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 13:15
노아의 신앙
1981. 6. 5. 금요일 새벽
본문: 창세기 9장 22절~27절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니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여게 둘째 아들 함과 맏아들 셈과 야벳이 아주 판이한 것을 여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동도 아주 판이했고 또 노아가 그들에게 대해서 선포한 것도 아주 판이했고 또 그 후 이루어진 것은 선포한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결과도 아주 판이했습니다.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 노아는 그 아버지요. 셈, 함, 야벳은 그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면 그 둘째 아들이 노아가 술이 취해 가지고 그만 정신없이 온 몸을 벗고 방 안에 그 아마 뭐 누워 있었든지 쳐박혀 있었든지 좌우간 흉하게 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함은 아주 업신여기고 추접하게 보고 또 그 흉한 것이 얼마나 흉한지 그 흉한 것을 자기가 보고는 느낀 것이 흉하게 뵌 것과 또 흉한 그것을 자기가 자세히 흉하면 얼마나 흉하노 하는 그 흉한 것을 보고저 하는 그것과 그 흉한 것을 보고 아주 흉하게 여기고 멸시한 것과 또 흉한 것을 얼마나 흉한가 그것을 자세히 보았고 또 셋째로서는 그 흉한 것을 저거 형제들에게 가 가지고 조롱을 했습니다. 이렇게 흉했다 흉하게 있더라 하면서 회방하는 그런 일을 한 것이 함입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그 소식을 듣고 마음에 그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지금 이 아버지가 저리되면 어찌되나 하고서 두려움을 가졌고 그 흉함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보지 안할라고 그 흉함을 보지 안할라고 애를 썼습니다.
그 흉함이 자기네들이 참 소원하는 것의 정반대인 자기네들 소원은 그 아버지가 천하 인간이 다 정죄받았을 때에 그는 정죄 받지 아니하고 의인으로 이렇게 되어서 저희들이 구원 얻었는데 더 의인되기를 원하고 더 하나님과 밀접해지기를 자기가 더 커지고 완전해지기를 원했는데 그만 그렇게 되 놓으니까 기가막히고 너무 기절할 정도로 참 자기네들이 하나님 다음으로는 보배로 여기는 그 보배가 지금 깨지는 판이니까 마음에 심히 원통히 여기고 근심하고 두려워해서 언제 뭐 멸시해야 하는 것이나 또 그 흠점을 보고싶은 것이나 또 그 흠점을 다른데 가 가지고 이렇게 소문을 퍼트려서 훼방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들이 생겨지지를 안했습니다.
생겨지질 않고 그만 자기네들에게 그 마음이 참 자기네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주 깨어졌으니까 깨어지니까 마음에 사람이 기절하는 것처럼 억장이 무너져서 그 심정에 발동이 보기도 볼 마음도 없고 그저 멸시 조롱하고저 하는 그런 마음도 생겨지지 않고 다른데 나가서 그렇게 흉을 보고 훼방하고 싶은 그런 것도 생겨지지 않고 들짱 그것을 감추어 없애고저 하는 그런 마음이 들어습니다.
이래서 그 옷을 그만 똘똘 뭉치 가지고 가 가지고 이렇게 휘득 덮으려고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보면 그 가룰 그 의복을 가지고 가되 어깨에다가 메고 갔습니다. 어깨에다 메고 갔고 또 뒷걸음쳐 들어가 가지고 그 벗은 하체를 보지 아니하고 덮고 난 다음에도 그 벗은 하체를 덮었지마는 덮고 난 다음에도 보기가 볼 수가 없어서 낯을 또 돌이키 가지고 보지 아니하고 그렇게 나왔었습니다.
이것이 대대손손이 저주를 받은 그 원인이 될만한 그 원인이었고 또 두아들은 이렇게 한 그것이 축복을 받을 만한 원인이 되어서 함은 지금까지도 그 흑인종은 참 세계에서도 제일 인간같이 않는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흑인종들입니다. 그 아랍족속들이 하는 그 모든 것은 다른 민족에서 볼 수 없는 그 흉하고 악하고 잔인하고 무도한 일이 많고 또 그들에게 제일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고 또 그들에게 그 미신을 지키고 이종교를 지켜서 멸망할 그런 그 우상도를 섬기는 그런 일이 그 민족에게 제일 많습니다.
보면 여게 선포한대로 셈은 하나님의 장막이 그들에게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자손들이 와서 거처 할 수 있는 장막이 있었다 하는 이것은 구원의 나라를 말합니다. 구원의 나라가 장자 셈의 그 족속들에게 있었고 또 야벳은 창대케 한다고 말한대로 이 백인종은 재림때까지 우수한 그 세상 생활 이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 이 셋 인종 가운데에 백인종이 제일 우수한 그런 세상 생활을 하게 될 것을 예언했는데 그대로 여견 그들이 항상 머리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백인종이 뭐 문화도 앞섰고 경제도 앞섰고 생활의 수준도 앞섰고 모두가 다 앞선 그것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간단하게 포도주 먹고 취해 가지고 벗은 몸으로 있는 것보고 함은 거게 대해서 그만 그게 보이니까 멸시를 했습니다. 멸시를 하고 또 그 흉한 기 보이니까 그 얼마나 흉한고 하는 것을 그 자세히 흉한 것 있는 흉한 것이 있는 것을 보고싶어 했습니다. 보고싶어 해서 자세히 봤습니다. 그 형들은 흉한 것 있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안했고 보지 안할라고 애를 썼습니다. 또 함은 멸시하고 천대했지마는 그 두 아들은 두려워하면서 두려워하면서 크게 근심했습니다. 또 그 함은 나가 가지고 조롱하고 훼방했습니다.‘아 이렇게 술취해 가지고 벌거벗고 지금 이렇게 되 있더라’그렇게 흉을 보고 헐었습니다.
허는 그 훼방하는 것으로 그 형제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들은 그 멸시고 흉한 것을 보는 것이고 훼방하는 것이고 그런 것은 다 냅두고 그만 마음에 크게 이 두려움과 절망과 이 근심이 있어서 그만 본능적으로 가져가서 얼른 덮어서 보이지 않도록 하려는 것으로 가져가 덮는데 뒤걸음 쳐 가지고 가서 덮고 또 돌이키 가지고 도무지 그 위치를 보지 안할라고 흉한 위치를 보지 안할라고 물론 그렇지 안할 때야 그 아버지니까 안기기도 했고 그 어머니와 아버지가 제일 좋지 안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만 그렇게 되고 옷을 가져갈 때에도 어깨다 메고 그래 갔습니다.
이기 무엇이기에 이렇게 이것이 자손 대대가 망하고 부요하고 또 구원이 거기서 결정이 됐는가 하는 이 중대한 일이 이렇게 결정이 됐으니까 무엇 때문에 이런가 하는 그 점을 우리가 예사롭게 지내봐서는 안 됩니다. 술취해서 옷 벗고 있는데 그 보고 뭐 벗고 있다고 한다고 해 가지고 저주를 받아서 대대 손손이 종된다.
언제든지 그만큼 뒤떨어져서 항상 황인종과 백인종에 대해서 도덕 면으로나 문화 면으로나 경제 면으로나 모든 면이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됐는가? 그 큰 아들은 어떻게 또 그렇게 신령한 구원에 천하 만민이 구원얻는 그 구원을 그 인종에서 나오도록 그렇게 하고 또 마지막 아들은 그 구원은 맏아들 구원에 참가해 가지고 구원 얻도록 그 장막에 같이 있다 했습니다. 그러면 셈의 장막에 있다 이랬소. 그러니까 그 구원에 참가하고 육신으로서는 그렇게 아주 창대해 가지고 어느 인종보다도 부요하게 됐는가? 그거 참 이렇게 중대한 것이 여게 원인됐는데 우리가 이것을 가볍게 그렇게 봐서는 안됩니다.
이 일이 잠깐 실수로 해 가지고 이래 된 것이 아니고 영원 전 하나님께서 목적을 정하시고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당신의 전지의 지혜로 경영을 하실 때에 그 경영하신 것 중에 이 순위가 하나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예정 때에 이 순위가 들어 있는데 이 순위가 어떤 그 중한 그런 성을 가지고 있느냐? 중요성을 가지고 있느냐? 이 사건에서 구원이 그 대대손손이 구원의 근원이 될 것과 또 세상에서 제일 잘 살것과 또 그 대대손손이 멸망 받을 것 그것이 요게서 결정이 되어서 이렇게 달라졌는데 그게 뭐 커서 그런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하시 가지고 요렇게 될 때에는 요자는 요렇게 되고 요렇게 되고 요렇게 되구로 한 그것이 우리에게 이 성경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보라 이것으로서 그의 영원한 멸망과 구원이 결정됐다’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그 멸망을 피하고 구원을 우리가 원하는 그런 그 계시 지식이 하나님이 주신 그 지식이 우리에게 가져지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이 영원 전 하나님이 예정에서 이리 됐다는 것, 또 하나님이 에정하신대로 요렇게 요렇게 창조를 하시 가지고 이렇게 됐다는 것 이것이 다 뭐 인간으로 된 것이 아니고 절대자이신 조물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가지고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이랬는데, 또 벌써 그런지가 근 육천 년이 되어가는데 아니 근 사천 년이 되어가는데 사천 년이 되어가는 가운데에 그때에 선포한 그대로 사천 년 동안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고 이루어 나가고 있으니 과거를 보나 또 미래가 있던 이 미래가 되는 것을 미래인데 그때는 미래지마는 우리로서는 벌써 과거가 됐기 때문에 우리가 압니다.
이렇게 그때에 그 일이 된 그 위치에서 거기에서 과거를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그것이 영원 전 우리에게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시 가지고 그렇게 된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서 그 중대성 권위성을 우리가 찾아야 됩니다.
또 현재로서 그렇게 된 그것이 그렇게 된 그것이 영원을 결정하는 보기는 사소한 일인데 사소한 일인데 그 일이 여 큰 것을 결정하는 큰 것의 원인이 됐다 말이요. 그들이 역사에 남은 사천 년 동안에 인종의 원인이 됐다 말이요. 인종의 원인이 됐으니까 그 현실이 보잘 것 없는데 우리는 보잘 것이 없는데 그 현실이 사천 년 동안의 실상의 그 셋 인종의 실상의 원인이 됐으니까 그 일이 얼마나 큽니까?. 우리는 아주 보잘 것 없는 대수롭지 않는 일로 보는데 실상 그것이 큰 원인이라 말이오.
원인이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큰 원인으로 그걸 삼았는데 우리는 볼때에 예사롭게 보고 또 원인대로 그 결과가 어찌됐는가? 결과가 사천 년 근 사천 년 내려오면서 이렇게 된 그 결과는 더 무섭다 그말이오. 이런데 우리는 여게 대해서 이것을 쉽게 보고 맙니다. 이러니까 쉽게 보고 마는 이것이 우리가 어두워서 그런 셈이요. 또 이 계시에 대해서 실지로 그 실상에 가까와지는 행동도 우리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데 여게 가까와지는 행동이 없으면 여게 대한 구원 성취가 우리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은 이 근원을 업신여기고 결과도 업신여기고 현재도 볼때 업신여기고 이러니까 우리가 참 천하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만한 그런 내것도 내것되어 있는 천하보다 또 귀한 내것도 이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팽개쳐 내버리 버리고 또 우리가 가진 사소한 것을 가지고 우주보다 큰 것을 내가 바꾸어 가질 수 있는 그런 기회에 바꾸어 가지지도 못하고, 이러니까 하나님은 지극히 큰 걸로 보는 것을 우리는 아주 지극히 사소한 걸로 보고,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보시는 그것을 우리는 지극히 큰 것으로 이래보니까 이 뭐 하나님이 틀린 기 아니라 우리가 틀렸으니까 우리 생활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어리석고 헛되기 쉽다. 헛되기 쉽다 이기요.
이러니까 그러면 성신의 감화는 어떤 것이 성신에 감화냐? 성신에 은혜를 받고 또 받고 또 받아서 어떤 사람은 영감이 아주 있기는 있지마는 약하고 어떤 성신에 감동이 강하고 이래서 그 정도가 사람마다 각각 백인이 백사람이 있으며 백사람에 정도 차이가 다 있다 그기요.
이 세상 일로도 아들이 여럿이 있는데 다 돈 좋은 줄은 알지요. 돈 좋은 줄은 알지마는 돈 좋다는 그 돈에 필요성과 참 귀중성 이 보배성의 가치를 느끼는 것이 열 아들이 있으면 열 아들이 같이 느끼는 기 아니라. 그 느끼는 정도가 다 다릅니다. 다 돈은 보배인줄 알기늘 알지마는 어느정도 보배인 줄 아느냐? 어떤 그 아들은 돈을 주고 뭘 사니까 좋으니까 돈을 쓰니 참 돈 가지고 뭘 돈을 주니 뭘 주니까 돈을 써보니 가치있다. 이래서 쓰는 데는 쓸 줄은 알지마는 그 돈을 피땀흘려 벌 그런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니가 쓰기는 쓰지마는 돈벌이 하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말이오.
또 돈벌이 하는 노력은 해서 돈은 벌기는 벌지마는 이 돈이 앞으로 어떤 고비에는 어떻게 쓰이질터인데 이것을 내가 지금 쓰고 싶어도 쓰지 않고 이것을 잘 저축해야 되겠다. 돈을 저축한다는 또 그런 가치로 느끼는 사람은 없다 그기요. 그러면 이 벌어야 되요. 써보니까‘이것 참 돈은 좋은 기로구나!’이래 느끼는 것 돈을 이것 참 이렇츰 가치있는 기기 때문에 내가 땀을 흘리고 좀 속이 썩우어져도 이 돈벌이는 해야 되겠다 해서 하는 사람도 있고, 돈벌이 할뿐만 아니라 이 돈은 벌어 가지고 암만 쓰고 싶어도 안 쓰고 저축을 해놔야 되겠다. 왜? 무슨 일이 있을런지 모르니까 그때에 이거 저축해 가지고 이걸 내놔야 되지 무슨 큰 일이 있어도 돈이 만일 그 십만원이 들어야 이 문제가 해결될 일이라면 내가 신용없으니까 다른 사람 돈 한푼도 안 빌려주지 돈 십만원 없어서 해결 못지울 터이니까 이것을 잘 저축해야 되겠다 이렇게 느낄 사람이 몇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돈으로 가지고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이 돈으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 이 돈은 이걸 가지고 썩어 가지고 없어질 것인데 영원한 것을 마련할 수가 있다. 이 돈에 대한 가치를 깨닫는 것이 열 아들이 각각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 귀한 줄은 알지마는 열 아들이 돈에 대한 가치를 깨닫는 그 정도는 아주 각각 달라 차이가 있다 이기요. 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거 지금 하나 비유인데 차이 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성신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는 것도‘성령을 받아라 성령을 받아라’하는 그말은 지금까지를 모두 다‘성령의 은사를 받아야 된다 성령을 받아야 된다’이렇게 일하는데 이 말이 나가면 인자 얼마 안가서 그들의 말의 용어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성령을 받아라’성경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것은 성령을 받아서 내가 가지라 하는 그말이 아니고 성령의 것이 되라 하는 말이요. 성령의 것이 되라. 성령의 성령을 내가 받아 가지는 기 아니고 내라는 이것이 성령이 받아서 성령이 받아 가지서 성령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받는 기 아니라 성령이 받은 것이요. 나는 성령에게 드리는 것이요. 성령에게 드리고 성령이 받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받으니까 성령이 받아 가지요. 내가 성령을 받아 가지는기 아니고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내가 무얼 받아 가지고 그 크신 분을 내가 가질 것이요. 돈 모양으로 그래 가지는 줄 압니까? 내가 성령에게 받힐 때에 성령이 받는 것입니다. 성령이여 나를 받아 주시옵소서. 성령이 받아서 내가 성령의 것이 되어서 그러면 성령이 나를 보호합니다. 성령이 나를 씁니다.
이러니까 이러면 완전자 절대자가 나를 받아 가지고 있으니까 아무도 해하지 못하지. 절대자가 나를 쓰니 절대자에게 쓰이니까 대통령에게 쓰이도 가치있다 하는데 절대자에게 쓰이지니까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없지.
이런데 이 정도가 다 같은 것이 아니라 각각 다 다르다 그말이오. 이 정도가 다 각각 달라. 그러니까 성령의 은혜를 받고 또 받고 또 받고 받는 이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받은 사람도 또 받고 받은 사람도 또 받고 더 받고 더 받고 성령의 은혜를 더 받는다 그말은 성령에게 백분지 일이 사로잡혀서 성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백분지 구십구는 내 마음대로 하고 성령은 손도 못 댑니다. 이러나 이제 백분지 일은 성령에게 받혀서 성령이 백분지 내 백분의 일은 받아 가지고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차차 차차 이래 가지고 내가 전부를 다 성령에게 다 받혀서 성령이 내 전부를 다 받아 가지고 성령이 내 언행심사를 다 주관하시 가지고 당신의 뜻대로 합니다.
당신의 뜻대로 말도 내 입술도 당신의 뜻대로 말하고 생각도 당신 뜻대로 당신 하고 싶은대로 내 언행심사가 되어지지 내 자유로은 하나도 못한다 그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이 천해습니까, 귀해졌습니까? 예. 귀해졌소, 천해졌소? 그 사람에게 죄가 있겠습니까, 의가 있겠습니까? 성령님이 그 사람을 전체를 주관해 가지고 제 마음대로 하나도 못하고 성령님이 그 사람을 전부를 주관해 가지고 성령님의 마음대로 자기 언행심사를 한다고 하면은 그 사람이 언행심사의 죄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예. 죄없지. 전부의 뿐이지요. 응 이것이 이제 성신의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신구약 성경 말씀은 하나지마는 성령은 무엇이 어떤 은혜가 성령의 은혜냐 하면 첫째 이 성경에 있는 이 내용을 이 사실을 깨닫게 하는 그것이 성신의 은사입니다. 깨닫게 하는 것이 성신의 은사요.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다른 사람은 거게 대해서 예를 들면은 수박을 이 주머니에 가져왔는데 어떤 사람은 주머니만 휘덕 벗겨 가지고 벗기고 어떤 사람은 껍데기만 갖고 어떤 사람은 속에 알맹이를 모으고 껍데기 껍데기 그걸 씻고 그 다음에는 수박 껍데기 그 안에는 들어가면 속에 알맹이 참 맛있는 기 있지 않습니다. 이 성경도 그렇다 그말이오. 성경도 깨달음이 그 수박으로 말하면 수박 주머니 이제 뱃겨놓은 정도 그 정도로 성경을 깨닫는 사람 있고 그 다음에는 수박을 인자 내기는 내 가지고 그 껏트머리를 핥소. 수박 껏핥는다고 수박을 거트머리를 줄줄 핥아봐야 맛이 있습니까.
그러면서 그 조금 들어가 가지고 거석하니까 물이 나와서 조금하지마는 좀 들어가니까 아주 달고 좋은 기 있지 않습니까. 깨닫는 것도 그렇다 그말이오.
성경을 깨닫는 것도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있으니까 그렇게 깨닫는 것은 성신의 감화로만 깨닫는 다른 것으로는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성신의 감화로만 깨닫지 성신의 언어로만 깨닫지, 이는 왜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이것이 전부 무한한 진리입니다. 한이 없는 진리입니다. 무한한 진리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한마디도 깨닫지 못합니다.
성신의 감화가 와야 깨닫지 자기가 깨달아 봤자 인간 즉 말로 인간의 말로 인간의 말로 인간이 그 보고 그 깨닫는대로 그대로 깨닫지 성령이 깨닫게 하시는 대로의 무한한 이 생명성으로 깨닫지는 못한다 그말이오. 성령이 와야 깨닫고 또 성령의 은사로서 받은 것만치 다시 말하면 자기가 주님의 것이 된 것만치 성령을 깨닫습니다. 또 성령의 은사를 깨달은 대로 그대로 실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나를 붙들어 자유하는 것만치 성령이 마음대로 쓰시는 것만치 내 언행심사는 주의 뜻을 행할 수가 있다 그기요.
이러니까 그 사람이 성경에 대해서 깨닫는 그 정도는 그 사람이 영감을 어느 정도 받아 가지고 성령의 은혜를 어느 정도 받아 가지고 있느냐? 성령의 은혜의 정도요. 또 그 정도는 그 사람의 신앙 생활의 정도입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꼭 하나입니다. 알고는 행하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알고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까. 생명의 애착심이라 하는 것은 생애 본능이 되겠습니다. 생애 본능이 있기 때문에 본능은 어찌됐든간에 자기를 좋게 하고저 하는 것과 자기를 잘되고저 하는 그것이 생명의 본능입니다. 뭐 어짜든지 생애 본능입니다.
어린아이가 나 가지고 그만 주먹 쑤시 넣는 그것도 뭐 본능으로 입에는 먹어야 되겠다는 이기 그것 모양으로 생애 본능이 있기 때문에 알고는 멸망할 길을 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애 애착도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애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참 알면 멸망할 길은 안 갑니다. 입으로는 아무리 이리 가면 멸망 멸망 한다고 해도 그 멸망 길을 몰라서 가는 것입니다.
모르는 거는 왜 알았다고도 모르는 것 성령이 와야 그 이것을 알지 성령이 안 오면 생명에 속한 것은 모른다 그말이오. 무한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 무한한 말씀은 무한하신 성령의 감화라야 알지 감화 전에는 하나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성경에 대해서 가치성을 요만치 모르는 사람 요만치 모르는 사람 무한히 모르는 사람 보는 정도가 다르지 않습니까.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의 말씀과 주의 이름을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보다도 그 귀중하게 그런 걸 알았기 때문에 이것을 있는 것을 다 애끼지 않고 다 해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안할라고 애를 썼다 그기요. 그것은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귀중성이나 성경에 대한 이 도리에 대해서 아는 것만치 입으로는 안다고 아는 기 아니라. 입으로만 하는 것은 저 불택자도 다 할 수 있어요. 또 불택자도 그만한 정도는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성령의 감화로 와야 온것만치 이 말씀이 무한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성신의 감화가 오면 자기 몸도 생명도 모두가 다 이 말씀으로만 생겨졌고 이 말씀으로 인하여 살고 이 말씀에 속해야 살지 이 말씀이 자기에게 속하지는 않는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아는 것만침 행하게 되고 행하면 구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너무 이 말씀을 무시하기 때문에 지금 오늘 아침에 거게 대해서만 했습니다. 이렇게 귀중하고 중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서 된 것이며 이것이 인종은 세 가지 인종으로 퍼져 나와 가지고 지금은 여러 가지로 변질 됐지마는 내나 그 인종이라 말이오. 그 인종인데 세 가지 인종이 사천 년 동안을 내려오면서 예수님 재림 때까지 그때 된 원인 그대로 되어진다는 그때에 이 세 아들이 갈라진 그때 원인 그대로 사천 년 동안 세 인종이 세상에서 그대로의 그 보응을 받는다. 그대로의 결과를 받는다 그말이오. 결과를 받는 그 원인이 된 그 원인인데 우리에게 이렇게 크게 여기느냐 그말이오.
그러면 사천 년 동안 그 인종이 세 가지 인종이 그 원인 그것대로 그때 원인 그대로 이거는 이렇게 제일 잘됐고 그때된 원인 그대로 이거는 둘째로 잘됐고 그 그때 원인 그때로 이것은 제일 비참하게 됐고 이렇게 된 이 원인으로 이렇게 느끼지느냐? 이 원인으로 느끼기를 어느 정도 느끼며 이것을 깨닫느냐? 여게 대해서 아무리 떠들고 아무리 해싸도 이걸 모르면 또 요게 대해서는 이걸 모르면 헛일입니다.
암만 천한 것 말해도 이 참 원인이 그 원인이 됐다. 이 큰 것이 원인이 됐는데 우리 보기는 그거는 뭐 예사로 옛날 지나가는 이야기 하는 모양으로 포도주 먹고 취해 가지고 내나 그 들어누웠다가 둘째 아들 한테 이렇게 저주했다 이렇게 보여지지 이 전 인류가 이때에 된 이 사건대로 사천년 동안 대대손손이 요렇게 됐다 그렇게 된 원인이 이것이 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성신의 감화가 없는 연고고 또 성신의 감화가 온다해도 그 느끼는 것도 참 천층 만층이라 그말이오.
참 이것을 이 느끼는 것이 이것이 자기와 자기 자손에 흥망 성쇠가 여기 있다 하는 이것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말로 하는 거와 또 어느 정도 느끼느냐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여러분들이 이 중요한 것이 것을 깨닫고 집에 돌아가서 일을 하면서도 알게 되니까 알기 쉬우니까 큰 아들하고 작은 아들하고는 안 보고 어깨에 옷을 메고 들어갔다. 또 덮고 난 다음에도 안 볼라고 나와 버렸다. 둘째 아들은 가서 보니 벗고 있으니 자세히 들여다 보고 그 벗어서 그 흉한 걸 자세히 들여다 보고 나와 가지고‘아 이 벗고 있더라. 들어가 봐라.’이렇게 한 그것이 우리 보기에는 뭐 별기 아니고 그렇게 큰 일이 아닌데 이것이 어떻게 되어서 전 인류의 흥망성쇠의 원인이 됐던가 하는 것을 우리가 좀 생각해야 됩니다.
그 사실 그대로 되니까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쓸어버리 버리고 그까짓 것은 말할 필요가 없어. 어쩌든지 좋으면 좋아. 그러면 되면 된다. 이걸 뭐 우선 인간이나 기쁘게 하고 자꾸 이래 자는 그기라 말이오.
어제도 제가 충헌교회 장로님 여덟분들이 왔는데 그 말하는 가운데에 그분들은 그거 묻지 안하지마는 내가 그걸 말을 했습니다. 내가 과거에는 주일학교를 그 저는 과거를 말하는 모든 교회 과거를 말하는 것이지 저는 과거에 그래 본 일이 하나도 없소. 주일학교를 할 때에 아동 심리를 연구해 가지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 기쁘게 해야 이래 올 수 있느냐? 기쁘게 해야 주일학교가 될 수 있느냐? 아동들의 심리를 연구해 가지고 아동들이 그 이해를 하도록 아동들이 또 기쁘도록 아동들 좋게 하는 이것을 생각했는데 지금은 제가 깨닫으니 그게 아니라.
어쩌든지 하나님을 좋게 해야 주일학교가 된다. 또 하나님의 그 하나님을 그 기쁘게 해야 된다. 또 그 아이들에게 어쩌든지 이해를 시킬라고 하는 그것보다도 하나님이 이해시켜 주시도록 내가 이렇게 하니 내가 이해시키 주겠다. 내가 이렇게 하니 내가 이 학생들을 내가 책임지고 구원하겠다. 이렇게 아이들 기쁘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 기쁘게 아이들을 이해시킬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아이들을 우리가 모인 아이들을 하나님이 이해시키 주실 수 있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이기 좋다.
그래서 아이를 생각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다만 아이들을 데려다가 하나님 앞에 오면은 하나님 앞에 받혀 하나님께서 어쩌든지 이 아이를 알려주시고 해달라는 그러니까 주일학교를 할 때에 하나님의 그 뜻과 하나님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대로 그분이 하시는대로 따라서 할라는 여기에 중점을 두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즐겁해서 이래 오도록 할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 심리를 이용해 가지고 알려 줄까? 그 아이들을 아이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첫째가 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것이 첫째고 아이들에게 대한 것은 그 다음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하는 그것을 말을 했는데 그게 보니까 장로님 한 분은 알아 듣고 다른 분들은 알아 듣는가 모르겠습니다.
한 분이 알아 듣고 있는 것은 요쪽 구석에 낫 기다라이 앉은 그분이 그 말을 알아 듣고 그 옆에 얼굴이 못난 사람 하나있는데 그분이 좀 알아 듣고 다른 분들은 그 무슨 말인가 말을 들어야 그 깨달아 느끼는 것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 사회하는 그분은 거게 대해서 별 느끼지를 못해.
우리가 어쩌든지 이 진리를 깨닫는 이것이 성신입니다. 성령이 와서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진리대로 행하게 하시고 요 진리대로의 사람과 진리대로의 행동과 진리대로의 그만 그 일 물건만 되면 우리 다 됐다 이기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가서 오늘 가서 연구를 해. 그 뭐 길가 가도 할 수 있어. 셈, 함, 야벳 따라 합시다. 셈. 함. 야벳. 함은 둘째 아들은 함은 흑인종의 조상이요. 셈은 황인종의 조상이고 야벳은 백인종의 조상인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 하더라.
일하면서 길가에 가면서 차에 가면서도 그 뭐 깨달을 수 있겠소. 성경보는 양성원 학생들은 성경보니까 거서 깨달을려고 애를 쓰지마는 또 잠시 나오든지 변소간에 가든지 밥을 먹든지 먹으면서 그 세 가지 언제든지 생각하면 깨달을 수 있다 말이오. 간단 명료합니다. 세 가지는 간단 명료 하게 깨달아졌는데 이것이 뭐이라서 사천 년 동안 그대로 모든 인류의 흥망성쇠가 되고 말았나 하는 그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되겠는데 하나님이 요렇게 함축시켜 가지고 간단 명료하게 우리에게 생명의 도를 가르쳤습니다.
그걸 모르면 소용이 없소. 그거 모르고 암만 떠드는 것도 이 세상에 암만 괭장히 떠들어도 운동장에 떠는 것 여러분들이 놀래고 괭장하지마는 그보다 이 세상에는 십 배 떠드는 떠드는 단체 훈련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지마는 그거 그게 제일 좋은 기 아니라 그말이오.
또 병 낫는다 하는 그런 것도 그것도 그렇게 그것이 제일 귀중한 것 아니라. 저 뒤에 있는 노인 저 병신 하나 있는데 저 무슨 병 들었소. 좀 저는 반신불구인데 무슨 병이고? 응? 누구? 김 뭐? 무슨 병이고?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