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 교리 신조


선지자선교회 1986년 5월 17일 새벽(토)

 

본문 : 창세기 26장 1절∼5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 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지난밤에 말하다가 약간 과제만 내 줬는데 우리가 제일 으뜸이 뭐이냐 하면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제일 근본되신 분이신데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에 하나님만이 홀로 계셨습니다. 이분은 그 속성이 완전자이시며 영원자이시며 불변자이시며 자존자이십니다. 또 단일성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인고 하니 우리가 소망하는 이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견고히 잡습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목적인 선택을 굳게 잡습니다. 또 그라고 나서는 하나님의 예정을 굳게 잡습니다.

예정을 자기가 잡을 때에 예정을 대체적으로 하나님께서 큰 것 굵닥굵닥한 그 강령들만 예정하셨다. 또 택자들의 구원에 대해서만 예정하셨다. 그저 고 세부적인 그런 것은 예정하지 안했다 이렇게 왜 사람들이 자꾸 돼져 나갔는가 하는 것은 모순이 많기 때문에 그 모순성을 피해 가지고 하느라고 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창조, 또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개별 섭리, 인간의 자유성, 또 하나님의 이 심판성, 심판은 지옥과 천국 다 행한 대로 갚는다는 그런 심판성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그냥 이래 슬슬 듣고 그냥 지내 그렇지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 전부 모순투성이입니다. 모순 더버기요. 또 삼위일체 하나님도 모순 더버기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제일 중요한 것 하나님의 그 속성과 모든 행사가 전부 모순투성이고, 또 이제 말한 그 여러 가지가 각각 모순이라서 얼핏 보면 이는 정신 이상자가 말해 놓은 말이라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고등 비평가들 또 그 모든 세상에 다, 그라면 고둥 비평가라는 것은 다 지성인들이 그 지식과 정당한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를 훼방하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고등 비평가라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학자들 과학자들, 이 모든 세상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이 아주 모순돼서 세상 지식은 그 모든 것이 딱딱 들어맞고 다 암만 봐도 그 지식은 참되다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돼 있고 하나님의 지식은 이거는 정신 없는 한 미치괭이가 해 놓은 말이다. 그걸싸나 무슨 시종이 맞든지 두미가 맞든지 또 그게 무슨 논리가 맞든지 하면 하지만 하나도 맞지 안하고 전부 모순투성이라, 이러기 때문에 되는 대로 말해 놓은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세상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믿는 자의 숫자가 차차 많아지니까 이제 다수를 따라서 성경을 권위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 그들은 다 아주 거짓말 뭉텅이고 정신 이상자의 말들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거는 믿는 사람들이 자꾸 많아지니까 이제 성경 권위를 높이 두는 것이지 그들이 이해해서 높이 두는 것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기를 여러 시대에 기록했느냐 그 기록이 다 모순되지 안한다. 모순 안 되게는 모순이 우리가 안 된다 하지 모순, 요 모순이 없다 하는 사람이 정말로 학자 가운데에 있느냐 하면 없습니다. 아주 없지야 안하지만 별로 없습니다. 다 모순됩니다.

이런데 숫자가 많으니까 성경 책 권위를 인정하지 숫자 없는 무슨 사람들이 깨달아서 논리에 맞다고 해서 성경책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 아닙니다. 그 내정을 말하자면 우리는 말하기를 그러하지만 제 삼자 불신자들은 인정이 되지를 아니합니다.

또 역사에 맞춰서 예언해 놓은 모든 미래사를 말해 놓은 것이 그것이 허무맹랑했지만 그것이 실 질적으로 이루어졌으니 하는 요것이 제일 권위가 있습니다. 그러면 미래사를 다 예언적으로 말해 놓았는데 그게 그 뒤에 그 현실이라는 그 현실이 지나가면서 다 그대로 이루어져 가지고 있어서, 미래적으로 보면 다 거짓말 같았지만 과거적으로 보면 이 역사면에 있어서는 다 틀림없이 다 들어맞았기 때문에 이것이 성경의 권위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있으나, 실은 그 속에 모순된 것을 다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 주석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돼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 모순이 되니까 요 모순을 요리 피해서 요리 해석을 해 놓고 저리 피해서 저리 해석 해 놓고 그 모든 모순을 피해서 해석을 해 놨지 그 모순을 딱 마찰해 가지고 모순이 서로 둘이 마찰이 되니까 마찰이 되어 둘이 깨지든지 말든지 마찰이 되도록 이렇게 나가 가지고 해결한 학자들이 숫자가 적습니다. 그게 지금 아직까지 세계에 나오지 안하고 있고, 또 말해 봐야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가 벌써 20세기라 성경에 대한 깨달음도 많이 그 진보가 됐고, 또 더군다나 더 우리 진영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면에 대해서 우리가 몰라 그렇지 깊이 하나님께서 넓게 알려 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제 말한 데 그걸 굳게 잡으시오. 틀림이 없습니다. 틀림이 없다 하는 것을 굳게 잡아 틀림이 없는데 이 교리와. 저 교리와 다 마찰이 돼서 모순이 된다 말이오. 모순이 되는데 모순된 그것을 피해서, 모순을 피해서 이렇게 해석 할라고 하지 말고 모순을 부딪히십시오. 모순을 부딪히면 모순이 아니고 모순 같은데 마지막에는 그 아주 유일의, 단일의 일치성이 나옵니다. 일치성이 나오요.

나오는데, 거게 하나 참고로 삼을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계약으로 선포해 놓으신 것이나 교훈이나 그 모든 것에 있어서 그 범위가 많이 있습니다. 그 범위가 많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런 범위 내에서 말한 것 있고 좀 큰 범위 내에서 말한 것 있고, 범위 잡은 것이 다른 거기서 해결이 돼지고, 실은 사람들이 또 무지해서 제한된 그 지능이기 때문에 그 지능을 자꾸 하나 꿰뚫고 들어가고 들어가고 하면 그 모든 것이 일치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러기에 하나님이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는 그 속성, 하나님 자체의 속성을 틀림없이 확실히 믿는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 믿는 사람이지 모순되다고 해 가지고 안 믿으면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두 다 뭐, 뒤에 예정론이라든지 창조론이라든지 이런 것 다 하나님의 속성에 모순이 되니까 요리 피해야 되겠다 조리 피해야 되겠다 하는 것이 다 그것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교리 학자의 그 교리가 이렇게 주장을 하는 거 그것은 무엇을 피하느라고 이렇게 됐다, 그게 틀렸다, 뭐 피하지 안하고 바로 가야 되는데 피해서 그렇다 그런 것을 짐작해 수 있고 평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속성을 틀림없이 견고히 그대로 믿어야 됩니다. 그대로 믿고, 또 하나님의 목적인 선택도 성경에 가르친 대로 그대로 믿고, 또 하나님의 자체라 하면 전지 전능도 하나님 자체에 다 들어갔고, 하나님의 예정이라든지 하나님의 창조라든지 하나님의 그 섭리라든지 하나심의 주권이라든지 또 하나님의 심판이라든지 인간의 또 자유성이라든지, 하나님의 심판이라 말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놓고 이렇게 해 놨으니까 그 예정을 벗어날 수 없는데 예정대로 요래요래 요래요래 갈 수밖에 없는 것인데 왜 사람에게 책임을 지워서 네가 잘못했다 이렇게 심판하느냐? 하나님이 절대자가 예정해 놓고 그대로 절대 능력이 성취하시니까 하나님이 심판 받아야 되지 어찌 인간이 심판받을 수가 있겠느냐? 이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모순성, 이 모든 모순투성이인데 실은 모순성이 아니라 가장 완전하신 계획이요 하나님이 가장 완전자인 것을 그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런 면을 자꾸 연구를 하면 사람의 마음이 커지고 넓어지고 또 발라지고 깨끗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 여러분들이 알도록 참고할라 하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난 그것이 네 자손인데 그 자손이 하늘에 별의 수와 바다에 모래 수와같이 그 자손이 많이 흥성하리라, 번성하리라 이렇게 해 놨는데 그 하나님께서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 하니까 번제로 드리라 하니 언제는 네 자손이 이렇게 많은 숫자로 번성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해 놓고 또 불에, 번제라 한 것은 불에 바짝 태워 재가 되게 해 가지고 드리는 것이 번제이니까 태워 번제 드리라 이러니까 이거 어떻게 이렇게 불에 태워 죽여 버리면 무슨 자손이 나겠느냐 그것이 모순이라 말자오.

모순인데 그 모순 속에서 아브라함은 이것도 믿고, 하나님이 번식하리라 하는 그 말씀도 믿고 또 번제로 드리라 하는 그 말씀도 믿고 두 말씀을 믿으니까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부활을 발견했다 말이오. 하나님이 죽은 가운데서 살려낸다 하는 그걸 발견해 그게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안한 것인데 두 신앙을 가진 그 신앙 사이에서 비벼 가지고 거기서 새로 발생된 것이 뭐이냐 하면 부활이라 하는 것을 발생해. 하나님께서 번식은 한다 하지 불에 태워 죽이라 하니까 불에 태우면 재가 됐으니까 죽었는데 죽으니까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하지 안하고는 그 뜻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제 말한 대로 우리의 중대한 그 근본 교리, 근본 교리 몇 가지가 이 서로서로 모순되는데, 모든 우리 믿는 신앙이나 모든 존재들이 다 거기서 나왔는데 이게 모순되는데 모순된 것을 모순되다 이래하고 모순을 또 저거 인간 생각대로 피할라고 하지말고 모순 같으나 인간의 지능이 모자라 그렇지 하나도 모순이 없다. 이거는 모순이 없고 절대 그 털끝만치라도 틀림이 없다. 성경의 절대 무오성 이것도 또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이라면 거기서 이 둘이 마찰 가운데에서 거기서 우리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그 지식이 우리에게 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지식을 줘 가지고, 그때는 사람이 죽으면 죽는 것이지 죽은 가운데서 부활한 다는 것을 그때는 그 지식은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아브라함이 두 가지 믿는 가운데서 부활이라 하는 것을 발명해 냈다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이제 이 모순을 이게 믿으면, 모순을 믿으면 이 믿는 모순 속에서, 이 모순으로 인해서 인간이 이제까지 모르는 새로운 그 지혜가 발명돼 나온다 그거요. 그래 자꾸 그래 가지고 이제 우리에게 이 20세기까지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그 진리를 자꾸 깨달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도해 주심을 우리가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좀 지성인들이 또 신앙의 높은 사람들이, 교역자들이, 또 은사 교권에 있는 분들이 그것을 좀 생각을 해 가지고 이렇게 모순을 가지고 모순이 일치되는 데에, 모순은 없는 것인데 모순으로 보여지니 모순이 일치되는 데까지 자기가 자꾸 기도하고 양심 쓰고 기도하고 해서 심령이 밝아지고 밝아지고 자기가 차차차차 참 제자가 되는 것 같이 성화되고 성화되고 돼 나가고 이러면 자기에 인간을 초월한 지능이 나와 가지고 자꾸 거기서, 일치된다, 일치된다, 할 수가 있다 그말이오.

예를 들면 산을 오르는 사람이 이 천 미터 올라간 사람이 말하기를 뭣도 있다, 뭣도 있다 하니까 구백 미터 올라간 사람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전부, 거짓말입니다. `어디 뭐 있다 말이냐?' `아, 있다, 저기 있다.' 해도 자꾸 거짓말, 어디 있느냐 그래. `아, 저쪽에 남쪽으로 봐라, 뭐 있다. `거짓말' 저는 안 보이기 때문에 거짓말이라 하는 말이 고게 저로서는 정당한 말이요, 또 위에 백 미터를 더 올라갔었기 때문에 더 높이 올라갔으니까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하는 것도 정당한 말, 둘은 다 정당한 말이지만 그거 밑의 사람은 백 미터가 미달됐기 때문에 아직까지 미성자, 미성, 올라가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리 되는 거와 비슷한 그와같이 우리가 이 모든 모순된 것은 우리가 아직까지 성화 되지 못하고 성장되지 못해서 우리가 이 무형의 감옥, 이 지식의 감옥, 깨달음의 감옥, 자유의 감옥, 또 이해의 감옥, 그 감옥이라 하는 수없는 종자들이 있습니다. 수없는 종자가 있어서 그걸 한 감옥씩 한 감옥씩 탈피해서 거기서 출옥을 할라고 하면, 출감을 할라고 하면 그만침 자신이 성화돼야 돼지지 성화되기 전에는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 모순을 모순으로 생각지 말고 자꾸 이래 하면 모순을 이것도 믿고 이것도 믿고 둘 다 믿으니까 `이거는 틀렸다' 해 버리면 쉬운데, 이것도 믿고 이것도 둘 다 믿으니까 이 모순이 생겨져 가지고 이 난제가 생겨졌는데 그럴 때에 자기에게 새로운 성화의, 성화의 새로운 지혜가 발견돼, 성화되니까 성화된 것만침 새로운 지혜가 되니까 새로운 지혜가 열려 가지고 보니까 그것이 그 밑에서는 모순이 됐는데 모순이 아니고 일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걸 지난밤에 약간 말했는데 그런데 대해서 좀 연구를 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절대 예정 그 예정을 변개하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엊저녁에 잠깐 비유로 말했지만 우리 사람마다 다 하나님께서, 죽을 때까지만 예정돼 있는가? 죽고 난 다음에 영원 무궁까지 예정r 있습니다. 그 한 사람에게 대해서 영원 무궁까지 예정되어 있으면 그 한 사람에 예정되어 걸어가는 그 노선만 해도 복잡해서 사람이 모를 만치 뭐 굉장한 것이 돼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학자들 가운데에서 자연 계시 중에는 인간의 그 마음의 이런 저런 구조들이라, 그 사람들의 마음의 구조가 요리조리 요리하는, 인간을 연구한 사람들의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구조라. 사람의 마음은 보면 천태 만상의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또 인간들의 그 한 사람의 노선을 생각해도 마치 한 사람의 노선으로 말하면 여게 명주실을 말이요, 명주실을 이만치, 명주실을 이만침 막 흐트러서 뭉텅이 이 명주실 뭉텅이를 이만침 흐트러 가지고 버글버글해 가지고 이만침 지금 놓은 거와 같다 그말이오.

한 사람의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가는 길이 그만치 지금 복잡한데 이것이 억억억억억억억억만 명도 더 되니까 그게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그 복잡함이 얼마나? 이것을 다 이걸 어떻게 하나님이 예정 했었을까? 예정할 것은 요 화초 요런 것 요것을 볼 때에, 사람이 볼 때에는 요거 단순하게 보지만 지금 보면 여게 여기도 세포가 들어서 뭐이 어떻다 하지만 지금 지능의 백 배의 지능이 늘면 이것을 지금 말한 거와 백 배를 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분의 자비는 무한함이며 무궁하다 하는 것은 그것을 자기가 보이는 데부터 연구해 가지고 자꾸 보이지 않는 데로 무한히 나가는 걸 알 수 있는데, 이러기 때문에 한 사람에 대한 그 노선 예정되어 있는 것도 비유컨데 명주실을 이렇게 한 뭉텅이 막 이래 헝크러 놓은 거와같이 돼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것이 막 이래 얽혀 가지고 이와같이 있으니 그걸 이렇게 생각할 때에 이 우주에 뭐 항성만 해도 십억만 항성이라 그 위성이니 유성이니 말할라면 그 별이 얼마나 많겠느냐? 그런데 그 별들이 다 자기 궤도를 따라서 이렇게 그 윤회하기 때문에 윤회하는 그 속도가 어떤 것은 광선의 속도보다 빠른 것도 있고 어떤 거는 느리기를 사람보다 느린 것도 있고 이 공중에 그게 달려 가지고 매인 데도 하나도 없이 이래 달려 가지고 이렇게 무두 다 궤도를 따라서 이래 운행하고 있다 하는 이것도 좀 생각하면 `아 그분 참 크다.' 깜짝 놀랠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그 무한성을 우리가 자꾸 연구하고. 이렇게 해도 이 하나도 모순되고 마찰돼 가지고 깨지는 게 없다 말이오. 이거와,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최고가 인간인데 인간에 대한 예정을 연구해 가지고 그면을 좀 생각하면 그까짓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 그런 거는 뭐 성글어서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 이 연구하면 우리도 자꾸 머리가 명철해져 가지고 그런 걸 다 짐작할 수 있다 말이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예정이 있는데 누가 제 길을 제가 찾아 가지고 갈 자가 있겠는가? 누가 제 길을 행복된 그 길을 제게 예정 돼 있다 할지라도 그 행복된 그 길을 누가 찾아갈 자, 아무도 찾아갈 자 없어 찾아가기를 누가 찾아가겠소? 이 길인지 이 사람 길인지 저 사람 길인지 내 길인지 네 길인지 이 길이 어디로 돌아 가지고 어디로 어떻게 해 가지고 이제 행복된 그 길을 쭉 갈 것인지 이것을 명상해 볼 때 아무도 찾아갈 이가 없어.

찾아갈 이가 없는데, 불신자에 대한 것은 그 예정되어 있는 그 예정이 하나의 그 시종일관으로 돼 있지 안해. 믿는 사람은 벌써 목적 정한 거 게서부터 저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영광의 그 찬미로 되기까지에 쭉 이것이 계속적으로 일관돼 있지만 안 믿는 사람은 이것이 돼 가지고 있지 안해. 안 믿는 사람은 이것이 돼 있지 안하고 믿는 사람이 이렇게 모두 예정되어서 되어 있는 여기에 따라서 움직여. 여게 따라서 움직이도록 이렇게 하기 때문에 뭐 그것도 한없이 복잡해. 이래 따라 움직이도록 이래 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시종일관으로 한 일정한 노선이 없다 그말이오.

이러나, 기독자들은 일정한 노선이 있는데 우리는 그 길을 찾아가야 그 길을 찾아가지 안하면 실패하는 것인데 그 길을 찾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경륜을, 때가 찬 경륜을 위해서 예정하신 것이 있어. 때가 찬 경륜 때가 찼다는 말은, 때가 찼다 말은 시간을 요 시간에는 요게 조 시간에는 조게 자꾸 이래 가지고 경륜해 가지고 "우리를 예정하사"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이루어 가게 했다고 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제 우리의 길은 이렇게 다 돼 가지고 있는데, 때가 찬다 하니까 그 때가 어떻게 차는가? 그것은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내일이 가면 모레가 오고 하니까 그 시간 시간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우리의 노정이 다 그대로 이루는 건데 그 시간 감에 따라서 우리에게 현실 닥치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노정을 지금 안내해 가지고 인도하시는 것이라 말이오.

안내해 가지고 인도하시는 것인데, 그러면 우리가 지금 이 범위를 깨닫고 난 다음에 자기에게 닥쳐진 현실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우리의 행복에 참 그 성공의 길을 우리를 안내하고 계신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라 하는 내 현실은,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현실은 행복되고 내 현실은 불행스럽다 말하지만 내 현실은, 세계에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현실이 있지만 내게는 온 세계에 수많은 현실 중에 내게는 내 현실 그것이 제일 보배요, 고 현실 외에는 나에게는 복된 현실은 없어. 그것이 내가 갈 노선이요, 내가 갈 궤도라 그말이오.

요것을 이렇게 깨닫고 믿는 사람과 깨닫지 않고 믿는 사람, 깨닫고 믿는 사람은 변동이 없어.

이렇게 현실인데, 요 현실에, 요 현실에, 지난밤에 말하기를 구멍이 한 백 구멍이나 천 구멍이나 뚤렸으니까 이 구멍으로도 나갈 수 있고 저 구멍으로 나갈 수 있는데 마귀란 놈은 `야, 네가 봐라. 요 구멍은 환하게 밝지 않느냐? 요 구멍으로 나가면 좋다, 조 구멍으로 나가면 좋다.' 이렇게 마귀란 놈은 수많은 구멍을 말하면서 요 구멍으로 나가라, 조 구멍으로 나가라 이렇게 여러 구멍으로 가리켜서 말하니까 사람들은 그만 그거 따라서 시키는 대로 이 구멍으로 나가 보니까 또 암흑이요 절망이요, 또 조 구멍으로 나가면 또 그렇고 또 탈선되고 이라는데 고 옳은 구멍을 가르쳐 줄이는 아무도 없어. 인간에게는 물을 필요 없어. 사람에게 배울 필요 없어. 사람에게 가르침 받을, 인도받을 수가 없다 이랬습니다. 사람에게 인도 받을 수가 없어. 다만 너를 중생시킨 그 성령이 중생된 자를 옳고 바르게 인도하니까 고 인도를 따라서 살라 이랬다 말이오.

인도를 따라서 가라, 그러면, 명주실 같은 그런, 거리도 멀고 굉장한데 하나님이 `요리 나서거라' 또 거게 나서니까 여기서는 또 지금 구멍이 여러 개 있는데 네가 여기서 요 구멍을 바로 찾아 나가거라. 찾아나갈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네 안에 기름부음이, 다른 사람이 천인 만인이 다수가 이리 가라 하니까, 세상이 이리 가라 하니까, 요럴 때에는 모든 인간 통계가 요리 갔으니까 모든 역사를 연구해 가지고, 인간 통계를 연구해서 요럴 때는 모든 사람이 요리 갔다 조리 갔다,이러니까 그대로 갈까? 그것도 아니다.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배울 필요 없다. 사람은 지도할 수가 없다 다만 너를 중생시킨 성령님만이 너를 옳고 바른 길을 가르쳐 주나니 그 지도를 받아서 가라 이렇게 말씀해 놨다 말이오.

그러면, 성령님이 인도하는 그 길을 갈라고 하면 그 성령님 인도는 다른 것은 우리에게 정서의 요소도 있고, 감각의 요소도 있고, 또 우리 이성 요소도 있고, 우리에게 모든 욕심 요소도 있고, 또 모든 취미 요소도 있고, 또 예술 요소도 있고, 감상 요소도 있고, 오만 게 다 있지만 그거는 다 안 된다 말이오.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을 찾아가라 하지를 안했다 말이오.

다만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 이렇게 우리 속에 양심, 그러기 때문에 너희 속에 있는라가 어두우면 어두움이 얼마나 어둡겠느냐 빛이 밝으면 다 밝고 빛이 어두우면 다 어둡다.

그라는 양심을 말한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네게 양심을 쓰면 네 몸 전부가 다 밝아지고 양심 어두워지면 네 몸 전부가 어두워진다. 눈 하나 감아 버리면 온 전신이 깜깜 어두운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양심 하나 버리면 이 마음의 요소라 하는 것은 다 깜깜해지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네가 길러야 된다. 양심을 기르는 데는 양심 기르는 방법이 뭐이냐? 양심 기르는 방볍은 네 소망을 하늘에 두고 네 보배를 하늘에 쌓아 두라. 네 전부를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그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의 소망을 위해서 투자하라. 투자하면 투자하는 것만치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는데, 고 마음이 하늘에 소망을 둔 마음 고 마음이 무슨 마음이냐 하면 그게 인간 마음 중에는 제일 옳고 바른 참된 마음이요, 그 마음의 전 요소를 바로 인도할 만한 인도자의 자격이 있는 자라 말이오. 그러면 그 마음인데 그 마음이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이렇게 말씀을 해 놨습니다.

해 놨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서 양심을 쓰지 않는 사람은 헛일입니다. 양심 쓰지 않는 사람은 건설구원이라는 거는 절대 없습니다. 건설구원은 이번에 사데교회에 대해서도 우리가 공부를 했지만 거기도 보면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러면, 우리는 온전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그거는 이제 두 가지 설교요. 그거 말하는 것은 내나 고 본문에 있는 것은 있는 것이지만 좀 연구를 해 가지고 여러분들의 심령이 좀 밝아지고 좀 넓어지고 좀 커지라 말이오. 장성해지면 오늘까지에 이 세상에 되어 있는 모든 학문을 그걸 최고의 절정이라고 하고 연구하지를 않습니다. 연구하지를 안해요.

다만 그것은 우리가 이미 걸어온 길 중에서 삐뚤어진 길도 있고 바른 길도 있는데 바른 길을 걸어온 그것이 그 장로교 교리입니다. 장로교 교리가 제일 바르고, 참 그 교리 중에 제일 유공자인 칼빈이 자기가 깨달은 것 단독 깨달은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깨달은 것을 편집을 한 이가 그 칼빈이지 칼빈이 다 깨달은 것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편집자인데, 이렇게 깨달은 그걸, 옳은 바른 것을 깨달은 것이 벌써 지나갔기 때문에 우리가 안다 말이오. 그러기에 묵은 둥치, 원 둥치를 우리가 잡았습니다. 원둥치를 잡았으나 그 둥치에 새 움이 나야 잎도 나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 것이지 새 움이 안 나면 소용이 없다 말이오. 그러면 이제까지 가는 그런 것은 다 묵은 둥치가 왔기 때문에 이 둥치는 다 안다 그거요. 둥치는 다 아니까 심령이 밝은 사람은 그거는 공부할래야 공부할 것이 없어. 다 우리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뭐 지금 옛날 그 속사도 시대의 그때 사람들의 교리와 신조를 아는 것과 우리가 아는 것은 천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또 과거에 사도 시대에, 사도 시대나 또 그뭐 무슨 그때와 같은, 그때와 같은 그거와 지금과 비교하면 아주 차이가 많습니다. OOO목사님은 청교도들의 그 신앙을 공부했는데 청교도들의 그들이 깨달은 신조와 교리와 오늘의 신조와 교리와 비하면 지금은 그때보다 얼마나 더 광대하게, 깊고 높게 깨달아진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그저 자꾸 남을 따라가는 그런 일만 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자꾸 새로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것은 외나 이제 말한 대로 근본적인 근본인 이 교리 신조, 근본인 교리 신조 요것만 뽈끈 붙잡고 믿게 되면 그 다음에 우리가 깨달을 교리와 신조는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가 근본된, 강령된 교리와 신조를 우리가 꼭 잡고, 잡고 깊이 연구하면 과거 시대에는 모순이 없었다 했는데 조금 장성한 사람이 보면 또 모순이 있다 되고, 모순이 있다 하고 난 다음에 모순 있는 것을 연구하면 일치되는 한 교리가 또 새로 나오고 또 그것으로 만족하고 할 게 아니라 또 성장되는 발전된 세대가 있었으면 그 사람들이 그 교리를 근본 뽈끈 잡고 있으니까 조금 더 연구하니까 과거 선배들은 모순이 없다 하고 지나왔지만 나는 모순이 있다 말이오. 모순이 있는 그걸 가지고 또 연구하니까 모순이 일치되는 또 자라갑니다.

이래서 강령적인, 사람들이 그 뒤에 뭐 깨달은 게 아니라 성경에 말해 놓은 이제 말한 절대성인 이런 교리 몇 가지 되는 이것을 거머쥐고 요동치 안하고 자꾸 이라며 연구하면 모순이 나와 가지고, 모순이 나왔을 때에 조금만 힘이 있으면 새로운 발견이 나오고, 또 새로운 발견이 나오니까 만족하고 있었는데 그 다음에 이 교리를 거머쥐고 또 연구하면 또 새로운 모순이 나오면 새로운 모순 뒤에는 새로운 발견이 나오고, 또 새로운 모순 뒤에는 새로운 발견이 나오고 자꾸 이럴 때를 따라서 이래 가지고 자꾸 성장돼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그렇게 해서 연구를 해 가지고 좀 자꾸 자라가면, 사람들이 자기가 신조와 교리를, 가지고 있는 신조와 교리를 빼앗기지 안하는 데에는, 이 서부교회 교인들이 지금 배우고 깨닫는 것을 빼앗기지 안하는 데에는 뭐 요걸 굳게 잡고 있다고 뺏기지 안하는 것 아닙니다. 굳게 잡고 있다고 뺏기지 안하는 것이 아니오.

반드시 교리와 신조에는 논리가 있고, 또 비판과 평가가 있습니다. 비판과 평가는 이거는 사람이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비판과 평가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비판하고 평가할 때 이게 이것보다 낫다 하는 그 최고의 절정에 있으면 그 밑의 것에서는, 자기 밑의 것에게는 미혹을 받지 안하지만 자기 위의 것에는 또 미혹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대에 미혹 받지 안할려고 하면 그 시대에 모든 것보다 깨달음이 앞서야 미혹 받지 안하지 그리 안 하면 미혹을 받는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이 시대까지는 선지자노릇을 했지만 그 다음 시대는 그 칼빈 모양으로 유공지인만 됐지 그 다음에는 또 새로운 선지자가 나오고 나오고 해서 자꾸 이래 가는 것이라.

가는 것인데, 지금 은사 교권에 있어 가지고 사람들을 지도하고 있는 분들은 이렇게 자꾸 한 성구 한 성구를 배워 가지고 나갈 게 아니라 자꾸 성구를, 성경을 배워서 그 성경에 인간 행위라 하는 것은 껍데기입니다. 인간 행위 그것만 배워 가지고 나갈라 하면 한없소, 그거는. 한없기 때문에 안 돼.거기서 가르치고 있는 참, 거기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거기서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거기서 가르치고 있는 우리의 목적과 우리의 소망을 발견해서 몇 가지를 거머 쥐면 자꾸 거기서 저 혼자 얼마든지 걸어서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게 줄기고, 오늘 아침에 일반 교인들에게 말할라고 하는 것은 이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우리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말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소속과 입장,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러면 믿음의 조상의 소속과 우리 소속이 같다는 말이요, 믿음의 조상의 소망과 우리 소망이 같다는 말이요, 믿음의 조상의 배경과 우리 배경이 같다는 말이요, 믿음이 조상의 성공으과 우리의 성공율이 같다는 말이요, 믿음의 조상들의 방편과 우리 방편이 같다는 말이요, 믿음의 조상의 내적 그 실력, 믿음의 조상들의 속에 있는 실력과 우리의 실력이 같은데 그때보다 우리가 뛰어났습니다.

그때보다 우리가 뛰어난 것은 뛰어난 점이 많습니다. 그때는 미래에 있는 대속을 바라봤지만 우리는 벌써 이미 되어 있는 현재에 되어 있는 그 대속을 우리가 바라보고 났기 때문에 구약의 영감과 신약의 영감이 다릅니다. 구약 영감은 외부에서 그 사람에게 감동시켜서 예언도 하고 성경 기록도 하고 이렇게 했지만 우리는 지금 이 영감이 우리 안에 들어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 그 구약 때의 모든 선지 영감과 우리 신약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그 모든 선지 영감들이 다릅니다. 그때에 중생과 지금 중생이 다릅니다.

이래서, 그것이 언제 완성이 됐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휘장이 갈라짐으로서 그 증거해서 그때에 이제 완전 해 결이 됐고, 또 모든 바위들이 갈라지고 이렇게 됨으로서 모든 참 회개라는 그런 완전 능력이 들어오게 됐고, 또 부활하심으로서 부활이 돼졌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돼졌지 그때는 다 미결에 있는 것을 받았고 우리는 이미 완전히 돼 가지고 있는 걸 받았기 때문에 영감이 다릅니다. 그 성경 가운데 여러분들이 찾아 보시면 그런 거는 좀 깊이 들어 있지만 영감이 다르다 그거요, 이런데 그들이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 우리는 믿음의 자손이라, 믿음의 자손인데 그분들이, 이 아브라함과 우리와 꼭 같고 이삭과 우리와 꼭 같고 야곱과 우리와 꼭 같은데 우리가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뭐이냐 하면 우리는 이미 돼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때는 미래를 바라보고 이래했기 때문에, 또 우리는 땀은 사람들의 선배들의 과거 그것이 내 재료가 됐고 양식이 됐지만 그들은 다 첫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그들은 초보의 길을 걸어갔고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난 그 길을 따라가는 걸음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삭에게 배경된 배경이 우리 배경이 되어 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하기를 간단하게, 그 어려움을 당하니까 지난밤에 그걸 약간 말 했는데 이거 한없는 시간을 가르쳐야 할 건데그 어려움 만난, 흉년에 어려움 만난 그것이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 전 예정하셔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르고 또 그들을 우리의 거울로, 그들이 우리의 선배로, 그들이 당한 거기서 우리의 당한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우연히 흉년이 닥친 게 아니라 흉년을 당하도록 하나님이 영원 전 예정하셔 가지고 그 흉년이 닥친 것이고 그 흉년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된다 말이오. 흉년에 어려워지니까 아브라함도 별 수 없이 이삭도 별 수 없이. 다 의인들이요 성자들이지만 어려움 당하니까 어디로 실실 갔느냐 하면 어려움을 피해서 가는 것이 이 인생들이라 그말이오. 어려움을 피해 가는 것이 인생들이라 그렇지 않습니까? 아브라함도 고기덩어리 배가 고프니까 어렵고, 또 마음도 어렵고, 이러니까 그 심신의 고통을 피해 간 것이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은 피해 갔다가서 실패를 했다 말이오. 실패해 자손들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말이오. 사백 년 종노릇한 것은 뭐 때문에 종노릇했느냐? 그 애굽에 하필 가 가지고. 그거 그때 또 받지 안할 걸 받았다 말이오.

이러니까 첫 아브라함은 실패했는데 둘째 이삭은 거기서 또 실패 걸음을 걷는 것을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네가 지시하는 곳에 가서 거하라, 거기 가서 머물러라, 그러면 내가 복 주겠다 이래 가지고 그 받아 가지고 둘째 믿음의 조상은 실패를 걷지 안하고 이삭은 걸었다 그말이오. 이래 가지고 그것이 우리에게 노정을 보여 준 거라.

그러면 우리는, 뭐 우리 현실을 당했을 때에 어려움 당하면 그만 무조건 어려움 당하면 어려움 피하고 또 좋은 것 닥치면 좋은 것 취하고, 자꾸 좋은 것 닥치면 좋은 것 취할라 하지, 어려움 닥치면 어려움 피할라 하지, 어려움을 피하는 것과 좋은 것을 취할라 하는 그것이 우리의 사상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멸망될 사상이니 현실 당했을 때 그만 좋은 것, 이게 좋으나 저게 좋으나 둘둘둘 봐 가지고 좋은 것 있으면 좋은 것 택해 버리고 또 실패가 와 가지고 이거는 피해야 되겠다 피하고 하는 이것이 우리 멸망되는 길이니까, 이것이, 우리 조상들이 아브라함이 걸어 가지고 실패했고 이삭은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그 길을 걸어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대로 `애굽으로 가지 말라' 애굽은 이 세상을 상징하는 것인데, 언제든지. `세상으로 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곳에 가서 거게 거하라.' 이렇게, 그러면 현실이 어려운데 우리는 그만 무조건 일방적 지식을 가지고 어려움은 피해야 된다, 좋은 것은 잡아야 된다. 이게 다 우리 망하는 것이요 악마의 마귀의 유혹이라 말이오.

그러면, 주님은 그뭐 한 번만 절하면 천하 영광을 다 주고 권세 다 준다. 그렇게 쉬운 길 택하지 안했어. 쉬운 길 택하지 안했어. 쉬운 길 택하지 안했고 좋은 길 택하지 안했고 어짜든지 우리는 우리의 미래라는 이 우리 노선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생명 구멍으로 나가야 되지 우선 나가기 좋다고 이래 했다가는 낭파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그 문이 넓고 길이 너르고, 또 생명으로 나가는 길은 길도 협착하고 문이 솔다 하는 걸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 현실에서 이 믿음의 세 조상을 따라서 이렇게 볼 때에 어떻게 됐느냐? 야곱은 그 셋 중에 제일 나았습니다. 야곱을 어째 보면 안 된 것 같지만 야곱은 그분은 인간적인 실수가 있어도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실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지만 이제 형이 천하게 여기는 장자 직분을 귀하게 여겨서 취했지 야곱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인, 종교적인 실수는 제일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보다는 이삭이 없었고 이삭보다는 야곱이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곱을 하나님께서 야곱의 하나님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랬는데 꼭 같은데, 이삭이 그 길 걷지 안하고 바른 길을 갔다가서 큰 성공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받았는데, 이래 이 길 가는 거는 그만 다 그만 다 말하지 못하겠으니까. 이 길 가서 받았는데, 그 내나 축복 준다 했는데 무슨 축복 줬습니까? 자기 자손이 그렇게 흥성했지, 천하에 있는 모든 만민이 다 자기네들 인해서 복을 받도록 이렇게 복의 기관이 돼졌지, 또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축복을 해서 아주 그렇게, 이 흉년되는 데에서 뭐 있겠느냐 했지만 백 배나 주수를 하게 됐지, 그 모든 사람들이 다 두려워서 다 이렇게 화친하기로 했지, 또 그랬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존대 받았지.

그랬는데, 그분들이 행복 받은 것 그것도 있어요, 아브라함의 아내는 할마이인데 할마이가 뭐 예뻐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막 탐을 내 가지고 죽일 만치 여겼던가? 아브라함 보기에 참 사라는 굉장히 예뻤던 모양이야. 또 이삭 볼 때 또 리브가는 예뻤던 모양이야.

거게도 나는 생각해. 야, 이거 그라면 인제 두 가지 문제라, 이 교역자 될 사람은 함부래 마누라를 예쁜 처녀를 가려야 되겠다. 이게 다 이쁜 처녀 가려, 믿음의 조상들이 다 예쁜 처녀이니까 예쁜 처녀를 가려야 되겠다 이제 이렇게 볼 수 있는데, 그런 게 아니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신앙생활하니까,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미인이 됐다. 하나님이 미인을 만들어 주셨다. 아내는 미인을 만들어 주셨지, 자녀는 그렇게 신앙의 사람들을 만들어 주었지, 그러면서도 두 길이 언제든지 있어. 또 모든 사람들에게 존대함을 받게 됐지, 그 모든 물질도 풍성하게 됐지.

이랬는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어떤 길이냐? 우리는 참 편한 길을 갑니다.

이삭이 아주 편하게 살았소. 살았는데 달라 하면 주고 뺏들면 뺏기고 가라 하면 가고 있으라 하면 있고 아무 책임을 안 지고 살아. 이삭은 아무 책임을 가지지 안했어요. 아당아당 투쟁하는 일이 없었어. 아당아당 투쟁하는 일이 없었는데 그저 쫓으면 쫓겨가고, 빼앗으면 뺏기고, 달라 하면 주고, 이러니까 아무 세상에는 마찰 없이 살았어. 마찰 없이.

이삭이 마찰 없이 살고 다만 하나님의 복만 벗기지 안하도록 노력하고 이러니까, 마찰 없이 살았으나 마찰 없이 사는 것이 빌어먹을 길이지. 아, 이거 달라 하면 주고, 뺨 때리면 맞고, 쫓아내면 쫓겨가고, 뺏기면 뺏기고, 달라 하면 주고 이러니까 이거 망할 길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는 세계 모든 민족이 따라갈 수 없는 그렇게 복된 조상이 되고 말았다 그말이오. 우리가 이 길이라. 이러니까 이 이삭에게 우리가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게 아니라. 싸우고, 다투고, 피 흘리고, 시기하고, 살인하고 막 굉장하다 말이오. 이래도 안 돼. 안 되는데 이삭은 아무 마찰 없어. 밀면 밀리고 쫓으면 쫓기고 이랬는데 다만 하나님의 축복을 이거 하나만 뺏기지 안할라고 할때에, 쫓아낸 사람들이 겁이 나 가지고 쫓아와 가지고 아이구 우리 사화합시다' 암만 빼앗아도 지난밤에 말한 거와 같이 뺏고 나니까 더 많아지고 뺏고 나니까 더 많아지고, 이와같이 자꾸 밀리고 쫓겨 다니고 뺏기고 주고 하는 이것이 뭐이냐 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존재요 대주재이시요 그분에게는 한없이 있는 건데 `아, 저분들은 저렇게 되는 것보니까 한없는 대주재와 연결이 돼서 그거는 뭐 암만해 봤자, 저거 수도 꼭지 저거는 한없는 그 저수와 그 연결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암만 해 봤자 저거는 물만 많이 나왔지 소용이 없다.' 이래서 하나님을 알게 됐다 그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이삭의 생활을 이렇게 해 나가야 우리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되고,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자이며 어떠한 그 참 무한한 배경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서 우리를 두려워하고 우리에게 화친하고 우리에게 굽신거리지 우리가 우리 힘으로 아당거려 싸워 가지고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안하기 때문에 우리도 천해지고 우리 하나님도 천해지고, 우리도 욕 얻어 먹고 우리 하나님도 욕 얻어 먹고 이래. 그러니까 이삭의 신앙에 대해서 우리가 잘 좀 연구를 해서 배우도록 합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지말고 하나님의 축복만 뺏기지 안하면 됩니다.

어디냐? 내가 지시한 곳에 거하라 이랬어. 거하라. 지시한 곳에 거하는 것이 뭐입니까? 지시한 곳에 거하는 것이 뭐입니까? 에덴동산입니다. 지시한 곳이 처음에는 에덴동산이오. 에덴동산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에덴동산 그 자리만 쫓겨 나오지 안했으면 영생이요 모든 피조물들이 말만 하면 쭉쭉 순종한 것이 얼마나 존영하며 하나님 다 음에 존귀한 자리 아닙니까? 하나님 다음에 존귀한 위치라.

하나님 다음에 존귀한 위치고, 모든 피조물들이 다 복종하는 영광된 위치라. 그 자리 거하면 될 때에 그 자리 거하지 안하고 망령을 부려 가지고 쫓겨났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오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지시하는 고 자리에 있으면 우리 에덴동산이라. 하나님이 지시하는 고 자리 있으면 다른 사람이 알아주든지 못 알아주든지 하나님이 인도하신 고 인도 하나님과의 교제되어 있는 그 교제의 관계를 끊지 안하고 교제의 그 교제의 거기서 잇겨 가지고 있는 그 잇김에서 있으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은 다 내 것이 됩니다. 저희들이 나를 빰을 때려도 그것은 나를 찬양하는 것이 되어지고 말고 그는 결국 나를 위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위하지 않는 거는 하나도 있을 수가 없어. 이러니까 좀 폭 넓은 신앙을 가지고 우리가 깨닫고 이렇게 조브랍지 안하고, 조급하지 안하고 이렇게 참 신앙에 든든히 서서 걸어가는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그 신앙을 따라서 가는 우리가 돼야 하겠습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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