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7 00:05
기본구원의 젖줄기
본문 : 엡1:9-12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오전에는 우리 구원의 유래를 예수님의 구속을 입어 성령과 진리와 우리 영이 거듭 살려 주심을 받는 데까지 우리의 구원 족보를 오전에 배웠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세상의 수많은 이종교와 같지 많습니다. 사람들은 어느 종교든지 그 종교가 퍼져나가는 그 양과 또 세상적 권위를 가지고 평가를 하지마는 우리가 믿는 이 도는 그런 것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노아 때는 불과 여덟 사람밖에는 남아 있지를 안했습니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어쩌 될지 모릅니다. 우리의 이 구원은 선교돼 나가는 그 양에다가 가치를 두지 아니하고 또 그 사람들이 어떻게 열심있게 행하는 그런 데다가도 가치를 두지 안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어데다가 가치를 두는가? 자존하신 이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다가 가치를 둡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자존하신 이 하나님에게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을 하는 것이지 어떤 피조물로 인한 그런 것을 받을라고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전에도 말했지마는 우리는 거룩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요새는 거룩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제가 어떤 녹음을 들었는데 뭐 부산에 기독교 연합회 무슨 연구회라든가 무슨 모임이 있었다고 거게 시청의 무슨 뭐 보안과서 뭘 했는지 주최를 했는지 어쨌는지 목사 장로들 모이라고 한다 해서 사람을 보냈었습니다. 거게 우리 교회서도 두 사람을 보내면서 녹음을 해 가지고 오라 했더니만 녹음을 해 가지고 왔습디다. 그 녹음을 제가 오늘 아침에 들었습니다.
거게는 하나의 기독교 사회주의 하나 도덕주의, 하나 조금 정치주의가 섞인 것이지 순수한 기독교는 거기에 무엇인가 나타나지를 않습디다.
요새 모두 지도자나 또 교인들이나 이 구별하는 구별성을 다 버려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눈도 멀고 귀도 멀고 입도 벙어리가 됐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저 어데든지 소리만 크면, 많은 사람만 있으면 그리 모여듭니다.
우리는 이 구별하는 이 일을 세밀히 해야 됩니다. 구별을 하면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친밀한 부부간에도 구별하면은 싫다 합니다. 동역자끼리도 구별하면 싫다 합니다. 구별을 좋아하는 사람은 성신의 감동을 받았을 새만 좋아하지 다를 때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별이 없으면 주를 보지 못하리라, '아무나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랬습니다. 거룩이 없으면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끄트머리로 보면 거룩과 이거 화평은 정반대 같아서 거룩을 할라 하면 화평이 깨지고 화평할라 하면 거룩이 깨지고 그런 것 같지마는 그 껍데기에서 그렇지 들어가면 화평 없는 데에 거룩이 없고 거룩 없는 데 화평이 없습니다. 거룩이 화평이요 화평이 거룩입니다.
오전에는 대충 해서 우리 구원의 제일 근원은 자존하신 하나님, 거게 대해서 해석은 별로이 구비하지를 못했지마는 그래도 알라면 알 수 있을 만치 간략한 해석을 붙였습니다.
자존하신 하나님 그 다음에 둘째는 하나님이 당신의 소원대로 한번 해 보시기 위해서 당신의 소원인 그 소원을 하나 목적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면 그 목적은 뭐인고 하니 앞으로 이루어지면 모든 천상 천하의 피조물은 발등상이 되고 당신이 목적한 이 목적은 하나님의 몸노릇을 합니다.
하나님은 머리가 되시고 몸노릇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일체된다 말이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은 창조주 우리는 피조물이지마는 이 모든 역사하는 행동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머리요 교회는 몸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이 주장하시고 하나님의 그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교회가 되고 또 만물은, 하나님이 교회에게 주시는 그 은혜를 만물에게 전달해서 만물에게까지 충만케 해서, 영원 무궁토록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은 것이 하나님 한 분의 은혜로 충만해서 다시는 죽는 것과 곡하는 것과, 아픈 것과, 쇠해지는 것과, 낡아지는 것과, 더러워지는 것이 없는 라의 나라를 조성해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는 하나님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하셨고, 또 창조하셨고, 또 창조하신 것을 하나님이 보존하시고, 또 보존하신 것을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섭리하시는 섭리로써 하나님이 창조된 것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운영하십니다. 운영하시는 걸 가리켜서 섭리하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섭리하시는 섭리 중에 당신이 친히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습니다. 또 이 공로를 베푸시고, 이 공로에 참가한 사람들은 누군고 하니 벌써 목적 안에서 지음을 받은, 목적 안에서 잉태되고 목적 안에서 출생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이 나기도 전에 전지하신 지혜로 그가 나 가지고 어떻게 범죄할 그 양을 다 예수님에게 부담을 시켰고 또 어떻게 그 율법의 요구가 있다는 그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에게 다 부담을 시켰고, 또 어떻게 하나님과의 서로 그 성글어지고 나누어지게 되는 그런 모든 것을 부담을 다 예수님께서 다 하셔 가지고 이 세 가지 대속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대속을 베푸실 때에 우리 몫이, 우리 개인의 개인의 구속의 모가치가, 우리 모가치가, 우리 몫이 다 되어 있는데 이것을 실상으로 우리에게 나누어 줘 가지고 우리가 그 구속을 입어 그 영광을 누리고 그 생명과 평강을 누리는 그 일을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마지막 시공의 역사를 떼 맡은 분이 두 분이십니다. 하나는 성령님이요 하나는 인격체는 아니지마는 전능의 능력을 가진 진리, 진리와 성령님이 책임맡고 또 예수님의 피공로가 밑바탕이 돼 가지고 우리의 구원을 개인 개인에게 실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하고 계시는데 여게까지 온 은혜를, 우리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되는 이 은혜까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진리로 살아났다 그말은 우리는 변하지 안하고 늙지 안하고 쇠해지지 안하고 낡아지지 않는, 진리는 영원입니다. 그 진리의 힘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중생된 힘은 진리의 힘입니다. 그러기에 중생된 자는 진리로 삽니다. 또 하나님이신 성령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으로 인격적면에 작용을 하고 진리로 그 법칙면을 역사하셔서 성령과 진리로 영원한 영생을 이루도록 된 것이 우리의 중생입니다. 중생은 우리의 마음이 중생된 것도 아니고 우리의 몸이 중생된 것도 아니고 우리의 영만 중생됐습니다. 영은 마음이 영이 아니고, 양심도 영이 아니고, 이성도 영이 아니고 우리에게 온갖 도덕심이나 그런 것도 영이 아닙나다. 영은 순전히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모형이니 하나님의 모형을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그것은 우리가 그저 성경이 말한 대로 하나님은 형상은 없는, 완전자기 때문에 형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형상을 가지면은 형상 안에 제재를 받기 때문에 완전자는 그 형상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 완전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완전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다 원인 있는 완전이기 때문에 그 완전은 원인에게 소속한 완전이기 때문에 그러나 자존하신 완전은 어떤 그 형체 속에 거게 속박함을 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영체도 없고 물체도 없고 무형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무형의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은 했으니까 그 형상이 어떻게 생겼나? 그 형상은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는 하나님은 자존하신 하나님이라 하는 하나님의 그 자존성, 하나님은 자존하신 하나님이라, 자존, 스스로 계신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라.
하나님의 그 자존을 성경에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생겼느냐?' '그분은 어째 생겼는지 모르지마는 그분은 자존하신이다' 우리가 그렇게 압니다.
또 하나님은 당신은 완전하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형상이 뭐 길고 짜른지 그거는, 이 세상의 물질 천태만상의 형용이 있지마는 그건 형상은 하나도 아닙니다. 다만 그 완전자라, 영원 불변자라, 그는 단일성의 자라.
또 그분은, 그분에게서 지식이 나왔고, 지혜가 나왔고, 또 능력 나왔고, 모든 거룩과 진실과 또 주권과 의 그런 행사를 하신 걸 보아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고 계시 분이시요 그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진실한 분이시다. 그 진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거룩을 하나님의 형상이라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또 로마서 l장에 보면은 하나님의 본성을 본 사람이 없지마는 물을 보아서 그에게 다 나타났다. 그러면 만물을 봐서 하나님이 하신 지혜도 알 수 있고, 또 능력도 알 수 있고, 그분의 성품도 알 수 있고 그분의 공의성이나, 정의성이나, 보수성이나, 복수성이나, 시기성이나, 그 미워하는 투기성이나 그런 것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중생까지는 주셔 우리가 중생을 했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우리가 만일 물질의 힘으로 거듭났다고 하면 물질의 힘을 우리가 떠나면 못 삽니다. 물질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면 물질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 또 이런 무슨 물이라든지 이런 액체로 된 것이면 액체 없으면 안 되는 것이고, 만일 그 얼음이 주위 때문에 줍기 때문에 생겨진 얼음이라면 그 얼음은 주위가 없어지면 녹아지고 안 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성령 감화가 우리에게 떠나면 우리는 그만 죽어져 버리고 안 되는 젓입니다. 또 우리의 힘이 강한 것은 성신의 감화가 강한 것이 우리의 힘이 해지는 것이고 성신의 감화가 충만해지는 것이 우리가 장성해 갈 것입니다.
그러면 성신의 감화라면 우리의 마음같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신의 감화는 자존하신, 그 완전하신, 지존자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을 이렇게 없는 가운데서 창조할 때에 그 감화로 창조했습니다. 그 감화가, 성신의 감화가 나왔을 때에 그 성신의 감화를 나온 그 외부를 말할 때에 진리요 그 진리의 내부를 말할 때에 영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으로 우리가 살아났다 말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역사의 능력으로 우리가 살아났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중생시킨 그 영감은 없는 가운데서 우주와 같은 것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그러기에 그 영감이 우리를 통해서 또 뭐 이런 우주와 같은 것을 만들란지 안 만들란지 몰라도 만들라면 만들 수 있는 그런 능력으로 우리가 살아나 가지고 그 능력으로 우리가 움직이는데 움직일 때에는 그 진리의 법칙대로 그 규범대로 움직여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우리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은 중생이 됐습니다. 영을 사람들이 모두 다 말하기를'영이라 하는 것을 그걸, 영이 뭐 인가? 영이 꼭 있기는 있는데, 영이 성경에 있기는 있는데 어떤 게 영인가? 마음이 영인가 뭐이 영인가?' 이래서 '마음을 영이라'이랬는데, '마음을 영이라, 마음이 영이니까 마치 우리 손바닥을 말하면은 여세는 손바닥이요 여게는 손등이라. 이렇지 마는 그거를 둘로 분리를 하려 하면은, 요 쪼개본다면 어데까지는 손바닥에 속했고 어데까지는 손등에 속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영이요 영이 마음인데 그 하나니까 둘이 하나이니까 외부에는 영이니 마음이니 그렇게 표시가 되지마는 그 내부에 가 가지고는 그 것을 어데까지가 영이고 어데까지가 마음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영이요 영이 마음이라.' 그렇게 해석을 해 가지고 했습니다.
그거는 둘을, 마음과 영이 하나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삐뚤어져서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은 뚜렷이 그거는 육에 속한 것이요 영은 별개의 존재입니다. 성경에 마음을 가리켜서 혼이라고 말했는데 혼은 짐승에게도 있다 이렇게 말했어.
짐승도 혼이 있다. '짐승의 혼은 죽으면은 아래로 내려가고 사람의 혼은 죽으면은 위로 올라간다" 그거는 심판받으러 간다 그말입니다.
그것은 사람만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짐승도 마음이 있다. 사람만 감정이 있는 세 아니라 짐승도 감정이 있다. 사람만 회로애락을 아는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짐승도 희로애락을 아는 마음이 있다. 또 사람만 추억함이 있는 게 아니고 짐승도 추억할 수 있고 사람만 예산을 하는 게 아니라 짐승도 예산을 하고 계산을 하는 그 계산이 있다.
그중에 침팬치라 하는 그런 원숭이가 있는데 말 들으니까 그 원숭이는 호주의 책임을 그렇세 잘 진답니다. 자기 가정에 대해서는 호주 책임은 꿔 침팬치만치만 지면 잘 진다고 그렇게 누가 말합디다. 짐승 가운데도 그런 것 있습니다.
어머니의 자정이 자녀에 대해서 자정 있는 것처럼 짐승도 에미가 그 새끼에 대한 자정이라든지 책임을 지는 것이라든지 같고, '그거는 그렇지만 나중에 크고 난 다음에 변하지 않는가?' 사람도 별수 없습니다. 어릴 때는 뭐 어머니 아니면 죽겠다고 서로 이렇지마는 얼마 지나가면은 새끼는 어머니를 싫어하고 또 어머니도 그 하는 행동 하니까 정이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마음은 영이 아니고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 그래 말씀했고 또 사람을 흙으로 지었다, 흙으로 지은 것은 육이요 또 그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것입니다.
짐승도 흙으로 지었고 사람의 육도 흙으로 지었는데 사람의 육과 짐승의 육이 좀 고등 동물이라 저급의 동물이라 그렇게, 고급이니 저급이니 그것은 붙일란가 몰라도 요소가 있는 것은 고급 저급이지 다 있기는 꼭 같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영은 영만 중생됐는데 그 영이 아담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만물의 이름을 지어봐라" 하고 만물을 그 앞에 모아 놓으니까 아담이 이름짓는 것이 하나님이 생각한 것과 꼭 같이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고 "잘 지었다 선하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중생된 영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서 하나님의 모형대로다.
하나님은 원형이요 영은 모형이요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인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영이요 또 하나님의 모양만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영이요,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만 쓰이지 다른 데는 쓰지 못합니다.
영을 마귀가 쓰는 줄 알아도 마귀가 쓰지 못합니다. 영은 죽어버렸지, 사람의 영이 죽었다고 해 가지고 마귀에게 이용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밖에는 이용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형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나타내지 딴데는 이용이,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만 딱 끊어져 버리면 그만 그거는 그만 죽은 거요.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온갖 당신의 무한하심을 사람의 영이 그대로 그 모형으로 이렇게 나타내는 그것이 사람의 영인데 그러면 영이 나타내는 그것을 그 사람의 육이, 영이 나타내는 것을 육이 또 나타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기덩어리와 마음, 마음과 영, 영과 하나님이신 성령 그 사이가 그렇게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게 다 원형이요 모형이요 그건 차이만 있는 것이지 다 동질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아무리 자기가 마음에는 슬픈데 얼굴은 기쁘게 할라고 아무리 그 가장을 할라고 해도 속에 몰라 그렇지 보면은 그 속에 있는 마음 그대로 몸뚱이나 안면이나 그런 모든 이 피부는 나 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 마음이라는 것은 중생된 사람은 중생된 그 영의 모든 그 형상을 나타내든지, 영과 연결이 되면 영의 형상을 나타내는 그것이 세상의 빛입니다. 영의 형상을 나타내지 안하고 이 마음이 영하고 딱 중간에 그만 끊어지고 절단이 되면은 절단될 그때는 절단시린 자가 악령이기 때문에 절단만 되면은 즉시 악령과 들어붙게 돼 버립니다. 악령과 들 어붙으면은 그 다음에는 그 마음도 악령의 모형이요 또 그 육도 악령의 모형으로 그와 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구원을 지금 이룰라고 하는 것은 무슨 구원을 이룰라고 하는가 하면 건설구원을 우리가 이룰라고 하고 있습니다. 건설구원이라는 것은 어떤 데는 그것을 성화구원이라, 일반 그 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은 성화구원이라 하는 그 말을 대개 씁니다. 건설구원이라는 그건 말도 잘 안 씁니다.
성화구원이라 그렇게 말하고 또 행위구원이라는 말도 잘 안 씁니다.
성화구원이라, 행위구원이라, 건설구원이라 이렇게 성경에서 말을 해 놨는데,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을 어떤 교파에서는 '구원은 하나라' 그렇게 말합니다.
'구원은 하나라' 이것도 옛날 미개할 때에, 미개할 때에 교리와 신조가 나타났을 때에 그때 '구원은 하나라' 그렇게 된 것이요 지금 더 세상이 발달됨에 따라서 죄악이 관영해지니까 믿는 진리도 세밀히 말하지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부득이 해서 세밀히 말하는 그런 자꾸 많은 교리와 신조가 자꾸 따르게 됩니다. 그러면 그 교리와 신조가 새로 생긴 거는 아니고 성경에 있는 것을 깨달아 가지고 고와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둘로 나누어 가지고 기본구원이라, 히브리서 6장에도 보면은 '너희들의 구원의 터는 이미 닦아놨으니까 새로 터를 닦지 말고 터 닦은 그 위에다 구원을 이루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기본구원은 우리가 이미 얻어놓은 구원이요 순전히 그것은 하나님 은혜로만 된 구원이요 그 구원이 가치 있는 가치가 더 귀한 구원이오 건설구원, 성화구원, 행위구원이라고 이래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구원의 그 혜택을 힘입어 가지고 사람이 그 은혜를 입어 가지고 그 은혜를 입어서 입은 그 은혜로 가지고 이루는 것이 성화 구원이요 건설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건설구원에는 인적 공로의 요소가 거기 들고 기본 구원에는 인적 공로의 요소는 하나도 들지 않습니다. 순전히 하나님 혼자 하시는 객관의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본구원은 무엇 무엇이 기본구원인가? 이것은 우리가 꼭 같이 얻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본구원이나 우리 기본구원이나 또 제일 잘 못 믿는 사람, 하늘나라 가면 저 마지막 제일 낮은 자리에 있는 그 사람이나 기본구원은 꼭 같습니다.
기본구원은 인간의 행위로써 얻을 수 없는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로만 얻는 것인데 이 구원은 참 심히 거룩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이 기본 구원은 인간의 그 공로가 조그마치라도 섞여 있으면 그 구원이 안됩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구원입니다.
기본구원은 공으로 얻는 것인데 가치가 없어서 공으로 얻는 게 아니라 기본구원에는 아무리 성자의 노력이라도 거게 조그마치만 가해도 그것 때문에 더러워져서 지극히 공평된 하나님의 심판을 면제받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은 예수님이 다 담당을 해 가지고 해결을 지웠고 해결지운 사람들만 따로 모아놓고 이제 건설구원이라는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하늘나라에 간 사람들의 등급과 모든 권위와 또 영광과 업무와 이용 가치의 그 차이를 두는 것이 그것이 건설구원입니다.
그러면 기본구원을 제가 몇 가지를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기본구원은 이미 입었는데 입은 기본구원은 자존하신 하나님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는 자존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우리가 받게 됐습니다.
또 다음에는,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셨는데 그 목적을 우리가 입어서, 목적 안에서 우리가 출생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목적 구원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우리가 받았습니다.
또 우리는 중생하는 중생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 아버지의 양자 아들이 됐습니다. 이거는 우리 노력으로 된 것 아닙니다. 양자 아들이 됐습니다.
또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성령과 진리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기 우리 구원에 대해서 보증자가 됐습니다. 책임자가 됐습니다. 그러면 이 셋 보증의 구원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이것도 기본구원입니다.
또 사망과 마귀와 죄의 그 왕권 아래에서 우리가 해방을 받아서 사망이 우리에게 왕노릇 하지 못하고, 죄가 왕노릇 하지 못하고, 마귀가 왕노릇 하지 못하는, 마귀와 죄와 사망의 왕권에서 우리는 해방을 받아서 자유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무것에라도 붙들리지 안하는 자유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았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부른 것은 자유케 하기 위해서 불렀다. 자유케 하기 위해서 불렀는데 이 자유는 제한된 자유가 아니고, 불의의 자유가 아니고, 범죄의 자유가 아니고 이 자유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평가적인 자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 자유는 옳고 바른 참된 자유입니다.
또 우리가 하늘나라를 우리의 나라로 받았습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전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다 받았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공로로 받은 것이지 우리의 무슨 공로로 받은 것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우리들이 받았습니다 또 우리는 이다음에 사람의-신불신자가 다 부활할 터인데-부활 때에 그때에 우리는 사망의 부활을 받지 안하고 생명의 부활을 우리가 받게 됐습니다.
그러면 부활은 두 종류가 있는데 영원한 사망의 시발로 부활하는 그 부활이 있어서 그 부활을 성경에 말하기를 사망의 부활이라고 말했고 우리는 이제 영생하는 나라에서 영생하기를 출발하는, 그 모든 이 영육이 영생하는 그 나라의 생애를 출발하는 그 부활이라. 그래서 그 부활을 성경이 말하기를 주님이 생명의 부활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생명. 우리는 생명의 부활을 벌써 받아놓은 것입니다. 아직까지 생명 부활할 때가 안 돼 그렇지 아무리 잘 못 믿는 사람이라도 택한 자는 다 생명의 부활을 벌써 받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이 심신의 성화, 심신의 성화, 이 심신이 성화되는 것, 심신이 행위로 온전해지는 것, 심신을 온전한 행위로, 온전한 그 지식으로 온전한 육으로 건설하는 이 건설을 실상으로는 지금 우리가 이뤄가야 되지마는 법적으로는 벌써 이루어져 받아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것도 기본구원입니다.
또 모든 피조몰, 어떤 피조물이든지 천사든지 무엇이든지 어떤 피조물 우주에 뭐 말하는 것, 지금 요때는 핵 세력이 나 가지고 뭐 인공위성이니 말해 쌓는데 그 인공위성도 실은 그 만든 그 사람들은 그 인공위성의 효력을 하나도 자기들은 이용할 수 없지마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인공위성의 효력은 믿는 사람들이 다 이용을 다 해 먹었습니다. 그 이용하는 거는 세상이 모르는 것이요 또 그분들이 이용하는 건 이용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사망에 이용하는 것이고 우리는 생명에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용하는 방편도 그분들은 모르고 또 이용할 줄도 모르고 이용하는 자기네들에게는 그것만 이용이 되면 자기들이 죽고 망하기 때문에 그 이용을 안 하고 피할라 합니다. 우리가 이용해야 되지.
기이합니다.
또 우리가 천년왕국을 벌써 기본구원으로 약속돼 있습니다. 뭐 잘 믿으나 못 믿으나 반드시 죽으면 생명 부활해 가지고 천년왕국 시대에 가 가지고 자기가 세상에서 어느 정도 준비를 한 그대로는 거기 가서 훈련을 받습니다, 거기서 통치 훈련받는 건데 그때 아무런 뭐 할 일 없는 사람은 그저 그냥 지내도 천년 동안 지내기는 거게서 지내게 됩니다.
또 그 다음에는 우리는 자유를 완전히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이 기본구원입니다. 기본구원인데 우리가 기본구원 얻은 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냐 하면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되어지는데 그 예정을 기본구원 얻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 예정이 기본구원 얻은 사람들을 위해서 예정 됐기 때문에 기본구원을 얻은 자의 구원을 위해서 예정된 그 예정을 다 써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다 우리가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영계뿐 아니라 물질계의 모든 창조한, 그 창조되어 있는 이 피조물들을 또 기본구원 얻은 사람들이 이것을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또 만물이 탄식하면서 고대하고 있는, 이 만물이 탄식하면서 고대하고 있는 것은 기본구원 얻은 사람들이 기본구원대로 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뭇아들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을 기다린다' 그말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들이 진리와 성령으로 사는 것을 기다린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진리와 성령으로 사는 것을 기다리면 뭐 할라고? 진리와 성령으로 살 때에 그에게 속하고 그때에 활용되고 이용되는 모든 만물은 그 생명의 역사에 속했기 때문에 그것이 앞으로 무궁세계가 건설될 때에 그런 것들이 다 무궁세계에 새로워지는 만물로서 다시 그 만물도 늙거나 쇠해지거나 안 하고 언제든지 청청한 산 것으로서 새로워지는 그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주권적으로 모든 것을 역사하시는데 하나님이 주권으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의 주권을 내가 얼마든지 혜택을 입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고 얼마든지 입을 수 있고 얼마든지 그 주권의 혜택을 우리가 전적 입을 수 있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기본구원 얻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그 모든 역사를 자기를 위해서 역사하도록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요 기본구원을 얻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주권은 자기에게 죽음밖에 안 됩니다. 대항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이 이제 우리가 이미 얻어 가지고 있는 기본구원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궤휼이 없는 순전한 그 하나님의 도의 젖을 사모하라' 이랬는데 우리가 이 기본구원은 우리의 뿌럭지요 우리의 둥치입니다. 이 기본구원은 우리의 뿌럭지요 우리의 둥치입니다 남의 것이 아닙니다.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비유건데 우리 어머니의 젖과 같습니다. 이 기본구원은 이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어머니와 같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나와 가지고 이런 은혜가 나왔다 저런 은혜가 나왔다 하는 그 은혜를 이제 말한 것이 한 열대여섯 가지 말했습니다 열대여섯 가지 말했는데 이것이 하나님께로서 나와 가지고 우리 택함을 입은 우리들을 위해서 이 은혜가 와 가지고 이 모양으로 저 모양으로 설치돼 가지고 그 은혜가 다 우리에게 연결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연결이 돼 가지고 있으니까 비유건데 기본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놓고 계시는 젖줄기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본구원을 받은, 기본구원은 우리가 먹고 장성할 수 있는 어머니의 젖, 하나님 아버지의 젖과 같다.
그러기 때문에 마치, 그거는 비유입니다. 젖은 그 아이가 빨아먹기로 돼 가지고 있고 빨면 나오기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이 근본 법칙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중생된 사람들이 기본구원을 자꾸 빨면 거게서 젖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거는 우리 위해서 있고 우리에게 벌써 주어진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를 받아 가지고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은혜를 받는 걸 하나님이 기뻐하지 그 은혜 받지 않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에게 구하라 얼마든지 주신다' '네가 정함이 없는 물질에 소망 두지 말고 항상 변하지 않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에게 네가 소망을 두고 거게 대고 자꾸 빨아대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기본구원과, 기본구원 외에 다섯 가지를 말했는데 그러면 총 합해서 아마 열일곱 가지인가 되는갑습니다. 뭐 가지 수를 이래 열일곱 가지뿐만 아니라 그 이상에도 숫자를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 열일곱 가지만 우리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우리와 자존자 이 하나님 사이에 이 연결되어 있는, 한 말로 말하면 기본구원입니다. 연결되어 있는 기본구원이니까 이 구원만 물고 시루면 이제 하나님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옵니다. 그저 자꾸 빨아대면 됩니다.
젖은 하나님이 만들 때에 사람의 젖도 빨면 나오게 만들었으니까, 어떤 사람 보니까 자기, 그만 아이는 낳아 놓고 자기 부인이 죽었는데 요새야 뭐 우유니 이런 것 안 했습니까? 옛날, 지금으로부터 한 육십여 년 전 그때는 그런 게 없었어. 없었는데 엄마가 죽으니까 그 할머니가, 자꾸 자꾸 젖을 빠니까 인제 할머니가 나이가 많아서 그거는 뭐 벌써 아이 낳은 지가 오래 되는데 자꾸 빠니까 젖이 나와. 그래 가지고 쏴 할머니 젖을 먹고 손자가 자라요.
그래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자기 마누라가 그만 일찍 죽었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야, 그렇더라. 그러니까 한번 젖을 빨려봐라.' 이러니까 아버지 젖을 빨리니까 아버지의 젖이 뭐 아파서 못 견뎌 못 견뎌 나중에 가서 뚱뚱하게 이래 더니마는 그 젖이 나오는데 그렇게 툭툭하게 많이는 나오지는 안해도 젖이 나오더라고. 어떤 사람 내가 말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암죽도 먹이고 젖도 빨리고 그래 키우는 3 내가 봤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본구원을 주신 이 구원을, 우리가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을 말이지요, 하나님과 같은 우리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심의 그 온갖 요소를, 요소인데 그 은혜 요소 하나님의 본체는 우리가 안 되지마는 하나님의 그 은혜 요소를 무한한 은혜를 우리가 빨아 가지고 하나님의 욕구에 만족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목적 달성이 되어지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본구원을 젖 빨듯이 빨라 하는 그거는 비유인데 젖 빨듯이 빨라 그말은 기본구원을 자꾸 생각하라 그말입니다. 자꾸 생각하면, 자꾸 생각하면 어떤 근심 걱정 속에서도 근심이 물러가고 기쁨이 나오고, 어떤 강한 세력이라도 자꾸 빨면 강한 세력 그것이 내 발 아래 밟히고 맙니다.
인간이 제일 두려워하는 게 죽음이지마는 기본구원을 대고 자꾸 생각하고 연구하고 자꾸 생각하고 그로 통해서 명상하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간구하고 자광 이래 하면은 이제 그 사망이 변하여서 기쁨으로 화해질 수가 있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 다 체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요새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은 몽둥이를 들고 회개 해라 이래 독촉을 하고 우리는 지금 뭐 요새, 어제 나는 6·25날 그날 산에 기도하러 가려고 했는데 안 가고 6·25를 테레비 봤습니다. 6·25 테레비 보니까 6·25 테레비를 그걸 뭐 프로그램을 정해 가지고 만들었는데 아무 실감이 없이 맛이 없어.
이래 가지고 '오늘 헛일했다' 이랬는데 나중에 그 뒤에 따로 하나씩 둘씩 나오는 그때 참 그거 실지로 되어진 그런 것을 자기네들이 느껴 가지고 해 놓은 걸 보고서 수입을 많이 봤습니다. 6·25를 한번 더 치러봤어.
보니까 제가 치른 것과 같은 그런 치른 것이 새로 한번 새삼스럽게 한번 생각해져서 그때에 믿음 없었던 것도 생각나고, 그때에 믿음이 있었던 것도 생각나고, 하나님의 권능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도 생각나고, 또 하나님을 믿지 안하고 딴것 믿다가서 낭파당한 것도 생각나고, 여러가지가 생각나서, 제가 생각하기를 '야, 이거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이 6·25는 이것 좀 보여야 되겠는데.'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왜? 앞으로 전쟁이 툭 터져 가지고 하면은, 뭐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잃지 말라 하는 말과 같이 그 6·25니 그런 전쟁나도 그거 내나 사람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 별게 아니라. 정신만 딱 차리고 있으면 괜찮은데 잘못하면 그 중에 총소리 꽝꽝 하고 왔다 갔다 하는 그 바람에 그만 정신 잊어버려 가지고 실패하기 쉽다 그말이오.
그럴 때라도 주님만 꽉 거머쥐면 그분은 전쟁을 낼 수도 있고 막을 수도 있고 합니다. '암만 그렇지만 폭탄 속에서야?' 아, 폭탄 속에 구원 얻는 능력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번 6·25 때에, 내가 그 교회 이름을 잊어버렸어. 오면서 차를 타고 오면서 '저 교회가 그 교회입니다.' 이래 차를 타고서 부산을 내려오니까 오른편으로 산 밑에 있는 교회인데 다른 건 다 탔는데 그 교회는 그대로 있어.
그 교회에 다니는 문둥 환자가 하나 있었어. 문둥 환자가 하나 있는데 그분이 그 예배당에서 나가지 안하고서 어쨌든지 말이지요, 그게 하나님의 성전은 아니지마는 '하나님의 성전을 내가 지켜야 되지 저 인민군에게 내줘 되는가? 또 폭탄에 불을 태워 되는가?' 이러면서 거기서 기도를 하고 앉았어. 앉았는데 이제 그 부근을 때릴라 하니까 거기서, 그때 그분 말하기를 뭐 한 요만치, 둥치가 한 요만치 되는 건데 그러니까 그 상당히, 그만 하면 뭐 굉장히 많은 폭발을 합니다.
제가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이 하나 떨어진 데를 가 보니까 그때 그 버드나무가 한아름 되는 게 있는데 이 한아름 되는 버드나무 옆에 떨어졌는데 버드나무가 뿌리까지 뽑혀 가지고서 저 얼마나 갔든지 아마 여기서 저게 주유소만치 날아가 버렸을 겁니다, 이만한 버드나무가 아주 힘이 세요.
이랬는데 그리 큰 폭탄이 떨어졌는데 떨어지기를 어데 떨어졌느냐? 바로 예배당 옆에 담 옆에 떨어졌어. 담 옆에 폭 꽂혀 가지고 있었지 폭발을 안 했다 그말이오. 그것 뭐, 하나님께서 사자 입을 막은 그 능력이나 그거나 비슷해요.
그런 것이 6·25 때는 많았습니다, 그런 간증이.
이러니까 암만 그런 때라도 정신 차려서, 그게 시험이니까 시험에는 어떻게 하라고요? 시험에는 이기는 게 어떤 법이라고요? 시험에는 굳게 잡는 건데 저게 있는 학박사들은 다 모릅니다. 저게 박사들도 다 있지마는 그거 몰라.
우리에게 시험 오는 것은, 시험 오는 건 하나님이 네가 나를 참 믿나 안 믿나? 바라보나 안 바라보나? 내 약속을 참말로 믿나 안 믿나 내 권능을 믿나 안 믿나? 내가 너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나 안 믿나? 전부 당신에게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가 그것 시험입니다. 딴것 시험 아니라.
이러니까 그때는 이기는 방법이 뽈끈 잡는 거라. '주여, 믿습니다!' 의심 안 하고 '믿습니다!' 당신만 믿으면 당신은 그 믿음을 통해서 일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하는 것을 당신을 전능자로 믿을 때에 전능으로 일할 수 있고 당신이 나를 보호하시니 불 가운데도 어데 가든지 당신이 나를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에 당신은 보호하실 수가 있지마는 안 믿는 자는 보호해 줄 수가 없다 그거요. 그래서 이거 한번 보였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가졌습니다.
마지막에 결론으로 우리가 요 기본구원을 자꾸 생각하면 거게서 필요 없는 근심은 물러가고 필요 있는 근심은 생겨지고, 근심도 다 물러가면 안 됩니다.
근심도 좋은 근심이 있어. 그래서 하늘에 속한 근심도 있고 땅에 속한 근심도 있고 성경에 그래 말했습니다. 또 욕심도, 욕심도 좋은 욕심은 자꾸 생겨지고 나쁜 욕심은 자꾸 물러가고, 이 겁도, 겁도 좋은 옳은 겁은 자꾸 생겨지고 나쁜 겁은 물러갑니다.
'아이고, 공산주의가 오는데 저것은 뭐라 한다. 인민 재판이 난다, 뭐 어쩐다.' 이래도 그 무서움, 그 두려움은 다 달아나 버리고 무섭지도 하나도 안 하던 하나님이 '아이구, 하나님에게 대해서 털끝만치라도 범할라?' 안 무섭던 것은 무서워지고 무섭던 거는 물러갑니다.
이래서 6·25 때 한 달 동안, 청년들이 뭐 처어치인가 뭐이 쓰라 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하루 열 번 죽고 열 번 살았어. '어라-하나님 생각하고-그저 어쨌든간에 모든 것 다 맡깁니다.' 그저 맡길 때에 다, '죽고 사는 건 당신에게 맡깁니다.' 죽음의 염려가 하나도 없이 다 맡기면은 그만 기쁘고 평안하고 즐거운데 그러고 난 다음에 또 살고 싶은 게 나오면은 또 죽을 지경이라.
살고 싶으면 죽을 지경이고 생명 내놓으면 살고, 그때 참 체험해. 그만 죽고 싶으면 평안하고 밥맛도 있고 아주 평안하고 살고 싶으면 도무지 등골에 땀이 차고 눌려서 살지를 못해, 견디지를 못해요.
이러니까 이 젖을 자꾸 빨면, 자꾸 생각하고 묵상하고 묵상하면, 기이합니다.
못쓸 것은 다 달아나고 좋을 것은 자꾸 생겨집니다.
하나님을, '이렇츰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목적하시고 뭐 이것 다 이것 때문에 내 구원 때문에 해 놨는데 이 구원에서 당신이 손을 뗄 건가?' 뭐 또 모든 걸 생각할 때에 '주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이런 저런 예정하시고 영원까지를 전지자가 예정했는데 그 예정에 잘못 오산이나 그런 것이 있을 것인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은 내 구원을 위해서 예정했다는 것이 자꾸 믿어지고 믿어지고 하니까 무엇이 있어도 이거는 내 구원 위해 있다는 것이 자꾸 믿어지니까 안심하고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전부 내 구원을 위해 있으니까 구원에 대해서는 안심할 수밖에 더 있습니까? 또 모든 것을 볼 때에'이거는 누가 창조했지? 일부러 묻습니다, 알면서.
'이거는 누가 창조했지?' '우리 주 하나님이 창조했지.' '뭐하려고 창조했지?' '당신의 목적 위해서 창조했지.' '당신의 목적이 뭐인데?' '그것이 교회지.' '교회가 뭐인데? 내 구원이지 내 구원. 내 구원 위해서 창조했지.' 자꾸 이리저리 물어서 이래 하면 그러고 난 다음에 나 위해 창조 했으니까 나 위해서 존재한 것이 벌써 지을 때에 그 창조의 목적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지었는데 오늘까지 보존한 것이 우리 구원대로 보존하는데 그것을 여러 수십 번 자꾸 개조하고 개조해 가지고서 우리의 구원까지 보존을 했는데 우리 구원에 대해서 필요하게 당신이 쓰시는 것인데 내 현실에 닥친 것이니까 '요때가 나 위해서 쓴 것이고 나 위해 쓰기 위해서 보존하고 창조한 것이다.' 하니까 얼마나 안심하니까? 그러니까 기쁘게 '이 보배는 오기는 왔는데 이거 잘못 사용하면 되니까 이렇게 하면 잘 사용할까?' 두려운 것은 간 곳 없고 '어떻거 하면 잘 사용할까?' 그 사용할 그 마음만 있으니까 좋다 그말이오.
마치 처음에는, 아이들이 모르고, 병아리라 하는 고기, 요만한 게 참 맛있습니다. 그 병아리가 겁이 나지마는 한번 지져먹고 나이까 이제 아이들이 맛이 있어놔서 이게 막 툴툴툴 하니까 놀라기는 놀라도 아버지가 그 병아리를 따면 옆에 앉아서 침을 꿀떡꿀떡 삼키면서 어서 따 가지고 끓여 주면 맛있게 먹겠다 싶어서, 이것 모양으로, 살은 그거 현실이 오는 것이 뭐 푸덕거려 쌓아니까 염려가 나도 '요놈 어서 요것으로 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이니까 요 구원에 잘 이용해야지.' 침이 꿀떡꿀떡 넘어간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나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하는 기쁨이 어데서 나오는가? 이 기본구원을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고 묵상하고 묵상하고, 새기고 새기고 하니까 다 나와요, 누구든지 다 나와요.
누구든지 뭐 젖줄기 빨면 짖 나오지 안 나오는 겁니까? 다 각자에게 다 하나님이 젖줄기 다 물려놨는데 그 기본구원 젖줄기는 꼭 같아 기본구원은 꼭 같애요. 자꾸 생각하고 자꾸 생각하고 소망하고 그만 간구만 하고 노력만 하면 자꾸 쭉쭉 나와요.
이러니까 우리는 벌써 영은 중생을 해 가지고 영생을 가졌는데,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하니까 영은 살아서 믿으니까 영원히 안 죽을 것이고 육은 또 성화되면 안 죽을 것이고, 또 말하기를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자는 찾을 것이고 목숨을 찾기 위해 서 나를 버린 자는 잃으리라' 했으니까 그거 얼마나 쉽습니까? 자꾸 이래 새김질을 하고, 또 '성령과 진리와 주님의 피공로가 나를 보증하고 계시는데 문제가 뭐인가?' 야, 저거 김일성이 왔다.' '김일성이도 나 위해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택한 사람 같으면 구원 얻을 것이고 택하지 안했으면 내 구원 위해서 이용물로 된 것이니까 택했든지 안 택했든지 어쨌든지 내 구원 위해 지음받았기 때문에 내게는 유익이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라.
우리의 구원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천국 얻었으니까 이 세상 것을 세상 것 위해서 할라 하니까 경쟁자가 많지, 세상 것을 위해서 할라 하니까 썩은 걸 취할라 하니까 경쟁자가 많지 이 천국을, 천국의 것을 취할라 하니까 사람들이 초기라서 그걸 모르요, 지금. 이 보배를 몰라.
내가 말 들으니까 어떤 섬에 거기 보석이 나오는데 그 보석 나오는 것을 그 사람들이 뭐 거기 있는 토인은 모르고 또, 모르는데 아 문화인들이 가 가지고, 보석을 가지러 배를 가지고 가 가지고 배에다가 먹는 걸 좀 갖다놓고서 그래, 이래 가지고 갖다 놓고 이러니까 그 모두 야만들이 토인들이 와 가지고서 빵 하나만 줘도 보석 주먹덩이만한 것 하나씩 주고 이래 가지고 아주 그때 뭐 처음에는 부자가 됐답니다.
그래 인제 유대인들이 제일 눈이 밝은데 유대인들이 그런 일 잘하는데 유대인들은 장사를 하는데 '에이구, 저거 뭐 점포를 늘여놓고 뭐 가게를 늘여놓고 뭐 공장을 차려놓고 그래 쌓아?' 그저 가방 하나 딱 들고 요래 가지고 가면은 그게 수억대라, 수억대. 그저 오고 가고 이러니까, 그 사람들은 전부 보석 장사 그렇게 가치 있는 그런 장사한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천국을 소망해 가지고 천국의 수려을 볼라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나도 방해하지 안하고 경쟁자도 없고 천국 수입을 볼라 하니까 자꾸 잘 보도록 도와만 줍니다. 김일성이도 와 가지고 '너 이놈 죽인다' 하니까 천국 수입에 천국 수입 되는 것, 김정일이가 와서 하는 것도 천국 수입 되는 것, 밸갱이가 와서 그래는 것도 천국 수입 되는 것, 안 믿는 사람이 저놈 예수 믿는다고 욕하는 것도 천국 수입되는 것, 전부 천국에 수입만 주지 해 주는 거는 하나도 없어요 인제. 자기의 소망을 천국으로 바꿔 놓으니까.
이렇지, 이다음에 뭐 죽어도 부활할 걸 믿으니까, 이러기에 죽는 데는 사람이 사는 것 반 죽는 것 반인데 사는 것도 일생 동안을 주를 위해서 사는 그것은 순생이라는 가치 있는 생활인데 그 가치의 중량이나 자기의 죽음을 가치 있게 죽는 중량이나 중량이 같습니다.
이러니까 순생은 일생 동안 살아서 가치 있는 것 만들지마는 죽음이라는 건 이미 죽을 폐물을 일시에 잘 이용해 가지고 일생 동안 순생한 그 가치를 만드는 것이 죽음을 이용하는 것이라 말이오.
알고 보니까 이러니까, 부활이 있고 이러니 그 죽음을 이용할 수 있는 그런 때가 올 때에 그 얼마나 좋은지? 그러니까 손양원 목사님은 만날 그걸 원하고 하다가 그때 6·25 때 당했는데, 주남선 목사님, 주남선 목사님은 평생 소원이 순교인데, 교인들이 저 피난 가서 주일날은 거기 가 예배 보고서 아침이면 월요일 아침에 일찌거니 인제 행여나, 순교를 당할까 해 가지고서 인민군 옆에 갔는데 예배당 옆에 거기 와 계시는데 마지막날에는 그만 예배보러 가다가 다 가다가 다리를 꼼쳐 가지고서 가서 예배를 보고 나 통통 부어서 뭐 기지도 못하겠고, 기어오지도 못하고 못 와서 할 수 없어서 뭐 거기서 사흘인가 이래 좀 거기서 누웠었는데 그머리 그만 인민군들이 그만 지나가고 후퇴해 가 버렸다 말이오. 그만 순교를 못 했어.
그래 놓으니까 뭐 그 목사님이 어떻게 원통하게 하고 이러든지, 그러더니마는 '에이고, 나는 인제 순교는 못 하겠고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외치다 죽겠다.' 이래 가지고 협천읍교회 가 가지고 얼마나 사경회 인도하면서 설교를 힘있게 큰 소리로 했든지 그만 간이 부어 가지고 죽었어, 간이 부어 가지고. 의사가 오는데 '아이고 너무 소리를 크게 해서 간이 이렇게 부어 놨으니 다시 치료 불가능입니다.' 간이 부어 죽었는데 그것도 뭐 한 시간이라도 일찍 죽은 것 아니야. 그것도 주를 위해서 죽으니까 역연 비슷한 순교가 됐다 말이오. 만고에 이리 누워도 유익 저리 누워도 유익, 진리를 알고 보면 유익뿐이지 손해는 우리에게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건설구원 이것도 법적으로는 다 얻어 놨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다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만 이제 수속만 밟으면 돼. 그러니까 사죄를 벗지만 안 하면 돼. 암만 인민군이 벗으라 해도 사죄 벗어 주지 말아요. 또 암만 칭의를 벗으라 해도 칭의 벗어 주지 말아요. 안 벗으면 돼, 그만. 뭐. 법적도 다 돼 가지고 입고 있는 것이니까 벗지만 안 하고 사죄 받은 자로 현실을 통과하고, 칭의 받은 자로 통과하고, 하나님과 화친한 자로 통과하면 그만 다 돼 버리는 거라.
그런고로 우리는 자꾸 기본구원을 생각해야 됩니다. 기본구원을 생각하면 젖줄기 모양으로 거게서 자꾸 힘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존,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보존, 하나님의 섭리, 그리스도의 구속, 또 세 가지 보증, 모든 이루어지는 순서는 나 위해서, 모든 보이는 것 뭐 모든 만물은 나 위해서 존재하면서 탄식하며 고대하고 있는 것, 그들이 이용하기를 칼로 가지고 우리를 찌르려고 이렇게 하고 있지 칼을 이용하지, 칼은 지금, 나를 그래 찌를라고, 그거 악인에게 칼이 들려 가지고서 나 찌른다고 이용을 당할 때에 칼은 있다가 뭐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칼의 말을 들으면 그럴 거라. '하나님 아들 영원한 내 주인공 될 분이시여, 이 칼로 찌를라 하는데 칼을 겁을 내지 마십시오. 내가 이거 찌를라 하는 것 이것은 그들이 지금 당신의 구원과 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이런 것이니까 부디 성령과 진리의 자유대로 행하고 자기 굴하지 말고 진리와 영감대로 사십시오.' 그렇게 지금 칼이 호소를 하면서 탄식하면서 간청할 거라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가 이런 위기에 당했으니까 어짜든지 기본구원을 자꾸 생각하십시오. 기본구원을 자꾸 생각해요. 생각하면 우리가 거게서 옳은 깨달음이 나오고, 옳은 비판과 평가가 나오고, 옳은 욕심이 나오고, 그러면 옳은 방편이 나오고, 또 그것뿐입니까? 내가 그래 가지고 믿으니까 '네가 믿는 대로 되리라'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그대로 역사할 수가 있어.
우리 믿는 것보다 더 좋은 것 없습니다. 믿는 것보다 더 귀한 것 없습니다. 참 우리는 복있는 사람이오. 우리가 땅위에 부러울 것이 뭐 있습니까?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어. 다 그것은 사망에 속한 것들입니다. 생명과 신령에 속한 것은 다 우리의 것이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갑자기 기도할 것은 '주여, 오늘 하나님이 한번 더 새김질해 새로 가르쳐 주신 이대로 이제는' 요대로 지식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는 대로 지식하는 것이오. 이제 믿음의 지식으로, 하나님이 '요렇다' 하니까 내가 '예, 그렇습니까?' 하고 그대로 하는 것이 뭐이냐? 하나님께 순종하는 지식이라, 순종하는 지식. 믿음으로 하는 지식, 믿음으로 가지는 지식, 믿음으로 가지는 소망 하나님이 소망하라 하니까 내가 소망하니까 하나님 따라 소망하기 때문에 믿음의 소망이지. 믿음으로 소망, 믿음으로 지식, 믿음으로 실행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당신 능력 줘서 할라 하니까 믿음의 실행이지 믿음의 실행, 믿음의 인내. 그런고로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작정하고 요대로 잡아 가지고서 오늘 저녁에라도 기도하러 가거들랑 하나씩 둘씩 꼭꼭 다져 가지고서 또 다져보고 다져보고 다져봐 가지고서 놓지를 말아요. 떨어지면 안 돼요.
저 대구 OO교회에 OOO조사님 여러분들이 알지요? 이런데 그분이 이 배 안에 이렇게 부어 가지고서 이거는 뭐 병원에 가서 서 병원에 가니까, 큰 병원에 다 갔는데 '이거는 치료 못 하니까 아 이거는 치료할라고 생각지를 말라'고서.
이래 가지고 이래 가지고 있는데 그래 인제 저 어데 가서 있으면서 뭐 석 달이라던가? 석 달 동안만 거기 있으면 된다 한다고 이러 때문에, 요번에 대구집회 왔어. 그래 내게 하기 때문에 '석 달 동안 O목사님이 한 달에 한번씩만 오고 석 달 동안 가서 그래 좀 치료,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O조사가 나 시키는 대로 하라 어데? 나 시키는 대로 할 것이가?' 이러니까 '예, 하겠습니다.' '그러한 주일도 빼지 말고 설교를 해라. 설교를 하는 데는 조건이 있다. 네가 이 젖줄기를 놓지 말고 젖을 계속 빨아라. 젖을 계속 빨면은 병도 그까짓 거 다 물러갈 것이고 네가 설교도 할 수가 있을 것이고 젖줄기를 놓고 엉뚱한 짓을 하기 때문에 안 된다.' 내가 이래 가르쳐 주니까 하겠습니다.' 이래.
그래서 그래 보냈더니마는 그날 저녁에 기별이 왔어.' '아이구, 목사님 시키는 대로 인제 설교 주일마다 설교하고 그래 해 볼랍니다.' 그래.
그래서, 또 그 이튿날 아침에 내가 또 걱정이 돼서 내가 또 사람을 보냈습니다.
보내 가지고 '네가 석 달 동안 쉬고 그래 OO목사님이 석 달 동안 오고 그래 해라. 공연히 내가 시키는 것 네가 하지 못할 터인데 못하면 네가 못 해 그렇다 소리 안 하고 결국은 나 때문에 실패했다고 할 터이니까 아예 가서 쉬든지 어짜든지 하고 그래 해라.' 이러니까 그래 그뒤에 또 답이 오기를 '아이고 제가 합니다.' '그러면 네가 해 봐라.' 이랬더니마는 그만 그대로 한 모양이라.
하니까, 전화가 저 먼저께 왔는데 뭐 세 번 왔던가 네 번 왔던가 와도 그만 전화를 통화를 못 했어요. 못 했는데, 나중에 전화로 안 되니까 달리 어떻게 와 가지고 왔는데 '인제 고러니까 병이 다 나았으니 이제 그래서 기쁜 소식을 목사님한테 알려 드립니다.' '너 젖줄기 빨아서, 그 줄이 장 있는 게 아니라 그만 젖줄기 놓으면은 또 배만 고프면 또 탈난다. 빨아라.' 이랬는데 OO목사 한 달 오고 말았어요. 말았는데 지금 설교 잘 하고 있고 교회가 잘 부흥된답니다.
주님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 말씀한 게 하나도 틀림이 없어.
그대로 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대로 하는 자는 성공합니다. 그대로 하는 자는 다 천국이요 평강이요, 그러나 그 어기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지.
다 같이 한번 통성으로, 이제 작정만 해요. '이제는 기본구원의 젖줄기를 놓지 않겠습니다.' 기본구원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 줄을 맺어놓은 그 젖줄기 같은 것이니까 내가 자꾸 빨면 하나님의 뭐 온갖 골고루 무한함이 자꾸 우리에게 와서 모든 것이 구비하게 돼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