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신앙

 

1981. 5. 27. 새벽(수)

 

본문:창세기 9장 20절∼29절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세에 죽었더라

 

성경에 기록된 일은 우연한 사건을 성경 기자들이 추억해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핍박하는 지식인들은 절대자이시며 전지자이신, 처음과 나중이  없는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몇천 년 전에나, 몇만 년 몇억만 년  후에도 모든 것을 아는 것도 같고, 또 행하시는 것도 같으신 기독교에서 구주로  모시는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기독교가 말하는 성경을 보면 기독교도 다른  종교처럼 조금씩 변화해서 오늘 이만큼 온전함에 도달했다’ 하는 진화론적인  기독교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 같은 온전한 자를 만드시려는 목적을 정하시고 이  목적을 달성하시려고 모든 것을 미리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홀로  억억만년이 아니라 영원까지의 모든 순서나 조직이나 세부적인 윤곽까지도  예정하시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것을 예정하신 그대로  섭리하시는 중에 예수님이 사람되어 나타나셨고, 또 우리 사람들이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데 이것은 예수님 재림 때까지는 계속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하나님이 목적하신 당신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자로 만들어서 천상천하의 모든 피조물의 중보자로 세워서  천군천사도 통치하고 은혜를 입도록 하고, 또 만물들 심지어 곤충까지도 온전케  된 사람들 곧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은혜를 입히시려는 순서로 정한  예정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나타난 것인데, 이 예정은 우리의  구원 곧 하나님이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한 예정입니다. 이 예정은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는 자연이요, 또 하나는 성경 말씀과 성령의 감화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구원이 무엇인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성경을  깨달은 사람들이 자연 만물을 볼 때 성경과 꼭 같은 이치로 기독자의 구원을  알려주고 또 협조하고 또 기독자가 어떻게 망하는 것을 자연이 가르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곤충 한 마리, 짐승 한 마리도 하나님이 구원도리를 가르쳐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소를 기르는데, 소가 소의 지혜를 가지고 소가 할 일을 하면 주인의  사랑을 받고 수명이 오래갑니다. 그러나 소 이상의 지혜를 가져서 소의 본분대로  살지 않고 제 꾀가 있어서 다른 소들은 가만히 있는데 어느 틈에 우리 밖으로  뛰어나온다고 합시다. 다른 소는 갇혀 지내니까 등신인데 그놈은 뛰쳐나와서 제  마음대로 먹고 돌아다니니까 아주 지혜롭고 잘났습니다. 그러면 주인은 소를  붙잡아서 고삐를 단단히 매어놓습니다.

이번에는 이놈이 입으로 끈을 씹어서 끊고 뛰쳐나옵니다. 이번에는 주인이 더  단단한 줄로 매어놓으니까 뛰어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소가 먹지도 않고  마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소를 어떻게 처리합니까? 팔든지 잡아먹든지 할  것이니 결국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됩니다.

이런 것도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칩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가질 지혜를  가지고 본분대로 살면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지만 벌써 다른 지혜를 가지고 자기  좋은 대로 살고, 자기 기쁨이 된다고 무엇이든지 하면 그 사람은 우리를  뛰쳐나온 소와 같아서 하나님도 얼마동안은 용서하지만 마지막에는 징계로  절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자연 이치 속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 이치를 가르치지  않는 만물이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인간들의 마음 구조도 자연계시입니다. 마음도 보면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씨도 내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씨를 가진 것이 보일 때 만일 나도 그 마음을 가졌다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께서 나를 그 사람처럼 미워할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남을 보아서 자기를 깨달을 수 있으니까 나쁜 사람을 볼 때, 악한  사람을 볼 때, 거짓말쟁이를 볼 때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어떤 구원을 보이려고 하시는지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심지어 어떤 색깔이든지 짐승이든지 사건이든지, 우리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고, 접촉되는 것을 당시에는 무심코 지나쳤더라도 오랜 후에  다른 일을 하다가 보면 연상이 됩니다. ‘아, 그때 그것은 지금 이것을 보인  것이구나! 하나님께서는 미리 이런 면에 대해서 경고를 하신 것이지만 내가  몰랐었다!’ 이렇게 하나도 필요 없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창세기 1장에서부터 하나씩 둘씩 증거하는 것을 귀 넘어 들으면 안됩니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 속에 있는데 예수님께서 돌을 굴려내라 하십니다. 옆에  사람들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할 때 주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은 영광을 보리라’ 하시면서  돌을 굴려내라 하십니다. 그럴 때 돌을 하나씩 둘씩 들어내니까 무덤 문이  열렸고, 예수님의 음성이 들리니까 송장이 일어났습니다. 일어났지만 동여  매였으니까 꼼짝도 못하는데 묶인 끈을 하나씩 둘씩 풀어헤치니까 나사로가  자유롭게 걸었습니다. 이런 것도 계시라 말입니다.

이와 같이 창세기 1장에서부터 배워서 우리도 이렇게 자유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밧줄로 동여매고 또 다른 사람에게 매여서 나사로와 같이 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돌담 같은 죄악이 가려있고, 또 우리 마음은 주님  뜻대로 살고 싶지만 이런 저런 세력에 매여있는데 이런 것들을 하나씩 둘씩 풀고  자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요즘 창세기부터 내리 증거하는 이 말씀에서 여러분들이 평소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수건을 하나씩 벗는 것이요, 붕대를 풀어놓는  것이요, 돌을 하나씩 옮겨 놓는 것이 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 나는 이런 죄는 짓지 않았다, 괜찮다!’ 하는  사람이라면 감사하고,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주님 앞에서 고해서 용서받고,  어쨌든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서 양심대로 진리대로 성신의 감화 감동대로 사는  자유자가 되도록 합시다.

자루 속에 든 쥐가 날뛰어도 소용없는 것처럼 우리를 싸고 있는 보자기 같은  죄악에 대해서 깨달은 사람은 보자기를 벗었을 것이고,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대로 뒤집어쓰고 나갈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증거하는 이 말씀도 노아가 우연히 술에 취해서 드러누워 있었는데  지나가던 아들이 실수해서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영원전 예정 가운데서  구원도리를 가르치려고 기록하신 것입니다.

노아가 얼마나 위대한 신앙을 가졌습니까? 하나님이 노아를 들어서 천하를  정죄하시고 노아를 구원하셨는데 이런 신앙가가 성공한 뒤에 이런 큰 실수를  했습니다. 다윗도 성공하고 난 다음에 실수를 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크든 작든 범사에 무엇인가 일으켜보려고 할 때는 실수가 적지만  일단 일으키고 나면 실수하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욕을 얻어먹을 때는  실수가 적지만, 욕 얻어먹던 사람이 욕먹을 짓을 정리하고 ‘이제부터는 욕  얻어먹을 것은 없어지고 칭찬만이 남았다!’ 할 그때에 실수는 더 많습니다.

노아가 아들을 저주해서 대대로 저주받도록 만든 일은 자기에게도 수치가 되지  좋을 것이 있습니까? 물론 그 아들에게 저주하지 않을 수 없는 죄가 있어서  저주는 했습니다. 노아가 저주한다고 저주가 됩니까? 저주받을 일이 없으면  천인만인이 저주해도 상관이 없지만 저주받을 것이 있다면 지나가는 당나귀가  저주해도 그에게는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도 우리에게 계시로 주신 것인데, 사람들은 섰다고 아는 그때에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스스로 섰다 할 때 넘어진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 노아가 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 인류가 멸망받는 가운데 구원 얻은 것은 특별히 은혜를  하나님이 베풀어서 된 일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도 홍수 속에 시체가 됐어야  하는데 주님으로 살았으니까 머리를 들 수 없는 감사로 살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노아 자기가 잘해서 됐다고 생각하다가 넘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에 걸린 것입니다.

실패에서 겸손이 생기고, 가난에서 겸손이 생기고, 고난에서 겸손이 생깁니다.

그러나 평안해지고 성공이 되고 존영하게 되면 사람이라는 것은 이상하게  부패해집니다. 그것을 여기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노아 같은 위대한 사람도  성공하고 난 뒤에는 그렇게 됐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공을 제 힘으로  가졌다고 알면 벌써 마귀에게 걸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벗어나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깨달은 것 중에서 ‘주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셔서 이런 직책을  주셨다! 내가 스스로 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만드셨다!’ 하는 것을 첫째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넘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경제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출세적으로나 또는  목회적으로나 인간을 구원하는 복음적인 면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  덕이 되고 영광이 될 만큼 성공하면 스스로 됐다고 생각하는 시험에서 반드시  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남에게 덕을 봤을 때는 자연히 머리가 숙여집니다. 우리에게 대해서  주님은 항상 같이 계시고, 주님에게 특수한 은혜를 받았으니 주님 앞에 머리  들지 못하는 감사함이 죽는 날까지 계속해야 하는데 그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누구보다도 의로운 줄 알아서 주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함으로 머리 숙여지는 겸손이 없어지니까 이런 실수를 하게 됐습니다.

또 노아가 어디서 실수했습니까? 농사짓지 않았더라면 그런 실수는 없습니다.

포도 농사를 지어서 포도를 담그니까 포도즙이 포도주가 됐습니다. 그것을  먹으니까 맛도 있습니다. 농사지은 것으로 포도주를 담고, 포도주를 먹고  취하고, 취하니까 그런 실수를 했는데 그 실수가 자기 아들을 저주하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공업을 하든지 산업을 하든지 농업을 하든지 그 업에서 실수가 나오고  후배에 대해서 큰 해독을 끼치는 독이 나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그 업에서 찌기와 독소가 나오는 것이 원리 원칙인 줄 알아서 우리도 별스러운  사람이 아니니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노아에게서 배울 세 가지 중에서  첫째는 자기는 은혜로 됐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감사함으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담배 불 얻을 때도 머리를 숙입디다. 주님이  은혜 베푸신 일을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못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나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멸망 받았을 것이라 하는 생각만 했다면 머리를 숙여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생활이 계속 됐을 것인데 이것이 계속되지 않은 데서  실족한 것을 첫째로 배워야 합니다.

둘째는 업을 해야 하지만 업을 하는 가운데에서 적은 실수가 큰 실수로  번져나가서 실수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업에서 우리가 더러워지고 후배와  자손을 망하게 하는 원인이 나오기 쉬운 것을 보여서 우리들을 그런 실패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노아가 자기 업에서 그랬듯이 목회자는 목회에서, 사업가는 사업에서 후배와  자손들에게 은혜의 천국 문을 가로막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이러니까  후배나 자손들에게 말은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 원인이 제게 있습니다!’  하고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업에서  더러워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함이 저주받은 원인은 노아에게 있었지 함에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저주는 자기가 먼저 받아야 하는데 함을 저주했으니 그것은  속단적으로 저주한 것입니다. 그때 ‘아, 내가 술에 취해서 벗지 않았더라면  괜찮았는데…’ 이렇게 미루어 생각했더라면 자기에게 책임이 있었던 것을  알았을 것이니까 속단적으로 실수하지도 않았을 것이라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새벽 기도에 참석해서 자기를 덮어 가린 것을 하나씩 벗어야 합니다. 혼자 성경  보는 것보다도 여럿이 모여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 더 잘 깨달아집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유하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흥분하며 뛰고 굴려도 절대로 구원은 못 이룹니다. 이번에 운동장에서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듣게 되면 복음은 가립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그런 운동과 달리  꿰뚫고 들어갑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행복스러운 가정’이라는 테이프를 들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들어 봤는데, 좋은 말도 많지만 섭섭한 것은 예베소서 5장 22절 이하의  주목적에 대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부부가 재미있게 잘사는 것만 말했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 앞에 흠 없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주목적인데 어쨌든지 아내는  남편 좋아하고 남편은 아내 좋아하라는 것만 말했습니다. 그런 것을 듣고  여러분들 마음이 기울어지고 해이하게 되면 헛일합니다.

잘살면 뭐 합니까? 마구 물고 빨면 뭐합니까? 좋아서 피차 행복하면 뭐합니까?  결혼으로 이루어져야 할 흠 없는 교회는 흠 없는 참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와  인간, 이 셋이 한 덩어리 되는 것이 교회요 이게 목적입니다. 굶어도 헐벗어도  이것만 되면 성공입니다.

어떤 부부는 첫 결혼하고 평생토록 나뉜 부부가 있습니다. 첫 결혼하고 하나님의  감화를 받아서 눈물을 흘리면서 떨어지기 싫지만 미개지역으로 가서 선교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깨달았습니다. 그 사명을 받고 나서 ‘변함없이 천국 문에서  만납시다!’ 하고 서로 헤어져서 각자의 선교지에 충성하다가 평생을 함께 지낸  부부처럼 천국 사업을 마치고 주님 앞에 갔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부부입니까?  평생토록 만나지 못했지만 더 이상 좋은 부부가 없습니다. 그보다 더 사랑함이  없고, 도움이 없고, 위함이 없습니다. 왜? 흠 없는 교회를 만들었으니까.

이렇게 교회 만드는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왜? 자기  소원이 아니니까 그렇지요. 고기 잡는 법을 배우러 온 사람에게 장사하는  이야기를 하면 잠이나 오지 소용없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원하는 자는 세상  말을 해줘야 귀에 들어갑니다. 하늘나라를 원하는 사람에게 세상 말을 해주면  천국을 이루는데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으니까 아무런 맛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앞으로 어떤 환난이 올지 모르지만 환난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능력을 얻으려고 귀를 기울이는데, 마침 이치를 말해주니까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마구 뛰고 굴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찌하든지 평안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환난을 말하면 ‘아이구 징그럽다, 도대체 들을 맛이  없고 딱딱해서 못 듣겠다!’ 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죽기를 원함으로 죽을 공부하려고 왔습니까,  평안하고 잘 살고 기쁘고 좋고 즐거울 것을 원해서 왔습니까? 환난이라는 말은  듣기도 싫어하는데 그래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죽을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고난받을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고난을 잘 견딜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평안하게 살까 하는 공부는 멸망 받을 인간들이 하는 것이지 천국  갈 사람들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부가 죽도록 좋아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흠 없는 교회를 이루고 진리와 하나 되기 위해서 부부가 사랑하고, 이 일에  방해가 되면 당장 사이가 벌어지고, 남편이 하나님과 하나되면 아내가 좋아하고,  아내가 하나님과 하나되면 좋아하고, 돈에 손해를 보더라도 진리와 남편이 하나  되고 아내가 진리와 하나 되면 손해 봤지만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로 다시 살림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찾아라,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데 강단에서부터 전부 그것만 가르치면 교인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박태선 씨가 한창 솜씨가 날 때인데 마구 두드리고 협박하고 야단이 났었는데 한  번 집회하면 금반지가 한 말씩 나왔다고 합디다. 모두 연보 잘했지요. 그런데 그  돈을 지금 박태선씨가 어떻게 쓰고 있습니까? 내가 반 시간 들어보니까 잡귀요.

그래서 듣다가 나와버렸는데 그때 김교신 장로님이라고 아주 열심 있는 분이  ‘박태선 장로 설교 들어봤습니까?’ 묻기에 ‘예, 반시간 들어봤는데  아닙니다!’ 하고 말해줬습니다. 그 분도 처음에는 녹았었는데 서너 번 듣고 난  다음에는 다시 가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전국 교회에 목사님들 가운데 안 끌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일 안  끌린 사람들이 고신측 사람들인데 그들은 진리고 뭐고 상관없이 자기 교파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기도 지금은  달라졌어요 지금은 어디든지 좋다고 하면 따라하려고 합니다.

이래서 요즘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는 것은 좋은 것은 따르려고 애를 씁니다.

○○○목사님은 내가 장립 받을 때 방해했던 분 중에 한 분인데 그분이 얼마  전에 서부교회에 당회 총무목사를 보냈고, 또 이번에는 장로님 여섯 분을  보내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옳고 좋은 것은 자꾸 따라가야 하지만 바로  따라가야 합니다.

또 양도천씨를 고신 목사님들이 초청해서 미국 공보관 옆 광장에서 집회했는데  그때도 굉장했습니다. 나는 그 설교를 처음에 바람이 일어나려고 할 때 한 시간  들어봤습니다. 우리가 서울에 원남교회를 세웠는데 ○○○목사님 동생이 시무를  했고 내가 당회장으로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초청해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 참석해 봤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설교를 하는데  가짜요. 그래서 어린 교인들에게는 말할 수 없고 들을 만한 사람들을 불러서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너희들이 뭘 보고 지금 은혜 받는다고 하느냐?  지금은 표시가 없지만 10년 이내에 드러날 것이라’ 하고 선포했습니다. 그 말을  서부교회에서 올라간 사람들은 믿었고 ○○○목사님 동생 같은 분들은 속으로  삐쭉 삐쭉거리면서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절정의 고개를 몰라요. 설교를 한번 들어보면 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나갔고, 어디로 삐뚤어졌고, 종말에는  어떻게 된다는 것이 보입니다. 이런 것도 하나님이 보여주시지 않으면 모릅니다.

자기를 산제사로 드려놓고 변화 받고 살아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데, 이번에  에베소서 성구의 요지는 빼 놨습니다. 결혼은 흠 없는 교회를 이루는 것  때문이지 저희들끼리 좋아하라고 주신 것 아닙니다. 흠 없는 교회 되도록 돕는  배필로 줬습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세상에서 잘 살려는 욕심을 품는 일에 서로  도왔습니다. 하늘의 것을 돕지 않고 땅의 것을 돕다가 죽었습니다. 지금 부부도  100의 99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신차려서 바로 알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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