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 00:09
기본회개
1981. 5. 23. 토요일새벽
본문:다니엘 12장 11절~13절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 이백 구십일을 지낼 것이요 기다려서 일천 삼백 삼십 오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업을 누릴 것임이니라
매일 드리는 제사들을 폐한 후에 얼마 동안 견디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특수한 보호와 은혜와 영광의 축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것은 참된 이치이기 때문에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종교 말년에도 이 이치대로 이루어졌거니와 예수님 재림하실 그때도 이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지난 시간에 제사에 대해서 증거하다가 중단이 됐는데 가인과 아벨은 제사로 인해서 교리와 신조가 확실히 구별됐고 노선이 결정됐습니다.
또 그 후에 노아의 제사를 인해서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풀렸고 그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가 임하게 됐습니다.
창세기 12장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도 벧엘의 제사를 인해서 하나님과 동거 동행이 시발됐습니다. 또 15장 8절 이하에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처음 그에게 말씀한 것이 실상으로 이루어지는, 이삭을 하나님의 택한 전 인류에게 구원의 씨로 확정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또 이삭은 인내성 많았으나 제사 드리는 일을 자주 하지 않았는데 창세기 26장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제사 드린 후부터 모든 힘들고 괴로운일은 물러갔고 주변에서 박해하던 세력가들이 화친의 맹세를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럴 때에 이삭이 ‘우리를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버러지처럼 짓밟으면서 어떻게 화친을 맹세하자고 하느냐?’ 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니까 당신의 흥왕은 끝이 없고 우리는 굴곡이 많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서로 멸하지 아니하고 보호하자는 맹세가 있어야 될 필요성을 느껴서 왔다’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신 것도 이삭이 쌓은 제단을 인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는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가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심을 보고 베개 삼았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부어 제단을 쌓고 하나님과 서로 약속을 맺었습니다. 그 약속대로 하나님은 틀림없이 이행하셨고, 야곱이 약속을 무시하고 돌아다닐 때도 기어이 그 제단으로 귀속을 시켜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출애굽기나 레위기에는 하나님께서 제사에 대해서 여러 종류를 세밀하게 말씀하셨는데, 짐승을 잡아서 태우라고 하신 것이나 또 곡식을 드리라고 하신 이런 것이 하나님께 요구되어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후에 나타냈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내게 가증스럽고 헛된 제물을 다시는 가져오지 말라, 내 마당을 밟을 뿐이고 내게 무거운 짐이 된다’ 하시면서 거부하셨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이 흠향하지 아니하셨고, 또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오셔서 ‘너희들은 외식하는 자들이라, 외식으로 인해서 너희들이 망한다!’ 하셨습니다.
그때 외식의 한 예를 들자면 ‘성전으로 더불어 맹세하는 것은 허무하거니와 성전에 있는 금으로 맹세하는 것은 지킨다!’ 하는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의 사상이 하나님을 근거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귀하게 좋게 여기는 대로 그들도 평가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제사를 말씀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냐? 첫째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더불어 약속하신 약속을 근거해서 역사하시기 위함입니다. 약속을 근거해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약속의 근거이신 하나님을 접하게 하려는 것이요 이것이 근본 목적인 것입니다.
제사를 통해서 자기가 가진 물건을 움직이고, 또 몸으로 활동하고, 또 마음의 움직임으로 약속의 줄기를 타고 하나님에게 도달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결합되는 것을 원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근본 목적을 세우신 것이나 또 당신이 실질적으로 이루시는 실상의 건설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신격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의 인격이 서로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밀접한 결합이 되고, 수많은 피조물 가운데 우리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결합을 가지도록 하기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우리를 통해서 모든 영계와 우주에 있는 피조물들에게까지 퍼져 나가도록 하시려는 것이니 곧 만물의 중보자, 곧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를 만드는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우리를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하셨는데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은 하나님의 나라요, 나라보다 더 속에 알맹이를 말할 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보다 더 속에 가까워지는 것은 제사장이요, 더 가까운 것은 신부요, 또 그것보다 가까워지는 것은 몸이요, 또 더 가까워지는 것을 가리켜서 ‘나는 너희들의 생명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순위의 종결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중에 우리를 가장 가깝고 구비하게 교제하고 결합해서 단일의 희로애락으로 동거 동행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생명 되시고, 그분의 움직임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생기가 되고, 이 생기로 인해서 우리의 영육이 영원히 영생케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 목적을 실질적으로 이루기 위해서 제사를 정하셨고, 신약시대는 그보다 초월한 제사, 당시로서는 상상치 못할 이상적인 제사로서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교회에게 ‘너희들이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하셨고, 또 예수님께서 책망하시기를 껍데기 외형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사람이 유물주의자가 되어서 물질을 제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두 주인을 말할 때에 한 주인을 물질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너희들이 물질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도와 형식은 있으나 의도 버렸고 인도 버렸고 신도 버렸다’ 하신 것도 하나님에게 인격을 바치는 것이 없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약교회를 말씀하실 때 ‘여인의 후손으로 난 자로서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이제까지 없었지만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 하셨습니다. 이 천국은 무궁세계가 아닌 신약교회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교회 시대는 아무리 작은 자라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한 지식이나 교제나 결합이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도 더 결합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약교회에 ‘몸으로 산제사를 드려라’ 하신 것을 구약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면 ‘마음으로 산제사를 드려라’ 하셨을 것인데, 악령이 구약교회를 삼킨 방편으로는 신약교회를 삼킬 수 없을 것이니까 정반대되는 방편을 쓸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신약교회에는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몸으로 드리는 데 중점을 두지 않으면 신약교회는 마음으로만 제사하는 거짓의 사람이 될 것을 아시고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 제사에 대해서 ‘이것이 영적 예배니라’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니 곧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제사라 할 수 있고, 또 하루종일 생활하는 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구약교회에 제사를 말씀한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교제해서 밀접한 관계를 가진 그것만큼 산 것이요, 지혜와 능력이요,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과 결합되지 않은 것은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결합이 되는데 우리의 영은 다른 것으로 인하여서는 살 수 없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삽니다. 이것이 영의 구원입니다. 또 심신은 주체인 영을 통해서 구원이 됩니다.
그러기에 심신의 구원을 하나님이 단독으로 하시면 월권이 되고 약속을 어기는 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계속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네가 너이지 이것은 네가 아니라, 이 성질이 너지 이것은 네 성질이 아니다. 이 전지의 지혜가 네 지혜지 거짓부리의 온전치 못한 지혜는 네 지혜가 아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런 작용 저런 작용, 모든 움직임으로 인해서 우리를 감동시키실 때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마치 둔한 사람이라도 공을 받으려고 주시하면 떨어진 공이라도 주울 수 있지만 아무리 능한 사람이라도 무심히 있으면 옆에 떨어진 것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우리 몸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서 움직이고, 하나님을 향함으로 하나님의 객관 역사가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임하는 데 따라서 반응하고, 세월 중에 차차 하나님과 교제가 되고 결합 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데, 이렇게 되는 데에는 마음으로 하는 것보다는 몸으로 움직여서 행동하면 마음도 더 강하게 되고 더 실상이 됩니다. 또 자기 몸으로 하는 것보다도 자기가 귀하게 여기고 아끼는 물질을 움직여서 하면 심신에 더 실감이 되고 실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래서 구약교회에 대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으면 물질을 하나님 앞에 드려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낙헌제를 드려라, 또 네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려라, 하나님 앞에 머리를 떼서 드려라, 또 감사할 일이 있으면 소제를 드려라,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감사하고 바칠 때는 요제를 드려라, 너희들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으면 말로만 하지 말고 네 주머니 돈으로 짐승을 사서 끌어다 놓고 그 머리에 안수하고 잡아서 피를 흘려서 네 잘못을 속죄하라 했습니다.
또 무슨 불목한 것이 있거나, 모르고 죄를 범한 것이 있거나, 또 감사할 일이나, 앞으로 어떤 난제와 복잡한 일이 해결이 되어야 할 미래가 있을 때는 번제를 드려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번제…, 이런 여러 가지 제사를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줄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생각하면 자기는 절망과 낙망 가운데서 멸망할 자가 아니요, 하나님과 연결을 가질 수 있는 소망 속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네 마음과 몸을 움직여서 하나님을 향하고 결합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영은 전부 죽어 있고 그 영은 심신에게 시체같이 실려 다니면서 일생동안 아무 작용도 못하고 순전히 심신의 작용으로 삽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사람이 육체가 됐다고 한 것입니다.
또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요,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라’ 했는데, 이 육체도 심신이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영의 생각은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중생된 영은 성령에게 떨어지지 않으면 영원한 절대성의 결합을 가지는데,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역사한다’ 했으니까 성령의 생각은 곧 중생된 영의 생각과 같습니다.
이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전부 심신으로 살지만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가? 영은 완전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보나 성장이나 성화는 없고 다만 주격체인 영이 육에 대해서 어느 정도 주격체의 실력 행사를 하느냐 하는 이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충만이 영에게 왔는데 영이 그 충만을 어느 정도로 육에게까지 발휘하고 전달해서 역사를 일으키느냐? 이것이 된 만큼 영의 부요요, 영의 권위요, 영의 실력이요, 영이 점령한 고을이요, 자기의 활동 무대가 됩니다. 이래서 지금 영은 소유를 풍성케 하려고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심신은 완전한 구속을 받았으나 약속으로 받았는데 심신이 영에게 지배를 받고 영에게 소속이 되면 영생이요, 악령과 죄악의 것이 되면 영멸입니다.
그런데 이 심신의 기능은 현실에서 개별적으로 영의 것 곧 하나님의 것이 되기도 하고 마귀와 죄악의 것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 심신이 현실에서 다시는 변동없이 하나님의 것으로 완성되는 것, 영에게 이용되고 하나님에게 이용되면 영생인데 이 작용은 현실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 일을 완성시키려고 해도 구약시대에는 너무 심령이 어두운 때요 미개한 때입니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는 신령한 세계지만 그때는 모르니까 몽학 선생에게 배우는 때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물질을 움직이고 또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도록 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 작용이 되고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심령의 운동을 일으켜서 하나님과 교제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지만 그 일을 통해서 성공하지 못했고 그만 껍데기만 강조하다가 마음의 작용은 공허가 됐기 때문에 ‘주의 전을 위해서 간절한 것이 나를 삼켰다.’ 했습니다. 그들이 제물에 열중하고 중심을 가지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통해서 마음이 영과 결합되어 완전하신 하나님의 신성과 교제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껍데기 제물, 물질을 드리라고 한 것은 물질로 하다가 안 되면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서라도 그들의 강퍅하고 둔한 심령이 일어나고 시동이 걸려서 신격이신 하나님과 교제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면은 깜깜하고 제물에만 주력하니까 제물에 대한 간절함이 하나님과 관계를 잊어버리게 만들었고 심령이 어두워지고 영감이 전혀 없으니까 메시야를 죽이는 역사가 됐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가 이렇게 됐기 때문에 신약시대는 심신이나 물질을 위주로 하도록 하지 않고,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도 위주로 하지 않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서 움직이는 것을 하나님이 욕망하셨습니다. 이제는 장성했기 때문에 신약교회에는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시면서 몸을 말한 것은 껍데기 외부를 멸시하기 쉽기 때문에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약교회가 어떤 병이 들었느냐? 말하는 것이나 다른 모든 움직임은 몸의 작용인데 신약교회는 마음뿐입니다. 마음의 작용인 말도 없고, 몸의 움직임도 없고, 또 물질의 움직임도 없습니다. 이런 껍데기는 하나도 없는 가짜 알맹이만 가진 신약교회가 됐습니다.
이래서 야고보서 2장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홀로 있어 죽은 것이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마귀의 믿음이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된 것이니라, 너를 구원하지 못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행함은 무엇입니까? 행함은 마음의 작용을 말하는 것인데, ‘아 하나님께 감사하다!’ 하는 것도 보면 마음뿐이지 외부의 작용이 없으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실질적인 역사가 없습니다. 또 ‘아이구, 잘못됐습니다.
자복합니다!’ 해도 입술로 말하고 끝입니다.
이렇게 감사도, 잘못도, 하나님 앞에 작정하는 것도 마음으로 작정하고 입술로 말이나 하고 눈물이나 흘리면 된 줄 알고 만족하지 심신을 움직이는 것은 없습니다. 심신이 합해서 육인데 그만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의 거짓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요 실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말은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계시록 18장에 말씀하신 것은, 인격을 하나님에게 드려서 실제로 교제하고 결합되는 작용은 없고 마음과 말로만 하는 그것이 바로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할까, 좋게 할까 하는 그런 일이요, 이렇게 자기를 중심해서 하나님을 이용해먹는 그것은 멸망하는 일이니까 너는 멸망하기 싫으면 거기에서 나와라 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때가 가깝습니다. 우리가 기름 준비하는 것도 무엇이냐? 하나님과 진리의 능력이 내게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 역사하도록 하느냐 하는 그것입니다.
무슨 역사? 깜깜하고 어두울 때 불 켜는 역사요, 다시 말하면 인간이 다 속화되는 데서 속화되지 않는 능력의 작용이요, 죄악에 다 굴복하는데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과 진리의 작용이 내게 오는 것, 진가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사이비한 때, 해가 기울어지면 전체가 깜깜한데 이럴 때 진가를 구별할 수 있는 성신의 역사와 진리의 역사가 어느 정도 있느냐 하는 것을 가리켜서 기름 준비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두움은 세상인데 최고의 세상을 정복하고 승리하고도 남는 역사를 빛으로 비유했습니다. 이것이 기름 준비인데 말세의 신약교회에 이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을 제가 이번에 한달 동안 누워 있는 가운데에서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멸망에 대해서 많이 말했는데 주님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에 멸망을 말할 시간이 없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구원이 되느냐 하는 것을 말할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간추려서라도 이 구원을 증거하겠다고 각오를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구원이 되는지 그 요소를 창세기 1장에서부터 말하고 있는데 창세기 8장에서는 하나님이 제사를 이렇게 기뻐하셨고, 이 제사로 만사가 해결이 됐습니다. 모든 큰 경영의 시발이나 하나님에게 크게 삐뚤어졌던 것이 재결합되는 것도 제사로 해결이 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제일 미워하시고 괴로워하시고 가증스럽게 여겼습니다. 또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무슨 문제냐? 구약교회에는 껍데기를 통해서 알맹이를 찾으라고 하셨는데 그만 껍데기에 치중하다가 알맹이로 들어가지 못해서 헛일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약교회는 알맹이에서 껍데기 자기 몸, 자기의 소유, 자기가 접촉하는 자기 세계, 다시 말하면 자기의 현실 전부를 끌어다가 하나님과 결합시키는 것이 구원이니 이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신약교회는 마음으로 끝입니다.
마음만 먹고 끝냈습니다. 거기서 조금 더 나가면 말인데 말로 하나님께 표시하고 끝내 버렸습니다. 이래서 멸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마음의 작용이 몸의 작용이 되는 것입니다.
병들어서 누워있는 사람은 몸의 작용을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의 표시를 어떻게 할까? 사과의 표시를 어떻게 할까? 어떤 예물을 가지고 간구할까? 이 은혜를 무엇으로 찾아볼까?’ 하는 마음은 있어도 몸으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는 최소한 입으로 기도해서라도 마음의 작용과 몸의 작용을 합하도록 해야지 이게 안 되면 결합은 안 됩니다.
말세에 기독교가 마음의 움직임만 가진 것을 두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홀로 있어 죽은 것이니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나 회개나 어떤 작정을 하더라도 몸의 작용이 없기 때문에 홀로 있어 죽은 것이라, 이미 죽은 것이지 거기에 생명은 없다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마음의 작용이 몸의 작용과 병행이 되도록 주력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마음의 작용이 하나님과 실질적인 교제가 되고, 실질적인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 우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들이 알리라’ 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게 작용하는 것도 알고, 당신이 주시는 담력도 알고, 평안 주시는 것도 알고, 그분이 지혜를 주셔서 과거에 옳고 그름을 모르고 유리 방황하던 일도 규정이 되고, 또 그분 앞에 사이비한 것을 단정도 짓게 되고, 또 당신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도 인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접촉하기 전에는 말뿐입니다. 아무리 두렵지 않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는데 하나님과 실상 접촉하니까 두려움이 없고, 소망을 말해도 절망이 됐는데 실질적으로 소망이 된다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과 우리와 결합된 것인데 이 결합의 작용이 어디서 끊어졌느냐? 마음에 몸이 합동되는 것이 중단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간구하려면, 이웃 사람에게 사소한 일을 부탁해도 머리를 숙이면서 인격으로 대우할 것은 인격으로 대접하고 또 과자 봉지 하나라도 들고 가는 것이 예의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에게 간구할 때도 ‘아,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려면 무엇이라도 예물을 드려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철야라도 하루 밤 해야 하겠다, 나는 오늘 하루를 바쳐서 전도라도 해야 하겠다.’ 또 그렇지 않으면 돈은 자기 심신을 기울여서 만들어 놓은 대가의 표니까 ‘아, 하나님 앞에 물질을 얼마를 드리겠다.’ 또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됐으니 노를 풀기 위해서 밥을 몇 끼를 안 먹겠다. 내가 이 값으로 며칠 간 잠을 편히 자지 않고 예배당에서 기도하지만 그래도 잘못을 표시하는 것으로 연보를 얼마를 하겠다.’ 이렇게 무엇인가 실질적인 작용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실질적인 교제가 되고 실질적인 결합이 이루어지지, 입술로만 하는 것은 홀로 있어 죽은 것이요 헛된 것입니다. 자기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말미암아 이 믿음이 온전해진다’고 말씀했습니다. 앞으로 기회 있는 대로 계속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