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향방과 절제

 

1986. 8. 29. 금밤

 

본문:고린도전서 9장 19절∼27절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기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지금 광고부터 먼저 합니다. 나중에 설교하고 나서는 광고할 시간 없고.

기도록에 등록 된 수는 팔천오백이십칠 명인데 금주에는 하루 삼백삼 명씩 기도하러 예배당에 왔었습니다. 또 기도록에 등록하실 분은 나가실 때에 일층 입구에서 등록하시면 됩니다.

새벽기도에 빠지지 말고 계속 나오도록 합시다. 새벽기도 안 나오는 사람들을 데리러도 가고 전화로도 깨워 주고 이래 가지고, 새벽기도 나온다는 것이 아주 어렵습니다. 쉽지 않소. 그러니까 위해서 기도도 하고, 또 전화로, 또 가서 그렇게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새벽기도 나오는 교인을 만들지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다.

요새도 보면 그저 새벽기도 하는 사람이 늘지를 않습니다. 그저 칠백 명에서 팔백 명이 넘어가지 못하고 항상 그만입니다. 삼천 수백 명이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이 나머지기는 새벽기도 안 나오면 뭣하는 것입니까? 뭐 제가, 물론 다는 아니지마는 새벽기도 못 나오는 그 사람이 뭘하겠습니까, 하기를? ‘나는 집이 멀어서’ 집이 멀면 네 신앙 생활에 안 될상바르면 좋은 집 팔아 가지고 나쁜 집 사 가지고 오면 되지 뭐 지금 ‘나는 집이 멀어서’ 직장이 그러면 직장 그거 내놔 버리고 그라면 좀 가난하게 살고 신앙에 자유하면 되지, 못할 게 뭐 있어? 새벽기도를 다 계속하도록 하십시오. 새벽기도를 안 나오는 사람은 진리를 몰라요. 진리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 진리대로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간추려서 증거를 하겠습니다. 오늘 밤에는 각처에서 교역자들이 많이 참석을 했기 때문에 또 내일 아침에는 가 버릴 터이니까 간단하게 해서 집에 돌아가 가지고 성경을 보고 연구하면 깨달을 정도로 간단하게 요약해서 증거를 하겠습니다.

여게 “모든 사람에게는 내가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됐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모든 사람에게 자유했다” 그말은 사람이 많든지 적든지, 높은 사람이든지 낮은 사람이든지 사람과의 관계하는 데에서 영감과 진리를 양보하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 하는 그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유한다” 그말은 뭐 생명을 뺏겼으면 뺏겼지 피와 성령과 진리대로의 사는 요 자기 생활은 양보하지 안하고 살아 왔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거 우리 믿는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스스로 모든 사람들에게 종이 됐다 말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그 일이 아닌 범위 내에서는, 하나님 말씀을 어기지 않는 그런 범위 내에서는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종노릇을 하고, 상대방 좋도록, 상대방에 유익하도록, 상대방을 자기보다도 더 높이고 그를 더 낫게 존중히 여겨서 그렇게 살았다 하는 그말입니다.

“스스로 종 됐다” 말은 종 됐다고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그런 일을 했다 말은 아니고 하나님 말씀 어겨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양보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또 지배받고 천대받고 어떤 일이라도 그저 그렇게 했다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인인관계에서는 자기를 남의 으뜸 될라고 하지 안하고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그저 말씀에 위반되지 아니하는 한 다른 사람에게 상전노릇 하지 안하고 종노릇 하고, 다른 사람의 위에 갈라고 하지 안하고 다른 사람의 밑에 가고, 다른 사람을 지배할라고 하지 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를 당하고 이렇게 바울이 살았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 사니까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을 업신여기기도 쉽고 아주 무시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참 아주 힘 없는 사람, 아주 천한 사람, 아주 못난 사람, 비겁한 사람같이 이렇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노릇을 하는 생활을 했다.

또 말하기를 “내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자기는 근본은 유대인이지마는 지금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로마인이지마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과 같이 그렇게 했고, 또 율법이 있는 자에게는 자기는 율법에 매여 살지 안하지마는 자기도 율법 있는 거와 같이 그렇게 살아 왔고, 또 율법이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그렇게 해서 어쨌든지 하나님 앞에 죄가 되지 아니하는 한 모든 사람을 따라서 살고 모든 사람에게 맞추어서 이렇게 자기를 비워서 살았다, 또 약한 자에게는 아주 자기가 약한 자와 같이 그렇게 상대해서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약한 사람으로 돼 가지고 살고, 또 되게 강하고 높은 사람은, 또 높은 사람에게는 또 높은 사람에게 그저 눌릴 만치 그렇게 살아서, 어쨌든지 이 말씀은 바울이 이렇게 저렇게 여러 모양으로, 사람이 보면 짐작 못 할 만치 이 껍데기도 입고 살고 저 껍데기도 입고 살고 있고 이렇게 뭐 몇 껍데기를 입고 사는지 모를 만치 그렇게 바울이 모든 사람을 상대해 가지고 살았다, 그것은 뭐 때문에 그렇게 살았느냐? 산 이유를 여기 22절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성경을 봐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산 것은 여러 모양을 가지고 사는 참 천태만상의 사람, 형형색색의 사람, 별별 기이하고 희희한 종류의 사람, 성격의 사람, 별별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따라서 그런 사람같이 이렇게 내가 잘 융화를 해 가지고 이렇게 산 것은 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그렇게 살았다 그랬습니다. 「구원코자 함이니」 23절에, 거게 참 중요한 무서운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코자 함이니」 「구원코자 함이니」 구원하고자 함이니, 곧 뭐이냐?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을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그러면 바울이 이렇게 전도하고, 다른 사람을 권면하고, 모든 사람을 대해서 자기가 부드럽게 겸손히 낮춰서 희생하고 하는 그것이 뭐 복음 생활 아닙니까? 그게 복음 전도 아니요? 복음 전도인데 또 뭐할라고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그게 내나 복음 생활인데 또 복음에 참여하기는 뭐 참여한다 말이요? 이렇게 천태만상으로 사람 만날 때마다 참 별별 사람이 다 있는데 그 사람에게 그저 이 사람 만나면 이 사람이 유가 되고 저 사람 만나면 저 사람의 유가 되고 이렇게 참 별별 그 형형색색 천태만상의 그런 생활 형태를 가졌으니까 바울은 그저 형편 되는 대로 또 환경과 주위에 맞춰서 그렇게 아무나따나 그저 사람 좋게만 해 가지고 살려 하는 그런 사람의 생활 했다 이렇게 보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 가지고ㅡ요거 잘 안 들으면 몰라요.ㅡ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은 만나서 수많은 종류의 사람의 행위를 하나 행위하는 그 목적이 어데 있는가? 그 목적은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라”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라” 자기가 수많은 형태의 생활을 하지마는 그 생활하는 표준은 뭐인가? 그 생활을 뭣을 표준해 가지고,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가지고 생활하고 있는가? 천태만상의 행동을 하니까 야만이 보면은 ‘바울은 우리 야만과 같은 동무의 사람이다’ 또 아주 뭐 흐리터부리한 사람은 ‘바울은 우리와 같은 유의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다 바울을 자기 친구라고, 자기와 같은 동류의 사람이라고, 자기와 아주 같은 그 수준의 사람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이렇게 하도록 이렇게 사니까 그 사람은 환경 따라서 변하는 생활하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아무나따나, 아무 뼈대 없고 기준 없이 그렇게 그저 마구잡이로 사는 그런 사람으로 사람들은 인정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와같이 사는 그 생애의 기준을 어데 두느냐? 이렇게 저렇게 사는데 그렇게 사는 그 생활 가지고, 무엇을 기준으로 해 가지고, 무엇을 표준해 가지고, 무엇을 자기의 목표로 삼고 살고 있느냐 그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라” 복음에 참여한다는 말은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이 복음인데 하나님의 구원을 어떤 것을 하나님의 구원이라 하느냐? 복음을, 하나님의 구원을 복음이라고 여게 표시했는데 구원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 가지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합격이라 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합격된 거,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이는 완전하다, 이는 영원이다, 이는 불변이다, 이는 영생이다 인정받는 그것이 복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인정받은 그것이 복음 속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복음은 신구약 성경 말씀이 복음인데, 지금은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으로 이래 가지고 이 복음을, 사람들이 뭐 제 마음대로 천태만상으로 이 복음을 이용해 먹고 있습니다. 이렇게도 사용하고 저렇게도 사용하고 하지마는 이 복음은 절대 불변의 진리입니다. 절대 불변의 진리요, 가감을 못 하는 진리요, 완전 무결의 진리요, 완전한 영원한 생명이 되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인데, 이 복음 안에 들어가는 것은 복음대로 된 것만 그 안에 들어갑니다.

복음대로 안 된 것은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복음은 껍데기로 말하면 신구약 성경 말씀이요 영감입니다. 또 더 한번 말하면 예수님의 피입니다.

복음은 피와 성령과 진리 이 셋이 합해서 복음인데 이 복음은, 이 셋이 들어서 사람을 구원하는데, 사람 구원한 그 수고나, 구원해 놓은 것이나, 구원으로 건설해 놓은 것이나, 그 놓은 것이 피와 성령과 진리 요 셋에 털끝만치라도 배치되지 안하고 요 셋대로 된 그것만이 복음 안에 들어갑니다. 알겠습니까? 요것만이 복음 안에 들어갑니다. 요거 무슨 말인지? 요것만이 복음 안에 들어갑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천하 인간들에게 옳다 인정을 받아도 소용 없습니다. 또 천하 사람들에게 정죄를 받아도 상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 요 셋이 복음인데 요 복음대로 딱 된 거, 옆으로도 뒤에서도 앞에서도 마구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마구 찔러서,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마구 찔러대고 마구 심사하고 송사를 암만 해도,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암만 정죄할라 하고 아무리 송사해도 송사받을 것이 없고 정죄받을 게 없고 신구약 성경 말씀 곧 복음대로,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대로 된 그것만이 이 복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복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게 뭐인가?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인데 그것이 영원한 것입니다.

바울이 껍데기에는 모든 사람을 대해서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사니까 그 사람은 뼈도 없는 사람이고, 중심도 없는 사람이고, 절제도 없는 사람이고, 아무런 비판도 없는 사람이고, 평가도 없는 사람으로,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사니까 사람들이 볼 때에 ‘저 사람은 참 우스운, 아무 무슨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

기준도 없는 사람이라.’ 이래 보지마는, 바울이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천 사람 만 사람의 그 형편에 따라서 자기가 그와 같은 사람 같이 되어져서 살고 있는 그 생애에 기준이 어데 있는가? 그 표준이 어데 있는가? 그것이 복음에 참여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알겠습니까? 요거 성경에 보니까 있습니까? 성경 보니까 깨달아집니까? 요것을 깨닫지 못하고 성경을 암만 말해도 헛말입니다. 알겠습니까? 바울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들을 다 좋게 하고, 모든 사람들을 따라서 다 피동으로 살고, 모든 사람에게 종노릇 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이렇게 그저 다른 사람이 하자 하는 대로 다 하고 이래 하는 것 같으나 그 속에서는 복음을 벗어나지 안하고 자기 생활하는 그 수고하는 그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맺는 결실은 어떤 걸 맺느냐? 어떤 걸 목표로 하느냐? 그렇게 하는 그 모든 생애에 기준과 목표는 복음 속에 들어가는 요것을 목표로 기준으로 삼고 한다 그렇게 여게 기록했습니다.

사람이 일생 동안 목회를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목회 한 것이 나중에 가서 보니까 복음 속에는 모래알만치 들어 있는 사람도 있고, 모래알만치도 들어 있지 안하고 기본구원만 들어 있지 자기 해 놓은 거는 털끝만한 것도 그 복음 속에는 없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복음 속에 주먹덩이만치 들어 있는 사람도 있고, 태산만치 들어 있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복음 속에 우주보다 더 크게 그 복음 속에 들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을 대할 때에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했다” 그말은 수많은 사람을 대해서 내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모든 사람을 좋게 하고, 모든 사람의 비위를 다 맞추고, 모든 사람을 따라서 종노릇으로 피동으로 다 양보하고 그를 따라서 살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배반하고 어떤 사람에게도 피동된 일이 없다. 알겠습니까? 요것이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껍데기는 볼 때는 물씬물씬해서 둘러마시면 시원하고 좋겠다 싶어서 똑 빨간 감홍시 같지마는 단쇠라. 속에는 쇠물이라. 삼키면, 먹어 삼키면 타서 죽어버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볼 때에 껍데기는 이렇게 유하니까 아주 껍데기는 뼈 없는 사람 같으나 속에는 절대 속이 속에 들어 있어서 그 기준과 표준은 복음 속에 참여하는 그것을 목표로 두고 모든 인인관계를 이렇게 한다 말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외부에 유하고 내적으로 강한, 외유내강, 외유내강은 형언할 수 없을 만치 외유내강의 사람으로 그는 살았습니다. 우리가 복음 생활 할 때에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종노릇하되 모든 사람에게 나는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살아난 자이기 때문에 본질과 본성은 피와 성령과 진리가 내 본질과 본성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종으로 이렇게 사나 피와 성령과 진리에 배치되는 생활을 하지 안하고 피와 진리와 성령대로 살기 때문에 요것은 “자유했다” 요랬습니다.

“자유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종노릇한다” 이런 것은 사람을 많이 얻고자 하기 위함인데 그러면 그렇게 살아 가지고 그 산 생애의 결과는 어떤 결과를 네가 맺겠느냐? 그 결과는 복음에 참여하는 결과, 요 피와 성령과 진리대로 이루어진 요 완전무결, 영원, 사죄 칭의 화친 영감 진리대로의 된 요것만이 복음이요 요것만 요 복음 속에 있는 것인데, 요것만이 그리스도의 심판을 통과해 가지고 영원 무궁세계의 완전 속에 들어가는 것인데, 요 완전 속에, 복음이라는 완전 속에, 피와 성령과 진리라는 요 완전 속에 자기가 들어가는 그것을 기준으로 하고, 그것을 목표로 하고, 그것을 표준으로 해 가지고 이렇게 외유내강에 천태만상의 행위를 하나 속은 요것이 기준이요 목표요 또 외부적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 종노릇 하나 자유했지 하나도 어떤 세력에게 끌려서 피동되지 안했다. 여게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것을 모르면 헛일입니다.

또 그가 말하기를, 그가 지금 여게 비유하기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여럿이 달음질을 하지마는 이기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상을 얻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이기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그러면 왜 이기는 사람이 하나뿐이라? 그거야 다 이긴 사람은 하나뿐이지요. 이등은 하나한테 졌다 표시요. 이등 됐다 그말은 한 사람에게 졌다는 말이요, 삼등은 두 사람에게 졌다는 말이오. 그러니까 이긴 사람은 하나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달음질하는, 바울은 달음질을 하는데 이 달음질하는, 그분이 달음질하는 그 표준은 어떤 것을 이 달음질의 표준으로 기준으로 삼았는가? 그는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자같이 아니하고”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그가 달음질을 하는데 달음질하는 기준이, 달음질하는 그 기준이 어데 있는고 하니 그가 그저 자기가 달음질만 하면, 어떻게 달음질하든지 달음질만 열심히 해서 다른 사람보다 앞에만 가면 되고, 또 다른 사람을 이기면 되고, 달음질을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지를 안하고, 달음질을 어떻게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달음질을 자기가 한다 할지라도 달음질의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달음질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달음질의 기준이 “향방 없는 것같이 하지 아니하고” 그가 달음질하는, 열심히 자기 신앙 생활을 하는, 열심히 하는 그 열심에 가치를 두지 아니하고, 그 열심내는 열심에다가 표준을 두지 안하고, 열심에다가 기준을 두지 안하고, 그 열심에다가 목표를 두지 아니하고, 자기 신앙의 달음질하는 것은 자기 향방 없는 것같이 그러지 안하고 자기가 달음질하는 향방은, 달음질하는 그 목표는,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자기는 달음질을 물론 열심히 빨리 하기를 해야 되는데, 그저 열심히 하기를 해야 되는데 그 열심에다가 표준을 두지 안하고, 빠른 데다가 표준을 두지 아니하고, 자기는 향방에다가 표준을 둔다. 목표에다가 표준을 둔다.

그러면 목표와 표준은 무엇인가? 목표와 표준은 곧 빌립보 3장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능력에 참여하려 함이라” 그러면 바울이 아무리 열심을 내고 그래 한데도 열심내는 그 열심에다가 표준을 두지 아니하고, 또 한 사람 두 사람을 자기가 다 떼내서 승리하는 그 승리에다가 표준도 두지 안하고, 열심에도 표준을 두지 아니하고 자기가 곧 예수님과 같이 되는, 예수님과 같이 되는 그리스도의 그 형상에다가 표준을 두고서 자기는 달음질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달음질하는 방편은 수많은 방편들이 있지마는 방편 그것도 상관하지 안하고 열심도 그것도 좋지마는 그런 것도 자기가 목표하는 그 표준은 아니고 다만 자기의 한 행동 한 행동 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향하여서 달음질하여 예수님에게로 가까이 나아가는 그 걸음이 아니라면 자기는 가치로 삼지를 안하고, 자기가 열심히 신앙 생활을 달리는 것은 열심에다가 표준을 두지도 안하고, 또 누구보다 낫다는 그런 인간 비교에도 표준을 두지 안하고, 자기 신앙 걸음은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님에게 조금씩이라도 가까이 나아가서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예수님을 향하여서 가까이 나아가는, 예수님을 향하여서 달리는 요것만을 자기는 달음질에 표준으로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하는 그것을 말씀했습니다.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하는 말은 자기는 만일 신앙 생활을 하는 데에 이기는 사람은 하나뿐이지 이기는 사람은 둘이 되지 않는다.

이기는 사람은 하나뿐인데 모든 것을 이겨야 그 사람이 이긴 사람이 된다. 상을 받는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 신앙의 달음질하는 그 경쟁면에서는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이기고, 신앙 달음질에서는 신앙 달음질에 같이 그 신앙 달음질을 출발한 것이 만일 열이라고 하면은, 자기와 힘을 비교하는 것이 열이라고 하면은 그 열을 하나를 집어넘기고 둘을 떼내고 서이 너이 다섯, 아홉, 열을 떼내면은 자기는 모든 것을 이긴 사람이라. 모든 것을 이긴 사람이라.

그러면 우리가 신앙 걸음에 힘을 다투는 것은 그 다투는 경쟁자가 누가 경쟁자인가? 경쟁자는 이 악령도 경쟁자요, 악성도 경쟁자요, 악습도 경쟁자요,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모든 세상 것도 다 경쟁자라. 다 힘을 겨루는 것이라.

그러면, 나와 힘을 겨루는 것이 열이든지 스물이든지 뭐 몇 십이 되든지 백이 되든지 그로 더불어서 서로 힘을 겨루어서 경쟁하는데 그 경쟁은 다 이겨야, 다 이겨야 이제 이긴 자가 되지 만일 백에 아흔아홉을 이겼다 할지라도 하나에게 지면은 이긴 자가 되지 못하고 진 자가 된다.

요것을, 그는 승패에 대해서는 요것을 그분이 지식을 삼고, 이기고 지는 것은 어떤 것을 이기고 지는 것으로 그 사람이 표준을 삼았는고 하니 다 이겨야 이긴 것이지 그뭐 몇분지 일 이겼다고 해서도 하나라도 못 이긴 게 있으면은 그거한테는 졌기 때문에 결국은 진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이 경쟁에 대해서는 다 이겨야 된다.

그러니까 바울이 승패에 대해서 그가 승패의 표준을 삼기는 뭘로 삼았느냐 하면은 다 이기는 것으로써 그는 승패의 표준을 삼았습니다. 다 이기는 것으로서 승패의 표준을 삼았습니다.

이거 여러분들이, 제가 잘못해 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백지 핑계를 대서 책임을 전가시키는 그런 일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또 책임을 전가하는 것보다도 내가 오늘 저녁에 이 설교를 아마 내가 설교하기를 한 이십 분 하고 왔을 것인데, 이 설교를 한 이십 분을 하고 왔는데 왜 여기 오니까 딱 막히는 게 안 되는지? 이것은 내게 뭐, 내가 그라고 나서 죄지은 게 하나도 없는데. 그저 거기서 시간이 바빠서 뭐 정신없이 이래 가지고, 저녁에 맛있는 식사를 해서 수제비를 끓여서 수제비 한 그릇 먹고 그래 맛있는 거 먹고 뭐 급하게 달려왔고 뭐 딴거 생각하지도 안했는데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지금 저녁 맛있게 먹고 이 설교할라고 그래 기쁨으로 이래 왔는데, 자신만만하게 왔는데, 내가 그동안에 너무 자신만만을 가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잘못된 건지 내게는 자신만만했으니까 교만한 거 그게 잘못인지 모르겠고 또 하나 전가가 아니라 여러분이 받을 만한 그 준비되지 안하고 그만 허투리 이렇게 실실 들어 치워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주는 거 아닌가 또 그렇게도 또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혼자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여러분들에게 암만 설교해야 은혜가 안 되는 모양입니다. 은혜가 안 되는 모양이라.

바울이 천태만상의 신앙 생활을 했으나 그의 목표와 기준은 어데 있느냐? 전신앙 생활은 복음 속에 들어가려는 것이 그것이 그의 목표라 하는 그 말을 여러분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는 거 같애. 못 알아들으니까 이거 아마 그런 이유가 있는 거 같애. 못 알아들는 거 같애요.

바울이 그 밑에 보면은 여러 모양의 생활 했습니다. 여러 모양의 생활 했으나,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복음에 이거 참여하고자 함이라.

요 말씀이 굉장한 어려운 말씀이고 굉장한 함축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해야 여러분들이 뭐 귀넘어 듣고 이래 듣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주시는 것 같애요. 안 주는 것 같애. 여러분들이 느끼지를 못하는 것 같애.

바울이 이렇게, 이 사람 만나면 이렇게 저 사람 만나면 이렇게 이거 뭐 뼈 없이 환경에 주위에 쓸려서 마치 말하면, 바울이 수많은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사람에게 하나도 자기 세우지 안하고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종노릇으로 피동으로 모든 사람에게 다 다 이렇게 굽신거리고 모든 사람을 좋게 높으게 자기보다 낫게 여겨서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대할 때에 자기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종으로 대하고, 종으로 대해서 모든 사람에게 종노릇 하고, 종노릇 하고 종노릇 하고 그런데 한 사람에게도 자유하지 못한 일은 없고 자유하지 못한 일, 알아듣습니까? 자유하지 못한 일은 없고, 또 이것이 뭐이냐? 복음에 참여하는 자 되기 위해서 한다.

이 생각을 여러분들이 지금 아무 뜻도 모르고 아무 생각도 없는 거라.

느껴집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 주시는 거 같애. 너무 여러분들에게 거리가 멀어요, 너무. 안 살기 때문에 거리가 멀어. 사는 사람은 무식해도 뭐 국민학교 공부 안 해도 좋아요. 주일학교 학생들은 가르치면 딱딱 알아들을 거라. 여러분들 속에 썩었고 죄악이 가득찼기 때문에 그 심령이 더러워지고 썩었기 때문에 안 들리는 거라.

바울이 삼각 생활을 했어. 삼각 생활을 했는데 그의 마지막의 종착은 복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사람에게 뭐, 모든 사람에게 다 종질 하기야 쉽지 뭐. 종질 하기 그거야 저만 빼내버리고 그만 굽신거리면 되는데 모든 사람에게 종질하기는 쉬운데 모든 사람에게 영감 진리 피로 자유하면서 종질하기는 어려워.

또 피와 성령과 진리대로 자유하고 모든 종질 하는 것은 굉장한 모순 모순이 되어 있는데 이렇게 하면서 뭐, 이렇게 하니까 이거면 이거 저거면 저거, 뒤에 결과가 어찌 되든지 이리 되면 이리 되고 저리 되면 저리 되고, 종질 하는 것도 하기 쉽고 또 자유하기도 하기 쉬워. 누구에게든지 어데든지 내가 진리 영감 피 양보하지 안하고 그대로 산다는 거. 이것도 하기 쉬워요, 할 수 있어.

요것도 할라면 할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종노릇도 할라면 할 수 있고 그런데 이것이 복음 속에 들어가는 일이 돼야 한다 그거요. 이 어려움을 압니까? 이걸 느껴요?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걸 주시지 않는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안 알아들으니까 내 마음을 가리워서 꽉 가리워서 하나님이 안 주셔요. 이러니까, 봐, 금방 또 틔워졌는데 또 안 주신다 그말이오.

바울이 달음질하는 데에서 승패의 표준은 그 사람은 뭘로했느냐? 이등 삼등 사등이 아니고 자기 달음질에서는 자기와 이 힘을 다투고 경쟁하고 자기로 더불어서 전투하는 전투의 대상, 전투의 대상은 크게 말하면 전투의 대상이, 우리의 전투의 대상이 몇입니까, 이제? 이거 또 인제 옛날로 가야 돼. 전투의 대상이 몇 개입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그라니까 내가 좀 힘이 난다. 넷.

악령, 악성, 악습, 합해서 세상. 죄, 사망, 마귀, 세상, 그래 너이 해도 한가지요.

천하 인간이 죄한테 다 종 되어 있소. 죄로 더불어 싸워서 죄를 이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올바른 기독자 외에는 하나도 없어. 악령을 이긴 사람이 있어요? 사망을 이긴 사람이 있어? 기독자만이 사망을 이겨. 이거 이름도 몰라. 입에 발려서 백지 그렇게 하고 있지. 입에 발려 그래 가지고 뭐이 됩니까? 안 돼.

자기는 수많은 대적으로 더불어, 이 경주한다 말은, 경주한다 말은 이거는 하나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경주한다 말은 이기기를 다툰다 그말이오. 이기기를 다투는데 뭐 권투로 이기는 것도 있고, 레슬링으로 이기는 것도 있고, 싸워서 이기는 것도 있고, 또 축구 이기는 것도 있고, 이거는 전투를 말하는 거라, 서로.

전투, 이기는 것. 전투하는데 그것을 여게는 달음질, 달음질 싸움으로 달음질 전투로 여게 비유를 해 놨다 말이오.

비유를 해 놨는데, 이 전투의 승패의 표준을 바울이 어떻게 삼았느냐? 승패의 표준을, 이제 뭐, 사울 왕은 승패 표준을 삼을 때에 그 사람은 ‘많은 사람 죽이고 짐승 몇 마리 남고 아각 남는 그것이야 이까짓 거야 다 완전히 승리했다.

사무엘이 나 때문에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십시오.’ 사울 왕은 승패의 이 표준을 그는 그저 한 육십점이나 칠십점이나 오십점이나 돼도 된다고 이랬는데, 요 바울은 승패 표준은 “상을 받는 자는 하나뿐이라” 그 무슨 말입니까? 승패의 표준을 어떻게 했다 말이요? 승패의 표준을 뭘로 잡았어? 뭘로? 승패의 표준을 다 이겨야 이기는 것이지, 하나라도 이기지 못했으면 이긴 게 아니라 그말이오. 이 바울은 이렇게 승패의 표준을 삼았습니다.

우리도 그래요.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복받을라고 지금 애를 쓰고 있는데 마태복음 23장이든지 학개서 2장이든지 거게 보면은 “이 나라와 모든 민족이 다 이러하다” 그렇게 말했어. 어떻게? 자기가 거룩한 고기를 옷자락에 쌌으니까, 고기가 하나님의 제물이라 거룩하니까 옷자락에 쌌으니까 옷자락도 거룩하고 사람도 거룩하고, 하나 거룩으로 가지고 모든 것이 거룩된다고서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실패했다.

또 죄는 하나 지은 것은 그것만 짓기 때문에 고거 죄 하나 지었으니 그것만 더럽지 딴거는 다 괜찮다 이렇게 말하지마는 죄지은 거는 하나 지으면은 안 지은 것 모든 것까지 다 더러워진다. 죄의 전염성과 의의 혜택성이 다르다 하는 그걸 구별하지 안하고 하기 때문에 헛일이라 그말이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거 승패의 기준을 이래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이만침 지켰으니까 하나님 축복이 올 것 아닌가?’ 안 온다 그거요. 안 오는 거는 뭐이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 앞에 축복받을 수 있는, “오늘날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면 명령하신 네 하나님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리라” 하는데 바울은 명령을 지키는 데에 하나도 없이 다 지키고 난 다음에 그게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자는 백 가지 가운데에 하나만 지키고도 오리라 생각하고 하나 지켜도 안 오니까 ‘나는 지켜도 안 오네’ 이러니까 이제 이 승패의 기준이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그거요.

바울은 승패의 기준을 어떻게 잡았어요? 이것도 아무 감각이 없어. 나 혼자만 이래 떠들지. 참 기차, 기차. 바울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상을 받는 자는 하나뿐인 줄 너희들이 알지 못하느냐” 그러면 이긴 자는 하나뿐이라 하니까 이긴 자는 하나뿐이니 이등을 여게 인정합니까 안 합니까? 삼등을 인정하요 안 하요? 뭣만 인정해, 그라면? 일등만 인정해.

우리의 승패에 대한 기준은 일등만 이긴 것이지 이등은 한 사람한테 졌다 그말이라.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백 가지 하나님의 법에서 아흔아홉 가지를 지켰지마는 하나 못 지켰으면 하나에게, 아흔아홉 가지 이긴 제가 하나에게 졌으니까 자기는 하나에게 패전해서 자기는 하나의 종이 된다 말이오. 하나 못 지켰으니까 그 하나에게 종이 돼.

바울은 이렇게 모든 투쟁과 경쟁에 대해서 승패의 기준을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이겨야 되지 몇 만 이기더라도 하나라도 남겨 놓으면 그거는 이긴 거 못 된다.

요렇게 바울은 기준을 잡았어. 바울과 같이 승패의 이 표준을 이렇게 두고 예수 믿을 사람은 믿고 ‘백의 하나만 이겨도 나는 이겼다’ 하는 그 표준으로 할 자 망할 행동 할라면 하고, 전부 거리가 너무 멀다 말이오. 거리가 너무 멀어 놓으니까 이 말씀이 여러분들 귀에 안 들려. 이러니까 이 설교가 안 돼. 해 봤자 소용이 없으니까, 뭐. 회개를 하고 들어야지.

승패의 표준은 ‘다 이겨야 이긴 것이지 다 이기기 전에는 이긴 것이 아니다.’ 요렇게 표준을 삼았고, 또 달음질을 하는 데에는 우리 신앙 생활하는데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달음질을 해서 뭐 신앙 생활을 이렇게 저렇게 전도도 열심히 하고, 또 목회도 열심히 하고, 설교도 열심히 하고, 또 연보도 열심히 하고, 뭐 회개도 열심히 하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분이 달음질하는 그 달음질의 표준은 무엇입니까? 달음질의 그 표준은 뭣이요? 표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님을 향해서 가는, 주님을 향해서 가는, 주님을 찾아가는, 주님에게로 가까이 가는 이것을 그는 달음질의 표준으로 기준으로 삼고 있다 말이오.

그러니까 뭐 빨리 가든지 더디 가든지 뭐 어떻게 재주를 부려서 간다 할지라도 이제 달음질하는 그 모양이, 달음질하는 모양이 뭐 세 발로 걸어가든지, 두 발로 걸어가든지, 기어가든지, 달음질하는 것이 동으로 서로 뭐 어떻게 맵시 있게 간다, 맵시 있게 가는 거고 뭐 그런 거 다 냅두고 어쨌든지 예수님 앞으로 가까이 나가는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달음질에 대해서는 그것만 기준으로 삼아.

그 사람 달음질하는 것을 천인 만인이 인정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찬성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인기가 올라가고, 뭐 교회가 부흥되고, 되는 그런 것을 자기가 지금 신앙 달음질의 목표로 삼지 안하고 그런 것을 목표로 삼지 안하고, 그거는 다 방편인데 그것은 목표로 삼지 안하고 자기 달음질의 목표는 꺼꾸로 가든지 옳게 가든지 어쨌든지 예수님을 향해서 가는 그것만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아무리 잘 가도 예수님을 향하여서 가는 걸음이 아니면 소용 없고 아무리 병신같이 가도 예수님을 향해서 가는 걸음이면 그거는 바른 걸음을 걷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바울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거와 같이 하지 안하고 향방을 똑똑히 목표를 정해 놓고 그 목표를 향해서 달린다. 그 목표는 뭐인가? 목표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도달하기까지, 우리의 구주가 되신 하나님에게 도달하기까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찾아가는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라간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의 달음질하는 그 신앙의 달음질, 이것도 비유입니다. 우리가 신앙 달음질하는 것, 신앙 생활을 이렇게 저렇게 열심히 하는 그 신앙 생활 하는 것을 여기 달음질로 비유했습니다. “거리끼고 무거운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 앞에 있는 경주를 경주하며” 그랬어.

그러면 우리 지금 달리는데 달리는, 달음질하는 달음질의 가치를, 달음질의 가치를, 달음질의 표준을, 달음질의 그 승패를 어디다가 두느냐? 아무데도 두지 아니하고 그 향방에다 둔다. 올바른 향방에다 둔다. 향방이 뭐입니까? 예수님을 향해서 달리는, 예수님이 우리 향방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하여 가는 거게다가 가치를 둔다. 거게다가 표준을 둔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목회를 열심히 합니다. 또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전도를 열심히 합니다. 모든 일을 열심히 합니다. 열심히 하는 그 열심히 하는 것을 비유해서 달음질로 비유했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 모든 일에 회개를 열심히 하고, 절제를 열심히 하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그 열심히 하는 그 상태를 가리켜서 달음질한다 이래 놨어.

뭐 또 졸지, 이거 뭐 참, 참 문제라. 여러분들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하고, 나는 이거 이 장년반 치워버리고 말이요, 나는 주일학교 지금, 주일학교 나는 부장 해 가지고 주일학교를 좀 하면 싶어요, 주일학교. 주일학교 학생들 가르치면 딱딱 알아맞춰요. 이 장년들은 못 알아.

이 달음질로 비유한 것은 우리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그것을 달음질로 비유했는데, 달음질은 자꾸 앞으로 걸어가는 것 아닙니까? 걸어가는 것인데, 우리 신앙 생활이 점점 자라가는 것이라든지, 배워가는 것이라든지, 닮아가는 것이라든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 가는 것이라든지, 또 이 세상이 보는 대로의 성공해 가는 것이라든지 그런 게 모두 달음질이라 말이오.

권찰들이 식구가 점점 늘어가는 그것도 달음질이요, 또 사업가가 사업이 잘되는 것도 달음질이요, 목회자가 교인들이 불어가고 교인들의 질이 향상돼서 자라는 그런 것도 다 달음질이요, 달음질인데, 달음질인데 바울은 이 달음질하는 달음질에, 신앙 생활 열심히 하는 이 열심에 대해서 그이가, 열심에 대해서 그분은, 신앙 생활의 모든 열심에 대해서 그분은 그 열심의 가치를 어디다 두며 열심의 표준을 어디다가 뒀습니까? 열심의 표준을 어디다가 둡니까? 자, 목회자가 열심히, 목회를 열심히 하는 데 열심히 목회하는 그 목회의 가치를 교인들이 많이 나와서 교회가 불어가는 거, 또 터를 사 가지고 예배당을 자꾸 잘 지어 가는 거, 또 연보가 많이 나와 가지고 이래 수억 수천 이렇게 나와 가지고 되어지는 거, 그런 것이 모두 다 이 신앙 생활하는데 성공 아닙니까? 그 성공 아니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예수 믿고 나서 보니까 사업이 잘돼서 부자가 된다. 또 뭐 한층 두층 자꾸 지위가 올라간다. 그런 거 다 성공 아닙니까? 성공하는데 그게 다 달음질 치는 거라 말이오. 신앙 생활의 열심히 하는 거라.

열심히 하는데, 바울은 달음질하면서 말이요, 이 사람은 달음질을 하는데 다른 사람은 뭐 걸어가는데 이 사람은 막 차를 타고 달음질을 하고, 이 사람은 자전차를 타고 달음질을 하고, 작대기를 뛰어가며 달음질을 하고, 깨금질로 달음질 하고, 이 사람을 춤을 추면서 달음질을 하고, 이라니까 그 달음질하는 것도 참 형형색색의 천태만상의 요모 저모 참 볼 만한 가치가 많고 달음질의 가치를 많이 두는데, 달음질의 가치를 이런 가치 저런 가치를 많이 두는데 바울은 아무것도 가치로 두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가치로 두지 않습니다. 않고, 다만 “향방 없이 내가 달리지 않는다” 내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향하여 달리는 요것만이 달음질의 가치지,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거는, 예수님을 향해서 기어가든지, 누운뱅이 모양으로 구불러 가든지 빨리 가든지 어찌 되든지 이 달음질의 가치는 예수님을 향하여 달리는 요것만이 가치로 삼았지 딴거 이런 맵시 저런 맵시, 이런 종류 저런 종류, 이런 인기 저런 인기, 뭐 이런 문채 저런 문채 아무것도 가치로 삼지 안하고 “내가 경주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하지 안하고 내가 향방 없는 것같이 달리지 안한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요걸 참 깨달아야 되겠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그분이 신앙 달음질의 승패는 어디다가 기준을 했느냐? 다 이겨야 된다.

다 이겨야 된다. 이거 우리는 어누리를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어. 건설구원 이루는 거는 보면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내가 보지 못했다” 온전한 행위라야 건설구원이 되는데 온전한 행위 아닌 것도 건설구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 돼.

우리가 이제 우리 신앙 생활에서 ‘합격’ 되는 것은 어떤 게 합격이 돼? 합격 표준을 어떻게 뒀습니까? 합격 표준을 어째 뒀습니까? 구십구 점을 표준으로 했습니까 이 바울은 팔십 점을 표준했습니까?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상받는 이는 하나뿐인 줄 너희들이 다 알지 못하느냐? 너희들이 다 아는 바라.” 이랬으니까 바울이 시험에 대해서 점수는 득점은 몇 점으로 표준했습니까? 구십구 점으로 했어? 백 점! 백 점! 바울은 그가 승패의 표준은 백 점으로 표준했어.

백 점이라야 그거 합격이지, 백 점이라야 합격이지 그거 구십구 점은 하나는 틀린 합격이라 그거요. 하나는 틀렸다, 하나는 틀렸다 그말이오. 다 맞은 거 아니라.

합격이 아니야. 하나는 틀렸다 말이오. 세상에서 인정하는 것은 뭐 할지라도 그거는 ‘틀렸다’ 구십구 점은 틀렸다 말이오. 구십구 점은 틀렸다 말이오. 자, 구십구 점은 틀렸다 말입니까 맞다 말입니까? 틀렸다 말이오. 바울은 신앙 승패의 표준을 이렇게 뒀다 그말이오. 이렇게 뒀다. 그러면 바울이 둔 그 표준과 기준이 그것이 바울 사람이 둔 것입니까 성령이 뒀습니까? 요거 지금 우리가 결정해야 돼.

또 바울은, 달음질하는 데에 이 모양으로 저 모양으로 자꾸 이래 지금 달음질을 하는데, 뭐 별별 형태를 가지고 조화를 부려서, 뛰며 가는 사람, 절며 가는 사람, 또 차 타고 가는 사람, 어째 가더란대도 그 달음질하는 것이 주님을 향해서 가는 그 달음질이면 가치 있지마는 주님을 향해서 가는 달음질이 아니면 기차를 타고 뭐 비행기를 타고 가도 소용 없다. 더 탈선 많이 되고 소용 없다. 그러면 그 달음질에 기준과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가는 요것만이 가치로 삼고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 여기 깨달을 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들이 그래 가지고는 안 돼요. 아주 멀었어요.

하나님께서 자꾸 주셔서, 아마 재림이 가까운 거 같애요. 하나님께서 가속도로 우리에게 진리를 첩경을 가르쳐 줍니다. 제가 요새 이렇게, 제가 깨닫는 대로는 하나님이 굉장한 우리에게 첩경을 가르쳐 주시고 아주 뭐 어제가 옛날로 가르쳐 주십니다. 어제가 옛날.

이 설교록 나가 봐도, 설교록이 나가도 이 목사들이 봐야 뭐인지 모릅니다. 모르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암만 읽어 봐도, 읽어 봐도 안 들으면 모를 것입니다. 그만치 벌써 너무 현재 탁월하게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절 이하에 있는 이 말씀도 굉장한 깨달음입니다. 요거, 이렇게 저렇게 하는데 여게는 보면 바울이 정한 기준과 표준을 지금 여게 가르치고 있어.

모든 신앙 생활의 기준과 표준을 지금 가르치고 있다 말이요, 가르치기를.

다른 데 주석 가 찾아봐요. 백권 천권을 찾아보라 말이요, 있는가 없는가? 그러니까 도무지, 이래 놓으니까 다른 사람이 나 미쳤다 하지. 자꾸 여러분들이 못 알아들으니까 자꾸 할 수 없어 안 알아들으니까 여러분들 때문에 ‘이거 그렇게 시시하게 볼 게 아니다. 볼 게 아니고 이거 깊은 깨달음이요 높은 깨달음이요 정확한 깨달음이요 지름길이 되는 이 깨달음을 우리에게 빨리 가라고 지금 가르쳐 주신다.’ 이래도 못 알아들으니까 자연히 미친 말과 같은 말 한다 말이오.

다른 데 이거 뭐 무슨 주석이니 뭐이니, 무슨 주석이니 뭐 ‘칼빈이 말했다’ 칼빈이 말해야 알아듣지 칼빈이 말 안 하면 안 듣는다 그말이요. 그러니까 ‘칼빈 주석에 가 찾아봐라, 어떤고?’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뭐이냐? `저것 또 칼빈보다 낫다고 제가 또 자랑한다.’ 저 자랑하는 미친 이 말이요, 저 자랑하는 거는 미친 말이라. 저 자랑하는 건 미친 말.

내가 미친 말인 줄 알고 합니다. 미친 말인 줄 알고, 이 말하는 데 욕이 올 줄 알고, 미친 말이오. 사실 그런 걸 그렇다 하더란대도 다른 사람이 지나치게 낫게 생각해도 신세 가는 것이고 또 사실 있는 데라도 다 있는 가치를 다 알고 다른 사람이 세상에서 높이 알면 그것도 그만 다 하늘에서 얻을 게 하나도 없고. 뭐 이거는 뭐 백방으로 이거 망하는 일이라.

백방으로 망하는 일인데 이 말을 왜 하느냐? 내 자랑으로 말하는 거 아니라.

여러분들 때문에 지금 말하고 있어. 여러분들 때문에 내가 미친 자 되고, 내가 교만한 자 되고, 내가 자기 자랑, 자긍하는 자가 되고 만다 그말이오. 공연히, 살리기 위해서.

달음질하는 데에는 달음질하는 데에 가치를 사람들이 뭐 여러가지를 삼지 안해요, 달음질하는데? ‘그 교회가 지금 부흥이 됐다, 몇천이모인다, 몇만 명이 모인단다.’ 그것도 가치로 삼고, ‘거게는 뭣이 장관이’ 제가 저게 ○○교회 가니가 그 교회에 장관이 다섯이더구만요. 그때 장관이 다섯이라, 총장이 서이고.

그때는 대학이 그리 없었어요. 총장이 서이고 장관이 다섯이라. 저 ○○교회 ○○○박사 있던 ○○교회.

이랬는데 다른 데는 내가 토요일만 하고 오는데 거게는 가 가지고 ‘어짜든지 내일 주일 좀 여기서 좀 계속 좀 설교를 해 주고 가라’고, 처음에 약속은 토요일 아침까지인가 이랬는데 하도 그래 쌓아서 그 속에 슬그머니 마음이 있다 말이오.

왜냐 하면은 이 장관 양반들은 안 와. 총장만 아니라 장관들 다 안 오고 몇은 왔다 갔다 하고 한번씩, 그렇츰 높은 양반이 거기 잘 오는가? 총장도 그런데.

‘이분들 때문에 내가 여기 좀 내일 한번 좀 있어 괜찮다’ 싶어서 있었어요.

그날 있어 가지고 그날 장관들 다 나왔어. 총장 다 나왔어.

어떻게 바싹 빠사버렸어, 그만. 그날. 콩가루 되도록 바싹 빠사버렸어, 그만.

하나님 말씀이 빠수지, 그거. 하나님 말씀이 빠수지, 내가 빠수는가? 이라니까, 이래도 뭐 참 길가바닥이라. 대패침으로 찔러도 꿈적도 안 해요.

이라니까 떡 나중에 마치고 난 다음에 와서 인사하면서 ‘아이구,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빙글빙글 웃으면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나는 울 줄 알았는데 울지 안하고, 그리 안 하면 막 멱잡이를 거머쥐고 싸울 줄 알았는데 싸우지도 안하고 울지도 안하고 빙글빙글 웃으면서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예사롭게 해 버리고 말아요. 어떻게 마음들이 강퍅한지.

그런 것을 가치로 알아요. 교회의 가치 신앙의 가치를 그런 데다 두고, 신앙의 가치를 교인 많이 모이는 거, 돈 많이 모이는 거, 또 사업 잘되는 거, 이런 것 저런 것 모두가 신앙의 달음질의 가치를 여게 저게 모든 데다 두는데 바울은 신앙의 달음질의 가치를 어디다가 두었어요? 어디다가 두었어요? “내가 달음질을 향방 없는 자와 같이 하지 아니한다” 자기가 하나님을 향하는 목표, 달음질의 목표 고게만 가치를 뒀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을 이렇게만 가치 두면 되는데 이렇게 가치를 두지 안해요. 엉뚱한 데다가 가치를두기 때문에, 믿던 사람이 엉뚱한 데로 빠져버리고, 교인 모으기 위해서 빠지고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다 빠져 버리고 이제, 나중에 가다가 보면은 중간에 이거 보느라고, 이거 보느라고, 달음질하다가 여기 구경 좋은 거 있으니까 이거 보느라고 이리 가 버리고 저거 보느라고 저리 가 버리고 다 옆으로 다 새버리고 나중에 예수님 앞에 갈 때 보니까 다 떨어져버리고 혹 몇 사람밖에 안 가.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해요? 과거에도 보니까 가다가 다 떨어져버리고, 신사참배 그 관문도 통과하지 못하고 거기까지도 못 왔어. 거게까지도 못 오고 다 떨어져버리고 그뭐 헛일하고 말지 안했어요?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자와 같이 하지 않는다” 요 진리를 여러분들이 깨달아서 여게 대해서 울어야 합니다, 요 무슨 진리인지. 뭐인지.

자기 신앙 전생활의 열중하는 모든 신앙 생활의 그 열중하는 신앙의 가치를 주님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고게다만 가치를 둬야 되는데 고게 가치 두지 안하고 엉뚱한 데 가치를 둔다 그말이오. 다 그만, 이리 탈선 저리 탈선 다 돼 버리고 말았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은」 그러면 싸우기를, 이것도 내나 그말이요, 내나. 우리 신앙의 전투.

전투하기를 자기가 이 신앙 전투하기를 공산주의를 이겼다. 우리 신앙 전투해서 공산주의를 이겼다, 이뭐 진리를 보수했다, 진리를 보수했다, 개혁을 했다, 개척 교회를 얼마나 세웠다, 신앙 투쟁을 얼마나 해서 순교를 했다, 뭐 했다 이라지마는 바울은 전투의 그 표준을, 전투의 기준을, 전투의 가치를 어데다가 뒀습니까? 전투의 가치를 어데다가 뒀어? 내가 전투하기를 공중하고 싸우지 안했다. 적이 없는, 적은 모르고 적은 발견도 못하고, 공중하고 싸우면 적을 바로 발견했소 못 했소? 칼을 들고 공중을 자꾸 때립니다. 총을 공중으로 자꾸 쏘고 있습니다, 적이 눈에 안 보이니까. 그게 전투 아니라. 내가 싸울 때에 허공을 치는 거와 같이 하지 않는다 그말은 내가 원수를 발견 못 하고 이 헛된 전투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 바울 너는 어떤 전투하면, 참된 전투는 어떻게 너는 하고 있느냐? 그러면 너는 뭣을 적으로 삼아서 싸우고 있느냐?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라” 내 마음과 고기덩어리의 기능, 내 심신의 기능, 요 심신의 기능 요것이 피와 성령과 진리와, 또 하나 뭐입니까? 몇입니까? 몇 가지? 네 가지 뭐? 피, 또? 성령, 또? 진리, 또? 중생된 영.

내가 싸우는 것은 요 심신의 기능 요것이 피와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영에게 복종시키는 요것이 나의 전투의 핵심이라. 요것이 나의 전투의 목표라. 요것이 전투의 기준이라. 요것이 전투의 표준이라. 요것이 전투하는 목표라. 요게 전투의 가치라 이렇게 한 것입니다.

자기가 천하에 개혁을 하고, 뭐 개혁 운동을 하고, 진리 운동을 하고, 보수 운동을 하고, 뭐 무신론 대적하고, 공산주의를 대적하고, 맥켄타이어씨는 공산주의를 대적하는 그 반공이 첫째, 보수가 둘째, 또 셋째는 뭐이더라? 누가 기억하고 있어요? 좀 기억 좀 해. 맥켄타이어씨가 세 가지 내세웠는데 처음에는 뭐이냐 하면 반공, 하나는 또 진리 보수, 또 하나는 뭐이야, 저 ○○○목사? ○○○목사, 뭐라? 맥켄타이어씨가 그때 서이 내세우지 안했어? 아이구 그뭐 하나 있었는데.

반공, 또 진리 보수, 복음 전파 요렇던가, 뭐 아마 그 서이가 뭐 어찌 됐었어.

이랬는데 그거 다 잘못 싸우는 것이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그거 다 잘못 싸우는 것이라.

뭐 ‘우리는 개혁 운동해서 개혁을 해서 개혁하자. 개혁하자.’ 개혁 운동을 하고 뭐 어짜고 또 복음 운동을 하자, 세계 보수파가 되자, 우리 무슨 우리 진영 총공회 진영을 지키자, 합동측을 지키자, 또 무슨 칼측을 지키자, 무슨 고신을 지키자, 이제 교파를 지키자 하는 그것이 싸움의 핵심이 아니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싸움의 핵심은 뭐냐? 네 마음의 기능과 몸의 기능을 악령 악성 악습 세상이 정복해서 그것들의 종이 되어 있으니까 거게서 해방시켜서 이 심신의 기능을 피 성령 진리 중생된 영에게 복종시키는 요것이 나의 전투라. 내 전투는 이 전투이기 때문에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이것을 나의 전투로 삼고 있다 말했어. 왜? 이렇게 안 하면 다른 사람에게 전파한 후에 도로 내가 버림을 당할까 함이라.

제 심신의 기능이 네 가지 세력에게 복종했으면 그는 영생됐지마는 이거는 싸우지 안하고 공연히 지금 세계로 돌아다니며 뭐 동양 복음화 뭐 세계 선교회 막 이름 많소. 무슨 회 무슨 회 선교회 많이 이래 쌓는데 네가 싸우는 것은 공연히 허공을 치고 있다. 네 전투는 허공을 치고 있다. 허공을 치지 말고 똑똑히 싸워라.

네 심신의 기능이 악령 악성 악습 세상에게 복종하고 있는 거게서 뺏들어서 죽기 전에 네 심신의 기능이, 마음의 실력이 몸의 실력이 이 모든 기능이 진리에 복종하고, 영감에 복종하고, 대속에 복종하고, 중생된 영에게 복종하는, 요 복종시키는 이 전투를 해야 네 알속이 차려지고 네게 유익이 있지 딴거는 다 헛일이라 그말이오. 알아듣겠습니까? 이해 됩니까? 저 뒤에, 이해가 됩니까? 저 뒤에, 이해가 됩니까? 진리요, 진리. 진리. 삽니다.

바울의 신앙의 이 표준 기준을 우리가 배워 가지고 이대로 신앙 생활 해야 되지 다 이렇게 모두 껍데기 생활, 이걸 가지고 모든 사람의 신앙 생활 자기의 모든 신앙 생활을 살펴보면은 다 껍데기라 그거요.

그런데 여게 말씀하시기를 그런 말씀 있어요. 여게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절제하나니」 절제를 해야 이기지 절제 안 하면 못 이기요. 절제라 말은 조절이라 말이요, 조절. 잘 조절. 조절을 바로 조절을 잘해서 나열을 잘하고 잘해야 돼요.

절제를 하는 데에는 절제를 앞서서 절제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뭐이냐 하면은 계산부터 먼저 해야 돼. 알겠습니까? 계산을 해야 절제를 해요. 계산을 해야 ‘요거는 요게는 넘어갔다. 요게는 조금 적게 갔다. 요게는 좀 많이 가야 되겠다.

이거는 하나도 안 가도 되는데 백지 허비다, 낭비했다.’ 이래서 계산할 줄 알아야 됩니다.

첫째는 네 가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소유의 종류가 몇 가지인지? 소유의 종류가 몇 가지인지? 알겠어요? 나는 지식도 가지고 있고, 총명도 가지고 있고, 지혜도 가지고 있고, 정신도 가지고 있고, 감정도 가지고 있고, 돈도 가지고 있고, 명예도 가지고 있고, 지위도 가지고 있고, 명철도 가지고 있고, 배짱도 가지고 있고, 담력도 가지고 있고, 열심도 가지고 있고, 건강도 가지고 있고, 꽉 찼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소유의 종류가 몇인지 계산하라. 또 그 종류의 양이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그 양을 계산하라. 또 그것을 써야 될 곳이, 그거 어디다가 투자할래? 이 두 가지를 어디다가 투자해야 될란지 투자할 곳이 몇 군데냐? 쓸 군데는 열 군데 있는데 한 군데뿐인 줄 알았으면 한 군데 다 써 버리면 헛일 했지 어짜겠소? 네 모든 소유를 쓸 수 있는 그 용처가, 투자처가, 투자할 그 투자할 곳이 몇 군데이냐? 고거 계산해라. 또 투자하는 데는 많이 하고 적게 해야 될 데 있으니까 네가 투자하는 그 양을 계산해라. 이 네 가지를 해야 돼. 이 네 가지를 계산을 해야 돼요.

이 네 가지는, 이거 계산하면은 이 네 가지는 지금, 있는 거 어데 어데 쓰면 된다 그거 아니요? 쓰면 된다. 어떻게 쓰면 된다. 어데는 많이 쓰고 어데는 적게 쓰고, ‘이거 얼마밖에 없는데, 쓸 군데가 백 군데인데 백 군데 나눠 붙일 것 없다. 백 군데 나눠 붙이지 말고 한 군데로 써 버리고 말아 버리자.’ 헛일이야. 이거 작아도 적은 대로 백 군데, 많아도 많은 대로 백 군데, 백 군데면 백 군데 다 갈라 붙여야 되겠다 말이오.

자 그러면, 이제 소유의 종류가 ‘나는 뭐뭐 가지고 있다. 뭐뭐 가지고 있는데 이 양이 얼마나 되느냐? 뭣은 양이 얼마다. 나는 지식이 나는 박사이기 때문에 지식은 양이 많다. 또 나는 무식하기 때문에 지식에 대해서는 무식하니까 양이 적다. 나는 돈에 대해서 양이 많다, 양이 적다.’ 자기의 소유의 종류와 그 분량을 네가 세밀히 조사해 가지고 정확히 네가 알고, 그다음에 그것을 몇 군데나 투자해야 될런지 투자처를 네가 똑똑히 알고, 그러면 투자처가 몇 군데인데 어데 얼마 하고 어데 얼마 하고 그 양을 네가 또 정확히 계산해라. 어데는 얼마 투자하고 어데는 얼마고 그렇게 계산을 또 해라. 이거는 쓰는 방법이라. 쓰는 것만 계산해. 그런데 쓰는 데도 잘못 쓰면 안 된다 말이오.

그라고 난 다음에는 ‘네가 써도, 그거는 계산을 바르게 써도, 그렇게 잘써도 네가 동기가 틀리면 안 된다. 네가 네 주관에서 하면 안 된다.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주님으로 인해야 된다. 동기가 주님으로 인하여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님으로 인해야 돼.

또 목표가 발라야지. 목표는 뭐인데?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뭐이냐?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기쁘시게 하며 그를 영원히 즐겁게 하는 것이니라. 그것이, “떠나든지 거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노라” 목표가 요게 목표라.

또 방편은 뭐이냐? 신구약 성경대로 방편을 써야 돼. 신구약 성경대로. 방편은 신구약 성경대로가 아니면 또 안 된다 그말이오. 요걸 다 계산을 대야 돼요.

또 결과가 뭐이 이루어져야 되느냐? 결과는 주님을 영화롭게 기쁘시게 하는, 주님의 형상을 닮아서 주님의 몸이 이루어지고 주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주님의 지체가 되고 그게 이제 실상이 그게 이루어야 돼.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의 종이 되고, 주님의 성전되고, 주님의 지체되고, 주님의 몸되고, 주님의 신부되고, 주님의 제사장되고, 주님의 선지자되고, 주님의 왕되고, 영광의 찬미되고, 주님의 형상되고 이게 돼져야 된다 말이오. 이제 이루어진 그 결과는 이게 돼야 돼.

이게 되면 다냐? 아니야. 이게 돼도 다섯째는 그리스도의 심판에 통과가 돼야 돼.

알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심판에 통과가 돼야 돼.

이러니까 이런 줄 알고, 그라면 계산에 계산하는 데에 계산에 필요한 것이 이거 몇 가지입니까 계산의 필요한 것이 몇 가지요, 자 헤아려 보소. 계산에 필요한 것이 몇 가지입니까? 알아야, 계산을 해야 되는데 그 계산 그것까지를 다 포함시켜 가지고 계산해야 돼요.

계산할 것이 몇 가지지?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몇 가지? 몇 가지? 이래 이래 이래. 아홉 가지. 아홉 가지. 아홉 가지 아니요? 처음에 네 가지 나중에 다섯 가지, 아홉 가지라.

아홉 가지를 이것을 세밀히 조사해서 계산해 가지고 네가 절제하라. 어데는 더 쓰고 덜 쓰고 다 계산해 봐라. 이라고 난 다음에 네가 아홉 가지를 다 포함시켜 가지고 다 모든 것을 다 배정을 하고 계획을 하고 계산을 하고 예산을 다 대라.

그런데, 네가 과거에 오늘까지 산 모든 생활을 이제 이 계산법을 가지고 한번 따져봐라. 이 계산법을 가지고 따져봐라. 네가 얼마나 죽었는가? 얼마나 썩었는가? 얼마나 헛일 했는가? 얼마나 불쌍한가? 얼마나 가련한가? 계산해 봐라.

이래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절제 없으면 헛일입니다. 알겠습니까? 이제 시간 다 돼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단단히 기억하고, 어짜든지 지금 달음질을 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는 길을 밝혀 주니까 여게서, 몰라서 사람들이 비겁해요. 아는 것이 힘입니다. 알면 다 돼요. 알면 다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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