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5 18:55
구주 탄생
1985. 12. 23 월새벽
분문:누가복음 2장 12절∼14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의 행위와 그 자체를 인해서, 예수님의 행위와 예수님 자체를 인해서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모두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늘에 수 없는 천군 천사, 이 세상에 있는 사람의 수로써 비할 수 없는 많은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다 하나님에게 감탄해서 감사와 찬송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그래 됐습니다. 예수님의 그 행하신 행동과 예수님의 그 자체가 어떻게 됐는데, 그로 인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또 그뿐 아니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은 택함을 입은 자들이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요, 또 택함을 입은 자들로 인해서 모두 다 세상이 고요하고 평화롭고 그렇게 됐습니다. 택한 자나 불택자나, 택한 자들은, 예수님의 그 행동과 그 한 분의 자체를 인해서 택함을 입은 자들은 영원한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다 삭제되어지고 영원히 평강을 가지게 됐습니다. 영원한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생과 영원한 평강을 가지게 됐고, 또 택자들만이 아니고 그로 인해서 모든 불택자 모든 피조물까지도 그들에게, 일반적인 은혜를 다 입어서 평화를 누리게 됐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이 세상은 다 절단나는 건데, 죄로 말미암아 절단나는 건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연장되고 다시 하나님의 예정이 전개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렇게 12월 25일날 탄생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때쯤이라고 하고 그 시일을 똑똑히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12월 25일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라 이래 가지고 모두 공통적으로 기념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오며 보니까 장식을 그전과같이 그렇게 많이 하지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면서 좀 느끼면서 같이 오는 사람에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성탄이 오면은 성탄 장식을 이렇게 화려하게 했는데 이게 차차 줄어지게 된다 하는 그것을 보고 마음에 조금 그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성탄 장식을 하지 안하는 그것이 그만 서부교회가 제일 먼저 앞서서 그런 걸음을 걸었습니다. 종 치는 것도 서부교회서 제일 먼저 종을 안 쳤어. 제일 열심히 치고 이라다가, 그때 뭐 관서에서 막아도 아주 열심히 쳤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신문까지 났어. 신문에 났거나 말았거나 열심히 쳤습니다. 그라다가 나중에 좀 또 생각해 깨닫고, 사회에서 막아 그런 것보다도 교인들이 차차 자라서 있고, 또 문화가 발달되어서 모두 시계를 가질 수 있고 또 시계를 안 가져도 정성을 모으면 되겠다 해서 종을 없이 그렇게 차차 해 보니까 지금은 종 없어도 뭐 시간 되면은 다 모이고 이랍니다.
종 치는 그것을 폐지하고 난 다음에 그 뒤에 말썽이 많았으나 차차차차 종 치는 것이 없어져서 지금은 뭐 거의 없다고 할 만치 이렇게 돼 갔는데, 성탄 추리 장식도 그만 그렇게 됐어. 그런 것은 좀, 장식 그런 것도 하면, 참 불교에서는 초파일날 아주 장식을 거대하게 하는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걸 그렇게 화려하게 하지 안하고 이라니까 그것이 화려하게 하는 것도 좋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나서, 그걸 안 하게 된 그것이 혹 내가 들어서 그렇게 한 그것이 원인이 조그매라도 되지 않는가 이래서 좀 어떨까 그렇게 생각을 해 봤습니다.
너무 예수님의 성탄에 대해서 그저 기쁘다고만 생각을 하고 다른 깊은 뜻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외부적인 그런 장식만 하고 속에 실상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그것이 좀 부끄러운 일이라 해서 그렇게 했었는데, 우리는 외모가 있고 또 이면에 내면이 있으면은 참 좋은데 내면은 없고,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이렇게 있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껍데기를 줄였는데, 알맹이도 없고 껍데기도 없고 이래 되면은 고만 이 예수님의 성탄에 대해서 아무 관념 없는 일이 되어서 이 세상에게 알리는 일이 아주 줄어지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실상에 가깝도록 우리가 기념해야 되겠다 해서 이랬는데, 우리 교회서는 얼마 전부터 그때부터 전도지를 나누는, 찬송을 새벽 찬양을 이렇게 다니면서 하다가 그 일을 또 그치고 전도지 나누는 일로써 이렇게 매년 기념 행사를 하다가 또 중간에 가다가 또 찬송도, 새벽 찬송도 한번하고, 어쨌든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습니다. 그랬는데 이 새벽 찬송도 그만 차차차 또 없어집니다. 없어지는데, 다 그래 그런지 어짜든지 이거 욕은 해도 서부교회를 많이 따라온다 하는 그런 생각이 있어서 좀 하기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좋지 못한 것을 해 가지고서 만일 그런 영향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크게 부끄럽겠는데, 좋은 일을, 더 좋은 일을, 보다 좋은 일을 해서 그래 되면은 우리가 심판 받을 일이 없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여게 대한 뜻을 깨닫고 우리가 서부교회 단체적으로 하는 그게 좋지마는 또 개별적으로도 충실하게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금년에는 전도지를 나누는 일을 하기 위해서, 작년에는 백만 장입니까? 작년에는 백만 장을 전도지를 박아 가지고서 거의 다 나누고 조금 남았었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그것까지 합한 걸 해서 새로 전도지 박은 것을 얼마 박았습니까? 오십만, 그전에 남은 게 얼마 남았습니까? 남은 거 없어? 두 가지가 다? 하나도 남은 거 없어? 인사 전도지도 안 남았어? 그런데 올해는 줄어서 오십만 장을 했답니다. 녜. 그때는 참 아주 힘써 했는데, 녜. 오십만 장이라도 기도 많이 하고 알뜰히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한 분이 행동하신 행동과 그 한 분의 자체가 어떻게 됐기 때문에 그렇게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들도 다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송과 참 감탄의 영광을 돌렸고, 땅에 있는 모든 택함을 입는 자들도 영원한 모든 사망 문제의 고난 고통 문제가 다 제거되고 영생과 그 기쁨의 완전 회복이 되고, 또 그로 인해서 불택자와 모든 피조물들도 다 그 혜택을 입어서 평화롭게 됐는가 그것을 어제 간단하게 다섯 가지를 들어서 말씀을 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 개적으로나 또 단체적으로나 이 다섯 가지의 예수님의 그 행하심과 예수님 자체가 어찌 됨을 우리들이 우리 행동에서 기념해야 되겠고 우리 자체에서 기념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섯 가지를 하셨는데 하늘에서는 당신이 참 지극히 높으신 자존하신 하나님이신데 당신의 그 높으심을 그걸, 높으심을 당신이 쓰지 안하시고 높으심의 그것을 다 물질계 이 우주에 있는 모든, 범죄로 타락해서 저주받아 가지고 있고 정죄받아 있고 사망 아래 있는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 피조물들을 위해서 당신의 지극히 높으심을 당신이 쓰시지 안하고 지극히 높으심을 이것을 비어서 우리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 택한자들과 불택자들과 모든 만물을 위해서 그 높으심을 희생을 했습니다. 높으심을 우리들을 위해서 쓰셨습니다.
높으심을 당신이 누리지 안하고 쓰지 안하고 그 높으심을, 우리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은 그 높으심을 하나도 쓰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그 높으심을 내놓고 땅 위에 오셔 가지고 당신은 한 번도 자유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높으심을 다 내놓으시고 한 번도 자유하지 못하시고, 말 한 마디도 생각 한 번도 자유하지 못하시고 순전히 다, 본체이신데 하나님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일을 했습니다. 또 그 부요를 다, 당신이 그 부요를 누리고 쓰지 안하시고 그 부요를 우리 위해서 다 내놔서 그 부요의 모든 효력이 우리에게 오도록 했습니다. 높음의 효력도 다 우리를 위해서, 그 효력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효력이 되도록, 그 부요의 효력도 하나도 당신은 누리지 못하시고 그 부요의 효력을 우리를 위해 써서 그 효력을 우리가 다 입었습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시고, 땅에 오셔 가지고서는 세 가지를 하셨으니 참 그 수고를 하되 당신의 있는 것을 다 들여서 수고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수고의 끝은 죽음으로 끝이 났습니다. 수고하시고, 또 우리를 인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읍니다. 멸시를 천대를 받는 것도 당신이 멸시 천대받아서 죽으심으로서 끝이 났습니다.
그전에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멸시 천대를 계속했고, 또 마지막에는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난도 그 고난으로 인해서 죽으셨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났지 그 고난이, 살아 있는 그것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고난으로 끝났습니다. 고난으로 끝났고 천대로 끝났고 수고로 끝났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온 혜택이 무엇인가? 혜택은, 우리가 범한 그 죄를 당신이 다 담당하신 결과를 이루었고, 또 우리가 하지 못한 그 모든 것을 대신,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을 대신 행하시는 그 역사를 이루어서 그 혜택을 우리에게 입혔고, 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당신이 죽기까지 이 화친을 인해서 화목의 제물이, 화친을 위해서 당신이 죽기까지 노력해 가지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의 이 관계를 맺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가지 대속을 입게 됐습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도 내게 있는 모든, 자기대로의 많든지 적든지 우리의 높음을, 우리의 이 높음을, 무엇으로, 세상에 돈으로 높으든지 지위로 높으든지, 지식으로 높으든지, 인격으로 높으든지, 혹은 권위로 높으든지, 교회의 무슨 성직으로, 목사로 높으든지, 장로로 높으든지, 집사로 권찰로, 구역장으로 높으든지, 반사로 높으든지 어짜든지 우리가 이 세상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이 높음을, 주님을 생각하고 위로 주님을 위하고 아래로 형제를 위해서 이 높음을 우리가, 사람들이 높아지기를 다 원합니다. 높아지기를 원하는데, 얼마 전에 제가 어떤 사람에게 말 들으니까 ‘아, 그 사람은’ 그 사람이 공무원인데 그 사람을 말하니까 ‘아이구’ 깜짝 놀라면서 `아이구' 그분은 높아서 우리가 근방에 가지를 못한다’ ‘가서, 그러면, 네가 오는 데에 심부름을 해서 같이 좀 모시고 오너라’ ‘아이고, 나는 거기 모시러 못 간다. 그 앞에 나는 가지 못한다.
어데라고 가?’ 그렇게 높으다고서 이렇게 말해서, 또 다른 분도 또, 몇 사람이 그란다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이 사람은 이 면에, 이 계통에 있는 사람에게 말한 거 그라고 저 사람은 저 계통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모두 행정 계통 뭐 경찰 계통 사법 계통 이렇게 다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말하기를 ‘아, 세상 사람들이 그러기 때문에 높아지기를 원하고 그렇게 죽자 살자하고 높아질라고 애를 쓰는가 보더라’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녜, 그들은 다 그렇게 하고 또 그게 높으면은 얼마나 영광되고 권세있는 것인지 참 형언하기 어려울 만치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높으신 위치에 있었으나 그것을 우리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우리 위해서 그것을, 우리 위해서 쓰시고 그 효력이 우리에게 오도록, 당신은 효력을 하나도 누리지 못한 그것이 하늘과 땅에 기쁨과 평강이 충만해졌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또 거게 가서 또 갖다 온 얘기를 또 해요. 가니까 아주 뭐 절절절 매고 ‘하이구 이거’ 이라면서 뭐 자기가 무슨 준비를 못 했다고, `아, 이거 갑자기 이런 소리를 나한테 했으면 준비할 건데 하나님의 종들을 모시면서 이거 이렇다고 막 당황을 해 가지고서 또, 거게서는 또 그렇게 교회서 심방 갔다고 막 두려워하고 이래 가지고 절절 매고 야단이더라고서, 그러니까, 얼떨떨하이 뭐인지 모를 만치, 그분들이 다 이렇게 주님을, 주님이 오신 그 일을 본받아서, 주님이 우리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을 본받고 그 생활을 하니까, 거게서도 자기의 높음을 그것을 자랑하지 안하고 그것을 항상 자기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희생해서 하나님께 영광되고 모든 이웃들에게 구원이 되도록 하려고 그걸 낮추니까 또 갖다온 사람들이 ‘하, 참. 참 놀랠 만한 그런 일이 있더라’ 그렇게 하더라고 은혜를 받고 와 가지고 또 그렇게 하는 말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부요도, 무엇을 부요하든지, 내가 지식으로 부요하든지, 권세로 부요하든지, 돈으로 부요하든지, 무슨 자기는 지혜와 총명으로 부요하든지 자기는 구변으로 부요하든지, 자기는 무슨, 진리 지식을 알아 부요하든지 어쨌든지 자기에게 있는 모든 부요를 다 자기가 쓸라고, 자기 위해 쓸라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우리는 다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모든 부요를 그 효력을 자기가 누리지 안하고 그 효력을 이웃을 위해서 누리게 하려고 할 때에 우리 주님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 주님이 하늘에서 우리 위해서 그렇게 할려고 다 그 효력을 다 내놓았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늘에 있는 무리들이 참 감탄을 해서 영광을 돌렸고 또 그 효력이 와 가지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고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고, 지금 이거 성탄을 축하한다 이라지마는, 지금은 그런 기회를 다시 특별히 강조하는 그런 기념의 기회로 삼은 것이지마는 우리는 평소에 항상 생각하고 주님을 기념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생활하신 것을 기념해야 하겠습니다. 이래서, 주일을 우리가 지키는 것은, 주일날은 주님이 이렇게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시고, 완전히 다 내놔서 생명도 없어지고 완전히 다 내어 놓으신 그 내어 놓으심의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우리가 기념하는 것이고, 또 우리 위해서 영원히 피조물 된 그 사랑을 기념하는 그 죽고 사신, 주님이 살았다 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사신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예수님이 사신 것은 하나님이 피조물 노릇을 영원히 해야 되는 그것을 책임지고 달게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자면 우리 사람이 무슨 구더기 되는 것보다 더합니다. 구더기 되는 것보다도 예수님이 부활은 더합니다. 그것을 자원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을 기념도 하고 축하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예수님의 그 가난해지심의 이것을 항상 우리는 마음에 두고서 기념해야 되겠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소원하시는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베푸신 이 공로로 모든 만물과 모든 인간과 모든 택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 대속,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이 대속을 우리가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는 그런 고난으로, 고난받을 수 있는 양이 있을 때에는, 고난을 받을 수 있는 남은 양이 있는 데는 그걸 다 고난받음으로써 없어져야 되겠고 수고함으로 없어져야 되겠고 천대받음으로 없어져서, 그렇게 수고와 천대와 고난으로 우리의 존재가 없어지는 그것이 참 주님을 기념하는 기념에 다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만일 우리 있는 것을, 높음이나 부요나 또 우리의 가진 모든 그것을 헛된 것에 쓴 그것은 부끄러울 일이고, 또 자기를 위해서 쓰는 것도 다 부끄러운 일이고, 예수님이 이 다섯 가지를 우리 위해서 씀으로 하늘에도 그렇게 단합이 돼 가지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었고, 땅에도 특수의 그 행복을 받아서 영원한 기쁨을 가진 자들도 있고 또 일반적인 은혜를 받아서 평화를 누린 자들도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도 그러하지마는 우리는 평소에 항상 이 다섯 가지를 생각하고 이 다섯 가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대로 행하게 되면은 주님에게, 하늘에서는 주님에게 영광이 돌아가고 땅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너희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서, 빛이 되어서 살 때에 너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교회라는 것은 보면은 대개 이것은 합니다. 물론 사랑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고 덕도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지 밑에서 올라가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밑에서 올라가는데 하늘나라는 위에서 내려옵니다. 이러니까, 교회의 성직자들이, 목사들이, 장로들이, 또 권사들이, 권찰들이, 집사들이, 또 이렇게 반사들이, 위에서부터 이렇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렇게 겸손하게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것이 원 원리는 원리입니다.
이제 그 일은 차차 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우리 서부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되어 가는 거 같은데, 어제도 말했지마는 그만 그렇게 되어 가니까 밑에서는 또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고 밑에서는 그것을, 자기 할 위치를 지키지 안하고 이라니까 덕이 되지 안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 거창 집회 가 가지고도 다른 데에 교회의 교인들이 왔었는데, 그 장로님들이 왔었는데 하도 거게서 어린 아이를 때리고 이렇게 자꾸 울리고 이래 쌓아서 안타까와서 좀 살살 달래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렇게 좀 권면을 하고 그렇게 잠깐 뭐 책망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꾸중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라니까 그 사람이 우리 서부교회서 배운 버릇을 가지고서 ‘자기가 장로면 장로지 뭐 남의 일 간섭할 게 뭐이냐?’ 이게 장로를 잘 몰랐다 말이오. 장로는 밑에 교인들의 모든 생활을 간섭할 수 있고 또 치리해서 벌을 줄 수도 있고 지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장로의 직권입니다. 그 맡은 의무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그만 실망을 하고, ‘이 서부교회 보니, 와서 보니까, 이 집회에 말씀은 좋은데 도무지 이렇게 위 아래가 없으니 이게 아마 뭐인가 잘못됐는가 보다’ 하고서 그분들이 실망을 하고 했다 말을 그 뒤에 들었습니다. 그래 들어서, 그거는 내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내가 사과를 전화로 만만히 했습니다. 사과를 하고, 또 그 본인들도 깨닫지 못해 그렇지 그거 고의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 본인들이 가 가지고서 잘못했다고 빌고 이랬었습니다. 이라니까 그쪽에서도, 아, 그거 뭐 몰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럴까 보냐 그래 가지고 다 해결이 되고서 그분들도 기뻐하고 그래 복음을 또 복음답게 받아 가지고 그분들도 지금 종종 와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이렇게 하시면서 주님은 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주님은 위에 대해서, 그렇게 하시면서 그라면 다이다 이럴 게 아니라 위를 상경하기를, 위를 공경하기를 예수님께서는 뭐 털끝만치도 위에 거슬리는 일을 안 했습니다. 위에 아버지에게 거슬리는 일을 한 번도 안 하고 복종하는 일을 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5장 5절에도 보면은 ‘장로들에게 순복하라’ 하는 그 말이 첫째 있습니다. ‘장로들에게 순복하라' 그러면, 위에서 은사 위치에 있어, 은사라 하는 거는 공으로 주는 건데, 은사 위치에 있어 위에서는 낮아져 가지고서 밑에를 위해서 오히려 밑에보다 더 밑에 내려가 가지고 그것을 올려서 이렇게 살려 구원하려고 하는데 이 밑에 있는 자는 어떻게 되느냐. ‘아, 이렇게 올리니까, 올리니까 내가 높은갑다’ 해 가지고서 위에를 멸시하게 되면은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또 교훈에 무조건, 복종하라, 복종하라. 장로들에게 순복, 순종하고 복종하라, 순복하라 했지 다른 말이 없습니다. 장로들에게 순복하라,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보면은 그 말씀이 있습니다. 이랬는데,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또,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그 다음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신다. 겸손으로 허리 동이라 그 말은, 겸손이라 말은 둘이 있으면 하나 있는 것같이 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고 자기를 바로 아는, 바로 알고 바로 행동하는 것이 겸손이라 하는 것으로서 여러분들에게는 제가 가르쳤습니다. 겸손이라 하는 것은 많이 있으면 적게 있는 것처럼 그렇게 외식하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위치를 똑똑히 알아 가지고서, 자기가 자기 아는 대로 순전히 자기는 어떤 죄인인데, 어떻게 멸망받은 자인데 어떻게 되어서 은혜로 구원받은 고걸 똑똑히 알고, 또 이 교회 내에서도 지위가 없이 지위를 지키지 안하는 것은, 지위를 지키지 안하는 천사가 멸망받았다, 천사 멸망받은 것을 유다서에 말하기를 지위를 지키지 안했다 고렇게 말했습니다. 그 지위를 지키지 안했다는 것은 자기 위치면 자기의 할 의무와 책임과 본분이 있는데 자기 본분과 의무와 책임을 하지 안하고 월권했다 그말입니다. 그래 가지고 망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위에 있는 사람도 밑에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러한 행동이 돼야 되겠고, 그런 자체가 돼야 되겠고, 또 밑에 있는 사람도 예수님의 그 행동과 그 자체를 본받아 가지고서 위의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교회서, 일반 식구는 자기 지권찰에게 어떻게 하며, 지권찰은 원권찰에게 어떻게 하며, 또 이 평신도는 집사를 어떻게 대우하며, 또 집사는 장로를 어떻게 대우하며, 장로는 목사를 어떻게 대우하며, 그런 질서가 이것이 정연해야 됩니다.
질서가 정연하고 이것이 바로 돼야 이것이 교회의 윤리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윤리, 또 이것이 이 사회에서 행할 때에 이것이 교회의 도덕입니다.
그런고로, 아래 위에도 그와같이 해야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 다섯 가지를 위의 사람도 하고, 또 위의 사람이 밑의 사람에게 이 다섯 가지 하는 요것만 알고 예수님이 당신 위에 있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한 요것을 배우지 못하면 요거 질서가 다 깨져 버리고 맙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말 들었는데, 어떤 다른 교파에 다니는 분이 서부교회 왔더니마는, 나이 많은 노인인데, 젊은 사람들이 암만 바쁘고, 아무 도덕을 그렇게 고조하지 안하는 버스를 타고도 나이 많은 사람이 가면은 젊은 사람이 일어서서 암만 안 앉을라고 해도 앉으시라고 이렇게 자리를 비켜 주고 이렇게 하는 일인데, 심지어 교회 와 가지고, 나이 많은 사람이 오니까 자리를 비켜 줘도 비켜 줘야 될 건데 옆에 자리가 있는 데도, 아, 여기 다른 사람이 와서 앉을 사람이 있다고서 그라며 쫓아내서, 좀 앞에서 들을라고 앞으로 왔다가 쫓기고 쫓겨 가지고 저 맨 뒤에 가서 앉아서 들으니까 뭐 모든 잡음들이 나와서 소리가 들려 쌓아서 알아 듣지도 못하고 그래 갔다고, 서부교회 나는 다시는 안 간다고서 하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나는 그 사람 말을 어제 들었어. 어제 들었는데, 마침 어제, 그 사람이 복이 있느라고 그런가 오후 설교할 때에 왔더랍니다. 오후 설교하는데 왔는데 어떻게 듣고 갔는지는 모르기는 모르겠습니다.
그거는 뭐 냅두고, 우리가 그래 가지고서 하나님을 근심되게 하고 또 이렇게 복음 운동을 가루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가 본받아야 되겠는데, 예수님이 위에 대한 아버지에게는 어떻게 한 고것을 본받고, 또 예수님이 자기로부터 그 이하에 있는 존재들에게는 어떻게 하셨는가 요것을 본받아서 우리가 나아가면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는 그 말은 한 말로 말하면 땅에 있는 모든 자,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 하는 그 땅에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화평케 하는 자라 말은 예수님이 이 다섯 가지를 하셔 가지고서 이 모든 하늘에도 땅에도 다 화평을 이루는 요 자취를,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는, 곧 그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제 말 들으니까 저 교회는 어짜든지, 인제 개척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금년 내로 장년반 백 명을 하나님께 달라면서 안 되면 한번 백명을 앉혀라도 달라고 그래 부르짖었대요. 이러면서, 어제, 다를 때는 못 하고 떡국을 이래 가지고서 어제는 그래 해 가지고 이래 했는데, 백 명은 못 오고 팔십 몇 명인가 장년반이 오고 주일 학생은 오후에는 백 팔십 명이 오고, 또 저 교회도 그렇고, 또 교회는 백 명을 하나님께 이렇게 구하고 표준하고 이랬는데 구십 여덟인가 일곱인가 왔는데 한 주일 남았는데 이거 어찌 될지 모르겠다고서 어짜든지 해 안에 한번 장년반들이 이 백 명 나오기를 원한다 하고, 또 주일 학생은 한 삼백 얼마인가인데 더 앉지를 못한답니다. 인제 이래서 좀 연보해 가지고서 좀 늘여트려야 된다고 이라면서, 교회도 많이 나왔어요. 교회도 주일 학생은 백 몇 명 나오고 또 장년반은 뭐 사십 몇 명인가 나오고, 그래서 모두, 가는 사람마다 그저 능력이 역사해서 그렇게 속성이 돼져요. 일군들만 되면은, 이거 다 여기서 지금 몇몇 일군들은 발가벗겨서 보내도 가면 일 년 안쪽에 다 독립 교회, 다 자립하는 교회, 자립 교회 다 세울 수 있는 그런 실력가들이 많이 있어.
그런데, 어짜든지 이래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룹시다. 이루어지는 데는 딴거 없습니다. 그저 요 다섯 가지를 기억해서 해야 될 것이고, 반사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나 주의할 것은, 사람들이 아무라도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데, 이 세상이 너무 어지럽고, 이렇기 때문에, 자, 어느 누구가 우리 자녀를 좀, 부모가 자기 자녀는 자기가 가르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녀는 서로 바꿔 가르치라 했습니다. 그 통계가 모두 계산하기를, 이러니까, 자기 자녀를 자기가 가르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우리 자녀에게 좀 바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느냐’ 우리 자녀가, ‘조 사람 본떠라. 조 사람을 본받아라. 조 사람같이 돼라’ 요렇게 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상대자가 있기를 다 고 구하고 있습니다.
있는데. 반사들이 보니까, 예수 믿는 걸 반대했지마는 그 반사 선생님을 보니까 ‘아, 우리 자녀가 조 반사 선생님같이 조렇게 모든 것이 정신이 까랑까랑하고 품행이 단정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또 봉사하고 희생할 줄 알고 하는, 인내할 줄 알고 조렇게’ 자기 보기에 참 욕심이 날 만치 귀한 사람이 돼 가지고서 가면 그 부형들이 잠깐 보고 그런 사람이 됐으면은 자꾸 자꾸 그 아이들을 맡아 달라고 뭐 굉장한 교제를 할 것입니다. 뭐하려고 아이들 못 보내구로 그라겠습니까? 그렇지마는 보니까 ‘아이구’ 이 세상에 음침한 거 징그러운 것은 뭐이냐 하면 저 건방졌고 모두 다 못쓸 것들 다 여기 꽉 차 가지고서 전부, 방 안에 가둬 놓고 키우지도 못하지 이거 아이들 보니, 사람을 보면 다 그런데, 이거 내 보내면 이거 그렇기 때문에 큰 근심인데, 오는 거 보니까, 반사라고 오는 거 보니까 권찰로 오는 거 보니까 그거 역연 내나 그런 물건이니까 겁이 나 가지고 야단을 지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꼭 우리가 노력으로만 하지 말고 빛으로 이래 증거해야 됩니다. 이런데, 우리 서부교회는 먼 데 있는 학생들은 오고 가까운 부근 사람들은 전부 학생들이 안 와요, 다 다른 데로 가 버리고. 그것은, 그것은 정식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그말은 못 알아 준다 말이 아니고, 선지자가 거기 있으니까 오늘 들어도 내일 들어도 언제든지 듣는다. 선지자를 너무 믿어서, 믿기 때문에, ‘아, 우리는 선지자가, 선지자가 우리에게 있으니까 문제 없다. 또 우리 부모가 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문제 없다’ 너무 믿어서 문제 없다 하지 불신임한다 그말 아닙니다. 아주 그거 정반대요. 이런데, 이 기독교는 자기 가정에서 다 감탄 받아야 되고, 또 자기 동리에서 감탄 받아야 되고 이래야 돼지지 그래 안 되면 안 됩니다. 감탄 받는 것이, 감탄 받는 것이 너무 거슬려 가지고서 그런 것도 있고 어쨌든지 좋은 것이 돼지면, 본을 받을 만한 좋은 것으로 했으면은 언제 나타나도 나타납니다. 그 나타나는 것이 일찍 나타나면 그 싹수가 가늘고 늦게 나타나면 싹수가 굵습니다. 언젠간가 나타나도 나타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빛이 돼야 되는 것이지 자꾸 열심으로만 해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니까 어짜든지 그 일을 조심해서 그렇게 합시다.
그러고, 이 머리 같은 것도 말이오. 머리 같은 것도 반사라면, 권찰이라면 해 가지고 다니면서 보기에 최고의 유행으로, 최전방, 최전의 유행으로 해 가지고 다니면은 그 부모네들은 어찌 생각하느냐? ‘아이구야, 그 선생들 오는 거 보니까, 우리 자녀들이 그 본 뜨고서 그렇게 하려고 하는 날이면 어찌 되겠노?’ 그것 본 삼는, 그걸, ‘나는 이렇게 최선의 지금 발단의 나는 화려를 하고 있습니다.
장식하고 있습니다.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 의복 입고 있습니다.
멋쟁입니다.’ 그거 세상에서, 그것으로 망하기 때문에 나이 많은 부모들은 다 그거 질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저 볼 때에 ‘아, 참 점잔하다’ 암만 어린 반사라도 보면 점잔하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책임감 있고, 말 한 마디 해 보면 정신이나 사상이나 그 모든 것이 똑 옳게 바르게 돼 가지고 있으면은 고만 그 부모네들이 그만 그 인격에 반해 버립니다. 그 인격에 반하면 고만 그 자녀를 자꾸 맡겨 줄라고 애를 쓰고 옆에 사람에게도 그 선생에게로 맡겨 줄라고 애를 쓰고 자꾸 이래 해 가지고서 일이 되어지는 것이지. ‘아이구야, 너거 반사, 너거 선생이라 하는 그거’ 욕도 하요. `너거 선생이라 하는 그 인간 본 뜨지 마라. 순 쓰지 못 할, 대가리는 뭐 어째 가지고 그래 가지고 있고 귀때기에는 또 뭘 지금 요새 모두 코걸이도 하고 귀걸이도 하고 해 쌓아니까 이제 또 그래 가지고서 돌아다니고 이라는 거 보니까, 아, 그 겁난다. 그따위 본 뜨지 말아라’ 이래 가지고서 막습니다. 이걸 우리가 알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하기가 조심해야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이 하신 이 다섯 가지로 이렇게 하면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겠습니다.
또 그뿐 아니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은 택함을 입은 자들이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요, 또 택함을 입은 자들로 인해서 모두 다 세상이 고요하고 평화롭고 그렇게 됐습니다. 택한 자나 불택자나, 택한 자들은, 예수님의 그 행동과 그 한 분의 자체를 인해서 택함을 입은 자들은 영원한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다 삭제되어지고 영원히 평강을 가지게 됐습니다. 영원한 기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생과 영원한 평강을 가지게 했고, 또 택자들만이 아니고 그로 인해서 모든 불택자 모든 피조물까지도 그들에게, 일반적인 은혜를 다 입어서 평화를 누리게 됐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이 세상은 다 절단나는 건데, 죄로 말미암아 절단나는 건데 예수님으로 인해서 연장되고 다시 하나님의 예정이 전개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렇게 12월 25일날 탄생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때 쯤이라고 하고 그 시일을 똑똑히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12월 25일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이라 이래 가지고 모두 공통적으로 기념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오며 보니까 장식을 그전과 같이 그렇게 많이 하지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면서 좀 느끼면서 같이 오는 사람에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성탄이 오면은 성탄 장식을 이렇게 화려하게 했는데 이게 차차 줄어지게 된다 하는 그것을 보고 마음에 조금 그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성탄 장식을 하지 안하는 그것이 그만 서부교회가 제일 먼저 앞서서 그런 걸음을 걸었습니다. 종 치는 것도 서부교회서 제일 먼저 종을 안쳤어. 제일 열심히 치고 이라다가, 그때 뭐 관서에서 막아도 아주 열심히 쳤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신문까지 났어. 신문에 났거나 말았거나 열심히 쳤습니다. 그라다가 나중에 좀 또 생각해 깨닫고, 사회에서 막아 그런 것보다도 교인들이 차차 자라서 있고, 또 문화가 발달되어서 모두 시계를 가질 수 있고 또 시계를 안 가져도 정성을 모으면 되겠다 해서 종을 없이 그렇게 차차 해 보니까 지금은 종 없어도 뭐, 시간 되면은 다 모이고 이랍니다.
종 치는 그것을 폐지하고 난 다음에 그 뒤에 말썽이 많았으나 차차차차 종 치는 것이 없어져서 지금은 뭐 거의 없다고 할 만치 이렇게 돼 갔는데, 성탄 추리 장식도 그만 그렇게 됐어. 그런 것은 좀, 장식 그런 것도 하면, 참 불교에서는 초파일날 아주 장식을 거대하게 하는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그걸 그렇게 화려하게 하지 안하고 이라니까 그것이 화려하게 하는 것도 좋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나서, 그걸 안 하게 된 그것이 혹 내가 들어서 그렇게 한 그것이 원인이 조그매라도 되지 않는가 이래서 좀 어떨까 그렇게 생각을 해 봤습니다.
너무 예수님의 성탄에 대해서 그저 기쁘다고만 생각을 하고 다른 깊은 뜻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외부적인 그런 장식만 하고 속에 실상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그것이 좀 부끄러운 일이라 해서 그렇게 했었는데, 우리는 외모가 있고 또 이면에 내면이 있으면은 참 좋은데 내면은 없고,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이렇게 있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껍데기를 줄였는데, 알맹이도 없고 껍데기도 없고 이래 되면은 고만 이 예수님의 성탄에 대해서 아무 관념 없는 일이 되어서 이 세상에게 알리는 일이 아주 줄어지게 되겠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실상에 가깝도록 우리가 기념해야 되겠다 해서 이랬는데, 우리 교회서는 얼마 전부터 그때부터 전도지를 나누는, 찬송을 새벽 찬양을 이렇게 다니면서 하다가 그 일을 또 그치고 전도지 나누는 일로써 이렇게 매년 기념 행사를 하다가 또 중간에 가다가 또 찬송도, 새벽 찬송도 한번하고, 어쨌든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습니다. 그랬는데 이 새벽 찬송도 그만 차차차 또 없어집니다. 없어지는데, 다 그래 그런지 어짜든지 이거 욕은 해도 서부교회를 많이 따라온다 하는 그런 생각이 있어서 좀 하기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좋지 못한 것을 해 가지고서 만일 그런 영향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크게 부끄럽겠는데, 좋은 일을, 더 좋은 일을, 보다 좋은 일을 해서 그래 되면은 우리가 심판 받을 일이 없겠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여게 대한, 뜻을 깨닫고 우리가 서부교회 단체적으로 하는 그게 좋지마는 또 개별적으로도 충실하게 주님의 성탄을 기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금년에는 전도지를 나누는 일을 하기 위해서, 작년에는 백만 장입니까? 작년에는 백만 장을 전도지를 박아 가지고서 거의 다 나누고 조금 남았었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그것까지 합한 걸 해서 새로 전도지 박은 것을 얼마 박았습니까? 오십만, 그전에 남은 게 얼마 남았습니까? 남은 거 없어? 두 가지가 다? 하나도 남은 거 없어? 인사 전도지도 안 남았어? 그런데 올해는 줄어서 오십만 장을 했답니다. 녜. 그때는 참 아주 힘써 했는데, 녜. 오십만 장이라도 기도 많이 하고 알뜰히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한 분이 행동하신 행동과 그 한 분의 자체가 어떻게 됐기 때문에 그렇게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들도 다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송과 참 감탄의 영광을 돌렸고, 땅에 있는 모든 택함을 입는 자들도 영원한 모든 사망 문제의 고난 고통 문제가 다 제거되고 영생과 그 기쁨의 완전 회복이 되고, 또 그로 인해서 불택자와 모든 피조물들도 다 그 혜택을 입어서 평화롭게 됐는가 그것을 어제 간단하게 다섯 가지를 들어서 말씀을 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 개적으로나 또 단체적으로나 이 다섯 가지의 예수님의 그 행하심과 예수님 자체가 어찌 됨을 우리들이 우리 행동에서 기념해야 되겠고 우리 자체에서 기념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섯 가지를 하셨는데 하늘에서는 당신이 참 지극히 높으신 자존하신 하나님이신데 당신의 그 높으심을 그걸, 높으심을 당신이 쓰지 안하시고 높으심의 그것을 다 물질계 이 우주에 있는 모든, 범죄로 타락해서 저주받아 가지고 있고 정죄받아 있고 사망 아래 있는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 피조물들을 위해서 당신의 지극히 높으심을 당신이 쓰시지 안하고 지극히 높으심을 이것을 비어서 우리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 택한자들과 불택자들과 모든 만물을 위해서 그 높으심을 희생을 했습니다. 높으심을 우리들을 위해서 쓰셨습니다. 높으심을 당신이 누리지 안하고 쓰지 안하고 그 높으심을, 우리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은 그 높으심을 하나도 쓰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그 높으심을 내놓고 땅 위에 오셔 가지고 당신은 한 번도 자유하지를 못했습니다. 그 높으심을 다 내놓으시고 한 번도 자유하지 못하시고, 말 한 마디도 생각 한 번도 자유하지 못하시고 순전히 다, 본체이신데 하나님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일을 했습니다. 또 그 부요를 다, 당신이 그 부요를 누리고 쓰지 안하시고 그 부요를 우리 위해서 다 내놔서 그 부요의 모든 효력이 우리에게 오도록 했습니다. 높음의 효력도 다 우리를 위해서, 그 효력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효력이 되도록, 그 부요의 효력도 하나도 당신은 누리지 못하시고 그 부요의 효력을 우리를 위해 써서 그 효력을 우리가 다 입었습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시고, 땅에 오셔 가지고서는 세 가지를 하셨으니 참 그 수고를 하되 당신의 있는 것을 다 들여서 수고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수고의 끝은 죽음으로 끝이 났습니다. 수고하시고, 또 우리를 인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멸시를 천대를 받는 것도 당신이 멸시 천대받아서 죽으심으로서 끝이 났습니다.
그전에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멸시 천대를 계속했고, 또 마지막에는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난도 그 고난으로 인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음으로 끝이 났지 그 고난이, 살아 있는 그것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고난으로 끝났습니다. 고난으로 끝났고 천대로 끝났고 수고로 끝났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온 혜택이 무엇인가? 혜택은, 우리가 범한 그 죄를 당신이 다 담당하신 결과를 이루었고, 또 우리가 하지 못한 그 모든 것을 대신,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을 대신 행하시는 그 역사를 이루어서 그 혜택을 우리에게 입혔고, 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당신이 죽기까지 이 화친을 인해서 화목의 제물이, 화친을 위해서 당신이 죽기까지 노력해 가지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의 이 관계를 먕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 가지 대속을 입게 됐습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도 내게 있는 모든, 자기대로의 많든지 적든지 우리의 높음을, 우리의 이 높음을, 무엇으로, 세상에 돈으로 높으든지 지위로 높으든지, 지식으로 높으든지, 인격으로 높으든지, 혹은 권위로 높으든지, 교회의 무슨 성직으로, 목사로 높으든지, 장로로 높으든지, 집사로 권찰로, 구역장으로 높으든지, 반사로 높으든지 어짜든지 우리가 이 세상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이 높음을, 주님을 생각하고 위로 주님을 위하고 아래로 형제를 위해서 이 높음을 우리가, 사람들이 높아지기를 다 원합니다. 높아지기를 원하는데, 얼마 전에 제가 어떤 사람에게 말 들으니까 '아, 그 사람은' 그 사람이 공무원인데 그 사람을 말하니까 '아이구' 깜짝 놀라면서 '아이구 그분은 높아서 우리가 근방에 가지를 못한다' '가서, 그러면, 네가 오는 데에 심부름을 해서 같이 좀 모시고 오너라' '아이고, 나는 거기 모시러 못 간다. 그 앞에 나는 가지 못한다.
어데라고 가?' 그렇게 높으다고서 이렇게 말해서, 또 다른 분도 또, 몇 사람이 그란다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이 사람은 이 면에, 이 계통에 있는 사람에게 말한 거 그라고 저 사람은 저 세통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모두 행정 계통 뭐 경찰 계통 사법 계통 이렇게 다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말하기를 '아, 세상 사람들이 그러기 때문에, 높아지기를 원하고 그렇게 죽자 살자하고 높아질라고 애를 쓰는가 보더라'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녜, 그들은 다 그렇게 하고 또 그게 높으면은 얼마나 영광되고 권세있는 것인지 참 형언하기 어려울 만치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높으신 위치에 있었으나 그것을 우리를 위해서 희생을 하고, 우리 위해서 그것을, 우리 위해서 쓰시고 그 효력이 우리에게 오도록, 당신은 효력을 하나도 누리지 못한 그것이 하늘과 땅에 기쁨과 평강이 충만해졌던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또 거게 가서 또 갖다 온 얘기를 또 해요. 가니까. 아주 뭐 절절절 매고 '하이구 이거' 이라면서 뭐 자기가 무슨 준비를 못 했다고, '아, 이거 갑자기 이런 소리를 나한테 했으면 준비할 건데 하나님의 종들을 모시면서 이거 이렇다'고 막 당황을 해 가지고서 또, 거게서는 또 그렇게 교회서 심방 갔다고 막 두려워하고 이래 가지고 절절 매고 야단이더라고서, 그러니까, 얼떨떨하이 뭐인지 모를 만치, 그분들이 다 이렇게 주님을, 주님이 오신 그 일을 본받아서, 주님이 우리 위해서 이렇게 하신 것을 본받고 그 생활을 하니까, 거게서도 자기의 높음을 그것을 자랑하지 안하고 그것을 항상 자기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희생해서 하나님께 영광되고 모든 이웃들에게 구원이 되도록 하려고 그걸 낮추니까 또 갖다온 사람들이 '하, 참. 참 놀랠 만한 그런 일이 있더라' 그렇게 하더라고 은혜를 받고 와 가지고 또 그렇게 하는 말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부요도, 무엇을 부요하든지, 내가 지식으로 부요하든지, 권세로 부요하든지, 돈으로 부요하든지, 무슨 자기는 지혜와 총명으로 부요하든지 자기는 구변으로 부요하든지, 자기는 무슨, 진리 지식을 알아 부요하든지 어쩌든지 자기에게 있는 모든 부요를 다 자기가 쓸라고, 자기 위해 쓸라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우리는 다릅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모든 부요를 그 효력을 자기가 누리지 안하고 그 효력을 이웃을 위해서 누리게 하려고 할 때에 우리 주님에게 영광이 돌아갑니다. 주님이 하늘에서 우리 위해서 그렇게 할려고 다 그 효력을 다 내놓았을 때에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늘에 있는 무리들이 참 감탄을 해서 영광을 돌렸고 또 그 효력이 와 가지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고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고, 지금 이거 성탄을 축하한다 이라지마는, 지금은 그런 기회를 다시 특별히 강조하는 그런 기념의 기회로 삼은 것이지마는 우리는 평소에 항상, 생각하고 주님을 기념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생활하신 것을 기념해야 하겠습니다. 이래서 주일을 우리가 지키는 것은, 주일날은 주님이 이렇게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완전히 다 내놔서 생명도 없어지고 완전히 다 내어놓으신 그 내어놓으심의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우리가 기념하는 것이고, 또 우리 위해서 영원히 피조물 된 그 사랑을 기념하는 그 죽고 사신, 주님이 살았다 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사신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예수님이 사신 것은 하나님이 피조물 노릇을 영원히 해야 되는 그것을 책임지고 달게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자면 우리 사람이 무슨 구더기 되는 것보다 더합니다. 구더기 되는 것보다도 예수님이 부활은 더합니다. 그것을 자원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을 기념도 하고 축하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예수님의 그 가난해지심의 이것을 항상 우리는 마음에 두고서 기념해야 되겠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소원하시는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베푸신 이 공로로 모든 만물과 모든 인간과 모든 택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 대속, 사죄와 칭외와 화친의 이 대속을 우리가 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끝없는 그런 고난으로, 고난받을 수 있는 양이 있을 때에는, 고난을 받을 수 있는 남은 일이 있는 데는 그걸 다 고난받음으로써 없어져야 되겠고 수고함으로 없어져야 되겠고 천대받음으로 없어져서, 그렇게 수고와 천대와 고난으로 우리의 존재가 없어지는 그것이 참 주님을 기념하는 기념에 다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만일 우리 있는 것을, 높음이나 부요나 또 우리의 가진 모든 그것을 헛된 것에 쓴 그것은 부끄러울 일이고, 또 자기를 위해서 쓰는 것도 다 부끄러운 일이고, 예수님이 이 다섯 가지를 우리 위해서 씀으로 하늘에도 그렇게 단합이 돼 가지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었고, 땅에도 특수의 그 행복을 받아서 영원한 기쁨을 가진 자들도 있고 또 일반적인 은혜를 받아서 승화를 누린 자들도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도 그러하지마는 우리는 평소에 항상 이 다섯 가지를 생각하고 이 다섯 가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대로 행하게 되면은 주님에게, 하늘에서는 주님에게 영광이 돌아가고 땅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너희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서, 빛이 되어서 살 때에 너희들의 착한 행실을 쓰고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교회라는 것은 보면은 대개 이것은 합니다. 물론 사랑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고 덕도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지 밀에서 올라가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밑에서 올라가는데 하늘나라는 위에서 내려옵니다. 이러니까 교회의 성직자들이, 목사들이, 장로들이, 또 권사들이, 권찰들이, 집사들이, 또 이렇게 반사들이, 위에서부터 이렇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렇게 겸손하게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것이 원 원리는 원리입니다.
이제 그 일은 차차 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우리 서부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되어 가는 거 같은데, 어제도 말했지마는 그만 그렇게 되어 가니까 밑에서는 또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고 밑에서는 그것을, 자기 할 위치를 지키지 안하고 이라니까 덕이 되지 안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번 거창 집회 가 가지고도 다른 데에 교회의 교인들이 왔었는데, 그 장로님들이 왔었는데 하도 거게서 어린 아이를 때리고 이렇게 자꾸 울리고 이래 쌓아저 안타까와서 좀 살살 달래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렇게 좀 권면을 하고 그렇게 잠깐 뭐 그 말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꾸중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라니까 그 사람이 우리 서부교회서 배운 버릇을 가지고서 '자기가 장로면 장로지 뭐 남의 일 간섭할 게 뭐이냐?' 이게 장로를 잘 몰랐다 말이오. 장로는 밑에 교인들의 모든 생활을 간섭할 수 있고 또 치리해서 벌을 줄 수도 있고 지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장로의 직권입니다. 그 맡은 의무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그만 실망을 하고, '이 서부교회 보니, 와서 보니까 이 집회에 말씀은 좋은데 도무지 이렇게 위 아래가 없으니 이게 아마 뭐인가 잘못됐는가 보다' 하고서 그분들이 실망을 하고 했다 말을 그 뒤에 들었습니다. 그래 들어서, 그거는 내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내가 사과를 전화로 만만히 했습니다. 사과를 하고 또 그 본인들도 깨닫지 못해 그렇지 그거 고의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 본인들이 가 가지고서 잘못했다고 빌고 이랬었습니다. 이라니까 그쪽에서도, 아, 그거 뭐 몰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럴까 보냐 그래 가지고 다 해결이 되고서 그분들도 기뻐하고 그래 복음을 또 복음답게 받아 가지고 그분들도 지금 종종 와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이렇게 하시면서 주님은 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주님은 위에 대해서, 그렇게 하시면서 그라면 다이다 이럴 게 아니라 위를 상경하기를, 위를 공경하기를 예수님께서는 뭐 털끝만치도 위에 거슬리는 일을 안 했습니다. 위에 아버지에게 거슬리는 일을 한 번도 안 하고 복종하는 일을 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5장 5절에도 보면은 '장로들에게 순복하라' 하는 그 말이 첫째 있습니다. '장로들에게 순복하라' 그러면, 위에서 은사 위치에 있어, 은사라 하는 거는 공으로 주는 건데, 은사 위치에 있어 위에서는 낮아져 가지고서 밑에를 위해서 오히려 밑에 보다 더 밑에 내려가 가지고 그것을 올려서 이렇게 살려 구원해라고 하는데 이 밑에 있는 자는 어떻게 되느냐. '아, 이렇게 올리니까, 올리니까 내가 높은 갑다, 해 가지고서 위에를 멸시하게 되면은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멸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또 교훈에 무조건, 복종하라, 복종하라. 장로들에게 순복, 순종하고 복종하라, 순복하라 했지 다른 말이 없습니다. 장로들에게 순복하라, 베드로전서 5장 5절에 보면은 그 말씀이 있습니다. 이랬는데, 그걸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또,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그 다음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교만한 자는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신다. 겸손으로 허리 동이라 그 말은, 겸손이라 말은 둘이 있으면 하나 있는 것같이 하는 것이 겸손이 아니고 자기를 바로 아는, 바로 알고 바로 행동하는 것이 겸손이라 하는 것으로서 여러분들에게는 제가 가르쳤습니다. 겸손이라 하는 것은 많이 있으면 적게 있는 것처럼 그렇게 외식하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 위치를 똑똑히 알아 가지고서, 자기가 자기 아는 대로 순전히 자기는 어떤 증인인데, 어떻게 멸망받은 자인데 어떻게 되어서 은혜로 구원받은 고걸 똑똑히 알고, 또 이 교회 내에서도 지위가 없이 지위를 지키지 안하는 것은, 지위를 지키지 안하는 천사가 멸망받았다, 천사 멸망받은 것을 유다서에 말하기를 지위를 지키지 안했다 고렇게 말했습니다. 그 지위를 지키지 안했다는 것은 자기 위치면 자기의 할 의무와 책임과 본분이 있는데 자기 본분과 의무와 책임을 하지 안하고 월권했다 그말입니다. 그래 가지고 망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위에 있는 사람도 밑에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러한 행동이 돼야 되겠고, 그런 자체가 돼야 되겠고, 또 밑에 있는 사람도 예수님의 그 행동과 그 자체를 본받아 가지고서 위의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교회서, 일반 식구는 자기 지권찰에게 어떻게 하며, 지권찰은 원권찰에게 어떻게 하며, 또 이 평신도는 집사를 어떻게 대우하며, 또 집사는 장로를 어떻게 대우하며, 장로는 목사를 어떻게 대우하며, 그런 질서가 이것이 정연해야 됩니다.
질서가 정연하고 이것이 바로 돼야 이것이 교회의 윤리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윤리, 또 이것이 이 사회에서 행할 때에 이것이 교회의 도덕입니다.
그런고로, 아래 위에도 그와같이 해야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 다섯 가지를 위의 사람도 하고, 또 위의 사람이 밑의 사람에게 이 다섯 가지 하는 요것만 알고 예수님이 당신 위에 있는 아버지에게 어떻게 한 요것을 배우지 못하면 요거 질서가 다 깨져 버리고 맙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말 들었는데, 어떤 다른 교파에 다니는 분이 서부교회 왔더니마는, 나이 많은 노인인데, 젊은 사람들이 암만 바쁘고, 아무 도덕을 그렇게 고조하지 안하는 버스를 타고도 나이 많은 사람이 가면은 젊은 사람이 일어서서 암만 안 앉을라고 해도 앉으시라고 이렇게 자리를 비켜 주고 이렇게 하는 일인데, 심지어 교회 와 가지고, 나이 많은 사람이 오니까 자리를 비켜 줘도 비켜 줘야 될 건데 옆에 자리가 있는 데도 아, 여기 다른 사람이 와서 앉을 사람이 있다고서 그라며 좋아내서, 좀 앞에서 들을라고 앞으로 왔다가 쫓기고 쫓겨 가지고 저 맨 뒤에 가서 앉아서 들으니까 뭐 모든 잡음들이 나와서 소리가 들려 쌓아서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래 갔다고, 서부교회 나는 다시는 안 간다고서 하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나는 그 사람 말을 어재 들었어. 어제 들었는데, 마침 어제, 그 사람이 복이 있느라고 그런가 오후 설교할 때에 왔더랍니다. 오후 설교하는데 왔는데 어떻게 듣고 갔는지는 모르기는 모르겠습니다.
그거는 뭐 냅두고, 우리가 그래 가지고서 하나님을 근심되게 하고 또 이렇게 복음 운동을 가루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가 본받아야 되겠는데, 예수님이 위에 대한 아버지에게는 어떻게 한 고것을 본받고, 또 예수님이 자기로부터 그 이하에 있는 존재들에게는 어떻게 하셨는가 요것을 본받아서 우리가 나아가면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는 그 말은 한 말로 말하면 땅에 있는 모든 자,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 하는 그 땅에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화평케 하는 자라 말은 예수님이 이 다섯 가지를 하셔 가지고서 이 모든 하늘에도 땅에도 다 화평을 이루는 요 자취를, 발자취를 따라가는 자는, 곧 그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제 말 들으니까 저 OO교회는 어짜든지, 인제 개척한 지 얼마 안됐는데 금년 내로 장년반 백 명을 하나님께 달라면서 안 되면 한번 백명을 앉혀라도 달라고 그래 부르짖었대요. 이러면서, 어제, 다를 때는 못하고 떡국을 이래 가지고서 어제는 그래 해 가지고 이래 했는데, 백 명은 못 오고 팔십 몇 명인가 장년반이 오고 주일 학생은 오후에는 백 팔십 명이 오고, 또 저 OOO교회도 그렇고, 또 OOO교회는 백 명을 하나님께 이렇게 구하고 표준하고 이랬는데 구십 여덟인가 일곱인가 왔는데 한 주일 남았는데 이거 어찌 될지 모르겠다고서 어짜든지 해 안에 한번 장년반들이 이 백 명 나오기를 원한다 하고, 또 주일 학생은 한 삼백 얼마인가인데 더 앉지를 못한답니다. 인제 이래서 좀 연보해 가지고서 좀 늘여트려야 된다고 이라면서, OOO교회도 많이 나왔어요. OOO교회도 주일 학생은 약 몇 명 나오고 또 장년반은 뭐 사십 몇 명인가 나오고, 그래서 모두, 가는 사람마다 그저 능력이 역사해서 그렇게 속성이 돼져요. 일꾼들만 되면은, 이거 다 여기서 지금 일꾼들은 발가벗겨서 보내도 가면 일 년 안쪽에 다 독립 교회, 다 자립하는 교회, 자립 교회 다 세울 수 있는 그런 실력가들이 많이 있어.
그런데, 어짜든지 이래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룹시다. 이루어지는 데는 딴거 없습니다. 그저 요 다섯 가지를 기억해서 해야 될 것이고, 반사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하나 주의할 것은, 사람들이 아무라도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데, 이 세상이 너무 어지럽고, 이렇기 때문에, 자, 어느 누구가 우리 자녀를 좀, 부모가 자기 자녀는 자기가 가르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녀는 서로 바꿔 가르치라 했습니다. 그 통계가 모두 계산하기를, 이러니까, 자기 자녀를 자기가 가르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우리 자녀에게 좀 바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느냐' 우리 자녀가, '조 사람 본떠라. 조 사람을 본받아라. 조 사람같이 돼라' 요렇게 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상대자가 있기를 다 구하고 있습니다.
있는데. 반사들이 보니까, 예수 믿는 걸 반대했지마는 그 반사 선생님을 보니까 '아, 우리 자녀가 조 반사 선생님갈이 조렇게 모든 것이 정신이 까랑까랑하고 품행이 단정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또 봉사하고 희생할 줄 알고 하는, 인내할 줄 알고 조렇게' 자기 보기에 참 욕심이 날 만치 귀한 사람이 돼 가지고서 가면 그 부형들이 잠깐 보고 그런 사람이 됐으면은 자꾸 자꾸 그 아이들을 맡아 달라고 뭐 굉장한 교제를 할 것입니다. 뭐하려고 아이들 못 보내구로 그라겠습니까? 그렇지마는 보니까 '아이구' 이 세상에 음침한 거 징그러운 것은 뭐이냐 하면 저 건방졌고 모두 다 못쓸 것들 다 여기 꽉 차 가지고서 전부, 방 안에 가둬 놓고 키우지도 못하지 이거 아이들 보니, 사람을 보면 다 그런데, 이거 내 보내면 이거 그렇기 때문에 큰 근심인데, 오는 거 보니까, 반사라고 오는 거 보니까 권찰로 오는 거 보니까 그거 역연 내나 그런 물건이니까 겁이 나 가지고 야단을 지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꼭 우리가 노력으로만 하지 말고 빛으로 이래 증거해야 됩니다. 이런데, 우리 서부교회는 먼 데 있는 학생들은 오고 가까운 부근 사람들은 전부 학생들이 안 와요, 다 다른 데로 가 버리고. 그것은, 그것은 정식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 그말은 못 알아 준다 말이 아니고, 선지자가 거기 있으니까 오늘 들어도 내일 들어도 언제든지 듣는다. 선지자를 너무 믿어서, 믿기 때문에, '아, 우리는 선지자가, 선지자가 우리에게 있으니까 문제 없다. 또 우리 부모가 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문제 없다' 너무 믿어서 문제 없다 하지 불신임한다 그말 아닙니다. 아주 그거 정반대요. 이런데, 이 기독교는 자기 가정에서 다 감탄 받아야 되고, 또 자기 동리에서 감탄 받아야 되고 이래야 돼지지 그래 안 되면 안 됩니다. 감탄 받는 것이, 감탄 받는 것이 너무 거슬려 가지고서 그런 것도 있고 어쨌든지 좋은 것이 돼지면, 본을 받을 만한 좋은 것으로 했으면은 언제 나타나도 나타납니다. 그 나타나는 것이 일찍 나타나면 그 싹수가 가늘고 늦게 나타나면 싹수가 굵습니다. 언젠간가 나타나도 나타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빛이 돼야 되는 것이지 자꾸 열심으로만 해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니까 어짜든지 그 일을 조심해서 그렇게 합시다.
그러고, 이 머리 같은 것도 말이오. 머리 같은 것도 반사라면, 권찰이라면 해 가지고 다니면서 보기에 최고의 유행으로, 최전방. 최전의 유행으로 해 가지고 다니면은 그 부모네들은 어찌 생각하느냐? '아이구야, 그 선생들 오는 거 보니까, 우리 자녀들이 그 본 뜨고서 그렇게 하려고 하는 날이면 어찌 되겠나?' 그것 본 삼는, 그걸, '나는 이렇게 최선의 지금 발단의 나는 화장를 하고 있습니다.
장식하고 있습니다. 화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 의복 입고 있습니다.
멋쟁입니다.' 그거 세상에서, 그것으로 망하기 때문에 나이 많은 부모들은 다 그거 질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저 볼 때에 '아, 참 점잖하다' 암만 어린 반사라도 보면 점잖하고 겸손하고 진실하고 책임감 있고, 말 한 마디 해 보면 정신이나 사상이나 그 모든 것이 똑 옳게 바르게 돼 가지고 있으면은 고만 그 부모네들이 그만 그 인격에 반해 버립니다. 그 인격에 반하면 고만 그 자녀를 자꾸 맡겨 줄라고 애를 쓰고 옆에 사람에게도 그 선생에게로 맡겨 줄라고 애를 쓰고 자꾸 이래 해 가지고서 일이 되어지는 것이지. '아이구야, 너거 반사, 너거 선생이라 하는 그거' 욕도 하요. '너거 선생이라 하는 그 인간 본 뜨지 마라. 순 쓰지 못 할, 대가리는 뭐 어째 가지고 그래 가지고 있고 귀때기에는 또 뭘 지금 요새 모두 코걸이도 하고 귀걸이도 하고 해 쌓아니까 이제 또 그래 가지고서 돌아다니고 이라는 거 보니까, 아, 그 겁난다. 그따위 본 뜨지 말아라' 이래 가지고서 막습니다. 이걸 우리가 알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하기가 조심해야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이 하신 이 다섯 가지로 이렇게 하면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