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5 22:28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1989. 2. 5. 주일오전
본문: 에베소서 4장 13절∼14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오신 것과 또 십자가의 사활로 우리를 대속하신 것은 그 목적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온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다.-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기 위해서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말씀은 온전한 사람이 영원히 가지는 자기의 직책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과 목적이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직책을 영원히 감당케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소원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직책을 감당한다 말은 선지자 직책 왕 직책 제사장 직책을 감당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셔 가지고 이 제사장 선지 왕직을 완료하셔서 우리를 완전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이 세 가지 직책을 대잇도록 넘겨 주셨습니다. 그런데에는 우리가 영원히 사람의 궤술에 빠지지 안해야 하고 또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안해야 됩니다.
진리와 영감 외에 땅위에와 영원히 말들이 많은데 세상에서만 말들이 있는 게 아니고 무궁세계에도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진리와 영감 외에는 다 간교한 유혹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십세기로 문화 발달 진화를 말하지마는 실은 이것이 간사한 유혹이 점점 충만해져서 하나도 남김 없이 전부 다 멸망케 하려는 악령의 역사입니다. 이런 데에 빠지지 아니해서 '교훈의 풍조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 세상에 조석으로 변해가는 이 모든 교훈의 이 물결 여기에 요동해서 타락해 가면 안 됩니다. 생명 없는 자는 세상의 모든 풍조의 유행에 다 피동되어 시대가 되어 가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생명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게 피동되지 않고 영원 불변의 완전자이신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봉독한 목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들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 첫째고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직책을 영원히 감당하는 자 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성공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직이 어떤 것인가? 제사장직 선지직 왕직인데 제사장직은 자존자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수많은 얽혀 있는 잘못된 것들을 다 정리 정돈해서 올바른 조화를 가져 하나님과 피조물이 화친을 이루게 하는 것이 그것이 제사장직이요 선지직은 하나님리 충만을 피조물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니 그 충만이 전달되는 데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충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왕직은, 이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단일 통치인 그 통일 통치에 배치되면 그는 멸망받습니다. 하나님의 단일성의 단일 통치에 복종케 하는 그 역사가 왕의 직책인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직책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천직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그 방편과 또 그리스도의 직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을 육성시키는 그 방편에 대해서 증거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영원 주재십니다. 영원 주재라 말은 영원히 모든 존재의 주인이 되십니다. 또 하나님은 영원히 주권자이십니다. 모든 것을 홀로 의지 주권 능력 주권으로서 모든 계획도 주권대로 하시고 성취하시는 것도 혼자 주권대로 하시지 어떤 것에게 호리라도 피동이나 협동을 받지 않는 주권자십니다. 또 하나님은 독행자시요 독재자십니다.
홀로 행하시고 홀로 당신의 뜻대로 독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은 인본의 민주주의 이 모두 공화주의를 많이 말하고 있는데 이럴 때는 하나님의 독재주의를 강하게 외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독행하시는 독재자십니다. 또 하나님은 영원히 홀로 당신 주권으로 섭리하시고 또 당신 주권으로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또 영원히 당신 홀로의 주권 심판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피조물들과 가까와지려고 하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신인양성일위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존자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들과 그 사이를 중화시키는 중보자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려고 역사하시고 또 거기에서 성신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오시려고 역사하시고 또 거게서 진리로 우리에게 올라고 역사하셔서 문서 계시인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신앙 행위를 할 때에 믿으면 된다고 생각을 하고 믿을라고 애를 씁니다. 또 하나님을 소망하면 된다고 생각해서 소망할라고도 애를 씁니다. 또 잘못된 걸 회개하면 된다고 회개할라고도 애를 씁니다. 또 기도를 해야 될 줄 알고 기도할라고도 애를 씁니다. 말씀대로 실행해야 된다고 실행에 대해서도 애를 씁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우리 신앙 행위를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쓰고 있으나 이것만으로써는 절대 안 됩니다.
기도만 가지고 절대 안 되고 믿음만 가지고 절대 안 되고 소망만 가지고도 절대 안 되고 행함만 가지고도 절대 안 되고 회개만 가지고도 절대 안 되고 기도만 가지고도 절대 안 됩니다. 이런 것은 비유컨대 나무가 있은 지 후에 열매가 맺는 거와 같은 그 결과로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열매보다 그 나무가 앞서 있어야 되지 나무가 없는 데에 그 열매는 맺어진다면 다 잡것이요 참열매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보다 먼저 있는 나무와 같은 그 근원을 찾아서 우리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고 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이 기독자의 구원 성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말씀 하시기를 사도행전 20장 32절 이하에는 보면은 사도 바울이 아시아 교회들에게 말씀을 삼 년 동안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들에 삼 년 동안 가르치신 이 말씀을 너희가 기억하고 이 말씀을 생각하고 이 말씀을 떠나지 아니하면 이 말씀이 너희를 든든히 요동치 않게 세우고 모든 궤술과 간사한 유혹과 이 세상 이 배암 꼬리 모양으로 흔드는 정함이 없는 이 변해 나가는 그런 데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겠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또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함으로 너희들이 거룩하여진다 이랬습니다. 말씀 외에는 인간이 거룩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8장 31절에는 보면은 너희들이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로 나를 닮을 것이요 나를 배울 것이요 나를 본받을 것이요 나와같은 자가 되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15장 7절에는 보면은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들의 모든 생각이나 소원하는 것이나 비판하는 것이나 평가하는 것이 나와 꼭 같아서 내가 동하면 너화가 동하고 내가 정하면 너희가 정하도록 내 소원과 너희들의 소원이 일치가 되니까 그 소원은 다 너희들이 원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방편을 제가 깨달은 대로 증거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을 대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산에 가서 기도하려 할 때에 잘못하면 그만 눈 감고 기도만 하기 시작합니다. 눈감고 기도하면 기도가 잘돼도 그 기도가 탈선돼 가지고서 마귀 놀음을 실컷하고 오기 쉽습니다. 기도하면은 기도하기 전보다도 기도함으로써 그 사람이 아주 점점 타락하고 그 변질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러 가든지 우리는 혹은 자기가 평소에 무슨 생활하든지 제일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처음에는 어리니까 제가 모르니까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설교 말씀을 듣습니다. 재독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이 가르치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걸 듣든지 들을 때에 우리는 거게서 변화돼야 됩니다. 들을 때에 곧 내가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이 설교해 주는 이는 껍데기는 사람이지마는서도 속에는 하나님이 말씀해 주십니다.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주님을 자기가 대면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이 지금 이 설교를 해 주신다.' 또 자기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주님이 나에게 직접 지금 나에게 말씀해 주신다.' 이거는 공연히 그렇게 끌어다 붙여 그런 게 아니고 사실은 그러한데 우리들이 믿음이 없어서 자기 주관대로 움직여 주님을 부인합니다. 주님 외에는 설교해 줄 자가 없습니다. 주님 없이 설교해 준다면 그거는 전부 마귀 말이지 하나님 말씀 안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이 문서를 기록한 이도 그분이시요 문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계에 신학자들로서 공통되어 있는 것은 이 성경 가운데는 내재적 영감이 있다.
이 성경 안에는 성령의 감화 감동의 이 영감 역사가 있다 하는 것은 다 공통돼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는 이 사실을 자가가 믿을라고 애를 써서 '주님이 이 시간 나에게 말씀해 주신다. 강단에서 주님이 오늘 말씀해 주신다. 또 주님이 이 성경책으로 나에게 읽도록 해 주신다.' 하는 것을 우리가 대면하는 것이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이래서, 성경을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을 대면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거게서 믿음을 내가 얻고 말씀을 들으면서 믿고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이것을 소망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회개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모든 나에게 각자의 형편에 따라서 희로애락의 이런 그 파문이 일어나겠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든지 또 읽든지 할 때에 그때에 듣고 읽음으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이 참 주님이십니다. 듣고 읽으면서 나에게 이 말씀을 설교해 주신다. 그러니까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요렇게 듣는 사람에게는 강단에서 보기는 목사인데 저 귀신이 와 가지고 지금 우리를 죽일라고 지금 귀신 말 하고 있다. 저거는 이리다. 분명히 분별합니다. 주님이 말씀해 주신다는 요것을 자기가 믿고 주님 말씀을 들을라고 할 때에 마귀 말은 아무리 무식한 자에게라도 그자에게는 즉시 나타납니다. 그것을 가리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문학을 세상에 과학을 세상에 그 끝없는 역사를 말할 때에 취미 있기를 마치 테레비 볼 때에 취미 있는 거와 같은 그런 자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멕에 또 말씀을 읽을 때에 그때에 우리는 거게서 주님을 대면해야 되고 거게서 소망을 가져야 되고 거게서 믿음도 가져야 되고 거게서 회개도 가져야 되고 거게서 우리가 실행할 힘도 얻어야 되고 실행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참이지 말씀은 떠나서 제 주관대로 '나는 기도하러 산에 왔으니까 기도하자.' 눈감고 하면은 자기 주관만 실컷 되풀이 합니다. 우리 주관을 죽이는 것이 신앙이요 순전히 자기 주관이 아닌 객관인 하나님을 따라서 우리가 움직이고 닮아가고 배워가고 그로 인해서 모든 이루어나가는 그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떠나서 자기가 기도하는 것도 나중에 분석해 보면 사욕입니다. 자기가 회개하는 것도 자기 주관대로의 회개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쭉 흘러내려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흘려내려오기 때문에 거기에 속해서 그로 인해서 우리에게 받아지는 것이 아니면 모두 다 잘된 것이요 수많은 그 마귀 역사의 인본인 것입니다.
또 셋째로는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외우면서, 외우면서, 들으면서 할 때와 또 읽으면서 할 때와 외우면서 할 때가 또 다릅니다. 말씀을 외우면서, 다 못 외우니까 단 한 성구라도 읽고 듣고 자기가 또 한번 외울라고, 자꾸 외울라 하면은 거기에서 이상스럽게 속에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듣기만 하고 읽기만 하고 외워보지 못한 사람은 외움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새로운 주님과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을 그는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외우면서 또 그 말씀대로 내가 실행을 하면서 내가 이 말씀대로 실행하면서 주님을 대면하는 일을 우리가 연습해야 됩니다. 내가 주의 말씀대로 실행하면서 주님이 지금 나와 동행하신다.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행할 때는 주님이 나와 확실히 동행합니다. 확실히 동행을 해요. 주님이 뭐 별스럽게 우리에게 무슨 저 짚동채같이 돼 가지고 우리에게 동행하지 않소. 또 무슨 그림자같이 얼렁거려서 동행하지 않소. 내가 말씀대로 행할 때에 주님은 나에게 무형의 존재로 나에게 지능과 온전으로서만 나에게 동행해 주십니다.
실행하면서 주님과 동행하고 실행하먼서 거게서 믿음을 가지고. 실행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믿을을 만들고 실행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실행하면서 거게서 자기의 무능도 깨닫고 회개도 하고 실행하면서 '주여, 아무래도 도용 주셔야 되겠습니다.' 나오고 이래서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면서 이런 것들이 발생되는 이것이 곧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져 가는 역사입니다.
이래서, 말씀을 들으면서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을 외우면서 말씀대로 실행하면서 거게서 자꾸 주님을 가까이 친밀해서 대면할 것, 거게서 주님을 대면하고 거게서 주님의 모든 약속하시고 선포하신 것을 믿고 또 거게서 소망하고 거게서 잘못된 것을 자기가 회개를 하고 거게서 또 간구하고 거게서 노력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제일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은 어짜든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외우고 행하고 하는 여기에서 시발되는 것이 이것이 제일호요 이것이 올바른 방편인 것입니다. 잘못하면 성경 말씀을 뭐 자기 좀 능숙하다 해 가지고 성경 말씀을 잊어버리고 기도만 척 시작하기 쉬운데 기도만 시작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지난 주간에는 기도하러 간 수가 구백삼십삼 명인데 이 기도하러 간 그 사람들은 아마 가던 길로 들짱 하나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같은 설교를 세 번이나 재독하고 혹은 네 번 재독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 기도는 간단하게 합니다.
들을 때에 거게서 깨달음의 거게서 나오는 기도 거게서, 회개하는 회개, 거게서 소망하는 소망, 거게서 주님과 친밀해지는 친근 이것이 다 참이요 온전인 것입니다. 지난 달에는 기도하러 간 분이 천오백사십 명, 산에 기도하러 단체로 간, 단체로, 개인으로 간 것 아니고 단체로 간 것만 천오백사십 명이라고 이렇게 보고가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이제 한 걸음 나아가서 그저 듣고 읽고 외우고 행할 뿐만 아니라 거게서 영감으로, 영감으로 듣고 영감으로 읽고 영감으로 외우고 영감으로 이제 행하는 이 일을 우리가 또 연습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영감으로 읽고 영감으로 듣고 영감으로 외우고 영감으로 행하는 것은 어멓게 행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심은 자기 양심이나 양심은 자기에게 속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 양심이 자기에게 속해서 뭐 자기 형편이 지금 물질 문제가 있으니까 물질에 따라서 비판한다면 그 양심은 벌써 그것을 성경에 말하기를 화인 맞은 양심이라, 물질의 소유가 된 양심이라. 양심은 아무것에게도 소유되지 않습니다. 이래서 세세에 신학자들이 이 양심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인적 요소가 아니라, 신적 요소도 아니고 인적 요소도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 그 사이에 독립성을 가진 존재인 깨끗이라 이렇게들 양심관을 보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양심은 이것은 지식에 지배를 받는 것이요 인적 요소입니다.
우리가 양심으로 듣고 양심으로 읽고 양심으로 외우고 양심으로 행한다는 그거는 뭐이냐? 자기로서 양심은 자기에게 옳은 판단으로 최종 최고의 판정을 일으키는 최종 최고의 결정을 지우는 것이 양심입니다. 자기가 만일 어떤 일을 시작해서 행한다 할지라도 양심에 판정 거게 미치지 못한 일시 감정으로도 할 수 있고 방편으로도 할 수 있고 수단으로도 할 수 있고 오만 것 하나 그런 것은 다 양심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양심은 자기에게 최고로 '이대로 해야 되겠다.' 말씀을 들을 때에 '아, 이 말씀이.' 자기에게 참이 아니라면 머물러 둡니다. '이 말씀은 나는 인정 안 된다.' 이러면 그 사람은 그 양심이 부정하고 있을 것이오.
양심으로 한다 말은 하나님 말씀은 정확 무오한 말씀이요 이는 획 하나도 변할 수 없는 산 말씀이요 무한한 말씀이요 영원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자기 양심으로 듣습니다. 자기 양심으로. 양심으로 '이 말씀은' 마음을 다해 가지고서 '이 말씀은 과연' 모든 말과 비교하지 안하고 이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땅에 있는 모든 말은 인간의 말이다. 그거는 다 죽은 말이다. 하나님 말씀은 산 말이다.
하나님 말씀은 산 지식이요 인간의 지식은 다 죽은 지식이라 죽이는 지식이라 하는 그거는 수많은 신앙 생활에서 경험하고 체험해 가지고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외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양심을 써서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인정할 때에는 그때에는 영감이 되는 것입니다. 양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은 영감이 와서 영감으로 듣는 말이 됩니다. 양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에는 양심을 써 가지고서 하나님 말씀, 양심을 쓴다 말은 자기 마음에 시비 곡직 진가를 비판하는 그 비판에 최고의 요소가 양심입니다. 최고의 요소 그게 양심인데 최고의 요소를 가지고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읽고 또 외우고 그대로 실행할 때에 곧 그것이 보이지 안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신의 감동과 동행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의 노력으로서 양심의 행동이 없이는 영감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노력하고 그것이 이제 잘되면은 영감이 됩니다. 양심의 행동이 잘되면 성령이 찬성해 줍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성령의 인을 맞는다. 이래서 시편 1편에도 보면은 하나님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신다. 인정을 해. 하나님이 인정하신다 그 말은 영감이 그와 함께 하신다 그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양심으로 듣고 읽고 외우고 행하면서 이것이 곧 영감으로 듣고 영감으로 읽고 영감으로 외우고 영감으로 행하는 요것이 하나님과 동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셋째로, 우리들이 그와 같이 살게 되면은 그와 같이 지금이 말씀을 자기가 자기 주관으로 듣고 읽고 외우고, 행하고 이라다가 이제는 양심을 써 가지고서 듣고 읽고 외우고 행하고 이리 되면은 점점 영감화되어질 때에 그때에 우리에게는 뭐이 봉착되느냐 하면은 죄가 봉착됩니다. 그리 되면 죄와 나와 하나된 것이 이제 이별이 돼서. 죄와 나와 마찰이 옵니다. 죄와 나와 대립이 됩니다. 그게 없는 사람은 죄와 대립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죄도 자기는 그 죄인 줄 모르는 데도 자기 살이 떨립니다. 자기 살이 떨리고 신경이 떨려서 그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양심이나 이성 판단보다도 우리에게 신경이 어느 때는 더 예민하고 날카로울 때가 있습니다. 이래서, 죄와 대립이 되고 이러니까 여게서부터 죄로 더불어 싸우는 일이 생겨집니다.
또 여게서부터 이제, 자기 자유 생활이 뭐이냐? 자기 본능 생활 자기 주관 생활 자기 소원 생활 이것이 뭐이냐? 의가 자기 소원이요 자기 주관이요 자기 본능이지 의가 아닌 거는 자기 비위에 맞지 않습니다. 자기 본능에 맞지 않습니다. 이러니까 자기 본능 생활인 이 의가 자기 본능 생활이 되어집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칭의를 입고 이제 그때사 칭의를 입게 됩니다. 칭의를 입고 삽니다.
그냥 우리가 뭐 아무리 사죄를 입고 칭의를 입고 한다 해 가지고 말로 입는 것인데 차차 차차 이래 가지고서 이 단계를 밟아가고 보면은 실제로 입어서, 실지로 입어서 죄와 자기와 적이 되어지고, 죄와 자기와 적이 되어지고 의는 자기 본능적으로 자기 취미와 자기의 본능이 되고 자기의 자유가 되어지기 때문에 그게 아니면 못 견디고 그거라야 견뎌지는 그런 의가 자기의 본능이 되어지는 그 자유자가 되어집니다. 그라고 나면은 이제 하나님과 동행한 것을 자기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동행하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 거게서 다른 사람들은 뭐 하나님과 동행인지 하나님과 적인지 모르나 이러면 이제 그 심령이 밝아져서 자기가 '이때는 내가 하나님과 동행을 한다. 내가 요렇게 생각 가지는 거 이거 하나님을 내가 배척을 했다. 하나님을 내가 아주 하나님 앞에 범죄했다.
하나님을 멸시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과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이 환하게 밤과 낮이 환한 것처럼 환하게 자기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이래서, 그러면 인제 그 사람이 땅에 있는 것을 소망할 것이 없습니다. 환하게 다 보니까. 다 보니까 그것이 소망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뭣을 물론 이 세상에서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순서를 밟아 가지고서 다 이리 저리 해서 구원에 도달하는 것이지마는서도 예를 들면은 모든 시작 어떤 일이 시작되는데 그 시작되는 그 일에서 그 시작이 어떤 과정을 통한다는 것이 같이 보여지고 그 과정을 통해 가지고서 결말이 어떻다는 것이 같이 보여지고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관해서 어떤 결말을 맺는다는 것이 같이 보여지니까 땅위에 하나님 그분 외에는 소망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 외에는 소망할 게 하나도 없어. 그분 한 분만이 소망하는 자가 된 것이 영생한 자요 그분 한 분만이 소망을 하고서 움직인 그 모든 언행심사의 행동이 전부 다 영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제 우리들이 하나님이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 그분이 대주재자시요 주권자시요 독재자시요 홀로 독행자시요 그분이 홀로 심판자시요 그분이 홀로 영원 보응자시요 그분이 완전자시요, 이런데 그분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분이 모든 걸 가지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줄라고 해도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줄라고 그분과 우리 사이를 다리를 놓은 것이 그것이 뭐이냐? 곧 도성인신 신인양성일위의 사활의 대속으로 우리의 중보자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보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건너왔습니다. 그래도 우리와는 만나지 못합니다. 중보자를 통해서 건너와 이제 성신의 감동으로서 우리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영감으로 가까이 온 하나님께서 영감으로만 가까이 왔지 우리는 영감을 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이제 영감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진리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진리로 나타나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구약 육십육 권의 문서 계시로 우리에게 비로소 와 자지고 우리가 들을 수 있고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우리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가까워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온전한 사람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우리에게 흘러내려오는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서 어린 양의 보좌 밑에서 샘이 흘러 가지고서 그 샘이 졸졸졸 흘러내려오는데 그 샘이 일천 척을 흐르니까 발꿈치에 오고 일천 척을 더 흘러내려 가니까 무릎에 오고 일천 척을 흐르니까 허리에 오고 일천 척을 더 흐르니까 이제 드부렁이 뜨게 되고 거게 생물들이 많이 살아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무한하심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모든 연관성을 가리켜서 그 형태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후에 계속하겠으니까 오후에 와서 듣고 이제 재독을 몇십 번이든지 들으면은, 이 성경 모양으로 거뜬거뜬 건너 뛰어서 이래 놨기 때문에 그 밑에 다리는 자기가 자꾸 많이 재독을 들으면 차차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들은 너무도 길이 많고 복잡해서 길 찾기가 참으로 어려운 말세를 당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좁고 곧고 바른 길을 알려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럽니다. 성경 말씀에서 츨발하고 영감으로 다져 빨리 걸어가고 마지막에 주님 만나는 것으로서 완성되는 이 신앙 걸음을 가르쳐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래서 말씀으로 영감으로 주님의 대속의 공로에 도달하여 주님을 옷입듯 입고 주님으로 우리의 전부를 삼아 온전한 사람을 이루며 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이루어지는 저희들이 되도록 이 신앙 걸음에 곧은 길을 택해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전부가 다 요동치 안하고 이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끝까지 주님이 붙들어 주시고 여게서 탈선되는 자가 없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제 많은 형제들을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은 이제 주님의 것이 됐습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봄으로 이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도 염려 없이 평안한 가운에서 구원을 잘 이루어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영감으로 항상 붙들어 지켜 주옵소서.
이들을 구원하느라고 수고한 사랑하는 종들에게 그리스도의 이 심정이 저희들 속에 불붙어서 형제를 구원하는 일을 언제나 게으르지 안하고 충성하게 하시고 지금 또 전도지를 삼백칠십만 장을 박아서 거의 다 전하였사오니 남은 것을 전하고 또 계속 이 복음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안하고 지체하지 안하고 점점 더 뜨겁게 역사하여 주님을 만족케 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