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5 22:23
그리스도의 심판대
본문 : 고후 5:1-10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지난번에 삼일예배 때에 공과를 한번 더 증거하려고 했는데 그만 그날 밤에 다른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말했지만 다시 한번 공과를 읽겠습니다. 공과 필기에 혹 잘못된 것을 고칠 분들은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본문, 고린도후서 5장 8절로 10절.
요절은, 10절.
제목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첫째. 우리는 세 가지 기억할 것, 첫째는 하나님의 자녀인 영생을 가진 참 자기와 자기 아닌 원수인 자기와 이 두 가지가 있는 것과, 둘째는 무너질 땅에 있는 장막집과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하늘 집 곧 하늘 처소가 있는 것과, 셋째는 우리의 전심 전력을 다하여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는 그 현실에 하늘에서 오는 영원한 집으로 개조받을 것에 전심 전력을 기울여 개조받으면 무너질 장막집은 하나님이 적절하게 해 주시는 이 세 가지를 기억하여야 한다.
둘째. 우리는 다 죽은 후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자기의 행한 대로 갚음을 받을 자들인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
심판의 내용을 표현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말씀하신 것은 땅 위에서 제사장 행위와 그 실력, 선지자 행위와 그 실력, 왕의 행위와 그 실력을 얼마나 갖추었으며 하여 놓은 일은 얼마나 있는가를 심사 보응하시는 이 심판대인 것을 말씀하심이다.
셋째. 그런고로 우리는 동기와 목적이 구속하신 주를 위함과 구원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방편은 우리에게 제사장 선지자 왕 노릇을 주께서 감당하신 것을 본받아 우리도 그 가난, 그 고난, 그 멸시, 그 천대, 그 죽음을 달게 받는 것으로 영원한 보응과 보상받을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살같이 지나가는 세상에서 슬기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현실의 행위는 곧 영원을 인치는 실상이다.
네, 공과 내용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을 때에는 자기가 한 사람뿐이지마는 믿은 후에는 자기가 두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은 자기 아닌, 자기를 죽인 원수가 자기처럼 나타난 자기 아닌 원수인 거짓 자기요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후는 중생된 영이 참 영생을 가졌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인 참 자기인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에게는 땅에서 살고 있는 자기 처지 형편 사정 분위기 위치 그것이 있어서 사람과 사람의 등급과 차이들이 있는 것과 같이 하늘나라에도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땅에서 좋은 것을 보아 하늘나라에 좋은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고 땅에서 불행스러운 것을 보아 무궁세계에 불행한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또 땅에 있는 이것들은 다 무너질 것들이요 옮겨질 수 있는 것들인데 이것이 무너질 그때에 무너지는 그 현실에서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더불어 하나가 되면 무너지되 영원한 멸망이 되어지고, 그때에 진리와 성령과 하나님으로 하나가 되어서 끝이 나면 그것은 죽을 것이 영원한 생명에게 삼켜져 하늘나라에서 오는 영원한 처소 영원한 집으로 바꾸어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요것 또 하나 기억하고, 이제 두 가지.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가 땅의 것이 단번에 다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따라서 서서히 무너지고, 단번에 무너지는 일도 있지마는 서서히 대개는 무너지는데 무너지는 그 때에 자기가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다 헛일이요 무너지는 그것이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으로 하나가 되어 그에게 속하고 그를 떠나지 않고 그와 하나되어 무너지면 무너진 그것이 무너진 것이 아니고 심어지는 것이 됩니다. "썩을 것으로 심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말씀과 같이 그것이 심어지는 것이 돼서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한 것으로 변화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일에만 전력을 기울이면 이 무너질 장막집에 속한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좋아하는 그 모든 일반 은총 이것은 우리가 힘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인 줄 아시고 이런 것들을 잘 제작하고 잘 공작해 주실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면 어떻게 될 건가? 그다음에 보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말씀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가지고 하나님의 공심판에 심판을 받아서 다 유황불 구렁텅이의 멸망으로 가지마는 택함을 입은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가지고 하나님의 공심판에는 예수님이 다 대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받을 것이 없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 가지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서 심판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어떤 심판대인가?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기름부음 받은 심판대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 뜻은 이 심판은 어떤 심판인고 하니 제사장 행위와 실력이 얼마나 세상에서 준비해 가지고 왔는가, 선지자, 왕의 행위와 실력을 얼마나 갖추어 가지고 왔는가 이것을 다 조사해 가지고 심판하는 심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반드시 이 심판대 앞에 서서 자기가 어떻게 살았든지 산 그대로 심판을 받아 가지고 영원한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다시 증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지난 토요일날 아침에 이 말씀을 증거했는데 외처에서 온 교역자들도 토요일날 아침에 이 말씀을 들었는데 또 오늘 밤에 뭐 할라고 이 말씀을 증거하는가? 증거할 필요는 몇 가지입니다.
하나는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담대하여 원하는 것은' 이 담대, 이 담대를 어떤 담대인지 우리가 바로 알아야겠고 또 이 담대를 가져야겠습니다. 우리는 이 담대를 평소에 준비해야 합니다.
이 담대는 어떤 것에 대해서 담대한 그 담대를 가리킨 건고 하니 이 장막집이 무너지는 데 대해서 담대한 담대입니다. 장막집이 무너지는 이 무너짐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은 다 떨고 겁을 내는데 이 무너지는 데 대해서 담대한 그 담대를 가리켜서 담대하다 이랬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장막집이 무너지다니? 자기의 재산이 절단이 난다 그것도 재산이라는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사업이 절단난다 그것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명예나 권세가 절단난다 그것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기 가정이 절단난다 그것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병이 들든지 어떻게 하든지 해 가지고 자기 몸이 절단난다 하는 그것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또 자기 마음에 심한 고통이나 고민이나 번민이나 그런 마음의 고생이 오는 것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또 자기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온갖 지식이나 지혜나, 지식이나 지혜나 총명이나 모든 기능이 무너지는 절단나는 그것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기능이 절단나는 것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이요 이 마음과 몸의 기능이 아무 쓸데없이 되는 것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기 젊음이 늙어서 쪼글쪼글해지는 것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이 끊어지는 것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온갖 쾌락이나 기쁨이나 평안이나 자유나 이런 것이 절단나는 것도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고 벌벌 떠는 것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뭣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고 고통을 하느냐? 두려워하느냐? 그것은 이제 말한 대로 이 장막집이 무너질까 겁을 내고, 무너지려고 하니까 떨고, 무너지니 탄식하고 고통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담대하다 그말은 이런 공포나 비겁이나 염려나 두려움이나 근심이나 걱정이나 이런 것들이 없다는 말입니다.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다 잡아 죽인다' 하니까 겁이 나면 그것은 이 담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는 사람이 자기 사업이 그만 큰 낭패를 당해서 사업이 무너지게 될 때에 겁이 나면 이것은 믿는 사람의 가지는 마음이 아닙니다. 담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는 염려나 근심이나 걱정이나 고통이나 두려움이나 이런 것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담대하여" 하는 말입니다. 그런 데 대해서 담대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그런 것으로 인하여 염려나 두려움이 있다고 하면 우리 신앙은 껍데기요 헛일입니다. 기본구원은 이루지마는 건설구원은 이루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이 담대한 것이 그런 것이 무너지는 데 대해서 근심 걱정 없는 담대라.
그다음에 뭐이냐?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담대하면서 원하는 게 있습니다.
이것들이 무너지려고 해도 꼼짝도 안 하는 담력을 가지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원하는고 하니 "차라리" 지금 이 상태로 있는 것보다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몸을 떠나' 몸을 떠나 그말은 장막이 무너지고, 장막이 무너지기 전에는 하나님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몸에 거할 때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몸을 떠나' 그말은 이 장막집이 무너지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 하는 말입니다.
자, 장막집이 무너지는 데 대해서 걱정 하나도 없고 담대합니다. 장막집이 무너지는데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고 담대합니다. 또 무너지는 걸 걱정 안 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은 어서 장막집이 무너지고, 어서 장막집이 무너지고 주님과 같이 있기를 원한다 이랬습니다. 장막집이 무너지고 주님과 같이 있기를 원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장막집이 무너질까 염려하지 않고 무너지기를 원한다 이랬습니다. 무너지기를 원하는 것이 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장막집이 무너지면 어쩔라고? 하늘에 있는 집으로 주님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더 원한다 여기 말했습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 이런 것이 절단이 나는 데 대해서 조금도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고 담대하다. 무너지는 것을 또 원한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믿는 사람은 '어서 죽었으면 좋겠다. 아이고, 그까짓 놈의 사업이야, 그까짓 것 사업 그것 그만 어서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 지저분하게 괴로운 그 가정 그만 아주 그만 절단나 버렸으면 좋겠다.' 기독자들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무너지는 것을 원하고 무너지는 데 대해서는 염려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기독자의 신앙인가? 2절에 보면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이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 말은 '죽고자 함이 아니요' '사업이 절단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요' 밑에는 무너지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무너지는 것을 원한다고 했는데 위에는 또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이랬습니다. 요걸 우리가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무너지기를, 무너지는 데 대해서 걱정 하나도 안 하는 사람 돼야 되고 무너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돼야 되고 또 무너지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요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안 됩니다. 요 준비가 안 돼 있으면 헛일입니다. 아무리 믿는 척해도 헛일입니다. 잘 안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
거기에 한 가지만 예를 들어서 말합니다.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할 때에 그 죽는 것은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이려고 할 때에 두려워해야 되는가?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때에 죽이려고 할 때에 담대해야 됩니다. 당대해야 됩니다.
담대하면서 소원은 무슨 소원을 가져야 되는고 하니 "원하는 바는 몸을 떠나" 원하는 바는 죽는 걸 원합니다. 죽는 걸 원합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합니다. 죽는 걸 원하는데 그 사람이 죽는 것을 원할 때에 세상이 괴로우니, 하늘나라가 좋으니, 세상에 살 가치가 없으니, 세상은 무가치한 것이라 살 맛이 없으니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아주 신앙 아닌 가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죽는 걸 두려워하지도 않고, 죽기를 원하는 데, 죽기를 원하는데 죽기를 원하는 요것이 자기가 죽어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는 사람 돼야 됩니다. 죽어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아니하는 사람 되고, 죽어 없어지기를 원치 아니하는 사람이면서 왜 죽기를 원하는가? 그겁니다. 왜 죽기를 원하는가 그겁니다. 그걸 지금 오늘 밤에 여기에서 증거해야 되겠다는 필요성을 가진 것입니다.
장막집을 벗고 주와 같이 있기를 원하는데 장막집을 벗고 주와 같이 있기를 원하니까 장막집 벗는 것을 원하는가? 벗는 것을 원해서 장막집 벗기를 원하는가? 장막집 벗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덧입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덧입기를 원하는 것.
덧입는 것은 이 장막집이 무너질 때 그때에만 덧입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덧입어 봤자 이 장막집이 하늘에 온 처소를 덧입음으로 이 장막집이 끝나버려야 되지 이 장막집이 끝나지 않고 덧입고 그냥 있으면 그다음에 이 장막집을 후딱 벗어버리고 무너질 장막으로 그대로 있다가 끝나기 쉽습니다. 요 말이 무슨 말인지? 우리는 요것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 이 장막집이 없으면 하늘의 처소를 입지를 못합니다. 땅에 그 사람의 장막집 있는 그것을 신령한 것으로 변화받는 것입니다. 신령한 것으로 변화받는 것이오.
이 장막집 이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가서 장막집을 턱 내놔야, 진리 앞에 영감 앞에 하나님 앞에 턱 내놔야 하나님께서는 이 장막집을 가지고 당신의 솜씨대로 개조를 하십니다. 당신의 솜씨대로 개조를 하시는데 만일 이 장막집을 내놓는 그 시기가 될 때에 이 장막집을 진리와 영감과 하나님에게 내 맡기면, 내 맡겨서 끝이 나 버렸으면 그분이 이걸 가지고 영원한 것으로 개조를 하는데 이 장막집을 우시우시거리다 보니까 당신에게 진리에게 맡길 기회가 없이 이 장막집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이 장막집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다시는 개조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고대하기를 이 장막집은, 기독교는 이 장막집을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만은 못하지마는 아주 가치있는 장막집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 장막집을 아주 보배로운 집으로 장막으로 인정을 합니다. 왜? 이것을 영원무궁의 완전의 하늘의 집으로 하늘의 처소로, 이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가면 이것을 주님이 받으시고 당신의 솜씨대로 내가 처세할 그것을 당신이 만듭니다.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이 이걸 가지고 만드십니다.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장막집을 두 개를 주님에게 맡겼는데 한 사람은 하나 맡겼습니다. 하나 맡긴 사람은 하나만 개조하시지 둘은 개조 못 합니다. 둘 맡긴 사람은 둘 개조합니다.
이 무너질 장막집의 가치는 이것이 무너지기 전에 바로 무너지는 그시에 이 무너질 집을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와 가지고 이 무너질 집을 뺏들려고 합니다.
이 무너질 집을 저한테 보관하라고 저한테 내놓으라고 조웁니다.
이 장막집을 자기는 이제 장막집은 내놔야 되는 때인데, 자기의 장막집의 십분의 일을 오늘 내놓는다, 혹은 십분지 오를 내놓는다 이래 순서대로 내놓는데 이 장막집을 내놓아야 할 요 시점에 이 장막집을 악령과 악성이 이것을 저에게 맡기라고 옆에서 미혹을 줍니다.
이 무너지는 장막집을 내가 내놔야 되니까 내놓는 데는 이것을 악령과 악성에게 내 맡기는 사람들 있고, 안 믿는 사람들은 다 거기다가 맡깁니다. 그럴 때에 거기에다 맡기지 않고 하나님과 영감과 진리에에 이 장막집을, 이미 나는 내놓는 건데 내놓는 것을 주님과 진리에게 내 맡깁니다. '이것 받으십시오' 하고 내 맡깁니다.
내 맡기면 이쪽에서는 '왜 거기다가 주노? 왜 그걸 거기다가 주느냐 나한테 안 주고? 나한테 내놔라. 나한테 바쳐라. 이래 나를 달라.' 양쪽에서 마구 집어뜯습니다. 하나님과 영감과 진리는 '얘, 네가 나한테 맡겨야 그것을 내가 잘 개조해 주겠다. 거기 맡기면 안 된다.' 옆에 있는 이놈은 또 저한테 맡기랍니다.
이렇게 양쪽에서 들쑤시니까 사람들이 못 견뎌서 하나님에게 맡길려 하다가 슬그머니 땅에 있는 이놈한테 맡겼습니다. 맡긴 것은 이제는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럴 때에 이것에게 맡기지 않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제 내가 내놓는 시기가 됐는데 이것을 '아무리 악령이 말해도 악령에게 안 줄랍니다. 악성이 말해도 안 줍니다. 악습이 말해도 안 줍니다. 주님과 영감과 진리에게 이걸 맡깁니다.
이것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맡깁니다. 그러면 그것은 진리에게 맡겨, 영감에게 맡겨, 하나님에게 맡겨 자기는 손을 뗐습니다.
그러기에 이 담대는 무슨 담대인고 하니 악령이 와 가지고 온갖 위협을 줘도 그 위협을 받지 않고 '네게 있는 것 이것 없앤다. 절 단낸다. 죽인다.' 이럴 때에 안 죽으려고 두려워해서 걱정하지 않고, 죽인다 하는 데에는 조금도 꼼짝지 않고 담대합니다. 담대하고 속으로 소원은 무슨 소원이 있는 게 아니라 '이 무너질 장막집 어서 주님에게 맡겨 끝이 났으면 좋겠다. 주님에게 맡겨 끝났으면 좋겠다.' 왜? 주님에게 맡겨 끝난 것은 그것은 다 영생이라. 완전이라. 다시는 찾지 못해.
이러니까 어서 이것을 주님에게 맡겨 끝이 나면 다시는 사망이 와서 미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어서 주님에게 맡기는 이것으로써 끝났으면 좋겠다.
다 완전히 다 맡겨 끝났으면 좋겠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이니라" 하는 이 소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벗기를 원한다. 벗고자 함이 아니다. 덧입고자 함이다.
"우리가 담대하여" 담대하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니라. 요 진리를 우리가 굳게 잡아야 앞으로 성공을 합니다. 요것 때문에 지금 오늘밤에 또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장막집을-하나만 예를 들어서-세상이 와 가지고 '네 사업을 절단낸다.' 절단낸다는 거기 대해서는 담대합니다. 절단낸다 하거나 말거나, 절단을 내거나 말거나 담대합니다. 또 절단이 안 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절단나는 것을 원합니다. 어떻게 절단나는 걸 원해? 절단이 나면 그것은 끝나버리거든. 절단이 나면 끝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땅위에 있는 걸 원하는 것보다 절단나는 걸 원합니다. 어떻게? 늙어서 절단나는 것? 병들어 절단나는 것? 자기가 잘못해 절단나는 것? 아니, 그게 아니고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에게 맡기는 것으로 끝나는 것.
그러기에 자기에게 있는 모든 자연 은총의 이 장막집에 속한 이것이 가지고 있는 때에는 항상 위험해. 이것이 아주 무너져 버리고 말런지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을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만날런지? 덧입을 수 있는 그 기회에 덧입게 될런지 그만 덧입지 못하고 그만 기회를 놓쳐 버릴런지? 항상 염려라.
이러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은 '그저 가지고 있는 것 이것 어서 하늘에서 오는 처소로 덧입어 끝장 났으면 좋겠다' 하는 요 소원을 가지는 것이 기독자의 소원이요 끝장날 수 있는 그런 때가 되니까 좋아서, 죽는 게 문제가 아니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는 것도 하나님과 진리와 영감에게 바쳐 영감의 것으로, 영감에게 맡기는 것으로, 영감에게 바친 것으로, 영감에게 딱 부담을 시켜서 영감을 보관을 시키는, 영감에게 딱 보관시키는 것으로 없어지느냐 하나님께 보관시키지 않고 이 악령에게 보관시키는 것으로 없어지느냐? 살아도 영감에게 보관시키고 하나님께 보관을 시켜서 사느냐 하나님께 보관시키지 않고 악령과 이 죄악들에게 보관을 시켜서 사느냐? 이것들에게 보관시키면 살아도 절단 죽어도 절단, 하나님께 보관시키면 살아도 그는 의, 죽으면 완전.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나 죽으나, 떠나든지 거하든지 주의 것으로 돼 있기를 원하는 우리가 돼야 되고 그중에도 원하는 것은 주의 것으로 끝마치기를 원하는 이것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문과 고형 가운데서 고문과 고형을 당할 때에 우리는 '주님이여, 이 시간 나를 살려 주옵소서' 하는 그것은 철이 없는 기도입니다. '주여, 이 시간 어쩌든지 주님을 배반치 않고 주님에게 내 모든 것을 맡겨 내 모든 것이 진리와 영감대로의 주의 것이 된, 주의 것이 된 이것으로 끝나게 해주옵소서. 주의 것이 된 이것으로 끝나게 해주옵소서. 주의 것으로 끝마치게 해주옵소서.' 요것을 원하는 요것이 그때 우리에게 있어야 되지, 요것 하나만 있어야 되지 딴것 있으면 다 그때는 미혹을 받고 다 패전하는 것이요 사망을 취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요 성구를 굳게 잡읍시다.
이 시간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 과연 내게 뽀스래기 장막이 무너지는 것, 이런 사소한 이런 것 저런 것 장막에 속한 그 종류들이 무너질 때에 무너지지 않기를 원하는 그것도 어리석은 사람, 또 무너지지 않도록 노력을 하는 그것도 헛된 수고, 무너질 때에 무너지기를 원하여 '무너져 버려라. 없어지면 좋겠다.' 하는 그것도 어리석은 사람, 우리의 마음은 무너지는 것이 겁나지 않고 무너지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무너지기를 원하느냐? 주께 보관하는 것으로, 주께 맡기는 것으로, 진리의 것으로, 영감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주께 영감에게 속한 것으로 끝나는 요것 하나를 원하는 우리가 돼야 됩니다. 요것 하나만.
요것 하나만 원하고, 그러면 주님이 주의 것으로 맡아서 세상 시험은 다 끝을 내 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주의 것으로 땅위에 더 두시든지, 더 두시면 우리는 앞으로 시험 문제가 남아 있고 이것으로 끝났으면 완전히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요것을 여기에서 우리가 결정지웁시다.
지금과 같이 이렇게 평안하게 예수 믿는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우리의 승패의 결정은 밤중에 옵니다. 아무리 뭐 전도 심방 많이 해도 영원한 처소를 덧입지 못하면 자기 구원은 헛일입니다. 공연히 심방한다고 돌아다니면서 핑계하고 예배 시간은 다 빠지고 예배 다 드리고 난 다음에 오는 그런 짓 하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