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구원

 

1988. 5. 22. 주일오후

 

본문 : 고린도전서15장36절-42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우리 부활에 대해서 곡식 종자를 가지고 비유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밀이든지  다른 어떤 알갱이를 뿌리면 그 뿌린 씨가 땅에 심기지, 안하면 싹이 나서  자라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땅에 심기워지면 싹이 나서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알갱이 속에 생명이 있으면 땅 속에 들어가면 썩는 거 같고 죽는 거  같으나 그것이 다시 생명으로 변화돼 가지고 자랍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씨는  땅 속에 들어가면 아주 썩어 버립니다. 그래서 생명 있는 씨와 생명이 없는 씨가  다르다 이렇게 여기에 비유했습니다. 요런 것도 단단히 잡아야 합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 아닙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여워하십니다.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누어져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택을 입은 자로  하나님에게 예정된 자가 있고 하나는 창조할 때에 예택 입은 자를 위해서  이용되기 위해서 창조된 사람 있습니다.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예택을 입은  자와 예택 입지 못한 자 두 종류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예택을 입고 못 입은 이 구별을 하는 것을 기독교가 다 하는 게  아니고 정통이라고 하는 사도 교회들이 이렇게 믿고 그후에 좀 많이 변해진  알미니안주의나 이건 교파들 그런 데서는 그렇게 믿지를 않습니다.

 이래서, 기독교는 전 인류 구원이라 이렇게 말하는 그런 교파도 있고, 또  기독교는 택한 자들만이 구원하는 것이 기독교다 하는 그렇게 선택을 근거해서  구별하는 그런 교파도 있습니다. 에베소 1장에 보면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택된 사람들이 있는 것을 성경에 똑똑히 말씀했습니다.

 이래서, 오전에도 신구약 성경 말씀은 택함을 입고 중생된 사람에게 한해서  주신 말씀이지 이 신구약 성경은 전 인류에게 주신 말씀은 아닙니다. 이것이  크게 구별되는데 여기에서 또 많은 마찰들이 옵니다. 선택 입고 중생된  사림들에게 신구약 성경 말씀을 주어 가지고 이 말씀으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라 하는 것을 이 성경이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땅위에서 여러 종류로 그렇게 하나님관이 달리있지마는  신구약 성경 말씀이 가르치신 대로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는 것이요 아는 것이  아는 것이지 신구약 성경 외에 모든 이종교에서 말하는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파고 들어가면 다신론 범신론주의들입니다.

 이래서, 기독자는 구원이 제일 첫째 구원이 하나님의 예택 구원을 입습니다.

하나님의 예택 구원을 입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예정하실 때에 그  예정에 우리 구원이 들어 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데에 그 창조하실 때에 우리 구원이 창조 얻을 자로 창조 됩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활의 대속의 이 공로를 입고 그다음에  성령과 진리로 다시 죽은 영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인의  신앙 행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성결교에서는 이 중생이 그 사람이 신앙생활 하다가 어떤 때에 큰  은혜를 받아 가지고 한번 크게 돌변될 때에 그때에 중생한다 이렇게 중생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대로가 아닙니다.

 성경은, 물과 성식으로 거듭난 것은 비유하시기를 마치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중생되는 것은 본인들이 모른다. 그러나 동풍인지 서풍인지 그것은  바람은 안 보이지마는 불고 난 다음에 그 일어나는 작용들을 보아서 동풍 남풍을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중생되면 중생된 후부터는 중생된 자의 그 표가  행위로써 나타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린 씨가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하는 요 말씀에 대해서 간단하게 증거를 하겠습니다.’  우리 기독자의 구원은 두 가지 구원이 있는데 하나는 기본구원이라고 말하고  하나는 건설구원이라 말을 합니다.

 그러면, 기본구원은 우리 사람들이 노력하지 아니하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영이 살아나는 것을 가리켜서 기본구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또 건설구원은 영이 살아난 그 사람이 살아난 영으로 살아서 행위를 해 가지고  자기 행위로 이루는 구원 이것을 가리켜서 행위구원이라 또 건설구원이라 이래서  집짓는 비유를 가지고서 주님이 가르쳤습니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지을  때에 이거는 다 불타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은 불타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이 일생 동안 사는 것은 자기 행위 건설, 또 자기 소유건설, 자체  전설 이 세 가지를 건설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입니다. 뭐 택한  자가 하늘나라 가는 것은 안 믿어도 하늘나라 갑니다. 죽는 날까지 죄만 지어도  하늘나라 가는 것은 갑니다.

 그러면, 그게 기본구원인데 영이 하늘나라 가는 그것은 택한 자면 다 가고  택하지 안한 사람이면 아무리 세상에서 애를 쓰고 훌륭한 도덕을 가졌다  할지라도 못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나라 가고 못 가는 것은 택함을  입었느냐 못 입었느냐 하는 거기에 근거되는것 입니다.

 또 이제, 건설구원은 택함을 입은 사람이 중생되고 난 다음에 중생된 새생활을  하느냐 중생은 돼도 새생활 하지 안하고 내나 옛생활을 그대로 하느냐 여기에서  구원과 멸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노력을 하는 것은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짓은  아니고 하늘나라에 가는데 그 부활했을 때에 부활한 자의 영광이 어떠냐 그 영광  문제, 권위 문제, 실력 문제, 자유의 그 모든 소유권 문제, 이 가치, 문제 이것  때문에 지금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지마는 그 사람의  가치의 층어리는 참 천층만층도 더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서 가치가 없고  사람이라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다 같은 사람이지마는 그 사람의 그 실력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지고 또 그 사람의 그 모든 행한 이력에 타라서 가치가  달라지고 그 사람의 마련한 지위나 권세나 모든 인류들에게 인정을 받는 그  인정받는 영광 그런 것으로서 가치가 차이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 우리가 다 구원 얻어 가기는 갑니다. 가는데 구원  얻어 간 자의 그 영광과 가치와 실력이 이렇게 차이 있는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노력을 하는 것이지 천국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도 잘못 깨달은 사람들은 항상 하늘나라 못 가니까 지옥안 가고  천국 갈라고 치금 애쓴다 이렇게 말을 하니까 그 사람은 평생 애쓰는 것이 천국  가기 위해서 애쓰는 일을 하고 천국 가기는 가는데 천국 가서 자기가 어떤  행위를 가져 가느냐, 어떤 사람이 되어져 가지고가느냐, 모든 존재와 인류와  만물에게 어떤 관계를 벚어 가지고 가느냐하는 여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안하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알지 못해서 구원에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 씨뿌리는 비유를 가지고 했는데 땅 속에 심는 씨앗이 생명이 있으면 그것이  썩어 가지고 자라고 생명이 없으면 그대로 썩어 버리고맙니다.

 그러면, 인류가 이 세상살이를 하는데 속에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하루살면  그만치 죽었습니다. 일 년 살면 그만치 죽었습니다. 제딴에는 사는 것인 줄  알지마는 하루 살면 하루 죽었고 오십 년 살았으면 오십년 죽었고 그라다가 다  살자 다 죽어 버려서 영원한 멸망으로 완전히 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에 생명이 있는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루  살면 겉사람은 부패하고 죽고 속사람은 자랍니다. 이래서 성경이 말하기를  겉사랑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바울이 탄식하는 것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에게 삼린  바 될라고 애를 쓴다 했습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에게 삼킨바 되기  위해서 애쓴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죽은 고기를 산 생명 있는 것이 먹으면  생명 있는 것의 것이 됩니다.

 요거 잘 들으면 우리가 다 이것은 이만츰은 다 상식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밀을 하나 심으면, 밀을 심으면 밀에는 고 핵이라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고게  컸고 또 밀에는 그 분이 있습니다. 분. 가루. 가루가 있어서 가루는 커단하고 고  속에 생명 가진 것은 고 아주 핵이라고 조그만하게, 밀 눈이라고 말해, 밀눈.

조그만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땅에 다가 심으면 밀에 그 생명이 없는 가루, 밀이 그거 탁  터주어 보면 그 속에 가루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생명이 없는 가루 고것이 땅  속에 들어가면 요 생명 작용으로 고것이 차차차차 불어서 썩어 버립니다.

썩습니다.

 썩으면 고게 뭐이 되는 고 하니 달콤하게 아주 질금을, 질구는 사람들이 고거  고래 가지고 싹이 나면 고 속에 분 고것이 죽어 가지고 달콤하게 아주 당분이  됩니다. 달콤하게 아주 엿 모양으로 그렇게 아주 달게 됩니다.

 달게 되면 고것을 누가 먹느냐? 고 속에 생명인 핵, 눈 고것이 그걸다  빨아먹습니다. 그걸 쪽 다 빨아먹으면 이제 그 터오르는 밀 눈 고것이자라  가지고서 고것을 다 빨아먹고 나면 땅위에 어북 이만치 올라습니다. 땅 위에  이만치 올라오게 됩니다.

 올라왔을 때에 이것이 땅위에 와서 제대로 살 수 있는 고 시기가 습니다.

제대로 살 수 있는 고런 시점에 가 가지고서 뿌리를 파서 보면 뿌리에는 분이  하나도 없고 쪽 다 빨아먹고 껍데기만 쪼글쪼글하게 있습니다. 껍데기만  쪼글쪼글하게 있고 분은 쪽 다 빨아먹고 고 밀의 양식이 돼 가지고서 됐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합니다. 병아리도 보면 고 속에 생명이 있는데 고생명 고것이  이십 일을 계란을 따뜻한 온도에다 두면 고것이 차차커 가지고서 먼저 횐 것을  먹습니다. 횐자를 먹어 가지고서 고것이 병아리 형체를 가지고 고다음에는  노란자를 먹습니다. 노란자를 다 먹는데 그래 가지고 노란 자를 다 먹고 나면 이  공간 공기 속에 나와도 살 수 있는 병아리가 됩니다.

 그 병아리가 돼서 공기 속에 나을 때에는 한 사흘 음식을 가져 나습니다.

나오는데 고거 보면 고 노란자를 다 먹지 안하고 좀 남겨 가지고서 고게 나와서  한 삼사 일 동안은 이 공간에 나와 가지고 고 자기체내에 있는 노란자 고걸 졸졸  빨아먹어 가면서 그래 가지고 그 병아리가 비로소 이 공기 가운데서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만나면 우리  현실에는 무엇이 들어서 활동을 하느냐? 활동하는 것은 우려의 마음과 이 몸에  정력이 있습니다. 마음과 몸에 힘이 있습니다. 마음과 몸에 힘이 있고 또 그  속에는 중생된 영이 있습니다. 중생된 영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한번  중생되면 이는 영생으로 중생됐기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마치 밀로 말하면 그 눈과 같이 우리에게는 중생된 영이 있고 또 이  마음의 힘도 있고 몸의 힘도 있고 있는데 이것이 이 현실이라는 자기 현실을  닥칠 때에 이 심신의 정력이 그 현실에 활동하게 됩니다.

 돼서, 고 현실에서 심신의 정력이 이것이 변해 집니다. 심신의 정력이 마치 고  씨종자의 고게 당분으로 돼 가지고 있는, 당분으로 돼 가지고 있는 고것을 고  속에 생명이 먹으면 고 생명이 자라 가지고서 움이 나서 이래 땅 밖에 쑤욱  올라옵니다. 쑤욱 올라오지마는 고 생명이 그걸 먹지 안하면 썩어 버리고  탑니다.

 이래서, 생명이 없는 밀도 땅 속에나 물 속에나 넣어 놓으면 국것이 나중에  몰캉몰캉하게 이래 불어서 속이 썩게 될 때는 고걸 짜서 입에 넣으면 아주  달콤합니다. 그러면 그거는 뭐이냐? 그대로 썩어 버립니다. 그거는 그만 내비  두면 썩어 버리요. 썩고 생명이 있는 것은 고것을 졸졸 빨아먹고 이제 그 움싹이  나 가지고서 자라서 땅 밖에 올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그 현실에, 현실은 우리의 심신의 정력이 있는데 이  심신의 정력 그것은 마치 말하면 그 밀이나 다른 알갱이의 분 그것이 당분된  거와같이 당분과 같은 것인데-요거 잘 안 들으면 뭐인지 모릅니다-당분과 같은  것인데 고 당분을 고것을 생명씨가 생명이 삼키면 그 밀이면 밀이 돼 가지고  자라나옵니다. 자라 나오고 생명이 삼키지 못하면 그거는 썩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현실 생활에서 심신의 그 정력을 그것을, 현실에서 심신의 정력을  생명이 삼키면, 산 영, 산 영이 삼키면 그 정력이 산기능이 됩니다. 산 영이  삼키면 산 기능이 되고 그 생명이 없는 자는 생명이 그것을 삼키지 못하니까  그대로 썩어 버리고 말고 또 중생된 자가 생명이 있지마는 생명이 삼키지 안하면  그거는 그만 썩어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우리 현실이라는 현실에는 자기의 심신의 정기와 힘, 정력 정기와 힘  이것이 현실을 통해서 영원히 썩는 것이 되느냐 이것이 현실을 통해서 영생하는  것이 되느냐 하는 그것이 이제 문제 입니다. 그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이.-이거 좀 알아 듣기가 까다로와서. 이런데 요거 하나라도 꼭잡아야 돼.

이치를, 믿는 구원 이루는 이치를 꼭 잡으면 사람이 구원을 이루고 뺏기지  안해요. 이거 잘 못 잡으면 아무리 예수 오래 믿어도 다 헛일되고 만다 그거요.

 자기가 현실에서 그 정력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면, 생명에게 삼킨바 되면 산  기능이 됩니다. 생명에게 삼킨바 되면 산 기능이 되고 그것이 생명 없는  것들에게 삼키게 되면 그것이 죽은 기능이 됩니다. 죽은 기능.

 그러면, 사람이 현실에 자기의 심신의 정력 가지고 다 현실을 삽니다. 현실  살았는데 한 시간 살았으면 한 시간 산 그 자기의 정력이 썩을 것을 마련했느냐  영생할 것을 마련했느냐? 성경이 말하기를 육체의 소욕은 사망이요 영의 소욕은  생멍과 평강이라 그렇게 말했어  영의 소욕이라 말은 성령의 욕심이라 말이오. 성령의 욕심대로 살면 생명과  펑강을 마련하게 되고 또 육체의 욕심대로 살면 그것은 사망을 마련하게 된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시간 그 정력 가지고 살 때에 그 정력은 어쨌든지 그 정력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정력은 없어집니다. 그 사람이 한시간 그 정력으로  살면서 가만히 누워 자면, 누워 자면 그 사람은 뭘 만들었느냐? 그 사람은 그  정력만 없어졌고 아무것도 만든 게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시간 살면서 그 시간에 어학을 공부했습니다. 어학을  공부했으면 그 정력이 어학화 됐습니다. 정력이 어학이 되고 말았어. 또 어떤  사람은 한 시간 그 정력을 가지고서 어떤 그 기계를 가지고 자꾸 연구했으면  기계에 대한 기술이, 정력이 기술화됐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한 시간 그 정력을  가지고서 이런 무슨 이 세상에 이런 것 저런 것 모든 과학 어떤 종류에 거기  에다가서 정력을 기울이면 한시간 기울인 그것이 과학 중에 어떤 종류의 과학의  실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과학의 실력.

 그러면, 그 정력으로 사는 그것이 과학의 실력이 되는 것도 있고 또 이 세상  문학의 실력이 되는 것도 있고 어학의 실력이 되는 것도 있고 무슨 또 무슨  전투의 그런 실력이 되는 것도 있고 자기의 육체의 어떤 기술, 연습이나 몸에  체육이나 그런 것의 기술이 되는 것도 있고 이렇게 자꾸 화해 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안하고 한 시간 그 징권을 가지고 사는데 고  현실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할 때에 진리대로 고 현실을  살았습니다.

 자기는 무슨 사무를 보는데 한 시간 아주 정력을 기울여 사무를 봤는데 한 시간  사무를 봤는데 한 시간 사무를 보면서 자기는 무슨 수지 계산이나 또 자기는  무슨 인사관리나 이건 것에 정력을 기울여서한 시간 노력한 사람은 그 사람은  인사관리를 만들었고 또 어떤 자기는 무슨 기계를 다루거나 그런 것을 다루는  그런 정력을 만들었으면 그것도 한 시간 산 그 정력은 없어지고 그 정력이 다른  기능화됐습니다. 다른 기능화 요거 이해가 됩니까? 다른 기능화가 됐습니다.

 그거 무슨 기계 지능화든지 인사 관리에 기능화가 되든지 꾸슨 정치의 기능화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이런 운동하는 그런 뭐 사교나 무슨 정치 운동이나  하는 그런 것에 기능이 되든지 기능이 됐습니다. 어짜든지 한 시간 살았으면 한  시간 산 그저 가지고서 무슨 기능으로 자 기가 기능을 만들었든지, 아무것도  만들지 안하고 그만 정력만 다 허비하고 말았든지 어쨌든지 한 시간 살았으면  다른 기능화되든지. 그리안 하면 그 정력만 없어지고 말든지 하고,  어떤 사람은 한 시간 살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할 때에 그때에 자기는 거기에서  진리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진리. 자기는 진리를 사람이 굴안에서만, 지킬 수  없고 또 방 안에서만 지킬 수 없고 바깥에서만 지킬 수 없고 자기 현실에서  진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현실에 진리대로 살았습니다. 자기는 그 현실에 돈 위해서 살지도  안했고 무슨 이 세상에 사무를 위해서 살지도 안했고 고 한시간 살면서 요  진리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면 진리를 위해서.

 그러면, 인사 관리를 할 때도 진리로 관리했습니다. 또 자기는 무슨 사람들로  교제할 때에도 무슨 얘기를 하고 서로 의논을 하고 서로 타협을 하면서도 좍  ‘나는 진리로 살아났기 때문에 진리로 살겠다’ 진리로 관리를 했습니다.

 또 자기는 양심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영감으로 하는 사람도, 영감으로 또 그  생활 살았습니다.

 또 그 생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배피 공로를 입고 ‘나는 주님이 사죄를  주셨기 때문에 나는 죄지을 수 없다. 나는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가지고 칭의를  줬기 때문에 이의를 내가 팔수가 없다. 이의를 팔수도 없고 또 이 진리도 팔수가  없다.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된 이 화친을 팔수도 없다.’  이래서, 내나 다 같이, 다 같이 한 입장에서 한 사무실에서 한 직장에서 꼭  같이 일을 해도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하는 게 뭐이냐?  똑 같이 사무 봤습니다. 한 자리 책상에 앉아서. 요 사람도 이 시간 정력을  기울여서 인사 관리 하고 이 사람도 앉아서 인사 관리 하고 꼭 같이 인사 관리  했는데 한 사람은 고 생활 한 고 한 시간이 영생으로 화해서 하늘나라 가게 되고  하나는 고것이 멸망으로 화해 가지고서 멸망이 됩니다.

 그러면, 한 시간 네가 정력을 가지고서 썩을 것을 만들었느냐 영생을  만들었느냐 뭘 만들었느냐 하는 그것이 오늘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  기독교는 과학적이요 실질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집에서 이 지금 주방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거기서  남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둘이 꼭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매를  거머쥐고 돌릴 때에 그때 팔레스틴에 매 돌리는 것은 미개해서 발달이 못 돼서  미개해서 손으로 돌립니다. 하나는 밑에 돌리고 위에 놀리고 이래 돌려. 이래  돌리고 이래 돌리면 하나는 콩이나 밀이나 떠넣고 이래 돌리고 이라면 가루  뽀사집니다. 둘이 같이 돌려. 이래 뺑뺑 돌릴 때는 꼭 같이 돌려.

 같이 돌리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데려가서 다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되고 하나는  다 유황불 구렁텅이로 타게 된다.

 그러면 이것은 영이 타고 하늘나라 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심신의  기능을 말합니다. 심신의 기능이 하나는 타고 하나는 구원이 됩니다. 심신의  기능이.

 그러면, 같이 매를 돌리지마는 어떻게 꼭 같이 매를 돌리는데, 한 밭에 둘이  일하는데 하나는 데려감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또 두 여인이 같이 매를  가는데 하나는 데려감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 당한다. 두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는데 하나는 데려감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 당한다. 두 사람이 한 자리서 같이  같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더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이거 뭐입니까? 이것이 꼭 같은 외모는 같지마는 속에 중심이 그 자리에서  거기에서 하나는 진리 지키는 일, 하나는 영감 소멸하지 않고 영감대로 하는 일,  하나는 예수님의 대속에 공로를 입고 사는 일 이일 합니다.

 꼭 같지마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안 벗을라고 애를 쓰고 영감을 소멸하지  않고 영감대로 살라고 애를 쓰고 진리대로 살라고 애를 쓰고요 사람은 요래  애쓰고, 이 사람은 진리 영감 그런 거 하나도 없고 직장이면 직장, 뭐 인사  관리면 인사 관리, 무슨 또 과학의 기술이면 기술, 밥하는 거면 밥하는 거  그것만 하고 진리야 어긋났든지 말았든지 영감이야 소멸이 됐든지 말았든지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이야 벗어버렸든지 입고 있든지 상관 없이 그것만  하는 사람 있고,  이러니까, 우리 현실에서 내 정력이 진리에 이용되고 영감에 이용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이용이 되면 한 시간 자기 정력이 진리와 영감과 대속의 공로에  이용을 당함으로써 한 사간 지냈습니다. 한 시간 지냈으면 한 시간 지낸 그  정력은 없어졌는데 그 사람에게 만들어져 가기고 있는 기능은 뭐이 만들어져  가지고 있겠습니까?  진리만 지키기 위해서 진리 어기지 안할라고 진리 지키고 영감대로 살고 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대로 살라고 이렇게 애를 써서 이래 살았으면, 뭐 어려운  게 아니라. 꼭 같은 일을 하는데 다만 죄 안 짓는 것뿐이오. 예수 믿는  신앙생활에 어려운 게 아니라. 아주 쉽소. 예수 믿는 생활 아주 쉽고 평안하고,  왜? 이 생활은 하나님의 돕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이 말 못해.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이렇게 하는 사람은 배짱이 있어. 이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기 때문에 뭐 나라가 상관이 세계가 한다 해도 눈도 꼼짝안 하고 그대로  나갑니다. 이 사람이 세계를 이기는 사람이오.

 이래서, 우리는 현실에서 자기가 없어질 정력을 가지고서 살면서 없어지지  아니할 것을 마련하느냐 없어질 것 가지고 내나 없어질 것을 마련하느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래서, 썩지 안하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 하는 것은 이것이 핵이 분이 그게  썩어 가지고 그 분 그것이 썩어야 그것이 다시 생명이 삼켜가지고서 생명이  자라게 되는 것이지 그것이 죽지 안하면 따글따글한 것은 못 먹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현실은 뭣이 살고 있느냐? 자기 현실은 자기의 몸의 힘  마음의 힘 이 두 가지가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러면 몸의  힘 마음의 힘이 살고 있는데 몸의 힘 마음의. 힘 그것이 언제든지 있느냐?  아닙니다. 없어집니다. 몸의 힘과 마음의 힘은 없어집니다.’  없어지는데 그것이 무엇으로 둔갑했느냐? 그것이 무엇으로 화해졌느냐? 마음의  힘과 몸의 힘이 없어질 것으로 변화됐느냐 영생할것으로 변화됐느냐 둘 중에  어느 것이냐 하는 거기에서 우리 구원이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지는 것이  거기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가만히, 그냥 그라면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 가지고서,  기독교는 그러기에 뭐 불 속에도 안 있고 지진 속에도 안 있고 바람 속에도 안  있고 큰 소리 속에도 안 있고 세미한 음성 속에 있다고, 여호와께서 세미한 음성  속에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기독교는 가만히 생각해야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서 이치를 깨닫고 생각하고 고 이치대로 살 때에는 현재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생명이 이루어지고 또 사망이 이루어지고 하는 것을 환하게 자기가  보기 때문에 요렇게 신앙생활하는 사랑은 신앙생활이 점점 자라가게 되고,  그냥 다 터놓고 예수 믿으면 왔다 갔다 ‘오늘은 주일에 왔으니까 됐다. 오늘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됐다.’ 이거 가지고는 기본 구원 얻습니다. 영  구원은 얻어 가지고 있지마는 건설구원이라 하는 거는 그래 가지고는 절대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애쓰는 것은 건설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 기본구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아니오.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아니고 우리 택한 자들은 천국은 안갈래야 안 갈 수 없는데 천국 가  가지고 내가 어떤 자로 사느냐? 아주 수치스러운 천한 자로 사느냐 영광스러운  존귀한 자로 사느냐, 하늘나라 갈 때에 만물이 다 환영하는 자로 사느냐  만물에게 아주 배척과 천대를 받는 자로 사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이래서, 하늘나라에는 입고 사는 옷을 가리켜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늘나라에는 무슨 옷을 입고 삽니까? 세마포 웃. 세마포 옷을 입고  하늘나라에서는 사는데 그 세마포 옷을 가리켜서 성경에 뭐이라고 말했습니까?  성도의 옳은 행실. 행실 입고 삽니다. 하늘나라는 행실입고 살아.

세상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양복을 막 이렇게 아주 읽고  있어도 그 사람의 행실이 거기에 실은 딴고 있습니다. 좋은 양복을 입고 있는데  그 사람이 횡생 착취나 하고 사기나 하고 협박이나 하고 횡령이나 했으면 좋은  양복 입고 있으면 ‘아따 그놈 도적질 잘했구나. 번들번들하게 도적질 얼마나,’  그 도적질한 옷을 입간 있다 그렇게 봅니다.

 어떤 성자가 그 사람이 아주 참 남루한 옷을 입고 있어도 그 사람의 행실이 다  보이기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성자로서 일생 동안 인간구원을 위해서  봉사하고 이라니까 제 몸에는 옷 한 벌을 좋은 것을 입히지 못하고 저렇게 아주  남루한 그런 켸켸묵은 그런 웃을 입고 있다’ 그라면 그래 헌옷 입고 있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영광이 되겠습니까? 수치가 되겠습니까.? 그게 오히려  영광이 됩니다.

 이렇게 하늘나라는 자기의 행위를 입고 사는 것이 하늘나라라 하는 것을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또 하늘나라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칠십을 살든지 육십을 살든지 일 년을  살든지 얼마를 살든지 자기 정력 가지고 현실 현실을 살아나가는데 그  현실에서만 탄듭니다. 현실에 자기가 살 때에 그 정력으로 무엇을 만들었느냐?  그 정력을 가지고서 돈을 만들었노냐 권세를 만들었느냐 지위를 만들었느냐  명예를 만들었느냐 행락을 만들었느냐 쾌락을 만들었느냐 뭐 가정을 만들었느냐  뭘 만들었느냐? 만들었을 때에 그때에 궐 만들었든지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 이런 것들은 다  썩어지는 것이라. 없어지는 거. 다만 그때 만들 때에 세 가지 만든 이것만  영생합니다. 진리 만든 거 영감 만든 거 예수님의 대속 만든 거 요거 세 가지만  영생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아이 밴 여인에게 화가 있다. 젖먹이는 여인에게  화가 있다.’ 이거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아이 하나만 낳으면 마구 상을 주고  지금 돈을 주고 이렇지마는 어떻게 여자들이 약아서 지금 안 낳을라 해서 아이를  못 낳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혹인종들은 자꾸 낳으면 생활비는 미국서 당하요.

그 나라에서 당해.

 이런데, 그 아이 낳는 게 좋은데 뭣 때문에 젖먹이는 여인에게 화가 있다, 아이  밴 여인에게 화가 있다 하는가? 그것은 이렇게 이것을 배고 낳아 가지고서  하늘나라에 가는 이 영생하는 기능화시키지 못한다면 안 밴 게 낫고 안 낳은 게  낫다 그말입니다. 그아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지  안했으면 좋을 뻔 했다, 가룟 유다야 네가 나지 안했으면 쫓을 뻔 했다  이랬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믿는 사람은 영 구원 얻는 것은 차이가 없이 꼭 같고 다만  자기가 일생 동안 산 생활은 영생할 것을 만들었으면 타지 안하니까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 거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거는 영원히 있고,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것은 다 탔기 때문에 그는 구원은 연으나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거와  같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몇 절입니까? 고건도전서 3장 12절 만일 누구는 지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과 같으니라  언제 뭐 대연각 호텔이라 하던가 거기 불이 나니까, 불이 나니까 그만불 속에서  전부 벗은 사람은 벗은 대로 나왔고 또 단벌 입은 사람은 단벌 입고 나왔고 불  속에 나온 사랑이 뭐 다 소지품은 다 못 가지고 나왔지.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에 무궁세계는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고, 불타니까 발가벗은 몸으로 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구원  얻을 영원한 내세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생각하고 오늘 어려워도 현실에서 타지  안할 것을 마련할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타지 안할 것은 뭐이냐? 타지 안할 것은 진리만 타지 안해. 진리가 타지 안하고  영감은 진리보다 더 깨끗한 거라. 영감만 안 타고 그 다음엔 예수님의  사죄,칭의,화친의 대속의 공로만 안 타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만든 사람은 타지  안할 것 만드는 사람이고 이 세 가지 외에 딴걸 마련한 사람은 돈을 만들어도  그까짓 거 타버립니다. 지위 만들어도 다 타 버려. 권세 만들어도 다, 타 버려.

뭐 온 세상이 다 자기를 투표해 가지고서 자기를 인정해도 표 그까짓 거 암만  많이 받아봤자 다 타 버려.

 다만 우리의 현실에서 한 시간 한 시간 현실 생활을 해 나가는데 여기에서는  불탈 것을 마련할 수도 있고 영원히 타지 안할 것을 마련 할 수도 있으니 내가  어떤 것을 마련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불탈 것을 마련하는 사람도 있고 영원히 타지 안할 것을 마련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것을 생각하고 영원히 타지 안할 영생할 그런 것을우리가 마련하면  그 사람은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사람이고, 이  세상에 있는 없어질 거, 자기가 세상을 떠날 때에 없어질 거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산 사람은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  그러기에 우리는 현실에서 썩어질 것을 마련할 수 있고 썩지 안할 것을 마련할  수 있고 영생할 것을 마련할 수도 있고 영원한 멸망할 것을 마련할 수도 있는  요것이 우리 현실인데 이 중요한 이 점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세상에 살아야 다 헛된 생활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게 대번에 되는 게 아니라. 백 번 듣고 천 번 듣고 만 번 듣고 자꾸 생각해야  이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지 당장 되는 게 아니라. 이러니까 뭐 예수 믿는다  하지마는 통통이 예수 믿는 거는 천리 만리 거리가 멀고 그저 형식도, 이름  예수, 이름만 예수 믿고 그저 이거 하나의 의식만 가지면 되는 줄 알지마는  실제로 이것이 안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한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러니까, 우리가 이거 현실에서 이거냐 저거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둘 중에  하나니까 요것을 깨닫고 이 죽은 것을 하지 안하고 영생하는 이것을 할라고 애를  써야 이게 돼지는 것이지 저절로 돼지는 것은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자기 현실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밥하는 것도 진리로 할 수  있고 영감으로 할 수 있고 밥하는 것도 그 자기 자기중심의 악령의 감화로 할  수가 있고 자기중심의 악으로 할 수가 있고 하나님 중심으로 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다 말이오.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같이 공부를 하면서도 한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해도 이 사람이  진리로 공부하는, 아이 있고 인간의 자율로 공부하는 아이 있고, 공부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아이 있고 또 영감으로 지금 공부하는 아이 있고, 또 공부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아이 있고 이 세상 명예나 지위나모든 소망 가지고 하는 아이  있고 이거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공부하는 사람 있다 말이오.

 대속으로 뭐? 대속으로 공부하면 무슨 공부하는 고? 공부하면서 ‘나는 이 시간  공부하면서 내가 진리에 어기는 일은 안 해야지’ 속에 가지고서 이래 합니다.

그라다가 이제 동무가 있다가 ‘야 너 아무 데놀러 가자. 또 내가 지금 이렇고  이런 건데 이 지금 거짓말 한 마디해 달라. 거짓말 한 마디만 해 주면 내게  도움이 되겠다.’ 안 합니다, 또 거기에서 무슨 불의한 그런 일이 있을 때에,  만일 공부를 합니다. 공부를 하는데 다른 어떤 죄악이 들어오면 죄악이 들어와서  동무들 다 그만 죄악에 물들고 하지마는 자기는 공부하면서, 공부를 하면서  죄악이 들어을 때에 ‘나는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으로 이렇게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했는데 내가 범죄할 수 없다.’ 범죄 안 하면서 공부 할 수 있어.

또 성신의 감화를 소멸하지 안하고 공부할 수 있어. 진리를 배반하지 안하고  공부할 수 있어.

 그러면, 그 사람은 한 시간 다른 사람 보기에는 그 사람은 공부 수입으로  보지마는 공부 수입이 아니라. 그 사람은 진리 수입했고 영감 수입했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수입했습니다. 썩지 아니할 기능을 마련했어.

 이러니까 하늘나라에는, 하늘나라에는 뭐 요새 이십세기의 과학을 떠들지마는  하늘나라는 과학이 필요 없어. 과학이 없어. 하늘나라는 과학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냐? 하늘나라는 진리의 힘으로만 살고 성령의 힘으로만  살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이 의로만 삽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실력이  하늘나라 실력이지 이 땅에서 없어질 그런 것은 하늘나라 가지 못해요.

 이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 고 현실에서 썩어질 것을 마련하느냐 영생할  것을 마련하느냐? 이것저것 마련할 수 있어. 영생할 것을 마련하면서 대통령 못  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 하면서 영생을 마련 할 수있어. 대통령하면서 대통령  하는 그 자리에서 영생 마련하고 대통령 그 자리에서 영원한 지옥 마련하고 사장  자리에서 영생 마련하고 거기에서 영원한 멸망 마련하고 어데든지 다 돼.

 이러니까, 요 기독자들이 요것이 기독자의 구원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한 번 두  번 듣고 되는 게 아니고 여러 수백 번 수천 번 듣고 자꾸 애를 써야 돼요.

‘나는 요 현실에서 아무래도 어떤 현실이든지 나는 요 현실에서 진리대로 살고  진리 내가 양보하지 않겠다. 영감을 양보하지 않겠다. 예수님의 대속의 사죄  칭의, 화친을 벗어버리지 않겠다. 하나님과 이렇게 친밀되는 이걸 내가 끊지  않겠다.’ 이래 가지고 사는 요것이 우리 구원을 이룬 것이요 기독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처음으로 오신 분들은 알아듣기가 참 어려울 것이고 또 두시 예배는 자꾸 잠이  옵니다. 오전 예배 보느라고 고단했지, 이런데 가서 요 테이프를 사 가지고 가서  테이프를 사 가지고 가 가지고 어짜든지 몇 십번, 한 테이프를 몇십 번 들으면  깨달아집니다. 깨달아지면 요게 사는 게 요게 있구나 하는 것을 자기가 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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