인간 주관의 힘, 인간에게 있는 힘이지 인간에게 있는 힘이지 다른 힘이 아니야.
그런데 그 속에 그래도 그분들이 유지되는 것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이래서 하니님을 믿으라는 이것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그래도 됩니다.
이기 됩니다. 힘이 그 힘이요.
그 힘인데, 우리는 생각할 때에 자 그러면 그 운동이 있는데 거게 보니까 기도하는 힘도 있고, 조직의 힘도 있고, 단합의 힘도 있고, 전도의 힘도 있고, 금식기도의 힘도 있고, 하나님 말씀에 힘도 있고 다 모든 것이 구비하게 이래 있는데 어느 것이 지금 주체가 되어 가지고 끌고 가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어느 것이 주체가 되어 가지고 끝고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지막에는 최종을 누가 끌고 가겠습니까? 자 그 주체되는 게 끌고 가겠소? 제이가 끌고 가겠소, 제삼이 끌고 가겠소, 제오가 끌고 가겠소, 제육이 끌고 가겠소? 누가 끌고 가겠소? 제일이 끌고 가겠소, 이가 끌고 가겠소, 최종은 누가 끌고 가겠소? 예. 거게서 제일 강한 그것이 끌고 가겠소? 제일 강한 주최는 제일호가 끌고 가겠소? 이호가 끌고 가겠소? 이호가 끌고 가겠다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봐. 일호가 끌고 가겠지요. 일호가 끌고 갑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일호가 끌고 갑니다.
그러면 이 운동도 일호가 뭐이냐? 여게 주체가 뭐이냐? 주체가 뭐이냐? 거게는 하나님의 진리도 보니까 증거하는 진리도 있고, 하나님에게 대한 진리도 있고, 금식기도도 있고, 또 전도할 열심도 있고, 조직도 있고, 찬송도 있고, 열심도 있고, 돈도 있고 다 있어. 다 있는데 보자 여게 주력되는 주체가 되는 힘이 뭐이냐 하는 것을 우리는 봐야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것 다 봐야 돼.
이 서부교회는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이렇게 되어지는데 이 서부교회는 주체의 힘이 뭐이냐? 그걸 봐야 됩니다. 주체의 힘이 뭐이냐? 저 사람이 저렇게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는데 저 사람의 신앙의 힘의 그 주력이 뭐이냐? 그걸 살펴야 됩니다. 주력 그걸 보고 비판합니다. 이거는 얼마 가면 절단난다. 이거는 얼마 동안 계속하겠다. 그것을 하는 것이 뭐이냐? 그것은 그 사람이 주체력 그것을 보고서 하는 것입니다. 예.
그러기에 요 진리의 말씀 요 말씀에 입각하지 안하면 헛일이요. 그 여러분들이 봐서 어데가 주체가 그분들에게 주체력이 주력 뭐인지 여러분들도 비판을 가질것입니다.
이 노아에 대한 요 성경에 간단하게 요래 했으니까 나는 내가 지금 업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에게 피동되어서 이 업을 하고 있느냐? 지금도 하나님과 동행해서 하나님하고 같이 하기 때문에 업 이거는 하나님하고 나하고 둘이 붙은 이것이 그 원 주체고 업 이거는 소소하기 때문에 이 업 이거는 던질라면 던지고 취할라면 취한다. 하나님이 던지라면 던지고 취할라면 취한다 이럴수 있는지 하나님을 버리고 진리를 버려도 이 업을 버릴 수 없게 되어 있는지 그러면 우상이요.
그러면 일단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꾸 시험할 것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시험할 때에 하나님이냐 하나님과 진리냐 업이냐 할 때에 시험이 오면 딱 떼버려야 됩니다. 그걸 떼 버리고‘아닙니다 하나님과 진리가 내 소망이요 내 힘이요 내 주지 이 업이나 뭐 지워나 권세나 뭐 이런 것이 뭐 내 것이겠습니까?’딱 떼버릴 때에 주님은 뭐라 하십니까?‘이제야 내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더 바라보고 더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알았다.’이제야 이삭을 번제로 드리니 내가 알았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또 철수하십니다. 했다가 또 얼마 지나가면 또 변해지면 또 하나님이 또 시험하시오. 하나님이 시험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면 실패가 없어. 이기 조금 무슨 숨쉬게 되면 달라지거든.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안했기 때문에 노아가 그리 됐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 것은 왜 그러냐? 업에 열중하다 보니까 하나님 잊어버렸다. 열중하고 하나님이 열중하니까 업이 잘 됐다. 업이 잘 됐으나 나중에 그 업에게 업에 소산이 됐다. 업의 제작물이 됐다. 업에 피동됐다. 그 업에게 삼켜졌다. 포도주에게 삼켜졌다 그 말이오. 삼켜졌다. 그러고 나면 뭐 됩니까? 그러고 난 다음 순서는 무엇이요? 뭐이지요? 벗었지. 벗었어. 하나님의 축복도 벗었고, 하나님의 은혜도 벗었고, 그 하나님이 모든 것 다 벗었어. 하나님의 경외도 벗었고,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도 없고, 하나님 눈도 벗어 버렸고, 하나님이 봐야 자기 아버지만 봐도 경관만 봐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보는데 하는 것 하나님 눈 다 벗었지. 다 벗어버렸지, 은혜도 벗었고, 권능도 벗었고, 자비도 벗었고, 자기에게 겸손도 벗었고, 간절성도 벗었고 좋은 것은 다 벗어버렸소. 예. 그러면 천대받지. 누구에게? 가까운 자에게 제일 가까운 자로부터.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