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5 18:34
구원의 성장성 전진성 향상성
1987. 1. 11. 주일오후
본문:디모데후서 3장 15절∼17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 성경은 어떠한 것이냐, 어떤 역사를 하느냐 하는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을 가리켜서 성경관이 바르다 그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어떤 그 지식을 갖추고 통달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지식에 하나님관이 바르지 못하고 성경관이 바르지 못하고 자기관이 바르지 못하면 그는 멸망합니다. 모든 지식이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중에 제일 필요한 지식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과 성경을 바로 아는 지식과 자기를 바로 아는 지식이 제일 유효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는 그런 지식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성경을 이렇게 존대하며 상대하는 자는 이 성경 자체가 그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합니다.
성경을 무시하는 자를 성경이 그 사람을 무시하고 멸하시고 성경을 존대하면서 모시는 자에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독자적인 전능의 권위를 가진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이 나에게 모든 것을 바로 가르쳐 주는 한 지식으로만 생각하고 이 성경 자체에 지극히 큰 능력이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성경관이 삐뚤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오전에는, 우리가 할 일은 이 구원을 얻는 일, 구원을 취하는 일, 구원에 도달하는 일 이것이 제일 중요하고 구원에 상관없는 일은 사람이 할 필요가 없고 하는 것은 다 속는 일이라 그렇게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배움의 때도 있고, 또 사업하는 때도 있고, 또 가정 생활하는 때도 있고, 사회 생활, 또 세계 생활, 문화 생활 별별 각종 각층의 생활들이 있지마는 그 모든 것은 택자라면 이 구원을 위해서 있는 모든 분야요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은 아닌 것을 말했습니다.
이런 저런 모든 각종의 자기 현실이라는 분야는 그것이 내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기 현실이라는 각종의 분야는 그 속에 보이지 않는 구원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구원 이것을 얻기 위해서, 이 구원을 잡기 위해서, 이 구원을 내가 입기 위해서, 이 구원을 든든히 가지고 빼앗기고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하는, 이 구원이 자기 현실 분야에 알곡이 되어 있고 이것 구원 외의 것은 다 배설물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배설물이라 말은 찌끼라 말입니다. 그런 것은 뭐 똥 찌끼나 밥 찌끼나 다 쓸모 없어 더러워 버리는 그 모든 쓰레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지 기독자로서는 자기 현실에서 이 구원에 주력하지 안하고 구원은 잊어버리고 그 현실 각양의 자기 분야만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그 찌꺼기 소용 없는 거 붙들고 있는 껍데기 생활이요 다 속는 생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사활 대속으로 우리에게 주신 일곱 가지 구원입니다. 일곱 가지 이 구원은 이 구원 받은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 되고 이 구원을 받아 가진 사람은 범사에 완전 행위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어서 주님이 이 일곱 가지 생애를 완전케 하셨음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것을 다 당신 것을 삼으시고 이 완전케 하신 이것을 또 우리에게 주어서 이 구원을 받는 자도 이 구원을 바로 이루어 가지면 예수님이 완전하심으로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거와 같이 그 사람도 완전자가 앉는 주님의 보좌에 같이 앉아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그 나라에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영원히 왕노릇합니다.
영원히 왕노릇한다는 것은 세상 왕과 좀 달라서 세상 왕은 왕이 모든 약한 자 낮은 자를 통치하고 그자를 복종시키고 그자를 이용하고 하는 것이 세상 나라지마는 하늘나라는 정반대입니다. 통치한다는 것은 권력으로 압도로 통치함이 아니고 그 나라에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되고 또 위에 있는 자가 아래 있는 자를 섬기는 봉사의 나라이며 사랑의 나라인 것입니다.
마치 가정에서는, 사랑이 있는 그 가정에서는 제일 그 가정에 세력 있고 실력 있고 모든 것을 부요하게 가진 그가 그 가정 모든 식구들에게 종노릇하고 봉사하고 모든 걸 책임져서, 식구에게 섬김 받는 게 아니라 식구를 섬겨서 자기로 인하여 그 가족이 온전해지고 행복되어지는 그것을 도모하고 책임지고 하는 것이 사랑의 그 가정의 제도인 거와 같이 하늘나라는 이러한 나라입니다.
이래서 마태복음 20장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세상 나라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압도하고 작은 자는 큰 자의 종노릇하는 것이 세상 나라이지마는 너거 나라는 그렇지 않고 정반대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이 일곱 가지 구원을 이루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말하면 일곱 가지 구원을 완전히 이룬 것은 모든 피조물과 창조주에게 완전 복종하는 일이라 말이요, 완전 봉사하는 일이라 말이요, 완전히 섬기는 일에 완성하는 것이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데에 온전을 이룬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이 일곱 가지 구원은 평가적으로 존귀한 구원이요 또 모든 존재들이 사모적으로 존귀한 나라입니다. 이 세상 거와 같이 그렇게 세력으로 악으로 독으로 권세로 욕심으로 이렇게 으뜸되는 나라가 아닌 나라요 평가적으로 으뜸된 나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지마는 평가적인 사랑의 나라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카톨릭 신문을 보니까 바오로 이세의 그 교황이 팔십칠년 메세지를 선포했는데 이제 사랑으로 가지고 모든 이 전쟁을 막고 이렇게 평화를 일으키자 하는 그런 것으로 말을 했읍디다. 했는데, 그분이 얼마 전에 우리 한국에 와서 다녀가서 선포한 것은 아주 사랑과 자비 이 박애의 말을 많이 증거하고 갔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존대하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말하는 데에 예수님의 이 대속의 공로의 역사가 없는 사랑은 배암의 사랑이요 사람을 죽이는 사랑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말을 하면서 사랑이 없는 것은 그것이 율법이 되고 생명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이걸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랑이 민족을 살리고 또 시대를 살리고 국가를 살리는 것으로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하지마는 성경적으로 보면 그분이 우리 한국에 와 가지고 생명에 유익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이 배암의 사랑을 강조하는 그런 일이 된 것이라고 그렇게 평가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대속이 없는 사랑을 말했기 때문에 그거는 인간 사랑 첫째 아담 하와가 피차에 사랑함으로 범죄하고 타락해서 멸망한 그 사랑이요 둘째 아담의 사랑은 아닙니다. 첫째 아담의 사랑이요 둘째 아담의 사랑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잘 구별하지 안하면 이 사회라는 이 조류에, 이 사회라는 물결, 세계 문화라는 이 인간 지식의 물결 속에 파묻혀서 몰사하기 쉬운 것입니다.
여게 이 지극히 큰 구원을 얻는데 이 구원이라면 별게 아닙니다. 이 구원이라면 온전한 사람되는 것이요 온전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는가? 온전한 사람의 표준이 무엇인가? 온전한 사람의 표준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족히 여기시고 모든 피조물 크고 작은 모든 것들에게 영원히 가도 만족과 유익을 줬지 추호의 피해도 끼치지 않는 그것이 온전한 행위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활의 십자가의 이 대속의 구원 생활만이 이 일이 가능한 것이지 이 외에 다른 생활로서는 이런 일에 근방에 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활의 이 대속의 일곱 가지 구원이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아는 것으로 자라가야 됩니다. 아는 것으로 자라가면 그 사람이 어데까지 갔든지 거게서 또 연구하면 또 알아질 것이고 또 아는 것이 또 자라갈 것이고 영원히 억억만 년 지나고 난 다음에도 알고 또 자라가고 하는 것은 끝이 나지를 않습니다.
이 구원을 이렇게 존귀한 구원을 우리가 가지는 것은 이 구원을 내가 만들어 가지고 가지는 것이 아니고 이 구원은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과 진리가 이 구원을 조성해 놓은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피조물의 요소로서는 이 구원은 털끝만치도 이 구원 요소는 이루지를 못합니다. 이것은 피조물을 탁월한 완전자의 요소로서만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이 구원을 우리가 이룰라고 하는 게 아니고 이 구원을 이루어 놓으신 것을 우리가 받아 가질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요것이 잘 구별돼야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만드느냐? 하나님과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과 진리가 이 구원을 완전히 만들어 놨습니다. 완전히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곧 주일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처음에 우주와 영계 것을 다 만드시고 이 창조하는 역사가 다 끝났을 때에 그때에 안식일을 주어 가지고 모든 지음 받은 것들이 거룩함과 복받는 일을 베푸시는 날로 정해 주셨습니다. 이랬는데 두번째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진동되지 아니할 영원 불변 완전의 이 나라를 창조하시고 이 창조된 자들에게 은혜 베푸시는 날을 가리켜서 주일날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주일날은 예수님의 두 가지 죽으심으로써 이루어 놓은 구원 다섯 가지에다가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구원 두 가지를 한테 합해 가지고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으니 이 완전한 구원은, 이 구원은 진동되지 아니할 나라이며 영원 완전한 나라입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서 영계 것과 물질계의 것이 다 통일되는 이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창조는 완전이 됐는데 완전이 창조해 놓으시고 창조를 마치고 이 창조된 것을 이 창조의 소망을 가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것으로 실상 받아 가지고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창조된 이 구원을 택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역사하는 것이 주일날 받는 은혜요 또 주일날 받은 것 가지고 엿새 동안에 실험하고 또 연습하고 또 연성하고 해서 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구원을 자기가 이루어 가진다고 생각하는 이 미혹들이 많이 있는데 이 미혹에 빠지지 안해야 됩니다. 아주 이것은 깊은 데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을 순전히 은혜로 공짜배기로 받는 구원인데 이 구원 받는 것은 꼭 제가 이 구원을 이루는 거와 같은 그런 노력을 가지고 이 구원을 받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가 힘쓰니까 구원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고 힘을 안 쓰니까 이 구원이 자기에게서 멀어지고 하니까 이 구원은 자기의 힘씀으로 된다고 이렇게 생각을 해서 과거에 그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사람은 순전히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 얻는다 그렇게 말을 했고, 또 알미니안주의 곧 감리교 이런 사람들은 사람과 하나님이 힘을 합해 가지고 이 구원을 이룬다고 그렇게 그 교리를 제정했고, 루터파는 하나님이 구원 주시는데 사람들이 이 구원을 거부만 하지 안하면 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깨달음을 가졌고, 칼빈은 전적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어 가지고 은혜로 주시는 것인데 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라 그렇게 말해서 교파마다 교리와 신조가 다릅니다.
그런데 오늘에는 벌써 칼빈주의의 교리와 신조가 정확하다 하는 것을 거의가 다 통일되다시피 통일이 됐지마는 사람들이 믿음이 모자라서 지금도 이리저리 흐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은 이렇게 존귀한 구원을 우리에게 은혜로 줍니다. 이 구원을 사람들이 자기의 노력으로 이 구원에 털끝만치라도 그래도 인간의 노력이 들어야 되지 않느냐? 인간의 노력이 털끝만치라도 이 구원에 가합해 가지고, 가해 가지고 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람은 그 신조와 교리를 회개를 해야 됩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깨달음의 교리인 것입니다.
제가 그 사람의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스폴트니 했는가 누가 하는 그 사람이 말하기를 이 구원에 대해서 실나끈, 실 한 오라기만한 것이라도 인간의 것이 들어 가지고 있으면 이 구원은 다 망하고 안 된다. 순전히 완전자 전지 전능자 이분이 만든 것만이 이 구원이 되지 이분 외에 사람이 만든 것을 털끝만한 것이라도 그게 섞여 놓으면 그 구원이 더러워서 멸망하지 그 구원이 유지 안 된다 그런 말 했습니다.
그것은 이 구원에는 인적 요소가 하나도 없고 전부 신적 요소로만 된 것을 인적 요소는 신적 요소로 된 것을 다만 은혜로 받는 그 노력에 지나지 못한다. 그게 뭐이냐? 믿음의 행위인데 그것이 인간은 유한한 사람이라 이 구원을 만들지는 못하지마는 이 구원을 성경이 가르친 대로 바로 알고, 또 이 구원을 확실히 믿고, 이 구원을 얻어 가지려고 애를 쓰는 그것이 자기의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면은 이 구원을 확실히 아는 증거요 믿는 증거요 이 구원을 받을려고 노력하는 증거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믿는다고 해도 이 네 가지를 다 기울여서 이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지 안하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이 구원을 믿지 못하고, 믿는다고 해도 천분지 일 만분지 일 백분지 일 그렇게 믿는 사람이지 확고히 이 구원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언행심사의 그 모든 행동에서 이 구원을 많이 믿고 적게 믿고, 이 구원에 가깝고 멀고, 이 구원에 양을 많이 자기 것을 삼고 적게 삼은 사람의 그 표현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순전히 믿음으로만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으로만 얻는데 그러면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말은 이 네 가지를 다해서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 네 가지를 다해서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네 가지 다해 가지고 뭐할 건가? 네 가지 다해 가지고 믿는 일 합니다.
그러면, 믿는 일이 몇 가지인데 이 마음, 목숨, 힘, 뜻 다해서 믿는 일 하는가? 믿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는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대로 이 구원의 종류와 이 구원을 설정하는 데에 어떻게 누가 누구가 힘을 들여서 이 구원을 설정했는 이 구원의 설정의 그 내용을 알고, 또 이 구원은 천지는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이 구원은 확고부동의 완전 실존이라는 것을 자기가 믿고 인정을 하고, 그 다음에는 이 구원을 자기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것이 되어 있으니까 이 구원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이 구원을 뺏기지 안할라고 이 구원을 놓지 안할라고 이 구원 생활을 하는 그것이 믿음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알고 인정하고 이 구원 생활을 하는 것이 그것이 합해서 믿음인 것입니다.
자기가 구원 생활한다고 구원이 만들어지는 거는 아니고 구원 생활하는 것은 구원을 뺏기지 안하고 구원의 그 효력을 누리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혜택을 자기가 얻는 것이요 이 구원의 혜택으로 자기 밖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봉사하는 일이 됩니다.
이 구원을 입고 구원으로 사는, 자기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구원 가지고 구원 생활을 하는 그것이 바로 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모든 천상 천하의 피조물에게 유익을 끼쳐 주는 사랑의 봉사를 하는 것이요, 그것이 자기가 모든 피조물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요, 모든 피조물을 다 구원되게 복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모든 피조물들이 알 때에는, 지금은 모르지마는 모든 피조물이 이 내용을 알고 난 다음에는 주님에게 대해서 말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참 우리의 주시라. 이래서 모든 것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다 그 앞에 주라 칭하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그런 생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믿음으로만 얻는다. 믿음으로만 얻는다 하는데 이 믿음이라는 건 꼭 세 가지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로 아는 것, 그 다음에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 다음에는 행하는 것.
그러면 이 구원을 알고, 이 구원을 자기 것 된 것인 것을 인정하고, 셋째로 이 구원이 자기 것 됐기 때문에 이 구원을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구원을 뺏기지 안하고 이 구원을 자기 구원이 되었으니까 이 구원이 사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곱 가지를 바로 알고, 바로 아는 데는 이 일곱 가지는 어떤 힘들인 구원인가, 이 일곱 가지 구원을 이루는 데는 얼마나 힘이 들었는가, 어떤 이가 힘을 들인 건가? 이것은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이 우주와 영계를 창조했지마는 이 구원은 벌써 일으키는 데에 영원한 때 전부터 시작해 가지고 이 구원을 이루는 역사 중에 하나가 예정이요, 이 구원을 이루는 역사 중에 하나가 창조요, 이 구원을 이루는 역사 중에 모든 것을 보존하는 것이요, 또 이 구원을 이루는 역사 중에 하나가 보존된 모든 것을 거머쥐고 섭리하셔서 하나님이 관할하시고 모든 것을 운영하셔서 십자가의 사활의 대속을 베푸시고 오늘에 이 복음 운동을 이렇게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다 이 구원을 이루는 역사요 이루어 놓은 구원을 우리 각자들에게 지금 나눠 주는 역사입니다.
이래서, 완성되어 있는 이 구원을 우리 각자들에게 나눠 주는 그 책임을 지웠는데 그 책임자가 있으니 보증으로, 이 책임을 보증하는 책임 보증자로 뭘 줬다 했습니까? “성령을 주셨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이 보증을 안고 와 가지고 이 일을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은 진리로 역사하는데, 그러기에 이 신구약 성경이 이 보증인 성령의 역사요 진리기 때문에 여게서 이 구원이 나옵니다.
이제, 이 구원을 내것 삼는 것은,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이 구원을 내가 간직하는 것은, 또 이 구원을 내가 써서 실제로 이 구원을 누리고 이 구원의 효력을 내가 누리는 것은 순전히 이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 믿음으로 되는 것인데 믿음은 세 가지라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이제 그 구원 중에 제일 겉에서부터 하나씩 우리가 생각해 깨달아 나간다고 하면은 이 구원의 제일 외부는 뭐이며 맨 마지막에 이루어진 구원은 무엇인가?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신 영생입니다. 이 영생은 하나님을 향한 생활인데 하나님의 향해서 진리대로 하는 그것이 영생이고 진리를 어기면 사망이 되고 맙니다. 또 성신의 감화 영감대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이 그것이 영생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진리대로 살라고 영감대로 살라고 한다고 해도 사람은 그 진리 생활 영감 생활이 완전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향한 진리 생활 영감 생활 하신 것 이거는 완전입니다.
털끝만치도 불안이 없고 불미스러움이 없고 부작용이 없고 완전한 진리 생활이요 완전한 영감 생활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해서 주셨습니다.
주셨으면 이 영감 진리의 완전 영생 생활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 우리가 지금 이 생활을 할라고 애를 쓰는데 할라고 애를 써도 완전함은 주님이 해 놨고 우리는 이 주님에게 대해서 우리가 이 구원을 받은 지금 이 구원을 간직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며 이 구원을 뺏기지 않는 생활하는 것이며 이 구원을 벗지 안하고 버리지 않는 그 생활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구원 얻은 우리가 사는 것은 이 생애가 누구와 관련이 있느냐 하면은 그리스도 예수님 내나 나를 대속하신 주님과 관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구원을 영생 구원을 설정을 하셨는데 예수님이 영생 구원을 설정해서 영생이 되는 것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을 향한 영감과 진리대로의 생애하는 이 생애는 누구와의 관련 있는 생애인가? 이 생애는 하나님의 공심판과 관련된 생애입니다. 이 생애는 하나님의 공심판이 간섭하고 하나님의 공심판이 이것을 심사합니다.
하나님의 지성 지공의 전지의 그 입법인 그 하나님의 공심판이 관련해서 심사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진리 생활 영감 생활 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공심판을 향한다 하면은 우리의 이 생활은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때묻은 옷과 같고 그것은 아주 불완전하고 더럽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생애가 하나님의 공심판을 상대하면 즉시 정죄받아 가지고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공심판은 내 대신 항상 영원히 예수님이 대신 지금 영감과 진리 생활하는 이 영생을 내 대신하셔 가지고 하나님의 공심판을 상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는 옳다 참되다 인정을 받고 우리는 다만 이렇게 당신이 우리를 대신해서 영생의 대속 생활을 해 주셨으니 나는 영생의 대속 생활을 믿음으로 내가 이 렇게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받고 있습니다, 또 이 믿음으로 이 대속한 이 구원을 뺏기지 안할라고 내가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이 구원을 내가 지키고 이 구원을 모시고 누리고 있습니다 하는, 우리의 생활은 대속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상대해 가지고 하는 생활입니다. 요것도 좀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은 냉정하고 공정한 공심판입니다. 냉정하고 공정한 공심판이요 하후하박이 없는 공정한 공심판이기 때문에 우리 생애가 하나님의 공심판에 가면 아무, 공정한 냉정한 지성 지공의 공심판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애는 전부 정죄받아 가지고 다 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게는 예수님이 대신해서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이 대신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가 상대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그저 우리의 연약한 걸 아시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이 우리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그것을 주님이 요구하시기 때문에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서 하는 어느 정도 네가 믿느냐,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 어느 정도 네가 이대로 사느냐? 살 때 내게 있는 것을 다 들여 살 때는 완전이라 이렇게 인정해 주시고, 내게 있는 걸 다 들여서 살아도 하나님의 공심판을 상대하면 전멸입니다.
거게는 닥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일생 동안 신앙 생애를 해 가지고 가서 심판 조사받는 검사받는 검사가 있습니다. 조사받는 조사가 있으니 그 조사 받는 그 조사, 우리를 검사해서 판단하는 그 판단, 그 판단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전부 그리스도 심판에는 안 갈 사람이 없고 전부 그리스도 심판은 다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심판에는 예수님이 대신해 가지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지 안하지 그것을 만일 우리가 거기 당하면은 우리는 전멸당합니다.
그러기에, 다만 그리스도의 심판이라는 것은 나에게 이 대속의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이 사랑의 주님이 이 구원을 큰 힘 들여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셨는데 이 구원을 참으로 어느 정도 네가 알고 있으며,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으며, 이 구원에 대해서 어느 정도 네가 힘들여 이 구원을 보존하고, 또 강직하고, 지키고, 다른 것에게 뺏기지 안하고, 네가 버리지 안하고, 어데까지 버리지 안하고, 어데까지 지키고, 어데까지 입고 있고, 어데까지 이 구원으로 네가 사느냐 하는, 그 산 정도의 양을 세밀히 해 가지고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하늘나라, 그리스도 나라 곧 하늘나라에서 영광과 존귀의 그 모든 지위로 등용하시고 갚아 주심을 받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에 심판받지 안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하나님의 자비의 심판이요 긍휼의 심판이요 우리를 위해서 생명 바치고 모든 것 다 바친 주님이 이 구원을 우리가 받아 누리도록, 이 공짜배기로 줘 놓은 구원을 이것을 우리로 하여금 받아 누리도록 하려는 이 심판이기 때문에, 이거는 공심판에는 상관이 없는 이 심판이기 때문에 긍휼의 심판이요, 자비의 심판이요, 사랑의 심판이요, 인간을 이해하는 심판입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심판이라고 해 가지고 성경에 말하기를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으니 이 대제사장은 우리를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체휼한다 말은 우리의 연약성, 인간성, 모두 다 제한성, 유한성 이거 모두 다 불완성이라 하는 것을 다 아시고 우리를 취급하시고 우리를 심판하시는 그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심판에서는 우리는 상관없이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러기에,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큰 힘 들여서 우리에게 이 구원을 베풀어 줬는데 이 구원을 베푸신 이 구원에 대한 이 설정하는 데에 얼마나 힘이 들었느냐 하는 것을 안다고 해도 우리가 뭐 만분지 일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는 대로, 아는 대로 그것을 하늘나라에서는 대우해 줍니다. 조금 아는 사람, 많이 아는 사람, 전연히 모르는 사람,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그 사람의 가치요, 그 사람이 받는 대우요, 또 그 구원을 자기가 뺏기지 안하고 지킨 그것이 그 나라에 가 가지고 의요, 그것이 정절이요, 또 그대로의 이 구원을 가지고 누린 행위, 이 구원을 지킨행위, 이 구원대로의 자기가 행동한 행위 그것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봉사한 생애요, 은혜를 베푼 생애요, 그들을 구원한 그 생애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영생을 대해서 믿는 것은, 하늘나라는 가면은 이 방해물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가면은 마귀도 없고, 죄도 없고, 사망도 없고, 모든 이 미혹 물건들과 시험 물건들이 없어. 시험하는 것들이 하늘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거게는 뭐 지장 주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거게서는 얼마든지 다 생활할 수 있겠지마는 이 세상에서 모든 장애가 많은 거 이런 모든 방해물들이 많은 이런 세상으로, 마귀를 지금 주님이 이겼기 때문에 마귀를 무저갱에 가둬버리면 마귀가 꼼짝 못 합니다. 이러나 이 마귀를 풀어놓고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이 구원을 우리 자신들이 세상에 있으면서 많이 가졌든지 적게 가졌든지 가진 것만치만 자기가 자기 것이 되지 가지지 못한 것은 자기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에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고 가진 줄로 알도록 마귀란 놈이 이 구원을 가지지 못하게 방해를 하다가 아무래도 방해해도 이 구원 가지는 것을 노력하는 일을 그만 두지 안하고 자꾸 이 구원을 받아 가질라고 애를 쓰는 자에게는 마귀란 놈이 둘째로 ‘너는 이 구원을 받아 가졌다’ 스스로 인정하도록 만듭니다.
처음에는 이 구원을 자기가 받아 가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다가 안 되는 자에게는 이 구원에 대한 오인을 하도록, 오인하고 오판, 그릇 판단하는 것. 오인하고 오판하도록 해서 ‘너는 구원을 가졌다. 너는 이만하면 구원을 가졌다.’ 이러니까 자기 생각에도 그렇고 마귀란 놈이 가졌다고 생각을 해 주니까 구원을 가진 줄 알았는데 나중에 하늘나라 가 보면은 통통 비었습니다. 쭉덩이입니다.
그것을 세상에서 구원을 정말로 가졌나 안 가졌나 하는 것을 시험해 가지고 가지지 못한 거짓부리를 가지고 구원을 가진 줄로 아는 그런 이 거짓된 믿음을 나타내 보기 위해서 여러가지 시험을, 여러가지 환난을 당합니다. 여러가지 그 환난의 시험의 종류를 당해 가지고 거기에서 자기는 믿음이 있는 줄 알고 구원을 받는 줄 알았는데 ‘헛일이구나.’ 과거 왜정 말년 때도 자기는 이 구원을 받은 줄 알았는데 신사참배의 어려운 일이 오니까 전부 구원 다 팽개쳐 버리고 하나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때 뭐 마귀들이 시키는 대로, 왜정 말년에 그 정권자는 마귀 정권인데 그 정권이 시키는 대로 다 순종했지 하나님이 시키는 거는 하나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인제 그게 믿는 게 아니고 이 구원을 다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말이오. 그 포기한 그것을 보고 비로소 ‘나는 믿는다는 게 다 허사로구나, 이 껍데기로구나.’ 이래서, 모든 시험하는 것은 자기 실력이 있고 없는 것을 그 시험으로 나타내서 자기는 실력이 없다는 것도 알고 또 있는 것도 알고 알아서 그 시험에 통과하면 한 층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 가지고 높은 시험을 받고 해서 우리 기독자들이 이 세상 생활이라 하는 것은 시험의 생활이요, 또 연단하는 생활이요, 연습하는 생활입니다.
자꾸 이 구원 받는 일을 연습해 보고, 연습해 보고 난 다음에 엔간히 연습했다 싶으면 연단이 옵니다. 마치 금을 연단하는 것 모양으로 연습이 됐다 하니까 자기 된 그것이 바로 됐으면 됐지만 잘못 됐으면 껍데기로 된 것이 나타나도록 어려움을 주니까 어려움 오니까 그만 뭐 이 구원을 받을라고 애쓰다가도 포기해 버리고 가졌다가도 포기해 버리고 등한히 해 버리고 이래 다 팽개치고 만다 그 말이오. 그것을 가리켜서 불로 연단하는 거와 같은 믿음의 연단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여러가지 시험을 받을 때에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그 시험으로 인해서 크게 기뻐하도다” 나중에 기뻐하도다 하는 것은 시험을 이긴 사람은 ‘내게 이만한 믿음이 들었구나, 이만한 구원이 내게 와 있구나, 죽음이 와도 이 구원을 내주지 안했으니까 내게는 이 구원이 좀 든든히 와 있구나, 이 구원을 알고 믿고 구원대로 사는 것이 이만침 강하구나.’ 하는 것을 알고 기뻐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바람에 날리는 겨와 마찬가지로 훅 날아갔으니까 ‘나는 이와같이 껍데기다, 내가 이 껍데기 된 것을 이렇게 알려 주셨으니 감사하다.’ 또 감사하고, 요새도 양산동에 가 가지고 어떤 아픈 사람들 몇 있는데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하루밤 새도록 기뻐 좋아서 웃고 춤추고 기뻐하고 했다고. 왜? 병든 게 기쁘다고. 그 병이 들지 안했으면 자기는 완전히 세상에 속한 것 돼 버리고 이제까지 믿는 거는 다 산 것이 헛일 살았는데 이제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나니까 자기에게 새사람이 나오고 참 새 인간 생애가 나오는 것을 보고서 기뻐한다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 생활은 믿음을 연습하는 생활이요 믿음을 연단 받는 생활이라. 연단 받는다 말은 믿음에 잡것이 있나 없나 하는 것을 그것을 시험해 가지고 잡것은 태우고 참믿음만 남궈 있는 그것을 가리켜 믿음의 연단이라 이랍니다.
믿음을 연단해 가지고 “이는 불로 금을 연단하는 것보다도 더 깨끗한 믿음을 가져 가지고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관씌우기 위해서 이렇게 하신다” 그렇게 베드로전서 1장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는 “너희들이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믿음을 연단하는 것이니 너희들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할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불이 와서 믿는 믿음을 흔들어도 상하지 안하고, 공산주의가 와서 흔들어도 상하지 안하고, 무슨 어떤 제국주의가 와서 흔들어도 상하지 안하고, 돈으로 가지고 흔들어도 상하지 안하고, 병을 가지고 흔들어도 상하지 안하고, 멸시와 천대와 압제와 온갖 가난과 온갖 고통을 줘도 이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이 믿음, 아무것에게도 흔들리지 안하고 온전한 계속을 이루는 믿음. 인내라 말은 계속이라 말입니다. 인내라 말은 참고 견뎌서 계속하라 말이오. 이렇게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네가 믿는 믿음 이 일곱 가지 대속의 믿음을 주님이 나에게 주셨으니 이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이니 이 믿음은 내것 됐다, 어떤 일이 와도 이 믿음은 내것이다 하는 것을 믿고, 그러니까 이 믿음은 어떤 것이 와도 내가 뺏기지 않겠다, 놓지 않겠다, 나는 이 믿음은 내것이니까 이제 이 구원을 얻은 이 구원 생활 하겠다 하는 이 일을 네가 어떤 그 환경 주위의 시험이 와도 낙제되지 안하고 계속 이 구원 생활을 하게 되면 너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이 영생을 주님이 이루어 주셨는데 이 영생을 자기가 놓지 안하고 가지고, 또 이 영생을 누리는 것은 어떤 것인가? 어떤 그 현실에서라도 진리 생활, 하나님을 향한다 말은 자존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말인데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위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 피조물에게는 부강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기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과 떨어지면 다 절단나요.
이래서, 그러면 하나님을 향한 진리 생활 영감 생활을 이걸 하다가 또 그만 실패했습니다. 실패했는데 또 시작합니다. 또 시작해 가지고 또 실패합니다.
실패해도 또 시작하고 실패해도 또 시작하고 하는 이것이 믿음 뭐입니까? 이것이 믿음 뭣하는 것입니까? 이게 믿음 뭣하는 것이지? 믿음 연습이지. 그렇지 안해, 믿음 연습. 믿음 연습을 합니다.
하다가 또 영감과 진리대로 살라고 기도하고 결심하고 했는데 그라다가 보니까 그만 아침에 새벽기도 때는 결심을 했는데 아침 먹고 동무 만나 가지고 얼렁덜렁하다 보니까 이 생활 다 던져 버렸습니다. 그라면, 그라고 난 다음에 또 새로 시작합니다. 그거 뭣하는 것이지요? 그거 뭣하는 것이야? 믿음 뭣하는 것이라? 따라해. 연습! 그게 연습하는 거라. 실패하면 또, 글씨를 보고 쓰다가 또 틀렸으니까 또 종이 갖다 쓰다가 또 내버리고 또 쓰고 또 쓰고 자꾸 연습하면 나중에 연습을 많이 하면 잘돼요 안돼요? 학생들, 잘돼 안돼? 잘되지. 연습하면 잘돼.
이것 모양으로 이제 영생 생활, 영감 생활 진리 생활을 자꾸 연습을 합니다.
연습을 하니까 잘되는데 어북 잘됩니다. 연습하니까 잘됐는데 나중에 뭣이 방해물이, 장해물이 와 가지고, 방해물을 하나님께서, ‘연습해서 이만하면 내가 됐다. 이제는 뭐 내가 진리대로 사는 생활 영감대로 사는 생활은 나는 이제 완전히 한다.’ 요렇게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거게서 방해물을 조막덩이만한 방해물을 하나 줬다 말이오.
방해물을 주니까 이게 없을 때는 잘했는데 그만 이게 오니까 이제 잘한 연습해서 잘된 생활이 다 그만 헛일입니다. 헛일이라. 고거는 뭣하는 것입니까? 믿음 뭐하는 것이요? 연단. 고거는 믿음 연단받는 거라. 믿음 연단.
불에다가 금을 구으니까 잡금이 다 타 버려. 나중에 보니까 금이 제딴에는 주먹덩이만하다고 생각해서 구웠는데 나중에 굽고 보니까 다 타 버리고 금은 똑 쌀내끼만한 거 있고 전부 그거는 은뭉텅이 또 구리쇠뭉텅이 쇠뭉텅이 뭐 흙뭉텅이 다 이런 거 잡철 이런 거는 다 타버리고 외나 순금은 쌀내끼만한 것만 남았다 말이오. 인제 이러니까 여러가지 방해물이 있으니까 이 순금과 같은 믿음은 남아 있고 이 모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잡된 믿음은 다 타 버립니다.
이 순금 같은 믿음은, 이 믿음은 어데 있는 믿음이라 했지요? 이 믿음은 어데 있는 믿음입니까? 대답을 해요. 그래야 내가 빨리 뭐 진행하지. 이 순금 같은 믿음은 어데 있는 믿음입니까? 이 믿음은 어데 있는 믿음입니까? 그리스도! 따라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이 믿음은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과 도성인신한 이 두 분이 만들었어요.
만드는 데 뭐 몇 해나 걸렸어요? 몇 해나 걸렸어요? 만 년 걸렸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영원한 세월이 걸렸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손을 들어. 백지 이래 들지 말고, 영원이라, 영원. 만날 가르쳐 봤자 다 잊어버리면 어짭니까, 뭐? 이래 놓으니까 마귀란 놈은 지금 자꾸 이걸 기억 못하도록 만들어.
이거 알면 세상을 점령해.
이거는 연단입니다. 연단인데 이제는 어떤 것이 와도 뭐 공산주의가 와도, 병이 들어도, 전쟁이 나도, 나라가 떠들어도, 온 뭐 세계가 억울한 소리를 해도, 애매한 소리를 해도, 매장을 시켜도, 욕을 해도, 거지가 돼도, 배가 고파도, 무인도에 가도, 이제 바다 가운데 빠져도 어데 가도 이것이 요동치 안하고 주님이 내게 주신 일곱 가지 이 사활로 주신 구원을 자기 것인 것을 믿고 이 구원을 자기 것으로 자기 것이 됐으니까 이 일곱 가지 구원이 제것 된 사람은 우주와 영계가 자기 것이라. 주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다 자기 것이 돼 버려요.
바다 가운데서 파선이 돼 가지고 바다 속에서 여러 날 있어도 그래도 요동치 않는 그 믿음이 됐으면 그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그 믿음을 무슨 믿음이라 합니까? 연습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연단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연성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손 들어. 연성 믿음이라. 손 들어요. 연성 믿음. 손 들어요, 손 들어. 연성 믿음. 그게 연성 믿음이야.
뭐 신사참배가 오니까 뚝 떨어져 버리고 변해져 버리고 또 6 5 오니까 변해져 버리고 인민군이 와 가지고 죽인다고 총 대니까 변해지고 하는 그런 믿음은 다 연성 믿음이 아니라. 연습 위에 연단, 연단 위에 연성, 연성은 완전히 이제 성숙해졌다 그 말이오.
이러기에, 우리가 이 영생을 얻는 거는 믿음인데 믿음은 알고 인정하고 행하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영감대로 행하고 진리대로 행하는, 주님이 나에게 이 영생 구원을 줬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은 영감대로 사는 것 진리대로 사는 것이 이것이 내 생애라. 주님이 이걸 줬거든.
주님의 대속 아니면 우리가 영감대로 살 수가, 진리대로 살 수가 있습니까? 마귀 그놈이 우리를 종으로 삼기 때문에, 죄 사망 마귀가 우리를 종으로 삼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대로 살 권리가 없습니다. 마귀가 ‘이놈의 새끼 내것이다’ 하고 잡아 홀치면 그만 가 버리지 마귀 그놈이 우리를 진리대로 살고 영감대로 살도록 냅두지를 않는다 그 말이오.
이런데, 이렇게 대속의 구원을 믿는 사람은 자기가 진리대로 살라 하면은 마귀란 놈이 이렇게 저렇게 시험을 하고 내놓도록 꾀우다가 달래다가 위협도 하고 협박도 하고 해도 나만 안 내 주면 그것은 내것이야. 안 내 주면 내가 죽어도 살아도 상관없어. 그것만 안 내 주면 영원히 영생은 내것이 된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러면, 이 생활을 우리가 세상에서 연습하다가 또 이 세상은 한 번 하고 실패하니까 또 시키고 또 하고 실패하니까 자꾸 거듭거듭 이래 하게 하는 것은 이게 연습하는 연습시키는 일이요, 연습을 해 가지고 엔간히 됐다 싶으면은 연단을 시켜 가지고 이제 잡탱이를 태울 수 있는 어려움을 줘 가지고 어려움 주면은 잡탱이는 다 깨져 버리고 진짜만 남고 이렇게 연습 연단해 가지고 마지막에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에는 그 믿음을 가리켜서 무슨 믿음이라 합니까? 불로 연단해도 없어지지 안할 연성 믿음, 그거 완전히 연성 믿음이라. 연성 믿음은 뭣 받는고?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으로 관씌움을 받는 이 믿음입니다.
이래서, 영생하는 이 구원을 내가 자꾸 이거 믿음으로 받는 것인데, 이 구원을 내가 인정하고 믿고 요 구원을 내가 누리고 사는 것인데 이것이 뭐이냐 하면은 내가 진리와 영감대로 이와같이 살면 이 구원은 얻어지는 것을 깨닫고 믿고 이 진리와 영감대로 사는 생활을 자꾸 하는 그것이 내 영생의 이 구원을 놓지 안하고 이 구원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 말이오.
내가 만일 어떤 환경에서 영감을 버려 버리면 영감 버리면 뭐 버렸습니까? 영감 버리면 뭐 버렸소? 영생 버렸고 진리 버리면 영생 버렸다 말이오. 버렸는데, 버렸으면 두 가지 있어요. 버렸는데 내가 주님이 주신 영생 생활을 주님이 나에게 줬으니까 영생 생활한 것을 버린 것도 있고 또 영생을 버린 것도 있고 이런데 영생 버린 사람도 있고 영생하는 그 생애를 버린 사람도 있고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생을 버린 사람은 어떤 사람이 영생을 버린 사람입니까? 영생을 버린 사람은 어떤 사람이 영생을 버린 사람이요? 영생을 버린 사람은 어떤 사람이 영생을 버린 사람이지요? 영생하는, 예수님이 해 주신 영생을 버린 사람이 있고 또 예수님이 주신 영생을 주셨으니까 영생이 살아야 될 터인데 영생이 살지 못하고 마귀 이놈이 와 가지고 그만 영감과 진리 생활 하지 못하도록 해서 악령의 감화대로 살아 버렸습니다.
살았는데 고게 대해서 ‘이제 나는 이렇게 영감과 진리대로 살지 못하고 악령의 감화대로 또 하나님의 진리에 위반되는 이 모든 불법대로 이렇게 살았다.
이러니까 내가 이 대속받은 자로서의 내 생애를 이놈에게 뺏겼다.’ 요렇게 깨닫는 사람있고, ‘나는 예수님이 나를 대신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두 가지 영생을 주신 이 영생을 내가 버렸다.’ 이렇게 깨닫는 사람 있고, 그 영생을 버렸다 깨닫는 사람 있고 영생은 내것인데 이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영생을 누리지 못하게 해서 영생을 누리지 못했다 요렇게 깨닫는 사람 있고 주신 영생을 내가 버렸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있고 그 믿음이 두 가지 종류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주님의 주신 이 영생을 자기 것인 것을 믿지 못하고 ‘이 영생은 내것인데 나는 뺏겼다, 나는 영생을 뺏겼다, 영생이 없다.’ 이렇게 믿는 사람 있고, ‘내가 아무리 죄를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 지었다 할지라도 영생은 내것이다. 영생은 내것인데 내가 원치 안하는 이것을 마귀 이놈이 와 가지고 자꾸 나를 괴롭혀 가지고 내 생활이 아니고 내 본의 아닌 이걸 이놈이 하게 했다.
이러니까 영생은 내것이요 내가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이놈에게 미혹받아서, 영생이 내 생활인데 내 생활 영생은 못하고 마귀 이놈이 시키는 엉뚱한 생활을 했다.’ 이러니까 그것을 회개하고 돌아서는 사람 있고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두 가지 종류가 있어.
여러분들은 어떤 거 할랍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거 할라요? 어떤 거 할랍니까? 그라면 우리가 영생 생활은 하나님을 향한 진리 생활 영감 생활이 영생 생활인데 이 생활 하지 못하고 진리를 어겨서 마귀 법대로 제 욕심대로 이 모든 더러운 생활해 버려서 고만 진리와 영감대로의 영생을 하지 못했습니다. 못 했으면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으로 여러분들이 인정을 할랍니까, 어떤 사람으로? 영생을 가진 사람입니까? 영생은 이제 다 던져버려 버렸고 영생은 다 버려서 뺏겨버리고 영생 없는 사람입니까, 영생을 여러분들은 가진 사람입니까?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인정합니까? 영생 가진 사람입니까 영생은 이제 뺏겨서 영생이 없는 사람입니까? 자, 영생은 인제 마귀에게 뺏기고 없어진 사람, ‘영생은 뺏겨서 나는 영생이 없다’ 없는 사람인 것으로 아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영생은 내것인데 영생 내 생활하지 못하고 원치 아니하는 이거 엉뚱한 놈의 딴놈의 생활 내가 했다’ 딴놈 생활을 했다고 믿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알기는 참 잘 압니다. 이게 아주 어려워요.
내가 한번 읽어 보지요. 로마인서 7장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로마인서 7장에 20절에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내가 원치 아니하는 일을 했다 말이오. 내가 원치 안하는 일인데 그 일을 하게 됐다 말이오.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악령, 죄, 악습 이놈이 들어서 나는 원치 안하는 것을 그놈이 들어가지고 나를 그 생활하도록 만들었다 그 말이오.
그러면, 우리가 원치 안하는 죄짓는 생활은 그것은 중생된 내 생활입니까 남의 생활입니까? 내 생활입니까 남의 생활입니까? 남의 생활이오. 이것을 우리가 원해서 했습니까 원치 아니하는데 죄, 악령, 악습. 못된 죄악의 습성 버르징이, 악령, 악성 요게 있어 가지고 안할라 하는데 그만 돼 버렸다 말이오. 안 할라 하는데 그만 그 죄를 지었다 말이오.
그래서,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내대로 원하는 대로 생활하지 못하게 하는 악 그놈이 옆에 있어 가지고 퍼뜩 달라들어 가지고 사람을 그만 시험에 딱 빠트려 가지고 그만 미혹해 가지고 범죄케 하더라 그 말이오.
그러니까, 그럴 때도 예수님의 대속을 놓지 안하고 의심치 안하고 예수님의 대속은 자기가 굳게 잡고 다만 그것은 내가 한 생활 내 생활이 아니고 남의 생활, 내 생활이 아니고 원수의 생활이기 때문에 그거는 그 범죄한 것이 내가 아니라.
그 범죄한 거는 내가 아니라 누가 범죄했습니까, 그라면? 누가 범죄했습니까? 누가 범죄했지요? 누가 범죄했어? 옛사람. 그거는 옛사람이라. 옛사람 그놈은 십자가 못박아 죽였는데 그놈이 지금 또 가끔 가다 푹 튀어 나와 가지고 그렇다 말이오. 이거는 자기가 행하는 게 아니라 옛사람 그놈이 행하는 거라.
그러기 때문에, 어짜든지 이것을 영생을 놓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영생은 주님이 해 주셨기 때문에 영생은 믿음으로 내것이라는 것을 믿으면 내것 됩니다. 믿고 내가 영생 생활을 해야 되는데 영생 생활 못 했으니까 아는 것 믿는 거는 내가 가지고 영생 생활 못 하고 그놈이 와 가지고 내가 원치 안하는 생활 했기 때문에 나는 얼른 영생 생활로 다시 일어서면 된다 말이오.
일어서는데 하루 몇 번이나 넘어졌다가 일어서면 됩니까? 몇 번 넘어졌다가 일어섭니까? 한 두 번쯤 됩니까? 두 번쯤 됩니까? 세 번쯤 됩니까? 몇 번쯤? 열 번 그라면 넘어지고 일어설 수 있습니까? 열 번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 칠칠은 사십구, 주님 말씀하시기를 하루 사백구십 번이라도 넘어졌다가 일어설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사백구십 번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어.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 있기를 이와같이 의로워 새로워지기를 당신이 원하셔서 이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요 믿음을 가지면, 믿음을 가지고 믿음을 잡으면 마귀란 놈이 죄란 놈이 해하지 못해요.
그때 요 믿음을 잊어버렸어. ‘주님이 나에게 이와같이 부활하셔 가지고 영생을 나에게 주셨다, 나는 영생을 가진 내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와같이 하나님이 영원히 피조물 되셔 가지고 나에게 영생 주시고 이 영생을 당신이 하셔 가지고 나에게 주셨는데 내가 이 영생을 가졌는데 이 영생을 가지고 뺏기지 안하고 내가 영생이 내것이니까 나는 영생을 이제 해야지.’ 하는 요것을 잊어버렸을 때에 마귀에게 넘어져 가지고 빠집니다.
요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 부활하심으로써의 대신 생애 해 주신 이 생애의 영생이 내것이라는 것을 자기가 새기고, ‘나는 영생을 가진 자다. 사망이 나는 해하지 못한다. 마귀가 해하지 못한다.’ 하는 요것을 자기가 믿음으로 가지고 있을 때에는 그놈이 해하지 못합니다. 요것을 생각하고 죄지은 자가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요걸 생각하고 죄지은 자 없습니다.
요것을 까마득히 잊어. 마귀란 놈이 옆에 와 가지고 자꾸 요 꼬우는 바람에 그만 꼬우는 바람에 돈 보니까 돈 보다가 그거 잊어버려 버렸고, 또 권세 보다가 잊어버려 버렸고, 뭐 테레비 보다가 잊어버려 버렸고, 미인 보다가 잊어버려 버리고, 미남 보다가 잊어버리고, 이제까지 버릇, 이제까지 버르징이, 이제까지 더러운 습성, 더러운 버릇 고게 들어 가지고 버릇이 들어와 가지고 우리에게 온갖 더러운 욕심을 충돌시켜 가지고 할 때 그때 그만 예수님의 이 대속을 깜빡 잊어버리고, 자기는, 예수님의 대속을 잊어버리면 자기는 누구 것이 돼요? 예수님의 대속을 잊어버리면 자기는 누구 것 돼요? 대속은 그거 다 잊어버렸으니까 주님의 것 돼 버렸고 자기는 자기 것 됐어. ‘내 몸뚱이 가지고, 내 지체 가지고, 내 입 가지고, 내 뭐 다리 가지고, 내 발 가지고 뭘 못 해?’ 제것인 줄 아는 고게서부터 마귀란 놈이 딱 거머쥐고 ‘요놈’ 하고서 잡을 때 범죄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믿음을 가지고 자기가 주의 것이 됐을 때는 마귀가 침노하지 못합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대속은 내것이다. 마귀와 죄와 사망이 어데 나를 해하느냐?’ 할 때에는 불도 해하지 못하고 사자도 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요것을 가지고 놓지 안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해하지 못합니다. 뭐 왜정 말년에 아무리 판사가 들고 아무리 부장이 뭐란다 해도 꼼짝도 안 합니다.
알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오. 믿음만 놓으면 그만이야.
믿음만 가지면 하나님이 와 가지고 우리를 붙들고 당신이 쓰니까 뭐 죄나 사망이나 마귀가 해하지 못하지마는 믿음 잊어버리면, 믿음 잊어버리면 예수님의 대속은 눈에 보이지도 안하요. 대속은 눈에 보이지 안하니까 대속은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깜빡 잊어버리고 또 자기는 뭣 됩니까? 자기는 자기 것 되고.
대속은 잊어버리고 자기는 자기 것 되고.
자기 것이 자기가 되고 난 다음에는 자기 것이 되면 누구의 것 됩니까? 예수님의 대속이 아니고 자기 것이 되면은 내나 옛날로 돌아가기 때문에 마귀의 것, 죄의 것, 사망의 것 이거 죄의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믿음을 잊어버렸어. 믿음을 자기가 ‘나는 주님의 대속을 받은 자인데, 나는 주님의 것이라. 이거 주님의 것인데 주님이 살아야 되지 내맘대로 살았구나. 주님의 대속은 내것 영생은 내것이다.’ 할 때에 그때에 아무리 결심해도 소용 없는 죄가 끊어져 물러갑니다.
자기가 죄를 회개해 보면 알아요. 요걸 생각할 때는 자기가 그 죄가 그렇게 그 죄를 범하지 안하면 죽을 지경이라도 요걸 생각하면 그 죄가 자기와 원수가 돼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던져 끊어 버리는데 요 대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가지지 못하고는 죄를 이긴 사람이 없습니다. 인간의 결심이나 뭐 이성 비판이나 가지고 이긴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믿음의 비밀, 믿음의 신비성, 믿음의 이 지극히 큰 능력성 이것은 아무도 믿어본 사람이라야 알지 믿어보지 안한 사람이면 모른다 그거요.
이런데, 이제 시간 다 됐는데 그와 같이 예를 들면 그 안에 세 가지 구원은 죄에 해방, 또 마귀에게서 해방, 사망에게 해방인데 그거 자유하는 것이라 그 말이오.
자유하는 이것을 자기가 예수님이 대속해 줬기 때문에 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의 이 세 가지 해방과 자유는 자기 것인 것을 확실히 믿고, 그 다음 할 게 뭐입니까? 할 게 뭐이요? 그 다음에 할 거 뭐입니까? 실행하는 것은 자유 생활하는 것이라 그 말이요, 자유 생활 하는 거.
나는 이렇기 때문에 나는, 죄에 대해서 자유 생활이라 말은 죄란 놈이 어떻게 와도 나는 죄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나는 죄에 자유한다. 죄에 자유한다 말은 죄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내나 나를 대속하신 그분에게 속하여서, 그분이 내 안에 사는 것이 내 생활이요 죄에 피동되는 거는 내 생활이 아니라, 주님에게 피동되는 것이 내 생활이요 죄에게 피동되는 것은 내 생활이 아니라 이것을 깨닫고 자기가 죄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주님에게 피동된 생활을 하는 것이 제 생활이라. 이것도 또 자꾸 모르니까이거 사람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라. 알겠어? 자, 주님이 내 대신 사활의 대속을 했으니까 나는 이거 누구 것 됐어요? 주님의 것 됐지 안했어요? 이러니까 주님의 것 됐으니까 내가 지금 이목구비 수족으로 사는 것은 주님의 소원대로 이목구비 수족을 놀려야 돼요 내가 놀려야 돼요? 내가 놀리지 못해. 주님이 소원하시는 대로 놀려야 돼.
요 사실을 믿고 나는 주님이 소원대로 하시지 이 이목구비 수족은 이제 내맘대로 하지 못한다는 요것을 자기가 믿고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는 나는 복종할 것이 아니라, 그에게 피동될 것이 아니라 이제 주님에게 피동 생활하는 것이 내 생활이라 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믿고 있을 때는 그런 것들이 해하지 못합니다. 잊어버릴 때 탈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요 대속을 잊어버릴 때에는 파괴가 돼 버리고 이 믿을 때에 이 지극히 큰 능력이 나에게 옵니다. ‘그거 뭐 믿는다고 오고 안 믿는다고 도망쳐 버리는가?’ 믿으면 오고 안 믿으면 도망칩니다. 도망치요.
만일 비유컨대는 다니엘이 사자구덩이에서 이제까지 믿었는데 이제 다리오 왕이 ‘네가 살았느냐? 이 다니엘을 달아 올리라.’ 달아 올리라 할 때 달아 올릴 때에 밑에 사자들이 우글우글하니까 올라오다가 말이요. 올라오다가 ‘아이쿠 이제 사자 이놈한테 안 먹히고 살아 올라온다’ 안 먹히고 올라온다 해서 그만 그 사자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이 대속의 구원을 잊어버렸으면 올라오다가 사자가 훅 뛰어 올라서 다리를 하나 꽉 물어서 끊어서 먹어버릴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게 믿음의 비밀이오.
베드로가 물 위에 떠뻑떠뻑 이와같이 걸어가다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이 대속을 생각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하니까 바닷물이 세멘트 바닥이 돼 가지고 떨벅떨벅떨벅 걸어가다가, 걸어갔는데 금방 바람과 풍랑 보고서 ‘아이쿠 저 바람과 풍랑이 오면 내가 어찌 되노?’ 그만 주님만 바라보고 믿는 믿음 버렸으니까 푹 빠져 들어갔다 말이오.
그랬는데, 우리 사람 보기에는 ‘야 네가 헤엄을 잘 치고 발을 자주 떼 놔서 그랬는데 어째 그만 잘 걸어오더니마는 물 속에, 언제는 걸어오더니만 빠져 버리노?’ 이래 말하지만 고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고 믿다가 믿음이 끊어지니까, 믿음이 동가리가 나니까 그만 물 위에 걸어오던 게 푹 빠졌다 그 말이오. 이런 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와같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 다 그래요. 죄에 자유도 그러하고, 하나님의 심판도 하나님의 심판에 나는 통과된 하나님이 인정하는 공심판에 인정받은 내가 된 것을 믿고, 이제 내 생활은 하나님의 공심판에 완전타 인정받은 내가 된 것을 믿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심판에 의롭다 인정받은 그자가 내니까 그자 생활하는 것이 내 생활이라. 그자 생활하는 것이 내 생활이라. 알겠어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이제 의를 믿고 의의 생활을 자기가 하는 것이 자기 생활인 줄 알고 의의 생활을 해. 의의 생활하는 것이 자기 생활입니까 주님 생활입니까? 의의 생활하는 게 자기 생활이요 주님 생활이요? 이제 하나님의 지성 지공의 심판을 통과한 의의 생활 하는 것은 자기 생활입니까 주님 생활입니까? 자기 생활인데 그것이 주님 생활이라. 알겠소? 주님이 자기에게 주셨기 때문에 자기가 사는 생활이지마는, 자기가 사는 생활인데 그것은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와같이 하나님의 법을 다 통과하는 생활하는 것은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누가 살아요, 우리 ○○○집사님? 누가 생활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의로 생활하는 그 생활은 구속받은 자기 생활인데 그 생활은 누가 하고 있는 생활이지? 대답 한번 해 봐요. 누가 하는 생활이지? 공연히 좋은 목도리 하고 딱 요래 가지고 앉았으니까 자꾸 잠만 솔솔 와서 꼬박꼬박 졸면서. 안 돼. ‘이 목도리 이거 이것들이 자꾸 해 줘 쌓아 가지고 이렇구나’ 해서 ‘목도리 이놈을 확 벗어 불에 태워버린다, 내가 예배 볼 때 이게 자꾸 졸게 하는 이 목도리 내가 불에 태워버린다.’ 이렇게 해져야 그거 그놈이 도망쳐요.
그 생활은 내 생활인데 누구 생활이라요? 누가 그렇게 생활해요? 하나님의 심판을 다 통과하는 죄 없는 생활을 누가 해요, 그거? 그래, 제 속에 주님이 한대요. 그거 참 이상한 말이지. 제 속에 주님이 하셔.
이거 믿음으로 돼. 믿음으로 돼, 믿음으로. 딴걸로 안 돼요. 내 속에 주님이 와 가지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니라” 하는 것을 믿을 때에 그분이 와 가지고 산다 말이오. 이게 믿음으로만 돼. 딴걸로는 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은 그 요소가 없기 때문에 그저 당신이 하신 것을 믿는 그거 외에는 당신에게 연결이 될 수가 없어.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제 이것도 또 시비부지 끄트머리 하다 보니까 다 갔는데 뭐 인제 요걸 잊어버리지만 말면 그 다음에 동가리만 이으면 되는데 다 잊어버려 놓으니까 또 처음에서부터 또 시작해야 되고 시작해야 되지 장 이라니까 이거 참 진도가 도무지 없어.
가만히 생각해서 요 시간에 몇 가지를 간추려, 다 가질라고 말고 자기로서는 한 가지나 혹 두 가지를 가져 가지고 ‘내가 요것은 놓지 않겠다’ 해 가지고 하면은 차차 자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