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은 만유시요 만유 안에

 

1988. 5. 1. 주일오후

 

본문 : 골로새서 3장 8절-17절 이제는 너희가 이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 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 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 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  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9절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존재입니다. 신령한 형상도 없고  또 물질의 형상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라 그렇게 성경에  많이 말씀을 했고 또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셨고 또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형상은 곧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속성에서 퍼져 나오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성경에 표현한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러면, 예를 하나 들면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 성이라 하나님의 지식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지식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의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진실 이런 것이 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기에, 지식이 옳은 지식이 있는 거기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이요 옳은  진실이 있는 거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이요 곧 하나님이 동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11절 끝에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리스도는 만유라 말은 모든 만 존재를 가리켜서 만유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라, 또 모든 존재 안에 계신다. 모든 존재라, 모든 존재  안에 계신다.

 그러기에, 참된 지식이 있는 그곳에 주님이 게시고 진실이 있는 그곳에 주님이  계시고 참된 사랑이 있는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은 만유  안에 계시고 주님이 곧 만유라, 만 존재라 하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이 모든 이런 조그만 한 화초 속에도 에게도 진리가 들어 있고  여기에도 진실이 들어 있고 여기에도 또 저희들이 사랑의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뭐이냐?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형상이요 그리스도의 존재라.

 이것을 외부로 보고서 불교나 이런 모든 이 종교에서는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계신다는 여기에 대해서 착각을 하고서 하나님은 만존 재라 이래서  범신론을 주장합니다. 불교에서도 범신론을 주장해서 개미도 신이요 나무도  신이요 흙도 신이요 돌도 신이라 그들은 이렇게 말을 해서 그것이 다 자존한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창조물인데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그 피조된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도 들었고 하나님의 능력도 들었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도  들어서 그로 인하여 그런 것들이 다 지음을 받았다 하는 그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범신론을 말을 합니다. 또 그들이 윤희론을 말합니다.

 이러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참된 지식이 내 말에 있을 때에는 내 말에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형상이 계십니다. 또 내 행동에 진실이 있을 때에는 바로 내  행동 속에 있는 그 진실이 곧 그리스도의 형상이요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아무리 우리가 같이  동행하기를 원하고 이렇게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주님에게 정반대 되는 나에게  거짓이 있다든지 혹은 불법이 있다든지 또 굽은 것이 있다든지 부정한 것이  있다든지 또 훼방이나 미움이나 그 모든 불의에 속한 것 그들이 있는 데에는  진실은 거기 같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무식하기 때문에 주님을 원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주님을 배척해 버리고 또 주님을 찾는다고 하면서 주님은 멀리 배척해  버리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그 형상은 신구약 성경에 모든 옳고 바르고 참되고  깨끗하고 거룩하고 또 겸손하고 화평하고 화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하는 그  모든,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라 하는 하나님의 그 신격성,하나님의 신의 신격성  신구약 성경에 말씀해 놨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해 놓은 것은 다른 책들과 같이 문자로만 그렇게 보면 안되고  그 문자 속에 친히 하나님이 내주해 계십니다.

 이래서, 모든 성경 학자들이 말하기를 성경 안에는 내재적 영감이 있다 이렇게  발표를 합니다. 내재적 영감이라 말은 성경 안에는 그 안에 내주해 계시는  성신의 역사가 있다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 모든 신구약 성경에 옳은 것을 말해 놓은 그것이 곧 주님의  속성이요 주님의 형상이요 주님의 자체의 역사 하는 모든 광채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진리가 있는데 주님이 계시고 불법이 있는 데에 마귀가 있고 또 참된  사랑이 있는 데에 주님이 거기에 내주해 계시고 거짓 사랑이 있는 데에 마귀가  거기에 내주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물론 어떤 그 인격체로 또 어떤 그 고정돼 있는 고정  체로 이렇게 사람처럼 계시는 것만 생각하고,  주님이 친히 역사로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창조하신 그 창조에는 주님의  능력이 다 그 속에 들어 있고 주님의 모든 속성들이 다 그 안에 들어 있고  주님의 그 모든 소원과 계획의, 주님의 완전하신 그 모든 당신이 그 속에 내주해  계신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11절 끝에 있습니다.

 “거기에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 당과 무하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그 게는 그만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분별이 있을 수 없고 전체는 다 그리스도가 그 가운데 계시는데  이러기 때문에“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만유라 말은  모든 존재라 말이요 또 존재 안에 계신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유는 당신이 없는 가운데 지으신 당신의 꼭 형상대로  지었습니다. 당신의 속성대로 지었습니다. 당신 모양대로 나온 것입니다. 당신에  이질된 것을 짓지 안하고 당신에게 없는 것을 짓지 안하고 꼭 당신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모든 피조물들이요 만물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속성을 본 사람이  없지마는 서도 만물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만물 가운데 다 그 가운데 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보면 아주 사망에 속한 것이 있고 생명에 속한 것이 있다. 또  성경에 잘못된 것이 있고 또 바로 된게 있다. 그걸 죄와 의로 말한 다면은  성경에는 죄되는 것도 있고 의되는 것도 있다. 죄되는 것은 그것이 벌써  타락해서 마귀로 말미암아 변질된 것이고 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이래서, 에덴 동산에서 거기에서 이 우주는 변질되기 시작했고 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변질된 것이 회복돼서 근본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러기에, 12절에“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하나님의 택하심이라  말은 택했다고 하니까 많은 것이 있는 것이 있는 가운데서 가려낸 것으로 그렇게  보기 쉽습니다. 이 택함이라 하는 것은 모든 존재가 있은지 후에 그 가운데서  가려낸 것이 아니고 이 택함은 존재 이전에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신 그 예택해서  없는데 미리 택한 것을 가리켜서 예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래서, 예택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도 있고 선택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도  있는데 선택이라는 걸 쓰는 사람들은 존재 후에 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선택이라 말하고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이 목적 정하시는 그때에 작정으로  택해졌다 하는 존재 이전에 그것을 정한 것을 가리켜서 예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택함이 타락 후에 택함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선택이라고  말하고 타락 전에 택함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예택이라 그렇게 예택이라는 단어와  선택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하나님이 미리부터 목적으로 정해서 유일하신 당신의 목적으로  정한 그 정함을 받은, 정함을 받아 가지고 정함 받은 속에서 우리가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해 가지고서 택함 받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이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정하셨다는 그런 뜻인데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목적을 정하셨으니 곧 하나님이 목적 정한 그것을  가리켜서 택하심이라 이랍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신“거룩하고 사랑하신” 거룩하다  말은 하나님이 목적을 정하셨는데 그분이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것은 더러운  것이 많이 있는 가운데에서 거기에서 구별되어서 된 것을 가리켜서 깨끗하게 된  것을 가리켜서 거룩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 혼자 존재할 때에는 이  거룩이라는 말 안 쓰는데 이제 모든 그 피조물을 상대했을 때에 그 분만이  거룩합니다.

 그러면,“하나님의 택하신”하나님의 택하신 자인데“거룩하고”모든 것보다도  뛰어나서 흠과 점이 없는, 여기에 거룩이라 말은 모든 존재를 뛰어나서 흠과  점이 없는, 완전자, “사랑하신 자” 택했기 때문에 거룩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랑하신 자처럼” 사랑하신 자와 같이, 이래서 우리가 믿는 우리의 구주는  하나님이 존재한 후에 당신이 목적으로 정하신 그 목적 책임자가 곧 모든  존재보다 탁월한 그 거룩한 자로서‘하나님의 사랑하신 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상속해 주고 상속해 주심을 받을 수 있는 자, 곧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이 종교들은 다 창조 이후에 있으나 이 택하심은 모든 창조후  피조물이 생긴 지 후가 아니고 생기기 이전, 모든 존재가 있기 전에 존재한 것이  우리 구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계 모든 종교나 사상이나 또 저들이 아무리 신화나 무엇을  어떻게 말한다고 해도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지음을 받은 존재 이후에 존재들  중에서 된 것이지마는 서도 우리의 이 구원의 근거는 존재 이전입니다.

 “사랑하신 자처럼”인제 그러면 우리의 근원이신 예수님 여기에서 가리켜서  말합니다. “처럼”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하는 것은 이 예수님은 영원 자존하신 그분의 목적에서 모든  존재가 있기 전에 당신이 목적을 정하셨는데 그는 모든 존재에 탁월한 존재 시요  또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것을 상속시켜 줄 수 있고 상속받을 수 있는 자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사랑하신 자’ 말합니다.

 “처럼” 그러면 여기처럼 하는 것은 곧 이렇게 근원이 자존에서부터 시작돼서  모든 존재 이전에 존재하게 된 그 완전하고 무결하신 그자처럼  ‘그자처럼’하는데 요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마치 빌립보 2장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가  그렇게 완전 승리하시고 모든 존재 위에 뛰어난 그 인정을 받고 모든 피조물들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한 것처럼 그런 그 온전한 구원을 우리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가리켜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나”  그러면 예수와 같은 동등된 이런 완전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소망 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도“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하는 말은 이제 이  분과 꼭 같은 자가 될 수 있다는 이 소망을 우리에게 주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언제 누구가 어느 교역자가 말하던가? ‘목사님이 이제까지  발표하지 안한 진리를 발표했다’ 하고서 고것을 딱 거머쥐고 달라드는 사람을  내가 봤습니다. 고게 누구든고 내가 모르겠습니다. ‘이제까지 발표하시지  안하신 것을 새로 발표한 것이 있었다’ 그렇게 말했는데 그래서 제가 그때에 그  말을 밝히지 안하고 그만 어물거려서 넘겨 버렸습니다. 그것은 왜? 아직까지  발표하면 위험하고 또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 했습니다.

 “사랑하신 자처럼” 그러면 이분과 같이 되어지는데, 이분과 같이 우리가  되어지는데 이분과 같이 되어지는 것이 이분과 꼭 같이 되어집니다. 꼭 같이  되어지는데 이분과 같이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누구로 말미암아 되어지느냐?  이분으로 말미암아 되어 집니다.

 그러면, 이분이 우리 속에 와서 계셔서 속에는 이분이 혼자 역사 하셔 가지고서  역사 하시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가지고서 이렇게 나타나는데 그게  다 그리스도의 형상이요 그리스도의 능력이요 그리스도의 지혜라.

 그러면, 하나님의 전지한 지혜가 예를 들면은 그리스도인이 된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 진지한 지혜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으니 나는 전지한 지혜를  가진 자라, 전지한 지혜를 가진 그 지혜가 내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이라.

 그러면, 그리스도의 전지한 지혜가 당신이 거기에서 역사 하신 그 지혜의 빛이  내 안에까지 와서 비추어서 광대하게 역사해 가지고서 내 안에서 빛으로 역사  하시고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데 그 능력과 그 지혜 모든 속성들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비추어서 역사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곧 우리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의 중생된 영이 살아난,  살아난 그것이 아니고 바고 하나님의 형상 그 본체가 우리 속에 와 가지고  나타나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처럼” 뭐 이것은 여러분들이 아니니까 이거 해석할라 하면 다른 것  안되니까. “긍휼과” 긍휼은 자기보다 더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내가 모든 존재  역사 하는 것을 가리켜서 긍휼이라, 나보다 더 귀하고 사랑하고 위해서 내가  그를 위해서 전부가 있게 되는 그 단계의 것을 가리켜서 긍휼이라고 말하고,  자비라는 것은 내라는 존재가 있고 내가 모든 내 밖에 있는 모든 존재들을 내게  있는 것만치 그에게 있게 해 주고 내게 나는 있고 그에게 없는 것이 있으면은  내게 있는 것을 그에게 줘서 나와 꼭 같이 있도록 하려는 고 사랑을 가리켜서  자비 성이라고 말하고 긍휼성은 그보다 탁월한 것입니다. 이래서, 이웃 사랑을  제몸같이 하라 하는 것은 곧 자비 성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겸손과” 이제 이 긍휼과 자비면 다냐 하면 긍휼과 자비가 다가 아니라.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되는 데는 긍휼과 자비 이 둘이 다 되는 게  아니고 긍휼과자비 이와 같은 것들이라 그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라.

 이와 같은 것들인데 그렇게 되고 난 다음에 잘못하면 이제 그것이 타락해서  변질되기 쉬운데 “겸손과” 하는 것은 그 긍휼과 자비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이후에 그 긍휼과 자비를 어떻게 계속 잘 보존할 수가 있느냐 하는 그 보존성을  말합니다. “겸손” 겸손히 없으면 그게 보존되지 않습니다.“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온유라는 것은 그렇게 될 때에 내게 이루어지는 그  본능, 내게 이루어지는 그 본능이 온유가 이루어진다. 온유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떤 그 큰 능력을 배경으로 삼아서 자체에게 아무런 부족감이나 그런 감이  하나도 없는 만족스러운,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 그 품에 안 기워서 그가 뭐 무슨, 어머니는  두려워할지라도 그 아이는 어머니면 만족이고 단지 그 어머니 외에 더 강한 이가  없고 어머니를 해할 이가 없고 자기로서는 그 이상 없는 만족한 그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아이 마음은 뭐 무슨 전쟁이 난다 해도 그는 꼼짝  안하고 아무개와도 그에게는 놀람이나 부족이나 염려되는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는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 있는 그 아이의 그 마음의 평안한 그 자세를  표현해서 여기 온유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이렇게 그 온유가 생겨질 만치 긍휼과 자비와 겸손을 이렇게  가져서 우리 속에 온유가 이루어지도록, 온유가 이루어지도록, 믿는 사람들이  온유하지 못하는 것은 조급성이 있어서 자기가 맡겨 놓고 의지하고 바라보는  그것이 좀 염려 성이 있었고 그 보다 더 강한 자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온유라  하는 것을 깨지는 것입니다.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라’ 이랄 때에는 전투할 때에 하나님이 쓰시기를 하나님으로 전신갑주를  삼아서 입어라 이렇게 말씀했는데 여기에는 전신 갑주를 삼아 입으라고 하지  안했고“옷입으라” 옷입으라 하는 것은 전쟁할 때에 입는 옷이 아니고 자기가  평소에 자기 몸을 보호해서 따뜻하기 위해서 입는 옷을 가리켜 말합니다.

유순하고 부드러운 것을 가리켜서 말하는데 이렇게 이런 것을 네가 입고 이 속에  있고, 이 속에 네 자체라는 것은 있고 이것을 벗어나지 말아라. 이것을 벗어나지  말아라.

 그러면 여기에 긍휼이나 자비나 또, 겸손은 자체가 되는 것이고 온유도  자체에게 이루어진 그 영향이 그 결과가 이런 것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긍휼이나 자비나 하는 이것은 그 긍휼과 자비가 자기가 힘써 가지고 가지게 된  것인데 이 긍휼과 자비는 그것이 뭐입니까? 그 긍휼과 자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그 긍휼의 운동이요 자비의 운동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자체의 운동입까? 우리에게 자비가 와 있고 긍휼이 와 있으면  그것은 뭐인가? 그것이 곧 주님의 형상이라. 그것이 바로 주님이라. 그러기에 그  위에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만유 안에 계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만유시요 그가 곧 그리스도시요 그가 곧 하나님이 시요  그가 주님이 시요 그가 하나님 영원 자존하신 자체시라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긍휼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긍휼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 내 안에  주님이 긍휼의 주님이, 긍휼이 내 안에 계tu 가지고서 그 긍휼이 나를 통해서  나타낸다.

 마치 말하면 나는 등과 같고, 등과 같애서 등 속에 불을 켜 놓으면 그 등이  그만 커다란 불덩어리가 이 돼지지마는 서도 속에 불은 따로 있다. 그러면  긍휼은 주님이시요 곧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를 옷입듯 해라. 네가 이 속에 살고 이 밖에 나오지 말고 이 속에 있도록  해라.

 “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그 무슨 서로 소원해지고 성글어지고 또  의심하고 갈라지고 엉글음진, 틈이 난 그런 것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을 이해를 하고, 용납하라 말은 그런 것을 묵인하라 말은 아닙니다.

묵인이라는 말이 아니고 용납하라 말은 그런 것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그를 붙들고 이제 살리고 고치는 역사에 일어나는 그것을 가리켜서  여기에 용납하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뭐 그런 거 들어와도 관계없다, 그거 뭐 더러운 거 들어와 봤자 상관없다.’  그것을 용인하라 말이 아니오 용납해서 인정하라 말이 아니고 그것을 붙들고  살리고 고치기 위해서 버리지 말고 붙들어라 말이오  “용납하여 피차 용서 하되” 피차 용서 하리라 말은 그래 가지고 그것을  거기에서 해방시키도록 노력해라. 용서라 말 속에는 해방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피차 거기에서 해방을 시켜 가지고 어데까지든지 자꾸 고쳐 나가는 거.

 그러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나쁜 점이 있어도 나는 그것을 아예 그 희망 없는  것으로서 포기할 권세는 없고 그런 걸 정죄할 권세는 없고 죽는 날까지 그것을  거머쥐고 고쳐서 만들라고 애쓰다가 죽는 그것이 우리의 의무고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용서 하되”거기서 해방시키되“주께서 너희를 용서 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러하고” 그러면 주님은 당신이 이런 점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이  구원하기 위하신 것은 구원하시는 일을 당신이 완료를 해서 완료된 것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구원하시는 일이 당신의 가진 자원을 다 들였습니다.

 당신의 가진 자원은 다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에 다 투자했기 때문에, 당신은  가진 모든 것을 우리 구원에 다 투자했기 때문에 투자한 것으로서 그것으로서, 투자하는 데 투자하는 그것을 계속 내비 뒀으면 지금까지도 주님은 계속 투자할  것입니다. 투자할 것인데 투자하는 그것을 끝을 낸 것이 곧 하나는 우리를  범죄케 한 악령이 끝냈고 하나는 우리를 정죄한 하나님이 끝냈기 때문에  하나님과 마귀에게 책임져 지워져서 끝내졌는고로 그것은 마귀로 이의를 달 수  없고 하나님도 이의 달 수 없어서 우리에게 이 구속한 구속은 완성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그리스도의 이 형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하던 그  일을 대 이어서, ‘복을 대 잇게 하려 함이라’ 복을 대 잇게 해서 그분의  하시던 그 일을 계대해서 하는 데에 계대해서 하는 데에는 우리가 계대해서 하는  그 일을 그 사건을 완성함으로서 그 우리가 계대에 완성이 되어지는 것인지  우리가 구속의 역사를 계대하는 그 계대하는 그 계대가 사건 자체가  완성됨으로가 아니고 우리가 계대하는 거기에 완전히 투자하고 남은 것이 없이  다 거기에다 완전히 투자하는 것으로서 이제 투자된 것으로서 완성이 되는  것인지 어떤 것입니까?   일을 완성함으로입니까 거기에 대해서 완전 투자로서 되어지는 것입니까?  뭘로요? 완전 투자로입니까 그 일을 완성을 해서입니까? 완전투자로입니다.

 예수님도 하신 일을 다 완성을 해서가 아니라 하는 데에서 다 거기에 다  투자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불목한 그 불목에 화목을  이루었는데 화목을 이룬 것은 예수님이 화목으로서 당신에 있는 것을 다  투자하고 그 투자하는 것으로 끝이 났기 때문에 화목이 완성되는 것이지 화목 그  일을 완전히 이루어서 완성된 것보다 당신이 완전 그 투자로서 하나님이 그것을  끝을 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지공이 끝냈기 때문에 그것은 완성이 되어진  것이고 마귀가 끝냈기 때문에 마귀는 다시 불복을 달 수가 없고 하나님도 거기에  대해서 불만이나 정죄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그러면 이 모든것  위에라는 것은 그 위에, 긍휼이라든지 자비라든지 겸손이라든지 인내라든지 또  이해라든지 용서라든지 용납이라든지 거기에서 완전 해방을 시킨 것이라든지  해서 그리스도가 하듯 해라  그리스도가 한 것 같이 “주께서 너희를 용서 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그러면 하신 것 같이 하라고 이래 했는데 이 같이 하는 것은 우리가 맡은 그  사건 자체를 완성함으로써 이게 완성되는 것인지 있는 대로 다 하여 죽도록  충성했기 때문에 이것으로서 완성이 되는 것인지 어떤 것입니까? 어떤 걸로  생각합니까?   우리가 무슨 사건을 맡았으면 그 사건을 완전히 완성을 함으로 되는 그  완성인지 우리가 그 일을 함으로써 있을 것을 다 기울여서 더 할래야 더 할 것이  없이 그것으로 끝이 났으니까 그 완성되는 그 완성인지, 어떤 걸로 생각합니까?  첫째입니까 둘째입니까? 첫째로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둘째로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네, 둘째입니다.

 이런 거는 좀 알기가 어렵고 아주 극단에 관한 것인데 우리가 고런 것도 확정을  지워 놔야 되지, 그러면 우리는 있는 대로 그 무슨 사건을 내가 무슨 전투나  죄악으로 더불어 싸워서 이렇게 전투하면, 그 죄악을 다 없애는 것이 나의  승리가 아니라 그 죄악으로 싸울 때에 죄악에게 지지 안하는 그 생활로서 끝이  나 버렸으면 나는 완전히 승리를 합니다. 알겠습니까? 고것을 결정 못하는  사람들은 시험에 듭니다.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내가 적극성 있게 사랑을 베푼 것과 또 모든 불 의한 것을 다 용납한  것, 내가 제철소에서 새로운 제철을 만들어 낸 것과 또 모든 고철들을 다 사들여  가지고서 이렇게 다시 신 철로 개조해 내는 거와 같이 내가 용서 하는 거 내가  또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거 그런 것을 그리스가 하듯이 고 그리스도의 양식  그리스도가 하든 그 양식처럼 그렇게 네가 한 그 위에다가 사랑을 더하라.

 “사랑을 더하라” 그러면 이런 것 다 위에다가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이 온전하게 매는 띠라.

 그러면, 위에 모든 하나님의 속성인 이런 의 저런 의, 이런 거룩 저런 거룩,  이런 진실 저런 진실들이 많이 있고 또 모든 더러운 것들을 다 개조해 가지고  다시 개량시켜서 좋게 만든 그런 것들이 있는데 그것을 그래만 만들어 놓고  사랑이 없으면 다 천지 만엽으로 이래 갈래길 돼 가지고서 다 분산돼 버리고  말고 그것이 집결되지 않는다.

 사랑이 없으면 그런 것이 집결되지 않는데“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 그러면 이  사랑은 뭐이냐 하면 그 이제 네가 소극적으로 적극적으로 만들어 놓은 그 모든  것을 똘똘 뭉쳐서 뭉치는, 연결시켜서 뭉치는 띠니라.

 그러면 띠라는 말은, 이 띠라는 말은 생명 없는 물건을 이렇게 주짐을 매듯이  결속시킨 그런 것을 말하지 안하고 이 띠라 말은 산 자가 활동하기에 좋고 또  힘쓰기에 좋도록 그렇게 ‘허리에 띠를 띠고’ 이랬습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러면 네가 여러 가지 속성 그  지체들이, 비유건대 속성으로서 지체된 것, 팔도 생겨졌고 다리도 생겨졌고 눈도  생겨졌고 입도 생겨졌고 여러 가지 지체를 위에 말했는데 이 지체가 너희에게  있는데 사랑이 없으면 눈은 눈대로 빼서 따로 놓고 팔은 팔대로 끊어서 따로  놓고 다리는 다리대로 끊어서 따로 놓은 것처럼 이것들이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한다. 그 사랑을 더하면 이런 것들이 다 연결이 된다.

 연결이 되는데 그러면 띠를 띠었는데 띠를 띠었으면 거기에 긍휼도 자비도 다  지체들인데 그 본체는 뭐인가? 여기 띠를 띠었으면 띠 떤 그 본체는 뭐인가?  머이 띠를 띠었는가? 띠 띤 본체는 뭐인가?   하나님의 무형의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켜서 여러 가지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모든 인내와 관용과 이해와 또 그 모든 것을 다 해방시키는 ‘용서’  해방시키는 그런 일을 한 그 일을 했는데 그게 뭐인가?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지체다. 그리스도의 지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다.

 그런데, 거기에 네가 사랑을 더하지 안하면 그 지체를 다 따로 끊어서 해부해서  분산시켜 놓으면 아무 짝도 쓰지 못한다. 팔을 팔대로 끊어 놓으면 무슨 소용  있으면 눈을 눈대로 빼서 따로 놓으면 무슨 작용을 할 수가 있겠는냐? 그것이  하나 똘똘 뭉쳐서 한 몸뚱이가 돼야 힘이 있지 않겠느냐?   그런데, 그러면 띠를 띠는 것은 그 몸뚱이가 있기 때문에 몸에 띠를 띠는  것인데 그러면 몸에 띠를 띠니까 모든 지체들이 다 띠를 띠어서 이렇게 몸이  있으니까 그런 게 다 모든 게 힘이 있게 되는 것인데 사람이 ‘허리에 띠를  띠고’  그러면, 허리에 띠를 띠면은 무거운 짐진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갈라면은  허리빵을 여문 걸로 합니다. 실한 걸로 합니다. 이래서 아주 여문 그 허리띠를  띠면 이 온 전신이 거기다 허리띠에다 힘을 줘 가지고서 젊어지고 가는데 가다가  만일 허리빵이 뚝 그러면 떨어져 버리면 그 사람 꽉 짜그라져 버립니다. 그만 팍  짜그라져 버리요.

 그러면 여기 띠를 띠면, 띠를 띠면 여기서 벌어져 나가지 안하고 딱 여기에서  함축되니까 이 함축된 그 힘이 팽창돼 나갈 때에 손도 힘이 있고 눈도 힘이 있고  귀도 힘 있고 전신이 지체가 힘이 있는 것처럼 여기서 사랑을 그 위에 더하면 이  모든 것이 다 띠를 띠는 것처럼 힘이 있어진다.

 그런데, 그러면 그 모든 긍휼과 자비와 겸손이 모든 것이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형상, 볼 수 없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 했는데 우리가 이런  것을 가지면 그리스도의 그 형상 그리스도의 곧 속성 그리스도의 지체를 우리가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여기에다가 사랑을 가지지 안하면 그 모든 지체가 다  분산돼서 다 집결되지 안하기 때문에 그것이 힘이 없다.

 그러면, 사랑을 더하면, 띠를 띠는데 그 본체는 뭐인가? 본체는 곧  그리스도시다.

 그래 내가 이런 하나님의 속성인 이런 것을 갖출 때에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이고 사랑을 가졌을 때에 그리스도와 나와는 결속하게 되는 것이다.

 결속하게 되는데 물건처럼 그렇게 결박시키는 것이 아니고 곧 활동하기에  좋도록 활동하기에 힘있도록 그렇게 띠띠는 일이 되어진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그리스도와 동행할 라고 하면은 그리스도의 그 속성이  내게 있을 때에는 주님은 떠나지를 못하고 내가 그리스도의 속성을 다 버릴  때에는 내가 아무리 주님을 붙들라 해도 주님은 붙들 수 없고 마귀만 와서 있게  됩니다.

 이래서, 속성을 가지고 그 위에 사랑을 더하게 될 때는 주님과 나와 하나  되어서 나는 곧 주님이 시요 주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의 성전을 돼  가지고 역사할 때에 주님은 나를 통해서 강한 역사를 힘있게 하실 수가 있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말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는 데에는 어떻게  하는 게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는가?   우리가 기도하기를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로 우리를 충만케 하셔서 먼저  주님의 것을 만들었고 또 주님에게만 복종하는 주의 종을 만들었고 또 주님의  성전을 만들었고 또 주님의 지체를 만들었고 주님의 또 몸을 만들었고 또 주님이  이렇게 역사 하는 역사를 우리를 주님의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왕으로 만들어  가지고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어졌고 하나님 대신에 그리스도  대신에 너희들이 땅에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지리라 말씀하신 이 대속의 제사장직을 우리에게 맡기셨고 또 왕직을  맡겼습니다.

 왕직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단일 통치를 수많은 존재를 통해서 단일 통치가  광대하게 이렇게 퍼져나갔을때 그것을 가리켜서 통일 통치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 통치를 우리들이 힘쓰고 있고 우리가 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러기에, 그리스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지체를 만드는 것을 14절까지 말해 놨고  15절에, 그러면 이렇게 만들어 놓은 지체가 외부 적에서는 사랑을 더하면,  사랑을 더하면 이 띠를 단단히 띠어 가지고서 아주 힘이 있게 쥐어지고 똘똘  힘이 뭉쳐서 한 덩어리가 되어지는데 그렇게 되어진 그 속에도 아무리 띠를  띠어도 밥을 안 먹으면 그만 배고프면 그만 턱 퍼드러집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또 힘을 내 주는 것이어야 되겠는데 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힘있게 해 주는 내재적 역사가 뭐인가? 내재적 역사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이 말은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좀 어려운 말입니다.“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그리스도라 말은 제사장, 선지, 왕이라 말인데 제사장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를 화합시키는 것이 제사장 지책이고, 선지 직책은 창조주의 그 모든 축복인  그 예언을 피조물들에게 전달해서 피조물들이 그게 복종함으로써 복을 받는 그  역할 하는 것이 선지직이고, 왕직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통일 그 통치를 그것을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와 같이 그 펴 가지고서 그 행정에 배치되지 안함으로  망하지 안하고 일치됨으로 흥왕 되는 그 역할 하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책은 예수님이 제사장, 선지, 왕직을 했는데 예수님이 제사장,  선지, 왕직을 할 때에, 세상 정권 자는 자기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O대통령이  그렇게 참 능한 정치를 했습니다. 뭐라고 쌓아도 능한 정치했습니다. 했는데 그  분이 죽으니까 그만 그만입니다. 그분이 죽으니까 그만 뭐 정권이 아무  소용없어. 정권에서 딱 내려앉으면 아무 권리 없어. 이랬는데 이 정치는 이상  정치요.

 제사장직이나 선지직이나 왕직이나 이직은 제가 살아 있어야 이 직책이  잘됩니까. 이 직책으로서 끝이 나서 죽어 없어져 버려야 잘됩니까 이 직책은  어떻게 하면 잘되는 것입니까? OOO 권사님, 죽어 없어져야 제사장직이 다 돼요?  죽어 없어져야 제사장직이 다 됩니다. 이 제사장 직이나 선지직이나 왕직은  자체가 이직을 인하여서 직을 하다 가서 완전히 없어져 버리도록까지 다해서  없어져야 이제 완성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평강을 너희들이 가지라 그 말이오.

 우리는 직책이 뭐이냐 하면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를 우리가 화합시키고  조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요 생애 목적이요, 하나님의 뜻을  피조물들에게 인간들에게 알려서 그분의 뜻이면 다 영생이요 축복인데 그 뜻을  모르고 어겨 가지고 자꾸 멸망 받는 것들에게 그 뜻을 알려서 그 뜻에  준행함으로써 피조물들이 다 복되고 영생하도록 그렇게 하는 그 직책이 우리  직책이요, 또 하나님의 단일 통치에 일치됨으로 멸망을 피하고 구원을 얻는  그것이 우리 직책이니까.

 이 직책이 우리 직책인 거를 깨닫고 이 직책은 내라는 존재가 완전히  없어짐으로 이 직책이 완성되어지는 요 비결을 깨달아 가지고 이 평강을  너희들이 가져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해라 이러니까  이평강은 세상이 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직을 하는 나에게, 그러면 그 제사장직을 잘하도록 제사장직을  하는 나에게 살려 두는 것이 제사장직을 잘하게 하는 것입니까 이제 완전히  제사장직을 하는 것을 제사장직 한다고 죽여 버리는 것이 완전히 잘하게 하는  것입니까 어떤 게 완전히 잘하게 하는 것입니까? 어떤 게 완전히 잘하게 하는  것이지요? 한번 대답해 봐요. OOO.죽여서 없애지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마귀와 로마 병정들이, 마귀란 놈이 항복 받을 라고 자꾸  이랬는데 이라 다가 그만 생명이 딱 끝나 버렸으니까 그만 다시는 저희들이 할  방법은 다 끝나 버렸고 이제 예수님은 승리로서 끝이 나 버렸기 때문에 마귀란  놈이 그때에 간담이 스러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죽을 줄  알았으면 안 박았습니다. 죽을 줄 알면 안 박고 그라면 항복이나 하고 자복할 줄  알았는데 그만 그 충성으로 끝나 버렸으니까 다시는 더 도전을 할 수가 없어,  도전하지 못하는 완전 승리를 한 것입니다. 이런 평강을 너희들이 가져라.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니 예수 믿는 사람들의 그 모든 생애는 이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사람이 볼 때는 미련하게 보이고  구원을 얻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라, 그게 없어지는 게 권능이라.

 이제 복음 위해서 죽는 것이 그게 안 죽을 라고 피해서 도망치는 그거는 약자고  이제 그 복음으로서 죽는 그것이 권능이라 그 말이오 권능이라.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내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이 네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네가 속에 내적 강력한 그 원기를 돋구는 데에는, 강력한 원기를 돋구는  데에는 뭘로 돋구느냐?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원기를 돋궈라.

 그리스도의 평강으로 원기를 돋구니까 공산주의가 오든지 뭐 독점이 오든지  독약이 오든지 고문과 고형이 오든지 어짜든지 그것으로서 그만 변동 안 하고 그  직책으로 끝나 버리면 다시 저거는 나를 시험할래야 시험할 수 없고 완전 승리로  다시는 내게 대해서는 도전을 못합니다.

 “평강을 위해서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이 평강, 이 평강  위해서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여려 수억만 성도라도 교회는  단일 교회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곧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그리스도의  분자요 나 혼자 있으면 그리스도의 몸 전부요 또 내가 수억 억만 명에게 속하면  나는 그리스도 몸에 속한 한 지체요 한 분자라. 이러기 때문에 자기의 위치가  이렇게 돼 있다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도리어 오해하고 교만해서 실패하기  쉽습니다.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하는 자가 되라” 이러니까 이 모든  그리스도의 이 대속과 그리스도의 이 직책을 자기가 자꾸 새기고 새기고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속에서 감사함이 솟아나옵니다. 그러면 이것이 참사람의  내적 실력입니다.

 참 사람이 참사람된 새 사람된 사람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그 속에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평강을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감사가 넘쳐서 어쩔 줄  모르게 감사한 이것이 속에 없어면 허약한 사람이라. 아무리 장사라도 허약하면  그거는 넘어져서 뭐 장사라도 산 개미를 못 당합니다. 장사라도 산 개미를 못  당해. 개미가 와서 장사의 입을 파먹어도 꼼짝도 못해, 속에 힘이 없어서  허약해지면은 결국은 넘어지고 넘어지면 나중에 그만 생명 끊어지면 썩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내적 힘을 강력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 또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몸을 이루는 이 사실을 깨달음으로 우리 속에  감사가 넘치는 이것이 자기의 내적 실력이 강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무슨 일이 형통해졌다, 성공해졌다, 모두 무질  이나 땅에 뭐 그런 것으로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그거는 다 마치 불난 데에  석유를 부어 버리면 텀벅 꺼지는 것 같지마는 서도 불이 더 커 나가는 것  모양으로 그것은 다 화가 되어지지 그 강건이 안 됩니다.

 이래서, 우리가 내적, 새사람의 내적 그 힘을 강력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리스도의 이 직책을 자기가 자꾸 생각함으로써 마음에 감사가 넘쳐  나는 이것이 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감사함이 없는 그런 빈약한 자는 순교를  못 합니다. 감사함이 없는 그런 자는 죄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자꾸 우리는 이미 성경 아는 걸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직책이나 자꾸  생각하고 사모하고 해 가지고서 우리 그 감정적으로만 자꾸 이와 같이 감사하고  힘얻는 그거 가지고는 안돼, 그 속에 진리의 말씀이 또 속에 역사를 해야 된다  말이오.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이런데 자기가 직접  가르치든지 또 말로 가르치든지 그 행동으로 가르치든지 우리는 언제든지 배우고  가르친다는 이것을 부절히 계속해야 된다는 걸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나는 배우는 사람이 되어지고 또 나는 모든 행동이 전부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직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자기 혼자 하지마는 서도 실은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요  인도하고 있는 것이요 본을 보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르치고 있는  면과 배우고 있는 양면을 가진 우리들이지 이 양면이 없으면 우리 속사람은 그만  허약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속사람은 양면을 가져야 강건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 가지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이러니까 그 뭐 자기가  노래 곡조야 되든지 말든지 속에 이렇게 하면 속에 감사가 뛰어나오고 또 기쁨이  튀어나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가 튀어나오고 이것이 기독자의 생활이라  말이요. 그거 우리가 장하고 있는 일 아닙니까?   “노래를 부르면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러니까 이 우리의  찬송이라 하는 것은 감사가 없이하는 찬송은 그것이 안됩니다. 그러기에 어떤  성악가들 모두 다 말 들어보면 기독교 성악가들은 말을 들어보면 그리스도의 그  은혜에 감격해서 감사가 넘칠 때에 그때에 자기가 그 성악 하는 발성이나 모든  또 듣는 사람들이 감상하는 것이나 그 전부가 다 참 온전함을 이루지 감사함이  속에 힘이 되지 안하면 아무 그런 걸 이루지 못합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로 일로 하든지 말이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러면 이렇게 이제 우리라는 그 그리스도인을  단단히 구비해서 갖추었습니다. 갖추고 위생 주의를 해 가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강건해졌을 때에 조심할 것은,  이라니까 건강하니까 활동하기 마련입니다. 강건하니까 말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활동하기 마련인데 활동하는 것은 필연적인데 활동을 할 때에 잘못하면  마귀란 놈이 꼬아 가지고서 제것으로 하기 쉽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 말은 제가하되 주님이 주신 힘 가지고 주님이 값 주고  산 주의 것 가지고, 주님이 주신 마음 가지고, 주님이 주신 계획과 소원 가지고  전부가 주님의 것이지 내것은 하나도 아닌데 주님의 것 가지고 주를 위해서 주의  일 하고 있는 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안해야 되지 요걸 잊으면은 만일 자기가  나오면 예수님과는 상관없습니다.

 자기가 나오면은 예수님의 피와 자기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다 실패를 합니다.

 이렇게 갖출 때는 제법 잘 갖춰 가지고서 나중에 그것이 활동할 때에 그만  자기가 나와 가지고서 자기 것으로 제가한 것, 자기 것으로 했으니까  제가했지요. 또 저를 위해서, 그래 버리면 다 사망이요 거기에는 있는 것만치  자타를 다 망치지 그것이 남에게 유익을 하나도 주지 못합니다.

 힘입어서, 그를 힘입어서, 주를 힘입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래서, 이제 오늘은 여러분들이 처음으로 들으면 잘 모를, 뭐 처음으로 듣는  거는 아니고 많이 듣기는 들었지마는 서도,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지금 오늘 그 해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그리스도는 만 존재다. 만 존재 안에 계신다. 만  존재는 어데서 나왔느냐? 그리스도의 속성이 그 능력에서 그게 짜여 나왔다 짜여  나왔다. 그 능력에서 나왔다.

 나오는데 나오는 방편이 둘이 있는데 거기에서 짜내니까 그것이 분산돼  가지고서 나온 거 있고 그 능력이 창조하니까 창조되어 나온 것 있고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유출설이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모든 존재가 이렇게 흘러 나와  가지고 그 분자가 나와서 됐다는 그 주장을 가리켜서 유출설이라고 말하니까  유출설은 이단입니다. 유출설은 이단이오. 그분의 능력이 거기에서 능력으로  그것이 비추어 나와 가지고 창조되어 나왔다 하는 그 창조설은 그것은 정통이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꽃 한 송이 이 속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 기억하고,  꽃 한 송이 이것이 곧 주님이라는 것, 그러면 주님이 물질이라 말입니까?  아니오. 주님의 그 모든 형상 주님의 그 모든 속성이 이것들을 만들어 가지고  속성이 이 안에 가득 찼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풀한 포기를 이것을 해하는 것이 곧 주님을 해하는 것이요  불법을 하는 것이 불법을 하는 것이오 그것을 애끼는 것이 주님을 애끼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후란시스는 그가 말하기를 이것을 형제라 이렇게 말했어,  형제라 말했는데 그것은 조금 외부적으로 말하면 교리에 위반된 것 같지마는  서도 깊게 깨달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가 자기가 이 거리 다닐  때에 다른 사람들이 보고 ‘저게 지금 거지들 오야가다 아니 가? 거지들 대가리  아니 가? 두목 아니 가? 두목인데 아 그거 두목 그거는 어북 두목 그 본이 나고  두목의 교만을 가지고 두목의 어북 세도를 부리고 있다.’ 이 말이 들렸다  말이요.

 이 말이 들렸어 서 ‘내가 이렇게 나는 교만한 줄 몰랐다’ 그래 가지고 그가  그 베드로 전에 가 가지고서 이를 인해서 오래 동안 통회하면서 울었습니다.

울면서 그가 길가에 수미레라는, 피랭이 꽃이라 하나? 수미레가 피랭이 꽃이요?  수미레? 수미레라는 꽃 있지 안해요. 일본말로 수미레? 그 피랭이 꽃이라고 왜  요래 꽃이 꽃 피면 딱 꼬그라져 피지 안해요? 요래 딱 꼬그라져 피지 안해요?  할미꽃 아니고 저 피랭이꽃이라 해, 피랭이 꽃 조그만 한 거 아주 조그만 한 거,  할미꽃 말고 그건 노구하고, 그 꽃을 보고서 ‘저는 저렇게 평생 머리 들 줄  모르고 저렇게 겸손히 꼬구려 가지고 있는데 나는 이와 같이 내가 교만해서  우쭐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래 근심거리를 시켰다’ 그라면서 그가 말하기를  ‘수미레 이 형제여 너는 참 겸손하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꼭 지키고 월권하지  안하는데 나는 월권한 자라’ 하면서 그가 오래 동래동안 베드로전에 가  가지고서 굶으면서 이래서 하나님이 직접 오셔 가지고서 내가 너의 겸손으로  만족하니까 안심하라 하는 그런 음성을 듣고야 비로소 그 전각에서 나왔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그러기 때문에 모든 데에 그리스도는 다 계시고 모든 걸  주관하시고 그 모든 것을 다 당신이 창조하시고 이 가운데 계신다.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11절 끝 절에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서,  그러면, 그리스도 속성 계시는 데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속성이  없는 데에 그리스도가 계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기록돼 있는 것이 성경이고 또 마귀의 속성이 기록돼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마귀의 속성은 하지 말아 물리치라 말했고 하나님의 속성은 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 있는데 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지 말라는 것은 마귀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그것을 하는 거기에는  마귀의 형상 마귀가 왕 노릇하고 주장하고 있는데 거기는 주님을 암만 불러 봤자  주님이 가실 수 없습니다. 만일 주님이 가시면 그 사람을 주님은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불의를 소멸하시기 때문에 그 사람을 소멸해야 되니까 구원도  하기 전에 소멸해 버리면 어찌됩니까? 그라니까 주님은 재빨리 거기에서 피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자 하느냐? 주님의 속성을 네 맘 가운데 가득히 채워라. 주님과  동행하고자 하느냐? 주님의 속성과 동행해라, 주님을 네가 아무리 동행하고자  하느냐? 주님의 속성과 동행해라 주님을 네가 아무리 동행하고 싶어도 주님의 그  속성에 위반된 것을 네가 가지고 품고 있으면 너는 주님을 배척하는 자기 때문에  주님이 네 안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한다 하는 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조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주님은 계시지 안한 곳이 없습니다. 가뜩 차고 계십니다. 알지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이렇게 세밀히 하셔 가지고서 우리를 길렀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당신이 가진 것처럼 우리에게 유업으로 주십니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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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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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은 만유시요/ 골로새서 3장 8절-17절/ 880501주후 선지자 2015.10.25
652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골로새서 3장 1절-11절/ 830911주전 선지자 2015.10.25
651 그리스도에 대하여/ 빌립보서 3장 8절-12절/ 800331월새 선지자 2015.10.25
650 그리스도에 대하여/ 빌립보서 3장 10절-11절/ 800401화새 선지자 2015.10.25
649 그리스도안에 우리 생명/ 골로새서 3장 1절-6절/ 820408목새 선지자 2015.10.25
648 그리스도안에 우리 생명/ 골로새서 3장 1절-4절/ 820411주새 선지자 2015.10.25
647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골로새서 3장 1절-5절/ 841019금새 선지자 201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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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9 그리스도 삼직/ 빌립보서 3장 3절-11절/ 800411금야 선지자 2015.10.25
638 그리스도 공부/ 골로새서 3장 1절 4절/ 841019금야 선지자 2015.10.25
637 그리스도/ 골로새서 3장 1절-4절/ 1983년 38 공과 선지자 2015.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