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길은 회개뿐


선지자선교회 1982년 10월 16일 토새

 

본문 : 계13:1-18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사람이 성신의 감화가 아니고는 우리에게 옳은 마음이나 행동이 없는 것입니다.

전적 죽은 것들입니다. 성신의 감화가 오므로 비로소 산 영의 생기가 마음을  사로잡아서 감동이 될 때에 마음도 옳아지고 행동도 옳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방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그 방편을 깨닫고 쓰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오늘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온전해 지려고 하는 그것도  좋은 것이지마는 그것만으로는 생명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하기를 원하는  데까지 가야 그 생각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또 일시 임시 현재의 것만 생각하고, 미래는 현재의 결과인데 미래에 대한  영감이 없어도 다 외식입니다. 지나간 성경 역사도 그러하고 교회 역사들도 다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미래를 두고는 다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미래가 현재로  지나간 후에는 다 참되고 크고 권능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밀히 일하신다 그렇게 말합니다. 시대마다 그 때에  유명하기를 원하고 그것만 노려서 수단과 방편과 지능을 기울이는 그런  외식자들은 저만 죽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다 죽여 하나님의 큰 원수의  역사를 이루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미래의 영감을 받아서 현재에서 미래를 생각하면서 미래의 것을 현재에  끌어다가 에누리 없이 정확한 비판과 평가를 가진 사람들이 현재를 미래를  위해서 노력하니까 그 하는 일이 허무한 것도 같고 또 필요 없는 무지한 자의  하는 일 같았지마는 그 사람들이 다 승리를 했습니다.

 아무리 가지가 무성해도 둥치가 병들면 시간 문제이지 그 가지는 같이 병들어  죽고 맙니다. 둥치가 강건해야 가지도 잎도 강건한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거룩케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양떼들이 따르는 교파의 책임자라 할지라도 책임자가 병들면 그  교파는 병들고 책임자가 패전하면 그 교파는 패전됩니다. 예수님 당시도  바리새교도 사두개교도 다 병들었지마는 그 중에 몇 몇 사람들만 병든 그 현재의  교파를 외부적으로는 벗어나지 않았지마는 그들을 따르지 아니하고 주님과 직접  연결을 가진 그 사람들만 메시야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꼭 같습니다. 외모에 나타나기를 원하는 자는 그리만  주력하기 때문에 그 내부가 필연적으로 허약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 계시록 13장에 있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밑에도 쭉 계속해서 보면 참 오늘  교회를 환하게 볼 수 있고, 자신도 환하게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도 자기 같이는  보지 못하지마는 대개 십분의 칠 팔은 정확하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서를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그 때에 그 실상의 형 편과 환경을  아는 대로는 정확히 평가하여야 할 겁니다. 입술로만 귀로만 말하고 증거해도  그때 형편과 환경이 어떨 것이라는 것을 느껴 보지도 않고 큰 소리만 치고  돌아다니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사람들을 미혹 줍니다.

 떠드니까 그 사람이 무슨 실력 있고 그 사람이 진실된 줄 알기 때문에 소리  보고 소리 크면 권위 있고 힘 있고, 소리 작으면 보잘 것 없고, 또 그 배경이  세상 배경이 커서 운동을 몇억을 들여서 운동을 했으면, 숫자가 많이 움직이면,  사회나 정치나 그 사용하는 배경이 강하고 크면 거기에 쏠려 가는 그것은 벌써  닥치기도 전에 실은 죽은 것들입니다. 산 것들이 아닙니다.

 이렇게 현재도 보면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예언서를 가지고 미래의 그  환경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표범, 곰, 사자 같다고  표현할 때에 세상이 그렇게 보기에 위험스럽고 무섭고 맹수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공산주의 자들에게 박해 받은 사람들의 소문을 들으면 그들이 이렇게 맹수 같이  날뛸 때에 거기에 기압되지 아니한 자들이 별로이 없었고, 왜정 말년에도 그랬고,  또 지금도 남한에 교회가 뭐 전성이니 뭐이니 떠들지마는 민주주의 정치에서라도  정권이 어떻게 탄압한다 하면 그 밑에 아부하고 들어붙지 거기에 거슬리는  진리가 있을 때에 진리와 함께 거슬림을 당하는 자기 신앙 위치를 지킬 자가  별로 없습니다. 교파적으로는 별로 안 보입니다.

 '내가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말씀하신 대로 이래 오늘에 운동해 나가는  것이 그 면을 보면 그렇게 경거망동은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세상이 맹수와 같은 위험과 위협과 압력을 가지고 무력을 가지고  탄압을 하고 억압하고 정복하므로-생명 책에 녹명되지 아니한 사람이라는 것은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을 말하는데 물론 택함 받지 않았지마는 택함 받아도 중생  안 된 자는 아직까지 택함 안 받은 자와 같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중생되지  아니한 자로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세력 앞에 다 굴복했다 했습니다.

 이것도 좀 생각해서 그렇게 굴복을 하고 굴복시킨 그 세력이 하나님을 훼방,  '하나님이 어데 있노' 독일에서도 히틀러가, '하나님 하나님' 하니까 혁명을 하려고  대포를 쏘아서 '하나님은 대포에 맞아 죽었다' 하고 파쇼 혁명을 일으킬 때에  그때에 그 파쇼주의에 굴복 하지 아니한 신자가 많지를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죽은 시체도 찾지 못하게 주님이 복수를 했고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이렇게 시대마다 이런 일이 많이 지나갔으니 이 맹수적인 위험과 압력과 협박과  거기에 굴한 천하 사람들이 다 옳다고 인정해서 막 따라가는데 여기에 보니까  거기에 따라가지 아니할려는 사람,  여기에 경배라는 것은 종교성 숭배성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동과 마음 지식 뜻까지 다 짐승 그것을 다 바라보고 의지하고 따르는 사람들로  변화된 것을 말해서 경배라 말합니다. 머리만 끄덕 숙이는 것이 아니고 진정코  숭배하는 종교성을 두고 말을 하는 것인데, 이렇게 권력들이 하지, 모든 사람은  다 기울여져 있지,  하나님은, 하도 오늘에는 이십세기의 모든 과학 별별 과학을 가지고, 진화론을  주장할 때에는 지질학 그거 하나 가지고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다 따랐는데  이 과학 저 과학 하나님 없다는 증거를 천하 지식이 다 공통되어 증거를 하고  하늘에 있는 모든 조직이나 소망인 천국이나 성도들이나 천사의 활동이나 이런  것을 전적 부인 하도록 만듭니다.

 이북에서는 무신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첫째로 그것을 하기 전에는 인간을  그렇게 끌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없다고-기독교만 아니고 무신론주의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종교라 하는 것은 나타나게는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을 훼방하는 건데 이렇게 되니까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다 맡기지  못하고 제 욕심, 제 힘, 제 주장, 욕심도 제 욕심 하나라도 있으면 헛일이고 또  지능도 제 지능 의지하면 다 헛일이라. 왜? 마귀는 제 지능으로 요거는 요  지능으로 안 된다 안 된다 하기 때문에 전부를 전지 전능의 사랑의 주님에게  맡기지 못하고 그분의 사랑을 인정치 않는 자는 다 삼키워집니다.

 요 말씀으로 결론을 지워 놓았으니 내가 앞으로 찾아가고 있는 그 모든 세상은  이렇게 맹수성의 역사를 가지고 전 인류는 다 기울어지고 무식한 자가  기울어지는 것보다도 유식한 자들이 기울어지는 미혹이 큽니다. 또 평신도가 그를  옳다고 긍정하는 것보다 권위있게 날뛰는 자들이 기울어지는 미혹이 더 큽니다.

 마귀의 일꾼이 돼 가지고 심지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기까지 큰 기적과  기사를 일으킨다고 했는데 이렇게 될 때에 참 주를 전적 바라보고 의지하여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긴 자만이 세상을 향하여 담대함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이 계시는,  그분에 대해서 의심이 없는 자만이 세상 이 마귀의, 배암의, 용의 미혹을 벗어날  수가 있지 그렇지 않은 자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기록했으니 네 자신과 그 때와 비교해 보지 못하고 교역자 된 자는 우선  설교에서 교인들이나 그날 그날 꼬와서 끌도록 하고 교인들이 인정하는 그거나  받고, 그것도 큽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도 그게 돼야 되지 그게 안 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 저기에는 관심도 없고 그시 그시  그것만 매꾸어 나갈려고 하는 그런 외식한 자가 이 참에 도달하는 것은 천리 만  리 거리가 멉니다.

 이 길을 갈려고 하면 자기 속에 원수가 수없이 있지마는 원수 그 놈을 원수로  알고 대적해도 안 될 건데 원수 그놈을 저인 줄 알고 또 가장 자기의 신앙의  돕는 지도자로 알고 있으니 그 자를 따라 움직이니까 사망뿐이지.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주의 일을 하니까, 야바우 놀음하는 자들이  주의 일을 하니까 저리 따르자 해 가지고 따라가 보면 죽습니다. 야바우.

 아래 어떤 물건을 보러 간다고 시장에 가니까 그것도 야바우 놀음이 있고  연극이 있습디다. 하나가 오더니마는, 오니까 반가워하면서 이러니까 뭐 그분의  어떻고 어떻고 소개해서 허무한 썩은 짐승 뼉따귀 갖다 놓고 사람들을 꼬와서  수십 명을 모아 놓고 약장사를 약 팔게 시킵니다. 그것입니다. 약장사들 약을  파니까 옆에 저거끼리 햐, 여기에 왔느냐고 이걸 내가 만날려고 내가 애를  썼더니마는 언제 안 보이더니만 왔느냐고 제가 효험을 본 듯이 말하니 옆에  사람이 '아 저 사람이 저렇게 효험 봤다고 하니까 효력이 있는가 보다' 그 사람  이 돈을 주고 비싸게 주고 사 가지고 갑디다.

 그래 가지고 따라서, 사람들은 옆에 사람들의 증거를 그렇게 잘 받는 것이  인간들인데 천하 인간이 다 이렇게 쏠려갈 때 그 증거를 받지 아니할 만한 자기  속에 하나님과 진리를 신망하는 것이 있는지? 정말로 환경을 양이 이리 가운데  있는 것처럼 어느 틈에 대적이 있는지 몰라 모든 것을 화평을 가지기 전에 먼저  적대시 하고 하나 하나를 정평해 정가해 나갈려고 하는 그 신앙 요소가 자기에게  있는지.

 오늘에 하나도 보지를 못해 그저 제 좋으면 되고, '너는 나 좋게 하고 나는 너  좋게 하고 서로 우리끼리 좋게 하자.' 저거끼리 좋게 하면 되는 그것이지 이렇게  암만 성경이 말해도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를 않습니다. 생각하는 시간이  없어. 설교할 때는 임시 그렇게 생각해 가지고 '이렇게 말해야 되겠다' 해서  말하면 그것으로 끝나 버리고 이 생각에 제 마음이 잠기지 아니하고, 이 생각에  물들지 아니하고, 이 생각에 눌리지 아니하고 하는 그자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비밀을 말했는데 그 교회 교역자 죽으면 다 죽습니다. 혹  사는 것이 남아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그저 여러가지로 기억하지 않아도 서너가지만 맞출려고 하면 여러분들이 무거운  짐진 것 같이 눌리는 것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 따라서 모든 언행심사의 오늘의  행동이 달라질 것인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 탄식입니다.

 그까짓 것 몇십 명 몇천 명 몇만 명의 제자를 내 놓았다 해도 마귀새끼 패전자  그것뿐이라면 하나님 앞에 가서 책망 받고 벌 받을 것뿐이지 무슨 기쁜 일이며  칭찬이 되겠습니까? 세상이 전 인류를 정복할 수 있는 맹수성으로 날뛸 때에  나는 어떠한 사랑으로 거기에 나타날 것인가? 천하 인간이 다 정복과 설복을  바라서 진정코 그를 다 옳다, 참되다...

 오늘 믿는 사람들도 과학을 성경보다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거는 인간이 보고  들리고 손으로 만지는 것이지마는 하나님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아니하니까 내나 그게 금송아지 만드는 것이오. 애굽에서 나와 가지고 금송아지  만들다가 멸망받는 그게 내나 금송아지요.

 천하가 이렇게 될 때에 나는 지기서 반대될 수 있을까?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얻을 그 영광은 비교 못 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한 편되어 세상과 대립됐으면  하나님과 한 편이오. 사망과 대립이니까 생명과 하나입니다. 생명과 하나이기  때문에 세상에 마찰 없는 것보다 마찰 있는 것이 낫지. 마찰이 많을수록 세상과  일치되는 것이 없다는 말이지. 전적 마찰되되 주님과는 아무 인색된 것이 하나도  없지.

 천하가 이렇게 될 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될런지? 내가 이면을 보고 죽자껏  노력을 해도 그 때를 당하면 패할 터인데 내게 부절히 이런 암투가 있는지? 숨은  전쟁이 있는지? 없어 그저 뛰고 굴리고 좋고 저거 취미로 심지어 양성원에서도  저거 취미 저거 오락이지 무슨 앞으로 큰 일을 맞는 근심하는 자는 없어. 마음이  눌리는 자는 보이지 않아. 뭐 방편 다를 것 없이 저거 재미 저거 취미에서 살아.

그러니까 다 좋지. 찌르는 가시 같은 말 하니까 다 싫지.

 왜 가시같은 말이 될까? 그 길을 걸어갈려고 하면 돕는 말이 되지마는 아예  저는 걸어가지 않고 대립적인 입장이 있기 때문에 가시 같아지지. 그런 것도  봅니다. 그 뭐 있어 봤자 숫자뿐이지 가치 없어. 정신차려야 합니다.

 천하가 다 그리 되니 그 힘이 큽니다. 옆에 사람 보면 그대로 따라서 움직여지고  내가 평소에 세상과 나와의 모든 생각하는 그것이 지금은 모르지마는 좀  지나가면 과거가 돼 버리면 알 수가 있는데, 이렇게 '행동록에 기록되지 아니한  사람들은 다 경배하더라' 했으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자기와 마찰과 대립이  될 이것이 승리의 길이니 자기가 그런 사람 돼 가지고 있어야 돼.

 얼마나 사람들에게 들어붙기를 잘하고 아주 참 불이 휘발유 따라 가듯이 이렇게  쩍쩍 붙어서 말 한 마디 들어도 다 변화되고 감염되고 하는 그것이 천하 인간이  다 갔는데 안 가고 거기에서 거슬리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걸 생각해  봤습니까? 어리석소. 때는 가까웠습니다.

 나중에 떠드는 교파, 떠드는 인물들, 유명한 인물들 다 발에 밟혀서 꺼꾸러지고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는 그런 보잘 것 없는 목회자들 평신도들 그들 속에 살아  있는 자가 남아 있을런지 모릅니다.

 이 둘을 생각하고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저도 칼에  죽으리라' 이 세 가지만 생각하면서 이 세 가지를 상대하는 내가 어떤 자가  되어야 될 것인가? 내가 여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내가 현재 생활에서 과연, 그들과 이기고 지는 것은 다 냅두고 대립이 돼도  마찰이라도, 이색이라도-다른 색깔이라, 이색. 그것들과 동색이  아니고-이색이라도 되어 있는 것이 있는가? 이색되어 있는 요소도 적으니 이색  그것이 언제 싸워 이겨 가지고 승리를 하겠소? 자기를 붙들고 탄식할 줄 알아야  됩니다.

 참 눈 앞에 이북이 있지마는 이북에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하나도 없고, 아주  공중에 나는 새와 같이 기회주의로 어떻게 민첩한지, 자기 인정 받고, 자기 인심  얻고, 자기 사람 얻기 위한 그 수단 방법이 날래기가 새 이상이오, 어떻게  민첩한지. 처세술은 민첩합니다. 사회술은 민첩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칼들이오.

세상 전법이지, 처세 법이고 세상을 이기고 얻는 법이지 하나님의 전법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나오는 짐승은 둘째 짐승인데 첫째 짐승보다 단수가 높습니다. 이거는  막바로 타락한 교회를 말합니다. 거짓 교회 거짓 기독교를 말합니다. 땅에서  나왔다 이것도 말로 하니까 시원하지 말은 백 번 들어도 땅에 나왔다는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못합니다.

 요것도 그 교훈이, 그 교파가 그것이 무엇을 위주로 하고 있느냐? 어데서  나왔느냐? 인인 관계를 가리켜서 도덕이라 말합니다. 인인 관계에 사람들이 좋다  아름답다 좋아하고 귀중히 여기는 것을 가리켜서 도덕이라 말하고,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믿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믿음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 도덕을 토대로 한 이것 하나만 가지고  판단해도 눈이 있으면 볼 수 있을 것인데 그저 뜻없이 귀로만 듣고 귀로도 듣기  싫어 녹음기 놓고 틀어 가지고 그대로만 졸졸 외워서 이거 사람 속이는 일이  될런지 모릅니다.

 그것이 살펴보니까 '땅에서 올라왔고 용처럼 말하더라' 용처럼 말하더라' 용이 한  말이 어떤 말이 용이 한 말입니까? 용의 말이 어데 있소? OOO 목사 용의 말이  어데 있소? 용의 말은 신구약 영감 계시 말씀 외에는 전부 용의 말입니다. 전부  용의 말이오.

 '참람된 말이라' 그러면 참람된 말, 그 말이야 예수 믿는다 하는 자들이 누가 그  말을 듣고 따라가겠소? 용처럼 말한다 말은 그 지식과 사상이 세상 지식과 합해  가지고 세상 지식이 왕이고 주고 하나님 영감 계시가 왕이 아니라 그 말이오.

 '용처럼 말한다' 지식의 주격이 세상 지식이지 하나님의 계시 지식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하지마는 여러분들이 잠깐 가서 무엇을 들어  봐도 알 것이오. 책이 거의 다 그렇습니다. '용처럼 말하더라'  또 권세는 '그 전 짐승 권세 쓰더라' 그 전 짐승이 내나 세상 아니오? 세상  권세를 안 쓸려고 애써도 나중에 가면 부득이 해서 그 권세에게 사로잡히는데  오늘 세상 권세를 하나님의 능력이나 권능보다도 더 필요하게 여겨서 어떻게  보배로 여기고 제가 쓸 수 있는 세상 권능이라면 뽀스레기 하나라도 떨구려 하지  않고 그걸 다 쓰려하는 그 사상의 신앙이 앞으로 어찌 될 것인가?  '전 짐승의 권세를 쓰더라' 또 그것이 '짐승을 위해서 우상을 만들었는데 우상이  말을 하더라' 기독교가 세상위주로, '전도는 사회를 개량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산업 전도니 또 모든 이 사회 제도를 바꾸어야 된다.' 이래 가지고 하는  것이 꼭 그럴 듯 하지마는 그게 그거 되지 그것을 이겨나는 것 없습니다.

 그저 미련한 것 같지마는 하나님 말씀과 영감, 양심 속에서 나오는 영감대로  하는 그 외에는 길이 없는데 마지막에 우상이 말하는 우상은 뚜렷이 새끼양이,  새끼양 운동이 이제는 인물이 확립돼서 드러납니다.

 그 인물이 주장합니다. 마치 지금 천주교에서 교황을 세우는 것처럼 이렇게  인물들이 확립이 될 때에 거기에 경배하지 아니하면 몇이든지 죽여. 경배하지  아니하면. 그 사상을 이마에나 행동에, 사상이나 행동에 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몇이든지 죽이게 하는 그 형편을 만날 걸 생각해 봤는지? 그 형편 그 실상  그 현실 그 광경을 만날 때에 나는 어떤 사람이 될 건가?  나는 느즈막이 일생동안 해 놓은 것 헛일입니다. 자기 교회 다 죽소. 헛일이오.

여러분들은 경험이 그런 경험은 믿은 지가 얼마 안 되니까 알 수 없지마는 뭐  과거 왜정 말년이나 6 . 25 때에 마구 쓰러져 넘어 갈 때에 신앙을 찾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 살아 있으면 많은 것이 따라서 살기는 쉽지마는 그거 없으면  따라 움직이던 것은 다 넘어가 버리고 말아.

 '매매들을 못 하게 한다' 모든 물물상통을 못 하게 한다 그 말은 생활을 못 하게  한다 그 말입니다. 이북에서도 지금은 안 그렇지마는 처음에는 저 벽지로 보내고,  수화 상통을 하지 못하게 하고, 딱 그러니까 감옥은 아니지마는 감옥보다  더합니다. 감옥과 똑 같아. 그것이 초기에는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래 숙청을 다  당해 버리고 할래야 남은 것이 없고 지키는 것이 없어.

 이러니 이렇게 될 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으로 그때에 나타날 건가? 그 하나  하나를 상대할 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으로 그때 상대할까? 내가 어데까지 갈까?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영감을 받은 자입니다. 그 때에 자기를 정확히 아는 그것이  영감입니다.

 그 때에 떨림을 지금 꼭 같은 떨림을, 그 때 눌림을 꼭 같은 눌림을, 그 때에 그  모든 것과 대립된 대립의 꼭 같은 고독을 오늘에 가진 자에게 무엇이 있지 그것  없이 지금도 무슨 꺼부지기를 꺼머다가도 죄를 뚱뚱하게 만들고 크게 만들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아니해 가지고 사람에게 사람 좋다 환영받고 인정 바라는 이  인본주의 그것만 가지고 있는데 무슨 좋은 날이 있겠소?  먼저 세상과 백분지 일이 화합되고 백분지 구십구는 세상과 대립되면 백분지  일은 주님과 대립입니다. 세상과 일치됨이 있으면 주님과 대립됨이 없고, 주님과  대립됨이 없고 일치되면 세상과는 대립되는 것이오. 세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했는데  과연 나는 세상이 이리라는 것이 느껴지고 이리처럼 내게 상대가 되어 있는지?  내게 대해서 세상은 비단 요 이불 같이 폭신 폭신 포근하게 되어 있는지? 그저  깨달을 자는 이래도 깨달을 수가 있고 저래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어떻게 하실런지? 제가 이렇게 자꾸 다니기는 다니지마는 떨려서  암만 손을 안 떨려 해도 손을 집으면 안 떨리고는 못 견딥니다. 이제 힘이 다  됐는지는 모르기는 모르겠는데 하나님 불러 간다면 그것은 문제가 없는데 남아  있는 여러분들이 문제입니다.

 전부 외식자들 뿐이고 껍떼기로 맞춰 가지고 그날 그날 이 세상으로 족하고  세상 잊어버릴까 싶어서 야단이지 세상을 두고 주님과 하늘나라를 살려고 하는  그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으니 그게 탄식입니다. 우리는 이걸 만날 사람들이요 다  이 마지막 결성을 통과하든지 안 하든지 이 결승은 다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요.

 이 결승에 도달하지 않으니까 저는 패전 안 한 자 같으나 주님 앞에는 다 되어  가지고 있어 닥쳤든지 안 닥쳤든지 이 신앙이라야 세상에 속하지 않고 주님에게  속한 것이지.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재물이라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물질이오  물질. 돈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육신 그것 다 물질입니다. 마음도 물질이요  고기덩어리도 물질이오. 모든 물질 물질이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냐 요  둘 중에 하나라 그 말이오. 이걸 귀넘어 들으면 안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 하시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 권찰회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봉사를 하십시오. 안 해도  집은 되지마는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기회에 하지 못 한 그게 후회될 것이오. 안  해도 집은 됩니다.

 이렇게 하는 그것 여러분들이 신앙 운동이오. 양심을 살리고 다음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하려는 그것입니다. 집이야 봉사 안 해도 또 연보 하면 안 내는  사람은 안 내지마는 내는 사람 또 내고 내고 내 가지고 집이야 될 것 아니겠소?  이러나 기회를 놓지 마라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니라' 하나님  중심인 그것을 제가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안 행하면 그것이  막 바로 그 다음은 범죄입니다.

 문 앞에 엎드렸다 하는 그것은 하나의 비유요.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문을  통과해야 나올 것 아니겠소? 제 마음의 움직임도 제 몸뚱이 움직임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면 움직이는 것은 다 죄의 종이 된다 그  말이오. 그래서 그 간격이 먼 것이 아닙니다. 내나 그것이오. 내나 그게 그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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